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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삼국사기 궁예 열전 - 원문 + 해석본

삼국사기 궁예 열전 - 원문 + 해석본

 ◈ <삼국사기> 列傳 궁예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其一目 抱而逃竄 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及壯不拘檢僧律 軒有膽氣 嘗赴齋行次 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不自安 潛結箕萱麾下

元會・申煊等爲友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將軍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以鐵椎打殺之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玆瓦]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 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 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 波珍亦必遭害” 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삼국사기 권제50 열전 제10 궁예)


◈ <삼국사기> 열전 궁예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까지 뻗쳤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출생하였고 나면서 이빨이 나고, 또 햇빛이 이상하니 아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오니 마땅히 이를 키우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궁중의 사람을 시켜 그 집에 가서 죽이게 하였다. 그 사람이 포대기에서 그 애를 꺼내 처마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인 여자 종이 몰래 받다가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 쪽 눈이 멀었다. 이를 안고 도망을 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가 10여세 되자 놀기만 하였으므로 그 유모[乳婢]가 말하였다.

“자네가 태어나 나라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내가 차마 하지 못하여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자네의 경망함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자네는 함께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궁예가 울면서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내가 떠나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문득 세달사(世達寺)로 떠나갔다. 그 절은 지금[고려]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장년이 되자 승려의 계율에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헌출하여 담력이 있었다. 일찍이 재(齋)에 참석하려고 가는 길에 까마귀가 입에 물었던 물건을 들고 있는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들여다보니 상아로 만든 첨대에 임금 「왕(王)」자가 쓰여져 있어 숨기고 말을 하지 않았으나 자못 자부하였다. 신라가 쇠약하여진 말기에 정치가 잘못되고 백성이 흩어져 왕기(王畿) 밖의 주현들이 반란세력에 따라 붙는 자가 거의 반에 이르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뭇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 아래 백성이 개미처럼 모여드는 것을 보고 선종은 이런 혼란기를 타서 무리를 모으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진성왕 즉위 5년 즉 대순(大順) 2년 신해년(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괴수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기훤이 얕보고 거만하여 예로서 대접하지 않자, 선종은 속이 답답하고 불안해하여 기훤의 휘하에 있었던 원회(元會), 신훤(申煊)과 몰래 결합하여 벗으로 삼았다.   

  천복(天復) 원년 신유(901)에 선종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으므로 평양의 옛도읍이 무성한 잡초로 꽉차 있으니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아마 이는 출생시에 버림받은 것을 원망하여 이런 말을 한 듯하다. 일찍이 남쪽으로 순행할 때 흥주(興州)[현재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 부석사에 이르러 벽에 신라왕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뽑아 찔렀다. 그 칼 자욱이 지금도 남아 있다.   

  주량(朱梁) 건화(乾化) 원년 신미(911)에 연호 성책(聖冊)을 수덕만세(水德萬歲)로 바꾸어 원년으로 하고, 국호를 태봉으로 고쳤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현재의 전남 나주시] 등을 치게 하였다. 금성을 나주로 개칭하고 그 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았다. 선종이 미륵불을 자칭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가사[方袍]를 입었다. 큰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로 삼아 외출할 때에는 항상 흰 말을 탔는데 말갈기와 꼬리를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였으며 소년 소녀로 하여금 깃발, 일산과 향기 나는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고 비구 승려 200여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 또 스스로 불교 경전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바른 말이 아니었으며, 때때로 반듯하게 앉아 불법을 강설하였다. 중 석총(釋聰)이 이를 평하기를 “모두 사특한 설 괴이한 말로서 교훈이 될 수 없다.”고 하자 선종이 이를 듣고 노하여 철퇴로 쳐 죽였다.   

