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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김헌창의 난 - 신라의 골품적 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하다

 

김헌창의 난
  "신라 하대의 족적 변동, 사회적 변화, 골품제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회 내부의 반란'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서 귀족의 유대의식의 약화로 골품제도가 붕괴되어가자, 진골 귀족세력의 분열이 극심하였습니다. 그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 경향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으로 초래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대의 신라는 귀족적이고 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어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지요.

   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에 오른 이후 이제 골품에 얽매이지 않고, 진골 내부에서는 누구나 실력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선덕왕 대에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다음 왕에 오르며 원성왕계를 형성한 것이 그 예이죠.

   김헌창은 실제로 진골 귀족의 계보를 따져보면, 태종 무열왕계로서, 그의 부친 상대등 김주원은 선덕왕이 죽은 뒤 당연히 왕이 될 것이었으나, 김경신(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만 비운의 사나이었습니다. 실제 선덕왕이 죽을 때 아들이 없었습니다. 궁궐에서는 당연히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주원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김주원의 집은 멀리 있었고 때마침 소나기로 인하여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원은 강을 건너지 못하여 왕이 되지 못하였죠. 이틈에 상대등인 김경신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 왕이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김주원은 세력다툼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원성왕인 김경신은 김주원을 강릉 지방에 땅(식읍)을 하사하여 강릉 군왕으로 삼았습니다. 그 유명한 신라의 작부체제(부체제)가 김주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죠.

   결국,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은 선덕왕이 죽은 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위치였으나 여러 가지 정치 알력으로 즉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김헌창은 지방의 외직 및 중앙의 시중등을 역임하다가 821년 웅천주도독이 되고, 이듬해 부친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나라 이름을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고, 한때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일대의 넓은 지역을 제압하기도 하였지요. 반란 소식이 중앙정부에 알려지자 당시 왕이었던 헌덕왕은 8명의 장군에게 경주의 8방을 지키게 하고 나서 군사를 출동시켰습니다. 중앙군이 삼년산성(보은)을 쳐서 승리함과 동시에 여러 곳에서 반란군이 패배하여 사태가 불리해지자 김헌창은 웅진성(공주)에서 자결했습니다.

     그 뒤 그의 아들 범문이 또다시 고달산적(여주) 등에서 사람을 모아 난을 일으켜 한산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이후로 무열왕 후손들은 왕위계승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