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속의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 :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정리해 봅시다.

1. 뭐가 있어야 말을 해보지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덕만>이가 <성골>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미실이는 자신이 <골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이라면, 신라에 품, 진골, 성골로 구분하는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덕만이가 <성골>이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아니, 진골, 성골과 같은 용어 자체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신라의 골품제도를 알 수 있는 사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 뿐이다. 너무나 적은 자료이지만, 그나마 그 적은 자료에서도 성골이 무엇인지, 진골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 놓은 부분은 없다. 신라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적을 필요가 없었던 것 일까?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과거의 용어일 뿐이다. 그럼 그 얼마 안되는 자료를 가지고,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말들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나온 <구분법>들을 총정리 해보도록 하자.

2. 신라의 건국과 <신성한 탄생>

자, 그럼 성골, 진골이라는 표현 방식부터 생각해보자. 성골(聖骨)이라는 말은 말 그래로, <성스러운 뼈대>라는 뜻이다. 진골(眞骨)이야 뭐, <진짜 뼈대>라는 뜻이겠지. 일단, 이 단어들은 모두 <뼈대 있는 인간들>을 말하는 <지배층>의 단어인데, 그 시작은 어떻게 될까?

먼저, 신라의 건국 시대로 올라가보자. 화랑세기를 보면, 이민족인 혁거세를 기존의 신라 집단이 받아들여서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의 이야기 역시 <화랑세기>의 내용을 근거로 캐릭터를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일단 화랑세기의 사료는 조금 조심스럽게 다뤄보려고 한다. 일단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의 원본이 없고, 일제시대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화랑세기 필사 원본도 지금 존재하지 않으며, 사본만 남아있는데 그 사본도 지금 위작 논란이 되고 있다. 문제는 <박창화>라는 사람이 일제시대에 음란소설이나 위작도서를 만들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아마추어 소설가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박창화>라는 인물의 생애와 글쓰기 능력 자체가 논란이 되어, 화랑세기를 역사적 사료로 다루는 데 상당히 신중한 편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일단, 사로국(신라의 초기 명칭)이라는 나라는, 고조선의 건국처럼 절대 강자가 등장해서 세운 나라가 아니다. 신라의 전신인 삼한 시대의 진한에는 <여섯 마을(6촌)>이 있었는데, 여섯 마을의 지배자를 각각 <간>이라고 불렀다. 그 중 고허촌의 촌장을 <도리>라고 부르면서 공동으로 마을의 일을 결정하는 <철기 연맹체 국가>였다.

철기시대에는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사회가 크게 변하고 있었는데, 여섯 마을의 지배자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맞게 국가 체제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여섯 마을이 같이 뭉쳐 세운 연맹체가 <진한6부> 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신성한 사람>이었기에, 공동의 왕으로 추대 했다고 한다. 혁거세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 용(계룡)이 나타나 여자 아이를 낳으니, 그녀의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짓고, 왕비로 삼았다. 왕비가 계룡의 우물(계정)에서 태어나서,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고 지었고, 사라, 또는 사로라고도 했다고 한다. (화랑세기에는 혁거세가 나정이라는 우물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성스로운 하늘의 기운을 받아 신라의 시조가 태어났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신성한 인물>이 왕이된다는 관념이 있었고, <신성한 왕, 왕비, 그 직계 혈족>을 성스러운 존재(성골)로 여겼다고 한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은 <골>이라는 말 자체가 최상위 지배층을 말하며, 성골이라는 관념은 이후 <계림>에서 후대 왕들이 <신성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3. 진한6부가 <골>의 시대로...

초창기의 진한6부를 다스렸던 세력은, 여섯 마을의 지배자였던 <간>이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박혁거세를 <거서간>이라고 부른 것은 <간들 중에 대표적인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의 초창기에는 <간>들이 돌아가면서 지배층을 이루었다. <박씨, 석씨, 김씨>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에서 진한6부가 <연맹체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거서간-차차웅-이사금 등의 군장, 제사장이라는 칭호를 쓰던 6부의 지배자가 <내물>시대에 <마립간>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김씨만이 왕위 세습을 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마립간>은 교과서에서는 <대군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더 깊게 들어가면, <간들을 지배하는 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진한6부는 <국가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존의 <간>들의 마을을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국왕의 신하로 복속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서라벌>이라는 협소한 지역을 벗어나 주변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자료가 적어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신라 시대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서서히 등장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골품제가 등장했는지는 기록에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한가지 명확한 것은, 골품이라는 제도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정해진 신분제도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제도였다는 점이다. 그럼, 일단 신라의 <골품제도>부터 한번 정리해 볼까?

4. 골품 제도의 변화와 <진골> 용어의 등장

골품제도는 말 그대로 <골족>과 <품족>을 나눈 제도이다. <골족>은 일반적인 학설로 본다면, 신라 초창기 지배자들인 화백회의 6부족의 지배자, 즉 <간>이라는 마을의 지배자를 최고지배층인 <골>로 인정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6부족의 관료층이나 행정실무층들은 그 능력에 따라 <품>으로 규정하고, 1,2,3,4,5 품의 5단계를 기준으로 <품>을 주었다. 그것이 바로 <골품제>이다.

그런데, 골품제는 초창기 진한6부의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서라벌>에 거주했던 진한6부의 <간>층과 그 일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신라는 관등을 12등급으로 나누어, 골족과 품족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의 한계선을 명확히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골품제가 <지증-법흥-진흥>으로 이어지는 변혁기에 많은 부분이 손질된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정한 뒤,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꿈꾸었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면서 골품제를 다시 만든 왕이다. 그리고, 진흥왕은 선왕들의 유지를 받들어 영토를 확장하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하려고 했던 왕이다.

특히, 법흥왕 때의 변화가 주목할 만 하다. 법흥왕은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다시 개편하려고 했던 왕이다. 그는 12관등이었던 신라관등제도를 17관등으로 넓히고, 신라의 왕이 곧 <부처의 일족>이라는 성스러운 개념을 신라사회에 도입하였다.

