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퀴즈) 역사로 정리해보는 불교 이야기 제 1부. 불교 탄생 이전의 종교 이야기 : 브라만교 - 부분입니다.
1-3장까지 핵심 내용을 문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차한잔 하시면서 풀어보세요.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3화. 전통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대결 속에서 탄생한 석가

1. 철기 시대의 사화 변화와 <정치, 사회> 계급의 성장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이념으로 <브라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의 인도는 이미 <고대 신의 신비주의> 관념만으로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철기가 보급되고, 생산력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전사계급이 원하는 것은 <넓은 영토>였다. 물론, 신관들이 신의 계시를 내리고 전쟁을 도왔다고는 하지만, 전쟁에서 실제 필요한 것은 무력과 경제력이었다. 무력을 가진 자들이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으며, 재력을 가진 자들은 바이샤 계급이었다.

전쟁은 많은 민족간에 혼혈을 가져온다. 더 이상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왔다. 크고 작은 부족 국가들이 통합되면서 거대한 영토를 가진 군주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발달하면서 엄청난 토지를 가진 귀족과 재력을 가진 상인들 역시 입김이 쎄진다. 특히, 비옥한 겐지스강 유역을 장악한 부족들은 인도 북부를 통일하겠다는 꿈까지 가진 시기였다.

<브라만>이라는 최고 계급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옥한 겐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점차 <브라만교 반대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 3계급은 브라만에게 반발하였다. 더 이상 특권을 유지하려는 브라만교를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특히,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만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었다. 제사 지내는 방법이야 누구나 배우면 되지 않는가?

브라만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직접 제사를 지내며 스스로 교단을 만들어 버린다. 특정 종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종교의 사상을 벗어나 독자적인 종파가 된 경우를 <사문 : samana>이라고 한다.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원래 인도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문들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어갔다.

2. 사문들과 브라만과의 싸움

브라만교의 전통 철학은 우파니샤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기본 원리는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과 생명의 원리인 아트만은 동일한 것>에서 출발한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점은,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이 창조주이자, 역사의 진행자이자, 생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법칙 속에서 생명도 만들고, 죽음도 만들며, 윤회도 만든다. 우주는 브라만의 법칙에 의해 돌고 돈다. 해탈은 그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만이 가능하다.

사문들은 브라만을 반대한다. 고행을 통하여 힘든 과정을 겪으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해탈이 가능할텐데 왜 <브라만>만 해탈한다고 하는가? 또, 착한 일을 하면 다음 생애에 <브라만>으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지금의 선악과 내세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과격한 사문에서는 아예 <육체>가 죽으면 선악이 죽는다는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문은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들을 거론하면서 <영혼>도 결국 물질 현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혼>이 어떻게 현실과 격리될 수 있는가? 살이있는 인간들도, 자 <영혼>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표적인 사문인 <자이나교>의 <바르다마나>는 브라만교의 <선행> 개념 자체를 부인한다.

인도 나타족 왕자(2계급)인 바르다마나는, 착한 일을 한다면서 하늘에 제사나 지내는 형식적인 브라만들이 해탈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해탈>는 깨닫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정화>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1계급들이 잘나서 1계급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무도 증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해탈은 신분과 상관없이 <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살생을 금지하며,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해탈의 기본 조건 아니겠는가?

자이나교의 교리는 단순하다.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한다. 고의든, 우발적이든 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영혼은 더럽다. 따라서 엄격한 계율 속에서 고통스러운 <고행>을 한다면 영혼이 정화되면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대부분의 브라만 의식은 인정한다. 그러나, 브라만들만의 특권을 반대하면서, 모든 계층이 고행을 통해 <구원>받는 다는 교리를 설파한 것이다. 수많은 사문 중에서 지금까지 인도인들에게 살아남은 사문은 <자이나교>밖에 없다. 그 핵심은 <고행>이었다.

<자이나교-아디나타사원>

<자이살메르사원>

티르탄카라상

3. 도시 공화국에서 태어난 석가

기원전 5세기, 강력한 철기를 가지고, 인도 북부(겐지스강가)에 살아남은 국가는 모두 16개국이었다. 그러나, 강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는 모두 <군주국>이었다.

군주국에서는 국왕과 브라만들이 독단적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수드라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윤회설>을 강조하였다. 수드라인 너희가 천민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너희는 이번 생애 내내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이 무렵, 석가는 기원전 566년, 도시국가인 네팔(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석가가 살았던 지역은 크샤트리아와 바이샤가 많았던 도시 지역이었다. 당시 도시 국가에서는 2, 3계급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공화 부족들은 군주 부족과 달리 모든 일을 부족내 유력자들이 모여 회의하고 결정하였다. 신라의 화백회의와 같은 <만장일치제>가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반면, 군주 부족들은 군주와 신관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공화국의 부족국가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국가들에 의해 하나하나 멸망해가고 있었다. 곧, 강력한 군주가 인도 북부 전체를 통일할지도 몰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석가는 브라만 신관들의 독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고, 약소국가의 2계급으로 태어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4. 석가 <사문>의 형성

석가는 브라만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브라만에서 말하는 <생명과 윤회>를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생로병사를 느끼고자 여러 브라만 수행자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29의 나이로 출가했다. 그 때, 갓 태어난 석가의 아들이 <라후라>였는데, <라후라>란 <장애물>이란 뜻이다. 석가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 것이다.

석가가 맨 처음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선정주의자들이었다. 선정주의자들은 <착한 일>을 많이하면 <해탈>한다고 말했다. 석가는 모든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아무리 해도 해탈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난다.

석가가 두 번째로 택한 길은 <고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해도 <해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석가가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명상>이었다. 보리수 밑에서 명상을 하던 석가는 35의 나이에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된다. 보리수란, 깨달음의 나무란 뜻이다. 또, 깨달은 사람을 <붓다>라고 하고, 성자를 <모니>라고도 하는데, 보통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가 명상으로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중도>였다. 선정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극심한 고행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는 구름과도 같은 제자들을 얻어 <교단 : 승가>를 만들었다. 승가란, 모든 자들이 평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동체 집단을 말한다.

석가가 만든 승단은, 공화국 체제와 비슷하다. 바르나 제도와는 달리, 모두가 평등하며, 서열은 먼저 들어온 순서로 정한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뭉쳐진 그룹집단인 것이다.

불교도는 네 그룹으로 이루어진다. 남성 출가자(비구), 여성 출가자(비구니), 남성신도(우바새), 여성신도(우바이) 이다. 이들간의 차별은 없다. 물론 가장 똘똘한 인물들을 10대 제자로 두긴 했지만, 그것은 어느 한 분야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을 능력별로 인정해 준 것이다.

석가 사후, 석존의 가르침은 대부분 구전이었기 때문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한 사람은 100년 후 아소카왕 시대의 제자들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경, 율법서를 율, 주석을 논 이라고 분류하여, 경,율,론 3장의 불교 지침이 성립된 것이다.

석가시대의 가르침을 보통 <원시불교 : 초기불교>라고 말한다. 원시불교란, <암송한 것>을 기억하여 가르침을 남긴 것이다. 석가와 같이 배우고 암송한 것을 함께 기억하고 되새겨 모아 적는다. 초기 석가의 가르침은 <아함경전>에 실려있다. 훗날, <아함경>으로 불리는 경전은 중국과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경이 가르침이라면, 율은 율법서이다. 율은 출가자들이 지켜야할 조문들을 모두 모아놓은 조문집이다. 물론 주석인 <론>은 후대에 달아놓은 것들이다.

5. 석가의 가르침

석가의 핵심 가르침은 <번뇌>였다.

번뇌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통과 고민>을 말한다. 보통 <고집멸도>라고 불리는 이 번뇌는, 고(고통), 집(고통의 원인), 멸(고통의 소멸), 도(소멸의 법도)를 총칭한다. 이 4가지 고통을 해결하는 과정을 <4제>라고 한다.

석가는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으로 8정도를 제시하였다. 8정도란, 고통을 없애기 위해 8가지를 바르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침이다.

