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개화 세력의 대두와 개화 정책의 추진 
 개화파의 뿌리는 박지원, 박제가를 축으로 하는 북학파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청을 왕래했던 오경석과 같은 역관 출신의 중인들로부터 신 문물이 전파되면서 중인들도 통상개화론의 주연들로 등장하게 된다. 통상개화론자들 이후로 개화파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양무 운동(洋武運動)를 모델로 개화하고자 하는 온건 개화파문명 개화론에 입각하여 변법적(變法的)인 개화를 모색하는 급진 개화파가 그것이다.
 온건 개화파 같은 경우 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주장했던 것처럼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중심으로 깔아둔 양무 운동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청나라와 친하고 상대적으로 일본과는 감정이 좋지 않았다. 동도 서기(東道西器). 즉, 동쪽 나라의 도리와 서양의 기술이라 함은, 우리 나라는 성리학적 윤리로 도(道)는 완성에 이르렀으나 아직 기술 문물이 발전하지 못했음으로 서양의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부국 강병을 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주로 개항 이후 1880년대의 주된 개화 운동(통리기무아문, 박문국, 기기창, 우정국, 별기군 등)와 대한 제국의 광무 개혁(기술, 농업, 학교 설립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문명 개화론에 의한 개혁을 추구했던 급진 개화파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을 개화된 문명이라 여기면서 그 중간자인 일본을 반 개화된 상태로 보고 미개화 상태인(그들 생각에) 우리 나라를 개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깊은 관계를 갖고, 청을 무시하였다. 동도 서기론자들과 달리, 그들은 서양의 발전된 문물들과 함께 그들의 제도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당시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도 개혁에 힘썼다. 예를 들어보자면, 이들이 시행했던 갑신 정변과 독립협회는 입헌 군주제적인 제도를 지지하고 제도적 변화를 모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위정 척사 운동
  위정 척사(爲正斥邪)라는 말은 '바른 것(성리학)을 위하고 사악한 것(서학 : 기독교)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당시 선비들이 성리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이 제사를 모시지 않고 조상신을 귀신으로 모는 등 유교 윤리에 정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처럼 여기어졌다. 굳이 말해본다면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를 개화, 보수의 두 축으로 보수쪽이라 할 수 있다. 크게 10년 주기로 나누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1860년대 병인양요를 배경으로 쓰여진 이항로의 척화주전론은 강력하게 통상 반대를 주장하였다. 물론 척화주전론은 당시 집권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통상 거부정책과 맞아떨어져 큰 호응을 얻었다.(유일하게 정부정책과 위정척사론이 일치한 경우이다.)
  "(전략) 사학(서학)의 무리를 잡아 베게 하시고, 밖으로는 장병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케 하소서." 

- 이항로, 「척화주전론」


  1870년대
최익현1876년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면서 통상 개화가 불가능한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가면서 5불가론(소)으로 반대하였다.

"우리들의 물화는 대부분이 땅에서나는 것으로 유한한 것이고 저들의 물화는 모두 지나치게 야비하고 음란한(?♡_♡?) 노리개로, 손으로 만든 것이므로 그 양이 무궁무진합니다. (중략) 저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洋敵)입니다." 

- 최익현, 「왜양일체론」


  1880년대
2차 수신사였던 김홍집이 "일본에서" 황쭌센으로부터 받은 「조선책략」을 가져오면서 청의 말도 안되는 외교정책에 이용당하는 설움을 영남에 있는 만명의 선비의 (상)소를 통해(지금으로 보면 서명운동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하였다.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온 김홍집이 가져온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보건데 온몸에 털이서고, 눈앞이 흐려집니다.(중략) 원교(遠交 : 여기서는 미국과의 통상을 뜻한다.) 핑계로 근린(近隣 : 러시아)를 배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 같은 오랑캐입니다. 누구는 후하게 대하고 누구는 박하게 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이만손 외. 「영남만인소」

   
  1890년대 을미개혁으로 인해 단발령이 내려지고 을미사변(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로부터 시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략)... 국모의 원수 ... (후략)" 
 
  위정 척사의 의의는 통상 수교 정책처럼 반외세, 반침략에 대해 국권과 문화적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단점 또한 통상 수교 정책과 같아서,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단점도 있다.

Posted by 비회원

(근현대사 21) 광무개혁 이야기 1장

1. 광무개혁은 왜 필요했는가?

오늘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광무개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무개혁은 4-5장으로 나눠어서 다루어볼까 합니다. 1장은 광무개혁의 배경이야기, 2번째 부분은 광무개혁의 정치적 개혁과 대한국 국제, 3번째 이야기는 광무개혁의 지조발급과 경제관련 이야기, 4번째 이야기는 광무개혁 때 교육, 공업 등 사회 기반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 개혁의 특징과 한계점을 이야기 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일단 광무개혁이 실시된 것은 1897년으로, 이 시기는 앞 장에서 다루었던 독립협회의 활동 및 열강의 이권침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실시됩니다.

우선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광무개혁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야겠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은 제발 돌아와 달라는 국민들과 독립협회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환궁 요구에 감동을 받기도 하죠. 왕을 다른 나라 대사관에 두고, 다른 나라들에게 우리의 이권을 빼앗기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국민들의 강한 의지로 국왕은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을 나올 수 밖에 없었던 대외적 배경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게 되면 다른 열강 국가들은 러시아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일본과 청을 비롯된 열강들은 고종의 환궁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실제 당시의 국가 세력 관계는 어느 한 국가가 조선의 이권을 독점하는 것을 다른 국가들이 견제하는 <균점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예로, 청의 영향력이 강해진 갑신정변기에는 미, 일, 영국 등이 조선에 간섭하려 하였고, 일본이 강해진 시기에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이 삼국간섭을 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되돌리기도 하였습니다. 러시아가 강해진 시기에는 영국, 일본 등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머물기도 하구요. 어느 한 국가가 동아시아 중요 전략지인 조선을 독점하지 못하는 것은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조선은 각 국가에게 돌아가면서 이권을 빼앗기고 있었죠.

이 상황에서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합니다. 국권을 약화시킨 개혁세력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해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반포하고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죠. 당시 분위기 자체가 열강을 몰아내고 우리 스스로 자주적으로 뭔가 해보자.. 으싸으싸... 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니까요. 그러한 분위기는 이미 독립협회가 깔아놓았던 것이구요.

고종은 환궁하자마자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고, 국호는 대한제국으로, 연호는 광무라 하면서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개혁의 목표는 <강력한 전제황권>을 만들어 주변국을 몰아내고 자주국가의 위상을 달성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광무개혁의 기본 방향은 <옛 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이었습니다. 이 구본신참의 이념은 <갑오, 을미개혁>의 문제점을 바로 잡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갑오개혁이 근대화를 위한 개혁이었음은 인정할 수 있지만, 갑오개혁은 너무 성급했고, 또 일본의 의도가 많이 포함된 개혁이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개혁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을 생각했죠. 예로, 갑오개혁에서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일본의 의도가 포함된 개혁이었으니까요,

광무개혁에서는 국왕과 보수파 관료들, 측근세력들을 중심으로 황제권 1원화를 추구하고, 국왕의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서양의 법과 제도를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근대 국가를 이루려는 것이 목적이었죠.

2. 독립협회와의 마찰과 탄압...

독립협회를 다루면서 중요하게 다룬 내용은 <입헌군주제와 내각제 문제>였습니다. 특히, 서재필, 박영효 등의 주장이 광무개혁과 충돌하고 있었다는 점을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독립협회는 내각을 중심으로 서구식 의회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서구식 의회를 만들어 국민주권적인 법치국가를 만든 뒤 중추원을 내각으로 개편하여 개혁의 중심기구로 하려고 했죠.

