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역사 사이 : 이야기 기독교사 (3)

수메르 신화와 서아시아의 상황

- 신화로 알 수 있는 것들...

원래 신화란 단어는 두 단어가 있답니다. Mythology도 신화이고, Theology도 신화란 단어입니다. 그런데, 두 단어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Mythology는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알고 그 신들을 만들어낸 인간들이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를 알아보는데 중점을 둔답니다.

즉, 우리나라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신의 이미지는 무엇이고, 그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단군이 펼치려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아본다면 그것이 바로 Mythology라는 신화를 뜻하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Theology라는 단어는 조금 의미가 다르답니다. 이 단어는 신화를 이해하고 이야기로 구성하기 보다는 <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밝히려고 한답니다. 즉,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신화가 아니라 신의 관점에서 보는 신화를 말합니다. 그래서 Theology라는 단어는 신화라는 뜻과 함께 <신학>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한번 대입해 볼까요? 우리가 이야기 하려는 수메르 신화는 신화를 통해서 최초의 문명을 살았던 서아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를 찾아내려는 것입니다. 이것아 바로 신화 이야기인 Mythology인 것이죠.

하지만, 나중에 중점적으로 다룰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야기는 <신의 섭리>가 무엇인지를 찾고, 신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맞춰서 <신에게 은총을 받을 것인지>를 추구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신의 이야기를 찾는 신화, 즉 Theology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Theology는 신의 섭리에 맞춘 인간의 행동양식이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의 행동이나 생각을 역사적으로 구성할 경우, 반종교적인 이야기로 흐를 수가 있답니다. 그래서인지 중세시대에 <인간을 기준>으로 했던 Theology 이야기는 대부분 이단으로 취급받곤 했습니다.

자, 하지만 당분간 여기서는 Mythology 이야기를 할 것이기 때문에, 아직 걱정거리는 없답니다. 그럼 간단하게 수메르 신화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요? 먼저, 지난 시간에 보았던 신들의 계보 사진을 더블 클릭해서 크게 한번 펼쳐보세요.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으로 크게 볼 수 있답니다.)

자, 일단 주신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겠죠?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는답니다. 일단 하늘과 땅이 이들에게는 세상의 중심이네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주신인 안에게는 또다른 부인이 있습니다. 바로 지하수의 신인 남무입니다.

자, 수메르인들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라는 두 강의 범람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습니다. 강 근처의 도시국가가 아니라면, 가뭄에 의해서 물이 고갈되는 것이 가장 무서웠겠죠. 따라서 지하수의 신은 하늘의 신과 땅의 신 못지 않은 존재입니다. 일부 점토판에서는 지하수의 신이 하늘의 신의 어머니라고 표현되기도 한다는군요.

하늘과 땅의 신이 만나서 낳은 자식은? 바람의 신인 엔릴이랍니다. 대지와 지하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바람이었겠죠. 특이하게도 당시 강력한 도시국가인 키쉬가 산자락에 있었기 때문에 산기슭의 신 역시 엔릴과 같은 서열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신은 지하수의 신인 엔키랍니다. 엔키는 인간의 창조주로서 인간사에 관심이 많았고,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많은 신들을 출생시킨 장본인이죠. 샤먼의 신을 낳기도 했고, 양치기와 포도주의 신을 낳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양치기와 포도주의 신은 왜 나왔을까요? 당시 서아시아에서 중요한 물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정답>이니까요. 초창기 문명사회에서 유목이 매우 중요했고, 포도 재배가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신화가 보여주고 있답니다.

그 외에 농경과 목축 사회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신들이 대부분 나옵니다. 태양과 달의 신, 전쟁과 죽음의 신 등이 있죠. 특히 태양신은 정의를 상징하고, 달의 신은 사랑과 질투를 상징합니다. 일반적으로 다신교에서는 태양이 광명을, 달은 미와 질투를 상징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예로 들면 태양신 아폴로는 정의감이 넘치고, 달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미의 상징입니다. 학자들은 수메르 신화가 그리스 신화에 많은 영향을 준 점을 감안하면 아예 연관이 없지는 않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양과 달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연관성을 확실히 따져야 할 것 같습니다.

1. 지하수의 신 엔키와 대홍수 이야기

수메르 신화가 나온 기원전 3000년경은 히브리 시대로 계산하면 아직 아브라함(기원전 2040년)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이며, 최초의 인류인 아담이 등장하는 전후 무렵의 시대입니다. 점토판에 새겨진 이 신화의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답니다.

하늘의 신 안과 땅의 신 키와의 사이에 엔릴과 닌후르쌍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안은 지하수의 신 남무와의 사이에서도 엔키라는 지혜의 신을 낳았습니다.

원래 세상에는 인간이 없고 신들만이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힘없는 신들은 먹고 살기 위해 직접 일을 해야 했고, 아눈아키라고 불린 큰 신들은 작은 신들을 감시하면서 일을 부려먹었답니다. 그럼 이 힘없고 빽없는 신들이 한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범람한 뒤 쌓인 진흙들을 파내고, 비옥한 토지로 바꾼뒤 열심히 농사를 짓는 일이었죠. 이렇게 되자 작은 신들은 지하수의 신인 남무가 낳은 엔키를 욕하기 시작했답니다. 물과 지하수를 담당하는 남무와 엔키 때문에 힘없는 신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어느 날부터 작은 신들은 금속기로 만든 연장들과 진흙을 담는 바구니를 버리고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하늘나라 최초의 노사갈등이 시작된거죠.

그러자 엔키는 어머니 남무와 상의해서 신들의 일을 대신할 노예들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엔키는 흙을 빚어서 출산의 여신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파업을 주도한 웨일라를 잡아죽여서 그의 피를 흙과 섞어서 출산의 여신들의 힘으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들은 모두 기뻐했고, 엔키는 창조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이라는 존재는 열심히 농사를 짓고 강의 범람을 막은 뒤 그 수확물을 신들에게 바쳐야 했답니다. 인간세상은 신관이라는 무당이 존재했고, 신관, 즉 왕(족장)은 신들에게 충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점차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마을을 만들었고, 신이 배급해주는 곡식을 먹으며 살았답니다. 하지만, 인간들도 옛날 작은 신들처럼 노동에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노동은 인간이 하는데 그 수확물을 다 빼앗기는 것이 억울했던 것이지요. 그 때, 하늘의 최고신은 안의 장자인 바람의 신 엔릴이었는데, 엔릴은 큰 비바람을 일으켜서 홍수로서 인간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합니다.

그러자 엔키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살려주기로 생각했답니다. 그는 신관인 <짜라투스트라>의 꿈에 나타나서 큰 배를 만들어서 동물들과 식물들의 씨앗을 태우도록 지시했습니다. 이후 일주일간의 대홍수가 있었고, 신관은 살아남았습니다. 엔키는 충실한 신의 노예인 짜라투스트라를 살려줄 것을 엔릴에게 부탁했고, 그 부탁이 받아들여지면서 다시 지상에 인간들이 채워지게 됩니다.

