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문) 일본 서기에 나오는 일본과 신라의 원한 관계 관련 기사



1. 신라는 작고 추한 나라이다.

천황이 궁으로 나오셨다. (중략) 천황은 제신에게 묻기를,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신라를 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신하가 간하기를, <적은 군사로는 쉽사리 치기가 어렵습니다. 신라에 대한 원한은 오래 되었기에 쉽사리 치는 것은 안됩니다>라고 말하였다.

- 흠왕 원년 9월 5일 -

백제가 달솔 등을 보내 말하기를, <금년 7월 신라는 힘을 믿고 세력을 만들어 이웃과 친하지 않고 당나라 인을 끌어들여 백제를 전복시키고 순신을 모두 포로로 하여 거의 살아님은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 제왕 6년 9월 5일 -

천황이 지시하기를,

<신라는 작고 추한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난폭하다. 나의 은혜와 의리를 모르고, 관을 파괴하였다. 내 백성을 해치고 내 군현을 부수었다. 우리 신공황후는 영묘하고도 총명하셔서 천하를 주행하셨다. 많은 서민을 위로하고 만민을 향육하였다.

신라가 궁하여 귀순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신라왕이 살해되려는 것을 살려주고 신라에 중요한 땅을 주었다. 신라의 편을 들어 영화를 누리게 하였다.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에 박하게 대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 원한을 갖게 한 것이 무엇인가?

그럼에도 신라가 긴 창과 강한 활로 임나를 강곡하고 큰 이빨과 날카로운 손톱으로 인민을 학대하였구나.

- 흠왕 23년 6월 -

이 때 신라의 조공사 지만 등이 당나라 옷을 입고 항구에 정박하였다. 조정에서는 마음대로 복제를 바꾼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문책하여 쫒아내었다. 대신이 주상하여, <지금 신라를 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그 치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난피진에 배를 가득 띄워서 신라를 불러서 그 죄를 물으면 쉽게 굴복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 효덕 2년 -

무릇 백제와 신라의 풍속은 사망자가 있을 때 부모 형제 부부 자매라 하더라도 스스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보면 몹시 자애가 없어 금수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 성극 원년 5월 22일 -

신라는 사인을 보내 주를 헌상하였다. 그 사인은 산리가 임나를 멸하였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천황의 은혜에 배반하였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가지 않겠다고 청하였다. 그래서 머물러서 본토에 돌아가지 않았다. 천황의 백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 흠명 23년 7월 -

신라는 사인을 보내 헌상품과 주를 바쳤다. 사인은 신라가 임나를 멸하여서 천황이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히 돌아가겠다는 청을 못하고 처벌을 두려워하여 본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후에 천황의 백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 흠왕 23년 11월 -

신공황후는 남장을 하고 신라를 공격했다. 그 때 신께서 인도하셨다. 배에 따른 파도가 멀리 신라 나라 안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 왕이 마중나와 무릎을 끓고 배를 잡아 머리를 땅에 대고 >신은 금후 일본국에 계시는 신의 아들에게 내관가로서 끊이지 않고 조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일설에서 신라왕을 포로로 하고, 해변에 데려가서 무릎의 힘줄을 끊고서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일본의 사행으로 하고 돌아갔다.

그 후 신라왕의 처는 남편이 묻혀있는 곳을 모르고 혼자서 사행을 유혹할 생각을 하였다. 행을 꾀어서 <그대는 왕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을알려주면 마땅히 후하게 보답하겠다. 또 그대의 처가 되겠다>고 말했다. 행은 꾀는 말을 믿고서 가만히 시신이 묻혀있는 곳을 말하였다. 왕의 처와 국인이 공모하여 행을 죽였다.

왕의 시신을 꺼내어 다른 곳에 묻었다. 그 때 행의 시신을 왕의 묘의 흙 밑에 묻고 왕의 관 아래에 놓고, <존배의 순서는 실로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이 말을 듣고 화를 내며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군대와 선박이 바다에 가득하여 건너갔다. 신라의 국민이 모두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로 모여 공모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죄를 빌었다.

