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10 만세운동(1926)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하고 있었음에도,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차별적인 식민지 교육정책(원인)에는 조선인들의 심기를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학생들과 사회주의자(주체)들은 일제의 지속적인 폭압에 신음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그러한 불만을 터뜨리기 위해 다시 한번 커다란 민족 운동을 꾀하였다. 전에 3.1운동이 고종의 안산일이었다면, 이번에 학생들과 수회주의자들은 고종의 뒤를 잇는 순종의 안산일에 맞춰 6.10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일찍이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자들을 박해왔고, 6.10만세운동에서도 그러한 이유로 사회주의계열의 고등학생들이 먼저 격문을 만들어 놓았으나, 그들은 사전에 일제에게 대부분이 검거되었거나 하였기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결국 민족주의계열의 학생들이 그 전단을 뿌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6.10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이 손잡고 함께 운동을 일으켰다는데에 의의가 있다.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의 연계하여, 훗날 6.10만세운동은 후에 민족 유일당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2) 광주 학생 운동(1929)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한일 학생들 사이에서 패싸움이 일어나게되었다. 이 패싸움에 대해서 일본 경찰은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책임을 조선인에게 부과하자, 참다못한 학생들과 광주의 주민이 합세하여 불합리한 처리에 항거하였다. 이것은 점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신간회는 사건이 커지자 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 규명을 시도하였으며, 광주 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퍼뜨리는데 기여한다(민중대회). 하지만, 학생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신간회의 지도부가 대거 체포되어 신간회의 실질적인 권한이 많이 약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민중대회사건). 표면적으로 볼 때는 단순한 조선-일본 학생 간의 패싸움이 발단이 된 듯 하나, 그 이면(異面)에는 식민지 교육의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Tip.
1926.6.10만세운동(민족 유일당 운동의 계기)
1927.신간회(민족 유일당)
1929.광주 학생운동(전국 규모의 항일 운동)
22. 사회주의의 유입과 계층 운동의 활성화
1)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1917) 이후 정권을 잡게 된 레닌은, 사회주의의 세계적인 전파를 위해 약소 민족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이야기가 조선인에겐 매우 호의적으로 느껴졌으므로 사상 자체의 내용은 뒷전으로 하고, 사회주의를 따르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1925년 조선 공산당이 결성하면서 대대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같은 해 일제가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탄압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이 지하조직화 되었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이 공산 혁명으로 가는 과도기로 생각하였으므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다.
2) 사회 운동의 활성화
사회주의의 유입으로 그동안 소외된 계층들이 자유와 평등을 위해 계몽운동을 활발히 벌이기 시작했다. 조선 청년 총동맹은 1924년 수많았던 청년, 학생 단체를 규합하면서 탄생하였다. 그들은 교육과 산업 진흥을 위한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한 신간회의 자매단체이자 여성 단체였던 근우회(1927) 또한 신간회와 마찬가지로 좌우합작을 주도하는 단체였으며 여성 계몽, 문맹 퇴치, 구습 타파 등의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조선 소년 연합회의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제정하였으며, 갑오개혁 때 이미 신분제가 타파되었음에도 계속된 차별대우에 못마땅해하던 백정들은 조선 형평사(1923)를 조직하여 사회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다. 후에 이들 역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점점 계급 투쟁, 둑립운동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23.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1920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조선 노동 공제회는 노동운동의 시초를 마련하였다. 그 계보는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 1924년 조선 노농 총동맹이 결성되었고, 이윽고 1927년 각각 직업별로 갈라져 조선 농민 총동맹과 조선 노동 총동맹이 결성되었다.
1) 농민 운동(소작 쟁의)
농민들은 오래전부터 토지 조사 사업과 산미 증식 계획 등으로 시달려왔으며 이에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사상이 확대되고, 그럼에 따라 농민들은 그들의 생존권을 위하여 투쟁하기에 이른다. 가장 그 규모가 크고 성공했던 소쟁 쟁이로는 암태도 소작쟁의(1923)가 꼽히는데, 그들은 거기서 소작권 이전 반대, 소작료 인하 등의 지극히 생존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요구하였다. 1927년 그들은 조선 농민 총동맹을 결성하여 합법적인 투쟁을 해 나아갔다.
하지만 1930년대가 지나가면서 이러한 요구 조차 일제는 탄압하게 되고(비합법적 투쟁), 그로 인해 잠시 농민 운동이 주춤하긴 하였으나, 오히려 항일 운동, 계급 투쟁으로 확대되어갔다.
2) 노동 운동(노동 쟁의)
회사령이 철폐되고 점점 식민지 공업화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노동자의 수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만이 증가하였다. 이 역시 사회주의가 유입됨에 따라 열악한 조건과 저임금에 대해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기에 이른다. 그들은 1927년 합법적으로 조선 노동 총연맹을 결성하고 1929년 원산에서 생존을 건 파업을 하게 된다(원산 노동자 총 파업).
