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일반)

  만약 한글이 보이지 않는다면,

  상단의 보기(v) - 인코딩(D)로 들어가서 자동선택 - 한국어(또는 유니코드)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This interactive crossword puzzle requires JavaScript and a reasonably recent web browser, such as Internet Explorer 5.5 or later, Netscape 7, Mozilla, Firefox, or Safari. If you have disabled web page scripting, please re-enable it and refresh the page. If this web page is saved to your computer, you may need to click the yellow Information Bar at the top of the page to allow the puzzle to load.

정답 확인하기!! 클릭!!!

좌우 크로스

  1. 제 2차 수신사를 이끈 인물.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에서 박영효와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
  2. 중국 기전체 정사의 시작인 <사기>를 편찬한 저자.
  3. 4세기 ~ 6세기에 왜국이 통치기구를 세워 한반도 남부 지방(경상남도 김해시 주변)을 다스렸다는 학설이다. 8세기의 역사서 니혼쇼키(일본서기)의 기록에 의존한다. 신공황후의 한반도 도래설과 관련있다.
  4. 새옹이 키운 말이라는 뜻.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는 변화는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그 이치가 감히 다 헤아릴 수 없다.
  5. 조선 초기 중앙군인 5위는, 양난 이후, 훈련도감을 비롯한 *** 체제로 전환되었다.

상하 크로스

  1. 고려말 공민왕기 권신. 신돈의 당여세력으로 정무를 장악한 뒤, 어린 우왕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원,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했으나, 권문세족의 보수적 성향이 강했다. 우왕의 명으로 최영, 이성계 등 무장들이 그를 유배시켰다.
  2. 통일신라시대 정부기관. 시중이 업무를 총괄하였다.
  3. 18세기 이래, 동학을 기반으로 한 고유 종교. 단군교로 불리기도 했으며, 어린이날 제정에 앞장선 종교이기도 하다.
  4. 프랑스 혁명기 총재정부를 쿠테타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인물.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국민투표를 통해 제 1 제정시기를 열었다. 유럽과 전쟁을 통해 제국을 건설하였다.
  5.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박영선을 통해 <종두귀감>이라는 책을 전해 받고, 종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종두법을 국내에서 사용한 인물.

This crossword puzzle was created by 히스토리아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19. 화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일본 고대사>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은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왜와 관련된 내용들 중 일부입니다.

- 한서지리지(반고)

기원전후 왜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100여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왜에서 낙랑에 조공을 바쳤다

- 후한서 동이전 : 1-2세기 묘사

왜의 노국왕이 후한에 사신을 보내 광무제에게 인수 받다

왜의 스이쇼 국왕이 안제에게 노예 160인을 바치다

소국간 다툼이 심하여 전국적인 대란이 일어나다

- 삼국지 위지 왜인전(진수) : 3세기 묘사

왜의 대란에서 살아남아 30여개 국을 지배할 정도로 __________의 여왕 히미코가 성장하다

히미코는 위에 사신을 파견하고 다시의 구리 거울과 친위왜왕의 칭호를 얻다.

히미코 사후 __________은 혼란에 빠지나 여왕 이요가 왕위에 오른 후 안정을 찾다

이요는 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1. 위 지문의 빈 칸에 들어갈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위 국가는 여러 호족들과 연합한 호족연합국가의 성격을 띄었다.
② 위 국가의 위치는 야마토라는 설과 규수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으며, 기록의 부재로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③ 일본 서기에서는 위 국가의 히미코 여왕을 신공황후라고 부르고 있다.
④ 일본 서기에 따르면 위 국가는 한반도에 진출해서 임나일본을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⑤ 히미코 여왕은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을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하려고 했다.

 

2. 다음은 일본 고대 불교에 대한 설명입니다.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538년, 백제의 성왕이 노리사치계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일본에 보내었다. 그러나, 모노노베 가문은 <조상신의 분노를 산다>는 이유로 불교의 공인을 거부하였다. 상대적으로 불교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소가 가문은 불교를 통한 중앙집권과 가문 독재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소가 가문이었지만, 이단자였던 (1)________ 태자는 최초의 일본 여제였던 스이코 천황을 대신하여 셋쇼정치를 하였다. 그는 고구려와 백제의 스승을 모시고, 불교와 율령을 받아들여가며 소가 가문이 아닌 천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가야가 멸망한 이후, 가야 유민 및 삼국의 불승들이 일본에 새로운 불교문화를 정착시켰다. 그것이 최초의 불교 문화였던, (2)________ 문화였다. 호류사의 백제관음상은 7c 일본 불교의 절정을 보여준다.

