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18건

  1. 2010.10.06 근대를 보는 창 20 - (02) 학교 종이 땡땡땡!(근대 교육 분야)
  2. 2009.12.28 한국 근현대사 낙서 노트 (1) -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점과 세계사 (15)
  3. 2009.10.02 조선 상고사와 신채호 선생 (1) - 어둠의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틀은 <민족>일 수 밖에 없었다. (3)
  4. 2008.11.18 수능 근현대사 정리 4 : 거문도 사건과 개혁의 노력 (2)
  5. 2008.04.28 통리기무아문의 조직표 (1)
  6. 2008.04.22 1882년. 임오군란이 조선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 (10)
  7. 2007.12.08 <일본사 이야기 22> 일본의 근대화 1 - 에도막부의 중농주의와 계급분화 (3)
  8. 2007.10.21 (근현대사 20) 독립협회 이야기 - 본문(카툰수정) (12)
  9. 2007.08.30 (근현대사 18장) 을미개혁과 개혁의 종말 (3)
  10. 2007.08.23 (근현대사 17장) 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1)
  11. 2007.08.18 (근현대사 16장) 1894년 갑오개혁 - 1차 개혁의 내용 (1)
  12. 2007.08.14 (근현대사 15장) 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2)
  13. 2007.08.11 (근현대사 13장) 동학농민운동 3 - 동학농민들의 2차 봉기 (3)
  14. 2007.08.08 (한토막 역사 13화) 개항기 때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돈이 쓰였을까? (3)
  15. 2007.08.07 근현대사 12장) 동학농민운동 2부 - 1894년 1차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4)
  16. 2007.07.04 (한국근현대사 5) 1860년대 이후 계속된 위정척사 운동의 흐름 (16)
  17. 2007.05.20 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2)
  18. 2007.01.13 홍범 14조 및 조항 해석 (1)


(도서퀴즈) 제 1부. 근대인되기 : (02) 학교 종이 땡땡땡!

 

근대를 보는 창 20에 대한 도서퀴즈 2회 문제입니다.

도서퀴즈는 역사와 관련하여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을 선정한 뒤
각 단원별로 공부한 내용을 풀어보는 퀴즈입니다.

학교시험처럼 성적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책을 얼마나 꼼꼼하게 읽었는지 확인하고,
무심코 넘어간 중요한 내용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는 퀴즈랍니다.

70점 이상일 경우, 축하 메시지가, 70점 미만일 경우에는 격려의 메시지가 나온답니다.
다음 회차는 근대를 보는 창 2회차분입니다.
역사도서 <근대를 보는 창 20> 은 제목 그대로 총 20회분으로 퀴즈를 구성했습니다.

만약 문제를 풀어보시는 분이
역사 전공을 하고 있는 대학생, 대학원생이시거나
공무원 또는 교원 준비를 하고 계시는 수험생이시라면
책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실력이 되시는 분들은 책을 읽지 않고 도전해 보세요~


**** 도서 정보 ****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최규진
출판 : 서해문집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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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보는창20인간을둘러싼여러이야기묶음이곧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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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낙서 노트 (1)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점과 세계사

1. 시대구분은 누가하는 거야?

한국 근현대사 낙서장 첫 이야기이다. 근데 말이지,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용어부터 맘에 걸리네. <근현대사>라니... 그럼 근대, 현대라는 건 뭐고, 누가 기준을 정한거야? 먼저 근현대가 뭔지 모르고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간략하게 끄적거려보자.

뭐 역사책을 보면 흔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뭐 이런 말들이 나온다. 근데 그건 누가 정한 거지?

사실 말이지. 시대구분이라는 것은 스스로 <근대인>이라고 생각했던 서양인들이 만들어 낸 <발명품>이야. <르네상스>라는 말은 다 알지? 미켈란젤로니, 라파엘로니, 레오 선생이니 하는 분들 나오는 서양 15-16세기 말야.

서양의 근대인들은, 15세기를 무지 자랑스러워 했어. 솔직히 중세 시대에 기사도가 어쩌구, 십자군 원정이 어쩌구, 교황이 어쩌구 말은 많이 했어도 그 시기는 <우물 안 개구리> 시대였거든. 아시아인들은 각각 무역권을 만들고, 문명간 교류도 활발히 하고 하던 시기에 유럽인들은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들끼리 죽자 살자 치고 받고 싸웠잖아.

그런데, 르네상스니, 종교개혁이니, 신항로 개척이니 하면서 밖으로 눈을 돌려보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이거야.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믿었던 가치관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였지.

