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는 예수의 가르침과 고대 법

1. 고대 법의 대표적 사례 - 모세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유명한 말은 성인인 예수의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경이나 예수에 대한 일화는 사이트 내에서 가급적 언급을 피해왔습니다. 잘못 말했다가는 폭탄맞을까봐서요... 하지만, 성경의 내용도 역사적으로 보면 재미있게 접근할 내용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오늘은 고대법으로 한번 접근해볼께요.

고대법은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모든 법이 보복주의, 복수주의, 중형주의, 농경주의적인 법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고조선의 8조법.... 사람을 죽은 자는 죽이고, 다치게 한자는 곡물로서 갚아라 등이 있죠.

함무라비 법전.... 목수가 지은 집이 부서져 사람이 죽으면 목수를 죽이고, 아들이 죽었으면 목수의 아들을 죽인다. 등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이 법의 내용이죠. 그런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실제 한 사람이 구약에 나오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만약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때는 그 생명으로서 갚게 하고, 눈을 상하게 했을 때는 눈으로써 갚게 하고, 이를 다치게 했을 경우에는 이로써 갚는다> 라고 했습니다.

즉,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 역시 법은 보복과 복수, 중한 엄벌(중형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고대 사람들은 이것이 정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복주의적인 법들의 특징은 그 법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통용된다는 <선민의식>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다른 이민족이 저지른 벌에 대해서는 법을 적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면 되니까요.

구약성경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 <선민의식>을 가진 책이라는 점입니다. 모세의 법은 모세와 그들 민족에 국한된 법이며, 선택받은 자들도 그들 민족이었으니까요. 선택받지 않은 자는 어떤 의무도 혜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대 법을 바꾼다는 것은 고대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생각해낼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 자신들인데, 그러한 성스런 임무를 스스로 깬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2. 예수의 박애정신은 고대 법의 틀을 깨는 것이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시기는 철기 시기입니다. 구약 성경의 전쟁 내용은 대부분 철제 무기를 가지고, 다른 민족을 점령하는 단계의 사회발전수준이었죠. 초기 철기시대의 보편적 특징은 많은 정복 전쟁 속에서 집단간의 우열차가 벌어지고, 무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가 심해지는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가 되면 수많은 사회변화 속에서 다양한 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법의 특징은 전술했듯이 중형주의, 보복주의, 복수주의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를 훔치면 2가지로 갚으라는 1책2법 등에서 볼 수 있죠. 또 투기하는 여자는 죽여서 버린자던가, 이전과 달리 정절을 강조한다는 것도 새로 추가된 법 내용입니다. 가부장적 사회로 넘어가는 시기니까요.

그러나, 세계사적으로 이러한 흐름이 당연한 것임에도, 그 흐름에 대항한 성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철기시대에 살았던 석가, 예수, 공자 같은 사람들이죠. 공자는 철기시대가 접어들어 전쟁이 한참 진행중인 춘추전국시대에 <가족윤리>를 말하였고, 석가는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도의 소국들 속에서 카스트를 부정하고 <만민평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고대법 체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새로운 윤리를 제시하였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한 너희들은 들었노라.

하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말하노라. 악한 자에게 맞서지 말라. 사람이 만약 너의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을 내 놓아라. 너를 소송하여 하의를 뺏으려 하는 자 있거든 상의도 내어 주어라.

너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책망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는 하늘에 계신 너희들의 아버지의 자식이 되고자 함이로다. 하늘의 아버지는 그 햇빛을 악한 자의 위에도 선한 자의 위에도 비춰 주며, 비를 올바른 자에게도 올바르지 못한 자에게도 내리도록 하시도다.

이 말은 예수가 고대법의 체계를 깨 버리겠다는 선전포고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를 지탱하던 것였시 <고대법>적인 사회질서였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이상적이기만 한 것>이었고, 로마 정치인들이 지향하던 처세술이 아니였습니다. 결정적으로 황제 숭배를 안할 뿐더러, 황제가 만든 법마저 무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가 못박혀 죽은 것은 기존 질서에 도전한 대가로 볼 수 있습니다.

3. 우리 나라에서도 <보복주의> 법이 극복된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 때 이런 법이 있습니다.

<도둑질한 자는 몸을 풀어주되 훔친 물건을 변상할 재산이 없는 자는 징수하지 말라. 백성이 가난하여 남의 곡물을 빌린 자는 농사를 짓지 못한 경우에는 원곡과 이자를 모두 갚지 않아도 되고, 올해에 수확한 자는 원곡만 돌려주고 이자는 갚지 않아도 된다. 소사는 이달 30일에 한하여 받들어 시행하라.>

- 삼국사기 권 6, 신라본기 6, 문무왕 9년 2월 21일 -

이게 무슨 말인가요? 도둑놈인데 도둑질한 물건을 받지 말고, 돈을 빌렸는데 갚은 돈이 없으면 갚지 말라니... 네... 실제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가 말한 내용은 고대법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법률 체계와 유사합니다.