8c에는 당과 통일신라의 불교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3)_________ 문화가 유행하였다. 국제적이고, 힘있는 국가들의 문화는 일본 문화에도 활기를 주었다. 이후, 진무 천황은 주변국의 국제적, 귀족적인 문화를 이어받아 더욱 활기찬 불교문화를 이끌어갔다.

헤이안 시기엔, 헤이안 천도를 반대한 구카이가 밀교(진언종)를 들여와 만다라상, 부동명왕상 등이 유행한다. 그러나 10c 후지와라 가문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독자적인 일본의 불교 문화를 추구하면서 그동안 15회나 파견했던 (4)_________ 도 폐지하였다.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일본 불교는 11세기 이후, 아미타 신앙이 확대되면서 지방에 까지 퍼지기 시작한다. (5)____________ 은 지방세력들에게 유행하면서, 선종과 함께 새로운 시기를 준비하는 종교였다.

 

2. 위 지문의 빈 칸에 들어갈 용어가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쇼토쿠
② 아스카
③ 하쿠호
④ 견수사
⑤ 정토종

 

3. 다음은 일본 고대 율령 체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음에 답하세요.

(1) 645, 다이카 개신 : 나가노 오에 황자의 쿠테타로 소가 가문을 제거하고 천황중심 신정부가 건립되다.

(2) 646, 개신의 조 : 호족이 소유한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의 토지로 규정하다.

(3) 672, 진신의 난 : 호족세력을 이용하여 즉위한 덴무 천황이 호족 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진하기 위해 고사기, 일본서기를 편찬하다.

(4) 701, 다이호 율령 : 중국식 조용조 제도를 실시하여 백성을 국가에 귀속시키려 하다.

(5) 743, 간전영년사재법 : 개간한 모든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다.

 

3. 위 지문의 1-5번까지의 내용을 설명한 것 중 옳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다이카 개신 이후에도 당의 율령체제를 답습하기 위해 수차례의 견당사를 파견하였다.
② 개신의 조는 통해 행정, 군사, 교육, 세법, 호적작성 등 백성들을 제민체제로 끌어들이기 위한 변법과 같은 성격이였다.
③ 일본서기는 천황가의 개인 서장용으로, 고사기는 국가통치지침으로 만들어졌으며, 공통적으로 천황가의 신성함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④ 다이호 율령 때 양천제를 바탕으로 토지제도인 반전수수법을 시행하였다.
⑤ 간년영전사재법으로 토지사유화가 인정되어, 일본식 장원제도와 봉건제도를 실시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4. 다음은 일본 고대 율령 체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음에 답하세요.

 

4. 위 그림은 간전영년사재법 이후 성립된 10-12세기 장원입니다. 위와 같은 장원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골라보세요.
① 황실과 연관된 유력 귀족들이 직접 토지를 경영했다
② 조정의 관리들은 장원에 출입할 수 있었고, 세금을 걷었으므로 서양과 같은 불입권, 불수권은 없었다
③ 유력농민들은 명목상으로 귀족들에게 개척 토지를 기부하는 형식으로 국가의 간섭을 피하려고 했다.
④ 토지를 직접 경작한 하층민은 모두 노예였다
⑤ 토지를 개발한 재력을 가진 자들은 사무라이 계급과 대립하였다

 

5. 다음은 일본 초기 막부에 관련된 용어입니다.

- 정의 : 가마쿠라 막부에서 비롯된 쇼권과 주종관계에 있었던 무사의 총칭

- 등장 배경 : 초기엔 쇼군 미나모토와 일반무사사이의 개인적 쌍무관계였으나, 가마쿠라 막부 성립 되면서 제도로서 고정되었다.

- 내용

1. 자신의 영지를 개간해 토지가 있는 개발영주가 충성을 맹서한 뒤, 영지 소유권에 대한 공문서를 받는다.

