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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번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이번 장에서는 후한시대의 건국의 의미와 멸망까지의 역사를 한번 다루어보겠습니다. 후한은 기원 후 25년에서 220년까지의 왕조입니다. 1. 호족연합정권의 성립 왕망의 신이 지나친 국가통제적 정책을 실시하면서, 사회 전반의 모든 세력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족들은 토지에 대한 규제 정책이 싫었고, 대상인들은 상공업 규제정책에 불만을 가졌으며, 농민들은 새로운 제도가 오히려 사회 불안을 부추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왕망이 죽을 무렵 시작된 전국 각지에서의 농민 봉기는 수습이 안될 지경이었습니다. 특히 반왕복한(왕망을 죽이고 한을 부활하자)는 구호를 위친 적미의 난(붉은 눈썹의 난)은 중국 각지에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계속 이야기 했지만, .. 더보기
한사군 설치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 한사군의 설치 원봉(무제) 3년이 되어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군을 나누어 두었다. 소제 5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없애고 낙랑, 현도를 합쳤는데, 현도는 다시 고구려로 옮겨졌다. 단단대령으로부터 동쪽에 있는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땅이 너무 넓고 멀다고 해서 다시 영동 7현을 떼어 낙랑동부도위를 두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 - 사료해석 : 한사군의 설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한사군은 낙랑, 진번, 임둔, 현도로서 그 위치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정인보 등이 제북설을 주장한 것과 달리, 싫증주의자들은 재남설을 주장하였죠. 한사군은 낙랑군을 중심으로 고조선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중국계 지배계급은 토착민과 유리되어 있었습.. 더보기
위만조선 열전 위만조선전 위만이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였을 때는 마침 효혜, 고후(한나라 혜제왕 대 여후 섭정기)의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된 무렵이였다. 요동태수가 위만으로 외신(외번)을 삼아요새 밖의 만이를 막아서 변방에서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들 가운데 천자께 들어가 뵙고자 하는 자는 이를 막지 말도록 하자고 아뢰니 천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위만이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자 주변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땅이 수천리나 되었다.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에게 이르자 한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자못 많이 유인하였다. 또 일찍이 들어와 천자를 뵙지도 않으면서 진번 곁의 진국(한반도 남방의 중국, 3한의 모태)이 글을 올려 천자를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