- 신공 전 12월 14일 -

일본서기에서는 신라에 대해서 불만스런 글들이 많습니다. 왜와 백제가 친선이었던 것과 반대로, 신라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한 이유는 신라가 당을 꾀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왜를 소흘히 했기 때문입니다. 천황은 신라는 <금수의 나라>라고 생각하였고, 신공황후는 신라 왕을 잡아 근육을 뽑아 죽이기까지 했다고 적어두었습니다. 신라측 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모든 진위 여부를 다 판별할 수는 없지만, 신라에 대한 글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또, 실제 역사적 기록에 비추어볼 때, 사실이 아닌 부분도 많은 듯 합니다.

사료부분 발췌 자료 : 고대한일관계와 일본서기, 최재석, 일지사(2000년)

참고자료 :
2007/08/24 - [초중고방/요청자료실] - (답변자료실) 백제 성왕이 552년 일본에 보낸 국서의 내용과 일본 불교의 수용 과정
2007/06/28 - [초중고방/교수학습 다운로드 자료실] - (다운로드) 일본고대사 1-14편까지의 긴 포스팅을 한글파일로 짧게 요약했습니다.
2007/03/08 - [동양사사료모음/동양사원문사료] - (일본 대국사전문)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문덕록, 삼대록 일본 6대 사서 원문
2007/03/08 - [동양사사료모음/동양사원문사료] - (원문사료전문) 일본서기, 속일본기 - 한문사료
2007/01/30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9 - 고사기, 일본서기의 분석(편찬 내용과 줄거리, 역사왜곡부분을 중심으로...)
2007/01/28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2 - 신화로 본 일본과 야마타이국에 대한 논쟁
2007/01/29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5 - 불교이야기 하나면 일본 고대사가 정리된다!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3.백제사료] - 일본서기 - 백제와 신라는 공물을 바치다.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사료참조서적] - 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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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료)백제 성왕이 552년 일본에 보낸 국서의 내용

1. 국서의 내용 정리

방명록에 문의하신 자료입니다. 백제 성왕이 일본에 보낸 문서에 대한 해석본입니다. 문제는 완역본을 제가 친구 빌려줘 버려서리... 완전히 한글로 된 부분이 없네요. 한자로 된 문서가 있어서 대충 해석을 했는데, 좀 이상하더라도 그냥 읽어주세요. 제가 원문을 알아서 원 뜻은 대충 통할거에요.

2. 백제 성명왕이 552년 일본에 보낸 국서 - 일본서기에 작성된 내용

흠명 13년(552) 10월, 백제 성명왕(聖明王, 성왕) 이 서부희씨(西部姬氏) 달솔(達率)인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 등을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불법을 유통시키고 예배하는 공덕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이 법은 여러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라도 오히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법은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복덕(福德)과 과보(果報)를 생겨나게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위 없는 보리(菩提)를 이루게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왕 신 명은 삼가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황제의 나라를 받드니, 기내(畿內)에 유통하시어 부처가 '나의 법이 동쪽으로 흘러갈 것이다'라고 한 가르침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이날, 천황은 다 듣고 나서 기쁨에 말씀하시기를, 백제 사인에게 조를 내리셨다.

"짐이 옛부터 지금까지 아직 이렇게 미묘한 법을 들은 일이 없다. 그러나 짐이 혼자서는 결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군신에게 하나하나 물었다.

- 니혼쇼키 권19, 흠명천황 13년 10월 -

3. 기사에 대한 해설 참조

백제 성왕 30년 10월, 노르사치계를 왜(일본서기의 대화왜)에 파견하여 불교 포교에 대해 말한 기사입니다. 그런데, 일본 서기의 내용은 이 내용에 대해 약간 사실과 다른 기술을 했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일본서기가 일본 왕실을 기준으로 한 내용이기 때문에 백제와 일본사이의 일들은 모두 <신하인 백제의 왕이 대화왜인 왜국 천황에게 무엇인가를 바치고 경의를 표하다>는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지요. 여기서도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파해 준 것을 <성왕이 글을 올려 일본에 불상 등을 헌상하였다>는 입장에서 글이 쓰여지 있습니다.