교황 : 야... 니들 라틴어 읽을 줄 모르잖아. 내가 성경책 읽어 줄테니 잘 들어. 하나님께서는 <면죄부>라는 티켓을 사는 사람에게 천국을 예약하셨단다. 자, 줄서... 티켓사세요.. 티켓... 교황한테 돈 바치면 천국가요... 교황믿음 만세천국 교황불신 바루지옥.....

로렌쪼 발라 : 놀구있네. 내가 조사해 봤더니, 교황이랑 황제랑 밀약맺고 둘이 해 쳐먹은 거 많던데, 이게 야~ 대체, 교황이 교지구 투기업자랑 뭐가달라? 교황이랑 랑크 제랑 따먹고, 치자금 주고 이런 거래 다메? 료 다 았다. 지금부터는 성경책 내가 직접 읽을란다. 니가 읽어주는 거 안 믿어.

루터 : 라틴어? 되었구... 지금부터는 모국어로 성경책 번역해줄테니 그거 읽으면 되겠다. 성경 직접 읽고 스스로 믿음을 가지세요... 우리 힘으로 종교를 바꿔 보자구요. 일단, 교황을 좀 죽여놓아야 우리 귀족분들이 힘좀 쓰실거에요. 교황불신 귀족만세~~

갈릴레이 : 근데, 교황이 한 말을 반박해도 될까? 내가 망원경 만들어서 보니깐 지구가 돌던데.... 근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내가 안했는데... 어떤 넘이 책 팔아 먹으려고 그런 말을 써 놓았어?

콜롬버스 : 그래? 그럼 난 그 말 믿고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서 인도 가봐도 돼? 진짜 간다.. 진짜루.... 지구 반대로 갔다가 낭떠러지 만나서 죽는 거 아니지? 확실... 하지? 후덜덜...

뭐, 점차 이런 분위기가 되가는 거다. 세상이 바뀌고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아시아 애들 노는데도 좀 놀아달라고 애원해보고, 무역도 같이 해보고 싶었겠지. 유럽애들도 점차 <스팩>이 되잖아~ 그래서 서양인들은 지금까지의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점을 만들어 본 거야.

과거 찬란했던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시대를 <고대>라고 기준점을 잡고, 로마 제국의 문화유산이 박살난 시대를 <중세>로, 그리고 르네상스를 겪은 자신들의 시대를 <근대>로 파악한거지. 이 시대 구분법이 여러 서양의 역사 학자들을 거치면서 <현대>라는 살까지 더해서 4단계 시대구분법이 나왔어.

그런데, 이 시대구분법은 문제가 있었지. 뭐 19세기 이후에 서구 애들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 시대구분법을 널리 애용하긴 했지만,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게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영국의 스펜서 : 뭐야... 중국, 일본, 한국, 뭐 인도, 오스만 제국... 이것들은 나름대로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라면서 19세기까지 쭈욱~ 중세 봉건시대 수준이네. 그니깐 니들이 우리 서양한테 정복이나 당하지 ㅋㅋ

일본 : 되었네 이 사람아.. 아시아는 아시아 나름대로 발전과정이 있었고, 니네 발전이랑 조금 다른 면이 많거든? 우리도 <메이지 유신>으로 나름 발전했는데, 몰랐어? 니네 시대 구분이 좀 우리랑 안 맞는다. 우린 근대랑 현대 사이에 독특한 발전 과정이 있거든? 오.. 그걸 <근세>라고 부르면 되겠다...

그리하여 4단계 시대 구분법이 <근세>를 포함한 5단계 시대 구분법으로 정착된거야. 뭐, 암튼 중요한 것은 이 시대 구분이라는 것이 서구적인 것에서 출발했다는 점이지. 따라서 우리식으로 고대니, 중세니, 근대니 때려 맞추려고는 하는데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일단, 한국사 교과서부터 봐봐.... 뭐 고대 사회로의 발전, 근세로의 전환... 이런 거창한 제목들은 많이 나오는데, 왜 고대고, 왜 근세고... 이런 설명들은 살짝 생략되어 있거든. ㅋㅋ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 학자 님들께서 고민해서 만들어놓은 시대구분이 많으니, 그걸 참조로 근현대사가 어디서 부터인지 파해쳐보자.

2. 한국 근대와 현대의 기준점

자, 그럼 한국사에서 근대사회가 언제부터인지 밝혀보자.