구약에서 큰 사건으로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사실 당시 서아시아 뿐 아니라 강을 배경으로 등장한 문명들에서는 단골로 나오는 신화입니다. 특히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와 같은 지역에서 홍수 이야기가 큰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지역의 강의 범람이 주기적이지 않고 두 강이 존재함으로서 가뭄과 홍수를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아시아 지역의 홍수 신화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태운 동물과 식물, 제물을 바치는 내용까지 대부분 일치합니다. 그러나 홍수 신화가 전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신화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구약에서의 홍수 신화가 수메르 신화에서 100% 가져온 것인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2. 저승으로 건너간 신의 이야기

홍수로 인간세상을 없애려고 했던 바람의 신 엔릴은 그의 아내 닌릴을 차지하기 위해서 저승의 신들을 만들었답니다. 원래 릴(lil)은 바람이란 뜻으로 엔릴과 닌릴은 모두 바람의 신입니다.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바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엔릴과 그의 부인은 '같은 대상'에게 바람을 피웠던 신이기도 합니다.

엔릴은 닌릴을 차지하기 위해서 강에 배를 띄우고 닌릴을 태운뒤 강제로 그녀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신이 바로 달의 신인 난나입니다. 신들의 회의에 참석한 50명의 아눈아키라는 큰 신들은, 엔릴의 성범죄 사실에 분노하여 그를 도시에서 추방했답니다. 다른 지역의 신화와는 다르게 수메르 신화에서는 성범죄만큼은 단호하게 처벌했습니다.

엔릴은 추방되자 닌릴은 엔릴을 쫒아갔습니다. 그러자 엔릴은 성문지기로 변장한 뒤 닌릴을 유혹했고, 닌릴은 엔릴에게 복수한다는 마음으로 성문지기와 잠을 자게 됩니다. 그 후 엔릴은 나룻배 사공으로, 산지기로 변장해서 닌릴을 만났는데, 닌릴은 엔릴에게 복수하려고 또 이들과도 동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태어난 세 명의 아이는 아버지의 신성을 부여받았지만, 아버지의 처지 때문에 저승으로 내려가 지하의 신이 되었습니다.

엔릴이 낳은 첫째 아들인 난나는 엔릴이 추방당했던 이유로 태어난 아들이었는데, 그에게는 사랑과 질투의 화신인 닌안나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닌안나는 인간 영웅인 길가메쉬를 유혹하려다가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리스 신하에서 헤라클라스가 헤라여신의 미움을 받아 고생을 하듯이, 질투의 여신인 닌안나는 길가메쉬를 고통 속에서 죽이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닌안나는 형부였던 구갈안나라는 황소를 보내서 길가메쉬를 죽이려고 했지만 오히려 형부가 죽고 말았습니다. 닌안나는 미안한 마음에 형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저승으로 찾아갑니다. 그러나 사랑의 여신이었던 닌안나는 저승을 갈 때도 화사하고 생기넘치는 옷차림으로 갔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누구나 죽음앞에서는 겸손하고 작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난안나가 저승에 화려한 복장을 하고 신의 권위를 앞세워 저승 앞에서 무례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이자 저승의 여주인은 화가 나서 재판 후에 닌안나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엔키는 사람을 보내어 생명수를 뿌려서 닌안나의 혼을 되살렸으나, 저승의 주인은 닌안나를 대신할 자를 저승에 두어야 닌안나를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닌안나는 자신의 죽음도 모르고 화려한 치장을 한채 살고 있었던 남편인 양치기 두무지를 저승사자에게 내주었습니다. 두무지는 놀라서 도망갔고, 두무지의 누이인 포도주의 여신 게쉬틴안나가 두무지를 숨겨주었습니다.

그러자 결국 둘다 들켜서 두무지와 게쉬틴안나는 각각 반년씩 돌아가면서 저승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아시아에서는 여름에는 양조장 일을 하면서 포도주를 저장하고, 여름인 건조기가 아닌 계절에 양을 몰고 들판에 나서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 수메르인의 생활을 엿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죽음에 관련된 신화가 아시아의 일본부터 서아시아의 그리스까지 골고루 각색되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신들끼리 결혼하다는 근친결혼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수메르의 영향이 아니라 고대 사람들의 결혼관이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반면, 여신을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넘어가서 고생한다는 설화는 그 스토리가 매우 비슷한 형태로 각국에 남아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저승으로 넘어가서 여인의 혼을 지상으로 되찾아온다는 설정 에다가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설정이 첨가되었습니다. 일본 신화에서는 똑같은 스토리에서 뒤를 돌아보자 이자노미 여신이 아자나기 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설정이 추가 됩니다.

특히 일본 신화에서는 여신이 뒤를 돌아본 남편 신을 저주하기 위해 지상의 사람들을 매년 저승으로 끌고가는 데,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반면 남편신은 부인이 데려간 수만큼 새로운 생명을 지상에 태어나게 하는데 이것이 곧 탄생이라는 신화로 연결됩니다. 이 죽음과 탄생의 신화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들의 손자가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다스리는데, 이것이 일본 신화에서 말하는 천손강림이자, 천황의 탄생입니다.

이렇듯 신화 즉, Mythology는 당시 사회상과 사람들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수메르의 신화에서는 이렇게 인간과 신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념이 들어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역에서 훗날 유대교가 등장하는데, 그 종교는 수메르나 다른 지역의 신화와 달리 여러 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유일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신화는 단순히 수메르의 신화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과 구원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 거의 새롭게 재편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유일신에 대한 관념과 유대인들만을 구원한다는 선민사상을 대놓고 기록한 것은 기존 종교와는 완전히 다른 혁명적인 것이었으니까요.

자 그럼, 수메르의 신들에 대해서는 이만 마무리하고, 수메르에서 등장한 영웅 설화를 한편 이야기 해볼까요? 다음 이야기는 당시 수메르인들이 생각한 영웅의 모습인 길가메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신화이야기 1> - 일본의 신화 편

신화는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합니다. 신들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질 수도 있고, 그들의 문화 양식을 대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화가 설화와 다른 점은,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서 그 이야기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이지요. 예로, 단군신화에서의 환인의 의미는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신화>는 그 공동체를 <이해>하는 수단이지 신화 자체로서 이해하지는 않으니까요.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푸코의 해석에 따르면 신화 속에는 그 사회상이 녹아있다고 합니다. 곰과 호랑이 이야기에는 곰부족과 호랑이 부족이라는 토템이 있고, 당시가 청동기 사회구, 농경을 했구... 어쩌고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죠.