  정명(貞明) 원년(915)에 부인 강(康)씨가 왕이 옳지 않은 법을 많이 행하자 정색으로 간하니 왕이 미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고 있다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강씨가 말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하고는 뜨거운 불에 쇠 절구공이를 다려서 그 음부를 쳐죽였다. 그 두 아들에 대하여서도 이후 더욱 의심을 많이 하고 성을 급하게 내니 모든 관료, 장수, 아전들 및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부양(斧壤), 철원 사람들은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보다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당나라로부터 와서 철원의 시전에 임시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 4년 무인(918)년에 저자에서 모습이 걸출하게 크고 머리카락이 온통 희며 옛 의관을 입은 사람을 보았다. 그는 왼손에는 옹기 사발을 들고 오른 손에는 옛 거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는가?” 하니 창근이 곧 쌀을 주고 바꾸었다. 그 사람은 받은 쌀을 거리의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후로는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창근이 거울을 벽 위에 걸어두니 햇빛이 거울에 비치자 가늘게 쓴 글자가 있었다. 이를 읽어보니 옛 시 같은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가 진마(辰馬)에 아들을 내리니 먼저 닭을 붙들고 후에 오리를 잡을 것이다.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청목(靑木) 중에 움추리고 한 마리는 흑금(黑金)의 동쪽에 나타날 것이다.』

창근이 처음에는 글자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보통 것이 아니라 하여 왕에게 이를 아뢰었다. 왕은 담당 관청에 명하여 창근과 더불어 그 원래 거울 주인을 찾도록 하였는데 찾지 못하고 오직 발삽사(颯寺) 불당에 서 있는 진성(鎭星)의 소상(塑像)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한참 동안 이상하다고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이를 해석하도록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 말하였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렸다는 귀절에서 진마(辰馬)는 진한 마한을 말하고, 두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청목(靑木)에 감추었고 한 마리는 흑금(黑金)에 나타났다는 귀절에서 푸른 나무는 송(松)이니 송악군 출신으로 용(龍)자를 이름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자손이니, 지금 파진찬 시중을 가리킴일 것이며, 검은 쇠는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을 말함이다. 지금 임금이 처음 이곳에서 일어났으나 마침내 이곳에서 멸망할 징험이다. 먼저 닭[鷄]을 잡고 후에 오리[鴨]를 잡는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을 얻고 후에 압록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함홍 등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지금 임금께서 잔학하고 난폭하기가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만일 이를 사실대로 아뢰었다가는 우리들이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만 아니라 파진찬까지도 반드시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고는 꾸며서 거짓으로 아뢰었다. 왕이 흉악함과 잔학함을 거리낌없이 하자 신료들이 크게 두려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여름 6월 장군 홍술(弘述), 백옥(白玉), 삼능산(三能山), 복사귀(卜沙貴)<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어릴 때 이름이다.> 네 사람이 몰래 모의하고 밤중에 태조의 집에 찾아가 말하였다.

“지금 임금께서 음란한 형벌을 마음대로 써서 자신의 처자를 살륙하고 신료를 목베이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려 살아갈 길이 막연합니다. 옛부터 어리석은 임금을 폐위시키고 지혜가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입니다. 청컨대 공께서는 탕왕과 무왕의 일을 행하십시오!”

이에 태조는 얼굴 빛을 붉히며 거절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박하다고 스스로 믿어 왔는데 지금 비록 포악하고 난폭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저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은 소위 혁명이라고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어 감히 은나라 주나라 건국자의 일을 본뜰 수가 없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였다.

“때는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이런 때를 만나기는 어렵고 기회를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우며, 백성들이 모두 왕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니, 지금 덕망이 공보다 더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히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獨夫]의 손에 죽임을 당하리오?”

부인 유(柳)씨가 여러 장수들의 주장을 듣고 이에 태조에게 말하였다.

“어진이가 어질지 못한 사람을 치는 것은 옛부터 그런 것인데 지금 뭇사람의 논의를 들으니 여자인 저도 오히려 분함이 생기는데 하물며 대장부께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뭇 사람의 마음이 문득 변하였으니 천명이 돌아온 것입니다.”

직접 갑옷을 갖다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옹위하고 문을 나섰다. 길잡이로 하여금 외치게 하기를 “왕공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 하니 이에 앞뒤에서 분주하게 달려 와 따르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먼저 궁성의 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사람이 또한 1만여 명에 달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평복으로 갈아 입고 산 속으로 도망쳤으나 곧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891)에 일어나 주량(朱梁) 정명 4년(918)에 이르기까지 28년만에 망하였다.

(삼국사기 권제50 열전 제10 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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