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와 프리메이슨 2>

프리메이슨의 기원 템플기사단 : 실제 역사속에서 어떤 기사단이였까?

우리는 사실을 fact라고 한다. 그리고 허구를 ficti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다면? 그러한 장르를 최근에는 faction이라고 합성해서 부른다. 팩션(faction)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을 교묘히 숨기기 위해 등장한 문학, 예술의 장르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치이던, 역사이던 이 faction을 이용하여 교묘히 글을 기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애매모호하게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에서 손을 내밀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느 쪽 선에 서 있는가에 따라 사실과 허구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사실과 허구를 포장해놓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을 할 수 있을 뿐더러,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의혹을 받아가며 관심을 유지할 수도 있다.

프리메이슨의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하나의 스토리라인은 <템플기사단>의 이야기이다. 십자군 원정이 막바지에 이른 14세기, 신의 수호자였던 템플 기사단이 갑자기 몰락한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사실이다. 프랑스 왕 필립 4세 때 실제 있었던 일이니까... 그러나 템플기사단이 몰락한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가져다 붙인다. 그래서 <기사단>의 이야기는 사실을 넘어서서 허구의 경계로 진입한다. 팩션(faction)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럼 <템플기사단>의 이야기를 위해 당시 역사적 상황을 짚어볼까?

중세시대 프랑스라는 나라의 기원은 게르만 족이 세운 국가 중 가장 강성했던 <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한다. 프랑크 왕국은 중세가 시작되는 5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유럽의 맹주였다. 특히 칼-대제(샤를마뉴) 때는 전성기를 구가한 나라였다. 하지만, 국왕계승원칙이 농경국가와 달랐던 게르만의 전통 때문에 왕위계승에 많은 혼란이 있었고, 10세기 이후 바이킹족(노르만)과 마자르족(아시아계)의 침입으로 국가가 분열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지금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영역으로 분열되었고, 그 중 프랑스 지방은 <카페왕조>라는 미약한 왕조를 유지하면서 계속되었다.

12세기 프랑스의 영토는 너무나 미약했다. 특히, 현재 프랑스 영토의 북부 지방인 노르망디, 앙쥬, 투레인 등 알짜배기 영역은 모두 영국의 영역이었다. 영국왕은 형식상으로는 프랑스 왕의 제후였지만, 실제 영역은 프랑스 왕보다 훨씬 넓었다. 특히 노르망디의 영주가 영국왕을 국왕으로 섬기면서 프랑스의 영역은 너무 비좁았다.

프랑스는 12세기 이후 왕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주변을 정복해가는 사업을 한다. 이 사업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이들이 바로 <기사단>들이다. 프랑스의 기사단은 왕령을 넓히기 위해 많은 전투를 치루었고, 국왕은 그들에게 적지 않은 보상을 해야 했다. 기사중에는 성주 출신도 있었고, 시민계급이나 하층민들도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기사단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국왕은 지방에 <세네샬>이라는 행정관을 파견하여 지방 영지를 관리하도록 하면서 프랑스 특유의 <관료제도>를 만들어간다. 단, 서양의 국가라는 개념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개념이기 때문에 여기서 국가란 국왕이 개인의 영토를 넓히는 영역을 편의상 <국가>개념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13세기가 되면서 프랑스는 교회세력과 연합하여 국왕의 영토를 넓히려고 하였다. 프랑스는 적대세력이 이단이든, 타른 영지이든 상관없이 영토를 넓히는게 목적이었다. 마침, 이 때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교황이라는 이노센트 3세의 시대였고, 이노센트 3세는 교황청의 논리와 맞지 않는 모든 세력을 이단으로 규탄하여 제거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12세기부터 이미 영토를 넓히기 위해 많은 이단파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교황의 논리와 가장 부합하는 국가였다. 여기서 프랑스와 교황의 세력에 의해 와해된 세력이 바로 <알비즈와파 : 일명 카다리파>와 <왈도파>였다.

