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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 관련 사료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 관련 사료

자료1) 9주

마침내 9주를 두었다. 본국(本國) 경계 내에 3주를 두었는데, 왕성(王城) 동북의 당은포(唐恩浦)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곳을 상주(尙州)라 하고, 왕성의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을 강주(康州)라 하였다. 옛 백제국의 경계에 3주를 두었는데, 백제의 옛성 북쪽의 웅진(熊津) 어귀를 웅주(熊州)라 하고 서남쪽을 전주(全州)라 하고 다음에 남쪽을 무주(武州)라 하였다. 옛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3주를 두었는데, 서쪽으로부터 첫번째가 한주(漢州)이고 그 다음 동쪽이 삭주(朔州)이고 또 그 다음 동쪽이 명주(溟州)이다.

(《三國史記》34 雜志3 地理1)

자료2) 소경

?) 북원(北原)에 소경(小京)을 두고 대아찬(大阿瑗) 오기(吳起)로 지키게 하였다.

(《三國史記》7 新羅本紀7 文武王 18年 正月)

遁) 가야군(加耶郡)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다.

(《三國史記》7 新羅本紀7 文武王 20年)

?)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고 아찬(阿W) 원태(元泰)로 사신(仕臣)을 삼았다. 남원소경(南原小京)을 두고 여러 주군(州郡)의 민호(民戶)를 옮기어 이곳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三國史記》8 新羅本紀8 神文王 5年 3月)

자료3)  

도독(都督)은 9인이다. 지증왕(智證王) 6년에 이사부(異斯夫)로 실직군주(悉直州軍主)를 삼았는데,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총관(摠管)으로 고쳤고, 원성왕(元聖王) 원년에 도독(都督)으로 일컬었다. 관등(官等)은 급찬(級찬)에서 이찬(伊찬)까지로 하였다. 사신(仕臣)-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은 5인이니 진흥왕(眞興王) 25년에 처음 두었다. 관등은 아찬(阿瑗)에서 파진찬(波珍瑗)까지로 하였다. 주조(州助)는 9인이니 관등은 사지(舍知)에서 중아찬(重阿瑗)까지로 하였다. 장사(長史)는 9인으로 관등은 사지(舍知)에서 대나마(大奈麻)까지로 하였다. 군태수(郡太守)는 115인으로 관등은 사지(舍知)에서 중아찬(重阿瑗)까지로 하였다. 사대사(仕大舍)는 5인으로 관등은 사지(舍知)에서 대나마(大奈麻)까지로 하였다. 외사정(外司正)은 133인이니 문무왕 13년에 두었다. 관등은 미상이다. 소수(少守)는 85인이니 관등은 당(幢)에서 대나마(大奈麻)까지로 하였다. 현령(縣令)은 201인이니 관등은 선저지(先沮知)에서 사찬(沙瑗)까지로 하였다.

(《三國史記》40 雜志9 職官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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