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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신라의 중앙 제도 2 - 중앙정치가 발전하다. 신라의 중앙 제도 2 - 중앙정치가 발전하다. 1. 신라 초기의 중앙 제도 변화 신라 초기의 관제의 특징은 어떤 뚜렷한 기준에 의해 관제가 정비된 것이 아니라 씨족적 유습들이 그대로 남아서 중앙 관제로 정착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초기에는 대보가 있어서 씨족장 출신인 이벌찬, 아찬 등이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정도의 초보적 기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법흥왕 기에는 상대등과 병부가 설치됩니다. 상대등의 설치는 국왕권이 강화되면서 그동안 공동으로 정치를 주도하던 귀족들을 왕권과 분리시키려는 시도였고, 병부의 설치는 국가 병권을 국왕이 장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후, 진흥왕대에 품주를 설치하면서 조세를 국가가 관장하였고, 관리의 규칠을 맡은 사정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진평왕 때는 위화부, 조부, 예부, 선부 등을.. 더보기
통일신라시대의 숙위학생 통일신라시대의 숙위학생 숙위학생이란, 신라에서 중국 당나라로 유학갔던 학생들을 말합니다. 이 숙위학생은 통일신라시대에 전제왕권기와 신라하대에 성격을 달리합니다. 숙위학생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상단 검색창에서 을 입력하시기 바랍니다. 1. 숙위학생이 시작된 이유는? 원래 숙위학생이란, 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 등에서 당의 개방정책에 의해 유학생을 파견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즉, 당은 주변 여러 나라에서 유학생을 모아 당나라 교육기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고, 유능한 인재를 당에서 선별하여 활용하는 정책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숙위학생을 당나라의 개방성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초기의 숙위학생들은 유학생이라기 보다는 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인질적 성격이라는 것은 초기 숙.. 더보기
신라의 지배층 - 성골과 진골이란? 신라 지배층 - 진골과 성골 1. 진골이란? 신라가 중앙집권화되는 과정에서 족장세력으로 영역을 가지고 있던 세력을 체제에 끌어들이면서 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성립하였습니다. 이들 은 신라의 지배집단으로서의 우월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초기의 소국을 벗어나 체제 정비를 하는 지증-법흥-진흥왕기를 거치면서, 지배층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가야계 귀족들이 신라에 유입되었고, 진흥왕의 영토확장으로 북방계 귀족들도 신라체제에 흡수됩니다. 그리고, 삼국통일기에 이르면, 족의 증가로 인하여 골족들의 특별한 표지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 내물 마립간계 후손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다른 지배집단과 구분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를 격상시킬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즉, 차별화된 지배.. 더보기
신라시대 상대등과 시중은 그 위치가 바뀌곤 했었다? 신라시대 상대등과 시중은 그 위치가 바뀌곤 했었다? 1. 원래 상대등의 개념 상대등은 신라 법흥왕기에 출현하여 신라 말기까지 있었던 관직입니다. 상대등이란 신라의 진골귀족 관료(대등)들을 총괄할 수 있는 상위의 대등이란 뜻입니다. 즉, 원래 상대등이 등장한 배경은 귀족들의 대표로서 국왕권을 견재하고 국사를 총괄할 수 있는 높은 권한을 가진 직책입니다. 법흥왕대 상대등을 처음 만들 때에 상대등은 국왕과 귀족이 같이 정치를 한다는 연합적 성격의 관직이었습니다. 당시 국왕은 명령을 내릴 때도, 유력 부족과 공동하교로 명을 내렸고 국왕이 화백회의의 의결사항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국왕은 이념적으로는 초월적인 군주이나 현실적으로서 귀족의 대표 성격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법흥왕은 상대등을 설치함으로서 국왕권을 견재할.. 더보기
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보통 역사에서는 김춘추의 즉위를 놓고, 성골계통에서 진골계통으로 왕위가 이전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김춘추 계통의 진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골과 진골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전에 자세히 정리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김춘추를 중심으로 성골과 진골 개념을 정리해보죠. 1. 진흥왕 시기 진골의 성립 진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신라 사회에 성립된 것은 보통 진흥왕 때라고 보고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은 정복군주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으며, 불교교단, 화랑도 정비를 통해 국가체제를 국가체제로 전환시킨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한 왕입니다. 진흥왕은 이전 왕들이 각 소속 부족들과 를 내리던 관례도 없애고, 왕 혼자 단독하교를 내리.. 더보기
김춘추의 초기 외교와 구토지설(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김춘추의 초기 미숙한 외교와 구토지설 춘추가 훈신 사간과 함께 고구려에 사절로 가는데 대매현에 이르니 고을 사람인두사지 사간이 청포 300보를 주었다. 고구려의 지경 안으로 들어가니 고구려왕이 태대대로 개금을 보내어 맞아 객관을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누가 고구려 왕에게 고하기를 [신라 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은 우리 형세를 살펴보려는 것이오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을 없애소서] 라고 하였다. 왕은 무리한 질문을 하여 춘추가 대답하기 어렵게 하여 욕을 보이려고 일러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국가의 토지는 신하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감히 명령을 따를 수가 없.. 더보기
김춘추의 대당 외교와 외교적 전환점 김춘추의 대당 외교 정관(貞觀) 22년(진덕여왕 2년; 648년)에 진덕(眞德)이 그의 아우인 국상(國相) 이찬간(伊贊干) 김춘추(金春秋)와 그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태종이 광록경 유형을 시켜 교외에서 춘추를 위로해 맞게 하였다. 춘추가 도착하자 태종은 춘추의 거동이 법도가 있는 데다 영특하고 뛰어남을보고 후히 대접하였다. 춘추가 국학에 나아가 석정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자기가 지은 온탕비, 진사비와 새로 찬술한 진서를 주었다. 또 직접 춘추를 불러 한가로이 만나보고 금백을 후히 주며 [경은 마음에 깊이 품은 바가 있는가?]고 물었다. 춘추가 꿇어앉아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바다 한구석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조를 섬겨온 지 이미 여러 해입니다. 그런데.. 더보기
김춘추의 왕위 계승 과정 - 진골왕계의 탄생 김춘추의 즉위 배경에 대한 사료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뭇 신하들이 알천 이찬에게 섭정을 청하였다. 알천은 짐짓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나이 늙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조 제세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군신이 드디어 춘추를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춘추는 재삼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 하, 보장왕 25년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선덕여왕기 이후 성골계 귀족들이 점차 소멸되면서 새로운 진골계 세력이 대두함을 보여줍니다. 선덕여왕은 [여자.. 더보기
김춘추의 정치적 위기와 성급한 외교 김춘추의 정치젹 위기와 성급한 외교 선덕여왕 11년 7월에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의 성 40여개를 탈취하였다. 8월에 또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취하여 당나라로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다. 이에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고하였다. 이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ㅡㄹ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을 공격해 빼앗아가니 도독 아찬 품석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쳐서 대야의 일을 보복하려 하여,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에서 패할 때 도독 품석의 처도 죽었는데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짝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하더니 얼마 뒤에 말하기를, [슬프다. .. 더보기
선덕여왕의 축출 선덕여왕의 축출 왕 16년 647년,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난을 일으켰다.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군사를 일으키니 여왕은 이기지 못하였다. 8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선덕왕 16년 ------------------------------------------------------------------------------------- 사료해석 : 선덕 15년 당에 군사적 구원요청을 했으나, 선덕여왕이 실패하자 비담, 염종 등 진골계 유력 귀족들이 난을 일으켜 선덕여왕을 죽인 사료입니다. 그러나, 김춘추 등의 수습으로 다시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