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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

드라마 선덕여왕 :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정리하면? 미디어 속의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 :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정리해 봅시다. 1. 뭐가 있어야 말을 해보지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이가 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미실이는 자신이 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이라면, 신라에 품, 진골, 성골로 구분하는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덕만이가 이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아니, 진골, 성골과 같은 용어 자체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신라의 골품제도를 알 수 있는 사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 뿐이다. 너무나 적은 자료이지만, 그나마 그 적은 자료에서도 성골이 무엇인지, 진골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 놓은 부분은 없다. 신라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적.. 더보기
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에 대한 구체적인 포스팅을 하기 전에 통일신라시대에 대한 개관을 해보겠습니다. 1. 전제왕권이 성립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는 국가 운영 체제와 영토의 팽창입니다. 삼국통일은 곧 영역의 확대 뿐 아니라 인구,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또 통일로 인하여 유민 세력에 대한 처우 개선, 군사력의 확보, 정치적 안정의 추구, 반신라세력에 대한 탄압 등 국가적 과제가 많았습니다. 즉, 국가적으로 팽창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과제들을 해결할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왕권은 이러한 새 시대의 과업을 를 통해 효율적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충신의 왕으로서 새 시대를 위한 체제 개선을 .. 더보기
신라의 지배층 - 성골과 진골이란? 신라 지배층 - 진골과 성골 1. 진골이란? 신라가 중앙집권화되는 과정에서 족장세력으로 영역을 가지고 있던 세력을 체제에 끌어들이면서 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성립하였습니다. 이들 은 신라의 지배집단으로서의 우월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초기의 소국을 벗어나 체제 정비를 하는 지증-법흥-진흥왕기를 거치면서, 지배층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가야계 귀족들이 신라에 유입되었고, 진흥왕의 영토확장으로 북방계 귀족들도 신라체제에 흡수됩니다. 그리고, 삼국통일기에 이르면, 족의 증가로 인하여 골족들의 특별한 표지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 내물 마립간계 후손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다른 지배집단과 구분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를 격상시킬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즉, 차별화된 지배.. 더보기
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보통 역사에서는 김춘추의 즉위를 놓고, 성골계통에서 진골계통으로 왕위가 이전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김춘추 계통의 진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골과 진골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전에 자세히 정리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김춘추를 중심으로 성골과 진골 개념을 정리해보죠. 1. 진흥왕 시기 진골의 성립 진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신라 사회에 성립된 것은 보통 진흥왕 때라고 보고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은 정복군주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으며, 불교교단, 화랑도 정비를 통해 국가체제를 국가체제로 전환시킨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한 왕입니다. 진흥왕은 이전 왕들이 각 소속 부족들과 를 내리던 관례도 없애고, 왕 혼자 단독하교를 내리.. 더보기
김춘추의 왕위 계승 과정 - 진골왕계의 탄생 김춘추의 즉위 배경에 대한 사료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뭇 신하들이 알천 이찬에게 섭정을 청하였다. 알천은 짐짓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나이 늙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조 제세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군신이 드디어 춘추를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춘추는 재삼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 하, 보장왕 25년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선덕여왕기 이후 성골계 귀족들이 점차 소멸되면서 새로운 진골계 세력이 대두함을 보여줍니다. 선덕여왕은 [여자.. 더보기
선덕여왕의 축출 선덕여왕의 축출 왕 16년 647년,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난을 일으켰다.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군사를 일으키니 여왕은 이기지 못하였다. 8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선덕왕 16년 ------------------------------------------------------------------------------------- 사료해석 : 선덕 15년 당에 군사적 구원요청을 했으나, 선덕여왕이 실패하자 비담, 염종 등 진골계 유력 귀족들이 난을 일으켜 선덕여왕을 죽인 사료입니다. 그러나, 김춘추 등의 수습으로 다시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더보기
간략하게 정리하는 삼국통일의 과정 삼국통일의 과정 1. 6c 신라의 성장과 백제의 부흥 노력 6세기에 신라가 성장한 배경은 551년 신라의 한강 점령입니다. 신라는 나제 동맹을 통해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탈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배신하여 한강을 독차지했습니다. 본래 한강의 남쪽을 보장받기로 했던 성왕은 격분한 나머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흥왕을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왕이 전사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이후 백제는 왕권이 약화되고, 연, 백, 사씨 등 8대성이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귀족체제가 됩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당항진에 당항성이라는 요새를 건축합니다. 이것은 곧 중국과의 직접 교통로를 확보함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한강유역 차지는 고구려, 백제로 하여금 여제동맹을 맺게 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 더보기
김춘추와 당태종간의 외교 김춘추의 대당외교 정관(貞觀) 22년(진덕여왕 2년; 648년)에 진덕(眞德)이 그의 아우인 국상(國相) 이찬간(伊贊干) 김춘추(金春秋)와 그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조서를 내려 춘추에게는 특진관(特進官)을 제수하고, 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제수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 및 강론(講論)의 의식을 참관하겠다고 청하므로, 태종은 이로 말미암아 친히 지은 《온탕(溫湯)》·《진사비(晋祠碑)》와 새로 편찬한 《진서(晋書)》를 내려주었다. 김춘추 등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3품 이상의 관원으로 하여금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 주는 등 예우가 극진하였다. - 구당서 199 상, 열전 149 상, 동이 신라 - 왕이 이찬 김춘추와 그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