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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참고글)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

출처:  이성복(sungbok.com), 이성미, 정슬기 외 5인 공저

이 글은 <히스토리아> 블로그의 운영자가 작성한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은 이후 포스팅 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핵심 내용들을 읽을 때 참조할 수 있는 글로서 위 저작자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참고만 하세요.

1. 서론

  현존하는 고려시대 자료가 빈곤한 상황에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시대사 연구 자료로 가장 비중이 있는 역사서일 뿐 아니라, 편찬할 당시인 조선 초의 역사인식과 시대적 상황과 서술을 검토하는 데에도 매우 긴요한 자료로써 일찍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새로운 집권층이 등장하는 경우에 대부분은 이전 시기의 역사(당시로 보았을 때는 현대사)를 정리 또는 왜곡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부여받으려고 하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편찬된 조선 건국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5세기 조선의 새로운 통치 질서 확립 과정에서 여러 사서들이 편찬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착수된 것이 고려시대 역사의 정리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전 시기인 고려사를 정리하여 새 왕조 건국에 대해 당위성을 부여받고 정당성을 강조하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편찬된 고려사 관련 사서들은 대체로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무신정변이후 고려 말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제 그러한 고려사 관련 사서들 가운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과정과 내용, 그에 반영된 역사의식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본론

(1) 편찬과정과 배경

  고려시대에 대한 통사적인 역사편찬 작업은 역사적 전환기로 들어서는 고려후기 이후 계속되고 있었다. 충렬왕대 정가신의 『천추금경록』을 비롯하여, 그 후에도 민지의 『편년강목』, 이제현의 『사략』, 이인복촵이색의 『금경록』등이 간략한 내용으로 편찬되었다. 공민왕대에 이제현은 백문보촵이달충과 함께 기전체인 『국사』의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이 책은 이제현에 의해 태조에서 숙종까지의 ‘기’와 열전의 일부만을 끝낸 채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에 대한 역사인식의 정립은 조선의 건국으로 새로운 국가사회의 건설이 추진되는 시점에서 더욱 절실해졌다. 태조 원년에 『고려국사』편찬이 착수된 후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개찬을 거듭하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그 오랜 과정은 역사학적 발전이 진행되는 한편 새로운 조선의 국가체제가 역사인식의 정립을 통해 심층적인 체계를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한 점에서 관찬사서인 두 책 모두는 조선 초의 시대적 산물이었다.

  조선은 건국 3개월 후에 정도전촵정총이 왕명으로 『고려국사』의 편찬에 착수하여 태조 4년 정월에 37권의 편년체 사서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현존하지 않으나 『동문선』에 수록된 정총의 서문, 정도전의 『경제문감』별집 군도편, 후대의 개찬 시에 언급된 부분적 내용 등을 통해 그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고려국사』에는 편찬자인 정도전 등 건국주체세력의 역사인식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지향하여 그 역할을 강조하였고, 사대적 명분을 세운다고 고려의 자주적인 전통에서 오는 사실이나 용어를 제후국의 예법에 맞게 삭제하거나 격하하여 개서(改書)하였다. 또한 정적인 반혁명파 및 고려말의 정치사에 대한 서술에서 곡필을 가하였다. 곡필 문제는 정도전 일파의 몰락 후 태종대에 크게 비판을 받았고, 빈약한 내용과 격하촵개서에 대해서도 비판되었는데, 세종은 “없는 것만 못하다”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비판을 받았음에도 『고려국사』는 그 후의 편찬작업에 기초적인 대본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고, 그 역사인식에 공감하는 세력들도 한편에 계속 존재하였다. 예컨대 편찬자의 역사인식이 직접 반영된 『고려국사』의 사론은 그후 『고려사절요』에 인용되어 그 논찬들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고려국사』의 개찬 작업은 하륜촵이숙번촵변계량 등에 의하여 태종 14년 5월에 착수되었으나, 태종 16년 하륜의 사망과 태종의 퇴위로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 개찬작업에서는 정적인 정도전 일파의 행적과 관련된 서술이 집중적으로 문제되었다.

  세종 원년부터 3년까지는 유관촵변계량이 개찬을 담당하였는데,『고려국사』에서보다도 더 심하게 사대명분론적으로 격하촵개서를 행하였다. 이 개수(改修) 작업은 사실대로의 ‘직선’를 주장한 세종에 의해 변계량이 파면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세종 5년부터 6년까지는 유관촵윤회가 8개월간『고려실록』에 따라 사실의 직서에 중점을 두고 개찬한 『수교고려사』가 만들어졌다. 이 책은 직서원칙에 대한 변계량의 강력한 반대로 반포가 되지 못하였는데, 기사 탈락이 많은 것도 문제가 되었다.