사실 한국사에서 근대는 서양인들이 구분하는 기준과는 완전 달라. 서양애들의 근대 기준은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잡히기 시작하는 시기야. 뭐, 칼뱅이라는 종교개혁가가 기독교인들은, <돈 잘 벌어도 천국가유~>라고 자본주의의 단서가 되는 말을 했다나 뭐래나... 또 로마제국의 울타리에서, 교황의 울타리에서 살던 유럽인들이 <근대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잡고 절대왕정이라는 걸 만든 것도 바로 이 <르네상스> 이후야.

아시아의 <근대 기준>은 사실 유럽인들이 말하는 <자본주의>가 언제 생겼냐는 거야. 근데, 아시아는 대부분 유럽인들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었거나, 강제로 개항했잖아.

따라서 아시아의 <근대화>란, 거의 대부분 유럽인들이 협박~해서 강제로 <자본주의>가 들어온 시기가 바로 근대란 거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강제적인 개방이었기 때문에 <국가>를 지켜야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생겨서 <민족의 생존>을 생각하게 된 시기를 근대로 볼 수 있어.

뭐, 유럽과 좀 다른 점이라면, 걔네들은, 다른 나라를 점령해서 민족의 영광을 널리 알리려는 거고, 아시아인들은 꼴보기 싫은 유럽민족들이 식민지를 넓히자, <니들 짱난다~>면서 저항했던 민족주의라는 거 정도지.

자, 그럼 한국사에서 말하는 근대의 기준이 감잡히지? 정치적으로는 <근대민족국가의 수립>,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의 수립>이 바로 근대화의 기준인 거지.

그럼, 민족국가, 자본주의 국가가 대체 언제야? 이걸 가지고 많은 학자분들께서 싸웠는데, 뭐 대충 정리하자면 이런거야.

18세기 주장파 : 일본이 안 쳐들어왔어도 우린 스스로 민족국가를 만들 수 있었거든? 특히 박지원, 박제가 등 실학파들 중에 <북학파> 있었잖아. 우리 민족이 강해지기 위해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우자는 사람들. 특히, 조선후기에 영조, 정조 시기를 봐봐. 거의 서양의 루이 14세 안 부러울 도로 대군주잖아. 그 때 자본주의가 발달할 딱... 찬스였는데. 박지원의 양반전 보면 양반이 장사하는 방법도 나오구...

흥선대원군기 주장파 :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격파, 미국 격파하고 침략전쟁을 다 막았잖아요... 일본, 청나라 간섭도 다 막아 버리고... 그것만큼 민족적인게 어디있어요? 그리고 대원군기에 국가 재정이 튼튼해지면서 서울 등 근기지방부터 자본주의가 발전하잖아요?

강화도 조약 주장파 :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일본이랑 맺은 <강화도 조약>이거든? 그 조약으로 우리가 비로소 세계사에 눈뜨고, 자본주의가 먼지 경험하게 된 거잖아. 비록, 일본이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맞지만, 조선이 개항하고 자본주의를 배운 건 1876년이야. 또, 일본 덕분에 외세에 저항하려는 <민족주의>가 비로소 시작되었고...

갑오개혁 주장파 : 강화도 조약은 그냥 문서일 뿐이구요. 실제로, 양반, 싱민, 노비같은 신분제도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진 건 1894년 갑오개혁 아닌가요? 모두가 평등해야 비로소 하나의 민족이죠. 솔직히 조선시대에 노비가 <우리는 같은 민족, 평등한 백성이다>라고 생각했겠냐구요.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정치, 사회 개혁이 선행되야 근대화든 뭐든 하죠. 그리고 갑오개혁 때 조세 개혁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발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국가권력이 성립된 거 아닌가요?

음... 다 조금씩 맞는 말인거 같다. 하지만, 현재 교과서나 일반 서적에서는 <강화도 조약>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 같다. 뭐... 강화도 조약을 챙기려면 서양과 일본 세력의 침략도 언급해야 하고, 그러려면 당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도 언급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짜피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가게 되지.

그럼 현대의 기준은 어디지?

그건, 만장일치야.... 일본이 핵무기 꽝~ 하고 맞아서 망하고, 아시아 전체가 이 날만 되면 모두 모두 기념하고 행사를 치루는 1945년 8월 15일.... 즉 광복절 날이지.