일본의 천황은 불법을 전수해준 것을 대환영(기쁨에 넘침)하면서도,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는 식으로 미룹니다. 이것은 당시 천황이 불법 전수를 단독으로 결정할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진자 가 아니였다는 점을 반영하면서, 고대 일본이 야마토 시대이후 호족 연합적인 성격이 강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백제는 오경박사나 승려 등을 파견하여 일본에 문화전파를 해 주었으며, 실제 일본서기의 기사를 다시 해석하면 말투나 분위기가 좀 바뀌어야 할 것 같네요.

4. 당시 상황에 의해 재조합된 기사라면...

만약 백제의 기록서가 남아있다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성명왕 30년(왜 흠명 13년) 10년에 성명왕은 달솔 노리사치계 등을 대화왜에 파견하였다. 성명왕은 석가상과 경론 약간을 백제에 하사하였다. 사인이 말하기를, "성명왕은 왜에게 불교를 전하며 큰 베품을 내린다. 불법으로 너희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바란다. 아울러 우리와의 관계를 계속 지속하였으면 한다." 라고 전하였다.

흠명은 대단히 기뻐하며 성명왕의 하사품을 받아보았다. 그러나 본인 단독으로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없으므로 두루 이야기한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사인에게 전하였다.

<문제는 백제의 기록서는 지금 전해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죠. 아쉬운 일입니다. 그냥 이런 내용이 아니였을까 적어봅니다.>

5. 일본의 불교 전래 문제

일본의 불교는 552년 위 문서에 기록된 시기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538년 전래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공식 전래 이전부터, 한반도 도래인들에 의해 불교가 숭배되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한반도의 불교 역시 국가가 공인하기 이전부터 이미 민간이나 왕실에서 불교를 알고 있었죠.

한반도와 일본 등 불교가 전래된 국가들의 공통점은 불교 전래 자체가 정치적인 논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중국과 먼 남방일수록 불교 전래로 인한 국왕권과 귀족권의 갈등의 골이 깊었습니다.

신라는 보편적인 왕권을 옹호하는 불교를 수용하고자 했을 때,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불교가 수용됩니다.

일본에서의 불교는 더욱 더 큰 문제를 초래합니다. 일본의 고대국가는 호족들이 연합한 야마토 정권이었기 때문에 불교의 수용 자체가 호족연합국가를 국왕일원적 국가로 재편하고자 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따라서 당시 집권 호족이었던 모노노베 일가는 불교 수용을 거부하면서 국왕에게 불교는 안된다는 건의를 올립니다. 반대로, 왕권을 옹호하는 호족세력인 소가 일가는 불교 수용을 지지하면서 국왕권 강화가 시대적 흐름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결국 흐름은 소가 일가에게 흐릅니다. 소가 일가는 불교를 수용하면서 한반도의 선진적 문화와 불교 문화를 받아들였고, 체제에 안주하는 모노노베 일가를 몰아내었습니다.

소가 일가의 소가노 우마코는 모노노베 일가를 축출하고 소가 일족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합니다. 우마코는 일본 최초의 여제인 스이코 천황을 내세워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 스이코 천황을 도와 셋쇼로서 조정을 지배하도록 허락받는 소가 일가의 황태자가 바로 <쇼토쿠 태자>입니다.

쇼토쿠 태자는 왕인, 아직기 등 고구려인과 백제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를 적극 수용하면서 왜 왕실의 중앙집권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쇼토쿠 태자는 진정한 중앙집권은 <천황중심>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뿌리이자 자신을 지원해준 소가 일가마저 몰아내고, <호족이 없는 진정한 천황 일가>를 구상합니다. 그는 관위 12개조, 헌법 17조 등을 만들고, 소가 일가를 견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하를 주름잡는 호족세력인 소가 일가를 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쇼토쿠 태자는 소가일가를 누르지 못하고 불교에 빠져 말년을 보내다가 성불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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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비에 대한 문제점 논의(종합자료)

1. 광개토 대왕릉비에 관한 이 사이트 내 검색 자료(히스토리아)

비문 전문  해석 : http://historia.tistory.com/236    
   비문 해석(한문포함) :
http://historia.tistory.com/909
   고구려의 영토 확장 :
http://historia.tistory.com/314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일부 : http://historia.tistory.com/323
   비문 위치와 내용 : http://historia.tistory.com/328

2. 광개토 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은 보통 우리가 영토를 넓힌 왕(광,개,토)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 이름은 담덕이었고,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엄청난 묘호를 쓰고 있죠. 생전에 연호는 영락으로서 보통 영락대왕이라고 합니다.