고대법에서 <나를 죽이면 너도 죽인다>라는 내용은, 중세, 근대로 넘어가면서 바뀝니다. 도둑질을 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돈이 없기 때문에, 급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용서해야 할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죠. 이러한 내용이 우리나라 법에 나오는 것은 삼국통일 직후입니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삼국통일 직후를 <고대가 아닌 중세사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살던 시기는 중세도 아니였고, 아주 먼먼... 고대였습니다. 우리가 성인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들의 업적이 너무 뛰어나고 고결해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서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사상을 말하고, 그 신념 속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몽소 실천하면서 해낸다는 것에서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고대법의 체계 속에서 자신들의 민족만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가진 유태인들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선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종교의 폭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은 그 종교를 로마 제국안에 녹여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시켰습니다. 지금 그 종교가 어떤 형식으로 평가받던 간에, 고대법적인 체계를 깨뜨린 예수의 사상 체계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일본의 고대 역사서 - 고사기, 일본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은?

고사기는 최초로 일본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고사기는 712년, 그리고 얼마후에 720년경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지요. 이 2권은 모두 덴무 천황의 명으로 제작됩니다. 덴무천황이 누구인지는 일본사이야기 7번에서 얘기했죠? 가장 유약한 왕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획득하여 일본 천황가를 중앙집권화 시킨 그 인물입니다.

보통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역사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우리 나라만 한번 찾아볼까요? 신라에서 편찬된 국사는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때 신라 왕실의 권위를 알리고, 진골귀족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도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백제의 서기도 백제가 동아시아 상권을 주름잡고, 중국 2군에 영향력을 펼칠 때, 왕실계보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덴무천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천황권 밑에서 편찬됩니다.(시작은 덴무찬황 때이지만,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끝나는 것은 후대의 천황대일입니다.) 덴무천황은 황실의 계보를 남기기 위해 전승자를 찾아서 황실계보를 암기시킵니다. 이 황실 계보를 <제기>라고 합니다. 또 <구사>라고 불리는 신화와 설화도 전승자에게 암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기시킨 내용이 이후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암기한 내용을 책으로 적으로 명하였는데, 이것이 <고사기>라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2. 고사기의 내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고사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덴무천황기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일본 천황가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중, 하의 권은 각각 중심 줄거리가 있습니다. 상권은 전설속의 신들의 이야기입니다.(이 신화이야기는 일본사 이야기 2번에서 다루었습니다.) 중권과 하권은 그 신이 천손강림을 하여 지상의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황가의 계보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단군신화와 다른 점은 당시 천손의 후예라는 천황가에서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약간 객관적 근거가 없이 적었다는 점이 좀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초기에는 고사기를 사서로 다루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 중, 하 전체를 한데 묶어 일본 신화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고사기의 편찬 목적은 진신의 난(일본사 이야기 7편 참조)을 넘긴 덴무천황이 지방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천황의 신성함을 대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따라서 이 책은 정사라기 보다는 천황가의 개인적 소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이 천황권의 전성기이자, 불교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래한 이래로 한반도 불교에서 전래된 설화들이 일본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고사기에는 많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또 이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 신화는 각종 세계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유입되어 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합니다. 즉, 중국, 한반도, 태평양,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도 많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이 주장하는 그리스 신화까지의 지역확대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 설화가 재일 많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3. 고사기의 실제 내용

상권의 내용 요약 - 일본의 신화 이야기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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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권의 내용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 신화를 가져다 베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조신 아마테리스는 해모수로, 천상계 이야기는 환인이야기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인데, 이렇게 까지 비약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신화는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일본신화가 우리나라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우리 신화는 중국이나 러시아 신화를 베낀 것이 됩니다. 사실 시기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설화는 다 공통적으로 천손의 강림, 인수교혼(동물과 사람이 결혼하는 것), 곰이 등장하는 설화가 대부분 다 나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설화를 유도했다고 보는 편이 좋지요. 또는 북방에서 설화가 차츰 남방으로 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구요.

중권의 내용 요약 - 진무천황과 신공황후(4대 천황 ~ 15대)

중권의 내용은 천손강림 이후 4대 진무천황이 신의 후손으로서 일본열도에 실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열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후 천황가가 발전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진무천황 이후 후손들 얘기는 그저 그렇고, 중요한 것은 야먀타이국의 히미코(신공황후)의 이야기입니다. 고사기에서는 진구우라는 여자로 나옵니다만, 몇 년뒤 편천된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시킵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에서의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에 각인시켰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고사기의 허황된 면을 발견합니다. 일본 천황가 이야기야 허구이든 진실이든 무시하면 되지만, 한반도 자체를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이 책이 뭐하는 책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충분한 소재거리가 됩니다. (일본사 이야기 2편의 야마타이국을 참조하세요)