현대가 되려면 식민지 상태에서 <민족국가의 발달>이나, <독점적 자본주의>의 발달이 이루어질 수는 절대~ 없는 거잖아. 뭐... 친일파의 국가라면 모를까.... 혹... 요즘 친일을 애국으로 바꿔주시는 뉴라이트 분들이라면 새로운 시대 구분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ㅋㅋ

자, 그럼 재미없는 시대 구분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고 본격적인 근현대사 낙서에 돌입해보자. 그럼 19세기 서양 열강의 침입과 독자적 발전을 이루려 했던 조선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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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고사와 신채호 선생 (1)

어둠의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틀은 <민족>일 수 밖에 없었다.

1. 1910년 이전의 신채호....

오늘 소개할 역사책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이다. 먼저,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신채호 선생이 살았던 시기를 간략히 짚어보자.

신채호 선생이 태어난 1880년은 민씨 정권에 의해 본격적인 <개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일본>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개화 정책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고 있었다.

개화가 사회의 큰 화두가 되었던 그 시기, 동학농민들이 개혁을 외치다 총탄을 맞고 쓰러진 그 시기, 구체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서구식 새 옷을 마련한 1894년의 갑오개혁이 일어난 바로 그 때의 조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신채호는 19세의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다.

약관의 나이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그는, 훗날 삼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소앙과 함께 <항일 성토문>을 발표하여, 친일파를 규탄하는 운동을 시작했으며, 산동학원을 만들어 교육자로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자진 사퇴하고, 장지연의 황성신문사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는 객원논설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계몽사상을 전파하려고 했으나, 장지연이 을사조약 반대를 표명한 <시일야 방성대곡>을 발표하면서 신문사 자체가 일본에 의해 탄압받게 되었다. 이후, 황성신문은 무기한 정간당하였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1906년, 양기탁과 베델이 이끌어가던 대한매일신보에 들어가 주필로 활약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부당함을 다양한 글로 적어 내었다. 초창기 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역사논문

   독사신론(讀史新論)

신문논설

   일본의 삼대충노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한일합방의 부당       대한의 희망   등...

연재시론

   천희당시화

영웅전기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이태리 건국 삼걸전

다양한 영웅전기는 그가 <민족주의>를 선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역사 속의 <민족>이란,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나라는 주체(아我)는 다른 모든 것(비아非我)과 구별되는 실체이다. 우리 역사 속에 살아숨쉬는 영웅들은, 민족이라는 <생명체>를 숨쉬게 한 매개체와 같은 것이다. 영웅이 제시해줌으로서 민족을 계몽하려던 신채호의 초기 계몽사상은, 일제 강점기에 <좌절감>을 느끼던 대중들에게 반항의 힘을 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대로 <독사신론>은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일본에 의지하려는 편협한 개화주의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개화와 매국은 뭐가 다른 것인가? 일본에 의지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들이, 일본과의 조약에 서명하고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것까지 선진문물과 개화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로마제국에서 노예로 살면서 로마를 찬양한 이들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독사신론은, 단군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은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위대한 시기를 구가했었다고 주장한다. 일본보다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노예근성으로 타락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1908년 무렵 대한매일 신보에 연재된 이 글들은, 신채호가 민족의 위대함만을 강조하기 위해 적은 글이 아니다. 일본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노예근성이 망국으로 이어졌다는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자, 고대사 이야기를 계속 꺼내고 있는 것이다. <독사신론>의 이야기는 그 이후,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신채호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까지,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거나, 직접 주도하여 친일파들과 항전하였다.

1905년 장지연의 <황성신문>, 1906년 양기탁의 <대한매일신보>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논설을 지속적으로 실었고, 1906년 대한자강회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인의 교육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직접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윤치호, 안창호와 같이 결성한 청년학우회의 창립취지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링크 : 신채호가 대한협회 원보에 올린 글(1906) http://historia.tistory.com/189

그러나, 1907년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한일합방 무렵부터 일본에 의해 탄압받으면서, 일제강점기 시기 내내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면서도 안정복의 친필이 담긴 <동사강목>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고 한다.

링크 : 신민회의 설립 취지문 http://historia.tistory.com/188

2. 1910년 이후의 신채호

1910년, 31살의 신채호. 그의 30대는 너무나 암울하고 어두운 시기였다. 독립을 위해 발버둥칠수록 더욱 암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1910년 안창호와 같이 산둥지방으로 도망간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인 <청도회의>에 참여한 뒤,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독립투쟁>을 할 것을 결의한다.

링크 : 청도회의 <daum 신지식인 검색>

1911년 이동휘와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청구신문 등 민족신문에 끊임없이 글을 기고하였다. 1913년에는 상하이에 <동제사>를 건립하여 신규식, 조소앙, 박인식, 정인보 등 민족주의 학자들과 함께 조선 독립운동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다녔다. 30대의 신채호가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위해 노력한 흔적들은 다음과 같다.