올바른 견해(정견), 올바른 생각(정사유), 올바른 언어(정어), 올바른 행동(정업), 올바른 생활(정명), 올바른 노력(정정진), 올바른 기억(정념), 정신통일(정정) - 이 8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8정도를 이끌어가는 방법이었다. 브라만에서는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에서 충실하기 위해서 <계급에 맞는 착힌 일>을 하라고 말한다. 반면 자이나교 같은 사문에서는 철저하게 <고통스런 고행>으로 악업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는 말한다. 선정이건, 고행 이건 단지 하나만으로 <해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그럼 왜 중도만이 고통을 없애주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정>은 영적인 측면을 주로 강조한다. <고행>은 육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정신과 물질이 연결되어 일어난다.

석가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은 상호의존한다는 것이었다. 깨닫는 다는 사실 조차,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어떤 일을 겪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으로 얽혀서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

우주가 단지 브라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 자체가 인과관계에 의해 얽혀서 움직이고 있기에 절대적인 근본이라는 것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어떻게 아트만(생명)이라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연기설>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존재하는 것이 같이 존재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현상의 원인이 있다. 원인이 없다면, 현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만물은 서로 의존하여, 서로의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이다. <연기>의 본질을 알게 되었을 때,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중도>를 모르고 한가지 길만을 추구하는 것을 <극단 : 탁자의 모서리>라고 말한다. <극단>은 <해탈>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연기>의 세계를 깨닫는가?

석가는 깨달음을 아는 방법으로 삼법인(3개의 진리의 도장)을 말한다. <연기>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원인이 되어 돌고 돌기 때문에 결국 그 본질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는 3개의 진리로 표현된다.

제행무상이란? 제행은 <움직여 변한다>는 뜻이다. 무상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움직여 변하므로 결국 인연에 의해 연결된 세계는 사간에 따라 변하게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법무아란? 제법은 <율법, 진리>를 말하고, 무아는 <나란 없다>는 뜻이다. 즉,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나란 육체와 정신, 생각, 역사 등등이 어떤 원인과 결과로서 만들어낸 순간적 존재이다. 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나이며, 내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아트만)이란 없다. 즉, 보편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열반적정이란? 열반은 <해탈>의 불교식 표현이고, 적정은 <소멸>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이 <연기>로서 돌고 도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과 번뇌>가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8정도를 행동으로 옮기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면 해탈한다는 것이다.

6. 석가의 가르침을 남긴 마가다국

석가의 이러한 불교 철학과 종단(승가)은,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한 마가다국에 의해 보호되었다. 석가는 살아 생전에 갠지스 강 유역의 마가다 지방에서 깨달음을 찾으며 고행을 했었다. 또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포교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이 마가다 왕국이었다.

마가다 왕국은 북인도 16대 강국 중의 하나라 불교, 자이나교의 발상지로 불리는 국가이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석가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영토를 주겠다는 말까지 했던 왕이다.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은 그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성지가 되었다.

갠지스 유역을 통일했던 기원전 5세기의 마가다국과 달리 기원전 4세기의 마우리아 왕조는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면서 불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마가다 왕국의 후손으로서 아리안 전통 직계인 마우리아 3대왕 아쇼카는 불교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석가의 연기설은 당시 통일국가 이념으로도 제격이었다. 연기설이란, 모든 사물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연결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각 부족별로 흩어져있던 당시 사상 체계를 통합하는데 딱 좋은 사상이었다.

개체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인과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즉, 개별적인 것들은 전체적인 것의 일부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부족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들은 좋던 싫던 다른 부족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궁극적으로 통일된 전체에 의해 규제받게 된다. 전체라는 것은 개별 부족을 넘어선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자를 뜻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국가도 인연을 맺고 있다. 강력한 국왕이 출현한 것도 그 인과 관계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국왕은 모든 백성을 때려잡는 국왕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슬기로운 지배자이다. 브라만 신앙에서 내려오는 정법(정의)의 지배자를 <전륜성왕>이라고 한다. 즉, 마우리아 왕조의 절대자 아쇼카 왕이 곧,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쇼카 왕은 이 전륜성왕의 브라만 신화와 불교를 연결시켜 버렸다. 전륜성왕의 통치를 돕기 위해 <미륵불>이 지상으로 내려와 백성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미륵불> 신앙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신앙이 등장하였다.

아쇼카 왕은 전륜성왕과 미륵불 사상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자신이 정법을 구현하는 왕이 되어 북인도를 통치함은 물론, 자신의 분신들을 주변국에 보내 불교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남부의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도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멀리는 이집트,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불교라는 종교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소카 왕 때의 불교는 <소승불교>라는 초기 불교였다. 아직 불교는 출가자들 위주의 불교였고, 국왕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왕이라고 여겨졌다. 부처가 되는 것은 개인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륜성왕

그러나 아쇼카 왕 사후, 기원전 2세기 무렵 불교는 또 다른 격동을 겪게된다. 아쇼카 왕이 죽은 뒤 약해진 마우리아 왕조는 서쪽에서 밀려온 이민족들에 의해 분열된다. 그리고, 만민 구원을 외치는 서방 종교와 서아시아 밀교 등이 들어오면서 <대중 전체의 구원>을 생각하는 불교가 등장한다. 이 때의 불교를 <대승 불교>라고 하며, 대승 불교는 비단길 등 교역로를 따라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대승 불교 이야기와 동아시아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나라까지 들어오게 된 <한국식 불교> 이야기이다. 동남 아시아로 내려간 소승 불교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겠다. 중국과 한반도로 넘어온 종파를 위주로 <대승 불교> 이야기를 좀 하고, 중국, 한반도, 왜로 넘어간 불교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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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2화. 아리아인의 시대와 인도 초기의 종교들

1. 종교는 인간의 염원이 만든 것이 아닌가?

자, 이제 불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종교 역시 크리스트교와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종교의 시작은 인간의 <열망>에서 시작된다.

역사가 인간들의 이야기이듯, 신과 종교의 탄생 역시 인간들의 당시 사회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 종교에서는 그것을 신이 내린 <고난>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앞뒤가 바뀐 말일 수도 있다. 신과 종교를 만든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의 교리가 확립되는 것 역시 당대의 <사회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여호수아>의 강림을 바랬던 열망은, 철기 시대에 접어오면서 심해진 핍박 때문이었다. 지금 인도에서 시작하려는 새로운 종교 역시 당대인들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정복민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사상적 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홍수나 번개 등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수많은 열망들이 고대 인도에서 다양한 신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자 그럼 불교가 탄생한 고대 인도라는 나라의 종교부터 한번 살펴볼까?

2. 초기 인도 원주민들의 신앙

인도 지방의 초기 문명을 흔히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초기 문명에 대해 우리는 약간 오해를 가지고 있다. 인더스 문명이 곧 인도 문명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틀렸다.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철기 시대 이전에 등장하였다. 인더스 문명 역시 청동기 시대의 문명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통일된 국가 체계가 없었던 초기 문명 시대였다. 문명이 등장하자마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생길리는 없지 않는가?

기원전 2500년경 등장한 최초의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가>의 작고 초라한 문명을 말한다. 천년간 계속된 이 문명은 작은 도시국가 단위의 문명이었다. 우리가 고대 문명 유적지로 말하는 모헨조다로나 하라파 문명은 국가 문명이 아니라 작은 도시 문명을 뜻한다.

<초기 인더스 문명의 도시 국가들>

이 문명을 이끌어간 사람들은 토착민인 <인더스인>들이었다. 인더스 인이란, 최초로 인도에 거주한 <드라비다인, 문다인> 등을 말한다. 이들이 만들어낸 청동기 문명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성곽과 도로가 정비되어 있었고, 홍수를 대비한 관개시설이 있었다. 이 시설들이 우선 만들어진 것은 인더스 강의 범람 때문이었다. 강은 농사를 짓기 위한 물을 제공하면서도, 큰 홍수 한방으로 주변 문명을 날려 버리기도 한다. 최초의 원주민들은 강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항상 홍수라는 큰 변수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초기 원주민들은 큰 목욕탕을 지어두었다.

목욕탕은 물(강)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다. 그들의 종교는 단순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존재들에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큰 곡식창고를 만들어놓고, 커다란 범선을 이용하여 주변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했던 이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홍수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숭배대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생식기였다. 노동력이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에 남성의 <정자>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또, 소를 숭배하는 풍습도 이미 존재했었다.

