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조선은 여장 이성계가 고려의 명을 갈아 세운 나라다. 맹자이래 소위 혁명이라 말한 것이 바로 이를 일컬음이다. 남의 명을 갈았다 하는 것은 바로 자기의 명이 다시 갈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므로 그 명은 부단하게 새로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경』에서 "기명유신"(其命維新)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대저 명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지만 하늘은 곧 민을 뜻함으로 명은 곧 백성의 명이다. 즉 다스리는 자가 백성의 마음을 듣지 못하면 하늘의 명도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을 갈아야하는 것이다. 내가 판단컨대 조선은 이미 하늘의 명을 스스로 새롭게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조선조의 건립은 고려의 귀족적 지방분권제의 난맥상을 청산하고 통일된 사대부 관료체제에 의한 중앙집권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양반관료정치를 가능케한 과거제야말로 그 제도적 핵심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초기에는 긍정적 의미를 지녔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직되고 폐쇄되어 백성의 삶을 대변하지 못하고 문벌의 작은 이권싸움의 수단으로 전락했을 뿐이니 권력의 타락은 극에 이르렀도다. 사는 민에 의하여 먹이어지는 자임으로 민에 의하여 부리어지는 것이 마땅한 사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는 민을 부리고 지배할려고만 하며 그들의 삶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사가 이와같이 민을 외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의 중앙관료체제를 유지시키고 있는 조세제도에 큰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양반은 처음부터 면세계급이었으며 그 관록이 전지로 세습되어 그 본래적 유동성을 상실했다는데 있다. 과거란 결국 면세집단에 한다리 끼기위한 특권쟁취의 수단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조세와 공물의 유통방식의 결함은 상인계급의 자연발생을 철저히 봉쇄시켰고 따라서 화폐경제는 발전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상업이 발달치 못한 결과로 농민의 조세부담만 가중되어갔고 양반계급자체가 빈궁화되어갔을 뿐이다. 이것이 곧 삼정의 문란이라는 참상을 초래한 이유며, 민생이 극빈상태에 도달하게되자 백성은 도처에서 민란을 일으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조선조의 명은 그 수가 다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더우기 지방관리인 향리에게는 아무런 봉록을 주지 않았으니 이는 백성을 적당히 갈취하여 먹고 살라고 국가가 보장하여 준 셈이다. 이들의 횡포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으니, 이도 그들을 나무라기 전에 우리나라의 제도적 결함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아아! 슬프다! 이땅의 식자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않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고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이 자기자신의 특권을 포기하는 자기 부정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민폐를 구원하는 길은 오로지 양반에게서 조세와 공물 부역의 특권을 박탈하고 사 농 공 상의 평등을 구현하는 대동사회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사민은 제각기 가지는 고유한 공능을 다할 뿐인즉 신분적 고하에 의하여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인성의 고귀함은 사민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다산과 같은 석학도 『목민심서』속에서 현체제의 개선을 논했을 뿐 현체제의 개혁을 논하고 있질 않다. 행정상의 방법만을 이야기할뿐 양반계급의 특권을 제약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늘은 혁명의 시대다. 혁명이란 주어진 제도내의 국부적 개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자체를 개혁하는 개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대동의 실현이며 민권의 실천이다. 나의 생각이 이 시대에 이해되기에는 너무도 원대하고 근원적이어서 고독과 비관의 념을 금할 수 없다. 허나 하늘은 우리민족의 염원을 결코 외면치 않을 것이다. 곧 사민평등의 새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나는 예감한다. 그러나 지금 나의 생각을 펴기에 부족감을 절감한다. 후세에 반드시 내 뜻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며 스스로를 반성한다는 뜻으로 자성록이라 이름하여 후생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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