  그 후 세종 13년경부터는 권제촵안지촵남수문 등의 개찬으로 『고려사대전』(일명『고려사전문』)이 세종 24년에 완성되었다. 비록 특정 인물의 서술에서 문제가 있었으나, 이 책에서도 제도 등에 대한 직서의 원칙은 계속되었고, ‘대전’촵‘전문’이라 함에서 보면 내용의 확충도 이루어졌다. 이 책은 세종 30년경에 인출되었으나, 권제가 자기 조상의 불미스런 사실을 삭제하고 타인의 그러한 청탁까지 들어준 수사의 불공정성이 발각됨으로써 권제 등은 처벌되고 이 책의 반포는 중단되었다.

  개찬작업은 세종 31년에 다시 착수되어, 김종서촵정인지 등에 의해 기전체 『고려사』(일명『고려전사』)가 2년 후인 문종 원년(1415)에 완성되었는데, 그때는 세종이 서거한 후였다. 그리고 김종서 등은 기전체 『고려사』를 문종 원년 8월에 찬진(撰進)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편년체 『고려사』의 수찬을 건의하여, 다음해 2월에 『고려사절요』를 완성하였다. 장기간 진통을 거듭하다가 결국 세종 사후에 기전체 사서와 편년체 사서가 단기간에 완성된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 개찬의 대본이 된 두 사서들이 모두 세종대에 반포 단계에 들어갔다가 중단된 만큼 완성도가 높았던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 그리고 뚜렷한 편사의 원칙을 제기하며 신료들의 편찬물에 문제를 제기하던 세종의 관여가 없어진 것도 부가적인 요인일 수 있다.

  이렇게 긴 세월을 두고 고려왕조사의 편찬이 난항을 거듭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첫째로는, 조선왕조의 건국과 이에 가담한 주역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작업 때문이었다. 맨 처음 편찬된 『고려국사』가 태종 때 개수케 된 원인은 태종의 말을 빌면 『위조(僞朝) 이후의 사실이 자못 많이 진실을 잃고』있고, 혹은 『태조의 사실을 기록하는 데 자못 실되지 못함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정도전이 고려 말기에 있어서의 건국과정을 사대부 본위로 엮었을 가능성을 나타내주는 것인데, 그가 태조에 관한 기록조차도 부실(不實)하게 하였다는 평을 듣고 있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물론 태종이 자기의 적수인 정도전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려는 속셈이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긴 하지만, 한편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정도전을 위시한 사대부 계층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정도전을 죽이고 드디어는 왕위에 오른 태종이 이러한 『고려국사』를 용납하였을 까닭이 없다. 이렇게 해서 추진하게 된 개수 작업이 미완인 채로 세종대로 넘어오자 세종은 개수를 계속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사신(史臣)의 본초(本草)를 중요시한 의견으로서, 정도전뿐 아니라 태종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듯한 느낌을 주지만, 어떻든 공민왕 이후의 건국과정과 관련된 여러 사실들의 기록이 개수의 주 대상이었음을 말하여주는 데는 다름이 없다.

  둘째로는, 개인의 가문을 빛내기 위한 곡필(曲筆)로 말미암아서였다. 우선 『고려국사』에 있어서 정도전이 그의 부(父) 정운경에 대한 기록을 고쳐 씀으로써 뒤에 말썽이 된 일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고려사전문』의 경우가 더욱 심하였다. 이미 주자소에서 인출되었던 『전문』의 반포(頒布)가 중지되고 또다시 개수된 것은 바로 사필(史筆)의 부정(不正)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인 예로는, 권제가 그 선조인 권수평을 태조공신 권행의 후예라고 한 따위가 있었다.

