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세 역사학의 발달 과정

1. 삼국시대 : 역사학이 성립되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제대로 된 역사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의거할 때, 한국에서 제대로 된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는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됩니다.

삼국시대의 역사편찬은 왕권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가 대체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시기였습니다. 고구려의 유기는 5c 고구려의 강성기에, 백제의 서기는 근초고왕의 전성기에, 신라의 국사는 신라 6세기 진흥왕기에 각각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을 <왕의 업적>을 홍보하여 왕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당시의 역사서들은 남아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왕실의 족보와 신성함, 왕계를 거슬러올라갔을 때의 신화, 선민의식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즉, 왕실과 지배집단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한 저서들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고구려에서는 유기를 편찬하였고, 이후 신집 5권으로 이것을 요약하였다고 합니다. 백제는 서기, 백제기, 백제본기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리는 국사, 가야는 개황력 등이 존재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서들은 일단, 중국의 역사 서술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단, 사마천의 기전체 중에서 거의 대부분 <본기> 위주로 역사를 서술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역사서의 편찬 목적이 국왕가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들 책의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인용되어 나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선사, 한산기,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등의 역사 저서들이 나오는 데, 이러한 책들인 국가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던 삼국시대 책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일단 불교관련 저서나, 화랑의 역사 등 역사 서술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즉, 국왕에게 치중했던 역사 서술이 이제는 좀더 넓은 지배집단 및 일부 피지배층으로 확대된 것이지요. 이것은 이제 국왕만의 역사 편찬인 <본기> 위주의 서술을 넘어 <열전, 지, 표> 등으로 역사 서술이 넓어진 것을 뜻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형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기 시작한 것이지요.

2. 중세시대 : 최초의 역사서 삼국사기의 등장

중세시대의 역사서술은 이제 <송>나라의 유학체제를 받아들이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서들이 출현였다는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아직도 역사서술에 있어서 <바이블>은 사마천의 사기였습니다. 고려 후기 <원>에서 성리학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사기의 기전체 방식이 역사서술의 대세였지요. 하지만, 성리학이 유입된 여말,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을 통한 유교서술이 대세가 됩니다.

우선 고려 시대 사서들을 아주 간략히 다루어 볼까요?(각 사서들에 대한 구체적 포스팅들은 따로 하겠습니다.)

고려 시대 최초의 유교적 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입니다. 당시 사회는 문벌귀족 사회의 폐단으로 사회적인 불안감이 조성되었고, 여진족의 금이 강성하여 국가적 위협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고려 국왕은 김부식을 책임자로 하여 당시 훈고학 계열의 유학자 12인에게 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으로서 <유교적 통치질서와 전통> 확보를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벌귀족 사회는 묘청의 난을 겪고, 금나라와 사대외교를 하는 등 국가적 팽창력이 약회된 시기였습니다. 삼국사기는 문벌귀족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신라 중심으로 고대사 체계를 정립하게 됩니다.

이후 무신 집권기에는 사회의 혼란함을 고대 위대한 유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잘 보여집니다. 이후 몽고간섭기에는 고구려의 유산을 넘어서서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보입니다. 이것이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단계의 역사서술이었습니다.

3. 고려시대 :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유교적 합리관

고려 중기 이후 유교주의적 역사서술의 특징은 상당히 합리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대표적인 서술 방식을 보통 <무징불신의 태도>라고 합니다.

무징불신이란, 합리적인 역사서술을 위하여 문헌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지도 쓰지도 않는다는 역사 서술 태도를 말합니다. 즉, 고대적인 신화주의는 배격하고,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존중합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가 가장 잘 반영된 역사서가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또, 문헌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도 귀신의 이야기는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쓰지 않는다는 <괴력난신>, 문헌적 증거가 확실해도 합리적이지 않은 사건은 삭제해 버린다는 <필삭주의> 원칙은 중세 사서의 큰 특징입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를 통해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했던 목적은 역사에서 합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즉, 역사는 지난 날을 되돌아봐서 오늘날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 역사 서술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실을 기록할 대는 사실 자체의 서술과, 그 사실에 대한 평가는 따로 구분해야 하며, 평가도 논,찬의 형식으로 따로 적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서술할 때 <기전체>가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역사 서술의 교훈적 목적에 맞추어 다양한 서술체제가 확립되는 것도 이 시기 역사서들의 특징입니다. 실제 기전체 양식은 사마천의 사기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했지만, 원나라에서 송학이 들어온 이후 고려 후기 역사서들은 다양한 역사서술체제를 선보입니다. 중국 송에서도 자치통감의 편년체, 자치통감강목의 강목체 등이 선보였듯이 다양한 서술체제로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한 것이지요.