비문은 보통 3개의 단계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위 참조 자료들에도 각각 자세한 설명을 달았지만, 1부는 고구려의 건국 내역, 2부는 대외 정복과정, 3부는 수묘인 연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 비문 위치와 내용 글 참조)

3. 비문의 발견과 위조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경 중국 만주지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이 당시 만주가 가장 강성했던 국가인 청나라의 근거지라는 점입니다. 이 비석을 발견한 청은 이 비석의 내용이 자국의 수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비석의 내용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청의 근거지인 요동-만주 지역을 차지한 일본은 이 비석을 위조했습니다.(청이 먼저 위조를 했을 수도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본의 위조 이유는 임나일본부설의 침략자료로 활용하여,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를 정설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은 비문의 중요 부분들을 쪼아내어 비문을 훼손하고 석회를 발라 없는 글자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일본인 사까와는 이 위조된 비문으로 탁본을 만들었고, 이 탁본 또한 탁본을 만들때마다 약간씩 글자가 달라지고나, 먹물 농도가 달라져서 탁본 1장 1장의 내용이 다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군 참모본부가 의도적으로 비문을 위조했다는 점입니다.

4, 신묘년조의 문제점

광개토대왕릉비의 최대 논점은 바로 신묘년조입니다. 신묘년조를 위조한 목적은 일본 참모부가 일본서기(니혼쇼키)에 적혀있는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함입니다. 즉, <신공황후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여 약 200년간 경영하였다>라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과 일치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시작된 것이죠.

문제가 되는 부분을 볼까요?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과*南,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때문에 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군사가 백잔 소굴의 남쪽에 이르러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일본은 이 부분을 위조했습니다. 일본측의 위조는 일본이 백잔, 신라, 고구려를 공격하였다는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來渡海입니다. 즉, 건너와서 쳐부순 주체가 누구냐는 것인데, 그 뒤의 글자들이 지워져 있으므로 알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실제, 당시 상황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이므로 고구려가 주어가 되어야 맞습니다. 즉,

고구려가 바다를 건녀 신묘년에 왜를 쳐부셨다. 가 맞죠.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도 양국의 첨예한 대립으로 남아있는 역사상 중요한 논쟁입니다.

나머지 부분들은 위 참조 포스트들에 각각 기술되어 있습니다. 혹시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글을 읽다가 중요한 것이 눈에 띄면 바로 올릴께요.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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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 역사서 - 고사기, 일본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은?

고사기는 최초로 일본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고사기는 712년, 그리고 얼마후에 720년경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지요. 이 2권은 모두 덴무 천황의 명으로 제작됩니다. 덴무천황이 누구인지는 일본사이야기 7번에서 얘기했죠? 가장 유약한 왕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획득하여 일본 천황가를 중앙집권화 시킨 그 인물입니다.