그러나, 고종의 개혁 목적은 절대적인 왕권강화를 통한 국가 발전이었습니다. 즉, 독립협회와 광무개혁은 둘다 국가의 근대화와 발전을 위한다는 목적은 같았지만, 그 방법이 정반대였던 것이죠. 고종이 초기 독립협회를 인정하다가도, 서재필을 추방하고 박영효를 탄압했던 것, 또 관민공동회는 인정하면서도 만민공동회를 탄압하면서 해체시킨 것 등은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 때문이였습니다.(독립협회편을 참고하세요.)

따라서 대한제국의 국제 마련, 양전사업 및 지계발급과정, 상공업 육성 등의 모든 부분에서 고종과 독립협회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은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법을 제정하려 했지만, 독립협회는 내각중심의 국제를 원했습니다. 물론 후기 독립협회 인사인 남궁억 등에 의해 타협안도 나왔고, 박정양 내각이 고종의 비위를 맞추려고도 했지만, 고종은 불만족스러웠죠.

또, 대한제국에서는 왕실재정을 강화하여 왕실의 조세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왕실사무와 행정사무를 분리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마찰을 보인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국가의 강력한 법적 근거가 필요함을 생각하고, <헌법>을 구상하게 됩니다. 이래서 <대한국 국제>가 등장하고, 국가 건설방향을 황제권 강화의 방향에서 잡게 됩니다. 개혁에 대해 불만을 가진 독립협회는 해산되었고, 대한제국은 거침없는 개혁을 실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광무개혁은 성공한 개혁으로 평가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정치, 경제, 사회부분으로 나눠서 한번 사료를 통해 분석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짧은 서론이 끝났습니다. 본격적인 광무개혁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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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4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15장) 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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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12.개화기사료] - 중추원 신관제와 헌의 6조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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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19) 독립협회 이야기 서론 - 아관파천과 이권침탈

1. 아관파천이 이루어지다.

지금까지 1895년의 개혁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을미개혁은 일본의 간섭으로 진행되었고, 우리 정부는 이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의 대항마>로서 러시아를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친러파로 규정된 민비 왕후가 죽게되고, 고종은 일본의 행태을 점점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1896년 고종은 왕궁을 버리고 엄상궁의 호위아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일본이 무서웠기 때문이죠. 이 사건을 러시아의 한자 <아>와 공사관의 <관>을 따서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은 걷잡을 수 없는 주권침해를 당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일본을 무서워해 러시아에 의탁함으로서 조선은 주변 강한 나라들(열강)에게 나라의 중요한 권리들을 빼앗기게 되었죠. 흔히 말하는 <열강의 이권침탈>이 시작된 것입니다.

열강의 이권침탈은 <러시아>로부터 비롯됩니다. 러시아는 조선의 철도, 광산, 해안 등을 빼앗기 위해 청, 일본, 서양 등과 다양한 조약을 맺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이 열심히 러시아를 위해 도장을 찍어야 했죠.

일단 러시아는 일본과 조약을 맺습니다. 그 조약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본군이 조선과 요동 남부에 머물수 있다. 이에 일본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한다.
  2. 조선의 전신선에 대한 권리는 러시아가 갖는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권리가 있다.

또, 러시아는 청과도 개별적 조약을 맺고 조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습니다.

1. 청과 러시아는 일본의 도발을 막기 위해 군사적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
   2. 청은 러시아에 동청철도부설권을 주는 대신, 만주와 요동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는다.

이러한 각국과의 조약으로 러시아는 조선에서 우월한 위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고종에게 <안전을 보장>한다며 여러 가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합니다. 요점만 간단히 볼까요?

1. 러시아는 조선 국왕의 안전을 보장한다. 조선의 안녕을 위해 러시아는 군사고문과 재정고문을 파견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돕는다.(재정고문으로 알렉시에프가 오게 되어 감놔라 배놔라를 시작합니다._
   2.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전신선을 연결하며, 그 권리는 러시아에게 있다.

2. 기회균등의 원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다.

조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고, 러시아를 비롯하여 청, 일본 등이 조선의 이권을 빼앗아가면서 조선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들도 조선의 이권을 빼앗아가기 시작하죠.

일본은 석탄 창고를 만들어 그곳을 군사기지로 활용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목포를 비롯한 항구들을 차지하고 해안가 토지를 매매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광산에서 은을 채굴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은 간, 심장, 폐를 다 떼어주고 만신창이가 되기 시작하였죠.

특히 우리 이권을 빼앗는데 앞장선 나라는 고종을 납치(?)한 러시아와 갑오-을미개혁을 주도했던 일본이었습니다. 러시아가 고종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권을 빼앗아갔다면, 일본은 철도와 광산권을 빼앗아가는데 주력합니다.

일본이 철도 부설권을 원했던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상품을 탈취하고, 대륙으로 군을 수송하여 앞으로 있을 동아시아 군사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청일전쟁으로 승리를 맛보았기 때문에 군사력에서는 자신이 있었죠. 따라서 일본이 조선에 철도를 부설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한 것은 자국의 제국주의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기본체제가 <식민지에서 원료를 수입하고, 다시 식민지에 제품을 비싸게 파는> 방식이었고, 그 방식은 철도 등 운송체계와 군 수송체계가 원할해야 가능했으니까요.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돈을 주고 샀으며, 훗날 러일전쟁으로 경의철도 부설권도 러시아로부터 빼앗아옵니다.

한편, 러시아나 일본보다 대 조선 정책의 후발주자인 미국은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기회균등의 원리>를 주장합니다. <기회균등의 원리>란, 서구열강들이 중국(청)의 이권을 빼앗아갈 때 논의하여 협의한 정책이었습니다. 쉽게말하면, 중국이라는 큰 빵이 있는데 누구 한명이 그 큰 빵을 독식하면 싸움이 나기 때문에 빵을 똑같이 잘라 나눠먹어야 한다는 논리죠. 이 논리는 아시아에 비교적 영향력이 적은 미국이 주도하여 힘으로 결정한 사항입니다. 상대적으로 러시아, 일본 등 아시아계 제국주의 국가에게 열세인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 주장을 함으로서 조선은 러시아, 일본 + 서양, 구미 세력에게 골고루 이권을 침탈당했던 것입니다.

이 이권 침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농업, 수산업, 광업 등의 기초 산업이 망가지고, 외국 자본에 넘어가면서 민족 자본이 형성되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민족자본이 없다면, 국내 산업은 외국의 차관에 의해 넘어가게 되고 결국 경제적 식민지 상태가 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죠.

따라서 이러한 열강의 이권침탈에 분개하여 민족 자본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형성한 단체가 독립협회였습니다. 따라서 독립협회의 가장 큰 주장은 아관파천에 의해 자행된 만행에 대한 반발입니다. 독립협회 초기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자주적 국권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2. 러시아 등의 열강은 이권침탈을 멈추어야 한다.
   3. 서양에 뒤지지 않는 의회와 관제를 마련하여 그들이 넘볼 수 없다록 해야 한다.

자, 그럼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독립협회가 어떤 단체인지 본격적으로 들어가봅시다. 다음 장으로 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근현대사 18장) 을미개혁과 개혁의 종말

1. 을미개혁의 배경

을미개혁을 이야기 하려면 1894년의 정세부터 다시 짚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1894년의 정세를 이야기해 볼까요?

1894년 청일전쟁으로 1,2차 개혁을 주도하려했던 일본의 의도가 꺾이게 되었습니다. 전쟁중에는 정신이 없어서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못하였고, 전쟁 후에는 삼국간섭에 의해 러시아 세력에 밀리게 되었죠. 또 조선 내부에서도 일본이 너무한다라는 의견이 대두하였고, 그 결과 2차 개혁의 핵심인물로서 친일적인 성향을 가진 박영효가 쿠테타 혐의로 축출되었습니다.