1930년대는 역시 일제가 이러한 노동 쟁의를 불법으로 하여 가혹하게 단속하였다. 노동조직은 비밀 조직으로 노동운동을 계속해나갔으며 반일, 계급 투쟁의 속성을 띠게 되었다.
24. 민족 실력 양성 운동
민족 실력 양성운동은 앞의 급진 개화파 - 애국 계몽운동의 뒤를 이어 교육과 산업을 통해 독립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1) 물산 장려 운동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되면서 회사령을 철폐하자, 그들은 우리네 민족 자본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회사령을 철폐한 것은 우리 민족 자본의 육성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자본이 국내에 유입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든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일제는 면직물, 술 등의 관세를 철폐하면서 위기를 느낀 민족 자본가들은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물산 장려회를 조직(1922)하면서 토산품(국산품) 애용운동을 전개하였다. 주 품목으로는 방직물, 고무신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결국 물산 장려 운동은 국산품의 가격만 올려놓았을 뿐이었고, 결국 자본가들의 배만 채워주었던 데다, 결과적으로 빈곤한 농민, 노동자 계층은 국산품을 오래전부터 소비해오고 있었음으로 사회주의 계열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추가사항 : 예전에 선생님께 물산장려운동이 어째서 민족주의 항일운동이었는지 여쭤본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의 답변은 "그냥." 원래 자본가와 민족주의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엄격하게 분류한다면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이 아니다.)
2)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일제는 교육 기회를 더욱 확대한다고 하였으나, 고등교육의 기회는 보장해주지 않았다.(고등학교 또한 중등교육이다. 헛갈리는 일이 없도록) 이에 이상재 등은 민족 교육을 시키는 고등교육기관을 만들기 위해 1922년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고 모금운동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민립대학기성회에 탄압을 가하는 동시에 경성제국대학(現 서울대)을 설립하는 바람에 대학을 세울 명분 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이것 또한 고등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소수 자본가들의 자제 뿐이었음으로 사회주의계열에게 비난을 면치 못했다. * 추가사항 : 민립대학기성회가 기성모금을 하러다닐 당시 가뭄 등의 피해 등으로 농민과 노동자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3) 문맹 퇴치 운동
문제는 맨날 일제의 식민지 차별 교육이다. 일제의 부실한 교육정책으로 시골의 문맹이 급증하고, 식자층과 무식자층의 격차가 점점 더 커 가기만 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20년대는 야학과 강습소 등을 차려 농민, 노동자 등을 가르쳤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언론, 학생이 참가하게되는데, 이로써 문맹 퇴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에 이른다. 조선일보에선 문자 보급운동을, 동아일보에선 브나로드 운동을 펼쳐 학생을 모았다. 학생들도 방학을 이용하여 적극참여하였다. 그들은 한글 전파를 비롯하여 문화 운동, 음악, 연극 공연, 구습 및 미신 타파, 근검 절약 등을 가르쳤다. 1931년 갓 태어난 조선어학회도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다. 사회주의계열이 호응을 얻었던 거의 유일하다 시피한 운동이었는데, 중요한건 이 운동의 전체적인 기간이다. 이 운동은 1935년에 일제의 방해로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일제의 통치 방법의 변화를 살펴보자면 민족말살기의 시작은 만주 사변 이후인 1931년이다. 그러나 문맹 퇴치 운동과 산미증식계획은 예외로 보아, 두 사건에 대해선 민족 말살기의 시작을 중일전쟁의 시작인 1937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실력 양성 운동의 한계
실력 양성 운동은 '선실력 후독립'을 표방하였지만, 일제와의 실질적인 차이는 너무나 컸기에 실질적으로 불가능 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희망도 차차 희미해지고, 민족주의자 대부분이 대농장 지주라든지 공장 지주 등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 노선을 걷기도 하였다.
25. 민족 유일당 운동
일제가 자치를 제시하면서 민족주의 진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자치론자'들이라 불리는 타협 민족주의와 그에 반대하는 비타협 민족주의로 갈리면서 민족주의 진영은 독립운동에 많은 차질을 빚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은 만주에 있는 군벌들을 타도하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자(국공합작), 이를 눈여겨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난 6.10만세 운동을 통해 힘을 모은 독립운동의 전개를 갈망하게 되었다. 1926년 몇몇의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얼마되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조그마한 조직인 조선민흥회(시초)가 었는데, 조선민흥회를 시작으로 사회주의계열에서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게 된다. 민족의 단결과, 정치 및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자치론)을 배격하면서 1927년 신간회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신간회가 출범하면서 비타협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통합된 지도부를 갖게 되었으며, 그들의 항일 운동 전부가 계승되었다. 그들은 민중 계몽, 온갖 대중 운동 지원과 광주 학생 운동에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민중 대회 사건 이후 지도부가 우경화 되고, 민족주의계열에서 합법 투쟁을 주장하여 이념적인 대립을 하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국의 국공합작도 깨어져버렸으며 이에 코민테른(세계 사회주의 지도부)은 민족 유일당 운동에 회의를 품으며 각개 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신간회는 해소(해체X)하게 되는데, 최초의 민족 유일당 단체라는 것과 전국적(군, 현 정도까지) 영향력이 미친 최대 규모의 항일 단체였다는 의의를 남겨준다.