보통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역사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우리 나라만 한번 찾아볼까요? 신라에서 편찬된 국사는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때 신라 왕실의 권위를 알리고, 진골귀족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도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백제의 서기도 백제가 동아시아 상권을 주름잡고, 중국 2군에 영향력을 펼칠 때, 왕실계보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덴무천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천황권 밑에서 편찬됩니다.(시작은 덴무찬황 때이지만,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끝나는 것은 후대의 천황대일입니다.) 덴무천황은 황실의 계보를 남기기 위해 전승자를 찾아서 황실계보를 암기시킵니다. 이 황실 계보를 <제기>라고 합니다. 또 <구사>라고 불리는 신화와 설화도 전승자에게 암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기시킨 내용이 이후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암기한 내용을 책으로 적으로 명하였는데, 이것이 <고사기>라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2. 고사기의 내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고사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덴무천황기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일본 천황가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중, 하의 권은 각각 중심 줄거리가 있습니다. 상권은 전설속의 신들의 이야기입니다.(이 신화이야기는 일본사 이야기 2번에서 다루었습니다.) 중권과 하권은 그 신이 천손강림을 하여 지상의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황가의 계보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단군신화와 다른 점은 당시 천손의 후예라는 천황가에서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약간 객관적 근거가 없이 적었다는 점이 좀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초기에는 고사기를 사서로 다루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 중, 하 전체를 한데 묶어 일본 신화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고사기의 편찬 목적은 진신의 난(일본사 이야기 7편 참조)을 넘긴 덴무천황이 지방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천황의 신성함을 대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따라서 이 책은 정사라기 보다는 천황가의 개인적 소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이 천황권의 전성기이자, 불교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래한 이래로 한반도 불교에서 전래된 설화들이 일본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고사기에는 많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또 이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 신화는 각종 세계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유입되어 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합니다. 즉, 중국, 한반도, 태평양,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도 많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이 주장하는 그리스 신화까지의 지역확대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 설화가 재일 많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3. 고사기의 실제 내용

상권의 내용 요약 - 일본의 신화 이야기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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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권의 내용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 신화를 가져다 베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조신 아마테리스는 해모수로, 천상계 이야기는 환인이야기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인데, 이렇게 까지 비약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신화는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일본신화가 우리나라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우리 신화는 중국이나 러시아 신화를 베낀 것이 됩니다. 사실 시기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설화는 다 공통적으로 천손의 강림, 인수교혼(동물과 사람이 결혼하는 것), 곰이 등장하는 설화가 대부분 다 나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설화를 유도했다고 보는 편이 좋지요. 또는 북방에서 설화가 차츰 남방으로 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구요.

중권의 내용 요약 - 진무천황과 신공황후(4대 천황 ~ 15대)

중권의 내용은 천손강림 이후 4대 진무천황이 신의 후손으로서 일본열도에 실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열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후 천황가가 발전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진무천황 이후 후손들 얘기는 그저 그렇고, 중요한 것은 야먀타이국의 히미코(신공황후)의 이야기입니다. 고사기에서는 진구우라는 여자로 나옵니다만, 몇 년뒤 편천된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시킵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에서의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에 각인시켰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고사기의 허황된 면을 발견합니다. 일본 천황가 이야기야 허구이든 진실이든 무시하면 되지만, 한반도 자체를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이 책이 뭐하는 책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충분한 소재거리가 됩니다. (일본사 이야기 2편의 야마타이국을 참조하세요)

하권의 내용 요약 - 16대 천황 ~ 33대 천황

하권의 내용은 16대 천황에서 33대 천황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가는 부분은 이 하권의 주요 줄거리가 야마토 정권에서의 천황가 이야기라는 점인데, 야마토 정권은 일본의 소국들이 뭉쳐서 만든 지방 호족들의 연합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천황은 그 연합정권의 수장 성격이었지요. 따라서 천황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고, 또 지방 유력 호족의 가문에서 천황이 나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 호족가문과 천황가는 권력구도에 따라 상호 결혼을 하였고, 당시 남매간에 결혼까지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유력호족가문에서 천황과 이어지는 핏줄만 있으면 그 기문소속의 천황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천황가를 휘어잡고, 불교를 수용하여 강력한 유력가문이자 천황가를 겸했던 가문이 바로 소가씨였습니다.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 참조) 특히 소가씨의 33대 천황인 스이코(소가노 아마코) 천황은 쇼토쿠 태자(소가노 쇼토쿠)와 함께 아스카 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후 소가논 집단의 멸망 부분은 나오지 않고 끝납니다. 다이카 개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4. 그럼 일본 서기는 왜 편찬한 거야?