이 때 신라의 <골>족들은 1-17등급으로 분화된 신라 지배 관등 사회에서 상하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또 넓어진 신라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골>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골>족 사이의 분화가 생겨서 <진골>이라는 차별화된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존 학설은 진골이라는 용어가 내물왕 때 등장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1-5두품밖에 없었던 신라에서, 새로운 관등에 적응하고, 새로 등장한 <진골>족들과 유대관계를 맺는 <품>족들이 생기면서 6두품이라는 새로운 <품>이 등장하게 된다. 신라의 6두품은 법흥왕대부터 삼국통일전쟁이 있던 시기에 새로 생긴 <품>이었다.

5. <성골> 용어에 대한 다양한 해석 문제

법흥왕 다음 등장한 <진흥왕> 때에는 새로운 사회 변화에 맞춰 <국왕의 신성함>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진흥왕이 거칠부를 통해 편찬했던 역사서가 바로 <국사>였다. <국사>에서는 <성골>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거칠부는 모든 신라왕들을 <성골>이라고 규정하고, 성골들에게는 어떤 <신성함>이 있었는지를 서술하였다. 즉, 국왕은 새로 등장한 <진골>이라는 계층보다 우월하며, 신성한 존재라는 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고대 왕들의 <신성관념>이다. 즉, 왕들은 성스러운 <성골>인데, 이미 성스러운 신분이기 때문에 왕에 등극했다는 것이다. 김춘추 이후의 진골왕들이 알게 모르게 강조한 <왕이기 때문에 신성하다>라는 개념과는 반대의 개념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성골과 진골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있고, 최초의 진골왕인 김춘추를 기준으로 <신라의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

그럼, 여기까지만 정리하고 <성골>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정의를 하나 하나 살펴보자. 역사학자들은 어떻게 성골과 진골을 구분해 두었을까?

6. 전통적 주장 : 실증주의 사학

가장 전통적인 주장은, 실증주의 사학의 대표자이자, 과거 한국 사학을 이끌어갔던 <이병도>의 주장이다. 이병도는 이렇게 주장했다.

골품에서 성골과 진골의 구분은 왕족의 혈통에서 구분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성골이면 성골, 한쪽만 성골이면 진골로 골품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지금 20대 후반의 나이라면 모두 이병도 사학의 주장대로 공부했을 것이다. 교과서 자체가 이병도 사학의 주장대로였으니까... 왠만한 백과사전에도 이 주장이 실려있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근거없는 주장이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맞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성골인 진지왕의 아들 용수공이고, 어머니는 성골인 천명공주이다. 그럼 김춘추는 성골이여야 한다. 이병도는 진지왕이 패악한 군주였기 때문에 김춘추의 신분이 강등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따지면, 진지왕과 혈연관계에 있는 모든 신라 성골이 다 진골이 되어야 한다.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맞는 부분이 거의 없지만 한국 사학에서는 이직도 이 분의 파워를 무시하지 못한다.

7. 진흥왕의 직계라는 관점

이 주장은 지증-법흥-진흥왕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산물로 <성골>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특히, 진흥왕이라는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직계 후손과 방계 후손을 구별하기 위해, 진흥왕의 직계 후손을 <성골>이라고 부르면서 신성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진흥왕의 태자는 동륜이었는데, 동륜의 아들이 진평왕이었고, 동륜의 손녀가 선덕여왕이다. 진흥왕의 적통이었기 때문에 <성골>이라는 것이다. 반면, 진흥왕의 다른 손자로 왕이 된 진지왕은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인 용수와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는 성골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화랑세기에서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대원신통, 진골정통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원신통이란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 박씨의 계통을, 진골정통이란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 김씨의 계통을 말한다.

여기서 화랑세기에 의하여 또 하나의 직계, 방계 구분이 나온다.

대원신통이란, 어머니가 신을 모시는 신당의 여사제 출신일 경우를 말한다.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왕후 박씨가 바로 대원신통이며,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인 미실이도 대원신통(신녀) 출신이다.

반면, 진골정통이란, 신당의 족속이 아닌 <골>족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정확하지가 않다.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합치는 대충 이런 결론이 나온다.

성골은 아버지가 왕족인 왕의 자녀이고, 진골은 어머니가 왕족인 공주출신의 자녀를 말한다. 물론, 성골과 진골은 화랑세기의 구분으로 모두 <진골정통>이다. 보통 왕은 <성골>출신에서 나오고, 왕비는 <진골>출신과 신당의 <대원정통> 출신에서 나온다고 한다.

8. 혼인 규율을 바라보는 관점

이 주장은 왕족 내부 근친혼에 근거한 주장이다. 신라시대에는 혈통을 보호하기 위해 왕족끼리의 혼인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때 성골은 왕족 내부 집단에서 혼인했을 때 태어난 왕족을 말하며, 진골이란 왕족이 다른 일반 귀족(품족 등)과 결혼해서 태어난 집단이라는 견해이다.

예로, 무열왕은 왕족 내부 근친혼을 어기고, 가야계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성골에서 밀려 족을 강등당했는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진골로 긍정되어 인정받았다는 내용도 들 수 있다.

9. 왕위 계승권 분쟁에 관련된 관점 

이 주장은 성골과 진골의 구분이 정치적 투쟁의 결과라고 보는 주장이다. 즉, 왕족 자체가 근친혼이었으므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국왕의 직계 계승자와 왕권에 오를 수 있는 순위권의 친족을 성골이라고 부르고, 그 외에 왕위 계승권이 없거나, 소외된 집단의 귀족들을 진골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성골은 왕위계승권을 확정해 두어서 이후 분쟁의 소지를 아예 없애 버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골로 왕이 된 김춘추는 오히려 가장 확고한 전제왕권을 확립했고, 가장 강력한 후기 신라 사회를 이끌어갔으며, 김춘추의 후손인 무열왕계가 왕권을 독점하였다.

