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역사'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2건

  1. 2010.07.30 화폐와 한국사(2) 우리 고대 역사에서도 화폐가 존재했을까? (2)
  2. 2007.02.15 우리 역사의 시작,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였는가? (5)

돈으로 보는 한국사 (2)

우리 고대 역사에서도 화폐가 존재했을까?

1.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을까?

이제, 우리 역사에서 사용한 화폐들을 한번 짚어볼께요.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돈>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문헌은,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고조선의 8개조 법>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과연 고조선 시대에 화폐를 사용했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교과서에서는, 고조선 시대의 화폐 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화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부족하고, 화폐를 만드는 틀(거푸집)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폐를 주조해서 사용했건, 중국의 화폐를 사용했던지 간에, 고조선의 <8조법>에는 <50만전>이라는 화폐단위가 나오기 때문에, 일단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또,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철전인 <자모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에 대한 해석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답니다. <자, 모>란, 글자체계에서 말하는 자음과 모음을 말할 수도 있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위계질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만든 우리 화폐와 우리 글자체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반면, <자모>라는 것이 일반적인 한자의 번역이라면, 명도전같은 중국 돈은 청동식 자모전, 철기시대의 돈은 철기식 자모전 등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돈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혹은, 자전, 모전과 같은 소액 화폐들과, 기타 돈들을 묶어서 자모전이라고 불렀다고 보기도 합니다. 뭐, 기록이 없으니 가설이 몇백개가 있어도 증명은 안되겠죠. 결국 결론없이 넘어갑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명도전>에 대한 해석 문제입니다. 명도전은 일반적으로 중국 돈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유물이 발견되는 지역은 고조선, 고구려의 영역이 많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화폐로 봐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제도전이나, 조도전 등은 제나라, 조나라 등 국가의 명칭을 사용했지만, 연나라는 연도전과 달리, 명도전이 또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는 것이죠.

최근, 명도전의 가치를 다시 조명한다거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강역을 다시 생각해보는 연구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항하기 위해 최근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집권당인 한나라당에서, 역사왜곡에 대항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 동북아 역사재단에 대한 지원 비용을 20% 삭감하고, 동북공정에 대한 관심에서 빠이빠이~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뭐,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기존 정치인들의 인식이 거의 비슷비슷하다는게 더 큰 문제죠.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한 비용을 4대강 사업에 투자하고,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지정하는 나라에 살고 있어서 우린, 아니 중국과 일본 사람들은 참 행복하답니다. ㅋ

반면, <도전>은 다른 화폐와 달리, 국가 권력이 직접 개입해서 권력을 상징하는 상징물(칼) 모양으로 만든 화폐이기 때문에, 중국 화폐가 확실하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아직 알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합시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여줄 자료가 너무 없네요. 우리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화폐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앞에서 보여드린 자료에 몇 가지를 더해 보여 드립니다.

이 중국 화폐들은 고조선과 고구려에서도 충분히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화폐들입니다. 고조선은, 위만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남방의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무역을 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중국의 화폐를 사용했겠죠.

다음은, 당시 중국의 진나라, 한나라에서 사용했던 화폐를 만드는 틀입니다. 이런 틀이 팍팍 나와준다면, 고조선에서도 화폐를 주조했다는 증거가 되겠죠? 실제, 내몽골 자치구 지방에서 이런 화폐 주조 틀들이 나오긴 하지만, 고조선에서 화폐를 주조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지는 않는답니다. 아마, 고조선도 화폐 주조를 했겠지만,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정도의 가설 수준이죠.

2. 삼국시대, 남북국시대에도 화폐를 사용했을까?