하권의 내용 요약 - 16대 천황 ~ 33대 천황

하권의 내용은 16대 천황에서 33대 천황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가는 부분은 이 하권의 주요 줄거리가 야마토 정권에서의 천황가 이야기라는 점인데, 야마토 정권은 일본의 소국들이 뭉쳐서 만든 지방 호족들의 연합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천황은 그 연합정권의 수장 성격이었지요. 따라서 천황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고, 또 지방 유력 호족의 가문에서 천황이 나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 호족가문과 천황가는 권력구도에 따라 상호 결혼을 하였고, 당시 남매간에 결혼까지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유력호족가문에서 천황과 이어지는 핏줄만 있으면 그 기문소속의 천황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천황가를 휘어잡고, 불교를 수용하여 강력한 유력가문이자 천황가를 겸했던 가문이 바로 소가씨였습니다.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 참조) 특히 소가씨의 33대 천황인 스이코(소가노 아마코) 천황은 쇼토쿠 태자(소가노 쇼토쿠)와 함께 아스카 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후 소가논 집단의 멸망 부분은 나오지 않고 끝납니다. 다이카 개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4. 그럼 일본 서기는 왜 편찬한 거야?

고사기가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됩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고대 신화부터 서술하여 고대 신화가 천황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서술 방향을 잡아 천황가에 신성성을 부여해 지방호족가문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민을 지배함에 있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역사책의 차이점은 정사인가, 개인적 장서인가의 차이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가 개인적으로 보존할 개인적 장서이므로, 그 후속편이 없고, 이야기도 고대신과 천황가의 족보 연결차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분위기에서 중국식 정사와 같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이후에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등이 계속 편찬되었고, 이러한 일본의 정사들을 한번에 묶어 <육국사>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편년체입니다. 일본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육국사는 <신의 책>으로 여겨지면서, 심지어 역사가들까지도 이 책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이 육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이 그저 신성한 책으로서 이 일본서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가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신화수준인 고사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정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한반도의 역사서술 부분에서 우리나라 및 중국측의 기록과 너무 달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가 우리 역사서 및 중국사서를 참조하면서 천황가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일본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5. 그럼 일본 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역사의 논쟁점들...

신공황후기 설화 이야기도 연대 차이가 심하다.

고대 일본 천황가의 기록들은 기원후 150년 이전의 기록들이 우리 사서나 중국사서에 비해 그 연도차가 너무 큽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본 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오녀는 잔잔한 사랑이야기 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여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왕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거의 5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 설화에 나오는 망부석 이야기도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200년 이상 차이나고, 신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맞는 연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기록들이 거의 다 연대가 안 맞습니다. 대체 이 일본서기는 무슨 책을 근거로 연대를 상정한 것일까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

일본 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일본이 신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거의 말이 안되는 해석인데요. 또, 일본은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위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이야기는 고구려사 편에 아주아주 자세히 기록할 것이구요, 또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을 한국사 사료방에 전문 다 옮겨 놓았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비석 내용을 글자 몇글자 바꾸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칠지도 문제

칠지도 문제는 고대 한국과 일본사에서 큰 논점이 되는 문제중 하나입니다. 칠지도(일곱가지가 난 칼)라는 칼을 백제 부흥기 때 성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이 전해주었다는 부분의 용어가 과연 <하사하였다>인가 <바쳤다>인가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한자로 <공공>이라는 글자는 주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해석하기 따라서 하사도 되고, 바친 것도 되거든요.

우리는 당연히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당시 중앙집권화 하던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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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점들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서기에서 최소한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를 볼 때,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잘 인용안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정사에서 조차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가 섞여 있으니, 역사가들은 일본 사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잘 판단하고, 인용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일본 사서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객관적 시선에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편에서 다룰 때는 조목조목 학술적인 근거를 들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와 같이 신화적 성격으로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이만 적고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휴가라 직장을 쉽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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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로마제국과 크리스트교 이야기 1번째

1. 초기 로마의 종교

초기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로마 문화 자체가 그리스적인 요소를 많이 받아들었고, 그리스 문화는 이집트 문화의 요소를 받아들인 탓에, 로마의 신화를 보면 거의 그리스 신화와 체계가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 등의 영향을 받은 신화 이야기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신화는 제우스 신을 쥬피터라고 부르는 등 명칭과 풍습, 일부 줄거리 등이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신화내용도 유사한 부분이 많죠.

이러한 다신교의 풍습이 로마 초기부터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로마의 종교는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황제 예배를 시도합니다. 즉, 그리스 신화의 가장 상위신인 쥬피터(제우스)를 황제의 권위와 맞먹는 권위로 신격화한 상태에서 나머지 신들은 각각 로마의 지배층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이유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초기 신앙을 황제예배 신앙과 결부하여 국가종교화 시킨 것이지요.