2. 교토에서 황실의 경비, 쇼군 저택 경비, 쇼군에 대한 노역, 전시 군역 등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부역을 담당할 만큼의 영지와 재력이 있어야만 했다.

3. 분할상속 원칙으로 점점 영지가 영세화 되어 무로마치 막부 이후 본래의 취지가 사라져갔다.

4. 에도 막부에서는 쇼군을 직접 만날 수 없는 막부의 하급 신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5. 위 지문과 관련된 용어로 가장 적절한 것을 골라보세요.
① 쇼군         ② 고케닌         ③ 셋쇼         ④ 칸바쿠         ⑤ 원청         ⑥ 다이묘         ⑦ 사무라이
⑧ 지토         ⑨ 슈고            ⑩ 신판         ⑪ 후자이         ⑫ 도자마      ⑬ 죠닌            ⑭ 고쿠후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일본의 고대 역사서 - 고사기, 일본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은?

고사기는 최초로 일본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고사기는 712년, 그리고 얼마후에 720년경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지요. 이 2권은 모두 덴무 천황의 명으로 제작됩니다. 덴무천황이 누구인지는 일본사이야기 7번에서 얘기했죠? 가장 유약한 왕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획득하여 일본 천황가를 중앙집권화 시킨 그 인물입니다.

보통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역사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우리 나라만 한번 찾아볼까요? 신라에서 편찬된 국사는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때 신라 왕실의 권위를 알리고, 진골귀족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도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백제의 서기도 백제가 동아시아 상권을 주름잡고, 중국 2군에 영향력을 펼칠 때, 왕실계보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덴무천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천황권 밑에서 편찬됩니다.(시작은 덴무찬황 때이지만,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끝나는 것은 후대의 천황대일입니다.) 덴무천황은 황실의 계보를 남기기 위해 전승자를 찾아서 황실계보를 암기시킵니다. 이 황실 계보를 <제기>라고 합니다. 또 <구사>라고 불리는 신화와 설화도 전승자에게 암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기시킨 내용이 이후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암기한 내용을 책으로 적으로 명하였는데, 이것이 <고사기>라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2. 고사기의 내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고사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덴무천황기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일본 천황가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중, 하의 권은 각각 중심 줄거리가 있습니다. 상권은 전설속의 신들의 이야기입니다.(이 신화이야기는 일본사 이야기 2번에서 다루었습니다.) 중권과 하권은 그 신이 천손강림을 하여 지상의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황가의 계보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단군신화와 다른 점은 당시 천손의 후예라는 천황가에서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약간 객관적 근거가 없이 적었다는 점이 좀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초기에는 고사기를 사서로 다루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 중, 하 전체를 한데 묶어 일본 신화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고사기의 편찬 목적은 진신의 난(일본사 이야기 7편 참조)을 넘긴 덴무천황이 지방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천황의 신성함을 대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따라서 이 책은 정사라기 보다는 천황가의 개인적 소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이 천황권의 전성기이자, 불교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래한 이래로 한반도 불교에서 전래된 설화들이 일본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고사기에는 많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또 이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 신화는 각종 세계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유입되어 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합니다. 즉, 중국, 한반도, 태평양,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도 많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이 주장하는 그리스 신화까지의 지역확대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 설화가 재일 많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3. 고사기의 실제 내용

상권의 내용 요약 - 일본의 신화 이야기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이 상권의 내용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 신화를 가져다 베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조신 아마테리스는 해모수로, 천상계 이야기는 환인이야기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인데, 이렇게 까지 비약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신화는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일본신화가 우리나라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우리 신화는 중국이나 러시아 신화를 베낀 것이 됩니다. 사실 시기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설화는 다 공통적으로 천손의 강림, 인수교혼(동물과 사람이 결혼하는 것), 곰이 등장하는 설화가 대부분 다 나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설화를 유도했다고 보는 편이 좋지요. 또는 북방에서 설화가 차츰 남방으로 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구요.

