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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스콜라 철학사 2 - 보편논쟁 제 1장 : 보에티우스(철학의 위안)

스콜라 철학사 2 - 보편논쟁 제 1장 : 보에티우스(철학의 위안)

스콜라 철학의 두 번째 시간으로 여기서는 스콜라 철학의 핵심인 <보편논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1. 스콜라 철학에는 2가지 핵심 논쟁이 있었다.

스콜라 철학은 전술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작이 이슬람에서 넘어오고, 탁발교단이 정통교리를 확립하는 시기에 등장한 중세 철학입니다. 이 철학의 핵심 과제는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지켜가면서도, 교황청의 정통 교리를 사수하며,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접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12세기 이후 중세 전 기간을 걸쳐 2가지 문제를 가지고 큰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 첫 번째 논쟁은 바로 과연 <신이 존재한는가, 존재한다면 신의 존재와 이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라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문제>였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두 번째 큰 논쟁은 <보편논쟁>입니다. 이 논쟁의 핵심은 <보편적인 개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보편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를 따지는 논쟁입니다. 이 논쟁의 전자를 실제론, 후자를 유명론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 유명한 논쟁에 대하여 한번 심도있게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2개의 핵심논쟁은 각각 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편논쟁>이라는 큰 속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중세 시대 가장 큰 핵심 논쟁이었습니다. 그럼 <보편논쟁>이 무엇인자, 지금부터 시작해볼까요?

2. 보편논쟁의 불씨를 지핀 보에티우스

스콜라 철학의 시조라고 불린 사람으로서, 최초로 <보편논쟁>에 불을 붙인 사람은 유명한 철학자 보에티우스입니다. 보에티우스는 게르만족의 이동이 활발하던 중세 초기에 학자로서, 동고트 왕국의 국왕 테오도릭에게 등용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게르만족들은 <크리스트교>로 교화하면서 유럽 중세 문화에 적응하고 있었는데, 이 게르만족들의 교화를 위하여 <카톨릭> 이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은 당시 과제였습니다.

보에티우스는 당시 그리스 저작(아리스토텔레스> 들이 많이 유실되었던 관계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등의 교부철학체계를 인용하여 카톡릭 철학 체계를 완성하고, 대이동 이후 유럽사회에 정착한 게르만족을 교화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릭 황제는 <보에티우스>가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동로마 황제와도 교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보에티우스를 감옥에 가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이 감옥 생활을 하면서 차분히 자신의 인생과 학문체계를 정리하였는데, 그 때 나온 저서가 스콜라 철학의 기초가 된 <철학의 위안>이라는 긴 대화체의 장문입니다.

중세 보편논쟁은 쉽게 말해서, 과연 <신, 이데아>와 같은 형이상학적 보편자는 존재하는가? 라는 것을 두고 논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에티우스는 그 논쟁을 최초로 불러 일으킨 사람이지요.

원래, 보편논쟁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저서 <범주론>에서 비롯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포르피리오스라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학 입문론>이라는 책으로 다시 해석해 놓았는데, 보에티우스가 그 책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보편논쟁>은 시작되었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사물의 유와 종이라는 것이 과연 그 자체로 실제할까?> 라는 물음을 이 책에서 던집니다. 그는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개념은 우리 머리 속에서 감각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일 뿐, 진정한 사물의 실체는 알수 없는 것일까?>, <우리 감각과 사물의 실체는 일치하는 것일까?> 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만, 결론 내리지 않고 문서를 번역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문점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에서 멈추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유, 종이라는 개념들을 모두 <보편>이라고 통칭하여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고민에 대한 논쟁을 <보편논쟁>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글이 바로 논란이 된 범주학의 서문 내용입니다. 이 글이 바로 <보편 논쟁>의 과제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유(類)나 종(種)에 관해서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우리의 오성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더 나아가 만약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은 물질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 혹은 감각적 사물과는 별도의 것인가, 아니면 단지 감각적 사물 속에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로서는 답변을 회피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와 같은 성질의 문제란 매우 난해한 과제로서 여기에는 좀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3. 자유의지의 위안 :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이러한 보편논쟁과 함께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잡고, 고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한 <실제론>이라는 것을 신학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를 고민한 보에티우스의 명저가 바로 <철학의 위안>입니다.