신화와 달리 설화는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의 이야기는 신화이지만, 지상에서 국가를 세운 주몽과 온조는 역경을 딛고 영웅이 되어가는 인간의 이야기이죠. 그러나, 사실 건국이야기를 다룰 때, 신화와 설화를 굳이 구분하려하지 않습니다. 설화 속의 영웅들은 대부분 천손의 자손으로 나오거든요. 아무래도 하늘의 자손이라고 해야 뽀대가 날테니...

오늘은 일본의 신화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일본은 다른 나라와 달리 신화 이야기를 국가적 차원에서 각색한 나라입니다. 그 이유는 일본 천황가가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강림>의 이데올로기를 전 신민에게 주입하기 위해서였죠. 천황가가 구체적으로 신화를 재창조한 책이 <고사기>라는 책의 상권입니다. 그럼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일본의 신화

세상이 시작될 때에는 하늘과 땅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탄생의 시작엔 어둠만이 있었고, 질서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죠.

어둠과 무질서는 세상에 최초의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그 최초의 존재가 <음, 양>이었죠. 음과 양은 떨어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의 존재가 없다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음이 없으면, 그 반대개념인 양이라는 말도 필요없으니까요.

음과 양이라는 대립되는 존재는 하늘과 땅이라는 대립되는 존재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신은 하늘에서 음과 양의 기운으로 만들어졌죠.

하늘의 천상계에서 최초로 태어난 신은 밝음의 신 3명이었습니다. 이 하늘의 신들이 이자나키라는 남자 신과 이자나미라는 여자신을 낳았습니다. 즉, 남매신이 탄생한 것이죠.

천상계에 머물고 있던 최초의 신들은 이자나키와 이자나미에게 물 위를 떠다니는 대륙을 평화롭게 만들고, 고정시켜놓으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늘 신들은 하늘의 창을 주어 그 임무를 남매신에게 맡긴 것이죠.

남매 신은 하늘의 구름다리에 서서 그 창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저어 올렸습니다. 그러자 바닷물이 창에 의해 휘감기고 떨어지면서 딱딱하게 굳어 버렸는데, 이렇게 해서 생긴 섬이 오노고로 섬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일본이라는 나라의 시초입니다.

남매 신은 그 섬을 자신들의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그 섬에서 하늘까지 이어지는 기둥을 세우고 큰 전각을 만들었습니다. 집을 만들자 남자신 이자나키와 여자신 이자나미는 남매가 아닌 부부로서 연을 맺고, 신성한 교접을 통해 국토를 낳기로 결정합니다.

신들이 신성한 교접을 할 때 여신은 말을 해서는 안되는데, 이자나미가 말을 하는 바람에 첫 번째 태어난 자식은 거머리였습니다. 이자나키는 아자나미를 나무라면서 다음 교접 때에는 자신이 먼저 말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여자신보다 남자 신이 우월하다는 관념이 있네요. 남자 신이 정력을 다하자 제대로 된 국토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자나미가 낳으려고 한 신은 불의 신인 카구쓰치였습니다. 그러나, 불의 신의 양의 기운이 너무 강하여 이자나미는 생식기에 화상을 입게 되었고, 결국 병들어 죽게 됩니다. 일본 신화에 성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일본인들이 <성>이라는 것을 상당히 자연스런 현상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자나키는 이자나미가 죽자, 아내를 죽이면서 태어난 불의 신 카구쓰치에가 원한을 갖게 됩니다. 이자나키는 카구쓰치를 베어 죽여 버렸습니다. 불의 신인 카구쓰치가 죽자 그의 피가 튀었고, 카구쓰치의 피와 살들은 다른 신들이 되어 신들이 계속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자나키는 이자나미의 죽음을 그러워하며 실의에 빠집니다. 이자나키는 결국 이자나미를 보고자 지옥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이자니키는 이자나미가 말한 지옥의 금기를 잊어 버리고 맙니다.

이자나미는 이자나키에게 절대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만들고 지킬 것을 요구했는데, 그 이유는 죽음의 세계에 있는 그녀는 구더기로 몸이 덮혀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이자니키는 이자나미의 얼굴을 보았고, 너무 무서워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자나미는 남편을 뒤쫒아 가면서, 이자나키가 자신을 모욕하였고 하면서 오히려 이자나키를 공격합니다.

이자나미는 도망가는 남편에게 <당신 나라의 사람들을 하루에 천명씩 저승으로 데려가겠다>라고 저주합니다. 그러자, 이자나키는 <그럼 하루에 천오백개명이 태어나도록 탄생방을 마련하겠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후 태어남과 죽음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이자나미를 황천길의 신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지옥에 다녀온 이자나키는 실의에 빠집니다. 그는 지옥에서 묻은 때를 씻는 다며 목욕을 하는데, 이 때 많은 신들이 이자나키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1번째 태어난 신은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 여신이였습니다. 태양은 대부분의 신화에서 농경과 풍요를 상징하죠.

2번째로 태어난 신은 달의 신(역법의 신)인 츠쿠요미였습니다. 양이 태어났으니, 다음은 음이 태어난 것이죠.

3번째로 태어난 것은 전투의 신인 스사노였습니다. 일본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겠네요.

이자나키는 이 3명의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 버립니다. 아마테라스는 하늘과 낮을, 쯔쿠요미는 밤을, 스사노는 바다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라는 섬은 결국 하늘과 밤, 낮, 그리고 바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죠.

여신 아마테라스는 자애롭게 하늘을 다스렸고, 밤은 쯔쿠요미에 의해 포근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다의 신 스사노는 어머니인 이자나미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울었고, 바다를 성나게 하였습니다. 이자나키는 화가 나서 스사노를 추방해버립니다.

스사노는 여신 아마테라스에게 몸을 의탁합니다. 아마테라스는 스사노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스사노와의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그를 돌봐주게 됩니다.

그러나, 스사노는 점점 아마테라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자신의 힘을 자랑하기만 하였씁니다. 어느날 스사노는 아마테라스의 시녀를 죽여 버리기 까지 하였습니다. 여신 아마테라스는 너무 놀라 동굴 안으로 숨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가 사라지자 세상은 온통 암흑이 되었습니다. 천상계의 모든 신들은 아마테라스를 겨우 달래어 다시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하고, 스사노는 추방해 버렸습니다.

스사노는 추방당하여 지상으로 왔습니다. 지상에서 그는 사람들을 괴롭히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여 지상 사람들의 영웅이 됩니다.

지상의 사람들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스를 지상의 지배자로 존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천상계를 다스리던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와 그 후손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테라스는 자신의 후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씁니다. 히노호니니기가 지상으로 내려오자 지상의 왕인 오쿠니누시는 히노호니니기에게 국가를 물려주었습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지상으로 내려온 사건을 <천손강림>이라고 합니다. 일본이라는 곳의 역사는 이 천손강림에서 비롯됩니다. 일본은 하늘의 명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며, 하늘이 아들이 이어서 지배하는 나라라는 명분이 생긴 것이지요.

