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궁예 열전 - 원문 + 해석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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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列傳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수태보문하시중판상서이예부사집현전태학사감수국사상주국치사신 김부식은 임금의 말씀을 받들어 찬함. 三國史記卷第四十一. 삼국사기 권 제 41 【1】列傳 第一 金庾信 (上) 열전 제1 김유신 (상)/출생(서기595년) 金庾信 王京人1)也 十二世祖2)首露3) 不知何許人4)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5) 望駕洛九村6) 遂至其地 開國 號曰加耶7) 後改爲金官國8)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9) 或云仇次休10)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11)之後 故姓金 庾信碑12)亦云 『軒轅13)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14)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김유신(金庾信)은 서울 사람(王京人:경주인)이었다. 그 12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른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峰:지금김해龜旨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 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9세손(世孫) 구해(仇亥)에 이르렀다. 구해는 혹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하며, 유신의 증조(曾祖)이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유신의 비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다.』 하였으니,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왕(首露王)과 신라(新羅)는 같은 성씨였다. 祖武力 爲新州道 行軍摠管15) 嘗領兵 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父舒玄 官至蘇判?大梁州都督 . 安撫大梁州諸軍事16) 按庾信碑云 『考蘇判金逍衍』 不知舒玄或更名耶 或逍衍是字耶 疑故兩存之 조부(祖父)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지금廣州) 행군총관(行軍摠官)이 되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왕(百濟 聖王)과 그 장수 네 사람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아버지 서현(舒玄)은 벼슬이 소판(蘇判:3등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유신의 비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다.』하였으니, 서현(舒玄)은 혹은 고친 이름인지, 혹은 소연(逍衍)은 자호(字號)인지, 모르겠다. 의심이 되므로 둘 다 적어 둔다. 初 舒玄路見葛文王立宗之子. 肅訖宗之女萬明 心悅而目挑之 不待媒?而合 舒玄爲萬弩郡太守 將與俱行 肅訖宗始知女子與玄野合17)疾之 囚於別第 使人守之 忽雷震屋門 守者驚亂 萬明從竇而出 遂與舒玄 赴萬弩郡 일찍이 서현(舒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法興王弟)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眞興王弟)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현재의 충북 진천]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서야 딸이 서현과 야합(野合)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갑자기 벼락(落雷)이 문간을 때리자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이 없었다. 만명(萬明)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드디어 서현공과 함께 만노군(萬弩郡)으로 부임하였다. 舒玄 庚辰之夜夢 熒惑. 鎭二星 降於己 萬明亦以辛丑之夜夢 見童子衣金甲 乘雲入堂中 尋而有娠 二十月而生庾信 是眞平王建福十二年18) 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及欲定名 謂夫人曰 ??吾以庚辰夜吉夢 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今庚與庾.字相似 辰與信. 聲相近 況古之賢人 有名庾信19), ?以命之, 遂名庾信焉,(萬弩郡20), 今之鎭州, 初以庾信胎, 藏之高山, 至今謂之胎靈山.21)) 서현공(舒玄公)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南方火星)과 진성(鎭星:中央土星)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부인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바로 태기가 있어 20개월만에 유신을 낳았다. 때는 진평왕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乙卯:595)였다. <서현공이> 그 <아들>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부인에게 말하였다.??내가 경진일(庚辰日) 밤에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경진(庚辰)으로 이름을 지어야 하겠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지금 경(庚)자는 유(庾)자와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소리가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 어진 사람에 유신(庾信)이라고 이름 지은 이가 있으니 그렇게 이름 짓지 않으리요??? 하고는 드디어 이름을 유신(庾信)이라 하였다.<만노군은 지금[고려]의 진주(鎭州)[현재의 충북 진천]이다. 처음 유신의 태(胎)를 고산(高山)에 묻었으므로 지금[고려]까지 태령산(胎靈山)이라 한다.> 【2】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15세(서기609년) 公22)年十五歲23)爲花郞24)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25) 공은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으니, 그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3】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17세(서기611년) 眞平王建福二十八年辛未 公年十七歲 見高句麗?百濟?靺鞨26)侵?國疆 慷慨有平寇賊之志 獨行入 中嶽石?27) 齊戒告天 盟誓曰 ??敵國無道 爲豺虎 以擾我封場 略無寧歲 僕是一介微臣 不量材力 志淸禍亂 惟天降監 假手於我?? 居四日 忽有一老人 被褐而來曰 ??此處 多毒蟲猛獸 可畏之地 貴少年 爰來獨處 何也?? 答曰 ??長者28)從何許來 尊名可得聞乎?? 老人曰 ??吾無所住 行止隨緣 名則難勝也?? 公聞之 知非常人 再拜進曰 ??僕新羅人也 見國之讐 痛心疾首 故來此 冀有所遇耳 伏乞長者 憫我精誠 授之方術?? 老人?然無言 公涕淚懇請不倦 至于六七 老人乃言曰 ??子幼而有幷三國之心 不亦壯乎?? 乃授以秘法曰 ??愼勿妄傳 若用之不義 反受其殃?? 言訖而辭 行二里許 追而望之 不見 唯山上有光 爛然若五色焉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辛未:611)에 공은 나이 17세로, 고구려?백제?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넘쳐 침략한 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석굴(中嶽石?)에 들어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하늘에 다음과 같이 고하여 맹세하였다.??적국이 무도(無道)하여 승냥이와 범처럼 우리 강역을 어지럽게 하니 거의 평안한 해가 없습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은 헤아리지 않고, 화란(禍亂)을 없애고자 하오니 하늘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저에게 수단을 빌려주십시오!?? 머문지 나흘이 되는 날에 문득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이 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하게 생긴 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있음은 무엇 때문인가??? 유신이 대답하였다.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노인이 말하였다. ??