  셋째로는, 이실직서론(以實直書論)과 사대명분론의 대립에서 오는 문제 때문이었다. 충렬왕 이후에 고려가 묘호를 위시한 용어들을 격하시켰던 것임은 잘 알고있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서 고려후기에 편찬된 사서들은 원종 이전의 묘호 등을 기록하는데 적지 않은 고민을 겪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국사』는, “원왕 이전의 사실들은 지나친 것이 많으므로, 지금 그 종(宗)이라 칭한 것은 왕이라 쓰고, 절일(節日)이라 칭한 것은 생일이라 쓰고, 조(詔)는 교(敎)라 쓰고, 짐(朕)은 여(予) 썼는데, 이는 명분을 바로하는 바다.” 라고 한 바와 같이 당시에 사용하던 용어들을 명분론에 입각하여 모두 개서(改書)였던 것이다. 그리고 태종대의 개수시에는 변계량이 또한 이 방침을 답습하여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이에 반대하여 이실직서를 주장하고 “그 종(宗)을 고쳐서 왕이라 칭한 것은 실록에 따를 것이다. 묘호나 시호는 그 사실을 없이하지 말 것이다.” 라고 하며, 이미 완성된 사고(史稿)를 수교(?校)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수교고려사』는 이렇게 해서 나타나게 되지만, 그 수교의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임은 잘 나타나 있다. 이같이 세종의 역사적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해주게 하여 고려의 역대 『실록(實錄)』이 없어진 후대에 있어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혼란을 방지해주었던 것이다.

  넷째로는 사체(史體)의 문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고려국사』는 태조의 교서(敎書)에 “사마광의 편년체(編年體)를 본떠서 전서(全書)를 각성(刻成)하라” 고 하였으므로 편년체였음이 분명하며, 이어 몇 차례의 개수(改修)에서도 이 편년체가 답습되었다. 그것이 『고려사전문』을 편찬할 때부터 기전체에 의한 개수가 문제되다가 『고려사』에 이르러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사체에 대한 논의는 적이 활발한 것이어서 편년체와 기전체로 의견이 대립되어 좀처럼 결정을 보지 못하였는데, 김종서와 정인지가 동궁(東宮)을 움직여서 기전체로 결정을 보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기전체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대두된 것은, 당시 조선왕조의 제도문물의 정비에 수반하여 전조의 제반 제도문물에 대한 인식이 필요했다는 시대적 요청과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신도(臣道)의 귀감(龜鑑)으로서, 혹은 또 사대부의 전통에 대한 인식이란 점에서, 세가(世家) 못지않게 열전(列傳)의 필요가 느껴졌던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이 하여 기전체의 『고려사』로써 전 왕조에 대한 조선조 집권층의 이해가 정리된 셈이다.

(2) 편찬자들

『고려사』의 편찬자들은 김종서와 정인지가 지춘추관사(직위; 知春秋館事)인 것을 비롯하여 모두 춘추관직을 가지고 춘추관을 담당기구로 하는 조직을 구성하였다. 『고려사절요』의 편찬자들도 역시 춘추관을 담당기구로 하는 조직을 구성하였고, 그 편찬자들의 대표는 김종서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자들은 편찬시기가 단기간 내에 바로 접속되어 있고, 둘 모두 춘추관이라는 기구를 통해 편찬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많이 중복되었다. 이런 사실은 두 책의 성격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두 책에는 그 만큼 공통적인 기반이 존재한다.

  한편, 이러한 공식적인 인적 구성과 별도로 실질적으로 두 책의 편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에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고려사』의 경우는 세종이 큰 영향을 주었으니, 정인지도 『고려사』의 전문에서 수사의 큰 원칙은 세종에 의해 결정된 것임을 밝혔다. 세종은 역사편찬의 직서주의와 기록보전주의 등 기초적인 중요한 편찬원칙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예컨대 세종 5년 12월의 논의를 보면, 변계량의 개서 주장에 대해 이선제 등의 신료들이 직서를 주장하여 세종과 함께 직서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러한 원칙들의 수립은 세종이 군주라 해도 동조하는 신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더욱이 그 원칙들이 논리적으로도 설득력과 타당성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종은 존왕실적인 방향도 추구했던 것으로 지적되었는데, 그 추구도 직서주의, 기록보전주의, 중립적 관점에서의 서술을 통해 미묘하게 달성되는 효과이거나 서술대상의 선정, 서술비중의 조정 등에 의한 온건한 것이며, 노골적인 곡필이나 강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세종 말년에 착수된 『고려사』의 편찬원칙들은 그 사후라 해도 쉽사리 반격을 받을 여지는 극히 적었으며, 더욱이 세종과 견해를 같이했던 수사관들이 그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종의 서거 후에도 그러한 기반이 확보된 상태에서『고려사』의 기본적인 편찬방향은 유지되었다.

  한편 세종 사후에 착수된 『고려사절요』는 김종서 등 편찬에 참여한 신료들의 역사인식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고려사』에서와 달리, 수사관 중에서 김종서는 춘추관의 직책으로도 제1인자가 되어 『고려사절요』편찬을 주관하였다. 당시 그는 정치적으로도 실권을 잡고 있었던 상태였다. 『고려사』에 비해 『고려사절요』는 그 내용에서도 이단시되는 문화전통에 대한 비판을 현저히 강화하였고, 여말의 정치사를 개국공신 쪽에 한층 비중을 두고 서술하였으며, 재상 중심의 정치를 옹호하는 경향을 가졌다. 그러나『고려사절요』의 경우도 곡필이나 강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대상이나 자료의 선정과 서술비중의 조정 등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인식을 반영시키고 있었다.