이렇게 하늘의 자손의 피를 받은 자들이 대대로 <천황>이 되어 일본을 다스립니다. 일본 천황가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화는 7-9세기를 거치면서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으로 재편집 되었고, 천황가의 권력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성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놓았습니다. 일본의 천황가는 정권이 누구로 바뀌든 간에 끝까지 지속되었고, 하늘의 후예들라는 명분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답니다.

신화의 위력이라는 것이 최소한 일본에서는 대단한 것인가 봅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일본사 이야기 21 - 역사의 흐름은 유통경제의 발달이었다.

1. 막부의 중농정책과 떠오르는 상인들

 

에도막부는 다른 막부들 보다 훨씬 더 철저한 중농정책을 실시한 막부였습니다. 이전 가마쿠라 막부가 국내외 무역을 통한 재정 확보를 중시한 것과는 달리, 에도막부는 사회 분위기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어느 정도 잉여생산물이 축척된 농업 자본을 막부의 재산으로 삼았습니다. 직업의 근간은 농업이었고, 성리학적 분위기에 의해 상공업은 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발전하는 사회 경제적 변화를 막부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농업기술의 발달과 중국, 조선에서 선진 농법이 계속들어오면서 농경지의 면적은 계속 증가하고, 개간이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시대 후기에 광작(넓은 영토를 가지고 농사짓는 것)이 성행하고, 농촌경제의 발달로 토지를 확보한 부농과 토지가 없는 빈농으로 신분이 분화되어 가죠? 에도 막부 역시 같은 시기 같은 상황을 겪게 됩니다.

정부가 농업을 강조하면서 농업 생산력은 엄청나게 성장했고, 그 결과 농업을 통해 거대한 이윤을 창출한 부유한 농민(부농)과 토지를 잃고 농업 노동자로 전락한 빈곤한 농민(빈농)이 등장합니다.

조선 시대 농업경제 발달이 양반층에도 부유한 양반과 몰락한 양반을 초래했듯이, 일본에서도 무사층의 분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부유한 무사들은 영주가 되어 엄청난 재력을 축척하지만, 빈곤해진 무사들은 사회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또 빈곤해진 무사들은 조금밖에 없는 토지에서 최대한 세금을 쥐어짜기 위해 농민들에게 많은 세금과 부역을 강요하게 되어, 사회가 동요하고 농민반란이 많아지게 됩니다. 조선시대 임술민란이나 홍경래의 난과 같은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보세요.

반면, 농업경제의 발달로 남는 생산물을 시장에 유통하려는 세력이 등장하면서 5일장이 확대되고, 재산을 축척한 상인집단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대상인 집단은 농촌경제를 이끌어간 부농출신도 있었고, 처음부터 상업과 수공업을 동시에 시작하여 유통경제의 신화를 이룬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18세기가 되면 농업을 중시하는 막부의 경제정책이 점차 무너지고, 도시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에도 막부의 전통적인 카스트적 신분질서를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2. 대상인이 출현하였으나, 정부는 이들을 끌어안지 못하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조선, 명, 에도막부 후기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각 국가들은 이렇게 축척된 상업자본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습니다. 동아시아 국가의 당시 관학은 모두 성리학이었습니다. 3국가 모두 후기에 좀더 실용적인 양명학이 성행하고 실학과 국학이 등장했지만,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하거나, 지배집단에서 소외된 이들이 받아들인 학문이였습니다. 전통적인 농업주의의 유교이념에서는 <중농주의>를 근간으로 토지에서 세금을 걷는 것이 경제의 원칙이라는 입장을 계속 고수하였습니다.

에도 막부 역시 성장하는 상업자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습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미쓰이 등 재벌가가 등장하였고, 이 재벌가들은 금융업을 통해 막부, 번보다 더 큰 경제적 위세를 떨치게 되었죠.

대상인들은 동업자 조합을 만들고 물품에 대한 독점권을 얻어 상품 가격을 통제하였습니다. 서양식 길드 체제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상공업자들은 도시의 대상인들과 결탁하여 서로간 상업규칙을 마련하고 동업조합의 운영절차를 작성하였습니다. 서로간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상업의 운영방식을 정하고 정해진 규칙 안에서 도시내 상공업을 완전 독점 장악하였습니다.

에도 막부는 중농정책을 고집하면서도 이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국가 경제권은 상업자본이 가지고 있었고, 쇼군과 다이묘도 금융업자들에게 많은 부채를 지고, 상업자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막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업이 근본산업이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전통 농업경제이념인 성리학을 백성들에게 계속 주입하는 정도였습니다. 또, 지나친 상공업에 의한 <사치>는 위험하다는 입장에서 <검약령>을 내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소상인들을 농업으로 복귀시키는 <귀농령>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에서 등장한 상업자본 역시 명, 조선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로의 경제적 근대화에 성공한 사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일부 일본학자들은 명, 조선과 달리 일본의 자본주의는 이미 에도 막부 말기에 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립하려면, 그 자본이 사회전체의 유통경제를 장악하고 자본에 의한 새로운 신분질서와 경제질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비록, 에도막부에서 이전과 다른 상업자본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 자본은 도시내 동업조합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자본으로 근대적 독점 자본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자본인 듯 합니다.

또, 축척된 상업자본은 막부의 군사력에 의해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고, 실제 막부는 상업자본이 막부에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언제든지 상업자본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즉, 에도 막부의 상업자본은 막부와 결탁하거나, 막부 재정에 협조하는 형태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본주의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에도 막부기 일본의 근대화론은 아직 시기 상조의 이론같습니다. (에도 막부가 일본에서 경제적 근대화를 이루었다면, 신해통공이 이루어지고 상공업이 활성화된 조선 정조 때도 근대화 기점으로 생각해 볼만 하네요.)

 

3. 도시 중산층의 문화가 등장하다.

에도 막부 후기, 급격하게 발달한 상공업은 무사계급과 다른 <중산계급>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산계급이란, 도시 상인계급을 말합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도시 상인들은 기존 무사 계급의 문화와 차별되는 좀더 서민적인 문화를 만들게 됩니다.

보통 도시를 거점으로 성장한 도시 상인 집단을 <죠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도시 중산 문화를 <죠닌 문화>라고 부르죠.

죠닌 문화의 핵심은 상인과 농민들에게 글과 예절 등을 가르치는 학교가 전국적으로 등장하여 <교육의 기회 확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중산층들은 더 높은 문화와 신분 상승을 위해 장남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주고, 차남 이하는 상인교육을 시켜 가문을 유지하였죠.

이 죠닌 문화는 서민적인 통속소설, 가부키 등을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로 발전합니다. 18세기 이후 일본의 겐로쿠 문화, 가세이 문화 등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면서 무사 중심의 상층 문화가 점차 상인 계급의 문화로 이동하였습니다. 특히, 돈 있는 상인들은 일본 풍속화가 들의 그림을 집안에 보관하는 것이 문화의 척도라 생각해서, 풍속화(우키요에), 목판화(니시키에) 등의 회화 기술이 발전하게 됩니다.