삼국간섭 이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조선 정부는 일본의 라이벌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일본을 몰아낼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조선의 왕비 민씨는 고종을 설득하여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이 조선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일본이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경복궁을 점령한 사실에 민씨 정권은 한을 품은 것이지요.

조선은 러시아에 접근하기 위해 박영효 등 친일파 개혁 세력을 몰아내고 친러파로 구성된 정부를 구상합니다. 그 핵심인물이 <이완용, 이범진>이었습니다.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등은 친일파라고 해도 어느 정도 조선의 개혁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소신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완용 등의 인물은 시류에 따라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친러파, 친미파, 친일파를 두루 섭렵했으니까요. (뒷장에 나오는 독립협회 초기의 핵심간부가 이완용이라는 사실도 아시나요?)

조선이 러시아와 친해지고, 민씨가 일본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자 일본은 낭인들과 친일 군부를 동원하여 민씨 왕후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 을미 사변 이후, 일본은 이제 일본의 의도대로 조선의 3차 개혁을 실시하는데 이 개혁이 바로 을미개혁이죠.

2. 을미개혁의 내용

을미개혁은 1,2차 갑오개혁의 연장입니다. 단, 1차 갑오개혁이 대원군 세력과 동도서기 계열의 어윤중이 주도하였다면, 2차 개혁은 김홍집 내각의 박영효 등 친일적 성향의 개혁파가 주도하였습니다. 3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가장 심했던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1, 2, 3차 개혁은 모두 일관적인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일관적인 틀은 일본이 개혁에 적극 간섭하려고 하였지만, 각각의 상황에 의해 원한 바를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조선의 관료들이 주도하여 근대화를 추구하였지만 근대화의 기본 틀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요구한 개혁안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1차 개혁이 수백개의 개혁안을 쏟아내어 정신없는 개혁이었다면, 2차 개혁은 1차 개혁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홍범 14조를 발표하였고, 중앙, 지방, 사법, 교육 관제를 정비한 개혁이었습니다.

그럼 3차 개혁은? 관제를 넘어서서 서양식 제도를 받아들이는 개혁이었습니다. 일단, 개혁의 첫 번째 내용은 태양력의 사용입니다. 이 개혁이 추진된 1895년 이전에는 음력으로, 이 개혁 이후의 연도는 양력으로 표시합니다. 따라서 이 태양력 사용을 놓고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근대적 연대표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냥 연표 표기가 바뀌었다는 것 뿐 역사적으로 태양력 사용이 아주 큰 의미가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또,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난리를 쳐서 사라졌던 우정국(우체국)이 부활되어 우편사무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또, 천연두 예방접종인 종두법을 실시하기로 하였고,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사용된 연호는 <건양>이었는데,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광무>라는 연호로 바꾸게 됩니다.

3. 단발령을 내리다.

을미개혁에서 실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개혁내용은 <단발령>입니다. 머리를 깎으라는 내용이죠. 단발령이 사회에 미친 파장은 어머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머리를 깍는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도 일본놈들이 바꾼 법 때문에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양반들에게 큰 치욕이었습니다.

사극을 보면 귀하신 마님들은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리죠? 가채라고 하는 그 엄청난 무게의 말아올린 머리는 양반집 규수의 상징이었습니다. 야사에 보면, 그 머리무게를 못이기면서도 품위 때문에 그 머리를 유지하다가 목이 꺽여 돌아가신 할마마마 이야기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머리는 농사짓고 장사해야할 일반 아낙의 머리는 아니죠. 양반댁 규수들도 과연 그 머리를 깎지 않고 평생 유지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양반집 남자들은 상투를 틀죠. 조상님이 주신 머리를 깎지 않는다고 하여 머리를 묶었다고 하지만, 에어콘도 없는 여름날 어떻게 보냈을까요? 실제, 양반들도 잔머리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주변머리만 남기고, 가운데 머리를 깎아 버리면 시원하겠죠? 그런 다음에 주변 머리를 깍아 버린 가운데 머리로 올려 묶습니다. 이렇게 상투를 틀면 머리를 깎은 티도 나지 않고, 조금은 시원한 맛을 느끼면서 체통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단, 티가 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편법을 쓰지 않은 모범적인(?) 양반들이 더 많았구요. 하지만, 득실대는 이는 알아서 처리해야겠죠.

단발령이 중요한 이유는 <신체는 부모가 주셨고, 부모가 주신 몸을 훼손할 수 없다>는 양반들의 명분을 자극했다는 점입니다. 최익현은 상소를 올리고, <머리를 베어도 머리카락을 벨 순 없다>고 단발을 거부하였고, 성균관 학생들을 비롯한 생원, 진사 등 양반 유생들은 <머리를 치기 전에 일본을 쳐 없애자는> 의병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 의병운동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을미개혁(단발령)으로 일어난 을미년 3종 세트인 을미 의병입니다.

을미의병 자체가 단발령 같은 양반들의 문데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 당시 의병은 <양반중심>의 의병이었습니다. 의병장도 유인석, 이소응 등 양반출신이었죠. 실제, 농민들은 단발령 같은 것으로 의병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습니다. 농민들은 일본 자체가 싫은 것이고, 그 이유는 일본이 쌀 등 곡물을 강탈하기 때문이지 머리카락 때문은 아니였거든요.

4. 개혁 3종 세트의 공통된 결과

갑오년 1차 개혁부터 을미년 3차개혁까지 3번의 개혁은 <왕권을 약화>시키는 방향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국왕을 제외한 모두가 왕권 약화의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침략을 위해 조선의 국왕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경제와 군사적인 면에서 고종의 힘을 축소하려고 하였습니다. 개혁파 신료들도 이 점에 공감하였습니다. 당시의 근대화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입헌이라는 말에서 왕도 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군주가 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 권한이 <의회중심>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의 근대화 개혁 자체가 국왕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강화하는 <내각제>를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개혁 자체에서 조선의 국왕은 제외되었습니다. 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에서, 2차 개혁 이후는 김홍집 내각에서 개혁을 주도하였죠. 이것은 서구 근대사회의 유물은 관료제를 표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서구란, 서양에 의해 개화된 일본 관료제 모델을 말합니다.

이 개혁의 핵심은 국왕권이 약화되면서 <시민사회>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18세기 시민혁명 이래 계속된 <부르조아 또는 젠트리 위주의 자본주의>를 조선 개혁가들이 꿈꾸었던 것이죠. 대표적인 부르조아 개혁이 <갑신정변>입니다. 김옥균은 소수 엘리트 중심의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고, 국민들은 계몽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프랑스나 영국이 아니였죠.

갑오개혁 역시 부르조아적 개혁을 표방하였습니다. 조세 금납화와 일원화는 상업 자본주의를, 신분제 폐지와 과거제 폐지는 근대적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표방하는 것이었죠. 단, 일본의 군사적 의도가 개입되어 군제개혁은 미흡하였습니다.

갑오개혁이 생각한 부르조아 개혁의 핵심은 <지주계층을 토지 자본가로 육성>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개혁이란,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핵심 계층이 필요한데, 그 계층을 토지를 가진 지주로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에서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하여 <실제 농사를 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해야한다>는 원리를 무시합니다. 토지는 자본을 가진 <지주>의 것이며, 따라서 갑오개혁에서는 동학에서 요구한 토지개혁을 빠져있습니다. 포함된 것은 부세 개혁정도이죠.

갑오개혁은 영국식 자유무역체제 도입, 조세제도 정비, 신분제도 철폐, 지주제도의 발전 등을 통한 체제 개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권의 약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죠.