  두 역사서에 서로 다른 역사인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두 책의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도 그 중 한쪽에 좀 더 애착을 갖는 경우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인지촵이선제촵신석조촵정창손촵신숙주촵이극감촵양성지촵이예촵김예동촵윤기견 등은 『고려사』쪽에 선 인물들이고, 김종서를 위시하여 허후촵박팽년촵유성원촵이계전 등은 『고려사절요』쪽에 선 인물들로 분류되기도 한다.

(3) 체재(體裁), 내용 및 역사인식

『고려사』는 세가(世家) 46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그리고 목록(目錄) 2권의 모두 139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사서이다.『고려사』범례에서는 세가와 지 그리고 논찬은 『원사(元史)』를 따른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중국의 기전체 정사 중에서 『원사』를 가장 많이 참고하여 유사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단, 표는 『삼국사기』따름으로써 군주 중심의 연표가 되어, 군주 및 종사의 안위와 관련된 사건들을 정리하였다. 열전은 여러 사서를 참작하되, 우왕과 창왕의 경우는 ‘위조론’에 입각하여 『한서』의 예를 따라서 반역전에 넣었다고 하였다.

  열전은 후비촵종실촵제신촵양리촵충의촵효우촵열녀촵방기촵환자촵혹리촵폐행촵간신촵반역으로 구성되어 1천여 명에 달하는 인물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열전의 항목은 명칭과 배열이 『원사』를 많이 참고한 것이나, 석로전의 경우는 따르지 않았다. 『원사』의 석로전이 정치적으로 관계된 승려들 4명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고려사회에서 불교의 비중이 원에 비해 현저히 컸다는 점을 고려하면 석로전을 아예 제외한 것은 중대한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는 천문촵역촵오행촵지리촵예촵악촵여복촵선거촵백관촵식화촵병촵형법의 12지를 구성되었다. 역시 『원사』를 많이 참고하여 그 구성과 함께 범례도 그에 의거한 바가 컸다. 전통적 요소를 바탕으로 당, 송 제도를 수용한 고려의 제도는 원의 제도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원사』를 따른 지의 형식은 고려의 제도를 기술함에 부적합한 면도 있었다.

『고려사절요』는 전체 35권으로 된 편년체 사서이다. 보통 ‘절요’라 하는 편년사는 본사 즉 기전체 사서의 연대별 요약이나,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의 요약이 아니라 다른 사서인 『고려사』에도 없는 기사가 수록되거나, 『고려사』와 달리 표현되거나 그보다 자세히 서술된 부분도 존재한다.

  편년체인 『고려사절요』의 체제는 편년적인 정리를 해놓은 『고려사』의 세가와 유사한 면이 있다. 두 사서는 모두 신왕의 즉위년 다음해를 원년으로 하는 유년칭원법을 취하고, 우왕촵창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함께 공양왕의 경우는 즉위년칭원법을 취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 이전과 마찬가지로 즉위년을 원년으로 하는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의 왕대별 편년은 고려 당시의 기록인 금석문이나 고문서, 문집 등의 기록과는 1년씩 차이가 난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와 세가에는 서로 다른 서술원칙도 존재한다. 그 한 가지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시기에 있었던, 전왕에서 후왕으로 바뀐 후 다시 전왕과 후왕이 재위한 이른 바 중조의 경우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경우는 충렬왕과 충선왕, 충숙왕과 충혜왕의 재위기간으로, 『고려사절요』에는 중제에 의해 전년과 후년으로 재위기간이 나뉘는 네 왕들의 시기가 그대로 편년별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세가에는 이 시기 재위기간들을 각왕별로 묶어 놓음으로써 전후 재위기간들의 서술순서가 시간적 순서와 달라졌다. 이는 기본적으로 세가가 왕기(王記)로서 편찬된 결과이다. 이러한 왕기로서의 성격 때문에 세가에는 정통성이 부정된 우왕과 창왕대에 해당하는 서술이 빠져 열전에 수록되고, 세가에는 공민왕대 다음에 공양왕대가 서술되었다. 물론 『고려사절요』에서는 이 경우도 편년적 원칙에 따라 서술되었다.

