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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고려사 우애전 서문 - 고려의 효도, 우애 관련 사료

고려사 우애전 서문 - 고려의 효도, 우애 관련 사료

효도와 우애는 사람의 항성(恒性)인데 세상의 풍교(風敎)가 쇠퇴하면서부터 백성이 그 본성(本性)을 상실한 자가 많아졌다. 그러므로 이에 힘을 다한 자가 있으면 표창하여 권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려(高麗) 5백년 간에 효우(孝友)로써 사책(史冊)에 쓰이고 정표에 나타난 자가 10여 인이므로 효우전(孝友傳)을 짓는다.

  문충(文忠)

문충은 세계(世系)가 자세하지 않으나 어머니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의 마을에 살아 서울에서 30 리 떨어져 있었다. 봉양을 위하여 봉록(俸祿)을 받고 벼슬하매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돌아오면 면전에 고하고 정성(定省)하여 조금도 쇠멸함이 없었다. 그 어머니의 늙음을 탄식하여 목계가를 지어 이름을 오관산곡(五冠山曲)이라 하였으니 <그 곡이> 악보에 전한다.

  석주(釋珠)

석주(釋珠)는 문종(文宗) 때 사람이니 일찍이 고아가 되어 의탁할 곳이 없어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는데 나무를 깍아 부모의 형상을 만들어 그림으로 장식하여 아침 저녁으로 정성(定省)하여 봉양하는 예(禮)가 모두 평일과 같이 하였다. 유사(有司)가 이를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정란(丁蘭)의 효(孝)도 이에 더할 수 없다.라 하고 명하여 후하게 상주었다.

  최루백(崔婁伯)

최루백(崔婁伯)은 수원(水原)의 리(吏) 최상저(崔尙)의 아들이다. 최상저(崔尙)가 사냥하다가 범에게 죽었는데 최루백(崔婁伯)의 나이가 때에 15세였다. 범을 잡고자 하니 어머니가 이를 중지시키는지라 최루백(崔婁伯)이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 하고 곧 도끼를 메고 범을 추적하니 범은 이미 먹고 배가 불러 누워 있었다. 최루백(崔婁伯)이 곧 앞으로 나아가 꾸짖기를, 네가 나의 아버지를 먹었으니 나는 마땅히 너를 먹으리라.

하니 범이 꼬리를 흔들며 구부려 엎드리는 것을 빨리 찍어 그 배를 갈라서 범의 고기를 독[瓮]에 담아 냇물 가운데 묻고 아버지의 뼈와 살을 취하여 그릇에 안치(安置)하여 드디어 홍법산(弘法山)의 서쪽에 장사하고 여묘(廬墓)하였다. 어느날 잠깐 잠들었는데 최상저(崔尙)가 와서 시(詩)를 읊어 이르기를,

숲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廬幕)에 이르니, 정(情)이 많으매 느끼는 눈물이 다함이 없도다.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 위에 보태니, 소리를 아는 것은 명월(明月)과 청풍(淸風) 뿐이로다.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어서는 지키니, 누가 효(孝)에 시종(始終)이 없다고 이를소냐.라고 하고 읊기를 마치고서는 드디어 보이지 않았다. 복(服)이 끝나매 범의 살을 취하여 다 먹었다.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의종조(毅宗朝)에 여러 관직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 국자 사업(國子司業) 한림 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위초(尉貂)

위초(尉貂)는 본래 거란인(契丹人)이니 명종조(明宗朝)에 산원 동정(散員同正)이 되었다. 부(父) 위영성(尉永成)이 악질(惡疾)을 않았는데 의원(醫員)이 이르기를,

자식의 살코기를 쓰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

하니 위초(尉貂)가 곧 다리살을 베어 경단 속에 섞어 넣어 먹이니 병이 조금 나았다. 왕이 이를 듣고 조(詔)하기를,

위초(尉貂)의 효(孝)는 고금에 으뜸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충신은 효자의 문에서 구한다 하였으니 위초(尉貂)의 효(孝)는 반드시 상줄 바라.

