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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후한서 동이전 부여 편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후한서 동이전 부여 편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지방이 二천 리로서 본래는 예땅이다.

  처음에 북이가 이국왕을 자루에 넣어가지고 국외로 나갔더니 그 시녀가 뒤에 태기가 있었다. 왕이 돌아와서 죽이려 하자 시녀는 말하기를, [전에 보니 하늘 위에 크기 계란만한 이상한 기운이 있어, 와서 나한테 항복하더니 그런 뒤로 태기가 있습니다]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그를 가두었더니 뒤에 남자 아이를 낳았다. 왕은 이것을 돼지우리에 갖다 버리게 했다. 그랬더니 돼지가 제 입김을 불어 주어 아이는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으로 옮겼더니 말도 역시 그렇게 해서 살리는 것이다. 왕은 이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기 시작했다. 이에 그 어미에게 알려 거두어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다. 이것을 보고 왕은 그 용맹스러운 것을 꺼려서 다시 죽이고자 했다.

  이에 동명은 달아나서 남쪽으로 가 시엄수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동명은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들이 모두 물 위에 떠서 모인다. 동명은 이 물고기를 타고 물을 건넜다. 이리하여 부여에 이르러 왕노릇했다.

  이곳은 동이의 땅 안에서 가장 좋은 곳이다. 땅에서는 오곡이 잘 되고, 또 이름 있는 말, 붉은 옥, 초놜 등이 난다. 큰 구슬은 대추만하고 나무를 둘러 성을 만들었고 궁실과 창고와 감옥이 있다.

  그 사람들은 추하고 크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근실하고 인후해서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 활과 화살, 칼, 창 같은 것으로 병기를 삼는다. 그들은 육축으로 벼슬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 마가, 우가, 구가 등이 있다. 또 그 고을에도 모두 모든 加의 이름을 붙였다.

  음식을 먹는데는 조두를 쓰고 사람들끼리 모이는데는 벼슬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서 술을 권하며 읍하고 사양하면서 마루에 올라가고 내려온다. 섣달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이 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여러 날을 두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 추고 노는데 이것을 영고라고 한다. 이 기간에는 형옥을 다스리지 않고 죄수를 석방한다.

  군사에 관한 일이 있을 때에도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소를 잡아 그 발굽으로 일의 길하고 흉한 것을 점친다. 길에 다니는 사람은 밤과 낮이 없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소리가 길에 끊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풍속은 형벌을 베푸는 것이 몹시 엄하고 급해서 죽음을 당하는 자는 그 집 식구들을 모조리 종으로 삼고, 또 한 사람이 도둑질하면 열 두 갑절을 물리며, 남녀간에 음란한 짓을 하면 모두 죽인다. 이 중에도 더우기 질투하는 계집을 미워해서 이미 사람을 죽였는데도 다시 그 시체를 산 위에 갖다 내버린다. 또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사람이 죽으면 곽은 있어도 관은 없다. 사람을 죽여 순장시키는데 숫자가 많은 자는 백 명이나 되었다. 또 그 임금이 죽으면 옥갑에 넣어 장사 지낸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항상 미리 옥갑을 만들어서 현도군에 보내 두었다가 임금이 죽으면 이것을 갖다가 장사 지내게 했다.

  건무년중에는 동이의 모든 나라들이 모두 와서 뵈었다. 이십오년에는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서 공물을 바치니 광무제는 여기에 후하게 답례를 보냈다.

  이에 사신들의 왕래가 해마다 서로 통했다. 안제 영초 五년에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 칠,팔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낙랑을 침략하여 관리들과 백성들을 살상시키고, 그 뒤에는 다시 돌아와 붙였다.

  영녕 원년에는 아들 울구태를 보내서 대궐에 들어가 뵙고 공물을 바치니 천자는 울구태에게 인수와 금백을 주었다.

  순제 영화 원년에 그 임금이 서울에 와서 조회하자 천자는 황문고를 만들어 피리 불고 놀게 하고서 보냈다.

  환제 연희 四년에 사신을 보내 조하 드리고 공물을 바쳤다.

  영강 원년에 왕부태가 군사 二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침입하자 현도태수 공손역이 쳐서 깨쳐 천여 명을 베었다.

  영제 가평 三년에 이르러 다시 글을 받들고 와서 공물을 바쳤다.

  부여는 본래 현도에 소속되었었는데, 현제 때 그 임금이 요동에 소속되기를 원했다고 한다.(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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