이것은 더 이상 <성골>이라는 개념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골>은 왕권이 미약할 때 왕위계승분쟁을 없애기 위한 장치이므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김춘추 이후에는 <성골>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없이 <골>이라는 명칭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성골의 개념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한 것은, 성골의 특징을 몰랐기 때문이다. 성골은 사실 중앙집권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법흥왕, 진흥왕의 과도기 때부터 여왕집권기로서 정권이 흔들렸던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 잠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삼국사기에 성골이라는 말은 그 시대에 사용된 용어이다.

10. 중국과 관련해서 바라보는 관점 

이 주장은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의미없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골과 진골은 사실 큰 차이가 없는데, 중국의 황제 체제의 영향으로 왕을 <성골>로 신성화시켰다는 주장이다.

특히, 성골이라는 관점을 외교적인 측면에서 찾는다.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으면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신라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성골>이라는 신성한 개념을 도입하여 당나라 등 주변국의 <황제> 개념에 맞먹는 개념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예로, 법흥왕과 진흥왕은 신라사회에서 보기 힘든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무열왕 때에 성골 개념이 생겼다는 주장도 연결된다. 무열왕은 이전 여왕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여왕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명분을 찾았는데, 그 결과 그녀들을 <성골>로 추존하면서 왕권이 신성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뭔가 더 찾아내려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의견도 내놓는다. 선덕여왕, 진덕여왕이라는 여왕통치가 중국 중화사상에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여자 황제를 부인한다. 당나라의 <측천황제>도 <측천무후>로 강등시키고, 여자 황제의 통치기간을 <암흑기>로 만든 것이 중국의 역사이다. 신라의 여왕 통치기를 중국이 조롱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성골> 개념을 만들어 <여왕통치의 정당화>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11. 성골은 유동적인 신분이라는 주장

이 주장은, 최근 많이 인용되는 주장으로서 이종욱이 쓴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 실려있는 주장이다.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를 다시 정비했다는 점을 위에 적어두었다. 그 때 법흥왕은 불교 전파와 관련하여, 신라의 왕을 <성스러운 석가의 일족>이라고 격상하게 된다. 따라서 성골은 원래 신성하기 때문에 왕이며, 왕은 원래 <성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왕과 그 가족, 형제 등의 직계 친족들은 모두 <성골>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제외된 이들은 진골이 되는 것이다. <성골>로서 새로운 왕이 즉위하게 되면, 새로운 왕의 가족과 형제 등을 포함한 새로운 <성골>이 등장하는 것이며, 그 외의 친족들은 <진골>이 된다는 주장이다. 즉, 성골이란 현재 왕의 직계 후손들이 <성골>인 것이다. 현재 성골이더라도 다음 왕과 혈연관계가 멀어지면 족적 강등을 당하게 되며, 왕위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이 때 성골들은 황궁에 거주하면서 그 신분을 유지하고, 후대 왕을 선출하는 등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하게 된다. 즉, 신라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진골은 황궁이 아닌 수도에 거주하면서 차별화 된다. 또한, 가야계(김유신계)라던가, 타국의 왕족이 흡수되었을 경우, 신라에서는 진골 신분으로 대접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출신 왕자가 태어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는 이 시기를 <성골남진>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에는 더 이상 성골집단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김춘추를 예로 들자.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었으므로, 진지왕이 계속 왕이였다면 성골이다. 그러나 진평왕이 즉위할 때는 그의 직계 진척이 아니므로 진골로 격하된 것이다. 신라는 예외없이 선왕의 후손인 <성골>이 다음 왕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성골이 아닌 상태에서 즉위했으므로, 진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12. 신라의 불교 공인과 성골의 연관성

이 주장은 성골이라는 관념이 불교전파와 관련되었다는 주장이다. 거칠부의 국사를 보면 모든 신라왕들이 <성골>이라고 씌여져 있으나, 그 주장은 진흥왕이 의도적으로 국사를 편찬했기 때문일 뿐이며, 사실 성골은 법흥앙-진흥왕대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즉,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면서 신라 왕의 신성함을 <미륵부처의 신성함>과 동일시 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이전 신라 시대를 지배했던 <신권>보다 강력한 힘을 불교에서 찾게 된다. 이 관념이 <성스러운 부처 일족>이라는 불교 설화와 맞물려 <성골>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원래, <골>은 모두 <진골>이었다. 그런데, 진골 중 일부가 <우리는 석가를 믿는 족속>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골>이 등장했다. 즉, 불교의 융성과 <성골> 개념의 등장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법흥왕이 불교를 전파한 이후,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덕여왕은 모두 진골의 진(眞)자를 이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진정한 석가모니 족속(진종설 : 眞種說)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진흥왕은 스스로를 불법왕인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했고, 신라를 석가의 불국토에 비유하기도 한다.

선덕여왕 드라마에서 진평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백정>이고, 그의 부인이 <마야부인>인데, 이것은 모두 석가의 부모 이름이며, 신라 왕실의 성골들은 석가의 친척이름을 차용하였다. 즉, 다른 왕족과 다른 신성한 석가 일족이라는 의미에서 성스러운 족속(성골) 개념이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13. 결국 성골이란 무엇인가?

위의 내용들을 정리해서 성골이라는 족속을 정리해보자. 위의 주장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결국 성골이란 <왕이 될 수 있는 왕위 계승권>과 관련있는 자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성골>은 하나의 신분이라기 보다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자인가를 허가하는 <허가증>같은 것일 수도 있다.

신라에는 <갈문왕>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왕위 계승>에 대비한 <보험>같은 것이었다.

왕은 다음 왕으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한다. 그런데, 왕이 자식이 없을 경우엔? 왕의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왕의 동생도 <성골>신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의 동생마저 죽어서 동생의 아들만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왕의 동생도 미리 성골로서 인정하고 <왕>으로 책봉을 해 놓아야 <왕의 동생의 아들>이 훗날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동생을 책봉한 것이 <갈문왕>이라는 제도이다. 즉, 갈문왕 제도는 성골이 <왕의계승권자>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라의 제도이다.