하고 재상(宰相)에게 명하여 포상할 것을 의론하니 한문준(韓文俊), 문극겸(文克謙) 등이 아뢰기를,

당(唐)의 안풍현(安豊縣) 백성 이흥(李興)이 아버지가 악질(惡疾)에 걸리니 이흥(李興)이 스스로 다리 살코기를 베어 다른 물건이라 가탁(假托)하여 먹였는데 아버지의 병(病)이 심하여 능히 먹지 못하고 밤을 지내고 죽으니 자사(刺史)가 그 일을 상서(上書)하여 그 여리(閭里)에 정표하였습니다. 지금 위초(尉貂)는 거란(契丹)의 유종(遺種)으로서 글을 알지 못하면서도 이에 능히 그 몸을 아끼지 않고 살을 베어 아버지에게 먹이고 죽음에 미쳐서는 또 무덤에서 3년 동안 여막(廬幕)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니 그 효(孝)를 다 하였다 말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이문(里門)에 정표하고 이것을 사책(史策)에 써서 영원히 후세에까지 가르쳐 보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제(制)하여 좋다고 하였다.

  서능(徐稜)

서능(徐稜)은 장성현(長城縣) 사람이니 고종(高宗) 때에 어머니를 봉양하고 벼슬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목에 창(瘡)이 났으므로 의원을 청하여 진찰케 하니 의원이 말하기를,

만약 생개구리를 얻지 못하면 고치기 어렵다.

하니 서능(徐稜)이 말하기를,

때는 바야흐로 엄한(嚴寒)인데 생개구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병은 반드시 고치지 못하겠구나.

하고 소리쳐 울기를 마지 않으니 의원이 말하기를, 비록 생개구리는 없으나 위선 약을 지어 시험하자

하고 이에 나무 밑에서 약을 볶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나무 위에서 솥 안에 떨어지니 곧 생개구리였다. 의원이 말하기를,

그대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곧 이를 주었으니 그대의 어머니는 반드시 살 것이라.

하고 약을 지어 이를 붙이자 과연 나았다. 같은 현(縣) 사람 대장군(大將軍) 서희(徐曦)가 매양 이 일을 말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김천(金遷)

김천(金遷)은 명주(溟州)의 아전이니 어렸을 때 자(字)는 해장(海莊)이다. 고종(高宗) 말에 몽고병(蒙古兵)이 내침(來侵)하매 어머니와 아우 김덕린(金德麟)이 사로잡혔다. 때에 김천(金遷)의 나이 15세였는데, 밤낮으로 큰소리로 울다가 사로잡힌 자가 많이 길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상복을 입고 상제를 마쳤다. 14년 후에 백호(百戶) 습성(習成)이 원(元)으로부터 와서 명주인(溟州人)을 저자에서 3일이나 부르니 마침 정선인(旌善人)인 김순(金純)이 이에 응하거늘 습성(習成)이 말하기를,

김씨(金氏)란 여인(女人)이 동경(東京 요양(遼陽) )에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명주인(溟州人)이데 아들 해장(海莊)이 있다. 하고 나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부쳤으니 네가 해장(海莊)을 아는가

하니

나의 벗이라.

하고 편지를 받아 김천(金遷)에게 주었다. 편지에 이르기를,

나는 살아서 모주(某州) 모리(某里) 모가(某家)에 이르러 종이 되었는데 주려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지 못하매 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방아를 찧어 갖은 신고(辛苦)를 겪고 있으니 누가 나의 사생(死生)을 알리요?

