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금관가야

고대 경제 무역권이 우리 민족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고대 경제 무역권이 우리 민족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는 역사적 사실일 수는 있지만, 정설로 인정된 내용은 아닙니다. 일부 사료의 파편으로 구성한 내용이거나,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역사적 내용들을 가지고 구성한 페이지입니다. 정설이 아니니, 글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런 내용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측면에서 만든 카테고리라는 점을 이해하고 읽어주세요. 1. 고대의 전쟁을 왜 공성전으로만 보는가? 우리는 고대의 전쟁하면 동이족과 중국족의 싸움.... 고조선, 고구려 등 북방의 패자들과 중국 춘추시대와 수당으로 이어지는 중국 국가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리고 동북아 국가와 중원국가의 싸움에서 주목하는 것은 부여성 - 요동성 - 평양성 등으로 이어지는 공성전을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더보기
우리가 완전히 잘못알고 있었던 고대 식읍과 녹읍의 개념 정리 우리가 잘못알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의 식읍과 녹읍제도 1. 고대 사회에서 식읍이란 무엇인가? 식읍이란, 전쟁 등을 통하여 공이 있는 자에게 내린 토지를 말합니다. 설명하자면, 왕실의 성원, 대공신 등 아주 소수의 일부 공훈자들에게 특별 급여로 땅을 지급하는 것을 말하죠. 땅을 지급한 대신 왕실을 번병하여 지키고, 국왕에게 충성하라는 의무를 부여합니다. 즉, 식읍은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부여된 땅입니다. 식읍으로 받은 땅에서는 인민, 토지 등을 포괄적으로 지배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광역 지배가 허용된 것이지요. 사실 식읍은 실제 땅을 내려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초기 국가시대에 소국의 족장들에게 원래 영토의 기득권을 허용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원래 소국 점유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한 것으로 .. 더보기
가야의 멸망 가야의 멸망 법흥왕 19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곧 첫째 노종, 둘째 무덕 셋째 무력과 함께 국고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왕은 김구해를 예로 대우하여, 상등의 위를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하였다. 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이사부에게 교를 내려 공격하게 하였다. 사다함은 그 부장으로 기병 5천기를 거느리고 먼저 왕궁 정문으로 달려 들어가서 백기를 세우니 성안의 사람들은 두려워 하였다. 이 때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고, 모두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구형왕은 신라와 대적하여 싸울 수 없게 되자 동기 탈지 이질금을 보내어 나라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 상손 졸지공 등과 신리에 투항하였다. - 삼국유사 권 2, 기이편 하, 가락국기 - .. 더보기
가야의 중계무역 가야의 중계무역 낙랑군에서 왜로 가는데 해안을 따라 한국(韓國)을 거쳤다. 잠시 남으로 갔다가 잠시 동으로 가면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금관국을 말하는 듯)에 이르는 데 7천리였다. 여기서 천리 한 바다를 처음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김해 지방의 구야한국(금관국)인 대라락의 위치를 말해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대가야는 낙랑, 대방군과 왜를 연결하는 중계무역(특히 철을 수출하였던 듯합니다.)을 통해 가야 소국들을 통제하면서 연맹왕국을 이끌어 갑니다. 이 사료는 초기 대가야의 중계무역을 제시하는 사료로 인용됩니다. 더보기
금관가야의 멸망과 식읍(부체제)의 등장 금관가야의 병합기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국주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장남 노종(奴宗), 둘째 덕무(武德), 세째 무력(武力)의 세 아들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오니, 왕은 이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상등의 지위를 주고 그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 아들 무력은 조정에 벼슬하여 각간에까지 이르렀다. - 삼국유사 - 자료 참조 : 법흥왕 대에 금관가야가 병합되는데, 이 사료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신라는 금관가야를 병합하면서 그 일족을 흡수한 사실입니다. 왕이 이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지위를 준다는 것은, 가야국에 대한 예우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더 연구되어야 알겠지만, 신라 통일기에 금관가야계 김씨인 김유신 등이 신라 공신으로 성장하였다가, 중대 이후 골품제의 한계.. 더보기
가야에서의 반란 - 포상 8국의 난 포상 8국의 난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