또,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다는 것은 다른 말로, 역사를 역사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학의 일부로 본다는 것과도 상통합니다. 역사는 유교적인 정치이념과 윤리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일종의 <거울>로서, 역사학의 목적인 현재 통치이념에 부합되는 <유교적 정당성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4. 15-16세기 조선시대 : 유교적 합리관에서 성리학적 유교관으로...

여말,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유교적인 합리관은 여말 들어온 <성리학>에 의해 성리학적 사관으로 전환됩니다. 여말의 성리학은 원대 허영의 학파에서 들어온 사관으로서 <수기치인> 중에서 <치인>을 강조하는 실용적이고, 부국강병 성향의 성리학이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가 개창하면서 새왕조는 통치이데올로기를 정비하기 위해 수많은 사서들을 편찬합니다. 일단, 고조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근원을 정리한 뒤, 성리학적 인식에 맞추어 삼국사와 고려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그 결과 삼국사략,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삼국사, 고려사 저서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사서들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고, 왕조초기 성리학적 가치기준에 맞춘 부국강병과 왕도정치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진보적인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대사에서 단군기원을 확립하고, 민족단일의식을 강조한 것이 이 시대 역사학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성종 이후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이제는 부국강병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도덕지향적인 송대 주자학이 조선 시대 역사학의 대세를 이룹니다. 이 시기의 역사서들은 부국강병보다는 사람들의 향촌자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습니다. 역사의 영역도 정도전이 주장했던 만주와 요동수복이라는 관점보다는, 한반도 내의 조선사를 좀더 강조하게 됩니다.

주자학적 역사관과 고려 합리주의적 역사관을 비교하면 가장 큰 차이점은 명분론과 합리론이라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역사학은 <무징불신>으로 대변되는 합리사관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주자학에서의 사관은 <전통과 명분>으로 대표되는 사관입니다.

예로, 중국 삼국지에서 조조의 위와 유비의 촉 중에서 어느 쪽이 정통이냐고 물었을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중세 합리적 사관을 지향하는 역사학에서는, 당시 정세와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선양으로 왕위에 오른 조비의 <위>를 전통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명분을 따지는 주자학의 사관에서는 한나라 왕실의 후손인 유씨의 유비의 <촉>이 삼국시대의 전통국가라고 볼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죠.

4. 양난이후 조선시대 : 새로운 전통과 실학의 발견

16세기 중반 이후 역사서술은 아주 큰 변화를 겪습니다. 실제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가 동요하고, 조선왕조의 체제가 급속히 붕괴됩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들은 무너져가는 왕조를 되살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붕당정치의 서인, 남인의 공조체제 형성, 비변사 체제의 형성, 대동법과 균역법 등 체제 변화 등으로 노력하면서, 사상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많은 사서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16-17세기의 정치가들은 명이 멸망한 후 <중화>의 전통이라는 것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습니다. 명은 망했고, 청이 대세인 시기에 명만이 전통이라는 <명분>만으로 사회를 이끌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 명분으로 추구했던 북벌운동도 실패도 끝났습니다. 이제는 청나라를 인정하는 <북학운동>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배워야 했고, 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명분보다는 부국강병이 필요한 시기였던 것이죠.

따라서 이 당시 역사학은 명청 교체로 인하여 중화의 전통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도통동전>을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 역사를 중국 역사의 부속물이 아니라 순수한 <정통설>로 확립하려는 시도가 많아졌고, 스스로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북벌수호운동>, <도서방위체제확립>, <양역변통> 등의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사상적으로 우리 역사의 체계를 잡으려 했던 사람들이 실학자들입니다. 이들은 단군, 기자, 고구려, 삼한 등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였으며,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른 포스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익, 정약용, 안정복 등의 고대사 시각은 이 당시 성리학 사회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음 파트에서는 1900년 대 이후 역사인식에 대하여 간략히 다루고, 이후 한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료들에 대하여 개론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중세 삼국사기부터 근대 노무현기의 사학까지를 포스팅 할 건데, 아주 가끔 다루다보니 시간은 무지 오래걸릴 것 같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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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 역사서 - 고사기, 일본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은?