성골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새로운 역사책이 발견되던가, 성골과 관련된 신라왕의 무덤이나 비석이 나오지 않는 한, 성골의 실체는 영원한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 뿐이다.

최근 학설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자.

최근 학설은, <골>이라는 것을 김씨 왕권이 세습되기 시작한 내물마립간 시대에서 찾는다. 내물왕의 후손들은 <김씨>로서 박씨, 석씨와 다른 자신들만의 우월함을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다른 진한6부의 <간>층, 즉 <골>들과 다른 진짜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진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이 지증왕-법흥왕-진흥왕대에 와서 왕권에 충돌하기 시작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공인했으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던 시기의 왕들은 <왕위계승권>자인 왕의 직계들과 다른 <진골>들을 구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국왕의 권위를 위해 불교의 <석가모니 족속>이라는 이데올로기, 국왕은 원래 성스럽고 신성하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왕권 세습을 정당화하고, 왕권이 신성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국통일을 이룰 무렵 진흥왕이 생각했던 <불가능한 꿈>을 이루낸 무열왕 김춘추의 후손들은 <성골>이라는 타이틀이 없이도, 삼국통일을 이루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서 백년간 신라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묻혀있던 새로운 역사서들이 나타나서 더 정확하고, 확실한 <성골>의 개념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남기고 오늘 글을 정리한다.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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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지배층 - 진골과 성골

1. 진골이란?

신라가 중앙집권화되는 과정에서 족장세력으로 영역을 가지고 있던 <간> 세력을 체제에 끌어들이면서 <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성립하였습니다. 이들 <골>은 신라의 지배집단으로서의 우월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초기의 소국을 벗어나 체제 정비를 하는 지증-법흥-진흥왕기를 거치면서, 지배층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가야계 귀족들이 신라에 유입되었고, 진흥왕의 영토확장으로 북방계 귀족들도 신라체제에 흡수됩니다. 그리고, 삼국통일기에 이르면, <골>족의 증가로 인하여 골족들의 특별한 표지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 내물 마립간계 후손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다른 지배집단과 구분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를 격상시킬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즉, 차별화된 지배집단을 형성하여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골>족 중의 진정한 <골>로 여기게 되었고, 이것이 신라시대 <진골>집단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진골이라는 개념은 신라가 성장하는 6c 무렵부터 등장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골은 국왕의 후원 아래 체제 속에서 요직을 독점하였으며,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전 혈연성을 내세워 특권세력으로 격상합니다. 그리고, 초기 박씨, 석씨 골족 중의 일부도 진골에 포함시킴으로서 다른 계층의 골족이 성장하는 것을 막기 시작합니다. 법흥왕 대 17관등으로 관등 및 골품제를 정비하고, 율령반포, 불교수용 등 일련의 사회적 변화를 주도한 것도 국왕권과 그에 밀착한 진골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조치라는 관점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2. 성골의 등장은?

진골 계급은 국왕과의 밀착성을 주장하면서, 국왕권이 신성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국왕권이 신성하다는 것은, 국왕과 혈통적으로 가까운 골족인 진골의 우월성도 같이 강조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골 중에서 국왕이 될 수 있는 왕위 계승권자들은 하늘이 내린 성스러움을 가진 <성골>로 미화하기도 합니다.

거칠부의 국사를 보면, 신라왕을 모두 성골로 규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모든 왕들은 성골이 왕으로 즉위했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보아 성골이란, 어떤 특수한 신분계급이 아니라 왕이 될 수 있는 후계자를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성골이라는 것은 왕위계승과 관련된 개념이므로, 단순히 혈연집단을 뜻하는 진골보다 더욱 <유동적>인 개념입니다.

일단 성골이 될 수 있는 기준을 볼까요?

먼저 현왕의 장자가 성골이 될 수 있겠네요. 다음 왕위계승자니까요. 즉, 왕위계승과 관련있는 순위의 적자, 손자 등은 모두 성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국왕은 당연히 성골입니다. 그 왕자들도 왕위 계승의 후보들이므로 성골입니다. 만약 왕이 자식이 없다면, 왕의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므로 이때의 왕의 동생은 성골입니다. 만약, 왕과 왕의 동생이 모두 죽었다면, 왕의 동생의 아들이 성골이 되겠네요.

이것은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스러운 왕위계승자는 특수한 <혈통>에서만 가능하다는 직조관념에서 비릇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골이란 신성함으로 엮인 왕위계승순서에 따라 자격자로서의 조건을 갖출 경우에 해당되는 개념인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왕의 동생의 아들이 왕위계승을 한 경우가 있다면, 이 경우 <왕의 동생>은 자신의 아들이 왕에 올랐으므로, 자동으로 왕의 아버지로서 성골 자격이 생깁니다. 그는 왕을 한 적오 없이 성골이 되었는데 이런 경우에 그 왕의 아버지를 <갈문왕>이라고 하여 성골 왕의 대우를 해줍니다.

그러나 신라 시기 진평왕 이후 이 계승원칙을 지킬 성골 남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성골계승원칙상 여자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이 여왕이 바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입니다. 그리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서는 성골의 관념이 약해집니다. 결국, 신라가 통일하면서 사회체제가 바뀌어가자 <진골>에서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진골로서 최초의 왕이 된 자가 삼국통일의 공신 김춘추(태종 무열왕)입니다. 선덕여왕기의 일을 보아, 성골이란 선덕여왕 즉위집단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설도 있습니다.