『고려사절요』와 세가는 연시(年始)의 기록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세가는 간지와 재위년촵월촵일진 등을 표시하였는데. 『고려사절요』에서는 중국의 연호를 함께 표시하고 일진을 생략하였다. 또한 『고려사절요』의 지에는 연월을 밝히지 않은 무편년 기사들이 많다. 열전의 경우도 대강의 시대는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기사들이 많다. 이는 역사의 서술에서 중요한 결함이 되는 것으로 『고려사절요』의 경우는 그러한 문제가 없고, 『고려사절요』에서 그 연대가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론인 논찬의 경우 역대 사서들에서는 선대 유학자들이나 사가들의 기성 평론을 채용하기도 하지만 대개 편찬자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사론(私論)을 만들어 수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두 사서는 찬자가 직접 논찬을 만들지 않고 가능한 한 선인들의 기존 논찬 중에서 선택하여 그대로 수록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면서도 『고려사』가 역대 왕기의 끝에 ‘찬’을 부기하는 데 그친 것과 달리 『고려사절요』는 ‘찬’에 더하여 각 사실들에 대한 ‘논’을 여러 곳에 삽입하였다. 그 결과 『고려사』의 논찬 총수가 33칙인데 비해 『고려사절요』는 108칙으로 논찬이 풍부해졌다. 이러한 논찬은 역사인식을 이해함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지만, 어떤 사실에 대한 당대 인물의 언급인 경우도 있어 그 자체가 사료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고려사』는 기전체 본사로서 『고려사절요』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체재를 달리했던 데서 비롯되는 것이나, 두 책의 내용은 그 편찬에 주도적 영향을 준 역사인식에 따라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의 지배층이 지닌 역사인식의 공통 기반과 지배층 내부의 이념적 차이에 다른 분화는 관찬사서인 두 사서의 서술내용과 연결되었다.

  두 사서는 전근대의 관찬사서로서 모두 지배층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고, 피지배층 내지 하층민의 동향은 역사서술에서 사실상 거의 배제되었다. 역사의 서술대상은 왕실과 지배층이 중심이 된 왕조였고, 그 왕조의 흥망과정이 주된 관심사였다. 두 사서는 그러한 점에서 공통적으로 고려전기를 왕조가 흥성한 긍정적 시기로 평가하고, 후기를 왕조가 쇠망으로 이르는 부정적 시기로 평가하였다. 유교적 문치주의 이념에 따라 지배층 중에서도 왕실과 함께 문신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도 양자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두 사서는 지배층이 주도해간 역사의 세부적인 서술에서는 차이를 갖기도 하였다. 『고려사국사』단계에서부터 문제된, 재상을 중심으로 신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의 역사서술과 군주의 비중을 강조하는 경향의 역사서술이 초래한 차이다. 이는 『고려사』의 체재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의 역대 정사들에서 기전체의 구성은 열전의 권수가 평균 전체의 61%이고 본기는 10% 내외로 집계된다. 그러나 『고려사』의 본보기가 된 『원사』는 역대의 기전체와 달리 열전이 46%로 축소되고, 본기는 22% 정도로 확대된 것이었다. 『고려사』에서는 이에서 더 나아가 열전이 전체의 36%로 축소되고, 본기에 해당하는 세가는 34%로 확대되었다. 『고려사』편찬 논의에서 세종은 편년체에 고려 태조의 세계(세계)와 지리지를 첨가한 형식을 제시하고, 그 파격적인 형식에 반대한 수사관들은 기전체를 제시하여, 토론이 진행된 결과로 그러한 체재(體裁)의 구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신료들의 기전체 주장은 종래의 편찬작업이 『고려국사』이후 모두 편년체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커다란 방향전환이었다. 이에는 효과적인 역사 서술형식의 모색이나 제도의 참고에 편리한 지의 필요성이라는 면도 있겠으나, 관찬사서 편찬에 개입하는 지배층의 정치적 동기들도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전체는 열전을 통해 신민의 활동을 역사 속에서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거니와, 그것이 신료들이 기전체를 주장한 또다른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세가에는 군주가 친히 행한 것은 반드시 기록한다는 원칙이 세워졌기 때문에 왕명인 조촵교를 모두 수록하는 등, 군주와 관련된 사료들은 상세히 수록하여, 세가의 분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신하들의 장소(장소)는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도 열전에만 수록되고 세가에는 간략한 내용도 언급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내용의 세가가 대폭 확대되고 열전이 반대로 크게 축소된 것은 자연히 『고려사』의 전반적인 내용이 군주를 중심으로 한 쪽으로 비중을 갖게 하였다. 이는 역사서술에서 군주 쪽에 비중을 두려는 세종의 주장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절충된 결과로 해석된다.