또, 중국 당나라 시기 견당사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한 차를 마시는 예법(다도)이 지배층을 넘어 죠닌층에게 확대되어, 다도 예법은 일본인 모두에게 교양을 판가름 하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4. 성리학보다는 실학이 필요한 시기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이념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경향을 탈피하여 새롭운 관점에서 유학을 바라보고, 백성과 국가에 실제로 필요한 학문을 연구하자는 경향을 역사학계에서는 <실학>이라고 부릅니다. 조선의 실학은 <토지 경작자에게 토지를 맡긴다>는 이념의 중농학파, <상공업을 통한 부국강병을 실현한다>는 중상학파, <우리 것을 알아 실사구시로 활용한다>는 국학론 등이 있었죠.

일본 역시 새로운 경향의 사회이념이 유사한 시기에 등장합니다. 일본 에도 막부의 국가 유학은 조선에서 건너간 <성리학>이었습니다. 성리학 중에서도 군신상하의 대의명분과 사무라이 윤리에 활용하기 좋은 <주자학>이었죠. 막부 지배층은 막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의 충성, 의리, 대의명분, 국가 윤리 등을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막부 후기가 되면서 양명학자들이 많이 늘어납니다. 양명학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우선이라는 성리학의 <격물치지>보다, 실천과 수양이 먼저라는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학문이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사회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변화하면서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죠. 그러나, 막부는 사회 동요를 막기 위해 양명학을 금지하고, 국가 관학은 오로지 성리학이라고 강조합니다.

양명학은 책을 읽는 깨달음보다 실천이 우선이라는 간명한 논리로 지배계층에서 소외당한 하층 무사나 도시 상공업자에게 환영받습니다. 또 성리학이 강조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논리와 다르게, 지역의 자율성이나 도시의 상공업 활동에 관대한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막부에서는 양명학을 <반체제적인 불순한 사상>으로 생각하였답니다.

명대의 양명학이 조선을 거쳐 일본에 들어왔다면, 청대의 고증학도 일본에 수입되었습니다. 고증학은 중국 청조 시기에 사물의 참 뜻을 깨닫고, 원전의 올바른 뜻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신유학이었습니다. 중국 청나라가 이민족인 만주족 왕조이기 때문에 유학 활동이 철학적이지 못하게 된 것에서 비롯된 학문이지요. 일본에서도 이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공자, 맹자 등 중국 선진 유학자들의 원전을 연구하는 파가 등장하는 데, 이러한 파를 <고학파>라고 합니다.

또 하나, 에도 막부기 유행한 사상 중의 하나는 <난학>입니다. 에도 막부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친 까닭에 교류했던 서양 국가는 네덜란드 뿐이었습니다. 난학은 네덜란드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서양 의학서 등을 일본식으로 해석하면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 후기에 가장 중요한 사상은 <국학>입니다. 국학은 조선으로 말하면 <실학>이라고 볼 수 있는 학문이죠.

에도 막부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하여 서민 문화가 널리 보급된 반면, 쇄국 정책으로 외래 문화와 사상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양명학이나 고학, 난학 등이 들어왔지만 지배층 일부의 학문이었고, 서민들 개개인이 인식할 만한 학문은 아니였죠.

국학은 서민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면서 이 일련의 사상들을 묶어 <일본 고유의 학문>이라며 부르는 말입니다.

일단 번학, 향학 등 서민교육기관이 증가하면서 서민적인 유학 교육으로 <도덕과 윤리 교육>이 등장하였고, 서민적인 오락이자 문학인 일본 고유의 가부키 양식이 완성됩니다. 또 풍자소설(센류)와 돌림노래(연가), 쿄카 등이 유행하였죠. 안도 쇼에키는 무가사 농민들을 수탈하는 사회가 과연 옳은 사회인가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민적인 학문 전통 속에서 일본 고전과 일본 고대사를 연구해서 독자적인 일본사를 완성하고 서민들에게 전파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이들을 흔히 <국학론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중국식 이념인 유교와 불교를 배격하고 일본 자체에서도 고대부터 내려온 사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고대부터 내려온 고유 사상이란,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의 <존왕왕이 사상>입니다. 천황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강림>을 이념적으로 정리하여, 왕권의 강화가 일본 역사의 발전방향임을 강조합니다. 또 일본 고유의 사상인 <신도>를 복고해서 일본인의 정신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이 국학사상이 일본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지대하였습니다. 일본 근대기 왕을 중심으로 모이자는 <근왕운동>, 조선을 쳐들어가 일본의 우월함을 증명하자는 <정한론> 등의 기초 이념이 국학 사상에서 이미 보여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는 에도 막부가 동요하면서 막부타도운동이 전개되는 시점의 이야기를 전개해보겠습니다. 막부 타도운동이 성공한 그 다음 이야기는 메이지 유신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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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20 - 에도막부의 재정과 조세개혁

1. 막부 공통의 관심사 : 재정문제

일반적으로, 일본의 중세라고 부르는 시기는 막부 시대를 말합니다. 이 막부시대의 막부는 국왕이 아니라 막부의 군사지도자 쇼군이 다스리는 시기입니다. 일본은 중세부터 이미 군사정권으로 역사를 쭈욱~ 이어오네요. 어쩌면 근대 일본사에서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열망이 왜곡되고 군국주의로 나간 것도 천황 이데올로기와 막부정권의 전통이 일본인들 머릿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한 나라의 역사라는 것이 자신들도 모르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에 투영된다는 것을 보면 <역사>가 참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중세에서 막부의 영양분은 <재정>이었습니다. 막부는 직접 국왕가로 불릴 수 없었고, 천황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막부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정통성>보다는 힘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재정이 필수였습니다.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것도 재정적인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몽골의 침입에 맞써 싸운 무사들이 전쟁 이후 재정난에 허덕이며 보상을 해주지 못한 막부에 대하여 더 이상 신뢰를 하지 않았거든요.

무로마치 막부는 명나라와의 공무역을 재개하고, 조선과의 교린 무역, 류쿠 및 동남아시아와의 활발한 무역로를 개통함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초기 막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명, 조선의 등장 등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상황과 상공업의 발달이라는 시대 흐름을 무역로 확보로만 해결하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즉, 성장하는 농민층의 힘을 끌어안을 능력이 없었죠. 농민층의 잉여생산은 막부가 아닌 지방 다이묘들에게 넘어갔고, 성장한 다이묘들이 독립국을 세우면서 <전국시대>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즉, 막부의 존립 근거인 재정을 원활히 통제하지 못한 것이죠.

2. 에도 막부 : 확실한 농민 통제로 조세를 확보하다.