고사기가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됩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고대 신화부터 서술하여 고대 신화가 천황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서술 방향을 잡아 천황가에 신성성을 부여해 지방호족가문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민을 지배함에 있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역사책의 차이점은 정사인가, 개인적 장서인가의 차이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가 개인적으로 보존할 개인적 장서이므로, 그 후속편이 없고, 이야기도 고대신과 천황가의 족보 연결차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분위기에서 중국식 정사와 같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이후에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등이 계속 편찬되었고, 이러한 일본의 정사들을 한번에 묶어 <육국사>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편년체입니다. 일본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육국사는 <신의 책>으로 여겨지면서, 심지어 역사가들까지도 이 책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이 육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이 그저 신성한 책으로서 이 일본서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가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신화수준인 고사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정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한반도의 역사서술 부분에서 우리나라 및 중국측의 기록과 너무 달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가 우리 역사서 및 중국사서를 참조하면서 천황가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일본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5. 그럼 일본 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역사의 논쟁점들...

신공황후기 설화 이야기도 연대 차이가 심하다.

고대 일본 천황가의 기록들은 기원후 150년 이전의 기록들이 우리 사서나 중국사서에 비해 그 연도차가 너무 큽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본 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오녀는 잔잔한 사랑이야기 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여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왕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거의 5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 설화에 나오는 망부석 이야기도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200년 이상 차이나고, 신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맞는 연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기록들이 거의 다 연대가 안 맞습니다. 대체 이 일본서기는 무슨 책을 근거로 연대를 상정한 것일까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

일본 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일본이 신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거의 말이 안되는 해석인데요. 또, 일본은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위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이야기는 고구려사 편에 아주아주 자세히 기록할 것이구요, 또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을 한국사 사료방에 전문 다 옮겨 놓았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비석 내용을 글자 몇글자 바꾸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칠지도 문제

칠지도 문제는 고대 한국과 일본사에서 큰 논점이 되는 문제중 하나입니다. 칠지도(일곱가지가 난 칼)라는 칼을 백제 부흥기 때 성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이 전해주었다는 부분의 용어가 과연 <하사하였다>인가 <바쳤다>인가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한자로 <공공>이라는 글자는 주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해석하기 따라서 하사도 되고, 바친 것도 되거든요.

우리는 당연히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당시 중앙집권화 하던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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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점들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서기에서 최소한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를 볼 때,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잘 인용안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정사에서 조차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가 섞여 있으니, 역사가들은 일본 사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잘 판단하고, 인용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일본 사서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객관적 시선에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편에서 다룰 때는 조목조목 학술적인 근거를 들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와 같이 신화적 성격으로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이만 적고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휴가라 직장을 쉽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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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본 일본과 야마타이 국

1. 일본의 신화

일본의 신화는 일본서기에 쓰여 있습니다. 일본서기는 니혼쇼키라고 일본식으로 많이 부르는데, 이 일본서기의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많고, 중국측 기록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으며, 특히 한반도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 부분에서는 당시 한반도 정세와 너무 안 맞아서 위작이란 말을 많이 듣기도 하고, 사료의 신빙성이 없다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일본의 정사인 만큼 이 책을 인용하여 신화를 서술해볼까 합니다. 어짜피 신화란 있었던 사실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 사회상을 알려주는 key의 역할을 하는 편이니까요.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아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 일본 고대의 야마타이국 논쟁

일본서기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여왕 신공황후가 나옵니다. 원래 일본에 히미코라는 여군장이 있었는데, 일본역사책은 이 히미코를 일본의 절대군주인 신공황후로 상정한 것이지요. 이 신공황후는 야마타이국을 이끌고 있었고 야마타이 국은 곧 일본의 야마토 조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야마타이국은 곧 야마토 지방(일본 나라현)에 있다고 믿은 것이지요. 전편에서 지도로 보았지요? 나라의 위치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일본의 고대 강국 야마타이국이라는 여왕의 국가가 어떤 성격의 국가이며, 그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일본인들도 알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사에서 고조선의 정확한 위치가 요동인지, 평양인지, 아니면 수도가 이동하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일본정사인 일본서기로 따지면 당연히 야마타이국은 야마토 정권과 연결되는 나라지방입니다. 그러나 중국책인 위지 왜인전에 기록된 일본의 위치와 방향을 따라가보면 방향이 일치하는 곳은 규슈지방(위 지도의 기타규수-나가사키 근처)입니다.

