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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고려사 열녀전 서문 - 고려의 여성 관련 사료

고려사 열녀전 서문

옛적에 여자가 나면 보모(傅姆)의 가르침이 있고 성장하면 동사(史)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므로 집에 있어서는 현녀(賢女)가 되고 남에게 시집가면 현부(賢婦)가 되며 변고(變故)를 만나면 열부(烈婦)가 되었다. 후세(後世)에는 부훈(婦訓)이 규방(閨房)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탁연(卓然)히 자립하여 난(亂)에 임(臨)하여 백인(白刃)을 무릅쓰고 사생(死生)으로써 그 지조(志操)를 바꾸지 않는 것은 아아! 가(可)히 어렵다고 하겠기에 <열녀전(烈女傳)>을 짓는다.

  호수(胡壽) 처 유씨(兪氏)

호수(胡壽)의 처(妻) 유씨(兪氏)는 그 세계(世系)가 자세하지 않다. 고종(高宗) 44년에 호수(胡壽)가 나가 맹주(孟州)의 수령이 되었을 때에 맹주(孟州)에서는 병란(兵亂)을 피하여 해중(海中)에 우거(寓居)하였었는데 몽고병(蒙古兵)이 신위도(神威島)를 함락하여 호수(胡壽)가 해(害)를 만나니 유씨(兪氏)가 적(賊)에게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현문혁(玄文奕) 처

현문혁(玄文奕)의 처(妻)는 사(史)에 그 성씨(姓氏)를 잃었다. 원종(元宗) 11년에 삼별초(三別抄)가 강화(江華)에서 반(叛)하였는데 현문혁(玄文奕)이 도망하여 옛 서울(개성(開城) 로 달아나니 적선(賊船) 4, 5척이 날개처럼 퍼져서 이를 쫓거늘 현문혁(玄文奕)이 홀로 활을 쏘았으나 화살이 서로 접(接)할 정도였다. 처(妻)가 옆에서 화살을 뽑아 주어 적(賊)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현문혁(玄文奕)의 배가 얕은데 교착하매 적(賊)이 추급(追及)하여 이를 쏘아 팔을 맞혀 배 가운데 쓰러졌다. 처(妻)가 말하기를, 내가 의리상 쥐 같은 무리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두 딸을 이끌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적(賊)이 현문혁(玄文奕)을 잡아 그 용기를 아껴 죽이지 않았는데 얼마 후에 현문혁(玄文奕)이 옛 서울에 도망하여 돌아왔다.

홍의(洪義) 처

홍의(洪義)의 처(妻)는 사에 성씨를 잃었다. 공양왕조(恭讓王朝)에 홍의(洪義)가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는데 조일신(趙日新)이 난(亂)을 일으켜 사람을 보내어 홍의(洪義)를 그 집에서 해(害)하려 하였다. 칼을 빼어 장차 베려 하니 홍의(洪義)의 처(妻)가 빨리 몸으로써 이를 가리고 울부짖으며 끌어당기니 내려치는 칼날에 얼굴과 팔, 다리가 잘리고 상하여 거의 죽게 되었으나 홍의(洪義)는 죽지 않았다.

  안천검(安天儉) 처

안천검(安天儉)의 처(妻)는 사(史)에 성씨(姓氏)를 잃었다. 안천검(安天儉)은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낭장(郞將)이 되었는데 밤에 집에서 불이 났으나 안천검(安天儉)이 때마침 취(醉)하여 누워 있었다. 처(妻)가 불을 무릅쓰고 들어가 부축하여 나가려 하였으나 힘이 이기지 못하여 몸으로 안천검(安天儉)을 덮었으므로 드디어 함께 타 죽었다.

  강화(江華) 3녀(女)

세 여자는 강화부(江華府) 아전의 처녀(處女)들이다. 신우(辛禑) 3년에 왜(倭)가 강화(江華)를 침구(侵寇)하여 마음대로 죽이고 약탈하매 세 딸이 적(賊)을 만나 의리상(義理上) 욕되지 않으려고 서로 붙들고 강(江)에 달려가 죽었다.