반면, 에도 막부는 이전 막부들과 달리 가장 확실한 농민통제를 실시합니다.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실시했던 <변법>과 같은 부국강병책을 도용한 것이죠. 에도 막부는 농민에 대한 통제가 확실한 조세 증가로 돌아온다는 것을 전국시대의 혼란함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일단, 농민층을 엄격한 신분으로 묶어버립니다. 에도 막부의 무사, 농민, 수공업자, 상인 이라는 신분 공식은 아주 엄격해서 농민은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농민은 국가에 부역, 조세 등을 납부해야만 했죠.

농민들은 연대책임제인 <고닌구미>에 묶어 있었습니다. 중국과 조선에서 실시한 <오가작통법>과 같은 것이었죠. 누군가 세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면 이웃이나 친척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특히 사치하는 자들은 주변인들을 같이 처벌함으로서 서로 서로 엄격하게 감시하도록 체제를 마련하였습니다.

또, 성리학의 토지 이념을 강조하여 토지는 하늘의 근본이라고 역설하였고, 농민이라는 직업이 다른 2, 3차 산업의 직업보다 우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토지를 중요시하는 사회의 특징인 <가부장권>을 중요시하여 가장에 대한 항명은 쇼군에 대한 가신의 항명과 동일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농민들보다 높은 계급의 무사들은 농민들보다 우월하는 이념으로 <무사도>를 강조하였습니다. 일명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불리는 무사도는 무사가 해야할 일들을 규제하면서, <무사는 힘써 일하는 농민을 보호해야한다>는 이념을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제도적으로 막부는 <토지영대적 매매의 금지령>과 <분지제한령>을 법적으로 반포하여 농민을 보호하였습니다. 농민들이 가진 토지는 헐값에 매내할 수 없고, 상속도 법에 의한 것으로 제한한 것이죠. 이것은 소농민을 보호하면서, 국가에 내는 세금 공급자들을 확보하려는 국가의 정책이었습니다.

3. 무역을 통한 재정확보가 달라지다.

무로마치 막부는 대외 무역을 통하여 막부 재정을 확충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이전 막부보다 대외 무역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에도 막부는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보통 쇄국정책이라고 하면 다른 나라의 문물을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과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쇄국이란, <서양에 대한 쇄국> 및 <농업상품에 대한 쇄국>입니다.

에도 막부는 중국, 조선, 류큐 등 동아시아의 전통 무역은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교류하던 서양과의 무역은 단절하고, 단지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문물을 수입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에도 막부의 정통성 문제와 막부 유지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세력이 활발하게 일본에 진출한 것은 신항로 개척기인 오다 노부나가의 <전국시대>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상으로 크리스트교를 적극 수용하고,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에서 대포 등의 문물을 수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개설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에도 막부는 농민을 막부 재정의 원천으로 생각하여 무사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카톨릭은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이었습니다.

또,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카톨릭 국가들과는 성격이 다른 네덜란드라는 신교 국가가 17세기 유럽을 주름잡자 일본은 카톨릭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상인들의 자유롭고 활발한 무역 분위기는 엄격한 카톨릭과는 사뭇 달랐죠. 네덜란드를 이용하여 이전 카톨릭을 막아볼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의 국가들이 에도 막부와 멀리 있는 규수 지방의 다이묘들과 무역을 계속하였다는 점입니다. 에도 막부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서양과의 무역을 단절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네덜란드는 카톨릭 국가들을 누르고 일본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카톨릭 세력을 모략했고, 그 결과 일본에서 네덜란드를 제외한 서양 세력들을 모두 배척하는 <쇄국정책>이 탄생한 것이죠.

이제 에도막부는 막부 재정의 근간을 무역에서 찾으려는 이전 막부의 재정책을 버리게 됩니다. 일본은 나가사키 항구 하나만을 열고, 네덜란드 및 중국하고만 무역을 했습니다.

조선과는 전통적으로 협상을 진행했던 대마도(쓰시마섬)에서 무역을 하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대마도주가 거의 독자적으로 주도했고, 대마도주의 태도에 따라 무역의 어감이 달라지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대마도주의 존재를 거의 막부 실력자의 존재와 대등하게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에도 막부가 다른 막부와 달리 오래 지속된 것은 이 쇄국정책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막부의 무역을 통한 재정확보와 달리, 에도 막부는 일본 국내 상품을 타지방, 또는 해외에 유통시키는 것 자체까지 제한하였죠.

즉, 에도 막부의 사회는 농업기반의 자연경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막부체제는 동요없이 계속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쌓이고 쌓인 농업의 잉여생산물이 터져나오면서 막부의 의도와는 달리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고, 새로운 부자와 상인들에 의해 도시에 <죠닌 문화>라는 중산층 문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아무튼, 쇄국정책으로 에도막부는 오랜 기간동안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초, 중반은 일본의 평화시대이면서 일본 고유의 국학이 발전한 시대입니다. 외국 사상은 네덜란드의 <난학> 정도였죠.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쇄국정책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전 막부에서와 같이 활발한 문물 교류가 줄었고, 서구와의 교류도 원할하지 못하였죠. 미국과의 교류도 서구인들을 통해 몇 번 왕래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4. 재정이 부족하다~ - 막부의 재정확보 노력

도쿠가와 에도 막부는 초기 쇄국정책과 농업 안정책으로 많은 재정을 확보하였으나, 4대 쇼군 이후 조선의 성리학을 이념으로 정착시키면서 막부의 성격과 재정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성리학의 탄생한 중국 송나라의 문치주의, 조선의 문반 우월주의가 무신정권인 막부에도 영향을 준 것이죠. 에도 막부에서 성리학이 국가 관학으로 정착된 것은 4대 쇼군기부터입니다. 성리학은 동아시아의 정권 강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학문이죠. 충효윤리와 국가 윤리가 지배층의 이념과 절묘하게 일치하니까요. 특히 이황이 주장한 이기론과 군신관계론은 막부 지도자들의 입맞에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막부 지도자들은 서양에서 넘어온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고, 일본 전통 지배층인 불교세력을 다시 옹호하였습니다. 특히, 무가 정권에 딱 맞는 선종 계열을 중시했죠. 일본의 선종은 가마쿠라 막부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문제는 이렇게 막부 정권이 무신적인 기풍을 잃어가고 <문치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됨으로서 국가 재정이 약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도 막부 초기 정책인 자영농 육성, 강력한 중앙집권, 무사를 중심으로 한 사회통제가 흔들리고, 막부가 원하지 않았던 <상인계급>이 점차 뜨게 된 것이지요. 특히 지방에서 돈좀 벌었다 싶은 자들이 장사에 나서고, 무사들마저 고리대의 맛을 알게 되면서 막부의 튼튼한 재정줄이 흔들리게 됩니다.

