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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가

고구려 초기의 왕권 강화 과정 고구려 초기의 왕권 강화 12월, 왕이 질산의 북쪽에서 사냥을 하면서 닷새가 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대부인 협부가 간하되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기어 백성들이 아직 안심하지 못하고 사니 마땅히 나라 일에 마음을 부지런히 쓰실 때 입니다. 그런데 이는 생각지 아니하고 사냥에만 몰두하시니, 만일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염려됩니다.'고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협부의 벼슬을 빼앗고 관아의 장원을 관리하게 하였더니, 협부가 분하게 여겨 남쪽의 한(韓)으로 달아났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 3월 고위 관리인 구도, 일구, 분구 등 3인을 내쫓아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이 3인은 비류부의 장이었는데, 그 바.. 더보기
유리왕 이야기, 황조가 - 삼국사기 - 유리왕 이야기 유리왕 3년 가을인 7월에 짓고 떨어진 궁[이궁,별궁]을 맡으니 이다. 겨울인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었다. 왕이 다시 장가 들으니 두 여자다. {아가씨}로써 계시니 하나는 가로되 였다. 사람이라고 불린 여자이니라. 또 하나는 가로되 였다. 사람이라 불린 여자였다. (두 여자가 사랑을 다투어 서로 화합하지 못하였다) 두 여자가 다투어 사랑하지 않는 바 서로 화하도록 왕이 맡았다. 에 만드니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궁으로 각각 있게 하였다. 후에 왕이 밭을 짐지어 맡으니 이다. (가서) 칠일간 아니 돌아오니 두 여자 {아가씨}가 다투어 싸웠다. 가 욕하여 를 가로되 "너는 집안의 비천한 첩이다. 어찌 무례가 심한가?"하였다. 는 부끄러워 하여 망망히 돌아갔다. 왕이 듣고 뒤이어 쫓아갔다. 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