철학의 위안에서 보에티우스가 고민한 것은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라는 명제였습니다. 이 명제는 중세 내내 <신앙>과 <이성> 중에 어느 것이 우위인가를 따지는 논쟁으로 발전하게 된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중 다음의 이론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였습니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우리는 항상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에게 행운이, 또는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부른다.

보에티우스는 우연이라는 단어가 <신의 섭리>와 어떻게 일치될까를 고민합니다. <신>은 완전한 존재로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일관된 <신의 섭리>와는 다른 것이 되버립니다.

하지만, 만약 신이 인간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알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모두 신의 섭리 안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게 되며, 모든 인간은 신에 종속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신앙>과 <이성>이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게르만족>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게르만족들은 결코 <신>에 대한 존경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죠.

보에티우스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왜냐면 인간의 모든 행동이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이 행한 모든 악한 행동은 모두 <신이 예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예정한 잘못을 인간이 했는데, 인간이 벌을 받아야할 이유도 없고, 인간의 잘못은 사실 모두 <신>의 잘못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4. 신의 섭리에 대한 위안 : 우린 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보에티우스는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분명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정리했는데, 그럼 인간과 신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지... 그것이 문제가 되었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보에티우스가 제시한 논리는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한계>라는 논리였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100년도 살지 못하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가진 의지입니다. 반면 신의 의지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지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신의 의지의 관찰 안에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이렇게 말하면 쉽습니다.

내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본다면, 이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신이 예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태양을 보는 것이 태양이 떠오르는 원인은 아니며, 내가 태양을 보는 것은 내가 나가서 보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다.

즉 쉽게 말하여, 신은 어떤 사실을 미리 예정하였고, 그 예정된 사실에 대한 결과도 예상할 수 있지만, 인간은 어떤 사실을 예정하지 못하고, 그 사실에 대한 결과도 예상할 절대적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즉,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종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고, 그 자유의자가 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해준 것입니다.

이 논리 속에서 보에티우스는 인간과 신, 그리고 각종 자연의 관계를 낮은 순에서 높은 순으로 체계화 시킵니다.

1. 감각 : 하등동물도 있는 가장 낮은 인식의 도구 - 아베바도 촉수가 있다는 정도
   2. 표상 : 고등 동물의 종들이 느끼는 인식의 도구 - 개나 말, 소 등이 스스로 행동하는 정도
   3. 이성 : 인간에게만 있는 인식의 도구 -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나, 절대성은 없는 것
   4. 직관 : 신에게 있는 것으로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하는 것

즉, 신이란 존재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도 없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려는 의지도 없는 완전무결한 관찰자입니다. 그리고, 관찰과 함께 인간에 대하여 사랑으로 <지켜봐 주시고> 훗날에는 인간에 대하여 용서하시거나 <심판>하실 존재입니다.

따라서 보에티우스가 알고 있는지상의 나라는 <악>이 존재하지만, 그 악은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묵묵히 관찰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악>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지만, 하나님은 그 악에 대하여 최대한 <용서>하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곧 보에티우스의 신학 체계입니다.

이것은 게르만족들에게 <용서>와 <교화>라는 체계적 원리로 나타나게 됩니다. 중세 유럽 사회의 종교적 큰 틀을 하나 완성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의 이론은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이성>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음으로서 훗날 <신앙>과 <이성>의 우위 문제를 유발시켰습니다. 또, 그가 제기한 <보편은 개별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 라는 <보편논쟁>은 중세 내내 이슈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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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만으로 포스트를 작성하려고 하는데도, 주제가 주제인지라 종종 종교적 냄새가 나 버리네요. 참고로, 저는 <다믿교>입니다. 성탄절엔 성당을, 석가탄축일에는 절을, 심심할 때는 용산 힌두교 상가에서 노는 사람이죠. 절대 특정 종교를 편애하지는 않습니다. 포스트 분위기가 그런 것이니, 그냥 이해해 주시길.. (저 교회, 특히 성당 많이 좋아합니다.)

다음 3편에서는 보편논쟁 중 <실제론>에 대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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