『고려사절요』의 범례에는 군주에 대한 기록 중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갖거나 반성의 자료가 되는 것을 추려서 수록하고, 대신과 현사(현사)들의 활동도 그 직책과 함께 정리하여 수록한다는 서술대상의 선정원칙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고려사절요』의 서술은 『고려사』에서는 열전이나 지에 해당할 기사내용도 함께 간추려 수용하는 데서 오는 측면도 있겠지만, 『고려사절요』에는 『고려사』에 빠진 내용이 수록된 것도 있어 편찬 관점의 차이도 함께 고려될 필요가 있다. 적어도 『고려사절요』의 서술은 『고려사』보다 신료들의 활동에 대한 비중을 확대하는 방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방향은 『고려국사』에서부터 있었는데『고려사절요』는 그와 기본적으로 같은 계통의 사서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고려사절요』는 그 범례가 『고려국사』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고, 『고려사절요』에 수록된 왕의 성품 및 치적에 대한 평을 한 문장은 정도전의 『경계문감』별집 군도편에 실린 것과 거의 유사하다.

  고려시대의 문화전통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역사인식의 차이에서도 두 책의 서술은 다른 면을 가졌다. 고려전기에도 사대적 세계관이 존재했지만, 대송 관계에서 보듯이 권도라는 면도 강하였고, 그 사상적 저변도 제한된 것이었다. 고려말기에는 역사서술에 사대명분론적 개서가 나타나지만, 원의 압력에 의해 고려의 여러 제도들이 격하촵개칭된 상황이었으므로 이념적 측면 외에도 대외적인 압력을 의식한 측면도 무시하기 어렵다. 조선초에는 한당유학적 요서의 축소와 성리학의 확산으로 자체적인 사대명분론이 강화되는 가운데 고려시대의 자주적 전통에서 비롯된 사실이나 용어를 격하촵개서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만큼 수사관들의 상당수는 유교적 명분 및 가치판단과 그에 따른 칭찬과 나무람을 역사편찬의 기본적인 준거로 신봉하였다. 이들에게 불교촵도참신앙촵도료 및 이들과 결합되기도 하며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토속신앙 등과 관련된 문화요소들이나 그와도 연관된 자주적 전통과 관련된 제도들은 혁파되어야 할 이단적인 것으로 역사서술에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한편 전래되고 있는 그러한 문화전통에 조금이라도 이해를 가진 쪽에서 보면 그러한 주장은 역사의 말살을 가져오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세계관과 문화관의 차이에서 오는 이견의 대립은 장기간의 격론을 거침으로써 평가는 내리되 역사적 사실은 존중한다는 선에서 직서와 기록보전을 추구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고려사』에서는 본기를 세가라 하고 볌례에서 그러한 고려의 자주적 전통과 관련된 사실들을 ‘참유’로 지칭하는 한편, 역사적 사실 자체는 존중하여 직서하는 쪽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고려사절요』의 경우 『고려사』보다 사대명분론적 관점이 약간 강화되는 경향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직서의 원칙이 채택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단시된 문화전통들에 대해서도 『고려사』는 전체적으로 상당량의 서술을 할당하였다. 고려시대의 문화적 비중에 비하면 그것은 대단히 불충분한 것이었지만, 그를 이단시하는 지적 분위기가 강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 정도 서술이 된 것도 다행이라 하겠다. 『고려사』에서는 이들을 수록하면서도, ‘잡의’라 칭하여 해당 지의 끝에 붙이거나, 그들이 ‘비야하고 속되다’고 하는 등의 평을 달았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러한 이단시되는 문화전통에 대한 서술도 많이 탈락시켰고, 논찬을 통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였다.