3. 진골의 분열

6c 이후 진골과 성골이라는 개념이 확립되자 진골들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6등급 아찬까지 진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고, 이 진골들의 조치로 새롭게 높은 관직에 오른 계층이 바로 <6두품>이라는 새로운 계층이었습니다. 원래 5두품까지밖에 없던 신라사회에 6두품의 출현은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6관등 아찬>이라는 하위직은 6두품에게 넘기고, 진골들은 5관등 대아찬 이상을 독식함으로서 신라사회가 좀더 개방적이 되었습니다. 즉, 두품이라는 것이 10등급 이하 최하위 관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두품은 능력에 따라 승진하면서 관등에 의해 두품이 결정되는 능력주의 사회로 전환된 것입니다. 단, 여기서의 한계점은 그 능력이 6관등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6두품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기 시작한다는 점이죠. 그러나, 신라사회는 6등급 이상은 인정하지 않았고, 설계두나 최치원의 예에서 보여지듯 신라의 6두품들은 중국 당나라의 빈공과를 통해 출세하려고 신라사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8c 이후 신라사회는 진골의 분열 현상이 심해집니다. 삼국통일 후 신라사회는 전제왕권이 확립되면서 진골중심체제가 아주 견고해졌습니다. 그러나, 일부 진골층은 왕과의 근친혼 등을 통해 성장한 반면, 일부의 진골들은 족적 강등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진골의 수가 많아 지면서 더 이상 진골이라는 계층이 특권층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였습니다.

따라서 진골은 왕과 가까운 1골, 왕실과 멀어진 2골로 분화됩니다. 1골은 이전 진골의 특권을 물려받아 특권층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러나 2골은 왕실과 혈연관계가 멀어지면서 관료화되어 버린 계급이 됩니다. 또 6두품 중에서는 제 1골과 밀착하여 왕위쟁탈전이나 군공을 세워 2골로 올라간 계급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6두품이 5품이상의 관리로 올라갔다는 것은 전에 설명한 <아찬 중위제>가 붕괴되었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로서, 2골은 진골과 6두품이 혼재한 새로운 계급으로 신라사회에 새롭게 형성되는데, 이러한 새로운 계급을 역사에서는 <득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결국 8c 이후 신라가 말기로 갈수록 골품제도는 원래의 이념을 지키지 못하고 구제도의 모순이 되어 신라사회의 발목을 잡는 제도로 변질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실제 신라가 망하는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을 <골품제의 모순>에서 찾곤 합니다.

4. 대등의 분열

신라사회가 1골, 1골로 분열된 8c 이후 골족은 또 한번 분열합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등이었던 김양상이 왕이 되어 버린 사건 때문입니다. 원성왕 김양상은 원래 왕위계승후보였던 골족이 강릉에 머물다가 홍수로 인해 왕위계승에 참석하지 못한 틈을 타 상대등인 자신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를 역사에서는 <원성왕계>라고 합니다.

이로서 신라 진골들은 상대등이라는 자리를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원성왕 이후, 다음 왕인 김경신 역시 상대등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즉, 신라사회는 이로서 상대등계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진골 귀족 역시 왕의 직계와 상대등계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골의 마지막 분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대등이란, 원래 <등>에서 나온 말입니다. <등>이란 원래 족장 세력이었다가, 왕권에 복속되어 관직에 머물던 하급 관리를 말합니다. 이 중 국왕의 직속관리로서 세력을 갖춘 자를 <대등>이라 하며, 이 대등은 하급관리인 <대사>와 비교되는 말이었습니다. 신라 법흥왕 대에는 국왕의 업무를 총괄하는 관리로서 <상대등>이라는 고위직 관리도 등장하게 됩니다.

대등은 실제 고위 관리로서 진골과 같은 대우를 받았는데, 신라 후기에는 1골과 2골이 분화하자 2골은 전문관료직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대등>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등으로서 전문 관료군을 형성한 2골군을 골족, 품족 따지지 않고 <득난>이라고 했습니다. 이 대등 중에서 상대등 세력은 실제 왕과 직계 혈연 관계를 가진 관료였고, 왕위계승에도 적극 개입하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신라 후기에 활약했던 것입니다.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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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골품제도에 대한 분석

1. 골품제도는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

골품제도는 신라 지배층내에서의 관등제도입니다. 이것은 신라 초기 독자적 영역세력인 <가, 간>층(족장, 군장층)을 신라 지배체제 내로 끌어들이면서, 상호 혈연성과 세력 규모에 입각하여 지배세력의 서열을 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골품제도는 신라라는 국가가 체제정비를 한 바로 직후 시기부터 그 골격이 등장합니다. 초기에는 12등급의 서열로 관등을 정했는데, 신라사회가 체계를 잡아가던 법흥왕기에 17관등제로 관등제를 정비하면서 골품제도가 서서히 정비됩니다. 따라서 골품제도란, 어느 한 시기에 카스트 제도처럼 법칙적으로 그 사회를 규정한 제도가 아니라, 신라 사회가 변동하는 방향성에 맞추어 계속 변화하면서 정비된 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골품제도는 신라 전체 시기를 통털어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제도이므로, 그 성격을 시대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2. 초기 골품제도의 특징

초기 골품제도가 성립될 당시 신라는 고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려는 시기였습니다. 신라의 골품제가 정비되는 법흥왕기에야 신라의 율령반포, 불교수용 등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골품제 역시 초기에는 체계가 빈약했다고 보면 됩니다.

골품제의 가장 큰 특징은 지배층인 <국인>에게만 적용된 제도라는 점입니다. 즉 이것은 초기 각 지역을 다스리는 족장세력을 지배체제로 끌어들이기 위해 지배층을 <골>족과 <품>족으로 나누어 이중적인 대우를 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이 골, 품으로 나눈 것을 골품제라고 합니다.

<골>족은 족장세력이거나 유력한 왕실 혈연세력인 <간>층을 - 거서간, 마립간 등의 지배층을 말한다 - 국가 체제로 끌어들여 특권을 부여받은 계급입니다. <골>족은 그 세력규모나 혈연성을 따지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였습니다. 이러한 골족이 신라에서 차지할 수 있는 높은 관직을 <간>층만이 소유하는 관등이라고 해서 <간군관등>이라고 합니다.

