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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1 - 출제범위 : 한국사 일반 \n"); c.write("\n"); c.write("평가 채점 결과\n"); c.write("\n"); c.write(" 문제 수 : 5\n"); c.write(" 채점하지 못 한 문제 수 : 0\n"); c.write(" 정답 수 : " + CorrectNumber + "\n"); c.write(" 오답 수 : " + IncorrectNumber + "\n"); c.write(" 점수 : " + TotalScore + " 점\n"); c.write("\n"); c.write("문제 해설 보기\n"); c.write("\n"); if( mail_address == "" ) c.write(" 문제지에 해설을 표시합니다.\n"); else c.write(" 결과를 전송한 후, 문제지에 해설을 표시합니다.\.. 더보기
신라의 중앙 제도 2 - 중앙정치가 발전하다. 신라의 중앙 제도 2 - 중앙정치가 발전하다. 1. 신라 초기의 중앙 제도 변화 신라 초기의 관제의 특징은 어떤 뚜렷한 기준에 의해 관제가 정비된 것이 아니라 씨족적 유습들이 그대로 남아서 중앙 관제로 정착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초기에는 대보가 있어서 씨족장 출신인 이벌찬, 아찬 등이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정도의 초보적 기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법흥왕 기에는 상대등과 병부가 설치됩니다. 상대등의 설치는 국왕권이 강화되면서 그동안 공동으로 정치를 주도하던 귀족들을 왕권과 분리시키려는 시도였고, 병부의 설치는 국가 병권을 국왕이 장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후, 진흥왕대에 품주를 설치하면서 조세를 국가가 관장하였고, 관리의 규칠을 맡은 사정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진평왕 때는 위화부, 조부, 예부, 선부 등을.. 더보기
신문왕의 전제왕권 2 - 중앙집권화를 위해 귀족권을 억압하다. 신문왕의 전제왕권 2 - 중앙집권화를 위해 귀족권을 억압하다. 이번 파트부터는 통일신라 전제왕권을 완성한 신문왕에 대한 포스팅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로 나누어 다양한 각도에서 포스팅하겠습니다. 신문왕을 자세히 포스팅하는 이유는 신문왕 자체가 통일신라의 문물을 정비하고, 완성한 사람이므로 신문왕을 로 하여 통일신라의 전성기 체제를 바라보면 이해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신문왕기의 정치사를 정리해 봅시다. 1. 전제왕권의 성립 배경 지난 장에서 전제왕권을 정의내릴 때, 국왕의 1인 독재권이 아닌 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럼 이러한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성립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삼국통일에서 그 핵심 배경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통일기 신라는 가 계속되었습니다. 고.. 더보기
신문왕의 전제왕권 1 - 집사부 체제를 완성하다 통일신라시대와 신문왕의 전제왕권 1 - 집사부 체제를 완성하다 이번 파트부터는 통일신라 전제왕권을 완성한 신문왕에 대한 포스팅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로 나누어 다양한 각도에서 포스팅하겠습니다. 신문왕을 자세히 포스팅하는 이유는 신문왕 자체가 통일신라의 문물을 정비하고, 완성한 사람이므로 신문왕을 로 하여 통일신라의 전성기 체제를 바라보면 이해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럼 시작해보죠. 1. 통일이 되면서 가 강화되다 신라가 삼국통일이 된 것은 무열왕, 문무왕기를 거치면서입니다. 실제 나당전쟁후의 676년 삼국통일은 문무왕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성하면서 그 아들인 신문왕은 이라는 2가지 과제를 안고 등극하였습니다. 신문왕은 먼저 체제가 발전해오던 기존의 신라 제도를 확고히 합니다... 더보기
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에 대한 구체적인 포스팅을 하기 전에 통일신라시대에 대한 개관을 해보겠습니다. 1. 전제왕권이 성립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는 국가 운영 체제와 영토의 팽창입니다. 삼국통일은 곧 영역의 확대 뿐 아니라 인구,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또 통일로 인하여 유민 세력에 대한 처우 개선, 군사력의 확보, 정치적 안정의 추구, 반신라세력에 대한 탄압 등 국가적 과제가 많았습니다. 즉, 국가적으로 팽창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과제들을 해결할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왕권은 이러한 새 시대의 과업을 를 통해 효율적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충신의 왕으로서 새 시대를 위한 체제 개선을 .. 더보기