이것은 일본 고대사에 큰 숙제를 던져줍니다. 만약 야마토 지방이 일본 고대 강국인 야마타이국이라면 일본은 초기부터 여왕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려고 하는 과도기의 연맹왕국이 됩니다. 그러나 변방인 규슈가 야마타이국의 중심지라면 고대 일본은 그냥 작은 소국국가들이 있었던 수준이 되는 것이고, 야마타이국도 수많은 일본 소국 중 변방에 위치한 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일본 고대의 여왕인 히미코(신공황후)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한국사에서도 중요합니다. 왜냐면 일본서기에서는 이 신공황후가 가야를 정복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운 뒤 가야-백제남부-신라남부에 걸치는 영역을 200년간 지배했다고 나오거든요. 물론 허황되긴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기록을 꽤 많이 믿고 있습니다. 또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기사를 일본이 위조한 목적도 이 임나일본부를 정당화하기 위함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신묘년에 광개토대앙이 백제를 치고, 신라를 구원하며, 일본을 격파했다는 기사는 일본측에 의해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격파하였다는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한국 고대사에서 양국이 풀어야할 문제중 하나죠. 신묘년조 기사가 포함된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은 한국사 사료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나중에 고구려사를 풀어 쓸 때 자세히 설명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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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국사전문)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문덕록, 삼대록 일본 6대 사서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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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의 공물

두나라(신라와 백제)의 공물을 조사하였다. 신라의 공물은 진기한 것이 많았는데, 백제의 공물은 적고 천하고 불량하였다. 백제 사신 구저 등에게 묻기를,

<백제 공물이 신라에 미치지 못함은 어찌된 것인가?>라고 물으니, <신들이 길을 잃어 사비신라에 이르렀는데, 그 때 신라인들이 신들을 붙잡아 가두었습니다. 3개월이 지나 저희들을 죽이려 하기에 하늘을 향하여 저주하였습니다. 신라인들은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을 바꾸어 신의 나라 공물로 하도록 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 니혼쇼키 권9, 신공황후기 47년 4월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4세기 근초고왕기에 백제가 성장하자, 신라가 다급해진 나머지 백제와 왜가 연결되는 것을 막고 왜에 대한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즉, 신라가 백제의 공물을 가로채었다는 것은 곧 신라가 백제보다 한참이나 경제적 여건이 뒤떨어짐을 보여줍니다. 즉, 신라는 왜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경제적인 면 등에서 백제에게 뒤쳐졌고, 이후 왜는 백제와 친선관계를 더하게 됩니다. 역시 일본서기이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만 쓰여진 내용이므로 정확한 진실파악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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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쇼키(일본서기)

30권. 이 밖에 계도(系圖) 1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덴무[天武]왕의 명으로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중심이 되어 680년경 착수, 72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6국사(六國史) 중의 첫째로 꼽히는 정사(正史)로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순한문의 편년체(編年體)로 엮었으며, 편찬의 자료로는 제기(帝紀), 구사(舊辭), 제가(諸家)의 전승기록(傳承記錄), 정부의 공식기록, 개인의 수기(手記), 사원(寺院)의 내력 등을 기초로 하고, 특히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 한국의 사료(史料)와 《위서(魏書)》 《진서(晉書)》 등 중국의 사서(史書)를 병용하고 있어, 일본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저술한 역사서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서술된 한국과의 관계는 왜곡된 부분이 많아,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정복하였다는 터무니없는 대목이 있고, 또 연대(年代)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 사실이 드러나 한국 학자 중에는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고 평하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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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인보(鄭寅普)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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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문물전파 - 담징

고려왕이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바쳤다. 담징은 5경을 알고 또한 채색 및 종이와 먹을 만들 수 있었으며, 아울러 연자방아를 만들었다. 대개 연자방아를 만드는 것은 이 때 시작된 듯하다.

- 일본서기 -

자료 참조 : 고구려 문물의 일본 전파에 관련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일본서기는 4세기에 만들어진 책인데, 특히 신공황후편에 임나일본부설 관련 근거들이 많아 일본의 한반도 고대사 왜곡에 많이 이용하는 자료입니다. 문제는 이 책에 당시 <왜>라고 표기되어야 할 용어들이 당시 없었던 <일본>이라는 말로 표기된다는 점 등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아 신빙성에 문제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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