(4) 두 사서의 공통점과 차이점

  지금까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체제상의 차이와 역사의식의 차이점을 이해하는데 주력하여 왔다. 그리하여 두 사서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군주의 입장과 신하의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수사의 주도권을 하나는 군주가 장악하고 하나는 신하가 장악했다는 차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체재가 하나는 정사체요, 하나는 편년체 라는데서 오는 편제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만도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시각의 차이인 것을 알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군주를 높이려는 입장과 신하를 높이려는 입장의 차이인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군주중심체제와 재상중심체제의 갈등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체제상의 갈등으로 인하여 두 사서는 반포과정에서도 심각한 대립을 보이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고려사절요』의 주찬자인 김종서가 반역으로 종신하는 비극까지 몰고 왔던 것이다.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된 『고려국사』의 찬자인 정도전이 김종서와 비슷한 종말을 맞이한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두 사서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서가 서로 만날 수 있는 공통점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두 사서는 비록 자의와 타의에 의해서 각각 씌여졌다고는 하지만 거의 동일한 편찬자들에 의해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서로 공통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두 사서의 공통점은 성종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의 고려사부분 특히 그 사론과 비교할 때 선명하게 이해된다. 동국통감의 사론은 고려사절요의 사론 이외에 사림파 유신이 직접 쓴 사론이 많이 첨가되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찬자는 관학파 유신들이다. 따라서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사론과 동국통감에 실린 사림파의 사론을 비교해 보면 이른바 관학파 유학과 사림파 유학의 차이점 그리고 나아가서 관학파의 역사인식과 사림파의 역사인식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관학파 유학의 특색은 정주학적 성리철학을 수용하면서도 한당유학의 정치사상을 넓게 수용하여 공리와 의리, 왕도와 패도를 적절히 조화시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인정을 추구하면서도 부강정책과 영토확장을 지지하고 이와 관련하여 무학과 기술학을 그렇게 천시하지 않는다. 정치의 이상도 삼대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한당정치도 중요시하고 당태종의 정관정요가 정치의 귀감으로 존중되었다. 향촌자치보다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고 국가의 제도와 법률을 중요시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찬자들은 15세기 관학파유학의 공통된 기반위에서 고려문화를 이해하고 있는 까닭에 고려전기문화가 다같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태조의 북진정책이나 윤관의 구성(九成)책같은 영토확대 정책이 모두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만주대륙에서 영위되었던 고대국가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국가의 역사적 정통성을 정립한 사실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려가 발해유민을 받아들이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단교한 사실이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조선초기에 북진정책이 다시 추진되어 태조대의 공원운동이나 세종대의 육진개척이 이루어진 것도 고려초기의 북진정책과 마찬가지로 만주 대륙에서 영위된 고대국가에 대한 역사적 승계의식을 전제로 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점은 동국통감의 사론이 고려의 친 발해 반 거란 정책을 비판하고 최영의 공원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 것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의 역대군주들이 당태종의 정관정요를 정치의 귀감으로 삼은 것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관적요를 상독한 광종이나, 성종에게 정관정요를 진언한 최승로가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관정요는 세종대에도 중요시되어 그 주역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용비어천가에서도 태조 이성계의 업적이 자주 당태종과 비유되기도 하였다.

  불교에 대해서는 고려사보다도 고려사절요가 더 강경한 비판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풍수도참 신앙이나 팔관, 연등과 같은 민족적 종교행사에 대해서는 양서가 모두 비교적 관용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고려와 조선왕조의 건국과 관련된 도참사상은 천운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른바 응천순인의 천명사상으로까지 설명되고 있다. 그리하여 태조의 훈요십조에 보이는 도참신앙에 대해서도 아무런 비판이 가해지지 않고 있다.

  고려와 원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양서가 모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원과 구생관계를 맺은 원종의 처사를 양서는 다같이 “동방의 백성으로 하여금 백년 승평의 악을 누리게 한 것” 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물론 원의 징구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원의 문화를 이적시 하고 있지 않으며 대원사대와 대명사대 관계를 같은 자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대원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중화와 이적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화이사상에 깊이 젖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몽고에 대해서 뿐아니라 여진에 대해서도 호적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을 반대한 사론을 싣고 있다. 거란에 대해서도 발해를 멸망시킨 침폭성은 비난하고 거란과 단교한 태조의 정책이 칭송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거란과의 영구적인 단교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거란과 가까이한 단종의 정책이 도리어 칭송되고 있음을 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대외관은 중국과 북방민족의 어느 한쪽에 편중되는 것을 지양하여 어떤 민족이든지 침략성을 드러낼 때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평화적 국가관계를 요구해 오는 민족과 사대우호관계를 맺는 것은 보국의 장책으로써 칭송되고 있다. 중화국가라고 해서 더 우리가 사대해야 하고 이른바 이적국가라고 해서 우리가 언제나 적대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사대 관계는 모두가 힘의 강약에서 오는 불가피한 보국정책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지, 어느 나라에 더 굴복적이고 더 자주적인 차이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공리적 현실적 대외관은 고려 사신들의 일관된 태도인 동시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찬자들 자신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사가 그 체재에서 일부 원사의 체재를 모방하게 된 것도 원 문화를 이적시하지 않은 한 가지 증거이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다같이 극단적인 화이론을 가진 주자의 강목체를 따르지 않은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세종 전후시기에 있어서는 원, 금, 서하, 몽고와 같은 소위 이적국가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니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의 찬자이기도 했던 양성지는 그 대표적인 논자라고 하겠다.