  정만(鄭滿)의 처 최씨(崔氏)

최씨(崔氏)는 영암군(靈巖郡)의 사인(士人) 최인우(崔仁禑)의 딸이니 진주 호장(晋州戶長) 정만(鄭萬)에게 시집가서 자녀(子女) 4명을 낳았는데 그 막내는 아직 강보(襁褓)에 있었다. 신우(辛禑) 5년에 왜(倭)가 진주(晉州)에 침구(侵寇)하니 때에 정만(鄭滿)은 서울에 간지라 적(賊)이 살고 있는 마을에 침입해 들어왔으므로 최씨(崔氏)가 여러 자식을 이끌고 산중(山中)에 피하여 숨었다. 최씨(崔氏)는 나이 바야흐로 30여 세이고 용모가 또한 아름다웠으므로 적(賊)이 얻어 이를 욕보이고자 하여 칼을 빼어 위협하니 최씨(崔氏)가 나무를 안고 거부하며 꾸짖어 말하기를,

죽기는 마찬가진데 그 더럽힘을 당하고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의(義)에 죽을 것이다.

하고 꾸지람이 입에 끊어지지 않으니 적(賊)이 드디어 이를 죽이고 두 아들을 잡아갔다. 아들 정습(鄭習)은 겨우 6세라 시체 옆에서 울부짖었고 강보(襁褓)에 쌓인 아이는 오히려 기어가 젖을 빠니 피가 줄줄 흘러 입에 들어가 얼마 안되어 죽었다. 10년 후에 도관찰사(都觀察使) 장하(張夏)가 이 일을 상문(上聞)하여 이에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고 정습(鄭習)의 이역(吏役)을 면하였다.

  이동교(李東郊)의 처 배씨(裴氏)

배씨(裴氏)는 경산부(京山府) 팔거현(八縣) 사람이니 삼사 좌윤(三司左尹) 배중선(裴仲善)의 딸인데 낭장(郞將) 이동교(李東郊)에게 시집 갔다. 신우(辛禑) 6년에 왜적(倭賊)이 경산(京山)을 핍박하매 온 지경이 소란하였으나 감히 막는 자가 없었다. 이동교(李東郊)는 때에 합포(合浦)의 군막(軍幕)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적(賊)의 기병(騎兵)이 배씨(裴氏)가 사는 마을에 돌입(突入)하였으므로 배씨(裴氏)가 그 아이를 엎고 소야강(所耶江)에 이르니 강물이 바야흐로 넘치는지라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알고 물에 투신하니 적(賊)이 강변에 와서 활을 당겨 화살을 겨누면서 말하기를,

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니 배씨(裴氏)가 돌아보고 적(賊)을 꾸짖어 말하기를,

어찌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 나는 서생(書生)의 딸이다. 일찍이 열녀(烈女)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고 들었으니 내가 어찌 적(賊)에게 더럽혀지리요?

하니 적(賊)이 쏘아 그 아이를 적중(適中)시키고 활을 당기며 또 전과 같이 말하였으나 마침내 나가지 않고 해(害)를 만났다.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일을 갖추어 상문(上聞)하므로 드디어 이문(里門)에 정표(旌表)하였다.

  강호문(康好文)의 처 문씨(文氏)

문씨(文氏)는 광주(光州) 갑향인(甲鄕人)이니 이미 성년(成年)이 되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강호문(康好文)에게 시집갔다. 신우(辛禑) 14년에 왜적(倭賊)이 돌입(突入)하였는데 주병(州兵)이 창졸히 제압하지 못하였다. 문씨(文氏)에게는 두 아이가 있었는데 어린아이는 엎고 큰 아이는 이끌고 장차 달아나 숨으려 하다가 문득 사로잡힌 바 되어 스스로 죽고자 하여 함께 가기를 거절하니 적(賊)이 그 목을 얽어 매고 핍박하여 앞세워 가게 하고 또 핍박하여 엎은 아이를 버리게 하니 문씨(文氏)가 면치 못할 줄 알고 어린 아이를 싸서 나무 그늘에 두고 큰 아이에게 말하기를,

너도 또한 여기에 있으면 거두어 장차 보호할 자가 있으리라.