26. 국외 이주 동포의 활동과 시련
1) 만주
만주는 19세기 후반부터 우리나라의 빈농층이 이주하며 살기 시작하면서 한족(韓族)의 또 다른 생활의 터전이기도 하였다. 보통 생존을 위한 경제적인 이주가 대부분이었으며, 만주지방에는 일찍이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문제로 고종 때 생긴 청과의 영유권 분쟁으로 관리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반인 1910년도에는 한창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서 정치적인 이주가 많아졌으며 1920년대는 항일 무장 투쟁의 본거지가 되기도 한다.
청산리 전투의 보복이었던 간도 참변(1920, 경신 참변)과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만주 군벌과 맺은 미쓰야 협정(1925), 일본이 사소한 물꼬싸움에서 일방적으로 조선인의 편을 들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한 만보산 사건(1931) 등을 통해 우리 민족은 시련을 겪곤 하였다.
2) 연해주
연해주 역시 만주와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 경제적 이주가 많았다. 러시아 정부의 적극적인 권유로 거기서 그들은 험한 러시아의 땅을 개간하면서 꿋꿋히 살아갔다. 1910년도에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정치적인 이주가 많았으며 대한 광복군 정부, 대한 국민 의회 등이 대표적이다.
소련의 내란에 휘말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죽어가던 자유시 참변(1921),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스탈린은 일제의 스파이의 가능성을 조선인에게 뒤집어씌우고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켜버렸다(1937).
3) 일본
초반엔 학생들이 유학도 많이 가고 하다가, 후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징병, 징용 등으로 일본에 이주하였다. 2.8독립선언을 처음 작성한 것도 일본 도쿄의 학생들이었다.
동포들은 일본에서도 민족적 차별이나 노동력 착취 등에 시달렸으며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인에 대해 안좋은 유언비어가 퍼져나가면서 조선인들은 마구잡이로 일본인에게 학살당하였다(1923).
4) 미주
20세기 초반에 사탕수수, 옥수수 밭 등의 농장이나 철도 공사장의 노동자로 이주가 시작되었다. 거기서 안창호는 미주의 항일단체를 통합한 대한인 국민회(1910)를 조직하였고, 이승만은 국제적 여론을 조직하기 위해 구미위원부(1919)를 만들었다.
27. 종교 탄압과 종교 운동
1) 기독교
기독교는 주로 의료, 교육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안악 사건, 105인 사건(1911)들도 그 들과 연관이 깊다. 그들의 교리에 따라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탄압받기도 하였다.
2) 천주교
천주교는 무장 투쟁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북간도의 청산리 대첩(1920)에 참여할 정도로 활약을 보였다.
3) 불교
일찍이 일제는 사찰령(1911), 승려법 등을 제정하여 불교계를 탄압해왔다. 유명한 독립운동가라고는 한용운 밖에는 교과서에서 소개되지 않는다. 한용운은 1913년 불교 유신론을 발표하여 불교의 쇄신을 주장하였고, 1921년에는 불교 유신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 추가사항 : 일본이 본래 신도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불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한국, 일본, 중국은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불교를 통해 역사적으로 많은 동질감을 갖게 된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아래에서 일본은 불교를 통해 조선을 동화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위의 설명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 것이지만, 불교계가 오로지 친일노선을 걸은 것은 아니다.)
4) 원불교
원불교는 개간사업, 저축운동, 금주, 금연 등의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일제에 대항하였다.
5) 천도교
천도교는 본래 동학이다. 일진회와 같은 친일조직이 동학 내에서 분리해 나감으로써, 동학은 그러한 위기를 타개하고 다시한번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천도교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3.1운동을 광고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6) 대종교
나철을 교주로 하고, 단군 신앙을 근본으로 삼는 종교이다. 나철의 전적을 보건데, 오기호 등과 함께 을사 오적을 암살하자면서 만들어진 오적 암살단 등이 있다. 그러한 사람이 만들어서 그런지, 대종교의 교도들은 무장독립 투쟁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중광단(후에 북로 군정서) 또한 대종교도들이 만든 단체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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