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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파

(근현대사 17장) 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1. 2차 갑오개혁의 배경(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은 1차 갑오개혁과 내용상의 큰 차이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차 갑오개혁은 그 추진 세력이 달랐습니다. 1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은 개화파의 성격과 보수파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1894년 7월부터 추진한 개혁은 그 개혁법안만 200개가 넘습니다. 200개가 넘는 개혁안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성급한 개화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200개의 법 이름만 외우기에도 벅찰 것 같네요. 구체적인 개혁내용은 신분제 폐지, 조세제도 개혁, 과거제 폐지 등등 근대화를 위한 핵심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안에 대한 홍보를 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었고,.. 더보기
1885년 조선의 중립화론을 주장하다. 1885년 조선의 중립화론을 주장하다. 1. 갑신정변 이후 정세 갑신정변 이후, 우리나라는 또 다시 청에게 정치적으로 종속되고 맙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모두 청의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우리나라는 청에게 내정간섭을 심하게 받게 되죠.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청을 견제하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조선과 지속적인 조약을 체결합니다. 일단, 임오군란 때는 제물포 조약을 통해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얻어냅니다. 갑신정변 때의 톈진조약으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청군과 공동 출병, 공동 철수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냄으로서 최소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청에게 밀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은 아직 청에게 있었죠. 청은 을 납치하.. 더보기
(한국근현대사 5) 1860년대 이후 계속된 위정척사 운동의 흐름 1860년대 이후 위정척사는 계속되었다. 1. 위정척사란? 흥선대원군이 18363년부터 집권하여 안동김씨의 노론 세도 가문을 축출한지 10년... 1873년 민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대원군이 실각하고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개화정책은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조선책략이 유입되면서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 사상을 우리 전통 유교주의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당연히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아무런 근거없이 서양을 싫어해서도, 조선 왕조를 지탱하는 신분질서의 하나인 성리학을 수호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였습니다. 물론 통상요구가 조선의 신분제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흔들기는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