사실 11세기 이래, 중세시대에는 교황이 권위가 막강하였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의 권위는 막강한 만큼 탄력적이지는 못하였다. 카톨릭 교회는 법령집을 만들어 법령에 위배되는 신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었고, 교회의 율법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유명론이니, 실제론이니하는 논쟁들도 어찌보면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자가 교황이 될 수 있는가라는 핵심적인 논쟁을 안고 있었으니까...

알비즈와파는 기존 카톨릭 교리보다 훨씬 더 금욕적인 종파였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의 성사를 부정하고, 육체보다는 영적인 면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그노시스파와 같은 교리가 보이지만, 이들의 교리의 핵심은 동방에서 건너온 마니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왈도파는 성직자의 <세속화>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은 성직자는 돈을 멀리해야 하며, 성직자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이상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인들은 복음과 찬양으로 말씀을 논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실제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는 교황에게 위험한 것이었다. 왈도파는 가장 철저하게 탄압당하여 지구상에서 소멸되었다.

프랑스는 이러한 이단파를 제거해주는 대가로 교황으로부터 많은 영지를 인정받았다. 영국으로부터 노르망디 등 주요 영토를 회복하였고, 알프스 북부와 이베리아 경계주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주변국들의 반발을 사게 되고, 그 영지가 문제가 되어 나중에 영국과 백년전쟁까지 치르게 되지만...

자, 그럼 본격적으로 <템플기사단>을 이야기해보자.

템플기사단은 1118년, 즉 12c 프랑스의 영토 확장기에 설립된 기사단이다. 이 기사단은 위그드파 등의 젊은 기사들이 <우리는 예수를 위한 가난한 군인들>이라는 이름을 걸고 만든 기사단이었다. 이 기사단의 신조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신조인 청빈, 순결, 복종을 이념으로 삼았던 기사단이었다. 이들은 이단을 격파하고 크리스트교 세계를 수호하는 기사단이었다. 그리고, 십자군에 출병하여 용맹을 떨치던 기사단이었다.

그럼, 중세 십자군 원정기의 기사단이란 무엇을 하던 단체였을까? 200년간 이루어진 십자군 원정 동안 기사단들은 맹활약을 하였다.

항상 아시아 또는 이슬람 세력에게 밀리기만 했던 유럽 세계가 최초로 자신감을 얻어 아시아로 진출하려고 한 사건이 십자군이다. 그러나 실제 십자군 원정에서 성공한 사례는 이슬람 세력이 미쳐 대비하지 못하고 급습을 당한 1차 십자군밖에 없다... 그것도 짧은 기간 동안...

1차 십자군 원정 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공동 성지인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인 서유럽이 정복하였다. 교화 우르반 2세는 안티오크와 예루살렘을 정렴한 뒤 십자군 왕국(라틴 왕국)이라고 이름을 짓고, 그곳에 서유럽식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점령지를 고생한 제후들에게 영지로 주고, 그 제후들이 다시 기사들에게 작은 영지를 주어 업적을 찬양하는 <봉건제도>를 아시아에 심어놓은 것이다.

여기서 일부 영지를 얻게 된 자들이 곧 <기사단>들이었다. 특히 유력 제후가 포함된 기사단은 더 큰 영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적인 기사단들은 많은 영지를 획득하지 못하였다. 교황은 종교 기사단들에게는 영지대신 수많은 특권을 부여한다.

병원기사단은 정착한 기독교인을 보호하면서 특권을 얻는다. 독일기사단은 성지에 교회를 지은 뒤 근처 영지와 요새를 획득하여 거대한 영역을 만들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무역로를 장악하여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그럼, 프랑스의 <템플기사단>은 어떤 특혜를 얻었을까?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이권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강력한 특권을 얻었다. 1128년 교황 볼드윈 1세는 템플기사단을 교황의 종교기사단으로 승인하였고, 절대적인 권력을 주었다. 템플기사단은 성지를 수호하면서 교황의 명에 따라 순례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다. 순례지에서 여행자들에게 걷는 보호세(통행세)는 막대하였고, 여행자수표를 발행하고 어음교환 사업까지 전개하였다. 이들은 이슬람 상인들과 접촉하여 아시아와 유럽의 무역을 중개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막을 자는 없었다.