고사기는 최초로 일본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고사기는 712년, 그리고 얼마후에 720년경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지요. 이 2권은 모두 덴무 천황의 명으로 제작됩니다. 덴무천황이 누구인지는 일본사이야기 7번에서 얘기했죠? 가장 유약한 왕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획득하여 일본 천황가를 중앙집권화 시킨 그 인물입니다.

보통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역사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우리 나라만 한번 찾아볼까요? 신라에서 편찬된 국사는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때 신라 왕실의 권위를 알리고, 진골귀족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도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백제의 서기도 백제가 동아시아 상권을 주름잡고, 중국 2군에 영향력을 펼칠 때, 왕실계보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덴무천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천황권 밑에서 편찬됩니다.(시작은 덴무찬황 때이지만,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끝나는 것은 후대의 천황대일입니다.) 덴무천황은 황실의 계보를 남기기 위해 전승자를 찾아서 황실계보를 암기시킵니다. 이 황실 계보를 <제기>라고 합니다. 또 <구사>라고 불리는 신화와 설화도 전승자에게 암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기시킨 내용이 이후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암기한 내용을 책으로 적으로 명하였는데, 이것이 <고사기>라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2. 고사기의 내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고사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덴무천황기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일본 천황가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중, 하의 권은 각각 중심 줄거리가 있습니다. 상권은 전설속의 신들의 이야기입니다.(이 신화이야기는 일본사 이야기 2번에서 다루었습니다.) 중권과 하권은 그 신이 천손강림을 하여 지상의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황가의 계보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단군신화와 다른 점은 당시 천손의 후예라는 천황가에서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약간 객관적 근거가 없이 적었다는 점이 좀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초기에는 고사기를 사서로 다루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 중, 하 전체를 한데 묶어 일본 신화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고사기의 편찬 목적은 진신의 난(일본사 이야기 7편 참조)을 넘긴 덴무천황이 지방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천황의 신성함을 대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따라서 이 책은 정사라기 보다는 천황가의 개인적 소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이 천황권의 전성기이자, 불교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래한 이래로 한반도 불교에서 전래된 설화들이 일본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고사기에는 많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또 이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 신화는 각종 세계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유입되어 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합니다. 즉, 중국, 한반도, 태평양,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도 많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이 주장하는 그리스 신화까지의 지역확대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 설화가 재일 많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3. 고사기의 실제 내용

상권의 내용 요약 - 일본의 신화 이야기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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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권의 내용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 신화를 가져다 베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조신 아마테리스는 해모수로, 천상계 이야기는 환인이야기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인데, 이렇게 까지 비약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신화는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일본신화가 우리나라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우리 신화는 중국이나 러시아 신화를 베낀 것이 됩니다. 사실 시기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설화는 다 공통적으로 천손의 강림, 인수교혼(동물과 사람이 결혼하는 것), 곰이 등장하는 설화가 대부분 다 나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설화를 유도했다고 보는 편이 좋지요. 또는 북방에서 설화가 차츰 남방으로 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구요.

중권의 내용 요약 - 진무천황과 신공황후(4대 천황 ~ 15대)

중권의 내용은 천손강림 이후 4대 진무천황이 신의 후손으로서 일본열도에 실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열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후 천황가가 발전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진무천황 이후 후손들 얘기는 그저 그렇고, 중요한 것은 야먀타이국의 히미코(신공황후)의 이야기입니다. 고사기에서는 진구우라는 여자로 나옵니다만, 몇 년뒤 편천된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시킵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에서의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에 각인시켰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고사기의 허황된 면을 발견합니다. 일본 천황가 이야기야 허구이든 진실이든 무시하면 되지만, 한반도 자체를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이 책이 뭐하는 책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충분한 소재거리가 됩니다. (일본사 이야기 2편의 야마타이국을 참조하세요)

하권의 내용 요약 - 16대 천황 ~ 33대 천황

하권의 내용은 16대 천황에서 33대 천황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가는 부분은 이 하권의 주요 줄거리가 야마토 정권에서의 천황가 이야기라는 점인데, 야마토 정권은 일본의 소국들이 뭉쳐서 만든 지방 호족들의 연합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천황은 그 연합정권의 수장 성격이었지요. 따라서 천황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고, 또 지방 유력 호족의 가문에서 천황이 나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 호족가문과 천황가는 권력구도에 따라 상호 결혼을 하였고, 당시 남매간에 결혼까지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유력호족가문에서 천황과 이어지는 핏줄만 있으면 그 기문소속의 천황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천황가를 휘어잡고, 불교를 수용하여 강력한 유력가문이자 천황가를 겸했던 가문이 바로 소가씨였습니다.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 참조) 특히 소가씨의 33대 천황인 스이코(소가노 아마코) 천황은 쇼토쿠 태자(소가노 쇼토쿠)와 함께 아스카 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후 소가논 집단의 멸망 부분은 나오지 않고 끝납니다. 다이카 개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4. 그럼 일본 서기는 왜 편찬한 거야?