5. 근대화 개혁의 한계점

갑오년, 을미년의 개혁은 3가지 측면에서 큰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 개혁이 일본에게 유리했다는 점입니다. 일단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실시한 1차 개혁 이래 일본의 입김이 계속 작용하였고, 독자적인 개혁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했다는 점입니다. 이 개혁의 내용 자체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기에 딱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개혁이 지주에게 유리했다는 점입니다. 개혁의 기본 방향이 농민층보다 지주층을 옹호하고, 지주층의 발전을 통한 근대적 자본주의 확립에 중점을 주었습니다. 농민이 요구한 토지개혁은 싹~ 사라지고, 대부분의 개혁 내용이 국가체제, 사회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한 개혁이었죠. 동학 등 일련의 사태 속에서 농민들이 쟁취한 신분제 폐지 등의 개혁의 내용도 결국 근대화를 위한 필연적 요소였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이 개혁에 대해 국민적 지지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개혁에 대해 일본의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던가, 개혁의 내용이 실제 국민들의 이해관계에 절실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의문이 많았습니다. 물론, 신분제 폐지 하나만으로도 좋아할 백성들이 있었지만, 실제 양반-농민간, 지주-전호간에는 신분제 폐지에 따른 신분 변화가 크지 않았습니다. 신분상 평등하지만, 소작농이 양반지주와 겸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농민들이 혁명으로 이룬 개혁이 아니라, 지배층의 자의적인 개혁안이기 때문에 국민 대다수에게 절실히 와 닿지 못한 것입니다.

네 번째  문제점은 군제개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근대화를 모델로 했기 때문에 서양식 근대화의 핵심인 관료제도, 상비군의 정비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군대의 개혁이 소홀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간섭한 개혁인 만큼, 우리 국방력의 강화가 일본의 이해관계와 반비례했기 때문입니다. 갑오, 을미년의 개혁으로 조선의 군대는 오히려 친위대 수준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조선의 군제 개혁은 훗날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에서 대대적으로 개편됩니다.

갑오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혁이 지속되지 않고, 미완의 상태로 중단되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개혁도 법하나 만들고, 조칙 몇 개 내리고 끝나지 않습니다. 수년, 수십년을 계속해서 보완하고, 수정하고, 고쳐가야 합니다. 그러나, 을미개혁은 을미사변으로 민비왕후가 죽은 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일본을 피해버림으로서 중단되었습니다.

즉, 수백개의 법을 만들어 놓고, 국왕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1년 몇 개월 동안 법령과 몇가지 세부사항만을 남긴채 종료되어 버렸습니다.

과거제는 폐지되었으나, 과거를 대신할 근대식 학제는 학교 몇 개 만들고 사범학교 만드는 선에서 끝났습니다. 조세의 금납화가 되었으나, 세밀한 조세 항목은 미흡했습니다. 군제개혁은 흐지부지하고 을미의병으로 국가 치안은 어수선했습니다. 신분제는 폐지되었으나, 양반이 평민들을 하대하지 못할 강력한 제재는 없었습니다. 후속 조치가 없었다는 것... 당시 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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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1. 2차 갑오개혁의 배경(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은 1차 갑오개혁과 내용상의 큰 차이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차 갑오개혁은 그 추진 세력이 달랐습니다.

1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은 개화파의 성격과 보수파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1894년 7월부터 추진한 개혁은 그 개혁법안만 200개가 넘습니다. 200개가 넘는 개혁안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성급한 개화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200개의 법 이름만 외우기에도 벅찰 것 같네요.

구체적인 개혁내용은 신분제 폐지, 조세제도 개혁, 과거제 폐지 등등 근대화를 위한 핵심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안에 대한 홍보를 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었고, 1984년의 7월엔 이미 동학농민운동이래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에서 남부 3도의 행정을 관할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 9월이 넘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개혁 강요로 인하여 2차 농민전쟁이 기포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일본은 1894년 11월 농민군 및 청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제 1차 개혁을 주도한 흥선대원군 및 동도서기 계열, 조선 보수 관료 등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죠. 이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개혁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의 개혁이 바로 2차 갑오개혁입니다.

일단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고문관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개혁에 감놔라, 배놔라... 시비걸기 시작합니다. 1차 개혁의 중심세력인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을 밀어내고 비교적 친일성향의 개혁파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때 흥선대원군은 물러나게 되었고, 1차 개혁의 중심기구인 군국기무처도 폐지하게 됩니다. 일본의 목적은 청나라 세력을 확실히 제거한 뒤,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2차 개혁은 1차 개혁과 내용상 차이는 없지만, 일본의 침투에 용이한 조항과 조선 국왕권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2.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다.

일본의 개혁방침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죠. 일본은 러시아를 막기위해 연합세력을 구축한 영국의 식민지 모델 방식을 벤치마킹하였습니다.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건설을 위해 막대한 돈을 이집트에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 건설이 늦어지고 이집트 스스로 그 차관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지자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았습니다.

보호국이란, 차관(빚)을 진 나라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돈을 빌려준 나라(영국)이 그 빚을 받기 위해 해당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이집트 같은 경우 영국에 막대한 차관이 있기 때문에 돈을 갚을 때까지 제 3국이 이집트에 불평등한 경제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영국이 이집트를 보호(?)해주면서 이집트의 모든 피와 살을 뜯어먹는 형식이지요. 일본이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에 가하려고 했던 방식이 바로 이 <보호국>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2차 개혁에서 일본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주기 위한 법령>을 만들고, 일본의 고문관들을 파견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선결조건으로 일본과 친한 박영효, 김홍집 등의 친일 내각을 수립하려고 했죠. 당시 개화파인 김홍집 등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나갔던 적이 있어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선진화되는 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조선의 개화와 동시에 일본의 침략을 원할하게 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은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성장을 두려워한 <러시아의 간섭> 때문이었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자 러시아는 긴장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삼국간섭>을 하였습니다. 3나라는 일본에게 청에게 강탈한 요동반도를 다시 돌려주고, 대만 땅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였죠.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마관조약, 하관조약)을 통해 대륙진출을 시도하던 일본은 러시아의 간섭으로 청일전쟁에서 빼앗은 땅을 다시 잃게 됩니다.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지면서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은 결국 1894-1895년에 실현되지 못하고, 훗날로 넘어가게 됩니다. 삼국간섭이후 조선의 개혁은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가 주도하게 되죠. 2차, 3차 개혁을 주도한 것은 1,2,3차 김홍집 내각(김홍집, 박영효 등)이었습니다.

2. 홍범 14조를 발표하다.

2차 갑오개혁 때 발표한 홍범 14조는 1차 갑오개혁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표한 것은 2차 개혁 때였지요. 홍범 14조로 볼 때 1차, 2차 갑오개혁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내용을 한 번 볼까요?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② 왕실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 ·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③ 국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 ·비빈 ·종실 및 척신이 간여함을 용납치 아니한다.

④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⑥ 부세(賦稅)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⑦ 조세부과와 징수 및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⑧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⑨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l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⑪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⑫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⑭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홍범 14조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1조의 <청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라>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조선이 원한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청은 청일전쟁에서 밀리며 이미 조선에 대한 간섭을 이전처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이 아닌 청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조항은 <일본의 조선 침략 목적>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2-5조까지의 내용은 <왕권을 확실하게 약화시킨다>는 조항입니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들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내각제를 실시하는 것>이 서양과 같은 근대화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의 왕권이 약해져야 <조선의 보호국 정책>이 수월해지니까요.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왕권은 약화시키면서도 군제를 확실히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군제개혁은 12조의 징병제도 뿐인데, 이 항목을 제외하곤 실제 1894년 조선의 군대는 더욱 약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개혁은 군대 강화를 일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갑오개혁의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6-9조는 재정과 부세에 관한 항목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조세의 금납화 및 조세권의 일원화>이죠. 탁지아문이라는 재정 전담부서에서 부세를 걷고, 잡세를 폐지하여 농민들의 살 길을 열어준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조세의 일원화는 국왕이 재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또, 토지개혁없이 세금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농민들이 원한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농민들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잠깐 세금 깍아주는 것보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이 원하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경자유전>이란, 토지를 경영하는 자(실제 농사짓는 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부터 계속 주장되어온 내용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실현되지 못합니다.

