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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백제 멸명 후 백제 부흥운동 사료

백제 멸망후 백제 부홍운동 사료

8월 2일에 백제의 나머지 무리가 남잠, 정현 등지에 웅거하였는데, 좌평 정무가 무리를모아 두시원악(충남 청양)에 주둔하여 당, 신라인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26일에는 임존(충남예산 위치)의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적병이 많고 지리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소책을 깨뜨리는데 그쳤다.

9월 3일 낭장 유인원으로 하여금 당나라 병사 1만인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머물러 지키게 하고 신라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 그리고 급찬 길나 등으로 하여금 신라 병사 7000인을 거느리고 보좌하게 하고, 소정방은 백제왕과 왕족, 신료 등 93인과 인민 12000인을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23일에는 백제의 남은 무리가 사비에 들어와 항복한 백제 사람들을 노력하려 하매 유수 유인원이 당, 신라인을 출동하여 적을 쫓으니 적은 물러가 사비 남쪽 산에 올라가 4-5개의 책을 세우고 주둔하여 기회를 엿보면서 성읍을 약탈하니, 백제인 중에서 이에 응하는자가 20여성이나 되었다. 당황제가 좌우중랑장 왕문도를 보내어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조(6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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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이 사료는 초기 백제 부흥운동을 보여줍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사비, 웅전성을 제외한 백제 전역에서 전개되는데 그 목적은 모두가 <사비성 탈환 시도>였습니다. 사비성은 당나라 유인원, 신라 김인태의 공동 관리였고, 웅진성은 당나라 왕문도가 관리했습니다. 즉, 백제의 점령군은 당나라가 주력군, 신라가 보조군의 입장에서 부흥운동을 막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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