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이 없고 인연 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難勝)이다.?? 공이 이 말을 듣고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에게] 두 번 절하고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만나는 바가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애달피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고 여섯 일곱 번 하니 그제야 노인은 ??그대는 어린 나이에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또한 장한 일이 아닌가??? 하고, 이에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면서 말하였다.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일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말을 마치고 작별을 하였는데 2리쯤 갔을 때 쫓아가 바라보니,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빛이 보일 뿐인데 오색 빛처럼 찬란하였다. 【4】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18세(서기612년) 建福二十九年 隣賊轉迫 公愈激壯心 獨携寶劒 入咽薄山29)深壑之中 燒香告天 祈祝 若在中嶽 誓辭仍禱 ??天官垂光 降靈於寶劒?? 三日夜 虛. 角二星光芒30) 赫然下垂 劒若動搖然. 진평왕 건복 29년(612:公年十八歲)에 이웃 나라 적병이 점점 닥쳐오자, 공은 장한 마음을 더욱 불러일으켜 혼자서 보검(寶劍)을 가지고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여 빌기를 중악(中嶽)에서 맹서한 것처럼 하고, 이어서 ??천관(天官)께서는 빛을 드리워 보검(寶劍)에 신령을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3일째 되는 밤에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 끝이 빛나게 내려오더니 칼이 마치 흔들리는 듯하였다. 【5】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35세(서기629년) 建福四十六年31)己丑 秋八月 王遣伊?任永里 波珍?龍春32)?白龍 蘇判大因?舒玄等 率兵攻高句麗娘臂城33) 麗人出兵逆擊之 吾人失利 死者衆多 衆心折? 無復鬪心 庾信 時爲中幢幢主34) 進於父前 脫?而告曰 ??我兵敗北 吾平生 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盖聞 ??振領而?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跨馬拔劒 跳坑出入賊陣 斬將軍 提其首而來 我軍見之 乘勝奮擊 斬殺五千餘級 生擒一千人 城中兇懼無敢抗 皆出降.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 가을 8월에 진평왕이 이찬(伊?:2등관) 임영리(任永里), 파진찬(波珍?:4등관)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蘇判:3등관) 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淸原)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맞아 치니, 신라 사람은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뭇 사람들의 마음이 꺾이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이 그때 중당 당주(中幢幢主:副將軍)였었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로써 살겠다고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옷깃을 들면 가죽옷[?]이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어 들어 참호(塹壕)를 뛰어넘어 적진에 들락날락하면서 장군의 머리를 베어 들고 돌아왔다. 우리 군사들이 보고, 이기는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고 1천 명을 사로잡으니,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6】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48세(서기642년) 善德大王十一年35)壬寅 百濟敗大梁州 春秋公女子古?炤娘 從夫品釋死焉 春秋恨之 欲請高句麗兵 以報百濟之怨 王許之 將行 謂庾信曰 ??吾與公同體 爲國股肱 今我若入彼見害 則公其無心乎?? 庾信曰 ??公若往而不還 則僕之馬跡 必踐於麗?濟兩王之庭 苟不如此 將何面目 以見國人乎?? 春秋感悅 與公互?手指 ?血以盟曰 ??吾計日六旬乃還 若過此不來 則無再見之期矣?? 遂相別 後庾信爲 押梁州軍主,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지금 陜川)를 함락하니,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으로 여겨,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춘추공이 장차 떠나려 할 때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공(公)과 한 몸이고 나라의 팔다리이다. 지금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해를 당하면, 공(公)은 무심할 수 있겠는가??? 유신이 말하였다. ??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을 대할 것인가???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더불어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여 말하였다. ??내가 날짜를 계산하여 보건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다. 만약 이 기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만나 볼 기약이 없을 것이다.??그리고 나서 서로 작별하였다. 후에 유신은 압량주(押梁州:지금 慶山) 군주(軍主:摠督:都督)가 되었다. 春秋與訓信沙干 聘高句麗 行至代買縣36) 縣人豆斯支沙干 贈靑布三百步37) 旣入彼境 麗王 遣太大對盧蓋金館之 燕饗有加 或告麗王曰 ??新羅使者 非庸人也 今來 殆欲觀我形勢也 王其圖之 ?無後患?? 王欲橫問 因其難對而辱之 謂曰 ??麻木峴38)與竹嶺39) 本我國地 若不還我 則不得歸?? 春秋答曰 ??國家土地 非臣子所專 臣不敢聞命?? 王怒囚之 欲戮未果 春秋以靑布三百步 密贈王之寵臣先道解 道解 以饌具來 相飮酒? 戱語曰 ??子亦嘗聞龜兎之說40)乎 昔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 則可療也??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 白龍王言 ??吾能得之?? 遂登陸 見兎言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兎曰 ??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日者 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 龜信之而還 ?上岸 兎脫入草中 謂龜曰 ??愚哉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龜憫?而退?? 春秋聞其言 喩其意 移書於王曰 『二嶺 本大國地分 臣歸國 請吾王還之 謂予不信 有如?日』 王?悅焉. 春秋入高句麗 過六旬未還 庾信揀得國內勇士三千人 相語曰 ??吾聞 見危致命 臨難忘身者 烈士之志也 夫一人致死. 當百人 百人致死. 當千人 千人致死. 當萬人 則可以橫行天下 今國之賢相 被他國之拘執 其可畏不犯難乎?? 於是 衆人曰 ??雖出萬死一生之中 敢不從將軍之令乎?? 遂請王 以定行期 時高句麗諜者浮屠德昌 使告於王 王前聞春秋盟辭 又聞諜者之言 不敢復留 厚禮而歸之 及出境 謂送者曰 ??吾欲釋憾於百濟 故來請師 大王不許之 而反求土地 此非臣所得專 嚮與大王書者 圖?死耳?? 此與本記眞平王十二年所書 一事而小異 以皆古記所傳 故兩存之. 춘추가 사간(沙干:8등관) 훈신(訓信)과 함께 고구려로 사신을 갈 때 대매현(代買縣:竹嶺縣?)에 이르니 고을 사람 두사지(豆斯支) 사간(沙干)이 청포(靑布:모시베) 300보(三百步: 43필)를 선사하였다. 고구려 국경내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寶臟王)은 태대대로(太大對盧: 1등관) 개금(蓋金:淵蓋蘇文)을 보내 객사를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식사 대접을 특별하게 하였다. 어느 사람이 고구려 왕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신라 사신(使者)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은 아마 우리의 형세를 살피려는 것 같으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고구려 왕은 무리한 질문으로 대답하기 어렵게 함으로써 그를 욕보이게 하려고 말하였다.??마목현(麻木峴:鷄立嶺:鳥嶺)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 나라 땅이니, 만약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 춘추가 대답하였다. ??