특히 7조의 1년 회계를 예정한다는 <서구식 선예산주의>를 택한 것으로서 재정개혁의 근대화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부분입니다. 또 13조의 민법, 형법 등의 법령을 정한다는 것은, 법령위의 헌법적 성격을 가진 강령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13조의 내용은 훗날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법령을 만드는 것에 기본 근거가 되는 조항이 됩니다.

10조 이하는 신분제도 폐지, 능력위주의 인재등용 등 새로운 사회의 지침을 설명한 것입니다. 200개가 넘는 수많은 개혁 법안 중 가장 핵심을 추려 놓은 것이 바로 이 홍범 14조입니다.

홍범14조를 정치적인 면에서 본다면 <입헌군주제>가 핵심이겠네요. 왕도 법을 지키라는 것이죠. 이것은 실학자들부터 이어져 내려와, 갑신정변에서도 강조된 개화파의 개혁 핵심이었습니다.

사회적인 면에서 본다면 <신분제 폐지>가 핵심입니다. 이것은 동학 농민들이 주장했던 내용입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는 <재정 일원화와 금납화>이겠죠. 홍범 14조는 국가의 자주권부터 정치, 행정, 재정, 교육, 국민의 권리 등을 규정한 <국가 개혁을 위한 기본 방침>이었습니다.

홍범 14조는 자주독립국가임을 국가 내부, 외부에 선언한 최초의 선언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주독립은 청의 종주권을 부인한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국가 개혁 강령으로 함으로서 서구적인 입헌주의를 도입하겠다는 의지를 알린 것이며, 서양식 헌법내용을 도입하겠다는 것을 알린 최초의 선언문입니다.

3. 2차 개혁만의 독특한 법안

1차 개혁의 내용 대부분이 2차 개혁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실제, 주도 세력이 누구인가만 다를 뿐 개혁 그 자체의 본질은 다를 바가 별로 없으니까요. 단, 2차 개혁에서는 제도적인 정비가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한 번 볼까요?

먼저 중앙제도에서는 본격적인 내각제도의 법제화라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1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개혁 주체가 <내각>이 되었고, 국왕권은 허수아비가 됩니다. 1차 개혁 때는 군국기무처라는 도깨비같은 기구가 개혁을 주도했다면 이제 서구식 <내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내각으로 개편하면서 의정부와 8아문이 서양식 <~~부>로 바뀌고, 이것을 7부라고 합니다. 7개의 부가 등장했죠. 요즘으로 말하자면 행정부, 경제부, 교육부 등등이 등장한 것이죠.

다음으로 지방제도도 바뀝니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나라 지방제도는 8도가 있고 그 밑에 군, 현이 있으며, 그 아래 행정단위로 방위개념이 강한 면, 촌락개념이 강한 읍, 향촌공동체 성격의 리 등이 있었죠. 이것을 23부로 바꾸고 지방 장관이 할 수 있는 권한을 확~ 줄여 버립니다. 그 이유는 철저한 개혁을 위해 전국을 <내각 주도>로 개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또, 사법제도도 근대식으로 바꿉니다. 사법부가 왕권에서 완전 독립하였죠. 행정부는 사법부에 간섭할 수 없었고, 재판은 독자적인 재판소의 권한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재판소인 의금부, 관리감찰을 하던 사헌부, 행정재판을 보던 한성부 등의 권한은 모두 1심, 2심 재판소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재판제도의 근대화라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왕권 약화를 위한 일본의 의도였다는 점은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교육제도도 근대화됩니다.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어 교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소학교, 외국어 학교 관제가 공포됩니다. 물론 이전부터 있던 개념이긴 하지만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등등의 학명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바로 세워진 학교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2. 2차 개혁의 중단

1차, 2차 개혁은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2차 개혁은 1년, 2년, 3년 계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습니다. 2차 개혁이 중단된 첫 번째 이유는 전술했던 <삼국간섭>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이 러시아에 의해 청일전쟁 승리의 노확물을 얻지 못하자, 일본 내부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고조되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 정책에서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죠.

두 번째 이유는 개혁의 추진 세력이 친일 개혁파였기 때문에 국민적인지지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조선의 국민들은 너나 할 것없이 갑오개혁에 간섭하는 일본 세력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일본군에 대한 반감은 과거 임오군란, 갑신정변에 개입하였던 청나라에 대한 것보다 더 큰 것이었죠.

세 번째 이유는 친일 개혁파의 거두인 박영효가 1895년 6월 쿠테타를 일으키고, 국왕을 추방하려고 한다는 혐의로 추방당했기 때문입니다. 갑오개혁의 핵심은 <국왕권 약화와 내각제 강화>였습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개혁파가 눈에 가싯거리였습니다. 좋은 개혁 내용도 있지만, 개혁의 핵심은 <국왕을 물로 본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조선에서 일본식 입헌군주제는 아직 시기상조였습니다. 박영효가 반대파의 음모 또는 쿠테타로 추방되면서 일본의 <조선 보호국 정책>은 완전 실패하였고 2차 갑오개혁에서 일본이 이루려던 야망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더구나 <삼국간섭>으로 고종과 민씨 왕후는 <러시아가 일본을 견재할 수 있는 대항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을 버리고 친러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일본은 당황하였고, 반일세력의 중심인물을 <민씨>를 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1895년 여름 일본은 <민씨 왕후>를 낭인자객을 보내 무참하게 살해하고 시체를 불지르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을미개혁이라는 3번째 개혁을 강요하게 됩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을미개혁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도록 하죠.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동영상

을미사변 동영상

1895년 을미사변에 대한 3분짜리 동영상입니다. 출처가 어디인지 불분명하네요.
(역사 스페셜인 듯 한데 잘 모르겠네요.)
교육용으로만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1. 정치적 침략 못지 않게 경제적인 침략이 중요하였다.

1880년대 조선에서는 청과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초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까지만 해도 청이 조선에서 전통적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 대립은 1894년 동학운동 당시 청일전쟁 기점으로 일본에게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청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후 조선이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재하려고 하자 을미사변 등을 일으켜 조선의 주도권을 유지하였고, 1904년 러일 전쟁을 계기로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인정받습니다. 러일전쟁 직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렇게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주변 열강과 끊임없는 암투를 벌여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1880년대는 조선에서 청과 일본이 경제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제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등을 통하여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일본은, 자국의 산업혁명을 위해 조선을 철저하게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이 산업혁명을 위해 모델로 삼았던 나라가 <영국>이었고, 일본은 영국의 산업혁명 모델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공동으로 막기 위한 연대전선까지 형성하게 됩니다.

일본은 영국산 면직물을 조선에 내다 팔고, 이 차익으로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오려고 하였습니다. 즉, 농업기반의 사회를 공업기반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하는 시기에 모라자는 식량 자원을 조선에서 가져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에서는 정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산업화를 위한 추가 조약>이 꼭 필요하였습니다.