<품>족은 <간>층의 신하계급입니다. 그러나, 품족에서도 왕족, 왕비족의 일부 품족만이 관등을 받았으며, 유력하지 못한 <간>층의 관료, 신하 계급은 <품>족에 끼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적인 규칙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에는 <골>족에 지배를 받는 <노인>계급이 있습니다. 노인이란, <골>족의 지배를 받는 백성을 말합니다. 즉, 신라에서는 왕이 모든 지배층(국인)을 총괄하지만, <골>족은 하위 백성인 <노인>을 다스리는 이중적 구조였던 것이지요. 실제 신라에서 중앙집권이란, 골족의 특권을 폐지하면서 <노인층>을 국가가 직접 다스리는 시기를 말합니다.

3. 이후 관등제도의 변화

관등제도란 국가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골>,<품>을 그 능력에 따라 등급을 주어 편성한 관료제도입니다. 초기 신라에서는 12관등이 있었는데, 골족은 1-9관등을 주로 했었고, 품족은 10-12관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철저한 규칙으로서 <품>족은 절대 골족의 관등에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품족도 그 능력에 따라 1-5두품까지 있어서 5두품이 가장 높은 두품이었습니다.

그러나 10관등에서 더욱 업적을 쌓은 <5두품>들은 더 이상 진급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바로 <중위제>입니다. 중위제는 당시 10관등이었던 <나마>라는 관등에 1등나마, 2등나마, 3등나마로 관등을 세분하여 진급하고자 했던 <품>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만든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12관등으로는 더욱 성장하고, 거대해지는 신라사회를 감당할 수 없었고, 법흥왕은 12관등을 17관등으로 확장하였습니다. 이 17관등은 나마라는 관등 위에 <대나마>라는 새로운 10관등을 상설하여 <품>족들이 1단계 더 진급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품>족이 더욱 높은 관등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신라는 대나마에 <중위제>를 적용합니다. 이전 중위제인 나마 중위제를 없애는 대신, 대나마에 1등나마, 2등나마, 3등나마를 만들어 진급하고자 하는 <품>족들의 욕구를 일부 해소하였습니다. 즉, 중위제라는 것은 관등이 늘거나, 시대가 바뀔 때 1시대 1시기에만 적용되는 제도로서, 초기에는 나마, 17관등기에는 대나마에 적용하였던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영토가 확장되고 삼국통일기에 가까워지면서 신라사회는 또 다른 형태의 골품제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은 진골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통일기 신라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형성된 진골은 5두품 관료 중에서 공로가 뛰어난 사람에게 더욱 높은 관등을 줌으로서 <품>족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원래는 절대 10등급 이상으로 진출할 수 없었던 품족에게 신라 6두품 아찬까지 진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지요. 이로서 신라에서는 원래 있어서는 안될 새로운 <품>족이 탄생하였고, 이들은 하위 <간>층 귀족과 맞먹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품족을 신라에서는 <6두품>이라고 부릅니다. 즉, 6두품이 탄생한 것은 진골이 신라에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 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다음장에서는 진골, 성골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골품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당시 신라인의 생활을 규제하게 되됩니다. 또 6두품이 등장한 이후 하위 두품인 1,2,3 두품은 점차 있으나 마나한 두품으로 전락하여 평민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신라 골품제는 지배층뿐만 아니라 평민화 된 1,2,3두품의 생활까지 규저하게 됨으로서 신라인 대부분의 생활을 규제하는 제도로 자리잡습니다.

4. 골품제도에 대한 결론

이상으로 볼 때 골품제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는 제도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인도의 바르나제도(카스트)처럼 엄격한 혈연적 신분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 관등이 변하고, 정치 주체가 변하면서 바뀌는 제도입니다. 또한 골품을 구성하고 있는 신분이 6두품처럼 새로 등장하기도 하고, 1,2,3두품처럼 몰락하기도 합니다. 진골과 성골이라는 개념이 지배집단의 입장에 따라 등장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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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의 지배층 - 가, 호민, 하호, 간

1. 가란 무엇인가?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을 논할 때 우선 알아야 할 단어는 <가>입니다. 가란, 북방 유목민 사회에서 전파되어 온 개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고대 유목민 사회에서는 지배자(족장)를 가한이라고 불렀습니다. 가한이란 큰 추장이란 뜻이라고 하네요. 흉노에서는 지배자를 <선우>라고 부르는데, 이 선우도 그 원 뜻은 <가한>이라고 한답니다. 중국에서 유목왕조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당나라도 이 <가한>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이민족을 지배하는 지배자라고 자처하기도 했답니다.

이 <가>라는 말은 남방에 내려와서 삼한 사회에서 <간, 한>이라는 용어와 같이 쓰였습니다.

우선 가가 들어간 말들은 고추가, 대가, 소가, 제가 등 북방계통의 국가가 많이 사용했습니다. 고구려, 부여에서 많이 나오는 용오들이죠. 신라에서는 마립간, 이사금, 거서간 등의 파생어가 있는데, 여기서의 간 역시 <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들 용어는 공통적으로 추장, 족장, 군장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용어는 <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소국의 군장을 뜻하는 용어로서의 <가>이기 때문에 이 용어가 사용된 시기는 연맹왕국 단계의 초기 철기 시대가 주류를 이루는 듯 싶습니다. 제가 역시 이 <가>라는 용어에서 파생된 작은 영역의 지배자로 해석하면 무난할 듯 싶네요.

그러나 초기 철기시대를 넘어 삼국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가> 계급은 중앙세력에 편입되어 관등제도 속으로 포함됩니다. 예로, 고구려의 초기 나(노)집단은 주변 씨족 사회를 통합하여 연노, 절노, 순노, 관노 등의 <가> 사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계루부 중심의 부로 통합되었고, 씨족적 부는 고국천왕대에 행정적 부로 재편됩니다. 그리고, 가들은 중앙관위 속에 편제되어 고추가 - 대가 - 소가라는 3중적인 서열로 재편됩니다. 즉, 가들은 읍락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왕권에 신속한 신하가 되는 것이지요. 이들은 왕권 밑에서 읍락과 하호를 통제하는 행정관 성격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부체제적인 <중층적인 이중 구조>의 사회가 중앙집권적인 <일원적 구조>로 바뀜을 말합니다.

