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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원

백제 부흥운동의 진압 - 흑치상지, 사타상여, 지수신 지수신과 흑치상지의 부흥운동 이에 손인사와 유인원, 김법민(문무왕)이 육군을 이끌고 나가 유인궤, 두상, 부여륭과 웅진백강에서 합류하였다. 백강 입구에서 왜인을 만나 네 번을 싸워 다 이겨 100척을 불태우고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 부여풍은 탈출하여 달아나고 거짓 왕자 부여층승과 충지 등은 무리를 이끌고 왜인과 함께 항복했다. 우두머리 장수 지수신만은 임존성에 거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앞서 소정방이 백제를 깨뜨렸을 때, 우두머리 사타상여와 흑치상지가 흩어져 험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과 호응하였는데, 모두 항복하였다. 지수신도 결국 처자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달아나니 백제의 나머지 무리가 모두 평정되었다. 손인사 등은 귀국하고, 유인궤는 조칙에 따라 군대를 통수하고 머물러 지켰다. 신당서 권 108 .. 더보기
복신과 도침의 백제 부흥운동 백제 부흥운동 - 복신과 도침에 대한 사료 백제 승려인 도침과 옛 장수인 복신은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을 거점을 반란을일으켰다. 그리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옛 왕주 부여풍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우니, 서부와 북부가 모두 성을 들어 호응하였다. 이 때 낭장 유인원은 백제의 부성(사비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도침 등이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였다.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왕문도를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병을 출동시켜 합세하여 유인원을 구원하고 계속하여 싸우니, 이르는 곳마다 항복하였다. 도침 등이 웅진강(공주 앞 금강) 어귀에 책 두 개를 세워 관군에게 저항하자 유인궤는 신라병과 함께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적들은 후퇴하여 책 안으로 달아났지만, 물에 막히고 다리는 좁아 물에 빠지거나 전사한 사람이 1만.. 더보기
백제 멸명 후 백제 부흥운동 사료 백제 멸망후 백제 부홍운동 사료 8월 2일에 백제의 나머지 무리가 남잠, 정현 등지에 웅거하였는데, 좌평 정무가 무리를모아 두시원악(충남 청양)에 주둔하여 당, 신라인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26일에는 임존(충남예산 위치)의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적병이 많고 지리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소책을 깨뜨리는데 그쳤다. 9월 3일 낭장 유인원으로 하여금 당나라 병사 1만인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신라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 그리고 급찬 길나 등으로 하여금 신라 병사 7000인을 거느리고 보좌하게 하고, 소정방은 백제왕과 왕족, 신료 등 93인과 인민 12000인을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23일에는 백제의 남은 무리가 사비에 들어와 항복한 백제 사람들을 노력하려 하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