<모헨조다로
족장집에서 나온 동상>

<모헨조다로의 춤추는 소녀상>

<하라파에서 나온 인장과 유물>

<하라파의 공동 시설물>

<하라파의 주거지>

<하라파의 사원>

<모헨조다로 유적지의 흔적>

<모헨조다로의 목욕탕>

<모헨조다로의 목욕탕과 배수시설>

3. 청동기 민족을 정복한 철기인들

크리스트교 이야기를 할 때, 유대인들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기원전 12세기라고 했었다. 기원전 12세기는 세계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 그 이유는, 청동기 시대가 철기시대로 변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줜 13세기무렵 히타이트 인으로부터 시작된 철기 문물은 유라시아 대륙을 모두 흔들어놓았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인도에 내려온 철기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중앙아시아 북부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아리아> 인들이었다. 아리아 족은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의 기원을 이룬다. 이들이 서부 유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많은 유럽인들의 선조가 되었다. 히틀러는 순수한 <게르만>인은 <아리아인>의 핏줄이라면서 엄청난 수의 유대인을 학살히기도 했었다.

반면, 동쪽으로 이동한 아리아인들은 인도 원주민인 <드라비다 인>들과 충돌하였다. 청동기 문명의 백성들이 철기 부족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하여 인더스 강 유역(펀자브 지방)까지 진출한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문명을 정복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좋은 땅을 찾아 끝없이 진출하였다.

기원전 10세기,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강을 넘어 갠지스 강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청동기 시절의 수많은 부족들이 이들에게 굴복하였다. 인도에 진출한 아리아인들을 유럽의 아리아인들과 구별하여 <인도-아리아인>이라고 부른다.

유목민족인 아리아인은 원주민을 정복하여, 화려한 도시 국가를 건설한다. 아리아인의 부족 족장은 <라진 : rajan)이라고 불렀는데, rajan은 <종교 : region>라는 의미의 어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리아 인의 국가는 농경을 주로 하는 철기 국가였는데, 수많은 아리아 부족들이 각각 영토를 확보했기 때문에, 부족의 <신> 역시 각각이었다.

그러나, 아리아 인들은 정복민만 노예로 삼았을 뿐, 각 부족간의 전쟁에는 신중한 편이었다. 최소한 기원전 5세기 까지는 이런 부족단위 국가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부족간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전쟁을 참았기 때문에, 아리아의 각 부족들이 믿는 신은 모두 평등했다.

초기 아리아인의 브라만교를 보면 하늘, 지상, 공간의 3 구역에 모두 33명의 신(데바)이 있었다. 이 33명의 신은 모두 평등하다. 결국 33명의 자연신이 훗날 브라만교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는 이 33명의 자연신을 찬양하는 찬양가와 기도문 등을 모아놓은 것이다. 원래 <베다>는 <지식을 안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지식을 안다>는 것은 자연현상을 안다는 것과 같았다. 자연현상을 다스리는 것은 33명의 신이었고, 이 신에 대해 알고 있는 <신관>은 당연히 최고 지배층이었다.

<베다>는 500년간 계속 이어진 찬가들을 모으고 모아 4개의 찬가집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기원전 900년경에는 거의 정리가 끝나간 듯 싶다. 이 찬가집인 베다는 각각 독립적으로 4개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먼저, 찬가 자체는 <본집>으로 정리된다. 제사를 위한 찬송가 쯤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제사 규칙을 적어둔 <브라흐마나>가 있다. <브라흐마나>를 알고 있는 자는 <신>과 접촉하는 자로서 지배층이 된다. 다음으로 숲속의 비밀을 적은 <아란야카>가 있다. 마지막으로 브라만의 철학을 말하고 있는 <우파니샤드>가 있다.

물론, 베다 자체에 이 4가지가 다 들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베다>는 이 4가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때 진정한 베다로 인정된다.

4. 바르나 제도의 엄격함

브라만교의 근본 철학은 <우파니샤드>이다. 그런데, 우파니샤드 철학이 완성된 것은 베다가 완성되고 한참 후인 기원전 5세기 경이다. 즉, 베다 문학보다도 400년 정도 이후인 것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초기 아리아인들은 굳이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신관>은 최고 계급이고, <노예>는 마지막 계급이다라고 말해 버리면 끝이다. 뭐하러 복잡한 철학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겠는가?

<브라만의 모습 : 알타이 벽화>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 신>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브라만교의 철학을 위협하는 계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브라만교를 만든 아리아인들은 사회 계급을 4계급으로 나누고, 그것을 <신>이 나눈 것 처럼 행동하였다. 즉, <제사> 규칙을 아는 자들이 최고 계급인 <브라만>이 된다. 브라만은 곧 신이거나, 신의 대리자이다.

왕족과 귀족은 브라만보다 낮은 제 2계급이다. 2계급은 정치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을 크샤트리아라고 부른다. 일반 백성들은 3계급이며 바이샤라고 불렀다.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한 원주민들은 <노예>계급으로 수드라라고 부른다.

이렇게 4계급으로 사회를 나누고, <바르나> 제도라고 불렀다. <바르나>란, 색깔을 뜻하는 단어이다. 원래 아리아인이 유럽인과 같은 계통인 백인이기 때문에,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과 구분하기 위해 바르나라고 불렀다.

우리는 인도의 신분 제도를 <카스트 제도>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15세기 경 유럽에서 건너온 포르투갈 상인들이 쓴 말이다. 카스트란, 바르나 제도의 4계급에서 계급마다 <출생> 족보를 따져서 수많은 계층으로 다시 분화한 것을 뜻한다. 즉, 직업, 결혼관계 등을 따져 여러 종족(종성)으로 분화되는데, 이것을 카스트(종성)이라고 다시 부른 것이다. 카스트는 바르나와 쟈티(JATI : 출생)이란 단어의 합성어이다. 즉, 카스트는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용어로 지금 인도의 신분계층을 분류하는 용어라고 할까?

   지금 말하고 있는 제도는 21세기 카스트 제도가 아니라, 고대 4계급이 존재했던 바르나 제도를 말하려는 것이다.

고대 <바르나>제도의 특성은 철저한 신분 차별에 있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 자체를 막아 버렸다. 제사계급과 아리아인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실제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2계급(크샤트리아)이 제 1 계급인 브라만의 권위를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크샤트리아 계급은 철기시대의 보편적 현상인 정복 전쟁을 시작하였다. 작은 부족들은 큰 부족에게 통합되었고, 중앙집권국가의 시대가 열릴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 부족간의 전쟁과 부족간 통합은 물자 부족을 가져왔고, 3계급인 바이샤들이 상공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3계급은 통일된 국가가 필요했다. 커다란 국가에서 통일된 상업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국가의 통일은 다양한 관세나 규제 등의 장벽을 허무는 길이기도 했다. 동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것보다 국제적 무역이 더 효율적이지 않는가?

정복사업과 상공업의 발전은 2,3 계급이 브라만 계급에 도전할 명분을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 드디어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종교들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자이나교와 불교였다. 새로운 종교들은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등장하였다. 그러나, 브라만교는 왜 브라만이 위대한지 설명이 부족했다.

브라만 족들은 급해졌다. 왜 브라만이 지배계급인지를 정당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브라만은 형식적으로 존재했던 우파니샤드 철학을 실제 사회에 맞는 철학체계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비로소, 브라만교의 걸맞는 사상 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5. 우파니샤드 철학의 <업그레이드>

브라만교의 철학인 우파니샤드는 <신관>들이 자신의 제자들엑게 입으로 전하곤 했다. 즉, 그들만의 구전 철학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이 철학은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편집되어 <철학>으로 정리되었다. 이 철학을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이 철학의 기본 사상들의 영향을 받거나 반발하면서 석가모니의 <불교 철학>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알다시피 인도의 왕자 출신으로 제 2계급인 왕족이었다. 1계급의 독주를 막기 위한 역사적 사명이 2계급인 석가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 그럼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철학을 한 번 살펴보자.