2. 호민이란 무엇인가?

호민은 원래 가에 속한 가층의 지배자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분화되고, 정복사업이 많아졌으며, 철기시대가 진전되면서 이 호민층은 가층에서 갈라져 나온 중간 계급의 성격을 갖습니다. 원래 호민은 소국의 지배층이었습니다. 예로 옥저, 동예, 삼한 등에서는 뚜렷한 지배자가 없이 다수의 읍군, 삼로, 장수, 후 등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더 큰 대국에 점령당하면서 대국에 편입된 호민층으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호민은 초기부터 자신의 지배영역을 가지고 있던 소국 족장으로서, 대국에 통합된 이후에도 읍락의 점유권 등을 바탕으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던 지방 지배층이라고 보시면 무난할 듯 싶습니다.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호족>세력과도 비교가 되네요.

3. 경, 대부는 무엇일까?

경과 대부는 중국 서주시대사에서 아주 상세히 다루었습니다.(필요하신 분들은 검색해보세요. 서주시대로..) 대부은 원래 제후 밑에서 봉토를 부여받고 군사와 공납을 담당하던 <국>의 지배층이었습니다. 경은 제후 옆에서 직접 업무를 담당하는 실권자인 대부를 말합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기자조선 시대에 경, 대부가 나타납니다. 여기서의 경은 한 지역의 국사를 맡던 관직으로 <조선상 역계경> 등에서 보여지듯이 독자성을 가진 이름입니다. 대부란, 일정 가문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층 귀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이들 경, 대부들은 각각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고, 상위 지배집단이 동요할 때에는 스스로 <가, 간>을 칭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고는 했습니다. 삼한 70여개국이 정확한 명칭을 알 수도 없고, 그 영역도 잡거 형태이며, 생몰을 파악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것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경, 대부에게 일정한 관직을 주고, 영역를 인정하여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국왕에 신속하면서 중앙정치에 참여한다던가 지역통치에도 관여했을 것입니다. <조선상 역계경>을 예로 보면, <상>은 국가에 신속한 관리를, <경>은 독자적인 지방 세력임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두가지가 동시에 명칭으로 사용됨을 볼 수 있네요. 이러한 경, 대부라는 직책은 위만 조선에서 보입니다.

4. 제가란 무엇일까?

제가란 용어는 부여에서 나옵니다. 제가란, 한자로 보아 <가>들을 두루 다스리는 큰 가란 뜻일 겁니다. 제가는 왕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큰 족장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읍락에서 수백, 수천가를 다스리며, 좌식자(앉아서 먹고 노는 계급)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호를 착취하여 막대한 조세를 걷었죠.

부여는 <제가평의>를 통해 행정에 참여하였는데, 이미 1책 12법 등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제가평의는 법의 제한을 어느 정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들은 그들의 특권이 존재하는 만큼 어느 정도 법의 제한에서는 벗어나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제가는 하호를 지배하는 실제적인 영역의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마음대로 관료를 임명하고, 임명한 관료의 명단만을 왕에게 통보하는 형식으로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예로, 고구려의 대가들은 사자, 조의, 선인 등을 스스로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 부여의 제가들은 흉년이 들었을 때, 왕을 죽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가들은 독자적인 군사력도 막강하여 왕위계승분쟁이 있을 경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전쟁시에는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만큼의 자제적 군사력과 전술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 부여나 초기 고구려 등의 5부족 연맹왕국은 2중적인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국왕이 제가를 통솔하나, 제가 역시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관료조직을 가지고 읍락을 지배한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부체제에서 말하는 <중층적 구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5. 하호는 무엇을 하였나?

하호에 관련된 유명한 사료는 <제가에게 고기, 소금>을 날라다 준다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혹한 수취로 하호들을 다루었으며, 하호가 노예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부여의 순장, 인두세 등은 노예제 사회임을 강력하게 증명해줍니다. 그러나, 실제 하호가 노예인가, 농노인가, 씨족사회 일원인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학자들간에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6. 지배체제에 대해 정리해보자.

결국 초기 철기시대의 지배계급은 가, 한, 간 등의 족장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본래 독자적인 소국의 왕을 칭하던 가, 한, 간 등은 소국이 대국에 굴복함으로서 대국에 귀속된 계층으로 전환됩니다. 고구려의 가(고추가, 대가, 소가), 백제의 한(가한), 신라의 간(거서간, 마립간 등)의 질서를 볼까요?

고구려는 보통 형제적인 질서를 보입니다. 태대형, 대형 등 <형>의 계열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아, 초기 고구려 지배층은 소국과의 관계가 같은 예맥족에서 출발함을 암시하는 듯 싶습니다. 대형은 큰 세력, 소형은 작은 세력을 말하는 듯 합니다.

신라는 지방 간층의 지배세력을 신지, 험측, 범예, 살해, 읍차라 부르며 등급화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앙지배세력으로 포섭된 이후에도 이간, 파진간 등 <간>의 칭호를 달리하여 세력을 등급화하였습니다. 초기에는 12등급, 법흥왕 이후에는 17등급으로 정비하면서 이것이 곧 골품제와 연결되는 <간군관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관등이란 것은 원래 국가 업무에 참여하는 자들을 <등>이라고 하여 주었던 것인데, 후대에는 지배층의 높낮이를 구별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국왕 밑에 신속한 관리는 <대등>, 그들의 우두머리는 <상대등>, 간층 귀족들이 차지하는 관등은 <간군관등> 등으로 쓰이죠.

7. 이 지배체제는 <부체제>로 정리될 수 있다.