사실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에 진출한 것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확립되어 조선을 강탈할 만큼의 여유가 생겨서가 아닙니다. 일본은 조선에 진출하여 제국주의적인 무역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그 무역망을 통한 치익을 통해 서양과 같은 자본주의를 단기간에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즉, 서양이 자본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와 같은 움직임을 일본이 한 것입니다. 가장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을 모델로 하면서 그런 것이죠.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원료 공급지 확보와 제품수출을 위한 기지로 활용한 것을 일본은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과 같이 국가 경제가 견고한 나라가 아니였습니다. 일본은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당하여 근대화에 막 발을 들여놓은 나라였을 뿐이죠. 따라서 영국이 조선에 팔고자 했던 것은 자국산 공업물품이 아니라 영국산 면직물 등 수입품이었습니다. 수입품을 팔아서 차익을 남기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탈은 조선과 전통적으로 무역국이었던 청을 자극하게 됩니다.

2. 조일수호 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1876년)

일본이 1876년 조선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구체적인 경제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3개 항구를 개항하고,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한다는 정도였지요. 이러한 내용들은 강화도 조약 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잠시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보신 분은 그냥 패스!!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

자, 위의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보면 경제적인 내용이 많이 빠져있고, 중요한 경제적 합의 사항은 추후에 다시 정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맺은 직후, 같은 해 8월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부록(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을 작성하여 경제적인 침투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해 둡니다.

조일수호조규의 부록(통상토지조약)

일본국 정부는 전에 특명전권변리대신육군중장겸참의개척장관 흑전청륙 특명부전 권변리대신의관 정상성으로 하여금 조선국 강화부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대관 판 중임부사 신헌 부관도총관 윤자승에게 위임하여 일본역 명치 9년 2월 26일 조 선역병지년 2월 초 2일 쌍방이 서로 조인하고 수호조규 제 11조의 취지에 따라 일 본국 정부는 이사관 외무대승 궁본소일에게 위임하여 조선국 경성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강수관의 정부당상 조인희에게 위임하여 상호 회동하여 의정한 조약 을 좌에 개례한다.

제 1관

  차후 각 항구에 주류하는 일본국 인민, 관리관은 조선국 연해지방에서 일본국 제선이 조난하여 위급을 요할 때는 지방관에게 고하고 해지에 갈수 있는 도로를 경과할 수 있 다.


제 2관

  차후 사신 급 관리관이 발하는 문리서신을 수송하게 되면 비용을 사후변상하고 또는 조선국 인민을 고용하여 전차할수도 있으니 각종기편할 것이다.


제 3관

  의정한 조선국 통상각항에 있어서 일본국 인민이 지기를 조차하여 주거함은 각지기주와 상의하여 그 가격을 정한다. 조선국정부에 속하는 지는 조선국인민으로부터 관에 납조함과 동일한 조액을 납부하고 거주 한다. 부산초양항공사관에는 종전에 동국정부로부터 수문·설문을 설정하였으나 금후 이를 징발하고 신정의 정한에 의하여 표식을 경계 상에 설정하되 타의 이항도 역시 비례에 준한다.


제 4관

  금후 부산항에 있어서는 일본국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이정은 방파제로부터 기산하여 동서남북 각 직경 10리(조선법에 의한다.)로 정한다. 동래부중에 있어서는 이 정외라 할지라도 특별히 왕래할 수 있다. 이 이정내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자유로 통 행하고 기타의 산물 및 일본국산물을 매매할 수 있다.


제 5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조선국인민을 채악할 수 있으며 조선국인 민은 그 정부의 허가를 받으면 일본국에 왕래함도 무방하다.


제 6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이 만약 사망할 때는 적선의 지처를 선발하 여 이장할 수 있다. 단 타의 이항의 이장치는 부산이장지의 원근의 예에 의한다.


제 7관

  일본국인민은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조선국인민의 소유물과 교환할 수 있고 조선국 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일본국소산의 제화물을 매득할 수 있으니 이시로 조선국의 지정한 개항에 있어서는 인민상호간에 통용할 수 있다. 일본국인민은 조선국 의 동화폐를 사용운수할수 있다. 양국 인민으로 감히 전화를 사주하는 자가 있다면 각 그 국가의 제법률에 비추어 처단한다.


제 8관

  조선국민은 일본국민으로부터 매득한 화물 혹은 증여를 받은 제물품을 자유로 사용하 여도 무방하다.


제 9관

  수호조규 제 7조에 기재된 취지에 따라 일본국의 측량선이 소선을 내어 조선국 연해 를 측량하다가 풍우에 봉착하거나 혹은 간조로서 본선에 귀환할수 없을 시는 해처 이 정으로부터 그 근방의 인간에 안착시키고 만약 수용의 물품이 있으면 관청으로부터 변 납하고 후일 그 비용을 청산한다.


제 10관

  조선국은 아직 해외제국과 통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국은 수호 경년하여 체 맹한 제국과 우의를 보유하고 있는 관계상 금후 제국의 선박이 풍파로 곤경에 빠져 연 변지방에 포착하게 된다면 조선국인민은 모름지기 이를 수휼 않을 리가 없는지라 해표 민이 그 본국에 송환되기를 원망할 때에는 조선국정부로부터 각 항구 주류의 일본관리 관 거치하여 본국으로 송환한다. 해관원은 이를 응낙하여야 한다.


제 11관

  위 10관의 장정급 이에 첨부한 통상규칙은 모두 수호조규와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 양 국정부는 존행하여 위반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 각 조중에 만약 양국인민이 교제 무역을 실천함에 있어 장해가 있다고 인정되어 불가불 개혁 하게 될 경우에는 양국정 부는 그 의안을 속히 작성하여 일개년 전에 통지하여 협의결정하여야 한다.

1876년의 조약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조일수호조규부록>입니다. 이것은 일본인이 경제적으로 조선의 거류지 무역을 공식으로 허락받는 것으로, 조선은 더 이상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막을 합법적인 방법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같은 시기에 경제적 침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맺은 추기 규칙도 한번 볼까요?

조일 무역 규칙(1876)

1칙 일본국 상선이 입항하였을 때는 선주는 일본국 인민무역관리관이 교부하는 증서를 한국 관청에 제출하여야 한다.

2칙

일본상선이 하물(荷物)을 양륙(揚陸)하고자 할 때에는 하물의 내용과 수량등을 상기(詳記)하여 한국관청에 제출하고 하선면허를 받아야 한다.

3칙

양륙하는 하물을 한국정부관리가 검사하고자 할 때에는 이에 응해야 한다.

4칙

출하하물에 대해서도 하주(荷主)가 그 하물의 내용과 수량 등을 상세히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하물면허를 받아야 하며 하물의 검사에 응해야 한다.

5칙

일본상선이 출항 할 때에는 전일 정오까지 이를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면허를 받아야 한다.

6칙

금후 한국 제항구에서 양미(糧米) 및 잡곡을 수출입 할 수 있다.

7칙

항구로 들어오는 상선은 항세를 납입해야 한다. 단 일본정부소속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

8칙

한국정부 또는 인민이 제물품을 부개항장의 해안에 수송코자 할 때에는 일본국 상선을 고용할 수 있다.

9칙

일본국 선박이 허가없이 조선국의 항구에 내항하여 물화를 매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때에는 그 물화를 한국관청이 몰수한다.

10칙

아편의 판매를 엄금한다.

11칙

이 조약은 조인과 더불어 효력이 발생되고, 각 임원(任員)의 상의(商議)로 개정증가(改正增加)할 수 있다.

이러한 조약들로 인하여 우리는 개항장에서의 모든 일본인의 권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즉, 개항장에서 일본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고, 일본의 화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약들 속에 <무관세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이 무관세 보장에 의하여 일본이 파는 <영국산 면제품>을 막을 방법이 없게 되었으며, 일본인이 조선의 쌀을 유출하는 것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수호부록 11조에 적혀있는 <양국의 무역을 다시 조정할 때에는 1개월 전에 통지한다>는 원칙도 문제가 됩니다. 훗날 <방곡령>이 일본에 의해 저지되는 것도 이 1개월 통지 약관에 따른 것이니까요.

