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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고구려의 개국 전설 - 동명왕편과 해석

삼국의 건국과정 - 고구려, 백제, 신라

1. 고구려의 개국 전설

삼국의 개국 설화는 <한국사 이야기 - 초기국가사료방)에 자세히 넣어두었습니다. 설화 자체 내용을 참조하세요. 아래 원문 참조를 걸어 링크로 설명하겠습니다. 이 사이트에서 이규보(또는 동명왕편)를 검색하시면, 동명왕편 전문도 보실 수 있습니다.

주몽 설화의 의미

주몽 설화는 갈등, 고난 극복, 주술성, 문화성 등의 극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설화입니다.

먼저 갈등 부분을 보면 형제간의 갈등이 극명하게 보입니다. 이것은 백제 건국 설화에도 반영되는 적자 왕위계승 원칙의 적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태양으로 상징되는 하늘의 권위가 현신한 자라는 부분도 내포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씨>집단이 태양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해씨 집단의 선민사상이 적장자인 동명왕으로 이어지고, 또 유리가 숨겨진 단검을 찾는 다는 이야기에서 신성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모수와 해박의 대결, 주몽의 동부여에서 탈출하는 과정, 송양국을 복속하는 과정 등에서는 주술적인 요소도 많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주몽의 어머니가 농업신의 성격으로 나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러한 설화를 괴력난신으로 규정하여, 미신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명왕편에서는 전통문화의 긍지로서 이것을 해석하였으며, 그러한 전통은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더욱 강조됩니다.

고구려건국설화

시조 동명성황은성이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이다..... 부여의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어 물은 즉, 하백의 딸 유화라 하는지라....... 금와왕이 이상히 여겨 그녀를 방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이 따라와 비추었다. 그녀는 몸을 피하였으나 했빛이 따라와 기어이 그녀를 비추었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잉태하게 되었고 마침내 알 하나를 낳았다. ...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고 나왔다.

기골과 모양이 뛰어나고 기이했다. 일곱 살에 의연함이 더하였고, 스스로 활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 하니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

주몽의 어머니가 비밀을 알고 아들에게, <장치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죽이고자 하니 너의 재간으로 어디 간들 못 살겠느냐, 지체하다가 욕을 당하지 말고 멀리 도망하여 큰 일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타일렀다. 주몽은 그를 따르는 세 사람과 함께 도망하여 강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널 수 없었고, 추격병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주몽이 강물에 고하여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여기까지 왔으나 추격병이 쫒아오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외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니 주몽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 주몽은 졸본천으로 갔다. 그 곳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천이 험하였다. 마침내 이 곳에 도읍하기로 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를 그의 성씨 로 삼았다.

                                                                                         - 삼국사기  -

사료해석 :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과 대립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고대 신화의 위기극복구조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설화입니다. 특히 졸본의 산악지대는 <힘써 일해도 양식이 부족한> 지역인 만큼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소국들을 정복하고 평야지대로 진출해야만 했죠.

이 사료에서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인 해모수이고 어머니 유화부인은 물의 신 하백의 딸입니다. 즉 고구려인들은 선민의식과 천신의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는데, 후의 고구려인들은 주몽과 유화부인을 시조신으로 모시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고구려 신화와 단군신화는 그 구조가 약간 다른데, 단군신화는 창세기적 요소로서 원시적인 초창기 신화이므로 영웅의 위기극복보다 선악의 대립구조가 강도되었음이 보입니다. 특히 청동기 시기의 전형적인 신비주의가 많이 보이죠. 반면 고구려 설화들는 유이민적인 요소가 보이는 철기시대 신화로서 신비주의는 축소되며, 그 사회상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로 형제갈등에서 보이는 적장자 상속의 인정, 주몽의 모친에서 볼 수 있는 농업적 지모신 요소 등이 설화에 녹아 그 사회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네요.