이렇게 로마 제정 초기까지는 고유 신앙이 견고하였고, 그 고유신앙이 황제예배와 결부되어,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후기 사회혼란으로 이러한 황제중심의 전통신앙이 흔들리게 됩니다. 특히, 제우스 위주의 신의 위계질서보다 그리스식 디오니소스 신앙이 대두되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에서 영향을 받아 영생, 불멸, 구원, 재생 등을 강조하였습니다.(그리스인 이야기 편을 보면 자세히 설명했었습니다.) 또, 오리엔트의 밀의 종교가 도입되어 로마 신앙은 다양한 신앙이 각 계층의 이해관계 속에서 난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배층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로마 특유의 강건함을 잃고 향략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에피쿠로스 학파적인 쾌락주의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에피쿠로스의 이념은 경건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로마의 지배층은 이 사상을 단순한 쾌락주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기독교적 이념의 로마인들은 에피쿠로스 학파는 악마의 학파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정 후기 로마의 사회 전반적 향략주의와 기강 문란은 민중들의 종교적인 경향을 기독교쪽으로 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교양있는 로마의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점을 신플라톤 철학의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신플라톤 철학은 지상 세계의 세속적, 향락적 생활보다, 더 높고 가치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여 로마인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죠. 이러한 이상주의적 사상은 크리스트교의 신비주의적 사상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2. 크리스트교의 성립

크리스트교가 등장한 것은 로마의 제정 초기입니다. 크리스트교는 일단 유대교의 구약성경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는 유대교가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유대인만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상이라는 것에서 탈피하려고 했습니다. 즉,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신약성경을 새로이 정립하여 더 많은 민족을 포용할 수 있는 도덕주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 바울 등이 로마에 크리스트교를 적극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로마 민중들은 이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유대교의 특징이 율법주의, 선민사상이라면, 크리스트교의 특징은 그것을 벗어나 사랑주의, 인류주의를 추구하는 세계종교로서 탈바꿈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출현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전도가인 후계자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고, 당시 세계제국인 로마라는 전파 매개체가 있었으며, 그리스 사상이라는 민주주의적 사상 기반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실제 유대교는 바빌론 유수 이후 강대국들의 압박으로 민족주의가 더 강화되었고, 그것은 철저한 선민사상과 구원주의, 메시아 사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등장과 예수의 탄생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테두리를 거부하는 것이였죠. 예수가 유대교를 벗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당시 선민사상을 가지고, 민족적 우월성을 따지던 사두케인, 파리세인을 모두 비판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는 민족주의라는 테두리는 결코 유대인에게 이롭지 않음을 역설합니다. 자신은 구세주로서 부활의 믿음을 유대인에게 보여주어 민족주의보다 사랑이 우선임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의한 크리스트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은 역사상으로는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바울>에 의해서입니다.

크리스트교에 대하여 로마 황제들은 초기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인들의 교세가 날로 늘어났고, 이들이 사랑과 세계구원을 주장하면서 황제의 요구를 거부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중 가장 황제가 싫어했던 것은 병역거부문제, 황제숭배거부(우상거부)문제입니다. 제정시대 황제들은 로마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크리스트교의 소행으로 돌려 그들을 죽임으로서 황제권을 더 강화하려고 시도합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하자 그것을 모두 크리스트교 소행으로 몰아 죽였으며, 이후 황제들 역시 비슷한 방법을 자주 동원합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아예 칙령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인들이 종교적 활동을 하느라 국가 대업을 경시하는 것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후기가 되어,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자 황제들을 생각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로마 후기에 오면 충실히 생업에 종사하면서 세금 납부을 꼬박꼬박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크리스찬이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이제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경건함을 이용하여 로마의 국가 기강을 바로잡을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밀리노 칙령(313)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합니다. 단, 집권층과 황제 자신도 그들의 종교는 제우스교였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목적에서의 크리스트교가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크리스트교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훗날, 테오도스우스는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하면서 모든 지배층에게 크리스트교를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역시 정치적인 목적이였기에, 크리스트교를 옹호하는 황제와 기존 신앙(제우스교, 디오니소스교 등)을 옹호하는 원로원파는 극심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배교자라 불리는 초기 신앙 옹호파들이 정권을 잡기도 하였고, 크리스트교를 옹호하는 파가 정권을 잡기도 하면서 상대파를 죽이기도 합니다. 실제, 로마가 동서로 갈리는 시기에 동서로마에는 각각 종교적인 대립이 극심하였고, 이것이 황제로 하여금 로마 분열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투쟁과 대립을 통하여 황제들은 반 크리스트적 계파를 완전 제압하였고,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의 영광이 남아있는 한 로마 제국의 전역에 교회조직을 성립시켜 퍼지기 시작합니다.

3. 로마 교회의 조직 구성

로마 교회의 교세 성장은 교회 관리자가 도시와 주변농촌에 행정 기능까지 관리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의 로마 교회는 단순히 <장로>가 다스리는 지역교회라고 보면 됩니다. 이들은 로마황제에 의해 핍박받고 음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공인 이후 교세는 급격히 확장됩니다. 특히 교회조직을 <로마제국의 행정조직>과 일원화하는 방식은 크리스트교의 세계화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 구성 방식을 한 번 볼까요? 크리스트교 구성방식은 로마 행정조직에 따라 3단계로 설정됩니다.

1. 도시와 주변 농촌 지역 : 가장 기본적인 교리 전파 지역으로 주교가 책임을 집니다.

2. 로마의 속주지역 : 로마의 속주는 몇 개 도시와 농촌을 포괄하는 식민지로서, 이 지역의 총책임자는 대주교입니다. 대주교가 주교들을 총괄합니다.