국가의 토지는 신하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臣)은 감히 명령을 좇을 수 없습니다.??고구려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려 하였으나 미처 처형하지 않았는데, 춘추공은 청포 300보(靑布三百步)를 은밀히 왕이 총애하는 신하 선도해(先道解)에게 주었다. 도해가 음식을 차려 와서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이 얼근히 올랐을 때 도해가 농담조로 말하였다. ??그대도 또한 일찍이 거북과 토끼 이야기를 들었는가? 옛날에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병을 앓았는데 의원의 말이 ??토끼간을 얻어 약을 지으면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다 속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거북이 한 마리가 용왕에게 아뢰어 ??제가 그것을 얻어 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섬 하나가 있는데, 맑은 샘물과 흰 돌에, 무성한 숲과 맛있는 과일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매와 새매가 침입하지 못한다. 네가 만약 가기만 하면 편히 살아 아무 근심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이어 토끼를 등에 업고 헤엄쳐 2~3리쯤 가다가, 거북이가 토끼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지금 용왕의 딸이 병이 들었는데, 모름지기 토끼간이 약이 된다고 하기에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이다.?? 하였다. 토끼가 말하기를 ??허허! 나는 신명(神明)의 후예라, 능히 오장(五臟)을 꺼내어 씻어 넣을 수 있다. 일전에 속이 좀 불편하여 간과 심장을 꺼내 씻어서 잠시 바위 밑에 두었는데, 너의 달콤한 말을 듣고 곧바로 와서 간이 아직도 그 곳에 있으니, 어찌 되돌아가서 간을 가져오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어찌 양편이 다 좋은 일이 아닌가??? 하였다. 거북이 그 말을 믿고 되돌아갔다. 겨우 해안에 오르자마자 토끼가 풀 속으로 도망치며 거북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리석기도 하다. 어찌 간 없이 사는 자가 있을 것이냐??? 하니, 거북이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춘추가 그 말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 왕에게 글월을 보내 말하였다. ??두 영(嶺)은 본래 대국(大國:고구려)의 땅입니다. 신(臣)이 귀국하면 우리 왕께 청하여 돌려 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왕이 이에 기뻐하였다. 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간지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국내의 용감한 군사 3천 명을 선발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잊는 것은 열사의 뜻이라 한다. 무릇 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백 사람을 당해내고, 백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천 사람을 당해 내며, 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만 사람을 당해 낼 수 있으니 그러면 천하를 마음대로 주름잡을 수 있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억류되어 있는데 두렵다고 하여 어려움을 당해 내지 않을 것인가???이에 뭇 사람들이 ??비록 만 번 죽고 겨우 한 번 살 수 있는 곳에 가더라도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드디어 왕에게 청하여 군사 출동 기일을 정하였다. 그때 고구려 간첩 승려 덕창(德昌)이 사람을 시켜 이를 <고구려> 왕에게 아뢰었다. <고구려> 왕은 이미 춘추의 맹서하는 약속을 받았고, 또 간첩의 말을 들었으므로 <춘추를> 더 잡아 둘 수가 없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춘추는 국경을 벗어나자 바래다준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백제에 대한 유감을 풀고자 하여 군대를 청하러 왔다가 대왕께서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니 이는 신하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엊그제 대왕에게 서신을 올린 것은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뜻이었을 뿐이다.??<이는 본기(本記)에서 진평왕 12년에 쓴 것과 같은 사건이나 내용은 조금 다르다. 모두가 고기(古記)의 전하는 바이므로 두 가지를 모두 남겨 둔다.> 【7】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50세(서기644년) 庾信爲押梁州軍主 十三年爲蘇判 秋九月 王命爲上將軍 使領兵 伐百濟加兮城41)?省熱城?同大城{同火城}等七城 大克之 因開加兮之津 유신은 <선덕왕 11년>압량주 군주(軍主)가 되었다가 13년(644)에 소판(蘇判:3등관)이 되었고, 가을 9월에 왕이 상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성을 쳐서 크게 이겼다. 이로 말미암아 가혜진(加兮津)을 열었다. 【8】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51세(서기645년) 乙巳正月 歸未見王 封人急報 百濟大軍來攻我買利浦城 王又拜庾信 爲上州將軍42) 令拒之 庾信聞命卽駕 不見妻子 逆擊百濟軍走之 斬首二千級 三月還命王宮 未歸家 又急告 百濟兵 出屯于其國界 將大擧兵侵我 王復告庾信曰 ??請公 不憚勞?行 及其未至備之?? 庾信又不入家 練軍繕兵 向西行 을사년(선덕왕 14년: 645) 정월에 돌아와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한다는 봉인(封人)의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니 유신은 명령을 받자마자 말에 올라 처자(妻子)를 만나지 않고, 백제 군대를 반격하여 쫓아냈는데 2천 명을 목베었다. 3월에 왕궁에 돌아와 복명하고 미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또 백제 군사가 국경에 주둔하여 많은 군사로 우리를 치려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공은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급히 가서 그들이 이르기 전에 대비하시오!?? 하니 유신이 또 집에 들르지 않고 군대를 선발하고 병기를 손질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于時 其家人 皆出門外待來 庾信過門 不顧而行 至 五十步許駐馬 令取漿水於宅 ?之曰 ??吾家之水43) 尙有舊味?? 於是 軍衆皆云 ??大將軍 猶如此 我輩 豈以離別骨肉爲恨乎?? 及至疆? 百濟人 望我兵衛 不敢迫乃退 大王聞之甚喜 加爵賞. 이때 그 집사람들이 모두 문밖에 나와서 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유신이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 돌아다보지 않고 가다가 50보쯤 이르러 말을 세우게 하고 사람을 시켜 집에 가서 장물<漿水>을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는 ??우리 집 물은 옛 맛 그대로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장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시니 우리들이 골육을 이별함을 어찌 한스러워 하랴!??고 하였다. 국경에 이르니 백제 사람들이 우리 군사의 방비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여 벼슬과 상을 더하여 주었다. 【9】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53세(서기647년) 十六年丁未 是善德王末年 眞德王元年也 大臣毗曇?廉宗 謂女主不能善理 擧兵欲廢之 王自內禦之 毗曇等. 屯於明活城44) 王師 營於月城45) 攻守十日不解 丙夜 大星落於月城 毗曇等 謂士卒曰 ??吾聞落星之下 必有流血 此殆女主敗績之兆也?? 士卒呼吼 聲振天地 <선덕왕>16년 정미(647)는 선덕왕의 마지막 해이자,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왕(女主)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하므로 왕은 스스로 왕궁 안에서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사는 월성(月城)에 머물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한밤(丙夜)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은 사병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왕(女主)이 패할 징조이다.??