1910년

  대동공보 주필, 청구신문 발행

1911년

  광복회 부회장으로 활동

1912년

  권업신문 주필로 국외 조선인 계몽활동

1913년

  동제사 활동 - 박은식, 조소앙, 정인보, 문일평 등과 민족주의 저술활동

1914년

  대종교 동창학교 교사 활동, 조선사 집필 착수, 광개토왕릉비 현지 답사

1915년

  신한혁명단 조직 후 무장독립운동 활동 시작(일본에 의해 실패)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도제사언문 집필(나철 추모)

1918년

  <조선사> 집필, 무오독립선언 33인에 참가

1919년

  3.1운동 국외 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원 활동, 신대한 주필 활동

1920년

  만주 독립군 단체를 통합한 군사통일촉진회 발기

  1910년대 신채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지었고, 독립운동과 계몽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적어나갔다. 특히 1915년에는 무장독립활동이 독립에 필요하다는 전제하여,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1차 무장독립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감시로 실패하였다.

일찍이 민족 영웅을 통한 애국심 고취에 관심이 많았던 신채호는 직접 광개토대왕릉비를 답사하여, 비석을 일본이 위조했다는 것을 밝혀내고, 그 비석이 가진 의미를 재발견하기도 하였다. 신채호의 노력으로 광개토대왕릉비를 위조한 일본의 만행을 논리적으로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링크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조작설(출처 : 조선상고사) http://historia.tistory.com/323

 

 

다음 장에서는 3.1운동이 신채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으며, 신채호의 사상이 3.1운동 전후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야기 해본 뒤,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생각한 3.1 운동과 독립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 신채호의 일대기를 정리한 뒤, 3-4편부터는 대표작인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신채호 사상을 정리해보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블로그에 적는 주관적인 글이기에 일부 다른 견해가 있어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p.s : 요즘 백범 김구선생의 기념관을 짓는 것, 김구선생을 모델로 한 10만원권을 발행하는 것 등이 전면 중지되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이고, 김구는 건국을 반대한 빨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홍경래, 전봉준은 내란을 일으킨 좌파 빨갱이이고, 안중근, 윤봉길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황당함과 짜증을 넘어 색다른 이론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그 분들에게 경의까지 표한다.

단, 근현대사 교과서는 만든 사람끼리만 읽어주세요.. 제발..

링크 : 그 분들이 수험을 출제한다면 이런 문제가???

 

역사 이야기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참조하세요 ...

조선상고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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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역사가 신채호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김남일 (창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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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그생애와 사상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임중빈 (명지사,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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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문화사(외)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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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역사사상 연구
카테고리 역사/풍속/신화
지은이 신일철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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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평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삼웅 (시대의창,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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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문집(사르비아문고 29)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신채호 (범우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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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거문도 사건과 중립화론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으로 청군이 우리나라에 진주하고 청과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당시 청의 외교고문이었던 뭴렌도르프와 러시아 외교고문으로 친러파를 양성하고 있었던 베베르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밀리에 러시아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하게된다.(1884)
  러시아는 우리나라와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함경도 경흥을 조차지로 요구하고 정부는 그것을 승락하게 된다. 이로써 러시아의 오랜 바람이었던 부동항의 확보는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항상 러시아를 늘 주시하고 있던 영국의 눈이 뒤집어졌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기에 이른다.(거문도 점령 사건, 1885 ~ 1888)
  이에 부들러와 유길준 등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여 중립화론을 내세웠으나 스위스와 같이 실행되지는 않았다.


대저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된다면 러시아를 방어하는 큰 기틀이 될 것이고 또한 아시아의 여러 대국들이 서로 보전하는 정략될 것이다. 오직 중립만이 우리나라를 지키는 방책인데 우리 스스로가 제창할 수도 없으니 중국에 청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다. 중국이 맹주가 되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같은 아시아에 관계 있는 여러 나라들과 화합하고 우리나라를 참석시켜 같이 중립 조약을 체결토록 해야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이익도 될 것이고 여러 나라가 서로 보전하는 계책도 될 것이니 무엇이 괴로워서 하지 않겠는가.

ㅡ 유길준, 「중립화론」

 


11.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 을미 개혁

 악명높고 출제가 두드러지는 곳이다. 순서, 주체, 개혁 내용들을 반드시 숙지하도록 하자.
 