중권의 내용 요약 - 진무천황과 신공황후(4대 천황 ~ 15대)

중권의 내용은 천손강림 이후 4대 진무천황이 신의 후손으로서 일본열도에 실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열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후 천황가가 발전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진무천황 이후 후손들 얘기는 그저 그렇고, 중요한 것은 야먀타이국의 히미코(신공황후)의 이야기입니다. 고사기에서는 진구우라는 여자로 나옵니다만, 몇 년뒤 편천된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시킵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에서의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에 각인시켰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고사기의 허황된 면을 발견합니다. 일본 천황가 이야기야 허구이든 진실이든 무시하면 되지만, 한반도 자체를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이 책이 뭐하는 책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충분한 소재거리가 됩니다. (일본사 이야기 2편의 야마타이국을 참조하세요)

하권의 내용 요약 - 16대 천황 ~ 33대 천황

하권의 내용은 16대 천황에서 33대 천황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가는 부분은 이 하권의 주요 줄거리가 야마토 정권에서의 천황가 이야기라는 점인데, 야마토 정권은 일본의 소국들이 뭉쳐서 만든 지방 호족들의 연합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천황은 그 연합정권의 수장 성격이었지요. 따라서 천황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고, 또 지방 유력 호족의 가문에서 천황이 나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 호족가문과 천황가는 권력구도에 따라 상호 결혼을 하였고, 당시 남매간에 결혼까지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유력호족가문에서 천황과 이어지는 핏줄만 있으면 그 기문소속의 천황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천황가를 휘어잡고, 불교를 수용하여 강력한 유력가문이자 천황가를 겸했던 가문이 바로 소가씨였습니다.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 참조) 특히 소가씨의 33대 천황인 스이코(소가노 아마코) 천황은 쇼토쿠 태자(소가노 쇼토쿠)와 함께 아스카 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후 소가논 집단의 멸망 부분은 나오지 않고 끝납니다. 다이카 개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4. 그럼 일본 서기는 왜 편찬한 거야?

고사기가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됩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고대 신화부터 서술하여 고대 신화가 천황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서술 방향을 잡아 천황가에 신성성을 부여해 지방호족가문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민을 지배함에 있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역사책의 차이점은 정사인가, 개인적 장서인가의 차이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가 개인적으로 보존할 개인적 장서이므로, 그 후속편이 없고, 이야기도 고대신과 천황가의 족보 연결차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분위기에서 중국식 정사와 같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이후에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등이 계속 편찬되었고, 이러한 일본의 정사들을 한번에 묶어 <육국사>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편년체입니다. 일본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육국사는 <신의 책>으로 여겨지면서, 심지어 역사가들까지도 이 책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이 육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이 그저 신성한 책으로서 이 일본서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가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신화수준인 고사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정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한반도의 역사서술 부분에서 우리나라 및 중국측의 기록과 너무 달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가 우리 역사서 및 중국사서를 참조하면서 천황가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일본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5. 그럼 일본 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역사의 논쟁점들...

신공황후기 설화 이야기도 연대 차이가 심하다.

고대 일본 천황가의 기록들은 기원후 150년 이전의 기록들이 우리 사서나 중국사서에 비해 그 연도차가 너무 큽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본 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오녀는 잔잔한 사랑이야기 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여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왕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거의 5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 설화에 나오는 망부석 이야기도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200년 이상 차이나고, 신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맞는 연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기록들이 거의 다 연대가 안 맞습니다. 대체 이 일본서기는 무슨 책을 근거로 연대를 상정한 것일까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

일본 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일본이 신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거의 말이 안되는 해석인데요. 또, 일본은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위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이야기는 고구려사 편에 아주아주 자세히 기록할 것이구요, 또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을 한국사 사료방에 전문 다 옮겨 놓았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비석 내용을 글자 몇글자 바꾸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칠지도 문제

칠지도 문제는 고대 한국과 일본사에서 큰 논점이 되는 문제중 하나입니다. 칠지도(일곱가지가 난 칼)라는 칼을 백제 부흥기 때 성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이 전해주었다는 부분의 용어가 과연 <하사하였다>인가 <바쳤다>인가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한자로 <공공>이라는 글자는 주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해석하기 따라서 하사도 되고, 바친 것도 되거든요.

우리는 당연히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당시 중앙집권화 하던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힙니다.