병졸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大王聞之 恐懼失次 庾信見王曰 ??吉凶無常 惟人所召 故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高宗以雉?興 鄭公以龍鬪昌 故知德勝於妖 則星辰變異 不足畏也 請王勿憂?? 乃造偶人 抱火載於風鳶46)而?之 若上天然 翌日 使人傳言於路曰 ??昨夜 落星還上?? 使賊軍疑焉 又刑白馬 祭於落星之地 祝曰 ??天道 則陽剛而陰柔 人道 則君尊而臣卑 苟或易之 卽爲大亂 今毗曇等 以臣而謀君 自下而犯上 此所謂亂臣賊子 人神所同疾 天地所不容 今天若無意於此 而反見星怪於王城 此臣之所疑惑 而不喩者也 惟天之威 從人之欲 善善惡惡 無作神羞?? 於是 督諸將卒 奮擊之 毗曇等敗走 追斬之 夷九族 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유신이 왕을 뵈옵고 말하였다. ??길(吉)과 흉(凶)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붉은 새(赤雀)가 나타났어도 망하였고, 노(魯)나라 애공(哀公)은 기린(麒麟)을 얻었어도 쇠하였으며, 은나라 고종(高宗)은 장끼가 울었어도 중흥을 이루었고, 정공(鄭公)은 두 마리 용(龍)이 싸웠으나 창성(昌盛)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덕(德)이 요사(妖邪)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이 떨어진 변괴는 족히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연(風鳶)에 달아 날리니, 하늘로 올라가는 듯 하였다.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길가는 사람에게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흰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人道)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神明)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한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 안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를 보이니 이는 제가 의심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惡)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는 여러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베고 그 9족(族)을 무찔러 죽였다. 【補記】 삼국사기 卷五 신라본기 『선덕왕16년(647)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은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일컫고, 반란을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8월에 왕께서 훙어,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례하였다.』 『진덕여왕원년(647) 정월 17일에 비담의 목을 베고, 연루자 30인을 죽였다. 2월에 이찬 알천(閼川)을 임명하여 상대등(上大等)을 삼고, 대아찬(大阿?:5등관)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春川)의 군주(軍主)를 삼았다』 冬十月 百濟兵 來圍茂山47)?甘勿48)?桐岑等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拒之 苦戰氣竭 庾信謂丕寧子曰 ??今日之事急矣 非子 誰能激衆心乎?? 丕寧子拜曰 ??敢不惟命之從?? 遂赴敵 子擧眞及家奴合節 隨之 突劒戟 力戰死之 軍士望之 感勵爭進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현재의 경북 구미시] 등 세 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진덕>왕이 유신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합 1만 명을 이끌고 막게 하였으나 고전(苦戰)하여 기세가 꺾이자 유신이 비녕자(丕寧子)에게 ??오늘의 사태가 급박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뭇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비령자가 절을 하고는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적진에 나아갔다. 아들 거진(擧眞) 및 집종[家奴] 합절(合節)이 그를 따라서 창, 칼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죽으니 군사들이 이를 바라다보고는 감동되고 격분되어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10】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41) 김유신/54세(서기648년) 眞德王太和元年49)戊申 春秋 以不得請於高句麗 遂入唐乞師 太宗皇帝曰 ??聞爾國庾信之名 其爲人也如何?? 對曰 ??庾信 雖少有才智 若不籍天威 豈易除?患?? 帝曰 ??誠君子之國也?? 乃詔許? 將軍蘇定方 以師二十萬 ?征百濟. 時, 庾信 爲押梁州50)軍主 若無意於軍事 飮酒作樂 屢經旬月 州人 以庾信爲庸將 譏謗之曰 ??衆人安居日久 力有餘 可以一戰 而將軍?惰 如之何?? 진덕왕 태화(太和) 원년 무신(648)에 춘추공은 고구려의 청병을 이루지 못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청하였다. <당>태종 황제가 ??너희 나라 유신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니, <춘추공이> 대답하기를 ??유신은 비록 다소의 재주와 지략이 있으나 만약 황제의 위엄을 빌리지 않으면 어찌 쉽게 걱정거리인 이웃 나라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제는 ??참으로 군자의 나라(君子之國)로구나!?? 하고는 요청을 수락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때 유신공은 압량주(押粱州) 군주(軍主)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놀며 몇 달을 보내니, 주(州)의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생각하여 헐뜯어 말하기를 ??뭇 사람이 편안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어 남는 힘이 있어 한번 전투를 해봄직한 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찌할 것인가.??고 조롱하였다. 庾信聞之 知民可用 告大王曰 ??今觀民心 可以有事 請伐百濟 以報大梁州之役?? 王曰 ??以小觸大 危將奈何?? 對曰 ??兵之勝否 不在大小 顧其人心何如耳 故紂有億兆人 離心離德 不如周家十亂 同心同德 今吾人一意 可與同死生 彼百濟者不足畏也?? 王乃許之. 遂簡練州兵赴敵 至大梁城外 百濟逆拒之 佯北不勝 至玉門谷51) 百濟輕之 大率衆來 伏發擊其前後 大敗之 獲百濟將軍八人 斬獲一千級 於是 使告百濟將軍曰 ??我軍主品釋及其妻金氏之骨 埋於爾國獄中 今 爾裨將八人 見捉於我匍匐請命 我以狐豹首丘山之意 未忍殺之 今 爾送死二人之骨 易生八人 可乎?? 百濟仲常一作忠常佐平 言於王曰 ??羅人骸骨 留之無益 可以送之 若羅人失信 不還我八人 則曲在彼 直在我 何患之有?? 乃掘品釋夫妻之骨 ?而送之 庾信曰 ??一葉落 茂林無所損 一塵集 大山無所增?? 許八人生還 遂乘勝 入百濟之境 攻拔嶽城52)等十二城 斬首二萬餘級 生獲九千人 論功 增秩伊? 爲上州行軍大摠管 又入賊境 屠進禮53)等九城 斬首九千餘級 虜得六百人. 春秋入唐 請得兵二十萬來 見庾信曰 ??死生有命 故得生還 復與公相見 何幸如焉?? 庾信對曰 ??下臣仗國威靈 再與百濟大戰 拔城二十 斬獲三萬餘人 又使品釋公及其夫人之骨 得反鄕里 此皆天幸所致也 吾何力焉?? 유신공이 이 말을 듣고 백성을 한 번 쓸 수 있음을 알고는 대왕에게 고하였다. ??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전쟁을 치를 수 있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陜川) 전쟁에 대한 보복을 합시다!?? 왕은 ??소수의 병력으로써 큰 병력을 대항하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 하니 <유신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쟁의 승부는 병력의 다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인심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殷)나라 주왕(紂王)에게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과 덕이 떠나서 주(周)나라의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백성은 뜻을 같이하여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데 저 백제는 두려워 할 바가 못됩니다.??