  중화중심 중화민족 중심의 화이적 사대사상이 심화된 것은 주자학에 보다 더 세련된 사림들이 등장한 이후부터이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비판은 동국통감의 사론이 보다 더 강렬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반사적으로 명에 대한 문화적 존숭이념이 한층 강화된 것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국에 대하여 민족적 자각을 가지려는 노력은 동국통감보다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쪽이 더 강렬하다고 말할 수 있다.

3. 결론 - 『고려사』와『고려사절요』의 사학사적 의의

『고려사』는 조선초에 고려시대 문화를 정리하는 정신적 기준으로서 의미를 가졌다고도 평가된다. 고려시대 문화와 조선초기 문화 모두에 대한 비판의 눈이 성립된 뒤 비교적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하게 된 『동사강목』단계와 비교할 때, 두 책은 조선초기 사학자들의 유교관념 과잉에서 오는, 냉정함을 잃은 흥분과 포폄이 있는 것으로 지적된 바 있다. 그러나 『동사강목』전 단계의 사서로서 지닌 시대적 한계를 감안한다먄,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비슷한 무렵의 『신편동국통감』과 같은 사서와는 달리 유교적 역사인식에도 경직서이 적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동국통감』이 고려시대를 연구함에 사실상 사료적 가치가 없는 사서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이념으로 경도된 경직된 편찬의 결과임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 비하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고려시대 연구의 중요한 기초사료로서 인정받고 있는 것은 현저히 대조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그 전단계에 편찬된 사서들을 참고하면서도 새로운 사료의 확충과 사실의 서술로 역사인식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동국통감』단계에서는 이념에 따른 역사서술과 사론을 통한 평가만을 강화하는 개서에 치중하여 『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를 대본으로 이용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고려사』는 그 편찬이 세종과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 전후의 조선전기 역사서들과 다른 뛰어난 측면이 있다. 성리학적인 이념에 투철한 것이 진리와 정의의 실천 방법이고 그에 어긋나는 것은 이단이라고 단정하는 논리가 횡행하는 가운데에서도, 세종의 주장과 같은, 사실의 존중을 내세운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겸허한 접근이 일부나마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전기 문화의 또 다른 측면이라 하겠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그러한 면은 두 사서의 체재가 성리학적인 이념에 따른 역사서술과 포폄에 좀더 철저할 수 있는 주자의 『통감강목』의 체재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미 강목체에 대한 이해는 고려말부터 본격화하여 민지의 『편년강목』이 편찬되었고, 정몽주도 『통감강목』을 본뜬 고려사를 편찬하자고 건의한 바 있었다. 조선전기에 들어와 세종대에는 『통감강목』이 인출되기에 이를 정도로 그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더 확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고려사』와『고려사절요』는 강목체로 서술되지 않고 기전체와 편년체를 취하였는데, 두 사서가 완성되기까지의 오랜 진통에는 체재에 대한 논쟁이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었다.

『고려사절요』도 그렇지만 『고려사』가 사료로서 가치가 높은 것은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는 진전된 역사편찬 방식의 결과였다. 객관성의 확보 면에서 같은 유교사관에 의한 역사서이지만 전 시대에 만들어진 『삼국사기』보다도 한결 큰 진전을 보이고 있는 것이고, 조금 뒤에 만들어진 같은 관찬사서인 『동국통감』보다도 앞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편찬방식은 편찬자의 역사관에 따른 서술대상 및 사료의 취사선택이나 생략등은 있을 수 있지만, 원사료를 인용하여 편집하는 방식을 기본으로 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편찬자의 문장에 의한 서술은 극히 한정하여 범례 등을 제외하면 본문에 해당하는 서술에서는 지와 열전의 서문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도 찬자의 주장임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여 사료의 인용에 의한 서술과 구분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단 서술된 내용은 사료집에 준하는 정도의 객관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고려시대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사료로서의 신뢰성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는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원사료를 선정하기 위해 노력하여, 그 서술내용은 금석문이나 문집 등의 자료와 대조 해보더라도 정확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시대적 한계를 감안할 때 『고려사절요』나 『고려사절요』는 당시의 사학으로서는 뛰어난 면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으나, 그 시대적 한계가 갖는 결함도 주목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주로 편찬자들의 역사관에 따른 서술대상과 자료의 선정과 관련된 문제로서 고려시대의 역사상의 구조적인 윤곽을 이해하는 데 제약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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