한국사에서 중세는 언제 부터인가에 대한 논쟁 사료 분석 한국사에서 중세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사료들 1. 통일신라가 중세이다! 1. 신라초기 읍락에는 호민이 산다. 하호라 불리는 자들은 모두 노복이다. 제가는 별도로 사출도에 산다. 대가는 모두 일을 하지 않는다. 하호는 노복으로서 부세를 공급해야 한다. 순장으로 죽이는 자가 수백에 이른다. 2. 지증왕 : 명을 내려 순장을 금지하였다. 전대의 왕이 죽자 남녀 오십인을 순장하였는데, 이 때 금지하였다. 주군을 나눠 농사를 권장하였고, 우경이 시작되었다. 3. 신문왕 : 7년 5월 교를 내려 문무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 이 기록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세가 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 더보기
신라의 지배층 - 성골과 진골이란? 신라 지배층 - 진골과 성골 1. 진골이란? 신라가 중앙집권화되는 과정에서 족장세력으로 영역을 가지고 있던 세력을 체제에 끌어들이면서 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성립하였습니다. 이들 은 신라의 지배집단으로서의 우월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초기의 소국을 벗어나 체제 정비를 하는 지증-법흥-진흥왕기를 거치면서, 지배층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가야계 귀족들이 신라에 유입되었고, 진흥왕의 영토확장으로 북방계 귀족들도 신라체제에 흡수됩니다. 그리고, 삼국통일기에 이르면, 족의 증가로 인하여 골족들의 특별한 표지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 내물 마립간계 후손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다른 지배집단과 구분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를 격상시킬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즉, 차별화된 지배.. 더보기
김춘추의 왕위 계승 과정 - 진골왕계의 탄생 김춘추의 즉위 배경에 대한 사료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뭇 신하들이 알천 이찬에게 섭정을 청하였다. 알천은 짐짓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나이 늙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조 제세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군신이 드디어 춘추를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춘추는 재삼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 하, 보장왕 25년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선덕여왕기 이후 성골계 귀족들이 점차 소멸되면서 새로운 진골계 세력이 대두함을 보여줍니다. 선덕여왕은 [여자.. 더보기
태종 무열왕기 새로운 격의 시행 - 신라의 율령격식 태종 무열왕이 격을 제정하다. 1. 율령격식이란? 율령격식이란, 중국 당나라에서 제정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 율령을 말합니다. 율은 형법, 령은 행정법을 말합니다. 그리고 격이란, 율령을 보완하거나 바꾸기 위해 임시로 제정한 임시법을 말하고, 식이란 각각의 법에 대한 시행세칙을 말합니다.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때, 백제에서는 고이왕 때, 신라에서는 법흥왕 때 율령을 제정하여 국가의 기본 법으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2. 고대의 율령 이 장에서는 고대의 율령과 통일신라기 율령을 비교하려고 합니다. 고대의 율령이란, 고대 노예제 사회의 전형적인 법을 말합니다. 예로, 고조선 8조법에서 말하는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던가, 부여에서 투기하는 여자는 죽인다라던가 등이 고대의 율령입니다. 3, 무열왕기 .. 더보기
나당연합군 - 소정방의 출전 소정방의 출전 3월에 당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을 삼고 김인문(金仁問)으로 부대총관(副大摠管)을 삼아, 좌요위장군(左饒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30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치게하고, 왕(무열왕)으로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을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응원하게 하였다. 5월에 …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니 전함이 천리에 뻗쳤는데 동쪽을 향하여 순류를 타고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으로 병선 백척을 이끌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게 했다. - 삼국사기 5, 백제본기 5, 태종무열왕 7년 - 참고글 : 삼국통일 전쟁기 김춘추의 외교가 성공리에 끝나고,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먼저 공격한다는 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