3. 로마제국의 5교구 : 로마제국의 가장 거점이 되는 5개의 수도에 각각 수좌대주교가 있어 대주교들을 총괄합니다. 이 5개의 5교구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입니다.

이러한 5개의 교구 중 가장 상위의 교구가 <로마>로서 로마의 교황은 다른 교구 및 모든 크리스트교 지역을 총괄하게 됩니다. 이 로마교구를 책임지는 자는 교황으로 불리며, 서방교회의 책임자이입니다. 로마가 가장 상위를 차지한 이유는 로마제국의 실질적 수도였으며, 로마교회가 예수의 직계인 베드로에 의해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게 망하게 되면서 5개의 교구중 로마(서방교회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동로마교회의 중심지)만 남게됩니다. 이 2곳이 동, 서 유럽의 종교 중심지가 되며, 나머지 3곳은 이슬람 세력으로 넘어가 교회중심지로서 구심점은 잃게됩니다. 나머지 3곳을 탈환하려는 노력은 훗날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자, 다음장에서도 로마 교회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단과의 논쟁, 교부철학 부분을 역사적으로 논해봅시다. 고고 싱!!

(이 파트는 종교사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부분이니까 종교적으로 덤비지 마세요. 난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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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사회와 문화

1. 헬레니즘 사회의 융성

헬레니즘 시대를 정확히 규명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아주 세부적으로 들어가기에는 제 지식이 짧기에, 헬레니즘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과 키포인트로 여겨지는 몇몇 사실들을 위주로 정리해 볼까 합니다.

헬레니즘 시대가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이라는 사실은 전단원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이 단원에서는 헬레니즘 당시의 사회와 문화 중심으로 다뤄볼께요.

우선 헬레니즘 사회는 알렉산더의 동방 이민정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인들을 동방으로 이주시켜 2가지 효과를 얻으려 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 사회의 혼란을 잠재우고, 그리스가 알렉산더 제국에 반기를 드는 것을 차단하며, 그리스 지배층에게 어느 정도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2번째는 지중해와 오리엔트를 연결한 거대한 교역권과 경제권을 성립시키고, 그 무역의 주체를 그리스인으로 삼으로 한 것입니다.

실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페르시아의 경제력은 엄청나게 확장하였지만, 그 경제력을 알렉산더 제국의 경제력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적 식견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필요했습니다. 이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적인 고대 문화유산을 동방에 전파하는 동시에 금, 은의 약탈 등을 통하여, 동방의 자원을 착취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 알렉산더 제국에서는 앗티카(아테네 지방) 주화가 화폐로 통용되었고, 앗티카 방언이 공용어로 인정되었습니다. 즉, 그리스어가 제국의 언어가 되어 상업, 제조업, 광업 등의 모든 교역산업의 통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 인들의 진출로 인하여 그리스적인 형태의 도시가 제국 곳곳에 생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도시가 70여곳이나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죠. 또, 아시아와 인도의 교역 중심지인 안티오크도 이 당시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동서양의 거점에 위치한 로도스섬, 델로스섬도 발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인이 동방으로 계속 진출하면서 식량 부족 문제가 대두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알렉산더 제국의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국에서는 <노예노동>을 통한 대규모 농업경영이라는 방식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상공업, 수공업, 농업 등에 <그리스적인 노예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였죠. 여기서 말하는 노예는 <원주민과 이주 노예>를 말합니다. 이러한 정책은 그리스적인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이 원주민과 자주 충돌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제국은 원주민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가혹하게 통치함으로서, 원주민과 이주민간의 빈주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집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알렉산더 제국의 번영은 노예노동과 원주민 착취를 바탕으로 한 경제번영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겠네요. 그리스의 민주정치가 시민이 먹고놀 때 <일하는 노예>를 기반으로 하였다면, 알렉산더 제국의 번영은 그리스적 시민이 먹고놀 때, 일하는 <원주민과 노예>를 기반으로 합니다.

또 알렉산더가 죽은 뒤에는 서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소모적인 전쟁이 계속되면서 제국의 물질적 자원과 풍부한 인적 기반이 새롭고 발전된 제국의 기반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계속 소모되고 고갈되어 갑니다. 알렉산더 제국이 로마제국에게 힘없이 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 때문이지요.

2. 헬레니즘 문화를 정의내리자면?

헬레니즘 문화는 결국 동서문화의 융합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평등한 입장에서의 융합은 절대 아닙니다. 전술했듯이, 원주민 착취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었으니까요. 이것은 그리스적인 입장에서의 문화가 폴리스 단위를 넘어 세계적 단위로 탈바꿈한 정도의 문화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폴리스의 분립적이고, 도시국가적인 문화는 오리엔트의 거대한 전제적이고도 전체적인 문화를 만나 새로운 문화로 탈바꿈하는 것이지요. 폴리스의 분립적이고 지역적인 성격은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보편적,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적인 성격의 문화로 나아갑니다. 특히 철학, 문학, 예술 분야는 그리스적이면서도 세계적이고 동양적인 문화 색체를 가지고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간다라 미술입니다. 이 문화는 동서양에 걸친 거대한 제국인만큼, 로마, 이슬람, 간다라, 중국 등 당대 모든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럼 대표적인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예술 분야를 살펴볼까요?

