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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

역사 가로세로퀴즈 15회 : 초등학생 한국사 단어퀴즈(난이도 : 하) 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하) 만약 한글이 보이지 않는다면, 상단의 보기(v) - 인코딩(D)로 들어가서 자동선택 - 한국어(또는 유니코드)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다운로드 : This interactive crossword puzzle requires JavaScript and a reasonably recent web browser, such as Internet Explorer 5.5 or later, Netscape 7, Mozilla, Firefox, or Safari. If you have disabled web page scripting, please re-enable it and refresh the page. If this web page is saved to your computer.. 더보기
화랑도의 기원과 역할, 그리고 진흥왕의 화랑도 개편 목적 분석 진흥왕대 화랑도의 개편 -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1. 화랑도에 관한 사료부터 읽어보자! 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신선을 숭상하고,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가려서 원화로 삼았다. 원하는 무리를 모아 그 중에서 인물을 뽑고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와 교정 낭자를 원화로 뽑으니, 모여든 무리가 300-400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한 나머지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로 인하여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뒤 여러 해만에 왕은 국가를 흥하게 하려면.. 더보기
김유신과 신령한 산신 김유신과 삼국통일의 의지 공은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으니, 그 무리를 용화향도라고 부른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에 공은 나이 17세로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넘쳐, 침략한 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 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와 범처럼 우리 강토를 어지럽게 하니 평안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 재주와 힘은 헤아리지 않고 화란을 없애고자 하오니 하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저에게 수단을 빌려주십시오!] 머문지 나흘이 되는 날 문든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이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하게 생긴 소녕이 여기에 와서 혼자 있음은.. 더보기
화랑도에도 파벌이 있었다. 화랑도에도 파벌이 존재하였다. 이 글은 운영자의 글이 아닙니다. 좋은 글이 있어서 퍼왔어요. 출처 : 다음 원형 대백과 사전 신라의 화랑도는 원천적으로 파가 나뉘게 되어 있었다. 사다함에게 낭도가 따랐고, 문노가 일찍이 낭도 5백 명을 거느리고 사다함을 따랐던 사실이 있다. 한마디로 화랑들이 각기 낭도를 거느렸던 것은 처음부터 화랑들을 중심으로 파가 나뉠 소지를 마련한 것이었다. 화랑도에서 파가 나뉜 것은 7세 풍월주 설화랑(설원랑) 때였다. 그 때 문노 일파가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위를 얻지 못하여 설화랑에게 불복하고 일문(一門)을 스스로 세웠다. 이 때 낭도들이 나뉘었다고 한다. 설화랑의 낭도들은 운상인, 문노의 낭도는 호국선이라 한 것이 파맥이 나뉘는 출발이었다. 마침내 당파가 나.. 더보기
화랑도의 기원 - 원화, 용화향도 화랑도의 기원 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신선을 숭상하고,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가려서 원화로 삼았다. 원하는 무리를 모아 그 중에서 인물을 뽑고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와 교정 낭자를 원화로 뽑으니, 모여든 무리가 300-400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한 나머지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로 인하여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뒤 여러 해만에 왕은 국가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가의 덕행 있는 사내를 뽑아 .. 더보기
모죽지랑 이야기 모죽지랑 이야기 죽만랑(죽지랑)의 낭도에 득오실이라는 급간(후에 급간이 되었다는 말, 당시 급간이 아닌 듯함)이 있었는데, 풍류황권(화랑도 명단을 적은책)에 이름을 올려두고 날마다 출근하더니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낭(죽지랑)이 그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있는가 물으니 어미가 말하였다. 라고 말하였다. 낭은 라고 말하였다. 낭은 떡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측근을 거느린 채 가니 낭도 137명이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거 물었다. 문지기가 답하길, 라고 하였다. 낭이 밭으로 찾아가서 술과 떡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같이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니, 익선은 끝내 안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 세금수취인 간진이 추화군(밀양)의 능절조 30석을 거두어부산성으로 싣고.. 더보기
계백 장군 이야기 계백장군 이야기 나당(羅唐) 연합군 18만이 백제의 도성을 향하여 진격의 박차를 가해오자 의자왕은 전세가 급박함을 직감하고 달솔(達率)이던 계백(階伯)울 장군으로 삼아 황산벌 전장에 출정토록 하였다. 계백장군은 5천 결사대를 인솔하여 전장에 나가며 말하기를, '한 나라의 사람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상대하게 되니 국가의 존망을 가늠할 수가 없다. 내 처자가 적들에게 붙잡히어 노비가 되어 욕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차라리 쾌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손수 처와 자식을 벤 후에 황산(黃山) 벌판에 이르러 삼영(三營)을 설치하고 신라의 5만 병사를 만나 싸웠는데 여러 장병들 앞에 맹세하기를 '옛날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은 5천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각기 장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