  1) 동학
 
동학은 1860년 서학에 반발하여 최제우가 유불도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민간 신앙과 통합하면서 생겨나게된 종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학(西學)에 반대하였다하여 그 이름도 동학(東學)이라 하였다.
  사해 평등주의와 '사람은 곧 한울'이라는 구호 아래 남녀노소의 평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적 입장을 가진 보수세력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상과 백성을 혼란캐(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였으므로, 1863년 최제우는 처형당했고, 동학교도들은 탄압받았다.
  하지만 평민들에게 있어서 동학이 내세운 평등 사상은 무척이나 달콤한 것이었기에 몰래몰래 믿어나가다 정부의 탄압이 많이 줄어들었을 무렵, 전에 처형당한 교주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집회를 벌였다.(삼례 집회, 교조신원운동, 1892) 이는 종교적인 집회라 하겠다.
  이듬해 동학교도 이외에도 많은 농민들이 참여한 보은 집회에선 '보국 안민(保國安民, 나라를 구하고 민중을 편한캐 함)', '제폭 구민(除暴求民, 폭정을 없애고, 민중을 구함)' 등의 구호를 내걸며 지극히 사회 개혁적, 정치적인 집회로 바뀌어 나갔다.

 2) 1차 동학 농민 운동(1894)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황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ㅡ 전봉준의 격문
 

1894년 1월,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이라고도 불리우는 동학농민운동은 그렇게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당하고 가혹한 수탈(만세보 등)에 항거하여 전봉준 등이 항거하여 처단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 사건의 해결을 위해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는 이러한 농민들의 항거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전몽준 등에게 돌리자 분노한 동학 교도와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1894년 3월 남접의 강경한 동학교도(비교적 남쪽이라는 것이다. 호남 등의)들이 운동을 일으켰다. 1월 고부 민란의 정봉준 등의 지도부를 온건히 계승하여 반봉건적인 성격을 띄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한양을 향하지 않고, 세력확장을 위해 남하했다가 다시 북상하여 황토현, 완산을 거쳐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동학교도들이 전주 이씨 종가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자, 당황한 정부는(당시 왕들이 전주 이씨였으므로) 청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5월 5일, 어린이날이 없던 그들은 출병하게 된다. 그에 따라 1884년 갑신 정변 이후 일본은 청과 맺은 텐진조약을 근거로 남자어린이의 날, 코이노보리 등에 두발 뻗고 잘만 놀고 있던 일본군은 청군이 출발한 다음날인 5월 6일에 출정하게 된다. 청과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자, 정봉준 자신이 구상한 시나리오와 크게 빗나가자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하고, 폐정 개혁안을 발표하여 그에 따라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치를 실시하게 된다.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富豪)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 갓은 없앤다.

 7. 청상 과부의 개가(改家)를 허용한다

 => 5, 6, 7 반봉건적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 수취제도 문란

 9. 관리 채용에는 지벌(地閥 ; 지연)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倭)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 반일적 성격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分作)한다.

 => 토지 제도 개혁 요구

ㅡ 폐정 개혁안 12조

3) 갑오 개혁, 2차 동학 농민 운동(1894) 을미 개혁(1895)
  그렇게 1차 동학 농민 운동은 막을 내리고 정부는 정치적인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자체적으로 교정청을 설치한다. 하지만 일본이 경복궁을 둘러싸고 교정청을 폐지할 것을 협박하였다. (일본 경복궁 포위)
  동학 농민 운동이 자체적으로 끝이 나고, 조선정부의 요청을 무시하고 청, 일 양군은 군대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으며, 결국 전쟁이 나기에 이른다. (1894. 6. 23. 청일전쟁)
  이윽고 일본은 교정청을 폐지시키고 군국기무처를 설치시켜 개혁을 단행하도록 한다. (1894. 6. 25. 1차 김홍집 내각, 1차 갑오개혁)
  하지만 당시 일본은 청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개혁에 대한 간섭도 적어 주체적인 개혁이 가능했다. 그러하여 10년 전의 갑신정변의 내용이나 동학교도들의 요구가 대다수 반영된 개혁이기도 했다.


 1. 이후 국내외 공사(公私)문서에 개국 기원( = 단기)를 사용한다.

  => 청의 종주권 부정

 2. 문벌과 양반, 상민 등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뽑아 쓴다.

  => 신분제 폐지, 동학 농민군의 요구 반영

 4. 죄인 자신 이외의 일체의 연좌율(連座律)을 폐지한다.