삼국시대에, 국가가 공식으로 주조한 뒤 유통시킨 화폐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단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곡물이나 직물이 <유사한 화폐기능>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또, <변한> 지역에서 철이 많이 생산된다는 역사 기록이나, 금, 은, 옥과 같은 것들을 보물로 여겼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광물들이 화폐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삼한 시대에, 무덤 밑에서 일정한 규격을 갖춘 철조각(철정 : 鐵鋌)이 발견되는데, 철이 많은 지역에서는 철을 가지고, 무기, 농기구, 화폐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중국의 동북공정과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연구를 하던 중, 발해의 화폐가 발굴되었고, 진품인지 규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화폐가 진품이라는 증거를 밝히는 작업이 쉽지 않을 뿐더러, 진품이 아니라는 증거를 밝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랍니다. 발해에 대한 역사서는 물론, 유물이나 유적조차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이지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은 발해이기에, 왕계표를 만드는 작업조차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이제, 백날 이야기 해도,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고대 화폐 이야기는 이 쯤에서 접고, 다음 장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실제 사용된 화폐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화폐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고조선의 중심지는 도대체 어디인가?

1. 기자 조선이란 무엇인가?

중국에서는 고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 항상 기자 조선을 염두에 두고 서술합니다. 고조선을 세운 것은 단군이지만, 중국에서 기자가 건너와 단군조선을 개화시켰고 단군조선이 문명화된 것은 기자의 영향이라고 말합니다. 실제, 조선시대의 지배층도 이 기자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고, 문명의 개화는 기자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침략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기자 조선의 이야기를 중국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기자가 중국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요하 서쪽에 위치한 조선으로 단군이 세운 단군조선과는 별도의 나라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단군조선이 새로운 세력인 지자조선에게 서쪽 영토를 일부 나눠준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서양이나 중국식으로 보면 봉건제도적인 성격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이 기자조선은 나중에, 또 다시 중국에서 넘어온 우리나라 유민세력인 위만조선에게 무너집니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중국 한무제에게 멸망당합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별도의 나라로 본다면 한사군이 고조선을 멸망시킨 사건은 단군조선과 무관한 일이 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조선만 고조선으로 기록해놓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위만조선은 한나라와 적극적인 투쟁을 벌이다 망한 나라입니다. 진국, 진번, 임둔이 한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으면서 중계무역을 독점하였고, 중계무역으로 쌓은 부를 이용하여 주변 임둔, 진번을 복속시켰습니다. 그리고, 흉노와 연합하여 한에 대항하려 했습니다. 위만조선의 이러한 행동은 한나라에게 커다란 위협이였고, 한무제는 적극적으로 위만조선을 공략하여 멸망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최근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다.

고조선은 그 중심지가 어디인지를 놓고 많은 이견이 있습니다. 실증주의 학자들은 고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을 거점으로 하는 평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대로 민족주의적인 학자들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최근에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이동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럼, 평양설, 요동설, 이동설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죠.

평양설을 주장하는 사례부터 볼까요?

고조선 중심지를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나 학자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평양설을 주장하던 시기가 북방 요동을 점령한 민족에 의해 침입을 받던 시기라는 점이죠. 북방 민족에게 침입을 받는 시기에 고조선 중심지가 요동이라고 주장하는 발언은 민족적 정체성을 훼손하고, 매국적 행위로 지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 예를 들어볼까요?

고조선 중심지가 평양이라고 주장한 문헌은 일단 <삼국유사>가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평양에서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고 기정사실화 해서 적어놓고 있죠. 일연이 삼국유사를 적은 시기는 몽고 침략기로서 문화적 정체성이 훼손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몽골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는 고조선의 중심지는 몽골이 점령한 요동이 아닌 평양이어야 할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안정복, 정약용 등 실학적 사관을 가진 학자들이 평양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에서 청나라가 강성했고, 청나라가 <만주원류고>라는 책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만주원류고는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를 청나라 중심으로 엮은 책으로, 청과 조선은 문화적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안정복과 정약용은 민족적 자존심 차원에서 단군 조선의 위치는 청의 근거지인 요동이 아니라 평양이라고 주장합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남으로 한정함으로서 청나라의 역사인식에 정면으로 반발합니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는 한반도라고 정하고, 훗날 영토를 넓혀 요서를 점령하고 연과 국경이 마주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쪽으로 확장된 국가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민족의 뿌리가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였습니다. 정약용은 낙랑, 현도, 임둔(함경도-평양-임진강)이 고조선의 중심지역이라고 주장합니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서는 고조선의 영토는 요서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였으나, 중심지는 어디까지나 평양임을 역설합니다. 조선시대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국지리지 등의 단군관련 기사도 평양중심의 단군조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제 문헌고증사학자들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것을 밝혀내려고 했습니다. 한군현의 위치가 요동이 아니라 한반도 내라는 것도 이들이 밝혀내려고 하였고, 단군조선의 위치도 객관적으로 밝히려고 했습니다. 이병도는 아사달은 평양, 패수는 청천강, 만번한은 박천강, 열수는 대동강으로 파악하여 고조선은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임을 주장합니다.