이 철학의 핵심은 <우주와 인성의 일치>이다. 우주의 근원을 브라만이라고 하는데, 그 브라만은 개인의 인성(아트만)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원래의 아트만은 myself라는 재귀대명사였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인간은 우주의 법칙으로 태어나고 죽는다. 그런데, 우주에 음양오행이 돌듯이, 인간 역시 끊임없이 돈다. 만약 착한일을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우주의 법칙에 의해 다음 세상에서는 <브라만>으로 태어난다. 즉, 브라만이 제 1계급인 이유는 단순히 부모를 잘 만난 것이 아니라 전생에 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음 생까지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대표적인 윤회설로는 <오행설>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은 자는 흙과 물이 된다. 물은 비가 되어 내리고 흙을 적셔주면서 다시 하나로 만난다. 흙과 물이 만나 곡식을 이루고, 남과 여는 그 곡식을 먹는다. 남자가 먹은 곡식은 정자가 되고, 여자가 먹은 곡식은 아기집이 된다. 정자와 아기집이 다시 만나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하나로 태어난다.

즉, 개인의 생명(아트만)은 죽은 뒤 우주의 법칙(브라만)이 되었지만, 다시 윤회하여 생명(아트만)으로 재탄생 되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브라만으로, 나쁜 일을 하면 수드라로 윤회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런데, 윤회의 예외로 <신도>가 있다. 신도란, 신의 길로 가 버린다는 뜻이다. 윤회의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이 숲속의 비전을 찾아 산 속으로 숨어 버리면 윤회하지 않고 <신의 영역>으로 가 버린 다는 것이다. 이미 윤회를 알기에,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떠난다는 것을 <업>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업>설과 연결된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브라만이 잘난 것은 전생에 착하게 살아서이고, <신>의 세상에 가는 것도 브라만 뿐이라는 것이다. 전생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수드라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수드라야 그렇다 치더라도, 크샤트리아와 바이샤는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우파니샤드 철학은 브라만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철학이었지만, 다른 계급의 반발을 불러오는 철학이기도 했다. 자, 그럼 2, 3계급이 어떻게 우파니샤드에 대해 반항했는지 한번 들여다 볼까나?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영혼의 스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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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게하르트 베르 (뜰,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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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오브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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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기태 (판미동,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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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산책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이태승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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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힌두교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박양운 (가톨릭출판사,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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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나를 흔들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법륜 (샨티,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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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의 세계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소서정첩 (여래,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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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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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길 팔정도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아름드리미디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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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편집부 (풀빛,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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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일본사 이야기 21 - 역사의 흐름은 유통경제의 발달이었다.

1. 막부의 중농정책과 떠오르는 상인들

 

에도막부는 다른 막부들 보다 훨씬 더 철저한 중농정책을 실시한 막부였습니다. 이전 가마쿠라 막부가 국내외 무역을 통한 재정 확보를 중시한 것과는 달리, 에도막부는 사회 분위기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어느 정도 잉여생산물이 축척된 농업 자본을 막부의 재산으로 삼았습니다. 직업의 근간은 농업이었고, 성리학적 분위기에 의해 상공업은 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발전하는 사회 경제적 변화를 막부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농업기술의 발달과 중국, 조선에서 선진 농법이 계속들어오면서 농경지의 면적은 계속 증가하고, 개간이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시대 후기에 광작(넓은 영토를 가지고 농사짓는 것)이 성행하고, 농촌경제의 발달로 토지를 확보한 부농과 토지가 없는 빈농으로 신분이 분화되어 가죠? 에도 막부 역시 같은 시기 같은 상황을 겪게 됩니다.

정부가 농업을 강조하면서 농업 생산력은 엄청나게 성장했고, 그 결과 농업을 통해 거대한 이윤을 창출한 부유한 농민(부농)과 토지를 잃고 농업 노동자로 전락한 빈곤한 농민(빈농)이 등장합니다.

조선 시대 농업경제 발달이 양반층에도 부유한 양반과 몰락한 양반을 초래했듯이, 일본에서도 무사층의 분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부유한 무사들은 영주가 되어 엄청난 재력을 축척하지만, 빈곤해진 무사들은 사회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또 빈곤해진 무사들은 조금밖에 없는 토지에서 최대한 세금을 쥐어짜기 위해 농민들에게 많은 세금과 부역을 강요하게 되어, 사회가 동요하고 농민반란이 많아지게 됩니다. 조선시대 임술민란이나 홍경래의 난과 같은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보세요.

반면, 농업경제의 발달로 남는 생산물을 시장에 유통하려는 세력이 등장하면서 5일장이 확대되고, 재산을 축척한 상인집단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대상인 집단은 농촌경제를 이끌어간 부농출신도 있었고, 처음부터 상업과 수공업을 동시에 시작하여 유통경제의 신화를 이룬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18세기가 되면 농업을 중시하는 막부의 경제정책이 점차 무너지고, 도시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에도 막부의 전통적인 카스트적 신분질서를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2. 대상인이 출현하였으나, 정부는 이들을 끌어안지 못하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조선, 명, 에도막부 후기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각 국가들은 이렇게 축척된 상업자본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습니다. 동아시아 국가의 당시 관학은 모두 성리학이었습니다. 3국가 모두 후기에 좀더 실용적인 양명학이 성행하고 실학과 국학이 등장했지만,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하거나, 지배집단에서 소외된 이들이 받아들인 학문이였습니다. 전통적인 농업주의의 유교이념에서는 <중농주의>를 근간으로 토지에서 세금을 걷는 것이 경제의 원칙이라는 입장을 계속 고수하였습니다.

에도 막부 역시 성장하는 상업자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습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미쓰이 등 재벌가가 등장하였고, 이 재벌가들은 금융업을 통해 막부, 번보다 더 큰 경제적 위세를 떨치게 되었죠.

대상인들은 동업자 조합을 만들고 물품에 대한 독점권을 얻어 상품 가격을 통제하였습니다. 서양식 길드 체제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상공업자들은 도시의 대상인들과 결탁하여 서로간 상업규칙을 마련하고 동업조합의 운영절차를 작성하였습니다. 서로간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상업의 운영방식을 정하고 정해진 규칙 안에서 도시내 상공업을 완전 독점 장악하였습니다.

에도 막부는 중농정책을 고집하면서도 이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국가 경제권은 상업자본이 가지고 있었고, 쇼군과 다이묘도 금융업자들에게 많은 부채를 지고, 상업자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막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업이 근본산업이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전통 농업경제이념인 성리학을 백성들에게 계속 주입하는 정도였습니다. 또, 지나친 상공업에 의한 <사치>는 위험하다는 입장에서 <검약령>을 내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소상인들을 농업으로 복귀시키는 <귀농령>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에서 등장한 상업자본 역시 명, 조선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로의 경제적 근대화에 성공한 사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일부 일본학자들은 명, 조선과 달리 일본의 자본주의는 이미 에도 막부 말기에 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립하려면, 그 자본이 사회전체의 유통경제를 장악하고 자본에 의한 새로운 신분질서와 경제질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비록, 에도막부에서 이전과 다른 상업자본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 자본은 도시내 동업조합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자본으로 근대적 독점 자본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자본인 듯 합니다.

또, 축척된 상업자본은 막부의 군사력에 의해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고, 실제 막부는 상업자본이 막부에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언제든지 상업자본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즉, 에도 막부의 상업자본은 막부와 결탁하거나, 막부 재정에 협조하는 형태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본주의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에도 막부기 일본의 근대화론은 아직 시기 상조의 이론같습니다. (에도 막부가 일본에서 경제적 근대화를 이루었다면, 신해통공이 이루어지고 상공업이 활성화된 조선 정조 때도 근대화 기점으로 생각해 볼만 하네요.)

 

3. 도시 중산층의 문화가 등장하다.

에도 막부 후기, 급격하게 발달한 상공업은 무사계급과 다른 <중산계급>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산계급이란, 도시 상인계급을 말합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도시 상인들은 기존 무사 계급의 문화와 차별되는 좀더 서민적인 문화를 만들게 됩니다.

보통 도시를 거점으로 성장한 도시 상인 집단을 <죠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도시 중산 문화를 <죠닌 문화>라고 부르죠.

죠닌 문화의 핵심은 상인과 농민들에게 글과 예절 등을 가르치는 학교가 전국적으로 등장하여 <교육의 기회 확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중산층들은 더 높은 문화와 신분 상승을 위해 장남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주고, 차남 이하는 상인교육을 시켜 가문을 유지하였죠.

