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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

백제 부흥운동에 대한 신라의 진압 사료 백제 부흥운동에 대한 신라의 진압 사료 백제의 잔적이 사비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에 임명하고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 아찬 충상 등으로 하여금 품일을 돕게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에 임명하고 아찬 진옹으로 돕게 하였다. 그리고 아찬 의복을 하주장군, 무염, 욱천 등을 남천대감에, 문품을 서당장군, 의광을 낭당장군에 임명하여 사비성을 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5 신라 본기 5 태종무열왕 8년 2월조(661) 상주장군 품일은 군사를 이끌고 우술성을 쳐서 적의 머리 1000급을 베니 백제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는 무리와 함께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조복에게는 급찬의 벼슬을 내려 고타야군 태수로 삼고, 파가에게도 아찬의 벼슬을 내리고 전택의 의물을 내리었다. 삼국사기 권 6 신라본.. 더보기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 사료 백제 부흥운동 - 내분에 의한 부흥운동의 실패 사료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에 바짝 닿아 잇는 데다 높고 험하여 요충지라 하여 군사를 증원하여 지켰다. 유인원이 이에 증원군을 주청하니, 조서를 내려 치, 청, 래, 해주(중국 지명임)의 군사 7000명을 징발하여 좌위위장군 손인사를 파견하여 무리를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웅진으로 가서 유인원을 도와주게 하였다. 이 때 복신은 벌써 병권을 모두 장악하여 부여풍과 점점 시기하여 사이가 나빠지던 터였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방에 누워서 부여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려 덮쳐 죽일 것을 계획하였다. 부여풍은 이를 알아차리고 오히려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덮쳐 죽이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여 관군을 막았다. 구당서 권 199상, 열전 149상.. 더보기
복신과 도침의 백제 부흥운동 백제 부흥운동 - 복신과 도침에 대한 사료 백제 승려인 도침과 옛 장수인 복신은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을 거점을 반란을일으켰다. 그리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옛 왕주 부여풍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우니, 서부와 북부가 모두 성을 들어 호응하였다. 이 때 낭장 유인원은 백제의 부성(사비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도침 등이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였다.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왕문도를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병을 출동시켜 합세하여 유인원을 구원하고 계속하여 싸우니, 이르는 곳마다 항복하였다. 도침 등이 웅진강(공주 앞 금강) 어귀에 책 두 개를 세워 관군에게 저항하자 유인궤는 신라병과 함께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적들은 후퇴하여 책 안으로 달아났지만, 물에 막히고 다리는 좁아 물에 빠지거나 전사한 사람이 1만.. 더보기
백제 멸명 후 백제 부흥운동 사료 백제 멸망후 백제 부홍운동 사료 8월 2일에 백제의 나머지 무리가 남잠, 정현 등지에 웅거하였는데, 좌평 정무가 무리를모아 두시원악(충남 청양)에 주둔하여 당, 신라인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26일에는 임존(충남예산 위치)의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적병이 많고 지리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소책을 깨뜨리는데 그쳤다. 9월 3일 낭장 유인원으로 하여금 당나라 병사 1만인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신라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 그리고 급찬 길나 등으로 하여금 신라 병사 7000인을 거느리고 보좌하게 하고, 소정방은 백제왕과 왕족, 신료 등 93인과 인민 12000인을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23일에는 백제의 남은 무리가 사비에 들어와 항복한 백제 사람들을 노력하려 하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