도쿠가와 8대 쇼군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코호의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이 개혁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은 18세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상인층이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막부의 쇼군은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 <검약령>을 반포하였습니다. 검약령의 중요 내용은 <식산흥업>이라는 구호입니다. 일제시대 일본이 많이 외쳤던 그 구호네요. 식산흥업이란, 농업 생산량을 늘려 국가 기반을 단단하게 하자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식산흥업의 핵심은 토지개발과 농업장려, 품종개량, 비료개발 등이었죠.

그런데, 이 정책을 실시하면서 늘어난 농업 생산력과 상품작물들은 많은 세금으로 인해 국가로 넘어가게 되었고, 국가는 세금을 미곡(쌀, 콩)으로 받아가면서 성장하던 농민층의 생산력에 찬물을 끼얻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농민은 성장하는데, 그 성장한 만큼의 생산물을 국가가 가져간 것이죠. 이러한 정책은 짧게는 막부 재정에 도움이 되나, 장기적으로는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막부 후기로 넘어가고 19세기가 되면서 막부는 더욱 더 재정 부족으로 허덕이게 됩니다.

19세기에 막부는 막부 존속을 위한 결단으로 <간세이 개혁>과 <톈보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개혁은 성장하는 농민과 상인들의 생활을 보장하면서 같이 커가자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잉여생산물을 수탈하여 막부의 창고를 채우려는 정책이었습니다.

일단, 성장하는 상업자본을 인정하여 상업자본에 세금을 부과합니다. 동업자 조직인 자를 인정하면서, 이들이 남기는 이윤은 철저하게 세금으로 걷어갑니다. 일본 에도 막부기에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일본학자들이 있는데, 실제 이러한 상업자본의 수탈로 일본 자본주의가 에도막부기에 형성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19세기 개혁의 내용은 <귀농령>입니다. 에도 막부는 농민이 살아야 세금을 걷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채무를 모두 없애줍니다.(채무파기령) 그리고, 어중간한 상인들은 모두 농촌으로 돌아가라며 협박을 합니다.(구리귀명령)

이것이 에도 막부 후기의 한계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을 겪은 후였고, 아시아에서도 각 국의 상업자본이 발달하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상업 자본주의를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상업자본은 찍어누르거나 수탈하면서 상인들을 농촌으로 돌려 보내려 한 것입니다. 시대착오적이었죠.

실제, 막부의 재정이 몇 년간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상인과 농민을 쥐어짜고 탄압하는 정책은 무사, 농민, 상인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최하급 정책이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재정 정책 실패로 가난해진 무사와 농민들은 결국 막부가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일본사에서 막부의 패망은 모두 재정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결국 지배층인 무사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막부 불만 세력들은 막부가 아닌 국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전통론>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 근대화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의 이념 중 하나였던 <존왕양이론>으로 연결됩니다. 해석하면, 왕을 받들어 서양을 물리치자는 것이죠. 막부가 아닌 왕이라는 개념이 일본인의 머릿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에도 막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인 <상공업의 발달과 자본주의 논쟁>을 다루고, 일본 상업발달로 등장한 <죠닌 문화>와 막부의 대응을 살펴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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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 역사서 - 고사기, 일본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은?

고사기는 최초로 일본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고사기는 712년, 그리고 얼마후에 720년경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지요. 이 2권은 모두 덴무 천황의 명으로 제작됩니다. 덴무천황이 누구인지는 일본사이야기 7번에서 얘기했죠? 가장 유약한 왕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획득하여 일본 천황가를 중앙집권화 시킨 그 인물입니다.

보통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역사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우리 나라만 한번 찾아볼까요? 신라에서 편찬된 국사는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때 신라 왕실의 권위를 알리고, 진골귀족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도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백제의 서기도 백제가 동아시아 상권을 주름잡고, 중국 2군에 영향력을 펼칠 때, 왕실계보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덴무천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천황권 밑에서 편찬됩니다.(시작은 덴무찬황 때이지만,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끝나는 것은 후대의 천황대일입니다.) 덴무천황은 황실의 계보를 남기기 위해 전승자를 찾아서 황실계보를 암기시킵니다. 이 황실 계보를 <제기>라고 합니다. 또 <구사>라고 불리는 신화와 설화도 전승자에게 암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기시킨 내용이 이후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암기한 내용을 책으로 적으로 명하였는데, 이것이 <고사기>라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2. 고사기의 내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고사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덴무천황기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일본 천황가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중, 하의 권은 각각 중심 줄거리가 있습니다. 상권은 전설속의 신들의 이야기입니다.(이 신화이야기는 일본사 이야기 2번에서 다루었습니다.) 중권과 하권은 그 신이 천손강림을 하여 지상의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황가의 계보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단군신화와 다른 점은 당시 천손의 후예라는 천황가에서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약간 객관적 근거가 없이 적었다는 점이 좀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초기에는 고사기를 사서로 다루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 중, 하 전체를 한데 묶어 일본 신화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고사기의 편찬 목적은 진신의 난(일본사 이야기 7편 참조)을 넘긴 덴무천황이 지방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천황의 신성함을 대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따라서 이 책은 정사라기 보다는 천황가의 개인적 소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이 천황권의 전성기이자, 불교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래한 이래로 한반도 불교에서 전래된 설화들이 일본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고사기에는 많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또 이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 신화는 각종 세계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유입되어 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합니다. 즉, 중국, 한반도, 태평양,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도 많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이 주장하는 그리스 신화까지의 지역확대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 설화가 재일 많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3. 고사기의 실제 내용

상권의 내용 요약 - 일본의 신화 이야기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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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권의 내용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 신화를 가져다 베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조신 아마테리스는 해모수로, 천상계 이야기는 환인이야기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인데, 이렇게 까지 비약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신화는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일본신화가 우리나라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우리 신화는 중국이나 러시아 신화를 베낀 것이 됩니다. 사실 시기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설화는 다 공통적으로 천손의 강림, 인수교혼(동물과 사람이 결혼하는 것), 곰이 등장하는 설화가 대부분 다 나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설화를 유도했다고 보는 편이 좋지요. 또는 북방에서 설화가 차츰 남방으로 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구요.

