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의 숙위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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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위학생이란, 신라에서 중국 당나라로 유학갔던 학생들을 말합니다. 이 숙위학생은 통일신라시대에 전제왕권기와 신라하대에 성격을 달리합니다. 숙위학생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상단 검색창에서 <숙위학생>을 입력하시기 바랍니다. 1. 숙위학생이 시작된 이유는? 원래 숙위학생이란, 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 등에서 당의 개방정책에 의해 유학생을 파견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즉, 당은 주변 여러 나라에서 유학생을 모아 당나라 교육기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고, 유능한 인재를 당에서 선별하여 활용하는 정책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숙위학생을 당나라의 개방성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초기의 숙위학생들은 유학생이라기 보다는 <인질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인질적 성격이라는 것은 초기 숙위학생을 했던 신분이 <진골 혈통>이었다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다음 사료를 한번 볼까요?
위 (1)번 사료를 보면 김춘추가 당에 아들인 문왕(훗날 문무왕)을 보낸 것은 유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삼국통일기에 당의 협조를 위해 아들을 인질로 보낸 것입니다. 또 (2)번 사료로 보면 신라가 당에 신하를 보낸 것이 <왕자>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 (2)번 사료에서는 학생들을 대학에 입학시켰다는 점에서 순수 학문을 위한 유학생들로 바뀌고 있다는 것도 동시에 보여줍니다. 2. 숙위학생의 신분과 역할이 바뀌다. 이러한 인질적 성격의 숙위학생은 신라 하대로 가면서 그 성격이 변화합니다. 신문왕 대 <국학>이 설립되면서 신라도 본격적으로 당나라를 모방한 유학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때부터의 숙위학생은 단순히 인질이 아니라 <학문연구>도 겸하게 된 것입니다.
위 사료를 보면 왕의 아우가 당나라에 인질적 성격으로 당에 갔으나, 국학에 입학하였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곧 인질적 성격과 함께 학문적 목적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사료를 볼까요?
위 사료를 보면 신라 후기의 숙위학생은 이제 확실히 공부를 위한 숙위 학생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귀국 숫자도 100명을 넘어 대단위이며, 이들의 출신도 김운경, 최치원 등 6두품 출신입니다. 즉, 신라에서 골품제도의 한계로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한 6두품들이 당에서 빈공과에 합격하여 능력을 인정받아서 당 왕조에 협조하거나, 신라로 돌아와 정치에 매진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학문적 성향이 강한 나말의 숙위학생들은 당에서는 인정받았지만, 정작 신라에서는 큰 인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폐쇄적인 골품제의 한계 때문입니다. 이들은 신라로 돌아온 후, 신라 사회의 모순을 한탄하며 대부분 당으로 돌아갑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최치원과 같이 은거하여 도교사상에 심취하거나, 호족과 연계하여 반신라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정리하자면 숙위학생은 초기에는 인질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나, 후기에는 학문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이러한 숙위학생들이 나말에 골품제적 한계에 좌절하면서 반신라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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