3. 헬레니즘 철학 - 스토아 학파

헬레니즘 시대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스토아 철학입니다. 이 철학의 기본 정신은 행복은 정신과 영혼의 안정에 있기 때문에 철저한 금욕을 통하여 정신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철학이 중요한 점은 거대한 제국 질서에 걸맞는 <보편성>을 가진 철학이라는 점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그리스의 분립주의적 성격을 넘어선 <초폴리스적인 세계국가>를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철학은 알렉산더 제국과 같은 세계국가란, 자연법과 보편적 정의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국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법>이란, 인간이라면 누구가 갖는 자유와 평등을 원칙적으로 지켜줌으로서 정의가 살아있는 법을 말합니다. 세계국가에 살고 있는 <세계시민>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모두가 평등한 시민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평등한 모든 시민들은 민족, 국가를 초월하여 평등한 시민입니다. 즉, 그 어떤 사회적 구속에서도 해방되고,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해방된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가 세계국가이며, 이 세계국가에서의 시민이란 철저한 개인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원자적인 개인>을 말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제국에서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이상은 철저히 받아들이면서도, 실제 정치체제에서는 정반대의 전제군주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알렉산더 제국의 기반이 그리스적인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세계국가와 같은 이상국가의 이념은 지배층에 한정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동방의 수많은 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페르시아적인 <전제군주제>가 가장 이상적이였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스토아 철학의 논리는 훗날 로마인들이 세계제국을 세울 때, 그대로 받아들였던 논리입니다. 알렉산더 제국을 멸망시킨 로마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이념을 수용하여, 시민권의 분배와 이민족에 대한 차별을 적절히 하였습니다. 단, 제정 후기의 로마는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논리보다는 점차 향락에 빠짐으로서 제국의 멸망을 스스로 초래하였다는 점도 하나의 키포인트입니다.

또 스토아 학파의 철저한 금욕주의와 세계시민사상은 유대교가 배타적인 선민사상에서 벗어나, 세계종교로 나아가는 것에도 영향을 줍니다. 실제, 크리스크교 초기의 구약에서는 선택받은 민족으로 민족성을 과시하던 부분이 있어서 타 민족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사상이 크리스트교 사상의 철학적 배경으로 자리잡으면서 이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지자를 만나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4. 헬레니즘 철학 -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는 흔히 쾌락주의 학파라 불리며, 스토아 학파의 반대선상에 있는 철학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말하는 쾌락주의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 약간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를 저급하고, 더러운 쾌락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제정 로마 후기 사회적으로 퇴폐하고 문란한 상황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조인 에피쿠로스는 스토아적인 금욕적 생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기본 철학은 <정신적 쾌락과 개인적 세계>를 위한 즐거움의 추구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하는데, 이것은 스토아 학파의 기본 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일단 국가라는 기관도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은 각 개인들이 생존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을 위한 발명품 정도의 역할을 하는 기구인 것입니다. 즉,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저해하면 국가는 필요없는 기구가 되는 것이지요. 이미 로크의 저항권이나, 근대 시민권의 개념이 이들에게서도 보입니다.

또 이들은 개인이 철저하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즐거운 생활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권리라고 말합니다. 즉, 쾌락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므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그들이 실제 쾌락적인 삶을 산 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하네요.

이들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쾌락 이전에 수양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예로, 인간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은 죽음이나 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인데, 이러한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에 대한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곧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논리지요. 즉, 죽음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두려운가? 신이란 무엇이며, 신의 존재가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등등을 생각하고,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하는 것이 곧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결국,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론은 언뜻 보면 난잡하고, 쾌락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스토아 학파와 마찬가지로 금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세계시민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에피쿠로스적인 사상이 로마 제정 초기에는 그 근본정신 그대로 받아들여졌지만, 로마 말기에는 난잡하고 문란한 쾌락주의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헬레니즘 미술이 감각적, 향락적인 측면이 강한 것도 바로 이 에피쿠로스적인 쾌락추구의 영향이 큽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람들이 금욕을 하던, 수양을 하던 간에 이들은 쾌락 자체는 절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니까요.

5. 헬레니즘의 예술

이러한 에피쿠로스적인 측면에서 헬레니즘 예술을 봅시다. 이들의 예술은 그리스적인 가치관, 즉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관능적이고 격정적인 현실미를 추구합니다.

헬레니즘에서의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신을 넘어서서 인간육체가 얼마나 관능적인 미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니케상은 승리의 여신이 자유롭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라오콘의 군상은 죽음의 고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며, 정신적 쾌락을 방해하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들의 건축을 보면 <코린트 양식>입니다. 건축 양식을 비교하는 것은 <그리스 이야기>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넘어갈께요. 헬레니즘 건축은 그리스와 동방문화가 혼합된 것 처럼, 고전적인 공공건물과 세속적인 건축 양식이 동시에 보입니다.