하였으므로 김천(金遷)이 편지를 보고 통곡하고 매양 식사할 때면 목이 메어 넘어가지 않았다. 가서 어머니를 속(贖)하여 오고자 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돈이 없으므로 남에게 백금(白金)을 빌려 가지고 서울에 가서 어머니 찾아 가기를 청하니 조의(朝議)가 불가하다 하므로 이에 돌아왔다. 충렬왕(忠烈王)이 입조(入朝)함에 이르러 또 가기를 구하였으나 조의(朝議)가 처음과 같으므로 김천(金遷)이 오랫동안 서울에 머무르니 옷이 떨어지고 양식이 다하였으므로 근심스럽고 무료(無聊)하였는데 길에서 고향의 중[僧] 효연(孝緣)을 만나 울며 애통스럽게 찾으니 효연(孝緣)이 말하기를,

나의 형인 천호(千戶) 효지(孝至)가 지금 동경(東京)에 가니 네가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고 곧 이를 부탁하였다. 혹자가 김천(金遷)에게 말하기를,

네가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지 이미 6년이니 어머니의 존몰(存沒)을 알겠는가? 또 불행히 중도에서 도적이라도 만나면 공연히 몸을 잃고 보물만 잃을 것이라.

하니 김천(金遷)이 말하기를,

차라리 가서 만나보지 못할지언정 어찌 신명(身命)을 아끼리요?

하고 드디어 효지(孝至)를 따라 동경(東京)에 들어가서 본국의 통역별장(通譯別將) 공명(孔明)과 더불어 북주(北州) 천로채(天老寨)에 가서 곧 어머니 있는 곳을 찾았다. 군졸 요좌(要左)의 집에 이르니 한 할미가 있어 나와 절하는데 옷은 헤어지고 머리는 흩어졌으며 얼굴에는 때가 껴서 김천(金遷)이 이를 보고도 그가 어머니임을 알지 못하는지라 공명(孔明)이 말하기를,

너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명주 호장(溟州戶長) 김자릉(金子陵)의 딸인데 형제인 진사(進士) 김용문(金龍聞)은 이미 과거(科擧)에 급제하였고 나는 호장(戶長) 김종연(金宗衍)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으니 김해장(金海莊)과 김덕린(金德麟)인데 김덕린(金德麟)은 나를 따라 여기에 와서 이미 19년이라 지금 서쪽 이웃에 있는 백호(百戶) 천로(天老) 집의 종이 되었으니 어찌 금일에 다시 본국인을 보리라 헤아렸으리요!

하니 김천(金遷)이 듣고 내려와 절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니 어머니가 김천(金遷)의 손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네가 참으로 내 아들이냐? 나는 네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였다.

고 하였다. 요좌(要左)가 마침 부재중이었으므로 김천(金遷)이 속(贖)하지 못하고 이에 동경(東京)에 돌아와 별장(別將) 수룡(守龍)의 집에 의탁하여 한달 있다가 수룡(守龍)과 더불어 다시 요좌(要左)의 집에 가서 속(贖)하기를 청하니 요좌(要左)가 듣지 않는지라 김천(金遷)이 애걸하여 백금(白金) 55냥(兩)으로써 이를 속(贖)하였다. <어머니를> 그 말에 태우고 도보(徒步)로 따라가는데 김덕린(金德麟)이 전송하러 동경(東京)에 와서 울며 말하기를,

잘 돌아가시오! 잘 돌아가시오! 지금 비록 따라가지 못하나 만일 하늘이 복(福)을 주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모자가 서로 안고 울며 능히 말하지 못하였다. 마침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원(元)으로부터 동경(東京)에 이르러 김천(金遷) 모자를 불러 보고 칭찬하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으며 총관부(摠管府)에 말하여 <증명서를> 주어 주전(廚傳)을 이용케 하여 보냈다. 장차 명주(溟州)에 이르니 김종연(金宗衍)이 듣고 진부역(珍富驛)에서 맞이하여 부부가 서로 보고 기뻐하였다. 김천(金遷)이 술을 받들어 올리고 물러가서 통곡하니 온 좌석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자릉(金子陵)은 나이 79세였는데 딸을 보고 기쁨이 심하여 땅에 넘어졌다. 그후 6년에 천로(天老)의 아들이 김덕린(金德麟)을 이끌고 오니 김천(金遷)이 백금(白金) 86냥(兩)으로써 이를 속(贖)하고 몇 해가 되지 않아서 전후(前後)에 빌린 바 백금(白金)을 도두 갚고 아우 김덕린(金德麟)과 함께 종신토록 효(孝)를 다하였다.