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드디어 압량주(押粱州:경산)의 군사를 선발 훈련시켜 적진으로 나가게 하여 대량성(大梁城:현재의 합천)에 이르니 백제군이 맞서 대항하였다. <신라군은> 거짓 패배하여 이기지 못하는 척하여 옥문곡(玉門谷:慶州西)까지 후퇴하니 백제군은 이를 만만하게 여기고 대군을 이끌고 왔으므로 복병(伏兵)이 그 앞뒤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목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1천 명<級>에 달하였다. 이에 <유신공은> 사자(使者)를 백제 장군(義直)에게 보내 말하였다. ??우리 대량주군주(大粱州軍主)이던 김품석(金品釋)과 그의 부인 김씨의 뼈가 너의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의 부장(裨將) 여덟 명이 나에게 잡혀 있어 엎드려 살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산 여덟 사람과 바꿀 수 있는가??? 백제의 좌평(佐平:1등관)인 중상(仲常)<또는 충상(忠常)이라고도 썼다.>이 의자왕에게 아뢰었다. ??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도 이로울 바가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신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의 여덟 명을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이 저쪽에 있고, 곧음이 우리 쪽에 있으니 어찌 걱정할 바가 있겠습니까??? 이에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내왔다. 유신이 말하기를 ??한 잎이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수풀이 줄어들지 않으며, 한 티끌이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보태지는 법이 아니다.?? 하고는 여덟 사람이 살아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마침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백제의 영토에 들어가 악성(嶽城:河東) 등 12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을 목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공로를 논하여 이찬(伊?:2등관)으로 승진시키고 상주 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하였다. 다시 적의 영토에 들어가 진례(進禮:錦山) 등 아홉 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을 목베고 6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춘추공은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 20만을 얻기를 청하고 와서 유신공을 만나 말하기를 ??사람이 살고 죽는 데에는 명이 있어 살아 돌아와 다시 공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니 유신이 답하였다. ??저는 국가의 위엄과 영령의 힘에 의지하여 두 번이나 백제와 크게 싸워 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3만여 명을 목베거나 포로로 잡았고, 또 품석공(品釋公)과 그 부인의 유해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모두가 하늘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 三國史記 卷 第四十一 終 三國史記 卷 第四十二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大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11】列傳 第二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54세(서기648년) 金庾信 中 김유신(金庾信) 중 <太和>二年秋八月 百濟將軍殷相 來攻石吐等七城 王命庾信及竹旨?陳春?天存等將軍 出禦之 分三軍 爲五道擊之 互相勝負 經旬不解 至於?屍滿野 流血浮杵 於是 屯於道薩城54)下 歇馬餉士 以圖再擧 時有水鳥東飛55) 過庾信之幕 將士見之 以爲不祥 庾信曰 ??此不足怪也?? 謂衆曰 ??今日必有百濟人來諜 汝等 佯不知 勿敢誰何?? 又使徇于軍中曰 ??堅壁不動 待明日援軍至 然後決戰?? 태화2년(649:公의 55세) 가을 8월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왔다. 왕은 유신과 죽지(竹旨), 진춘(陳春), 천존(天存) 등의 장군에게 명하여 나가 막게 하였다. 전군<三軍>을 다섯 방면(五道)으로 나누어 쳤으나 서로의 승부가 열흘이 지나도록 나지 않았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어 공이(杵)를 띄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쳐서 말을 쉬게 하고 군사를 잘 먹여 다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때 물새가 동쪽으로 날아 유신의 군막을 지나가니 장군과 병사들이 보고 불길한 징조라고 말하였다. 유신이 이는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무리에게 일렀다. ??금일 반드시 백제인이 간첩으로 오는 자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체하고 검문하지 말라!??그리고는 군중에 전령을 돌렸다. ??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옴을 기다려 결전을 하겠다!?? 諜者聞之 歸報殷相 殷相等 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 庾信等 一時奮擊 大克之 生獲將軍達率正仲?士卒一百人 斬佐平殷相?達率自堅等十人 及卒八千九百八十人 獲馬一萬匹?鎧一千八百領 其他器械稱是 及歸還 路見百濟佐平正福 與卒一千人來降 皆放之 任其所往 至京城 大王迎門 勞慰優厚. 간첩이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이 군대가 증원되는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일시에 용감히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장군 달솔(達率: 백제 2품관) 정중(正仲)과 병사 100명을 생포하고 좌평(佐平: 1품관) 은상, 달솔 자견(自堅) 등 10명과 병사 8,980명을 목베고 말 1만 마리와 투구 1천8백 벌, 기타 이와 비슷한 숫자의 기계를 노획하였다. 돌아오다가 길에서 항복해 오는 백제의 좌평(佐平) 정복(正福)과 병사 1천 명을 만나자 모두 석방하여 각자 가고 싶은 데로 방임하였다. 유신공은 개선군을 거느리고 왕도<경주>에 이르니 대왕이 성문까지 나와 맞았고, 위로함이 극진하였다. 【12】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0세(서기654년) 永徽五年56)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謀 迎春秋伊? 卽位 是爲 太宗大王 영휘(永徽) 5년(654) 진덕대왕이 세상을 여의셨으나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없으므로 유신공은 재상(宰相)인 알천(金閼川) 이찬(伊?: 3등관)과 논의하여 춘추(金春秋) 이찬(伊?)을 맞이하여 즉위하게 하니 이가 바로 태종대왕이다. 【13】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1세(서기655년) 永徽六年乙卯57) 秋九月 庾信入百濟 攻刀比川城58)克之 是時 百濟君臣 奢泰淫逸 不恤國事 民怨神怒 災怪屢見 庾信告於王曰 ??百濟無道 其罪 過於桀紂59) 此誠順天弔民伐罪之秋也?? 先是 租未坤級? 爲夫山縣60)令 被虜於百濟 爲佐平任子之家奴 從事勤恪 曾無懈慢 任子憐之不疑 縱其出入 乃逃歸 以百濟之事 告庾信 庾信 知租未坤忠正而可用 乃語曰 ??吾聞 任子專百濟之事 思有以與謀而末由 子其爲我 再歸言之?? 答曰 ??公不以僕爲不肖 而指使之 雖死無悔?? 영휘 6년 을묘(655) 가을 9월에 유신이 백제 땅에 들어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무렵 백제의 임금과 신하들은 심히 사치하고 지나치게 방탕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속출하였다. 유신이 왕에게 고하기를 ??백제는 무도하여 그 지은 죄가 걸주(桀紂)보다 심하니 이 때는 진실로 하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정벌하여야 할 때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급찬(級?:9등관) 조미곤(租未坤)이 부산현령(夫山縣令)이 되었다가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 좌평(佐平) 임자(任子)의 집 종이 되어 일을 부지런히 하고 성실하게 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자가 불쌍히 여기고 의심치 않아 출입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이에 도망쳐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고하니 유신은 조미곤이 충직하여 쓸 수 있음을 알고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임자는 백제의 일을 오로지 하고 있어 그와 함께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길이 없었다. 