5. 자연과학의 발달

헬레니즘 시대는 세계시민주의가 발달하면서, 보편적으로 탐구되야할 진리는 무엇인가? 라는 명제가 중요해졌습니다. 그러한 명제에 호응하여 발달한 분야가 자연과학 분야입니다. 아르키메데스의 기하학, 유클리드의 물리학,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 에라토스테네스의 자오선 측정과 지구둘레의 계산 등은 이 당시 자연과학이 최첨단 수준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러한 과학적 발달은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 곳곳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지으면서 활성화되었습니다. 즉, 이 시대는 국가가 처음으로 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투자한 시대입니다. 실제,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만의 독특하고 심도있는 철학과 과학의 대부분을 스승이 지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이뤄냈습니다. 알렉산더는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곳곳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도서관으로 바로 바로 보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생전에 절대 볼 수 없었던 진귀한 모든 것들을 도서관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의 스승을 하지 않았다면, 유럽 철학과 과학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인문과학분야는 그리스 시대의 작품을 수집하고, 해석하며, 해설을 다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있었기에 고대 그리스 문화의 기록들이 현재 남아있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이제 겨우, 로마편에 입문하겠군요. 로마편은 제가 유럽 고대사 중에서 그나마 책을 좀 많이 읽은 부분입니다. 재미있으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모두 적을 수 있도록 생각하면서 전개해보겠습니다. 그럼 로마시대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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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문명의 탄생

1. 석기 시대를 넘어선 문명 탄생

석기시대 오리엔트에서는 문명이 탄생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오리엔트 문명이란,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 <동쪽의 문명>이란 뜻입니다. 석기에서 청동기로 접어들면서 탄생한 오리엔트 문명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리적으로 풍부한 물과 기름진 땅이 제공되었고, 강 유역에는 다양한 식용생물이 있었으며 주변지역의 자원이 뒷받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잉여생산이 출현하게 됩니다. 세계 4대 문명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공통점이 많은데, 제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기에 다음과 같습니다.

1. 청동시 시대였다. - 충분한 잉여생산이 출현 가능한 시대였고, 잉여생산물 투쟁을 위한 싸움으로 사회계급이 형성되고 국가 조직이 발생하였다.

2. 문자가 출현한 시대였다 - 어느 정도 사회구성원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였으며, 이것은 다양한 발명품을 생산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촉매제였다.

3. 조직적인 종교가 발달하였다. - 신전 및 신관이 출현하면서 종교적인 역량을 가진 자들이 지배층으로 등장하였다.

4. 운송 기구가 발달하였다. - 선박, 바퀴 등의 발명이 잉여생산물 운반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발전 속에서 촌락을 중심으로 한 씨족 사회가 국가를 중심으로 한 문명사회로 전환된 것입니다.

2. 오리엔트의 고대 역사 전개

고대 오리엔트 지방의 역사를 논의하려면 그 역사를 4단계로 나눠서 이해하는 편이 편합니다. 오리엔트 역사를 형성기, 발전기, 암흑기, 통일기라는 4단계의 역사로 나눠 보겠습니다.

1. 형성기 : 기원전 3000년경 - 형성기의 오리엔트 사회의 특징은 각각의 문명과 국가들이 자국의 문화적 기본틀을 완성하는 시기입니다. 각 집단은 상호 접촉없이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형태를 띄고 발전하였습니다.

2. 발전기 : 기원전 2000년경 - 이 시기는 각각 개별적으로 발전한 강국들이 상호연관성을 갖는 국제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왕국, 이집트의 신왕조, 소아시아의 히타이트와 미탄니, 에게문명의 크레타는 전쟁을 통해 접촉하고, 외교문서를 교환하는 등 상호 교류를 통해 상대문물을 받아들입니다.

3. 암흑기 : 기원전 1200년경 - 이 시기는 갑작스럽게 오리엔트의 강대국들이 모두 몰락하는 시기입니다. 이집트의 신왕조가 약화되고,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는 멸망하며, 미케네 문명이 몰락합니다. 그리고 그 몰락기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보통 이 시기를 역사가 호메로스의 기록에만 의존한다고 해서 호메로스 시대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갑작스런 오리엔트의 몰락 원인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가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는 점에서 미루어볼 때 급격한 사회 변화가 원인이 아니였는가 추측합니다.

4. 통일기 ; 기원전 1000년경 - 이 시기는 혼란한 오리엔트의 상황이 끝나고, 강대국인 아시리아가 최초로 오리엔트를 통일한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가혹한 통치로 곧 망하여 4국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이 지역은 페르시아가 재통일하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폴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을 기원전 4c에 거치면서 점차 약해졌고, 그 무렵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이제 다음 글에서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고대 문명의 각각 국가들을 자세히 설명해보려 합니다. 그 전에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문명 중 핵심 문명이 무엇인가만 짚어봅니다.

고대 오리엔트와 서방의 5대 문명은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동부 지중해 문명, 그리스 문명,(과도기인 헬레니즘), 로마 문명입니다.

이들이 오리엔트 고대 문명을 이루되, 그 핵심은 유럽중심의 로마 문명이었고, 로마가 망한 뒤 유럽은 고대시대를 넘어 중세시대로 넘어갑니다.