하였으나 아이가 억지로 따라 갔다. 가다가 몽불산(夢佛山) 극락암(極樂菴) 길에 이르니 높이 1천여 척(尺) 가량의 돌 낭떠러지가 있고 그 위에 실[線]같은 길이 있었다. 문씨(文氏)가 같이 잡힌 이웃 여자에게 말하기를,

적(賊)에게 더럽히고 삶을 구(求)함이 몸을 깨끗히 하여 죽음에 나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몸을 떨쳐 떨어지니 적(賊)이 미쳐 정지시키지 못하자 극구(極口)로 욕하고 그 아이를 죽이고 같다. 언덕 밑에는 칡넝쿨과 부풀들이 빽빽히 우거져 죽지 않고 오른팔이 부러졌다. 오래있다가 다시 소생하니 마침 마을 사람이 먼저 벼랑구멍에 와 있었는데 보고 불쌍히 여겨 죽으로 구완하였다. 3일 만에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향리(鄕里)에 돌아오니 놀라며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김언경(金彦卿)의 처 김씨(金氏)

김씨(金氏)는 서운 정(書雲正) 김언경(金彦卿)의 처(妻)로 광주(光州)에 살았다. 신우(辛禑) 13년에 왜구(倭寇)가 표략하여 갑자기 그 집에 이르니 집 사람이 사방(四方)으로 숨었는데 김씨(金氏)가 김언경(金彦卿)과 더불어 수풀사이로 달아나 숨었더니 적(賊)이 김씨(金氏)를 잡아 목을 얽어 <끌고> 가서 이를 더럽히고자 하니 김씨(金氏)가 땅에 엎어져 적(賊)을 꾸짖고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네가 곧 나를 죽여라! 나는 의(義)로 욕을 당하지 않겠다.하니 성내어 드디어 이를 죽였다

  경덕의(景德宜)의 처 안씨(安氏)

안씨(安氏)는 창평인(昌平人)이요 판사(判事) 방혁(邦奕)의 딸이니 전의 정(典醫正) 경덕의(景德宜)에게 시집가서 정읍현(井邑縣)에 살았다. 신우(辛禑) 13년에 왜적(倭賊)이 안씨(安氏)가 사는 마을에 침입하여 들어왔다. 경덕의(景德宜)는 때에 서울에 있었으므로 안씨(安氏)가 창황히 두 아들과 비(婢) 3인을 이끌고 후원(後園) 토우(土宇)에 숨었는데 적(賊)이 손에 넣고 이를 욕보이고자 하엿다. 안씨(安氏)가 꾸짖고 또 저항하니 적(賊)이 그 머리털을 붙잡고 칼을 빼어 위협하자 안씨(安氏)가 극구(極口)로 꾸짖어 말하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너를 좇지는 않겠다.

하니 적(賊)이 드디어 이를 죽이고 그 아들 하나와 비(婢) 하나를 사로잡아 갔다.

  이득인(李得仁)의 처 이씨(李氏)

이씨(李氏)는 고부군리(古阜郡吏) 이석(李碩)의 딸이니 낭장(郞將) 이득인(李得仁)에게 시집가서 정읍현(井邑縣)에 살았다. 신우(辛禑) 13년에 왜적(倭賊)이 와서 이씨(李氏)를 잡아 이를 더럽히고자 하거늘 이씨(李氏)가 죽음으로써 굳게 저항하다가 드디어 적(賊)에게 살해당하였다.

  권금(權金)의 처

회양부(淮陽府) 백성 권금(權金)이 밤에 범에게 물렸는데 집에 장정 7, 8인이 있었으나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하거늘 처(妻)가 권금(權金)의 허리를 안고 문지방을 버티고 큰 소리로부르짖으니 범이 이를 놓고 암소를 물고 갔는데 이튿날 권금(權金)이 죽었다. 공민왕(恭愍王) 2년에 교주도 관찰사(交州道觀察使)가 도당(都堂)에 보고하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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