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가야에서의 반란 - 포상 8국의 난

포상 8국의 난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먼저 4세기에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 등에 의해 타격을 입어 중계무역의 주요 루트가 끊겼다는 점입니다. 고대 상업권은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와 서로 차지하려고 무단히 애쓰던 대동강이 중계무역권이었습니다. 그 중계무역권을 장악하던 가야는 주요 무역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백제 및 왜와 연결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죠.
 
  금관 가야의 세력이 위축되고, 중계무역의 타격이 커지자 거제도 등 남해 지방에 있었던 8개의 소국들이 금관 가야의 지배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들 8개 소국들을 통칭하여 포상 8국이라고 부릅니다.

   초기에 금관가야는 왜와 연결하여 무역경쟁국인 신라를 견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관 가야가 위로는 아라 가야로부터 아래로는 포상 8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게되자 201년에 신라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게 되었죠. 결국 금관 가야는 신라의 도움으로 6 가야의 맹주국 위치를 다시 찾고, 포상 8국의 독립 의지를 꺽고자 하였던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신라는 김해 지방에 군사를 파견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라가 김해 지역에 진출하려면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와서 장산국이 있는 해운대를 거쳐서 김해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산국은 포상 8국과 연계하여 김해의 금관 가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습니다. 이러한 장산국을 그대로 놔두고 신라군이 김해로 진출하면 중간에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고, 장산국은 장산의 정상 부근에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죠. .

  따라서 신라군은 장산국 정벌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신라는 어느 해 가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기장에서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습니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는 사신을 장산국에 보내서 감사의 선물을 바치고 물러갔죠. 이러한 군사 훈련을 매년 가을마다 수행하자 어느덧 장산국에서는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갑자기 5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장산국을 기습하여서 멸망시켰습니다.

  209년 7월에는 포상 8국이 금관 가야를 침공하였고, 이에 신라는 내해왕이 태자를 중심으로 대병을 파견하여 금관 가야를 도왔습니다, 이때 잡힌 포로가 6천명에 이르렸다고 하니 이 전쟁도 큰 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 전쟁을 가르켜 삼국사기에는 포상 8국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상 8국의 난이 평정된 후의 금관 가야는 신라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가야 연맹은 점차 쇠약해지게 되었죠.
 

   가야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왜와 연결을 시도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넘어온 왜를 격퇴하고, 가야까지 침공하면서 전기 6가야 연맹의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를 왜곡하고, 그것을 예로 들어 일본이 가야 또는 백제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 가야사에 있어 일본이 점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김해 가야문화복원 1단계사업


스에키 : 5세기 후반부터 10세기에 만들어진 고대의 토기

이 토기를 만들때, 기술과 직인이 한반도에서 수입되었다.
백제 유물이 많은 일본 미야자키현 난고촌 곳곳에서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