그러나, 1차 십자군 이후 유럽세계는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였다. 특히 템플기사단이 참가한 마지막 7차 십자군에서는 프랑스의 루이 성왕이 이슬람 세력에게 포로로 잡히기 까지 하였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은 유럽의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십자군이 끝나고 14세기 프랑스의 왕은 그 유명한 필리프 4세였다. 필리프 4세는 십자군으로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템플기사단>이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템플기사단>이 종교 기사단으로 교황과 연줄이 있다는 점이었다.

필립 4세는 교회 세력이 국왕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고 발언을 해 성직자의 과세문제로 교황과 대립했던 반항적인 왕이며, 교황에게 반기를 들어 <아비뇽의 유수>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필립은 십자군에서 지고 돌아와 위세가 떨어지는 교회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는 법원인 고등법원을 설립하고, 재정은 회계원을 창설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국왕의 자문은 기사단이 아닌 왕실평의회가 주관하였으며, 지방 영지도 기사들이 아닌 행정관료가 담당하도록 조치를 취한 왕이었다.

그리고 필립 4세 하면, 그 유명한 프랑스 <삼부회>를 최초로 만든 왕이다. 삼부회에 참여할 3 계급은 성직자, 귀족, 제 3신분이었고, 이 때의 삼부회는 국왕의 명령에 절대 복정하는 <중앙집권화>를 위한 삼부회였다. 이 때의 국왕은 신의 대리인이었다. 훗날, 태양왕 루이 14세가 <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필립 4세의 업적에서부터 비롯된다.

필립 4세가 템플기사단을 몰살시킨 것은 그들이 <프리메이슨>이었다기 보다는 그들의 존재가 강력한 국왕에게 불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기사단의 막강한 재력은 국왕의 권위에 도움이 된다. 기사단을 제거하면 봉건제도를 청산하고 행정국가로 변모할 수 있으며, 훗날 교황을 밀어낼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우선이지 않았을까?

필립 4세가 기사단을 몰살한 표면적인 이유는 프랑스의 전통과 관련이 깊다. 어떤 종파든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제거해왔던 프랑스였기 때문에 더욱 손쉬웠던 것이다. 실제, <템플기사단>은 동방과의 무역을 해왔기 때문에 이전 <왈비즈와파> 등에서 주장해왔던 동방 종교의 영향을 조금은 받았던 것 같다. 국왕은 1304년 템플기사단의 종교 의식이 신을 모독하는 이단의 의식이라고 꼬투리를 잡아 기사단을 탄압하였다.당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템플기사단을 다른 기사단으로 개편하려고 하였으나, 필립 4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사단을 이단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템플기사단에 관련되어 조사를 받은 자만도 1만 5천명을 넘었고, 이단을 부인한 자크 드 몰레이 기사단장 등 중심인물들은 모두 화형에 처해졌다. 이단을 부인한 많은 자들은 각종 이유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 손톱과 발톱을 바늘로 찌르고, 눈을지지고, 생니를 뽑고, 등에 불로 낙인을 찍거나, 거꾸로 선 채로 코에 물과 가루를 부었다.

기사단은 해체되었으나, 화형을 당한 이들은 100여명이었다. 조사받은 자들은 1만명이 넘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기사단의 잔여 세력이 계속 잔존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잔존하였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지하에 숨어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확대되었다. 실제 그들은 중세 시대의 큰 흐름을 이끌어갔고, 교황의 공식 기사단이었던 만큼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 이야기는 확인된 것이 없다. 사람들은 이들의 생존자가 신비단체이자 반기독교단체인 <프리메이슨>의 기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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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개한 바티칸 문서 : 템플기사단은 이단이 아닌 공식기사단임이 적혀있다고 한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