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민본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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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임금은 본래 하나이므로 하늘은 인간에 대하여 반드시 그 이(理)가 있어야 하고, 인군과 백성은 본래 하나이므로 임금은 반드시 백성에 대하여 그 도(道)가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이 모두 그렇다고 동의하는 내용이 곧 공론(公論)이다. 공론은 온 나라 사람들로부터 나타나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것을 막을 수 없으며, 공론에 따를 때 바로 국시가 정해지는 것이다. 법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백성들이 좋아하는 지를 살펴야 하며, 민심이 이를 싫어하면 끝내는 백성을 병들게 할 것이므로 비록 백 배의 이익이 있다 할지라도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부득이 하여 이를 시행하려고 한다면 4,5개 군현에서 4,5년간 시행하여 백성들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불편한 지의 여부를 시험함과 동시에 현지에 찾아가서 물어 보아야 한다. 비록 수령이 시행해도 좋다고 하더라도 이를 듣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그 고을 사람들이 시행해도 좋다고 할 뿐만 아니라 4,5개 군현 사람들이 모두 시행해도 좋다고 한 연후에 시행해야 한다. 下民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써 위협할 수 없으며, 또한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배반하게 되는데, 그들이 배반하고 따르는 그 사이는 털끝만큼의 차이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私意로써 구차하게 하는 것도 아니며, 도를 어기고 명예만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얻는 방법은 역시 仁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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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1392~1910,519년)의 역대 제왕 중에서는 두 사람의 폭군(暴君)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성종(成宗)의 아들이자,폐비윤씨(廢妃 尹氏)의 아들인 9대 왕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5~1506,12년)이며, 한 사람은 선조(宣祖)의 아들인 광해군(光海君)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시대차는 정확하게 103년의 차이가 난다. 연산군은 무오(戊午),갑자(甲子) 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을 무지막지하게 죽였으며,그의 할머니인 인수대비(仁壽大妃)를 머리로 받아 죽인 당시 사회인식 으로는 납득이 되지않는 폭행을 일삼아 대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1506)에 의해 폐위 됐다가 얼마후 죽음을 맞았다.
이와 반면,광해군은 연산군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지자 아버지인 선조의 명으로 분조(分朝-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국가정부를 둘로 나누는 일)의 수장 이라는 중책을 맡았으며,왕위에 오르자 민생의 안정을 꾀하고 대동법을 실시 하는등,조선의 역대 제왕 중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광해군 몰락의 원인은,폐모(廢母)를 단행한 일과,명나라에 대해 배신을 했다는 서인(西人)들의 주장, 이것 때문 이었다. 명나라는 일본이 조선을 공격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선조가 의주에까지 도주해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구원을 요청하자 자국의 이익에 의해 원군을 파견해 위기에 몰린 조선을 도와준 일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라고 떠 받들며 심지어는 소중화(小中華)라고 떠벌렸다.
하지만,이 당시의 명나라는 낙조(落照)가 드리워진 국가에 불과 하였고 만주 건주위(滿州 建州衛)의 추장이던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1616년에는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후금(後金-淸, 1616~1911)이라 칭하였다. 여기에서 누르하치의 후금은 조선에 서신을 보내 명을 칠것이니 군사를 내라고 요구 하였다. 이에,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30년도 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병화(兵禍)를 피하기 위해 강 홍립으로 하여금 후금을 도와 명군과 싸우는척 하면서 형세를 살피면서,후금에 투항하게 하였다. 후금의 황제는 조선의 사정을 이해 했으나 조선의 친명 사대주의자들은 광해군의 이러한 행태를 명나라에 대한 배신행위로 보고 마침내 인조반정(仁祖反正,1623)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출 하는데 성공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후금의 침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서인들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이미 강력한 국가를 이룬 후금의 여진족들을 한낫 오랑캐로 치부,그들을 무시 했으며,이에 대노한 청 태종 홍타이시는 정묘,병자호란(丁卯,丙子胡亂,1627,1636)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인조의 항복을 받아 들이고 인조는 우리나라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삼전도의 굴욕에 의해 그가 멸시하고 천대하던 홍타이시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씻기 어려운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인조와 그 무리들인 서인들은 조선의 사직(社稷)은 보존할 수 있었으나 청나라의 속방으로 전락 당하고 말았다. 청나라 또한,배후의 조선을 완전히 무릎 꿇리지 않으면 자국의 이익에 막대한 피해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조선을 침공,이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데 성공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광해군이 권좌에서 내몰린 일이,못내 아쉬울 뿐이다. 삼전도에서의 굴욕을 당한 인조는 광해군 보다 그 질이 떨어지는 인물이다. 오히려 그가 폭군 으로써 더 잘 어울린다. 그는 자신의 딸을 죽였으며,막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눈을 뜨기 시작한 소현세자(昭顯世子)라는 똑똑한 아들을 독살 시켰다는 의혹을 받고있다. 만약 소현세자가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의 역사는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갔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친동생이자,인조의 두번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효종(孝宗, 재위-1651~1660,10年)이다. 효종은 터무니 없는(?) 북벌(北伐)을 계획 했으며 이것 때문에 조선의 군사력이 강화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으나 당시,청나라의 국력은 일취월장 그 자체였다. 조선의 국력으로 청나라를 친다는것은,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계획 이었다. 결국,효종의 북벌계획은 계획 그 자체로 끝나고 말았지만......
광해군에 대해 미력 하나마 글을 올려 보았다. 어찌보면 좁은 소견 같지만,나는 광해군이 폐위 된것이 안타까웠으며 이것 때문에 글을 올린 것이다. 요즘 시대의 외교(外交)는 그 나라의 국력을 좌우할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고금을 통틀어 마찬가지지만,서기 926년에 멸망한 발해(渤海)도 외교적으로 고립돼 거란(요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것이고,대한제국(大韓帝國)도 외교에 실패해 쪽바리 들에게 나라를 잃고 만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