주몽설화 관련기록 - 후한서

성은 고씨(高氏).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 기록되어 전한다. 즉 《국사 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성이 고씨, 이름은 주몽이라 하였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추모’ 또는 ‘상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 묘지에서는 ‘추모왕’이라 하였다.

또 백제에서 시조로 모신 동명에 대하여 《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 등 일본문헌에는 ‘도모(都慕:일본음 쓰모)’라고 하였다.  이들 일련의 한자(漢字)표기는 모두 동명을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한편 중국문헌인 《위략 魏略》, 《후한서 後漢書》 부여전, 《양서 梁書》고구려전에는 부여의 시조가 동명이라 되어 있고, 《위서 魏書》· 《주서 周書》· 《남사 南史》· 《북사 北史》· 《수서 隋書》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시조가 주몽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동명을 시조로 모시는 전통은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원래 동명과 고구려 시조 주몽은 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몽설화도 문헌기록에서 볼 때 동명설화와 줄거리가 구조적으로 똑같다.
그 특징은 ‘단군(檀君)’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왕자(王者)의 정치적 권위의 원천을 하늘에 귀속시키면서 농업생산을 좌우하는 ‘물의 신령’의 권위를 아울러 주장하는 새로운 종교사회사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서의 주몽설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였으며, 해모수는 동시에 북부여의 왕이었다. 이것은 그가 동부여에서 태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왕실의 법통의 근원을 북부여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주몽의 어머니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柳花夫人)이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정을 통한 뒤 집에서 쫓겨났다.
이때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유화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가두었더니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치어 태기가 있어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은 그것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에 버려도 소나 말이 피해 갔다.
또 들판에 버렸더니 새들이 모여 날개로 덮어주었으며 알을 깨뜨리려 하였지만 깨어지지 않아 드디어 유화부인에게 되돌려주었다.  이에 알을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  골격과 생김새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7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므로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왕자가 있었는데 큰아들 대소(帶素)가 “후환이 두려우니 제거함이 옳다.”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그는 날랜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하니 왕이 살찐 말을 골라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러나 왕자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꾀하니, 유화부인이 “멀리 도망가서 큰 일을 도모하라.”고  이르니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으로 벗삼아 엄체수(淹遞水, 또는 蓋斯水, 掩遞水, 奄利大水)에 이르렀다.

이때 주몽이 강물에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망하다가 뒤쫓는 군사가 닥치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이 건너자 곧 흩어져 뒤쫓는 군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한편 어머니 유화부인이 비둘기 한쌍을 보내어 보리씨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모둔곡(毛屯谷)· 무골(武骨)· 수거(獸居) 등 세 사람의 신하를 얻었다.  

개국과 치적

졸본(卒本:일설에는 紇升骨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서기전 37년에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하였다.  왕위에 올라 서기전 36년(동명성왕 2)에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고, 서기전 33년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고, 서기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서기전 24년에 유화부인이 죽자 동부여의 금와왕이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서기전 19년에 동부여에서 첫부인 예씨(禮氏)와 왕자 유리(類利:뒤에 유리명왕)가 도망하여 오므로 태자로 삼았다.

이해 9월에 왕이 돌아가니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졸본으로 온 뒤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었다고 하였다.

주몽설화의 특징

그런데 주몽설화는,  첫째 여자를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어 태기가
생기고,  둘째 알을 낳고,  셋째 태어난 땅에서 달아나,  넷째 물고기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여,  다섯째 새로운 땅에서 왕이 되었다는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첫째는 단군과 마찬가지로 주몽이
천손(天孫)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 유화부인이 단군의 어머니인 곰이 굴 속에 갇혔던 것처럼 방 속에 갇혔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몽설화 또는 동명설화에는 단군의 전통에서 볼 수 없었던 넷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가 하백의 외손으로 물의 신령의 영험스러운 능력을 지녔다는 것으로 비를 다스리는 주술적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즉 단군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새로운 농경사회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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