  황수(黃守)

황수는 대대로 평양부(平壤府)에 살았으며 충숙왕(忠肅王) 때에 본부(本府)의 잡재서 승(雜材署丞)이 되었는데 부모의 나이 모두 70여세였다. 아우가 있어 황현(黃賢), 황중련(黃仲連), 황계련(黃季連)이라 하였으며 또 자매 2인이 있었는데 같이 밥지어 먹으며 날마다 세 때에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먼저 부모에게 드리고 물러가서 함께 먹었다. <이렇게 하기를> 20여 년이라 자손들이 좇아 익혀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찬성(贊成) 강융(姜融)과 판밀직(判密直) 김자(金資)가 몸소히 그 집을 찾으니 부모가 모두 흰 머리로 뜰에서 출영(出迎)하거늘 말려서 앉게 하였다. 강융(姜融)이 눈물을 흘리며 탄복하기를,

지금 세상에 사대부(士大夫) 간에도 또한 드물게 듣는 바이어늘 어찌 이 성(城) 안에 이러한 효자의 가문이 있을 줄 생각하였으리요?

하고 부인(府人)으로 하여금 장(狀)을 갖추어 상문(上聞)케 하니 마을에 정려(旌閭)가 높이 보였다.

  정유(鄭愈)

정유(鄭愈)는 진주인(晋州人)이니 지선주사(知善州事) 정임덕(鄭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21년에 아우 정손(鄭)과 더불어 아버지를 따라 하동군(河東郡)에 수자리를 살다가 왜구(倭寇)가 밤을 타서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뭇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나 정임덕(鄭任德)은 병으로 말[馬)을 탈 수 없었으므로 정유(鄭愈)와 정손(鄭)이 부축하여 달아났다. 적(賊)이 뒤쫓아 따라 오므로 정유(鄭愈)가 말을 타고 수인(數人)을 사살하니 적(賊)이 감히 앞에 오지 못하였다. 한 적(賊)이 칼을 휘두르며 뛰어와서 정임덕(鄭任德)의 빰을 찌르므로 정손(鄭)이 자기 몸으로써 이를 가리우고 또 4인을 베고 힘껏 싸워 이를 물리쳤으므로 정임덕(鄭任德)은 면할 수 있었으나 정손(鄭)은 마침내 적(賊)에게 죽었다. 이 일이 들리매 정유(鄭愈)에게 종부 시승(宗簿寺丞)을 제수하였다. 때에 또 어떤 백성의 형제(兄弟)가 함께 가다가 아우가 문득 황금(黃金) 2정(錠)을 얻어 그 1정(錠)을 형에게 주었다. 양천강(陽川江)에 이르러 같이 배를 타고 건너다가 아우가 갑자기 금을 물에 던지자 형이 괴이하여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평일에 형을 매우 돈독하게 사랑하였는데, 이제 금을 나누니 문득 형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이를 강에 던져 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형이 말하기를, 너의 말이 진실로 옳다.

하고 역시 금을 물에 던졌다. 때에 배를 같이 탄 자들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성명과 읍리(邑里)를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조희참(曹希參)

조희참(曹希參)은 수성인(守城人)이니 여러 관직을 거쳐 군기 소윤(軍器少尹)이 되었다. 일찍이 왜구(倭寇)를 피하여 그 어머니를 부축하고 장차 경산부성(京山府城)에 가려 하여 가리현(加利縣) 동강(東江)에 이르니 배가 없어 건너지 못하였다. 적(賊)이 쫓아오니 어머니가 조희참(曹希參)에게 이르기를,

나는 늙고 또 병들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너는 그 말[馬]을 달려 면하라.