일본은 우리 항구인 부산 부산, 인천, 원산 등을 차례로 개항하고 조계를 설치함으로서 점차 조선에서의 경제 침투를 가속화합니다.

3. 조선의 무역 구조 -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다.

강화도 조약과 추가 경제 조약들은 <조선의 전통 경제 구조>를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서 일본 상인들이 활동하면서 1876년부터 1882년까지의 대 조선 무역은 일본이 주도해 나갑니다.

이 당시 무역은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첫 번째 무역은 일본과의 조약을 통하여 <거류지 무역>이 활성화 된 것을 뽑을 수 있습니다. 거류지 무역이란, 조약을 통해 개방한 항구와 조약으로 규정된 항구의 일정 거리 이내에서의 장사를 말합니다. 즉, 초기 조약이 항구를 개방하고 항구에서 10리까지의 무역권을 일본에 허락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 항구 10리안의 주요 포구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무역을 전개합니다.

두 번째 활성화된 무역은 <조선인의 중개무역>입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개항장에 와서 10리 안에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주로 조선에 판 것은 영국산 면제품이며, 조선에서 무관세로 가져가는 것은 쌀, 콩, 소가죽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10리 안에서 무역을 하겠다는 원칙 때문에 항구와 내륙을 연결하는 조선 전통의 상인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로, 객주, 여각으로 대표되는 전통 상인들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죠. 특히, 항구와 먼 내륙지를 이동하면서 물건을 파는 부보상들(교과서에서는 보부상으로 표기)들은 많은 돈을 벌게 되죠. 그러나, 이후 항구에서의 무역거리가 100리 이상으로 확대되고, 조청무역장정으로 외국인의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전통 상인들은 외국 상인에 의해 몰락하게 됩니다.

세 번째 무역은, 일본의 약탈 무역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물건을 반 강제로 팔기도 하였습니다.

4. 청나라의 대응 -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2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조선 무역을 독점하면서 청나라는 긴장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이 조선과 맺은 영사재판권, 화폐사용권, 치외법권, 무관세 규정 등은 조선에서의 청의 입지를 한없이 좁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1880년대 청나라는 조선의 어떤 사건만 있으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여 <청이 조선의 정치, 경제적 지배국가>라는 것을 확인하려 합니다. 또, 조선시대 이래 실제적 조공관계로 규정되던 청과 조선의 관계를 실제적 속국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임오군란 때의 청의 개입입니다. 청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출병하여 조선의 내정을 완전 장악하고, <위안스카이의 고문정치>를 시작합니다. 또,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내정을 장악하려 하자, 청불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할 정도로 많은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개화파를 완전 진압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경제적으로 일본과 동등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 뒤, 더 많은 경제적 이권을 약속받게 됩니다. 그럼 장정의 내용을 볼까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3)

전문(前文) :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황해도와 산동.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의주, 훈춘.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이 문서를 보면, 일본과 맺은 <조약>과는 달리 <무역장정>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장정은 대등한 양국의 협정문이 아니라 중국이 속방과 맺는 협정문입니다. 임오군란으로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청나라가 <경제마저 일본을 누르기> 위한 조치로 맺은 장정입니다.

문제는 이 조약에 내륙통행권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청은 일본보다 한술 더 떠서 아예 내륙지 무역까지 하겠다고 일방적인 협정을 체결한 것이지요. 조선의 경제는 이 협정에 의해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비단 청나라에게만 적용되는 협정이 아니였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거류지 무역 및 개항장 무역 만을 하던 일본 등 외국들은 이 조약을 계기로 앞다투어 최혜국 대우를 요구하면서 내륙무역을 요구하게 됩니다. 최혜국 대우는 예전에 여러번 이야기 했었죠? 최혜국이란, 어느 한 나라가 조약을 맺을 때 그 조약의 내용이 제 3국과 체결한 조약의 내용과 불리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청과 맺은 조약의 좋은 내용들은 일본 등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 역시 이러한 논리를 내세워 다시 <조일통상장정>을 다시 체결하도록 강요하였고, 이 일본과의 <장정>으로 일본과 거류지 무역권을 확보하고 조선 경제에 더욱 침투하게 됩니다. 덕분에 조선의 객주, 여각, 보부상 등 항구 100리 밖에서 중개무역을 하던 전통상인들이 크게 몰락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이 조약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외국과 조선간의 중계무역을 하던 여각, 객주 등 조선 상인들입니다. 조선 상인들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경제권은 점차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청과 일의 이 경제적 침투를 보시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왜 청과 일본이 치열하게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해야 했는지 경제적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 청과 일본은 조폭 수준으로 조선의 경제를 흔들어 놓았다.

조선과 각각 무역장정을 맺은 청과 일본은 이제 조약의 내용대로 조선 경제를 침투해 나갑니다. 요즘 뜨고 있는 무이자! 무이자! 외치는 대출광고처럼 한번 무역을 하기 시작하면 그 조약의 내용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요.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의 경제는 일본의 독무대였으나, 청의 반격으로 조선은 두 나라 사이에서 심한 경제적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조선 전역에 그 여파가 미치게 됩니다.

청나라는 그나마 조선과 비슷한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침탈적인 경제활동보다는 <우세한 자본과 대규모 인력>을 활용하는 중개무역을 주로 하였습니다. 청은 조선의 물건을 가져가기 보다는 자국의 물건을 판매하는 쪽으로 무역의 기준을 잡았죠.

그러나 산업혁명이 끝나지 않아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은 조선의 쌀, 콩을 최대한 쥐어짜서 일본에 가져가려 했고, 그 비용은 영국산 면직물을 대량 판매하는 것으로 충당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경제적 침탈은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의 대조선 영향력>이 매우 급상승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청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았죠. 청일전쟁의 경제적 배경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청일 양국이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거의 깡패수준으로 우리 포구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두모포 사건을 볼까요?

두모포 사건은 1878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정부의 관세방침과 일본의 무관세 규제가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조선정부는 포구의 대외무역이 활발해지자, 막대한 상업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조선은 두모포 등의 포구에 포구세를 걷기로 하였는데, 일본은 이것이 무관세 규정에 어긋난다면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조선정부는 두모포와 같은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는 규정과 상관없는 <조선의 내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말로 이길 수 없자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하였습니다. 즉, 일본 상인과 부산 주둔 일본 해병대가 해관을 습격하여 점령해 버린 것이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압력으로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마저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개항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장시에 대한 관세도 폐지하라고 정부를 협박하였고, 정부는 일본에 굴복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정부는 상품에 대한 직접 과세를 받지 못하자, 자릿세나 영업세 등의 부가적인 일부 세금만 징수하게 됩니다.

청과도 이러한 마찰이 있었습니다. 1886년 청나라는 모든 경제적 면에서 일본보다 우월한 지위를 요구하면서 인천 해관을 습격하기도 합니다. 우리 정부는 역시 속수무책이었지요.

이러한 청, 일본의 경제적 협박은 조선 전반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상인들은 객주, 여각 등은 강화도 조약이후의 중개무역으로 어느 정도 자본이 축척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청, 일본 상인들과 맞서 조직을 만들고 상권을 지켜나가기 위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조청수호조규의 속약(제물포 조약의 추가 협약)

제 1조. 부산, 원산, 인천항의 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제 2조.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 고종실록 권 19, 고종 19년 7월 17일 -

위 조약은 갑신정변의 결과로 맺은 제물포 조약 때 일본이 청과 대등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기 위해 맺은 속약입니다. 위 내용을 보면 일본 역시 청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자유로운 무역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청일전쟁 이후 무역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가다.

청과 일본의 대조선 무역 쟁탈전의 승자는 일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조선의 무역은 또 한차례 크게 흔들립니다.