자네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 말해다오!?? 조미곤은 답하기를 ??공께서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지목하여 부리고자 하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遂復入於百濟 告任子曰 ??奴自以謂 旣爲國民 宜知國俗 是以出遊 累旬不返 不勝犬馬戀主之誠 故此來耳?? 任子信之不責 租未坤 伺間報曰 ??前者 畏罪不敢直言 其實 往新羅還來 庾信諭我 來告於君曰 ??邦國興亡 不可先知 若君國亡 則君依於我國 我國亡 則吾依於君國???? 任子聞之 ?然無言 租未坤 惶懼而退 待罪數月 任子 喚而問之曰 ??汝前說庾信之言 若何?? 租未坤驚恐 而對如前所言 任子曰 ??爾所傳我已悉知 可歸告之?? 遂來說 兼及中外之事 丁寧詳悉 於是 愈急幷呑之謀. 드디어 <그가>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에게 아뢰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이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의 풍속을 알아야 하므로 집을 나가 수십 일간 놀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정을 이기지 못하여 돌아왔습니다.?? 임자는 이 말을 믿고 나무라지 않았다. 조미곤이 틈을 타서 보고하였다. ??저번에는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유신이 저를 타일러 님(佐平)께 가서 아뢰도록 하기를 ??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는 법이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 나라에 의지하고, 우리 나라가 망하면 나는 그대의 나라에 의지하겠다.??고 합디다.??임자가 듣고는 묵묵히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조미곤은 두려워하며 물러 가 처벌을 기다렸다. 수개월 후에 임자가 불러 묻기를 ??네가 저번에 말한 유신의 말이 무엇이었느냐??? 하기에 조미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대답하였다. 임자가 말하기를 ??네가 전한 바를 내가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다. 돌아가서 아뢰어도 좋다.??고 하였다. 드디어 돌아와서 <김유신에게> 보고하였다. 겸하여 <백제의> 국내외의 일을 말하여 주었는데 정말 상세하였다. 이에 더욱 백제를 병합할 계획을 급하게 하였다. 【14】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6세(서기660년) 太宗大王七年庚申61) 夏六月 大王與太子法敏 將伐百濟 大發兵 至南川62)而營 時 入唐請師 波珍?金仁問 與唐大將軍蘇定方?劉伯英 領兵十三萬 過海 到德物島63) 先遣從者文泉 來告 王命太子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大船一百? 載兵士會之 太子 見將軍蘇定方 定方謂太子曰 ??吾由海路 太子登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王都 泗?之城64)?? 太子來告 大王率將士 行至沙羅之停65) 태종대왕 7년 경신(660) 여름 6월에 대왕은 태자 법민(法敏)과 더불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대군을 동원하여 남천(南川: 李川)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당에 들어가 군사를 청한 파진찬(波珍?: 4등관)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유백영(劉伯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현재의 경기도 덕적도)에 도착하였고, 부하 문천(文泉)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왔다. 왕은 태자와 장군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00척으로 군사를 싣고 만나게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니 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바닷길로 쳐들어가고, 태자는 육로로 쳐들어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왕도(서울)인 사비성(泗?城: 부여)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태자가 돌아와서 대왕에게 고하였다. 대왕은 장수와 병사를 거느리고 행군하여 사라정(沙羅停: 今突城-尙州)에 이르렀다. 將軍蘇定方?金仁問等 沿海入伎伐浦66) 海岸泥? 陷不可行 乃布柳席 以出師 唐?羅合擊 百濟滅之 此役也 庾信之功爲多 於是 唐皇帝聞之 遣使褒嘉之 將軍定方 謂庾信?仁問?良圖三人曰 ??吾受命以便宜從事 今以所得百濟之地 分錫公等 爲食邑 以酬厥功如何?? 庾信對曰 ??大將軍 以天兵來 副寡君之望 雪小國之讐 寡君及一國臣民 喜?之不暇 而吾等 獨受賜以自利 其如義何?? 遂不受 장군 소정방과 김인문 등은 바다를 따라 기벌포(伎伐浦)로 들어갔는데 해안이 진흙이어서 빠져 갈 수 없으므로 이에 버들로 엮은 자리를 깔아 군사를 진군시켜 당군과 신라군이 합동으로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 전쟁에서 유신의 공이 많았으므로 당나라 고종(高宗)은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포상하고 칭찬하였다. 장군 정방은 유신(庾l信), 인문(仁問), 양도(良圖) 세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황제의 명으로 현지의 일을 적절하게 처리하도록 되어 있다. 지금 얻은 백제의 땅을 그대들에게 나누어 주어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여 그 공로에 보답하고자 하니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 유신공이 대답하기를 ??대장군께서 황제(天兵)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 임금의 희망에 따라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아 우리 임금과 온 나라의 백성이 기뻐하기에 바쁜데 우리들만 홀로 내려줌을 받아 스스로 이익을 챙기는 것은 의리상 할 수 없다.?? 하고는 받지 않았다. 唐人 旣滅百濟 營於泗?之丘 陰謀侵新羅 我王知之 召?臣問策 多美公 進曰 ??令我民 詐爲百濟之人 服其服 若欲爲賊者 唐人必擊之 因與之戰 可以得志矣?? 庾信曰 ??斯言可取 請從之?? 王曰 ??唐軍爲我滅敵 而反與之戰 天其祐我耶?? 庾信曰 ??犬畏其主 而主踏其脚 則咬之 豈可遇難 而不自救乎 請大王許之?? 唐人諜知我有備 虜百濟王及臣寮九十三人?卒二萬人 以九月三日 自泗?泛船而歸 留郞將劉仁願等 鎭守之 定方 旣獻? 天子 慰藉之曰 ??何不因而伐新羅?? 定方曰 ??新羅 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 事其上 如父兄 雖小 不可謀也.?? 당나라 군사들은 이미 백제를 멸하고, 사비(泗?)의 언덕에 주둔하면서 몰래 신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군신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다미공(多美公)이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백제 사람인 것처럼 그 옷을 입혀서 만약 반역하게 하면 당나라 군대가 반드시 칠 것이니 이로 인하여 <그들과> 싸우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유신공도 이 말은 취할 만하니 이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가 우리를 위하여 적을 멸하여 주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하니 유신이 말하였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주인을> 무는 법인데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스스로를 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당나라 첩자가 우리의 준비가 있음을 알고는 백제왕과 신료 93인, 병사 2만 명을 포로로 잡아 9월 3일 사비(泗?)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가고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 등을 남겨 지키도록 하였다. 소 정방이 돌아가 백제의 포로를 바치니 황제는 그를 위로하면서 ??어찌 내친 김에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다. 