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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해

김춘추의 초기 외교와 구토지설(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김춘추의 초기 미숙한 외교와 구토지설 춘추가 훈신 사간과 함께 고구려에 사절로 가는데 대매현에 이르니 고을 사람인두사지 사간이 청포 300보를 주었다. 고구려의 지경 안으로 들어가니 고구려왕이 태대대로 개금을 보내어 맞아 객관을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누가 고구려 왕에게 고하기를 [신라 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은 우리 형세를 살펴보려는 것이오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을 없애소서] 라고 하였다. 왕은 무리한 질문을 하여 춘추가 대답하기 어렵게 하여 욕을 보이려고 일러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국가의 토지는 신하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감히 명령을 따를 수가 없.. 더보기
김춘추의 외교술 발전 - 고구려, 당에 대한 외교 김춘추의 고구려 외교 11년…7월에 백제왕 의자(義慈)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 서쪽의 40여 개 성을 공취(攻取)하였다. 8월에 또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項城)을 취하여 당으로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 태종(唐太宗)에게 급한 사정을 고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 빼앗아가니 도독(都督) 이찬(伊瑗)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용석(龍石) 등이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大耶)의 일을 보복하려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에서 패할 때에 도독 품석의 처(妻)도 죽었는데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