 6.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하의 조혼을 금지한다.

 7.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자유에 맡긴다.

  => 동학 농민군의 요구반영

 8.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인신 매매를 금지한다.

  => 동학 농민군의 요구반영

 => 1.2.4.6.7.8 봉건적 악습철폐

18, 퇴직 관리의 상업 활동은 자유 의사에 맡긴다.

20. 각 도의 각종 세금은 화폐로 내게 한다.


ㅡ 1차 갑오개혁의 개혁 법령


  나름대로의 개혁은 성사되었지만, 한반도는 남의 나라(청, 일)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이에 동학교와 농민들은 다시 한번 반외세의 깃발하에 모두 모여(남+북접) 운동을 일으켰다.(척왜양창이)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힘을 잃고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만다.

  같은 11월, 갑신 정변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던 박영효가 일본을 빽으로 삼아 돌아왔다. 김홍집 - 박영효의 온건 - 급진 연립 내각(2차 김홍집 내각)이 구성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박영효가 2차 갑오 개혁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의 입김이 어느정도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튼, 2차 갑오개혁에서는 헌법적 법률인 홍범 14조와 독립서고문, 교육입국조서(2005 수능) 등을 발표하였다.


 

 1. 청국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확실히 자주 독립하는 기초를 확고히 세울 것

  => 청의 종주권 부정.

 2. 왕실 전범을 제정하여 왕위의 계승과 종실, 외척의 구별을 밝힐 것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모름지기 나누어 서로 혼합하지 아니할 것

  => 왕권 약화, 내각 중심(입헌 군주제가 아니다.)

 5.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 권한을 명확히 제정할 것

 6. 인민에 대한 조세 징수는 법령으로 정하여 명목을 덧붙여 함부로 거두지 말 것

 7. 조세의 부과와 징수,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이 관할할 것

10. 지방 관세를 빨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할 것 => 사법권 분리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하는 법을 사용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정할 것

 => 실질적으로는 시행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일본이 우리나라가 군제 개혁하는 것을 좋아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1895년 4월,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은 요동 반도와 대만을 할양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자(삼국 간섭) 12월, 일본은 청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러한 강한 모습을 보고 민씨정권을 비롯한 온건개화파는 청을 저버리고 친러파가 되었고 7월에 새로운 내각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친러적인 내각을 구성하였다.(3차 김홍집 내각) 이에, 일본은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친러파의 우두머리격이었던 명성황후를 낭인들을 통해 시해하고 친일 내각을 세우게 된다.(4차 김홍집 친일내각, 을미개혁 : 연호(건양) 제정, 친위대(서울), 진위대(지방) 설치, 태양력 사용, 단발령) 

 4) 동학 농민 운동(1894)의 의의와 한계
  동학 농민운동은 대내적으로 반봉건적인 성격을 띠어 사회체제에 항거하고 갑오 개혁 때 그 뜻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반외세적 성격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제시하지 못해 미완의 운동으로 끝맺은 안타까운 '운동'이기도 하다. 

 5) 갑오(1894) 을미(1895) 개혁에 대한 평가

  온건개화파 중심으로 정부의 주체적인 근대 개혁이라는 것과 앞서 갑신 정변의 급진개화파나 동학농민운동의 농민층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것 또한 권력을 가진 소수층의 위에서부터의 개혁이었고, 토지 개혁도 하지않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일본의 강요 속에 이루어졌다는 씁쓸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6) 개화 운동의 비교
  공통점 : 신분제 폐지, 인재의 고른 등용, 조세제도 개혁
  차이점 : 재정의 일원화, 반청적 경향(갑신정변, 갑오개혁) 
              토지제도 개혁, 반일적(동학 농민운동)


 7) 아관파천(1896)

  을미개혁엔 태양력과 특히 단발령이 포함되어 있는데, 고종을 필두로하여 머리를 잘리고 그 이하의 양반 유생, 평민을 비롯하여 남자들의 상투를 잘리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와 더불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 1896년 1월 을미의병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인 보초가 경복궁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자, 고종은 조선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독살에 대한 히스테릭으로 일절 가공품은 입에 가까이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오로지 허기를 달랬던 것은 서양에서 수입되어 들어오던 캔으로 포장된 연유 까먹는 것과 생 달걀을 직접 깨뜨려 먹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참한 생활을 하다 그는 결국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을 결정한다.(1896, 아관파천)
  갑작스럽게 러시아 공사관 창문을 통해 나타난 고종은 을미개혁(특히 단발령)의 무효를 선포하고 을미의병의 해산을 권고하자 의병들은 해산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으면서 몇몇 이권을 러시아 공사에게 넘기기도 하는데, 이에 관해 최혜국에 관련된 모든 국가가 이권을 빼앗아 가게 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인 침해를 입기도 하였다.