이 죠닌 문화는 서민적인 통속소설, 가부키 등을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로 발전합니다. 18세기 이후 일본의 겐로쿠 문화, 가세이 문화 등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면서 무사 중심의 상층 문화가 점차 상인 계급의 문화로 이동하였습니다. 특히, 돈 있는 상인들은 일본 풍속화가 들의 그림을 집안에 보관하는 것이 문화의 척도라 생각해서, 풍속화(우키요에), 목판화(니시키에) 등의 회화 기술이 발전하게 됩니다.

또, 중국 당나라 시기 견당사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한 차를 마시는 예법(다도)이 지배층을 넘어 죠닌층에게 확대되어, 다도 예법은 일본인 모두에게 교양을 판가름 하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4. 성리학보다는 실학이 필요한 시기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이념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경향을 탈피하여 새롭운 관점에서 유학을 바라보고, 백성과 국가에 실제로 필요한 학문을 연구하자는 경향을 역사학계에서는 <실학>이라고 부릅니다. 조선의 실학은 <토지 경작자에게 토지를 맡긴다>는 이념의 중농학파, <상공업을 통한 부국강병을 실현한다>는 중상학파, <우리 것을 알아 실사구시로 활용한다>는 국학론 등이 있었죠.

일본 역시 새로운 경향의 사회이념이 유사한 시기에 등장합니다. 일본 에도 막부의 국가 유학은 조선에서 건너간 <성리학>이었습니다. 성리학 중에서도 군신상하의 대의명분과 사무라이 윤리에 활용하기 좋은 <주자학>이었죠. 막부 지배층은 막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의 충성, 의리, 대의명분, 국가 윤리 등을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막부 후기가 되면서 양명학자들이 많이 늘어납니다. 양명학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우선이라는 성리학의 <격물치지>보다, 실천과 수양이 먼저라는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학문이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사회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변화하면서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죠. 그러나, 막부는 사회 동요를 막기 위해 양명학을 금지하고, 국가 관학은 오로지 성리학이라고 강조합니다.

양명학은 책을 읽는 깨달음보다 실천이 우선이라는 간명한 논리로 지배계층에서 소외당한 하층 무사나 도시 상공업자에게 환영받습니다. 또 성리학이 강조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논리와 다르게, 지역의 자율성이나 도시의 상공업 활동에 관대한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막부에서는 양명학을 <반체제적인 불순한 사상>으로 생각하였답니다.

명대의 양명학이 조선을 거쳐 일본에 들어왔다면, 청대의 고증학도 일본에 수입되었습니다. 고증학은 중국 청조 시기에 사물의 참 뜻을 깨닫고, 원전의 올바른 뜻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신유학이었습니다. 중국 청나라가 이민족인 만주족 왕조이기 때문에 유학 활동이 철학적이지 못하게 된 것에서 비롯된 학문이지요. 일본에서도 이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공자, 맹자 등 중국 선진 유학자들의 원전을 연구하는 파가 등장하는 데, 이러한 파를 <고학파>라고 합니다.

또 하나, 에도 막부기 유행한 사상 중의 하나는 <난학>입니다. 에도 막부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친 까닭에 교류했던 서양 국가는 네덜란드 뿐이었습니다. 난학은 네덜란드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서양 의학서 등을 일본식으로 해석하면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 후기에 가장 중요한 사상은 <국학>입니다. 국학은 조선으로 말하면 <실학>이라고 볼 수 있는 학문이죠.

에도 막부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하여 서민 문화가 널리 보급된 반면, 쇄국 정책으로 외래 문화와 사상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양명학이나 고학, 난학 등이 들어왔지만 지배층 일부의 학문이었고, 서민들 개개인이 인식할 만한 학문은 아니였죠.

국학은 서민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면서 이 일련의 사상들을 묶어 <일본 고유의 학문>이라며 부르는 말입니다.

일단 번학, 향학 등 서민교육기관이 증가하면서 서민적인 유학 교육으로 <도덕과 윤리 교육>이 등장하였고, 서민적인 오락이자 문학인 일본 고유의 가부키 양식이 완성됩니다. 또 풍자소설(센류)와 돌림노래(연가), 쿄카 등이 유행하였죠. 안도 쇼에키는 무가사 농민들을 수탈하는 사회가 과연 옳은 사회인가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민적인 학문 전통 속에서 일본 고전과 일본 고대사를 연구해서 독자적인 일본사를 완성하고 서민들에게 전파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이들을 흔히 <국학론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중국식 이념인 유교와 불교를 배격하고 일본 자체에서도 고대부터 내려온 사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고대부터 내려온 고유 사상이란,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의 <존왕왕이 사상>입니다. 천황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강림>을 이념적으로 정리하여, 왕권의 강화가 일본 역사의 발전방향임을 강조합니다. 또 일본 고유의 사상인 <신도>를 복고해서 일본인의 정신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이 국학사상이 일본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지대하였습니다. 일본 근대기 왕을 중심으로 모이자는 <근왕운동>, 조선을 쳐들어가 일본의 우월함을 증명하자는 <정한론> 등의 기초 이념이 국학 사상에서 이미 보여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는 에도 막부가 동요하면서 막부타도운동이 전개되는 시점의 이야기를 전개해보겠습니다. 막부 타도운동이 성공한 그 다음 이야기는 메이지 유신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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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3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7 - 무로마치 막부의 경제정책과 막부외 붕괴
2007/10/13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6 -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
2007/10/12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5 -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라!(막부타도운동과 겐무신정)
2007/10/11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4 - 봉건제도의 등장과 선종의 유행
2007/04/24 - [초중고방/요청자료실] - (요청자료) 일본 토지제도 변화과정과 무가정권의 출현 배경
2007/03/18 - [동양사정리/중국사이야기] - 남북조의 귀족 1 - 호족의 성립과정과 호족의 개념
2007/02/08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3 -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정치 핵심 알기
2007/02/08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2 - 가마쿠라 막부의 사회 구조와 법, 종교 분석
2007/02/08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1 - (중세입문) 일본 중세사회의 특징과 봉건제도의 성격 개관
2007/01/28 - [기타사정리/주요지명] - 일본역사 편 들어가기 전 일본지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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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9 - 에도막부의 등장과 문물 정비

1. 에도 막부의 철저한 신분제도

에도막부를 창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자손들은 막부를 창립하고 바로 영주(다이묘)들에 대한 통제정책에 들어갔습니다.

일단, 막부 자체를 에도라는 수도에 세움으로서 중앙에서 막부가 지방을 총괄하는 식으로 통제하고, 반발하는 자들을 찍어눌러 전국시대와 같은 혼란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죠. 1,2,3대 막부의 쇼군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철저한 통제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일단 에도막부는 일본판 카스트 제도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신분과 계급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막부의 계급은 4계급으로 최고 계급은 무사, 다음으로 생산자인 농민, 그 밑으로 수공업자, 상인층이 존재하는 계급구조였죠.

무사는 지배층, 농민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생산자였지만, 수공업자와 상인은 농업생산물을 부수적으로 이용하는 계급이라고 인식하여 천대하였습니다. 실제 막부 재정의 핵심이 농민들이 내는 세금이었거든요.

2. 막번체제 : 명목상 중앙통제와 실제적인 지방 분할의 조화

에도막부를 창립한 도쿠가와 가문은 막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을 추구했지만, 전국시대 이후 성장한 각 지방의 다이묘들을 모두 찍어누를 수 없었습니다.

실제, 막부 집권 초기에 다이묘들을 모두 막부에 굴복시키려는 의도로 다이묘들을 탄압하였다가 엄청난 반란인 <유이 쇼세츠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거든요. 초창기 쇼군들은 다이묘의 자식들을 인질로 잡는 <산킨고타이 제도>라던가, 다이묘들의 토지세를 엄격하게 시행하였지만 반발만 사고 맙니다.

막부의 4대 쇼군부터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 다이묘들의 권한을 인정합니다. 다이묘에 대한 산킨고타이 제도를 완화하고, 다이묘(영주)들의 영지를 인정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쇼군이 전국토의 1/4 정도만 지배하고, 나머지 영지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각각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 체제라고 합니다.