중권의 내용 요약 - 진무천황과 신공황후(4대 천황 ~ 15대)

중권의 내용은 천손강림 이후 4대 진무천황이 신의 후손으로서 일본열도에 실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열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후 천황가가 발전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진무천황 이후 후손들 얘기는 그저 그렇고, 중요한 것은 야먀타이국의 히미코(신공황후)의 이야기입니다. 고사기에서는 진구우라는 여자로 나옵니다만, 몇 년뒤 편천된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시킵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에서의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에 각인시켰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고사기의 허황된 면을 발견합니다. 일본 천황가 이야기야 허구이든 진실이든 무시하면 되지만, 한반도 자체를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이 책이 뭐하는 책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충분한 소재거리가 됩니다. (일본사 이야기 2편의 야마타이국을 참조하세요)

하권의 내용 요약 - 16대 천황 ~ 33대 천황

하권의 내용은 16대 천황에서 33대 천황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가는 부분은 이 하권의 주요 줄거리가 야마토 정권에서의 천황가 이야기라는 점인데, 야마토 정권은 일본의 소국들이 뭉쳐서 만든 지방 호족들의 연합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천황은 그 연합정권의 수장 성격이었지요. 따라서 천황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고, 또 지방 유력 호족의 가문에서 천황이 나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 호족가문과 천황가는 권력구도에 따라 상호 결혼을 하였고, 당시 남매간에 결혼까지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유력호족가문에서 천황과 이어지는 핏줄만 있으면 그 기문소속의 천황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천황가를 휘어잡고, 불교를 수용하여 강력한 유력가문이자 천황가를 겸했던 가문이 바로 소가씨였습니다.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 참조) 특히 소가씨의 33대 천황인 스이코(소가노 아마코) 천황은 쇼토쿠 태자(소가노 쇼토쿠)와 함께 아스카 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후 소가논 집단의 멸망 부분은 나오지 않고 끝납니다. 다이카 개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4. 그럼 일본 서기는 왜 편찬한 거야?

고사기가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됩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고대 신화부터 서술하여 고대 신화가 천황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서술 방향을 잡아 천황가에 신성성을 부여해 지방호족가문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민을 지배함에 있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역사책의 차이점은 정사인가, 개인적 장서인가의 차이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가 개인적으로 보존할 개인적 장서이므로, 그 후속편이 없고, 이야기도 고대신과 천황가의 족보 연결차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분위기에서 중국식 정사와 같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이후에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등이 계속 편찬되었고, 이러한 일본의 정사들을 한번에 묶어 <육국사>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편년체입니다. 일본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육국사는 <신의 책>으로 여겨지면서, 심지어 역사가들까지도 이 책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이 육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이 그저 신성한 책으로서 이 일본서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가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신화수준인 고사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정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한반도의 역사서술 부분에서 우리나라 및 중국측의 기록과 너무 달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가 우리 역사서 및 중국사서를 참조하면서 천황가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일본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5. 그럼 일본 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역사의 논쟁점들...

신공황후기 설화 이야기도 연대 차이가 심하다.

고대 일본 천황가의 기록들은 기원후 150년 이전의 기록들이 우리 사서나 중국사서에 비해 그 연도차가 너무 큽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본 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오녀는 잔잔한 사랑이야기 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여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왕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거의 5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 설화에 나오는 망부석 이야기도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200년 이상 차이나고, 신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맞는 연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기록들이 거의 다 연대가 안 맞습니다. 대체 이 일본서기는 무슨 책을 근거로 연대를 상정한 것일까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

일본 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일본이 신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거의 말이 안되는 해석인데요. 또, 일본은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위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이야기는 고구려사 편에 아주아주 자세히 기록할 것이구요, 또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을 한국사 사료방에 전문 다 옮겨 놓았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비석 내용을 글자 몇글자 바꾸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칠지도 문제

칠지도 문제는 고대 한국과 일본사에서 큰 논점이 되는 문제중 하나입니다. 칠지도(일곱가지가 난 칼)라는 칼을 백제 부흥기 때 성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이 전해주었다는 부분의 용어가 과연 <하사하였다>인가 <바쳤다>인가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한자로 <공공>이라는 글자는 주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해석하기 따라서 하사도 되고, 바친 것도 되거든요.

우리는 당연히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당시 중앙집권화 하던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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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점들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서기에서 최소한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를 볼 때,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잘 인용안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정사에서 조차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가 섞여 있으니, 역사가들은 일본 사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잘 판단하고, 인용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일본 사서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객관적 시선에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편에서 다룰 때는 조목조목 학술적인 근거를 들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와 같이 신화적 성격으로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이만 적고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휴가라 직장을 쉽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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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본 일본과 야마타이 국

1. 일본의 신화

일본의 신화는 일본서기에 쓰여 있습니다. 일본서기는 니혼쇼키라고 일본식으로 많이 부르는데, 이 일본서기의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많고, 중국측 기록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으며, 특히 한반도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 부분에서는 당시 한반도 정세와 너무 안 맞아서 위작이란 말을 많이 듣기도 하고, 사료의 신빙성이 없다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일본의 정사인 만큼 이 책을 인용하여 신화를 서술해볼까 합니다. 어짜피 신화란 있었던 사실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 사회상을 알려주는 key의 역할을 하는 편이니까요.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아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 일본 고대의 야마타이국 논쟁

일본서기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여왕 신공황후가 나옵니다. 원래 일본에 히미코라는 여군장이 있었는데, 일본역사책은 이 히미코를 일본의 절대군주인 신공황후로 상정한 것이지요. 이 신공황후는 야마타이국을 이끌고 있었고 야마타이 국은 곧 일본의 야마토 조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야마타이국은 곧 야마토 지방(일본 나라현)에 있다고 믿은 것이지요. 전편에서 지도로 보았지요? 나라의 위치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일본의 고대 강국 야마타이국이라는 여왕의 국가가 어떤 성격의 국가이며, 그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일본인들도 알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사에서 고조선의 정확한 위치가 요동인지, 평양인지, 아니면 수도가 이동하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일본정사인 일본서기로 따지면 당연히 야마타이국은 야마토 정권과 연결되는 나라지방입니다. 그러나 중국책인 위지 왜인전에 기록된 일본의 위치와 방향을 따라가보면 방향이 일치하는 곳은 규슈지방(위 지도의 기타규수-나가사키 근처)입니다.

이것은 일본 고대사에 큰 숙제를 던져줍니다. 만약 야마토 지방이 일본 고대 강국인 야마타이국이라면 일본은 초기부터 여왕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려고 하는 과도기의 연맹왕국이 됩니다. 그러나 변방인 규슈가 야마타이국의 중심지라면 고대 일본은 그냥 작은 소국국가들이 있었던 수준이 되는 것이고, 야마타이국도 수많은 일본 소국 중 변방에 위치한 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일본 고대의 여왕인 히미코(신공황후)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한국사에서도 중요합니다. 왜냐면 일본서기에서는 이 신공황후가 가야를 정복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운 뒤 가야-백제남부-신라남부에 걸치는 영역을 200년간 지배했다고 나오거든요. 물론 허황되긴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기록을 꽤 많이 믿고 있습니다. 또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기사를 일본이 위조한 목적도 이 임나일본부를 정당화하기 위함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신묘년에 광개토대앙이 백제를 치고, 신라를 구원하며, 일본을 격파했다는 기사는 일본측에 의해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격파하였다는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한국 고대사에서 양국이 풀어야할 문제중 하나죠. 신묘년조 기사가 포함된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은 한국사 사료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나중에 고구려사를 풀어 쓸 때 자세히 설명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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