소 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어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부형(父兄)처럼 섬기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15】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7세(서기661년) 龍朔元年67)春 王謂百濟餘燼尙在 不可不滅 以伊?品日?蘇判文王?大阿?良圖等 爲將軍 往伐之不克 又遣伊?欽純68)一作欽春?眞欽?天存?蘇判竹旨等 濟師. 高句麗?靺鞨謂 新羅銳兵 皆在百濟 內虛可? 發兵水陸竝進 圍北漢山城 高句麗營其西 靺鞨屯其東 攻擊浹旬 城中危懼 忽有大星 落於賊營 又雷雨震擊 賊等疑駭 解圍而遁 初 庾信聞賊圍城曰 ??人力旣竭 陰助可資?? 詣佛寺 設壇祈禱 會有天變 皆謂至誠所感也. 용삭(龍朔) 원년(문무왕 원년: 661) 봄에 왕(太宗)은 ??백제의 남은 세력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는 이찬(伊?) 품일(品日)과 소판(蘇判) 문왕(文王) 대아찬(大阿?) 양도(良圖) 등을 장군으로 삼아 가서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이찬 흠순(欽純)<또는 흠춘(欽春)이라고도 썼다.>, 진흠(眞欽), 천존(天存), 소판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인솔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말갈은 “신라의 정예부대는 모두 백제 땅에 가 있어, 나라 안이 텅 비어 있으므로 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군사를 일으켜 수륙(水陸)으로 진군시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포위하였는데 고구려는 그 서쪽에, 말갈은 그 동쪽에 주둔하여 공격이 수십 일에 이르니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지에 떨어지고 천둥과 벼락이 치면서 비가 오니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처음에 유신공은 적이 성을 포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하기를 ??사람의 힘을 다하였으니 이제 신령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고 절(佛寺)에 나아가 제단을 마련하고 기도를 드렸더니 마침 하늘의 변괴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극한 지성이 감동시킨 바라고 말하였다. 庾信 嘗以中秋夜 領子弟 立大門外 忽有人 從西來 庾信知高句麗諜者 呼使之前曰 ??而國 有底事乎?? 其人 俯而不敢對 庾信曰 ??無畏也 但以實告?? 又不言 庾信 告之曰 ??吾國王 上不違天意 下不失人心 百姓欣然 皆樂其業 今爾見之 往告而國人?? 遂慰送之 麗人聞之曰 ??新羅雖小國 庾信爲相 不可輕也?? 유신공은 일찍이 한가윗날 밤에 자제를 거느리고 대문 밖에 서 있는데 문득 서쪽으로부터 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신공은 그가 고구려 첩자임을 알고 불러 앞에 세우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니 그 사람은 얼굴을 숙이고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유신공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단지 사실대로 말하라!?? 하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이에 경고하기를 ??우리나라 임금님은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아서 백성이 즐겁게 모두 자기 일을 즐기고 있음을 지금 네가 보았으니 가서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주어라!??하고 드디어 위로하여 <그를>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유신이 재상을 하고 있는 한 가벼이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六月 唐高宗皇帝 遣將軍蘇定方等 征高句麗 入唐宿衛69)金仁問 受命 來告兵期 兼諭出兵會伐 於是 文武大王 率庾信?仁問?文訓等 發大兵 向高句麗 行次南川州70) 鎭守劉仁願 以所領兵 自泗?泛船 至鞋浦下陸 亦營於南川州 時 有司報 ??前路有百濟殘賊 屯聚瓮山城71) 遮路 不可直前?? 於是 庾信以兵進而圍城 使人近城下 與賊將語曰 ??而國不? 致大國之討 順命者賞 不順命者戮 今 汝等 獨守孤城 欲何爲乎 終必塗地 不如出降 非獨存命 富貴可期也?? <문무왕 원년> 6월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이 명을 받고 돌아와 출병일을 알리고 겸하여 출병하여 함께 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문무대왕은 유신, 인문, 문훈(文訓) 등을 인솔하여 많은 병사를 출동시켜 고구려로 향하였다. 행군이 남천주(南川州)에 이르렀을 때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이 거느린 군사를 사비로부터 배를 태워 혜포(鞋浦)에 이르러 하륙시켜 또한 남천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유사(有司)가 보고하기를 ??앞길에 백제의 잔적이 옹산성(瓮山城: 대덕군 ?德)에 모여 있어 길을 막고 있으니 곧바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유신공은 군사를 진격시켜 성을 포위하고 사람을 시켜 성 아래에 가까이 가게 하여 적장에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가 공손하지 못하여 대국(大國)의 토벌을 당하였다. 명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겠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 지금 너희들은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어찌하고자 함인가? 끝내 반드시 패망할 것이니 성에서 나와 항복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귀를 기약함보다 더 좋은 방책이 없을 것이다.?? 賊高聲 唱曰 ??雖?爾小城 兵食俱足 士卒義勇 寧爲死戰 誓不生降?? 庾信笑曰 ??窮鳥困獸 猶知自救 此之謂也?? 乃揮旗鳴鼓攻之 大王 登高見戰士 淚語激勵之 士皆奮突 鋒刃不顧 九月二十七日 城陷 捉賊將戮之 放其民 論功賞 ??將士 劉仁願 亦分絹 有差. 於是 饗士?馬 欲往會唐兵 大王 前遣大監文泉 移書蘇將軍 至是復命 遂傳定方之言曰 ??我受命萬里 涉滄海而討賊 艤舟海岸 旣踰月矣 大王軍士不至 粮道不繼 其危殆甚矣 王其圖之?? 大王 問?臣 ??如之何而可?? 皆言 深入敵境輸粮 勢不得達矣 大王 患之咨嗟 庾信 前對曰 ??臣過?恩遇 ?辱重寄 國家之事 雖死不避 今日 是 老臣盡節之日也 當向敵國 以副蘇將軍之意?? 大王前席 執其手下淚曰 ??得公賢弼 可以無憂 若今玆之役 罔愆于素 則公之功德 曷日可忘?? 庾信 旣受命 至懸鼓岑 之岫寺 齊戒 卽靈室閉戶 獨坐焚香 累日夜而後出 私自喜曰 ??吾今之行 得不死矣?? 將行 王以手 書告庾信 ??出疆之後 賞罰專之 可也?? 적들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비록 조그만 성이지만 군사와 식량이 모두 족하며, 장수와 병졸이 의롭고 용기가 있으니 차라리 죽도록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 하니, 유신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새와 짐승은 오히려 스스로를 구할 줄 안다고 하는데 이 경우를 두고 말함이라!?? 하고는 이에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공격하였다. 대왕은 높은 곳에 올라 싸우는 군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격려하니 병사들이 모두 분발하여 공격하여 창끝과 칼날을 겁내지 않았다. 9월 27일에 옹산성이 함락되자 적의 장수를 잡아 처형하고 그 백성은 놓아주었다. 공을 논하여 장수와 병사에게 상을 주었고 유인원도 비단을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디. 이에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먹인 후 당나라 군사가 와 있는 곳에 가서 이와 합치려 하였다. 대왕은 앞서 태감(太監) 문천(文泉)을 보내 소장군(蘇將軍)에게 서신을 보냈던 바 이 무렵 돌아와 보고하였다. 드디어 <소>정방의 말을 전하였다. ??내가 명을 받아 만 리나 되는 푸른 바다를 건너 적을 치러 배로 해안에 이른 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대왕의 군사가 이르지 않으니 식량을 이을 길이 없어 위태로움이 심합니다. 왕께서는 조처하여 주십시오!?? 대왕은 뭇 신하에게 ??어찌하면 좋을꼬??? 하고 물으니, 다같이 말하기를 ??적의 경계 내에 깊이 들어가 식량을 수송하는 것은 형편상 이룰 수가 없다.??고 하였다. 대왕은 걱정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유신이 앞에 나아가 대답하였다. ??