막은 중앙집권을 하는 쇼군의 <막부>, 번은 지방 다이묘들의 <영지>를 말하는데, 합하여 <막번>이라고 부르죠.

그러나, 한없이 지방 세력에게 권한을 주면 막부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는 대신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 장치들을 마련합니다.

가장 유명한 제도는 참근교대제도라고 한자로 읽는 <산킨코타이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에도 막부기 실시된 가장 강력한 다이묘 통제책이었죠.

그 내용은, 다이묘의 반란을 막기 위해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본국 : 번)과 수도(에도 : 막)를 1년씩 교대로 왕복하면서 머물게 하는 제도입니다. 다이묘는 식구들을 중앙에 머물게 하면서 지방과 중앙의 물자 유통을 원할하도록 책임지게 됩니다.

이 제도는 구두 계약이 아니라 에도와 번 사이를 오가며 군역을 한다는 조항을 성문법으로 만든 제도입니다. 신라시대에 본인이 수도에 머문 상수리 제도, 고려시대에 호족의 아들을 중앙에 머물게 한 기인제도와 비교가 되네요.

다음으로 막부의 지방 통제책은 <공역부담제도>입니다. 원어로는 <후신야쿠제도>라고 하죠. 이것은 국가가 원하는 공공 시설을 지방에서 돈을 부담하여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댐이나 치수공사, 군사거점의 구축 등을 지방 다이묘가 책임지고, 그 성과를 판단함으로서 중앙의 재정 부담을 덜고 지방은 중앙의 위세를 확인하게 되죠.

또 <일국일성령>제도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방 다이묘가 자신의 본성을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도 성벽을 지을 수 없다는 제도로, 성벽을 지어 중앙에 위협을 주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제도입니다. 이 법의 시행으로 지방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군사활동을 효율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고, 중앙에 대한 반란이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가신고소의 관례>도 있었습니다. 원래 막부의 위계질서와 사무라의 정신에서는 절대 가신이 주군을 고발하거나, 부하가 장군을 모함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에서도 백성이나 향리가 수령을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부민고소법>이 있었죠.

그러나, 조선에서의 부민고소법은 성리학 윤리를 어긴 강상죄와 국가반역죄는 누구든 고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대상이 부모건, 수령이건 고발할 수 있었죠.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도막부에서 관학화된 성리학 윤리에 의해 다이묘를 고발할 수 있는 특수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중앙에 반역을 꾀하는 다이묘는 누구든 고발할 수 있게 조치한 것입니다. 에도 막부에서는 이 조항을 이용하여 많은 정적들을 죽이는 행위에 이용하기도 합니다.

3. 건국 초기 : 행정 조직의 체계화가 이루어지다.

일본에서의 새로운 정권의 등장은 건국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역사처럼 신라 건국, 고려 건국, 조선 건국이라는 용어는 낯선 말이죠. 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왕조가 바뀐 적이 없고, 천황가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뀐 것은 지배층으로 권력을 가진 쇼군의 가문이 계속 바뀐 것이지요. 무사 가문인 막부가 바뀐 것일 뿐, 왕조의 변화라는 우리 식 개념과는 좀 다릅니다.

에도 막부는 아예 천황이 있는 수도인 에도에 살림을 차리고, 이전 막부와는 다르게 강력한 중앙, 지방 통제 정책을 실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일단,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쇼군입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쇼군 밑의 호죠씨 가문이 다 해먹었고, 무로마치 막부는 지방 다이묘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쉽게 망했습니다. 즉, 가마쿠라 막부는 중앙체제가 부실했고, 무로미치 막부는 지방 통제가 부실했죠.

따라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도 막부는 <산킨고티이 제도>등을 통해 지방을 통제하려고 무척 노력하였습니다. 그럼, 중앙은 어떻게 통제했는지 볼까요?

일단, 쇼군은 있으나 쇼군이 모든 정무를 처리하지 않습니다. 쇼군은 행정 전문가인 <로츄>를 등용하여 그가 중요한 정무를 처리하고 쇼군의 허락을 받게 하였죠. 조선으로 보면 재상, 현대 개념으로는 대통령 밑에 총리같은 거죠. 로츄는 쇼군의 두뇌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 쇼군의 일을 돕는 와카도리요시가 있었는데, 이것은 현대개념으로 공무원, 일선 비서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자리입니다. 요즘으로 보면 국가 행정의 일선에서 뛰는 장관직이나 차관, 공무원 같은 다양한 직함들을 말하죠.

또 쇼군에게는 쇼군을 지키면서 행정관들을 감시하는 <하타모토>의 직책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실과 같은 역할을 했죠. 하타모토는 행정관 뿐 아니라 유력 영주인 <고케닌>들의 동향을 쇼군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지방 영주 무사인 <다이묘>들의 근황을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쇼군에 충성하는 부하들이 한 직책을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집착하게 될 쯤에서 자리를 옮기게 했다는 점입니다. 중앙 고위직들은 모든 직위를 서로 돌아가면서 담당하고, 국가의 중요한 정책은 같이 모여 <합의>로 결정하였습니다.

즉, 이전 막부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쇼군이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중앙 정치를 통제하는 효율적인 제도였죠.

다음장에서는 에도막부의 쇄국 정책과 농업정책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이야기로 에도 막부기 상공업 정책을 다뤄보기로 하죠. 일본사는 깊이 있게 들어가지 않고, 핵심적인 것들만 간단간단하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가볍게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조선역사와 깊이 있게 관련된 부분들이 있어서 그 부분들은 다루고 넘어가야 할 것 같네요. ㅎㅎ



이글과 관련된 일본사 포스트 :
2007/10/17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8 - 전국시대 : 오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에 이른 다이묘들의 시기
2007/10/13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7 - 무로마치 막부의 경제정책과 막부외 붕괴
2007/10/13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6 -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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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8 - [초중고방/교수학습 다운로드 자료실] - (다운로드) 일본고대사 1-14편까지의 긴 포스팅을 한글파일로 짧게 요약했습니다.
2007/04/24 - [초중고방/요청자료실] - (요청자료) 일본 토지제도 변화과정과 무가정권의 출현 배경
2007/03/18 - [동양사정리/중국사이야기] - 남북조의 귀족 1 - 호족의 성립과정과 호족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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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8 - [기타사정리/주요지명] - 일본역사 편 들어가기 전 일본지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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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1장.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다

이번 페이지는 특별 기획으로 몇 편의 시리즈로 다루어 적어보겠습니다. 시리즈라고 해보았자, 생각나는 대로 적어서 오늘 출근 전에 다 마무리 하겠지만, 그래도 양은 많으니깐 시리즈가 되겠네요. 일단, 대학 때 모아논 자료들과 틈틈이 메모해논 자료들을 모두 꺼내놓고, 불교사에 대한 <전파과정 및 생성과정>을 포스팅 하려 합니다. 순서는 인도의 불교 - 중국의 불교 - 한국의 불교 - 일본의 불교 전파 과정으로 다루어 보고, 동남아시아나 소승불교 이야기는 차후 문제로 넘기도록 하죠.

이 포스트는 불교에 대한 종교사가 아니라, 불교가 아시아에 전파되면서 어떠한 역사적 상황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관점의 포스트입니다. 예전 기독교사나 카톨릭사를 포스팅할 때 처럼 종교적 관점에서 댓글 다시면, 답변 드릴 수 없습니다. 전 항상 강조하지만 <다믿교>입니다. 다~~~ 믿습니다.

1. 기원전 10세기 : 인도에 종교다운 종교가 등장하다 - 브라만교

석가가 태어날 당시의 인도는 기원전 6세기 무렵입니다. 인도는 기원전 10세기부터 5세기 무렵까지 아리아족의 시대였습니다. 아리아족은 기원전 1500년경 인더스강 상류에서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펀자브 지방에 진출하였는데, 기원전 1000년경 철기 사용이 확장되면서 갠지스 강 유역까지 진출한 민족입니다.

이들은 철기를 이용하여 기존의 <인더스 문명>을 철저히 파괴하였고, 기존의 인더스 문명인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브라만교>를 성립시켰습니다. 브라만교는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로서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라는 기본적인 계급 차별 구조를 갖추고, 이 4계의 계급을 또 다시 수십개로 세분화하여 신분차별을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계급구조를 보통 <바르나 제도>라고 하는데, 서양인들에 의해 카스트 제도라고 불리게 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카스트 제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르나 = 색, 인종>이라는 뜻이 원어로 정확하다고 합니다.