고사기가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됩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고대 신화부터 서술하여 고대 신화가 천황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서술 방향을 잡아 천황가에 신성성을 부여해 지방호족가문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민을 지배함에 있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역사책의 차이점은 정사인가, 개인적 장서인가의 차이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가 개인적으로 보존할 개인적 장서이므로, 그 후속편이 없고, 이야기도 고대신과 천황가의 족보 연결차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분위기에서 중국식 정사와 같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이후에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등이 계속 편찬되었고, 이러한 일본의 정사들을 한번에 묶어 <육국사>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편년체입니다. 일본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육국사는 <신의 책>으로 여겨지면서, 심지어 역사가들까지도 이 책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이 육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이 그저 신성한 책으로서 이 일본서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가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신화수준인 고사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정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한반도의 역사서술 부분에서 우리나라 및 중국측의 기록과 너무 달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가 우리 역사서 및 중국사서를 참조하면서 천황가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일본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5. 그럼 일본 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역사의 논쟁점들...

신공황후기 설화 이야기도 연대 차이가 심하다.

고대 일본 천황가의 기록들은 기원후 150년 이전의 기록들이 우리 사서나 중국사서에 비해 그 연도차가 너무 큽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본 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오녀는 잔잔한 사랑이야기 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여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왕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거의 5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 설화에 나오는 망부석 이야기도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200년 이상 차이나고, 신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맞는 연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기록들이 거의 다 연대가 안 맞습니다. 대체 이 일본서기는 무슨 책을 근거로 연대를 상정한 것일까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

일본 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일본이 신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거의 말이 안되는 해석인데요. 또, 일본은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위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이야기는 고구려사 편에 아주아주 자세히 기록할 것이구요, 또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을 한국사 사료방에 전문 다 옮겨 놓았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비석 내용을 글자 몇글자 바꾸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칠지도 문제

칠지도 문제는 고대 한국과 일본사에서 큰 논점이 되는 문제중 하나입니다. 칠지도(일곱가지가 난 칼)라는 칼을 백제 부흥기 때 성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이 전해주었다는 부분의 용어가 과연 <하사하였다>인가 <바쳤다>인가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한자로 <공공>이라는 글자는 주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해석하기 따라서 하사도 되고, 바친 것도 되거든요.

우리는 당연히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당시 중앙집권화 하던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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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점들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서기에서 최소한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를 볼 때,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잘 인용안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정사에서 조차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가 섞여 있으니, 역사가들은 일본 사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잘 판단하고, 인용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일본 사서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객관적 시선에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편에서 다룰 때는 조목조목 학술적인 근거를 들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와 같이 신화적 성격으로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이만 적고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휴가라 직장을 쉽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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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고구려의 교육제도와 불교 수용

2년 여름 6월에 진나라 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太學)을 세우고 자제(子弟)를 교육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

습속에 문지기와 말먹이 따위의 집에 이르기까지 서적을 매우 좋아한다.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이라 부르는데,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힌다. 책은 오경(五經)과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범엽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와 손성(孫盛)의 진춘추(晋春秋), 그리고 옥편(玉篇)· 자통(字統)· 자림(字林)이 있다. 또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를 가장 귀중하게 여긴다.

- 구당서 열전 동이 고려 -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고사(古史)를 축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만들어 이름을 <유기>라 하였는데, 이때 와서 깎고 고쳤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

자료 참조 : 고구려 교육에 대한 사료입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대 율령반포, 불교수용을 하면서 태학을 설립하여 왕권강화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태학은 우리 나라 최초의 대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당은 초등에서 고등까지 다양한 교육을 책임지는 기관이었는데, 특히 독서, 습자, 활쏘기 등 다양한 서민교육을 하였습니다. 신집 5권은 이전의 유기를 간략히 축약하여 영양왕대 고구려의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제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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