결국 초기 철기시대의 국가들의 특징은 각 소국의 지배자(가, 간, 한)들에게 영역을 인정해주고, 백성 지배를 인정해 준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소국의 지배자인 족장, 군장들은 각각 자국의 지배층들과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이것을 <귀족 회의>라고 합니다. 국가 중대사는 거의 이 회의체가 결정하였습니다. 국왕도 이 회의의 결정을 때를 수밖에 없었으므로, 왕권이 전제화되지는 못한 듯 합니다.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회의, 신라의 화백회의 등은 이런 역할을 수행한 면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초기의 지배층은 왕의 도읍에 거주지를 마련한 후 정치집단을 형성하였습니다. 고구려의 5부, 백제의 5부, 신라의 6부 등은 이런 정치집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들 지배층 중에 가장 강력한 집단이 왕이 되었고, 그 다음은 왕비족이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계루부 정권에서 절노부가 왕비족으로 군림한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집단도 일정 세력을 가진 자치권이 있었습니다. 예로, 고구려 소노부는 계루부에게 정권을 넘겨준 부였지만, 자체 종묘사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왕 밑에서 각 부들이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형태의 구조를 <부체제>라고 합니다. 부체제에서의 부들은 상호 후원자적 성격으로서 각 부는 자신의 이익을 지킴과 동시에 외적에 대해서는 공동방어를 추구했습니다.

모든 부는 왕 이하 평등관 관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 신라 진흥왕기 이전의 삼국을 보면, 왕이 하교를 내릴 때, 왕도 왕의 명칭 앞에 소속부를 붙었으며, 그 하교가 왕과 여러 부의 공동하교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왕은 군사권, 인사권, 재정권, 세습권을 가지고 있지만, 각 부는 자치권, 제사권, 방아권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상호 평등한 관계를 유지함을 알 수 있네요.

그리고 각 부에서는 귀족 대표를 스스로 뽑습니다. 고구려는 삼세일역이라고 하여, 삼년에 한번 신하들 가운데 실력자를 대대로로 선임하였으며, 백제는 서너명의 재상 후보들이 다투면 왕이 마지막에 선택하였고, 신라의 상대등은 6부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선발했다고 합니다. 부체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따로 <부체제>라는 파트를 만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무지 길거든요.

8. 부체제는 중앙집권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부체제는 국왕권이 강화되면서 점차 각 부의 독자적 영역과 세력이 약해집니다. 부는 행정구역으로 변하게 되고, 각 부의 <간>층은 관등에 속한 관료계급으로 전환됩니다. 이 때, 부가 국가의 행정구역으로 변하면서 <간>층은 유력한 혈연 귀족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혈연을 뜻하는 단어인 <골>입니다. 특히, 내물왕 이후 골들은 자신들의 유대관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진정한 골(진골)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왕위 후계자가 될 진골들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혈통이락 하여 성스런 골(성골)로 규정하기도 하죠. 이 부분은 다음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를 보면, 신라 초기에는 공동하교를 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냉수리비에서 지증왕(지도로갈문왕)은 아직까지도 여러 부의 왕들과 함께 교를 내리고 있습니다. 울진봉평비에서 법흥왕은 노인법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서 <간>층이 임의로 지배했던 피지배층(노인)을 국가체제로 흡수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들 왕은 아직도 <부>를 장악하지 못하였고, 각 지방에서는 <부>를 다스리는 <간>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를 확실하게 누르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중앙집권화와 영토확장을 과감하게 실시한 왕이 바로 <진흥왕>입니다. 진흥왕의 단양적성비에는 모든 부를 제외하고 왕 혼자서 명령을 내리는 <단독하교>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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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로 이행 - 간단히 핵심 요약

1. 철기사용과 그 시대적 특징 - 간단히 다루기...

철기시대의 특징은 철기는 청동기와는 다르게 구하기 쉬웠고, 두루 쓰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철기를 이용하여 농업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논농사가 전국적으로 실시됩니다. 또, 철제무기를 통한 전쟁이 증가하고, 이것은 사회 분화를 촉진시켰다는 점도 중요하죠.

철기시대에는 해상활동세력, 대장장이(철기제조 기술을 가진 자), 상업세력 등이 각자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지역별로 이루어진 국가들이 철기 시대 초기에는 아주 많았죠. 삼한 70여국이라는 말에서만 보아도 이 당시 국가 숫자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국가들은 서로 정복전쟁을 통하여 집단간 계급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진 자들은 노예가 되어 사회 내부적인 계급이 상당히 분화됩니다. 즉, 제가, 호민, 하호 등 계급이 나뉘고, 정치와 제사를 지내는 군장 및 종교 세력등이 성장하는 등 중층적 질서가 보다 견고해지는 것이지요.

한반도에서 철기가 도입된 것은 위만조선시대라고 보통 말합니다. 위만은 본래 조선을 다스리던 준왕을 한반도로 몰아내고, 새로운 기술인 철기제조술을 이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원래 고조선에는 <경>이라 불리는 관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독자적 봉건세력을 뜻합니다. 그러나 위만은 봉건세력들을 통합하기 위해 새로 <상>이라는 칭호를 내려줍니다. 상은 지방 봉건세력을 중앙 관료로 흡수한다는 뜻의 관직명입니다. 그러나 봉건세력들은 <경>이라는 칭호 앞에 <상>이라는 칭호를 붙여 씀으로서 그들이 관료이지만 독자세력임을 과시합니다. <조선상 역계경>이라는 사료의 호칭은 가장 유명하죠. 조선상 역계경이 왕과의 마찰로 자신의 세력 2000호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버린 사실은 유명한 사료입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철기 국가들은 구심점을 잃고, <간>, <가> 등을 칭하면 독자적인 국가를 세웁니다. <간>, <가> 등은 왕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후에 이 명칭은 더 큰 나라에 복속된 소국의 군장세력을 뜻하는 말로 의미가 바뀌게 되죠. 북방의 이러한 독자적인 작은 소국들은 개마국, 구다국, 비류국, 옥저국, 동예국 등 수가 엄청 많았는데, 대부분 고구려에게 흡수됩니다. 훗날,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은 이러한 소국들의 간, 가 들을 자국의 세력으로 끌어들어 강대한 국가연합을 이루면서 대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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