3.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이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의 공통점은 민족적 자긍심이 높아진 시대에 국가적 위상을 높이려고 한 시도와 맞물린다는 점입니다.

요동설은 조선 초기 권람의 <응제시주>에서 처음으로 보입니다. 권람은 낙랑은 압록강 북쪽이며, 기자조선은 요동과 요서에 걸친 광대한 영역국가라고 주장합니다. 정도전은 이러한 옛 조선을 계승한 조선왕조가 요동정벌을 하여 옛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북벌을 계획하여 당시 중국 명나라와 조선의 사이가 멀어지기도 합니다.

17세기에 남인학자들은 이러한 요동설을 체계화 합니다. 홍여하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후 북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청나라는 우리 옛 땅을 강탈한 도적이라고 말합니다. 이익, 이종휘 등은 이러한 사상을 <소중화 사상>과 연결시켜, 중국 정통 국가인 <명>이 멸망한 뒤 중화사상의 전통은 오랑캐인 청이 아니라 <조선>에 넘어왔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청>은 중국 영토와 옛 고조선의 영토를 강탈한 침입자라고 주장합니다.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했던 북학파 역시 <청>이 고조성의 영토를 차지한 국가라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실학자들을 거쳐 일제시대 민족사학자들에게 계승됩니다.

평양설과 요동설은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내리기 어렵습니다. 또, 평양설과 요동설 중 어느 하나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 입장이 애국적이거나 매국적이라는 판단도 내릴 수 없습니다. 평양설은 외세 침략에 맞서 우리 민족의 기원을 한반도에서 찾으려고 한 애국심의 발로이며, 요동설도 우리 영역을 요동너머로 정함으로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려는 시도였습니다. 즉, 이 두가지는 민족적 처지를 우선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시대에는 필연적으로 주장할 수 밖에 없는 상반된 학설이였던 것이지요.

4. 고조선 중심지의 이동설

이동설의 핵심내용은 고조선이 요동에서 건국하였으나 후에 한반도 내부로 이동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이였습니다. 실제 고조선 문화를 규정하는 것은 비파형 동검 문화인데, 비파형 동검이 출현한 것은 요서가 먼저이고, 요동으로 차츰 전파됩니다. 이것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서에서 요동으로 점차 이동함을 보여줍니다.

만약 고조선 중심지가 초기부터 평양이라면 한가지 모순이 생깁니다. 평양에서 발견되는 고조선기 세형동검은 그 상한선이 기원전 4세기를 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기원전 4세기 이전의 고조선은 무엇을 들고 중국과 항쟁했을까요?

즉, 요동에서 기원전 4세기 이전 발견되는 비파형 동검이였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조선의 중심지는 비파형 동검을 사용한 요동에서 뿌리내리고 있다가, 중국과의 항쟁(기원전 4세기 연의 침입)에서 밀린 후 평양지역으로 이동했다는 학설입니다. 평양으로 이동 후 한국형 세형동검을 만들어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학설이 최근에는 유력한 학설로 자리잡았습니다.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은 고조선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 고조선 이야기를 적을 때 상세하게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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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