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 이민족의 로마
1.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민족 융합 정책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 후 2개의 로마가 되었을 때, 동로마에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했던 황제였습니다. 이당시 서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막스무스라는 반란군 때문에 동로마로 피신해 있었는데,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서로마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여동생(갈라티아)에게 반하여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역적 막시무스를 치기 위해 서로마로 진군했지요. 당시 로마는 이미 고대 제국의 영광이 사라져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동로마, 서로마는 모두 게르만 용병을 동원하여 공격과 수비를 하고 있던 시기였지요. 당시 동로마는 주력부대가 고트족 부대였습니다. 막스무스의 반란군은 주력이 프랑크족이었지요. 즉, 테오도시우스 시기에는 이미 모든 전쟁을 이민족들을 동원한 이민족 전쟁의 양상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럼 먼저 테오도시우스 이전의 당시 이민족인 게르만의 상황을 한번 돌아볼까요? 당시 아시아의 유목민족인 훈족(흉노)은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아 강경대응하는 등 중국통일제국과의 장기간의 전쟁에 지쳐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들 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서북 아시아의 게르만족을 공격하였고, 게르만은 더욱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집단 난민으로 로마쪽으로 이동한 최초의 게르만 민족이 서고트족인데, 서고트족은 378년 훈족의 기마군단을 피해 로마제국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로마는 고토족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목숨만은 살려준다고 하면서, 모든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빼앗아 버린 것이죠. 테오도시우스 이전의 고트족은 이러한 처참한 상황 속에서 로마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곧 고트족의 폭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동로마는 이것을 진압하지 못하여 한니발과의 포에니 전쟁이후 가장 큰 패배를 경험합니다. 이러한 고트족의 폭동을 본 서로마의 당시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이민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동로마 황제 자리에 테오도시우스를 발탁하였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이민족에 대한 차별은 곧 로마의 멸망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민족을 로마에 흡수할 방법을 찾게 됩니다. 테오도시우스가 찾은 방법은 기독교 이념이었습니다. 즉,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기독교를 아예 국교화 시키고, 기독교 이념 속에서 모든 민족이 평등한 로마를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막시무스와 같은 전통 로마 군인들은 이민족들과의 평등한 생활을 거부하였습니다. 이민족 용병도 무시하였구요. 즉,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수적인 로마 군인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막시무스를 죽이고, 실질적으로 동, 서 전로마를 통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갈라티아와의 사이에서 갈라-플라키디아라는 딸을 낳게 됩니다. 이 갈라-플라키디아는 고대 로마의 멸망 단계에서 마지막으로 로마 재건에 힘쓴 실질적 여군주가 됩니다. 2. 테살로니카 폭동과 기독교를 통한 개혁 추구 당시 로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 혼자 개혁하기에 너무 나라의 형편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이 확대되면서 전쟁이나 노역에서 해방된 로마 시민들은 고대 카이사르(시저)때부터 유래되어 "빵과 서커스" 정치에 빠져있었습니다. 즉, 경기장, 극장, 투기장 등을 만들고는 연극, 스트립쇼, 검투사의 결투 등을 즐기며 정치에서 무관심하게 살았고, 군대도 가지 않았지요. 이 때 마침 당시 최고의 프로스포츠 선수로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였던 마차 경주 검투사가 범죄를 저질러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이 스타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거의 동방신기나 보아, 비를 능가하는 스타의 구속은 "빵과 서커스"정치가 낙이었던 로마인들에게 충격이었죠. 그런데 이민족 총독이 이 스타의 석방을 거부하고, 투옥시키자 로마인들은 이민족에 대한 반감이 폭발하였습니다. 이민족인 고트족 총독과 관료를 죽이고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요. 테오도스우스 황제는 이 소식에 충격을 먹었죠. 같은 로마시민들끼리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황제는 철저한 진압으로 폭도들을 모두 다 죽여버립니다. 이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몰상식한 로마인들에게 질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민상을 찾기 시작하는데 이 황제의 눈에 띈 것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그들은 "빵과 서커스" 정치를 멀리했고, 오락이나 폭력보다는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 기독교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청신함이 좋았기 때문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로마교로서 제우스신을 받들었던 테오도시우스나 콘스탄티누스는 자신들이 믿는 종교와는 상관없이 기독교를 옹호하는 옹호자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테오도스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교도와 기독교의 반목은 더 심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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