이 바르나 제도의 특징은 아리아인들이 스스로 지배집단이 되기 위하여 선주민들을 차별하기 위해 등장하였습니다. 문제는 아리아인의 가장 높은 특권계급이 <브라만 : 사제계급>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고대 사회의 특징인 <제사, 군사>개념이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만큼, 제사를 담당하는 브라만이 1계급, 정치, 군사를 담당하는 크샤트리아가 2계급을 이루었던 것이죠. 3계급인 바이샤도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나름대로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4계급으로 분류된 수드라는 아리아인이 아닌 비아리아족으로서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노예계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브라만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브라만교 포스트를 보시고, 일단 여기서는 개념만 알고 넘어갑니다.

2. 기원전 5세기 : 반브라만 운동이 시작되면서 등장한 철학은 <윤회논쟁>을 가져오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인도에서는 이제 <브라만의 신성성>에 대한 반발운동이 전개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적 존재>, <신의 은총>이라는 신성성을 매개로 지배집단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선민사상>이 많았습니다. 유대교가 그러하였고, 고대 동아시아의 천손강림 사상도 그러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 발전과정에서 점차 <신성성>보다는 <현실정치의 이해관계>로서 선민사상이 극복되고, 국왕권이 강화되듯이 인도에서도 제사계급인 브라만을 극복하고 <정치세력의 결집>을 추구하는 운동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운동들은 곧 제 2, 3 계급은 크샤트리아(도시국가 지배집단)과 비이샤(상공업 집단)의 세력 확대를 가져왔고, 크샤트리아 중심의 반브라만 운동은 인도에서 큰 이슈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 반브라만 운동이 본격적으로 성렵된 것은 철기를 사용한 정복사업이 확장되고, 정복사업 속에서 상공업 계층의 활약 무대가 넓어진 것에서 기인합니다.

그 결과 브라만교 내부에서는 <윤회나 해탈>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우파니샤드 철학이 등장합니다. 원래 브라만교에서는 <윤회>를 강조합니다. 이 윤회란, 전생에 신의 은총을 받은 자는 지배집단이나 높은 계급으로, 전생에 신에게 불경함을 지은 자는 노예로 태어나므로, 과거의 업이 모여 끊임없이 전생과 내세에 영향을 준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우파니샤드 철학은 우주인 브라만과 생명인 아트만을 알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한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배집단의 논리였던 브라만교를 철학적으로 만들어주는 데 큰 역활을 합니다.

하지만, 이 철학에서 주장한 <윤회>에 대한 개념에 대하여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의 입장은 사뭇 달랐습니다. 특히 크샤트리아 계급은 브라만의 <윤회>개념이 너무 브라만 계급 위주라는 것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3. 자이나교의 등장 - 윤회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고행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이러한 우파니샤드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윤회개념>을 종교적인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나타족의 왕자인 <바르다마나>입니다. 그는 브라만의 형식적인 제사라던가 신분차별에 반대하면서, 형식보다는 실제적 수행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가 주장한 이러한 내용은 곧 <자이나교>의 성립으로 완성되는데, 자이나교는 3가지 내용을 통하여 브라만교를 비판합니다.

1. 인간의 구원은 형식적인 제사와 신의 은총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고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 인간과 자연은 근본적으로 평등한 우주 속의 생명(아트만)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살생은 금해야 한다.
   3. 모든 인간은 자연 속에서 신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계급에 따른 불평등은 있을 수 없다

이 자이나교의 교리는 브라만의 형식적인 측면을 실제적 <수행>으로 바꾸고, 차별적인 계급구조를 <평등한 부족개념>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윤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 쯤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영혼에 때가 끼게 됩니다. 단지, 그 때가 적게 끼는가 많이 끼는가의 차이로 내세에 <좋은 윤회>인가, <나쁜 윤회>인가가 결정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윤회 자체를 부인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영혼에 낀 때를 제거하여 윤회를 벗어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혹독한 수련>, 즉 고행입니다. 고행을 해야 천상세계로 올라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 현실의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이 고통을 참는 다는 것에 <현세의 계급구조>는 더 이상 차별적일 수 없습니다. 단지, 낮은 계급은 더 많은 때가 끼었으므로 더 많은 고행을 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모두가 <해탈>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반대로 브라만교에서는 <수드라>는 절대 현세에서 해탈할 수 없으며, 수드라가 지배집단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 세상에서 <수드라>가 아닌 다른 계급으로 윤회하여, <다다음 내세에 해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더 많은 고행>을 낮은 계급에 강조하는 것 역시 완전한 평등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4. 불교 - 윤회는 고행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교는 자이나교의 이론에서 더 한걸음 진보적으로 나아갑니다. 불교는 윤회라는 개념을 다시 해석합니다. 즉, 윤회는 영혼에 때가 끼어 가혹한 수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등장이 인도 사회의 큰 충격이었던 것은 <윤회>를 깨달음을 통한 <해탈>로 규정함으로서 <현세의 신분 계급>을 부정했다는 점입니다. 원래의 윤회설은 지배집단이 수드라 집단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지배집단은, 수드라 집단에게 <너희는 전생에 악한 일을 많이 해서 수드라로 태어났어. 지금 너희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어>라고 규정하였고, 수드라가 지배집단에 충성함으로서 다음 세상에서 <아주 조금>의 악업을 씻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브라만교에서는 무서운 내세를 당하지 않으려고 체계적이고 신성적인 <제사의식>이 강조되었고, 수드라는 절대적인 복종만이 강요되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크샤트리아의 반발입니다. 크샤트리아와 바이샤는 <브라만>이 아니라고 해도 모두가 똑같이 <해탈>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종교교리나 이론면에서 전문가인 브라만과 싸워 이길 길이 없는 2, 3계급은 아주 단순한 논리로 <브라만>에 저항합니다. 이론보다는 <깨달음>만 있으면 된다고....

이 깨달음의 방법이 바로 불교의 팔정도와 수행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본체는 자비와 평등입니다. 이 자비와 평등을 깨달은 자는 계급적 차별이 무의미함을 알게 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인도의 불교 전개과정과 중국으로의 전파과정을 한번 볼까요?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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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관련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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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씨 이야기

1. 불교 수용과 소가씨의 주장

일본 고대 초기인 6-7C를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는 소가씨입니다. 일본 고대 초기의 야마토 정권은 유력 호족들이 연합한 상태에서 서로간의 합의에 의해 천황을 가장 신성한 권력자로서 모시는 구조였습니다.

일본의 천황은 이러한 유력 호족들에 의한 정권을 탈피해서 야마토 정권을 천황중심의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 싶어했지요. 그 당시 국제 정세는 중국, 백제, 신라, 고구려 모두 불교 수용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구축했으므로, 천황은 백제 성왕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불교를 통한 국가통합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도 카스트 제도를 초월한 만민 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한 교리가 국민 통합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 불교에서의 절대적인 구원의 신인 미륵불, 전륜성왕을 왕에게 대입하여 왕 자체가 부처가 세상에 내려온 것이라는 사상을 백성에게 주입하여 왕권을 신성시 하였죠. 즉, 불교의 수용 자체가 호족연합정권인 야마토 정권을 천황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 절대 안된다며 반대한 유력 귀족이 모노노베씨 가문 이였습니다. 반대로 이러한 정책을 찬성하며 선진불교문화를 수용하자는 유력귀족은 소가씨 집단이었습니다. 소가씨 집단은 천황의 후원을 받아 모노노베씨 집단을 압도하여 그들을 몰아내고 일본 조정의 실권을 장악합니다. 소가씨의 노력으로 일본에서는 불교가 공인되고, 국가가 중앙집권화되었습니다.