-----------------------------------

이러한 논점들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서기에서 최소한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를 볼 때,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잘 인용안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정사에서 조차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가 섞여 있으니, 역사가들은 일본 사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잘 판단하고, 인용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일본 사서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객관적 시선에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편에서 다룰 때는 조목조목 학술적인 근거를 들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와 같이 신화적 성격으로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이만 적고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휴가라 직장을 쉽니다. 하하하...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글을 퍼가실 땐 댓글을 남겨주시는 것...인터넷 문화의 기본입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일본의 임나부 지위 인정 요청

흥이 죽자 아우 무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니, 순제 승평 2년에

<사지절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제수하였다.

- 송서 권 57, 이만, 왜국 -

비가 죽자 경이 즉위하여 세조 대명 원년(457)에 사신을 보내어 제수를 요청하니 조칙을 내려 허락해주었다.

- 송서 권 57, 이만, 백제국 -

사료해석 : 위 1번째 사료는 5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정치적 균형을 이루는 시기에 왜가 백제를 통하지 않고 중국 남조와 직접 교역을 하려 했던 증거입니다. 왜는 남조 왕조들에게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영도적 지위를 인정해야 함을 강요합니다.

중국 남조의 사서에는 찬, 진, 제, 흥, 무로 이어지는 일본 5왕의 이름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임나 일본부설의 주요한 근거로 작용될 수도 있는 사료가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사료는이러한 일본의 중국 접촉에 대하여 백제의 견제를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백제는 집요하게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어 대중국 교역에서 백제가 주도적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달라고 계속 요청하는 사료입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인보(鄭寅普)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포상 8국의 난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먼저 4세기에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 등에 의해 타격을 입어 중계무역의 주요 루트가 끊겼다는 점입니다. 고대 상업권은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와 서로 차지하려고 무단히 애쓰던 대동강이 중계무역권이었습니다. 그 중계무역권을 장악하던 가야는 주요 무역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백제 및 왜와 연결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죠.
 
  금관 가야의 세력이 위축되고, 중계무역의 타격이 커지자 거제도 등 남해 지방에 있었던 8개의 소국들이 금관 가야의 지배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들 8개 소국들을 통칭하여 포상 8국이라고 부릅니다.

   초기에 금관가야는 왜와 연결하여 무역경쟁국인 신라를 견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관 가야가 위로는 아라 가야로부터 아래로는 포상 8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게되자 201년에 신라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게 되었죠. 결국 금관 가야는 신라의 도움으로 6 가야의 맹주국 위치를 다시 찾고, 포상 8국의 독립 의지를 꺽고자 하였던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신라는 김해 지방에 군사를 파견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라가 김해 지역에 진출하려면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와서 장산국이 있는 해운대를 거쳐서 김해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산국은 포상 8국과 연계하여 김해의 금관 가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습니다. 이러한 장산국을 그대로 놔두고 신라군이 김해로 진출하면 중간에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고, 장산국은 장산의 정상 부근에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죠. .

  따라서 신라군은 장산국 정벌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신라는 어느 해 가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기장에서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습니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는 사신을 장산국에 보내서 감사의 선물을 바치고 물러갔죠. 이러한 군사 훈련을 매년 가을마다 수행하자 어느덧 장산국에서는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갑자기 5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장산국을 기습하여서 멸망시켰습니다.

  209년 7월에는 포상 8국이 금관 가야를 침공하였고, 이에 신라는 내해왕이 태자를 중심으로 대병을 파견하여 금관 가야를 도왔습니다, 이때 잡힌 포로가 6천명에 이르렸다고 하니 이 전쟁도 큰 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 전쟁을 가르켜 삼국사기에는 포상 8국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상 8국의 난이 평정된 후의 금관 가야는 신라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가야 연맹은 점차 쇠약해지게 되었죠.
 

   가야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왜와 연결을 시도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넘어온 왜를 격퇴하고, 가야까지 침공하면서 전기 6가야 연맹의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를 왜곡하고, 그것을 예로 들어 일본이 가야 또는 백제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 가야사에 있어 일본이 점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김해 가야문화복원 1단계사업


스에키 : 5세기 후반부터 10세기에 만들어진 고대의 토기

이 토기를 만들때, 기술과 직인이 한반도에서 수입되었다.
백제 유물이 많은 일본 미야자키현 난고촌 곳곳에서
출토되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