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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1. 삼국시대에는 고조선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들은 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 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거의 자신들의 계통을 철기 시대 국가들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뿌리는 북방에서 왔지만, 독자적인 영역국가임을 주장합니다. 사실 삼국사기라는 우리 역사서의 편찬 태도 자체가 고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볼 때, 고조선에 대한 삼국시대 지배층들의 인식은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 읽어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의 지배층들이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하였다는 근거는 삼.. 더보기
고중세 역사학의 발달 과정 고중세 역사학의 발달 과정 1. 삼국시대 : 역사학이 성립되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제대로 된 역사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의거할 때, 한국에서 제대로 된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는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됩니다. 삼국시대의 역사편찬은 왕권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가 대체로 강력한 를 확립하는 시기였습니다. 고구려의 유기는 5c 고구려의 강성기에, 백제의 서기는 근초고왕의 전성기에, 신라의 국사는 신라 6세기 진흥왕기에 각각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을 을 홍보하여 왕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당시의 역사서들은 남아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알 .. 더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동명왕편 고려 고종(高宗) 때 이규보(李奎報)의 작품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3권에 실려 전한다. 그 내용은 고려 초기 문인들이 허상적 관념론에서 벗어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임을 재인식하는 입장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영웅적이고 성자적(聖者的)인 행위를 찬양, 고구려인의 긍지를 노래한 장편 서사시이다. 대몽항쟁(對蒙抗爭)에 있어서 민족의식 내지는 국가의식이 고취되면서 역사적 사실이 문학에 반영된 작품으로 기사체(記事體) 문학의 선구가 된다. 《현대문학》 제1권 제10호(1955년 양재연 번역)에 실려 있다. 더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 유리의 태자등극 이규보의 동명왕편 - 유리의 태자 등극 유리는 소년 시절에 남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참새잡이로 일을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있음을 보고는 쏘아 구멍을 냈다. 부인이 노하여 퍼붓기를 라고 하였다. 유리는 크게 부끄럽게 여기여 진흙 탄환을 쏘아 맞혀 동이 구멍을 막으니 전처럼 되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묻기를 라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가 어리므로 장난삼아 고 대답하였다. 유리는 울며 하고는 마침내 자살하려 하였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말리며 라고 말하였다. 유리가 대답하기를 라고 말하였다. 어머니는 더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 고구려의 건국 이규보의 동명왕편 - 국가의 안정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흰 사슴을 잡아 해원에 거꾸로 매달아 저주하기를, 라고 하였다. 그 사슴의 슬피 우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송양의 도읍은 물바다가 되었다. 왕은 갈대줄로 강을 가로질러 놓고, 오리말을 타고 있었다. 백성들은 모두가 그 줄을 붙들고 있었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에 금을 그으니 물이 줄었다. 6월에 송양이 온 나라 백성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다고 한다.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은 그 산성을 볼 수 없었다. 오직 수천 사람 소리가 토목 공사를 하는 듯이 들렸다. 왕이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이레 만에 운무가 스스로 흩어지니, 성곽과 궁실, 누대 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었다. 왕이 황천을 향해 절을 하고는 나아가서 .. 더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 송양과의 대결 및 고구려의 건국 이규보의 동명왕편 - 건국의 과정 비류왕 송양이 사냥을 나왔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데리고 가서 더불어 앉아 말하기를, 라고 물었다. 왕이 대답하기를 라고 하였다. 송양이 라고 말하였다. 왕은 라고 말하였다. 송양은 왕이 몇 번이나 천손이라고 말하는 데 대해 의심을 품고 재주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라고 말하고는 사슴을 그린 과녁을 100보도 못 미치는 거리에서 두고 쏘는데, 살이 사삼의 배꼽을 맞하지 못했으면서도 실지로 맞힌 것처럼 여겼다. 왕은 사람을 시켜 옥지환을 100보밖에 걸게 하고 쏘자 마치 기와장이 부서지듯이 깨지므로 송왕은 크게 놀랐다고 한다. 왕이 말하기를 고 말하였다. 시종하던 신하 부분노가 나와서 말하기를 라고 하메, 왕이 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하고는.. 더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 주몽의 위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 영웅의 위기 나이 들어 어른이 되니 재능도 함께 갖추었다. 금와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같이 사냥을 하면서 놀았다. 왕자와 종자가 40여명인데도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으나, 주몽이 잡은 사슴은 아주 많았다. 왕자가 이를 투기하여 주몽을 잡아 나무에 묶어놓고 사슴을 빼앗아가 버리므로 주몽은 나무를 뽑아 버리고 돌아왔다. 태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라고 말하였다. 왕이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먹이도록 하였으니, 주몽의 참뜻을 떠 보고자 한 것이다. 주몽은 속 마음에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하기를 하고 곧 말목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긴 채찍으로 마구 치니 뭇 말이 놀라 달리는데, 붉고 누름한 말 한 마리가 두 길이나 되는 난.. 더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 주몽의 탄생 편 이규보의 동명왕편 - 주몽의 탄생 왕이 천제의 왕비임을 알고 별궁에 있도록 하였더니 여자는 품 속에 햇빛이 비치어 잉태를 하였다. 신작 4년 계해 여름 4월에 주몽이 탄생하였는데, 울음소리가 아주 크고 골격이 뛰어났다. 처음에 날 때 왼쪽 옆구리에서 한 알을 낳으니, 크기가 닷 되들이 정도였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사람을 시켜 알을 말 우리에 두었더니 모든 말들이 밟지 않았고, 깊은 산속에 버려도 온갖 짐승들이 모두 지켜주었다. 구름이 끼고 음침한 날이면 알 위에 항상 햇빛이 비쳤다. 왕은 알을 가져오게 하여 그 어머니에게 보내 기르게 하였다. 알이 마침내 갈라져서 한 사내아이를 얻었다. 낳은 지 한달도 안되어 말을 아주 잘했다. (주몽이) 어머니에게 일러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더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 해모수, 하백 이야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 해모수와 하백 본기(구삼국사 본기인 듯)에 이렇게 적혀 있다.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하여 아들 낳기를 빌러 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금빛 나는 개구리 모양의 작은 아이가 있었다. 라고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아란불은 왕을 권하여 옮겨 도읍하고 동부여라 이름하였다. 예전 도읍테에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 되어 내려와서 도읍하였다. 한 신작 3년인 임술년에 천제가 태자를 보내 부여왕의 옛 도읍에 내려가 놀게 하였는데, 해모수라는 이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다섯 용이 끄는 수레 오룡거를 탔고, 따르.. 더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 서문 이규보의 동명왕편 - 서문 세상에서 동명왕의 신이하고 이상한 일이 이야기 되는데, 비록 배운 것 없는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제법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내가 일찍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웃으며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뒤에 와 을 읽어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지 못하고 자세하지 못하니, 자기네 일은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핵심만 기록하려고 한 때문일 것이다. 다음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서 동명왕 본기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되는 것보다 더 자세하였다. 그러나 역시 처음에는 이를 믿지 못하였으니, 귀신(귀)이나 환상(환)의 이야기같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여러번 탐독, 미독하여 차차로 근원을 찾아가니 이는 환이 아니고 성이며, 귀가 이나고 신이다. 동명왕의 이야기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