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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통일 후 대당외교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료 - 7차 교과서

통일 후 대당외교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료 - 7차 교과서

급찬(級瑗)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또 각간(角干) 흠순(欽純)과 양도(良圖)를 당에 보내어 사죄하였다.

(《三國史記》6, 新羅本紀6 文武王 9年 5月)  

당의 중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두로 조칙을 전하기를, "우리의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는 그 신성한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므로 그 붕어하던 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한 것이다. 너희 나라의 선왕(先王)인 김춘추(金春秋)가 이와 호를 같이 한 것은 매우 참람한 일이니 급히 고치라"라고 하였다.

(《三國史記》8, 新羅本紀8 神文王 12年)  

정월에 김의충(金義忠)을 당에 보내어 신년(新年)을 하례(賀禮)하였다.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에서 죽으니 당 황제가 그에게 광록소경(光祿少卿)의 직을 더하였다. 의충(義忠)이 돌아올 때 당 황제가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하사하였다.

(《三國史記》9, 新羅本紀9 聖德王 34年 正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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