하였다. 조희참(曹希參)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계신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어머니와 함께 밭 가운데 숨었다. 적(賊)이 이를 잡아 창으로 조희참(曹希參)을 찌르고 또 장차 그 어머니를 살해하려 하니 조희참(曹希參)이 모든 궁마(弓馬)와 재산을 적(賊)에게 주고 몸으로써 어머니를 가리우고 이르기를,

원컨대 나를 죽이고 나의 어머니를 해치지 말라.

하니 적(賊)이 칼로 조희참(曹希參)을 쳐죽이고 그 어머니를 버리고 갔다. 신우(辛禑) 때에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빨리 글을 올려 조정에 상문(上聞)하니 드디어 비석을 세우고 사실을 기록하여 이를 정표(旌表)하였다.

  정신우(鄭臣祐)의 딸

정씨(鄭氏)는 우달적(達赤 관명(官名) ) 정신우(鄭臣祐)의 딸이다. 아버지가 죄로써 해주(海州)에 귀양갔는데 병이 위독하매 글을 그 집에 부치니 어머니가 글을 보고 통곡하였다. 정씨(鄭氏)는 때에 나이 17세였는데 방에 있다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의 죽음이 조석(朝夕)에 있으니 재가 가서 뵈옵겠습니다.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가 나라에 죄를 얻었으니 어찌 너에게 가서 뵈옵기를 허락하겠는가?

하니 말하기를,

내가 또한 이것을 조정에 청하겠습니다.

하고 곧 달려 서울에 이르러 글을 갖추어 고하니 도당(都堂)이 받지 않는지라 정씨가 문 밖에 서서 여러 재상(宰相)이 나오기를 기디리다가 나아가서 시중(侍中)의 말 고삐를 잡고 말하기를,

첩(妾)의 아버지 정신우(鄭臣祐)는 죄가 반역이 아니온데 멀리 이향(異鄕)에 귀양보냈고 지금 또 병이 위독하오니 청컨대 첩(妾)이 가서 보기를 허락하소서.

하니 여러 재상(宰相)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곧 신우(辛禑)에게 사뢰니 정신우(鄭臣祐)를 석방하여 전리(田里)에 돌아가게 하였다.

  손유(孫宥)

손유(孫宥)는 청주(淸州)의 아전인데 매양 공무(公務)로 인하여 촌락에 출입하였으나 조금도 취하지 않으니 이 때 사람들이 청백리라 칭찬하였다. 신우(辛禑) 4년에 그가 사는 마을에 왜(倭)가 침구(侵寇)하였는데 자녀들이 옷을 붙잡고 울었으나 손유(孫宥)가 돌아보지 않고 빨리 어머니의 집에 달려가서 엎고 숨어 면할 수 있었으니, 고을 사람들이 존경하고 탄복하였다

  권거의(權居義) 노준공(盧俊恭)

권거의(權居義)는 백주인(白州人)이니 여러 벼슬을 거쳐 부령(副令)이 되었다. 신우(辛禑) 때에 모친 상을 당하여 애통하고 훼모(毁慕)하여 3년 간 무덤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았다. 또 광주(光州) 사람 노준공(盧俊恭)도 또한 무덤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을 지냈다. 때에 상제(喪制)가 폐하여 무너져서 모두 100일 동안 복(服)을 입고 벗었는데 두 사람은 홀로 능히 유속(流俗)에서 초월하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모두 문려(門閭)에 정표하였다.