3. 고대 오리엔트 암흑기의 한줄기 빛 - 해상왕국

위에 설명한 오리엔트 암흑기(호메로스 시대)는 오직 암흑만이 아니였습니다. 암흑기를 이용하여 그 시대를 이끌고, 빛나는 전성기를 구가한 나라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페니키아와 헤브라이입니다. 고대 국가들을 각각 개별적으로 다음 글에서 살피기 전에 이들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페니키아는 지금 아프리카 북단의 카르타고에 근거지를 둔 해상왕국입니다. 이들은 아프리카 북부와 유럽남단를 휘젓고 다니면서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던 강국이었습니다. 이들이 중요한 점은 오리엔트 문명을 유럽에 전파했다는 점입니다. 시돈, 타루스 등의 해안 국가를 건설한 이들은 동방과 유럽을 동시에 오가는 해상민족이었으며, 오리엔트의 선진문물을 유럽에 전파하여 훗날 그리스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특히, 카르타고를 정복한 이후에는 표음문자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은 곧 훗날 알파벳이라 불리는 문자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민주정치 국가인 그리스 폴리스들의 성장은 이들의 힘이 큽니다.

헤브라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성장한 유일한 고대 유일신 국가입니다. 고대 모든 국가가 다신교였지만, 특이하게도 이들은 선민사상을 가진 유일교를 신봉하였습니다. 이들은 초기 가나안 왕국을 건설하여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집트 왕국의 압박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신앙과 십계명을 매개로 하여 뭉친 청동기 전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기록이 바로 구약성경의 핵심을 이룹니다. 이들은 초기에는 이집트 군을 격파하고, 수도를 예루살렘에 정하는 등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다윗, 솔로몬 왕 때에는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합니다.

   이들은 일신교인 유대교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들 민족은 스스로를 위대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고대 선민사상을 가진 대표적인 민족입니다. 이들의 자부심이 곧 구약성경이지요. 이들의 유대교가 훗날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거대한 종교의 기본 바탕이 되었는데, 특히 이 종교가 훗날 다른 종교들에게 미친 영향 중 제일 큰 것이 바로 <내세사상>이라는 부분입니다.

   내세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증명해줄 선지자가 필요했고, 각 종교는 그 선지자가 누구인지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예수, 마호메트 등은 모두 이 내세사상을 증명하기 위한 최후의 선지자라고 각 종교는 주장합니다. 뿌리가 같은 이 두 종교는 지금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 채 분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헤브라이는 이집트와 주변국의 끊임없는 압력으로 결국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유대와 이스라엘이라는 2 국가로 분열된 것이지요. 유대는 훗날 바빌론 유수라는 사건을 겪으면서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은 훗날 최초의 오리엔트 통일왕조인 아시리아에게 망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각각 개별적인 오리엔트 국가들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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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건국설화

시조 동명성황은성이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이다..... 부여의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어 물은 즉, 하백의 딸 유화라 하는지라....... 금와왕이 이상히 여겨 그녀를 방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이 따라와 비추었다. 그녀는 몸을 피하였으나 했빛이 따라와 기어이 그녀를 비추었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잉태하게 되었고 마침내 알 하나를 낳았다. ...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고 나왔다.

기골과 모양이 뛰어나고 기이했다. 일곱 살에 의연함이 더하였고, 스스로 활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 하니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

주몽의 어머니가 비밀을 알고 아들에게, <장치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죽이고자 하니 너의 재간으로 어디 간들 못 살겠느냐, 지체하다가 욕을 당하지 말고 멀리 도망하여 큰 일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타일렀다. 주몽은 그를 따르는 세 사람과 함께 도망하여 강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널 수 없었고, 추격병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주몽이 강물에 고하여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여기까지 왔으나 추격병이 쫒아오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외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니 주몽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 주몽은 졸본천으로 갔다. 그 곳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천이 험하였다. 마침내 이 곳에 도읍하기로 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를 그의 성씨로 삼았다.

                                                                                         - 삼국사기  -

사료해석 :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과 대립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고대 신화의 위기극복구조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설화입니다. 특히 졸본의 산악지대는 <힘써 일해도 양식이 부족한> 지역인 만큼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소국들을 정복하고 평야지대로 진출해야만 했죠.

이 사료에서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인 해모수이고 어머니 유화부인은 물의 신 하백의 딸입니다. 즉 고구려인들은 선민의식과 천신의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는데, 후의 고구려인들은 주몽과 유화부인을 시조신으로 모시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고구려 신화와 단군신화는 그 구조가 약간 다른데, 단군신화는 창세기적 요소로서 원시적인 초창기 신화이므로 영웅의 위기극복보다 선악의 대립구조가 강도되었음이 보입니다. 특히 청동기 시기의 전형적인 신비주의가 많이 보이죠. 반면 고구려 설화들는 유이민적인 요소가 보이는 철기시대 신화로서 신비주의는 축소되며, 그 사회상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로 형제갈등에서 보이는 적장자 상속의 인정, 주몽의 모친에서 볼 수 있는 농업적 지모신 요소 등이 설화에 녹아 그 사회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네요.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