2. 소가씨 집단과 쇼토쿠 태자 사이의 비극

실권을 잡은 소가씨 집단은 여자를 천황으로 임명한 뒤 그 가문이 모든 정치를 독재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소가씨의 실력자는 소가노 우마코였습니다. 소가노 우마코가 천황으로 임명한 여자가 소가노 집단 출신의 일본 최초의 여제 스이코 입니다. 그리고 소가씨는 자신들의 친척 중에서 유력자인 쇼토쿠 태자를 황태자로 삼아 소가씨의 영원한 집권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인과 백제인을 스승으로 삼으면서 소가씨와 다른 사상을 배워갑니다. 고구려, 백제가 강해진 이유는 중앙집권화를 빨리 이루어 국왕권이 강했다는 생각에, 쇼토쿠는 소가씨 집단보다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고구려, 백제를 모방한 관등제(12관등제)와 율령(헌법17조)를 만들었습니다. 또, 견수사를 수나라에 파견하면서도 수와 왜가 대등한 관계임을 주장하는 등 자주적인 국왕권을 추구한 인물입니다. 또, 쇼토쿠 태자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라는 전설도 전해져 오는데, 이것은 그의 총명함과 천황가의 신성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입하려는 후세의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쇼토쿠 태자의 정책은 소가노 가문의 영광을 추구하는 가문 이념과 맞지 않았고, 태자는 결국 소가씨와 대립 끝에 정권에서 밀려나 불교 공부를 하면서 살다가 자살했다라고 합니다. 기록에는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도 하는데, 이건 신빙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3. 다이카 개신과 소가씨 가문의 몰락

소가노 가문은 점점 견제할 세력도 없이 독자적으로 너무나 성장했습니다. 그들을 견제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고, 천황마저 그들의 가문에서 독점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독재는 다른 귀족 가문들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결국 소가노 가문은 다른 귀족들의 견제를 받아 몰락하게 되는데, 그것은 전쟁이나 다른 공적인 방법을 통한 것이 아니라 암살이라는 방법이었습니다. 소가노 가문의 유력자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나카토미노 가문에 의해 하나하나 암살로 제거된 뒤 결국 몰락하게 됩니다.

다시 일본의 정권은 천황에게 돌아왔으며, 천황인 나카노 오예 황태자는 <개신의 조>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토지공전제를 표방하는 법인데, 그 내용이 당시 호족 가문들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즉, 호족은 모든 토지를 가질 수 없으며, 토지와 모든 백성은 천황의 것이라는 법입니다.(공지공민제) 과연 당시 그것이 잘 시행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법이 천황권 강화에는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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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골품제도에 대한 분석

1. 골품제도는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

골품제도는 신라 지배층내에서의 관등제도입니다. 이것은 신라 초기 독자적 영역세력인 <가, 간>층(족장, 군장층)을 신라 지배체제 내로 끌어들이면서, 상호 혈연성과 세력 규모에 입각하여 지배세력의 서열을 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골품제도는 신라라는 국가가 체제정비를 한 바로 직후 시기부터 그 골격이 등장합니다. 초기에는 12등급의 서열로 관등을 정했는데, 신라사회가 체계를 잡아가던 법흥왕기에 17관등제로 관등제를 정비하면서 골품제도가 서서히 정비됩니다. 따라서 골품제도란, 어느 한 시기에 카스트 제도처럼 법칙적으로 그 사회를 규정한 제도가 아니라, 신라 사회가 변동하는 방향성에 맞추어 계속 변화하면서 정비된 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골품제도는 신라 전체 시기를 통털어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제도이므로, 그 성격을 시대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2. 초기 골품제도의 특징

초기 골품제도가 성립될 당시 신라는 고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려는 시기였습니다. 신라의 골품제가 정비되는 법흥왕기에야 신라의 율령반포, 불교수용 등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골품제 역시 초기에는 체계가 빈약했다고 보면 됩니다.

골품제의 가장 큰 특징은 지배층인 <국인>에게만 적용된 제도라는 점입니다. 즉 이것은 초기 각 지역을 다스리는 족장세력을 지배체제로 끌어들이기 위해 지배층을 <골>족과 <품>족으로 나누어 이중적인 대우를 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이 골, 품으로 나눈 것을 골품제라고 합니다.

<골>족은 족장세력이거나 유력한 왕실 혈연세력인 <간>층을 - 거서간, 마립간 등의 지배층을 말한다 - 국가 체제로 끌어들여 특권을 부여받은 계급입니다. <골>족은 그 세력규모나 혈연성을 따지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였습니다. 이러한 골족이 신라에서 차지할 수 있는 높은 관직을 <간>층만이 소유하는 관등이라고 해서 <간군관등>이라고 합니다.

<품>족은 <간>층의 신하계급입니다. 그러나, 품족에서도 왕족, 왕비족의 일부 품족만이 관등을 받았으며, 유력하지 못한 <간>층의 관료, 신하 계급은 <품>족에 끼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적인 규칙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에는 <골>족에 지배를 받는 <노인>계급이 있습니다. 노인이란, <골>족의 지배를 받는 백성을 말합니다. 즉, 신라에서는 왕이 모든 지배층(국인)을 총괄하지만, <골>족은 하위 백성인 <노인>을 다스리는 이중적 구조였던 것이지요. 실제 신라에서 중앙집권이란, 골족의 특권을 폐지하면서 <노인층>을 국가가 직접 다스리는 시기를 말합니다.

3. 이후 관등제도의 변화

관등제도란 국가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골>,<품>을 그 능력에 따라 등급을 주어 편성한 관료제도입니다. 초기 신라에서는 12관등이 있었는데, 골족은 1-9관등을 주로 했었고, 품족은 10-12관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철저한 규칙으로서 <품>족은 절대 골족의 관등에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품족도 그 능력에 따라 1-5두품까지 있어서 5두품이 가장 높은 두품이었습니다.

그러나 10관등에서 더욱 업적을 쌓은 <5두품>들은 더 이상 진급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바로 <중위제>입니다. 중위제는 당시 10관등이었던 <나마>라는 관등에 1등나마, 2등나마, 3등나마로 관등을 세분하여 진급하고자 했던 <품>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만든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12관등으로는 더욱 성장하고, 거대해지는 신라사회를 감당할 수 없었고, 법흥왕은 12관등을 17관등으로 확장하였습니다. 이 17관등은 나마라는 관등 위에 <대나마>라는 새로운 10관등을 상설하여 <품>족들이 1단계 더 진급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품>족이 더욱 높은 관등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신라는 대나마에 <중위제>를 적용합니다. 이전 중위제인 나마 중위제를 없애는 대신, 대나마에 1등나마, 2등나마, 3등나마를 만들어 진급하고자 하는 <품>족들의 욕구를 일부 해소하였습니다. 즉, 중위제라는 것은 관등이 늘거나, 시대가 바뀔 때 1시대 1시기에만 적용되는 제도로서, 초기에는 나마, 17관등기에는 대나마에 적용하였던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영토가 확장되고 삼국통일기에 가까워지면서 신라사회는 또 다른 형태의 골품제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은 진골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통일기 신라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형성된 진골은 5두품 관료 중에서 공로가 뛰어난 사람에게 더욱 높은 관등을 줌으로서 <품>족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원래는 절대 10등급 이상으로 진출할 수 없었던 품족에게 신라 6두품 아찬까지 진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지요. 이로서 신라에서는 원래 있어서는 안될 새로운 <품>족이 탄생하였고, 이들은 하위 <간>층 귀족과 맞먹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품족을 신라에서는 <6두품>이라고 부릅니다. 즉, 6두품이 탄생한 것은 진골이 신라에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 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다음장에서는 진골, 성골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골품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당시 신라인의 생활을 규제하게 되됩니다. 또 6두품이 등장한 이후 하위 두품인 1,2,3 두품은 점차 있으나 마나한 두품으로 전락하여 평민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신라 골품제는 지배층뿐만 아니라 평민화 된 1,2,3두품의 생활까지 규저하게 됨으로서 신라인 대부분의 생활을 규제하는 제도로 자리잡습니다.

4. 골품제도에 대한 결론

이상으로 볼 때 골품제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는 제도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인도의 바르나제도(카스트)처럼 엄격한 혈연적 신분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 관등이 변하고, 정치 주체가 변하면서 바뀌는 제도입니다. 또한 골품을 구성하고 있는 신분이 6두품처럼 새로 등장하기도 하고, 1,2,3두품처럼 몰락하기도 합니다. 진골과 성골이라는 개념이 지배집단의 입장에 따라 등장하기도 합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