신사천(辛斯)의 딸

신씨(辛氏)는 영산인(靈山人)인 낭장(郞將) 신사천(辛斯)의 딸이다. 신우(辛禑) 8년에 왜적(倭賊) 50여 기(騎)가 영산(靈山)에 침범하니 신사천(辛斯)이 가족을 데리고 난을 피하였다. 멸포(浦)에 이르러 배를 탔는 바 그 자식 신급열(辛及悅)이 <배를> 밀고 당기는데 마침 장마로 물이 빨라 닻줄이 끊어져 배가 언덕에 닿으니 적(賊)이 쫓아와서 배 가운데 사람들을 거의 모두 죽였고 신사천(辛斯)도 역시 살해되었다. 한 도적이 신씨(辛氏)를 잡아 배에서 내리려 하니 신씨(辛氏)가 좇지 않으므로 적(賊)이 칼을 들어내어 겨누자 신씨(辛氏)가 크게 꾸짖기를,

도적놈아! 죽이려면 죽여라! 너는 이미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의 원수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너를 좇지 않으리라!

하고 드디어 적(賊)의 목을 움켜잡고 차서 거꾸러뜨리니 적(賊)이 노하여 드디어 이를 살해하였다. 때에 나이 16세였다.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그 일을 상서하여 드디어 그 곳에 비석을 세웠다.

  윤구생(尹龜生)

윤구생(尹龜生)은 찬성사(贊成事) 윤택(尹澤)의 아들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가 되었다가 물러가 금주(錦州)에 살면서 사우(祠宇)를 세우고 삭망(朔望)과 사중속절(四仲俗節)에는 3대를 제사하고 동지에는 시조(始祖)에게 제사하였으며 입춘에는 선조(先祖)에게 제사하여 한결 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썼다. 부모와 조부모의 무덤에 묘석(墓石)을 세워 그 기일(忌日)을 기록하고 또 아버지 묘(墓)에는 묘비(墓碑)를 세웠으며 묘(墓)의 남쪽에 재실(齋室)을 짓고 고조(高祖) 증조(曾祖) 이하의 기일(忌日)도 돌에 새겨 후세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였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노숭(盧嵩)이 금주(錦州)에 이첩(移牒)하기를,

지금 국가에서 영(令)을 내려 가묘(家廟)를 세우게 하였으나 한 사람도 행하는 자가 없는데 윤구생(尹龜生)은 아직 영(令)이 있기 전부터 묘(廟)를 세우고 제사를 받들어 공경스럽게 조고(祖考)를 섬기니 그 효(孝)는 실로 여러 사람의 표준이 된다. 선왕(先王)의 정사에서는 선악을 표출하여 가리고 이로써 풍교(風敎)를 세웠으니 이제 문려(門閭)에 정표하고 효자비(孝子碑)를 세우며 그 집에 조세와 부역을 면제케 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장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아들은 윤창종(尹昌宗), 윤소종(尹紹宗), 윤회종(尹會宗)이니 윤소종(尹紹宗)은 따로 전(傳)이 있다.

  반전(潘)

반전(潘)은 안음현(安陰縣) 사람이니 산원(散員)으로 향리(鄕里)에 있었는데 신우(辛禑) 14년에 왜적(倭賊)이 창졸히 이르러 그의 아버지를 잡아 돌아가거늘 반전(潘)이 은정(銀錠)과 은대(銀帶)를 가지고 적중(賊中)에 가서 애걸하여 아버지와 교환하기를 청하니 적(賊)이 의롭게 여겨 이를 허락하였다.

  군만(君萬)

군만(君萬)은 광대이니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그의 아버지가 밤에 범[虎]에게 물려갔다. 군만(君萬)이 하늘에 부르짖으며 궁시(弓矢)를 가지고 산에 들어가니 범이 이를 거의 다먹고 산을 등지고 있다가 군만(君萬)을 보고 소리치며 앞에 와서 먹은 뼈마디를 토하거늘 군만(君萬)이 한 화살로 이를 죽이고 드디어 칼을 빼어 그 배를 갈라 남은 뼈를 모두 거두어 불태워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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