신이 지나치게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고, 무거운 책임을 맡았으니 국가의 일을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이 이 늙은 신하(老臣)가 충절을 다하여야 할 때입니다. 마땅히 적국에 가서 소장군(蘇將軍)의 뜻을 맞추어 주려고 합니다.?? 대왕은 자리를 옮겨 앞으로 나아가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공의 어진 보필을 얻었으니 걱정이 없습니다. 만약 이번 전투에서도 뜻한 대로 어긋남이 없으면 공의 공덕을 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유신공은 이미 명을 받고 현고잠(懸鼓岑)의 동굴 안의 절(岫寺)에 가서 재계하였다. 곧바로 영실(靈室)에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분향하여 여러 날 밤을 지내고 나와서 사사로이 홀로 즐거워하며 말하기를 ??나의 이번 행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하니 왕께서는 손수 쓴 글을 유신공에게 주었는데 『국경을 벗어난 후 상벌을 마음대로 하여도 좋다.』 하였다. 十二月十日 與副將軍仁問?眞服?良圖等九將軍 率兵載粮 入高句麗之界 12월 10일에 부장군(副將軍) 인문(仁問). 진복(眞服). 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과 더불어 군사를 인솔하고 식량을 실어 고구려의 경계 안으로 들어갔다. 【16】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8세(서기662년) 壬戌72)正月二十三日 至七重河73) 人皆恐懼 不敢先登 庾信曰 ??諸君若?死 豈合來此?? 遂先自上船而濟 諸將卒 相隨渡河 入高句麗之境 慮麗人要於大路 遂自險隘以行 至於?壤74) 임술년(문무왕 2년, 662)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臨津江)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배에 오르지 않자 유신이 말하기를 ??여러분이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 곳에 왔는가??? 하고는 스스로 먼저 배에 올라 건너니 여러 장군과 병졸이 따라서 강을 건너 고구려 강역 안에 들어갔다. 고구려 군사들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하여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하여 산양(?壤)에 이르렀다. 庾信 與諸將士曰 ??麗?濟二國 侵凌我疆? 賊害我人民 或虜丁壯 以斬戮之 或?幼少 以奴使之者久矣 其可不痛乎 吾今所以不畏死 赴難者 欲藉大國之力 滅二城 以雪國讐 誓心告天 以期陰助 而未知衆心如何 故言及之 若輕敵者 必成功而歸 若畏敵 則豈免其禽獲乎 宜同心協力 無不以一當百 是所望於諸公者也?? 諸將卒 皆曰 ??願奉將軍之命 不敢有偸生之心??乃鼓行 向平壤 유신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강역을 침범하여 우리 백성을 죽이고 젊은이를 포로로 잡아가 목을 베었으며, 혹은 어린애를 잡아다가 종으로 부린 지가 오래되었으니 통탄스런 일이 아닌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움에 나가는 것은 대국의 힘에 의지하여 두 나라 수도성을 함락시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다. 마음 속으로 맹서하고 하늘에 고하여 신령의 도움을 기대하나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 몰라 말한다. 적을 가벼이 보는 자는 반드시 성공하여 돌아갈 것이나, 적을 두려워하면 어찌 포로로 잡힘을 면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면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내지 못함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여러분에게 바라는 바이다.?? 그러자 여러 장졸들이 모두 말하기를 ??원컨대 장군님의 명을 받들겠으며 감히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북을 치며 평양으로 향하였다. 路逢賊兵 逆擊克之 所得甲兵甚多. 至障塞75)之險 會天寒烈 人馬疲憊 往往?? 庾信露肩執鞭 策馬以前驅 衆人見之 努力奔走 出汗 不敢言寒 遂過險 距平壤不遠 庾信曰 ??唐軍乏食窘迫 宜先報之?? 乃喚步騎監裂起76)曰 ??吾少與爾遊 知爾志節 今欲致意於蘇將軍 而難其人 汝可行否?? 裂起曰 ??吾雖不肖 濫中軍職 況辱將軍使令 雖死之日 猶生之年?? 遂與壯士仇近等十五人 詣平壤 見蘇將軍曰 ??庾信等領兵 致資粮 已達近境 ?? 定方喜 以書謝之 길(梨峴)에서 적병을 만나면 역습하여 이기니 얻은 무기가 심히 많았다. 장새(獐塞: 遂安)의 험한 곳에 이르렀을 때(2/1) 마침 날씨가 매우 추웠고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하여 쓰러짐이 많았다. 유신이 어깨를 드러내 놓고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 나가니 뭇 사람이 이를 보고 힘을 다하여 달려 땀이 나자 감히 춥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험한 곳을 지나니 평양이 멀지 않았다. 유신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대의 식량 부족이 심할 터이니 마땅히 먼저 알려야겠다.??고 하고는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를 불러 말하였다.??내가 젊어서 그대와 놀 때 너의 뜻과 절의를 알았다. 지금 소(蘇) 장군에게 소식을 전해야겠는데 적당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네가 가지 않겠는가???열기가 말하였다.??내 비록 어리석으나 외람되이 중군(中軍)직을 맡았고, 하물며 장군님이 시키신다면 비록 죽는 날도 살아 있는 때와 같다고 여기겠습니다.??드디어 힘센 장사(壯士) 구근(仇近) 등 15명을 데리고 평양으로 가서 소 장군을 만나 말하기를 ??유신 등이 군사를 이끌고 식량을 가지고 가까운 곳에 이르렀다.??고 하니, 정방이 기뻐서 글로 감사하다고 썼다. 庾信等 行抵楊? 見一老人 問之 具悉敵國消息 賜之布帛 辭不受而去 庾信 營楊? 遣解漢語者仁問?良圖及子軍勝等 達唐營 以王旨 ?軍糧 定方以食盡兵疲 不能力戰 及得粮 便廻唐 良圖以兵八百人 泛海還國. 時 麗人伏兵 欲要擊我軍於歸路 庾信 以鼓及? 繫?牛腰尾 使揮擊有聲 又積柴草燃之 使煙火不絶 夜半潛行至{艸/瓢}77)河 急渡岸休兵 麗人知之來追 庾信 使萬弩俱發 麗軍且退 率勵諸幢將士 分發拒擊敗之 生禽將軍一人 斬首一萬餘級 王聞之 遣使勞之 及至 賞賜封邑爵位 有差. 유신공 등이 양오(楊?)에 다다라(2/6) 한 노인을 만나 물었더니 적국의 소식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 베와 비단을 주었더니 사양하여 받지 않고 가 버렸다. 유신공이 양오(楊?)에 진을 치고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인문(仁問), 양도(良圖) 그리고 그 아들 군승(軍勝) 등을 보내 당나라 군영에 가서 왕의 명으로 군량을 보냈음을 알렸다. 정방은 식량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곤하였으므로 힘껏 싸울 수 없어 식량을 얻고는 돌연히 당으로 돌아갔다. 양도(良圖)는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귀국하였다. 그때 고구려인이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우리 군사의 돌아오는 길에서 공격하고자 하였다. 유신공은 북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적마다 소리를 내게 하였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놓고 밤중에 몰래 행군하여 표하([艸/瓢]河:임진강 하류)에 이르러 나루를 건너 강 가에서 군사를 쉬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이를 알고 추격해왔다. 유신공은 만노(萬弩)를 일제히 발사하니 고구려 군대가 물러나므로 여러 부대[幢]의 장병을 독려하여 나누어 출발하게 하고 역습하여 패퇴시켰다.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았고, 1만여 명을 목베었다. 왕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하였고 <왕도에> 돌아오자 상을 내려 식읍을 봉해 주고 벼슬을 차등있게 하였다. 【17】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42) 김유신/69세(서기663년) 龍朔三年78)癸亥 百濟諸城 潛圖興復 其渠帥據豆率城 乞師於倭 爲援助 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 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 合兵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 出陣 我軍力戰 大敗之 百濟與倭人 皆降 大王謂倭人曰 ??惟我與爾國 隔海分疆 未嘗交構 但結好講和 聘問交通 何故今日 與百濟同惡 以謀我國 今爾軍卒 在我掌握之中 不忍殺之 爾其歸告爾王 任其所之?? 分兵擊 諸城降之, 唯任存城 地險城固 而又粮多 是以 攻之三旬 不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