먼저 <영국산 면제품 - 조선의 쌀, 콩>으로 이어지던 대일 무역이 더욱 강화되면서 미면교환체제가 일본의 대조선 무역형태로 확고하게 자리잡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에게 넘어갔던 대조선 무역이 일본의 독점으로 넘어간 것이지요.

특히, 청일전쟁을 겪을 무렵 1차적으로 산업화를 완성한 일본은 영국산 면제품이 아닌 일본산 면제품을 조선에 내다 팔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됩니다. 일본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면서 조선의 쌀은 더 많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쌀을 생업으로 하는 많은 소작농들이 몰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쌀을 상업적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 지주층들은 일본과 협력하여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즉, 일본의 대조선 무역이 농민층의 몰락과 지주층의 성장을 돕게 된 것이지요.

일본이 쌀을 많이 사갈수록 쌀값이 폭등하면서 농민이 망해갔습니다. 쌀을 상품으로 내댜판 지주들은 그 이익금을 토지에 재투자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식민지 지주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일제시대를 구분하는 사회구분법으로 흔히 <식민지 반봉건제도>를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조선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제국주의 일본세력>이지만,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식민지에서 토지를 가지고 돈을 번 지주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은 1889년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쌀이 부족한 북부지역 지방관들이 <방곡령>을 반포하고 일본에 쌀 수출을 금지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방곡령은 <조약 개정시 1개월 전에 통보한다>는 일본과의 조약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오히려 일본에 벌금만 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후, 농민들은 더욱 더 분노하였고, 이것은 동학농민운동의 경제적 배경이 됩니다.

7. 청이 사라진 자리를 러시아가 메꾸려 하다.

청일전쟁이후 1894년에서 1896년은 일본이 조선의 경제를 장악합니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다시 청에 할양하게 되면서 조선에도 새로운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와 친해짐으로서 일본을 견재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이 그 의도를 알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게 됩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정치권은 러시아의 영향아래 들어갔고, 철도, 산림, 광산 등의 큰 이권들은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은 10년뒤인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마저 조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모든 경제권을 손에 쥐게 됩니다.

8. 러일전쟁 후 합일합방 이전까지의 경제정책

러일전쟁 후 일본은 을사조약(1905)를 맺고, 조선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실시한 것이 바로 <차관제공> 정책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복으로 재정적으로 조선을 예속화하는 정책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화폐로 바꿈으로서 전통적 화폐를 사용한 조선 상인들을 몰락시키고,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터를 잡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화폐정책> 포스트에서 다룰께요.

화폐정리사업으로 조선의 전통적 상인들이 몰락하자, 다음으로 토지약탈을 합법화 하기 위한 다양한 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알고 범국민적으로 일본에게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자주국권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언론활동을 통하여 열강의 약탈성을 알리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를 거절하는 입장을 보였지요.

이 독립협회와 연계되어 상권수호운동을 벌인 단체가 황국중앙총상회였습니다. 이들은 시전상인을 중심으로 상업자본육성운동을 벌이면서, 각종 회사를 설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생각한 경제적 자주권이란,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일본과 대등히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좌절되었지요.

또, 일본이 빌린 차관을 갚아 버리자는 국채보상운동도 전개됩니다. 대구에서 서상돈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의 신무사들의 호응을 얻어 애국계몽운동(왜 명칭이 애국인지 모르지만, 교과서에서 그렇게 부릅니다.)과 연계되어 대대적으로 일어납니다. 양기탁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였고, 국민들이 돈을 모아 일본의 차관을 갚아 버리려고 하였지만, 결국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말죠.

오늘 포스트는 원래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만을 다루고, 몇가지 사료를 보는 선에서 쓰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서 일제시대 직전까지 전개되어 버렸네요. 뒷부분에 간략하게 다룬 이야기들은 해당 시대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아관파천을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글을 쓴 고종의 친서

- 러시아 공사관 이동을 요청하는 고종의 친서 -

지난 해 9월부터 방역 도배들이 집요하게 나를 압박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단발령으로 일어난 전국적 시위의 혼란을 틈타 나와 내 아들을 살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나는 내 아들과 함께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나 러시아 공관에서 보호받기를 바란다. 나를 구출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란 없다. 나는 두 공사가 나에게 피신처를 마련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바이다. (발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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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료는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고 자신의 몸마저 지킬 수 없는 고종의 절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이 거처를 옮길 경우, 러시아에 의해 심한 내정을 받게 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해질 것을 고종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의 장래보다는 당장 죽음이 임박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고종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고종도 격변기에 살았던 어쩔 수 없는 한 명의 인간이었을 뿐, 그 자신이 실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을 것입니다.

그림 :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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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오늘부터 다룰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입니다. 그 중 맨 처음으로 개화기의 중요한 역사적 흐름과 사건을 주제별로 묶어서 포스팅 하보도록 하죠. 오늘은 그 첫 번째로, 1860~1900년대까지 개화기의 전반적 흐름을 개관하는 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1. 1870~8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80년대의 한국사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키워드는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정부주도의 개화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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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화정책과 관련된 조선책략>

한국사회에서 1850년대는 세도정치의 여파로 각종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사회모순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또 밖으로는 서양의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가 서구의 아시아 진출로 인하여 또 다시 재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1862년에는 세도정치에 대한 대대적인 항거인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의식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하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1863년부터 딱 10년간 정권을 잡은 사람이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삼정의 문란과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재정립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가문과 양반벌족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만은 1873년에 축출되고 맙니다.

대원군을 몰아낸 명성왕후 세력은 1895년까지 조선 사회를 <개화>라는 맥락에서 이끌어갑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게 되었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개화정책이 정부주도로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1880년대의 조선 사회는 이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조선책략을 수용하여 1882년 미국과 수교를 맺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조선책략을 통한 대미수교에 대하여 양반유생들을 비릇한 전통 성리학자들은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대대적인 위정척사운동으로 연결되고, 1882년 임오군란에서도 이러한 반대논리가 표출됩니다.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이 절정에 맞이하면서 반개화세력과 마찰을 빚은 가장 큰 사건은 1884년의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급전적 개화파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세력을 개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사건이었으나 보수파와 청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는 <청>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졌고, <일본>역시 경제적인 침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는 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외세의 경제적 침략은 1889년 방곡령을 계기로 노골화되고,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청, 일본이 대립하게 됩니다.

2. 189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90년대 한국사의 키워드를 말하라고 하면 <일본이 청, 러시아를 제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90년이 되면서 한반도에서는 일본, 청이 각각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치, 경제적으로 대립하는 형세였습니다. 또, 방곡령 등을 계기로 반외세의 기운이 높아지고, 국내 정치의 문란으로 인한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층의 불만은 <임술농민봉기>가 30년이나 지난 시점에 다시 불붙고 있었습니다.

결국 1894년 농민들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농민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외세인 청,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고, 청과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직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은 일본의 입맞에 맞는 개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본은 1990년 중반을 기점으로 조선에서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잡게 됩니다. 비록, 삼국간섭에 의해 청나라에서의 주도권은 잃었지만,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갑니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개혁> 등을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고종은 1896년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버립니다.(아관파천) 이 사건으로 우리 나라는 국가의 무능력함을 대외에 크게 알리게 되었고, 결국 이 사건이 우리나라의 각종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이권수호운동 및 고종이 다시 궁으로 돌아올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됩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 이후, 환궁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후 황제가 되어 <광무개혁>을 실시합니다.

여기까지가 개화기 1860-1990년대까지의 대략적인 역사 줄거리입니다. 당시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만, <사회모순과 외세에 대한 농민의 저항과 정부의 개화정책 실패>라는 큰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럼 하나하나 개화기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그리고 중요 사건순으로 묶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화기, 그 격동의 한국사로 갑니다. 고고!!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