 8) 독립협회(1896 ~ 1898)

  1896년, 서재필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갑신 정변의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그 역시 급진 개화파에 속했다. 그는 갑오 개혁이 위로부터의 좁은 개혁임을 반성하고 독립협회(1896 ~ 1898)를 조직하여 민중을 계몽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유인권 및 기본권 보장을 주장하고 만민 공동회 등을 통해 민중들의 의식을 높이고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절영도 조차, 한러 은행 폐쇄 등의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그 대상은 러시아에 한정되었을 뿐, 미국, 일본 등에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역시나 급진 개화파 출신답게 입헌 군주제의 전신격인 중추원 관제(의회 기능정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뒤에 나올 광무개혁 이후, 황제제일을 주장하는 광무정권과 정치적인 마찰(경제, 사회적인 마찰은 없었다.)을 이루어 황국협회와의 패싸움을 구실로 해산하게 된다.


 9) 광무개혁(1897)

  드디어 1년의 고요 끝에 그가 돌아왔다.(이렇게 말하고 보니, 무슨 아이돌이 컴백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문무백관과 독립협회의 간청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고종이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곳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덕수궁'이라는 이름 자체도 일본의 잔재라고 한다.)으로 러시아 공사관의 바로 건너편이다.(언제든지 도망가기 쉽도록. 전에 경복궁 포위 때 호되게 고생한 고종이기에;;) 환궁한 고종은 원구단(* 참고 : 환구단이라고도 한다. '원구단'도 일본의 잔재라는데. 확실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황제로 즉위한 곳이니 '환구단'이 맞는 말인 것 같다.)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Tip  : 인기만화 「궁(宮)」의 영향으로 대한제국이 입헌군주제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대한제국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옛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동도서기와 비슷한 입장이다.)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황제의 전제적인 권한(정치적인 면)만 제외하면 모두 근대지향적인 (경제, 사회)개혁이었다 할 수 있다. 경제면에선 안정적인 조세를 걷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했고, 지계(地契 : 땅문서)를 발급하여 근대적인 토지 소유를 인정하였다. 근대적 공장과 회사 등도 이 개혁 때 생긴 것이다. 교통, 통신, 의료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앞서 언급한 교육입국조서와 같이 고종은 교육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각종 실업, 기술 학교를 세우고, 유학생도 파견하였다.
  갑오 을미 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한만 광무개혁이었지만 역시 황제의 유일한 권한만을 강조하였음으로 복고주의적이고 보수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가 가장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한 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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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I S T O R I A > 한국사 사전

통리기무아문의 조직표

통리기무아문의 조직표

통리기무아문은 강화도 조약 이후 밀려오는 외국 문물을 효율적으로 받아들고, 국제적인 행정기구를 마련하기 위해 온건파 개화지식인들과 민씨 정권이 추진한 정부개편안입니다. 이것은 청나라의 총리기무아문을 모방한 관제였습니다.

1880년 설치된 이 기구는 기존의 의정부-6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별도의 정 1품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것이죠. 이 기구는 군사권과 행정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초행정부적 기관으로 엄청난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권한이 강대해지면서 군국기무를 담당하는 부서(통리군국사무아문), 외교통상기무를 담당하는 부서(통리교섭통상아문)으로 분리하였습니다. 통리기무아문은 12개의 속사로 구성되었는데, 이 속사들을 이끄는 최고부서가 통리기무아문입니다. 초기 12개 부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대사 ; 중국과의 외교                          교린사 ; 일본 및 각국과의 외교

군무사 ; 경향의 군사 사무                      변정사 ; 국경 사무, 인근 국가의 동정 및 정탐

통상사 ; 외국과의 통상                          군물사 ; 병기 제조

기계사 ; 각종 기계 제조                         함선사 ; 각종 선박 제조

기연사 ; 연안 포구 왕래 선박 검사            어학사 ;각국 언어, 문학의 번역

전선사 ; 관리 선발과 관용품 조달             이용사 ; 재정 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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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구성

총리대신 : 이최응(영의정)

당상관 : 김홍집, 이재긍, 신정희, 정범조, 김보현, 민겸호, 김병덕, 조영하, 민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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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군국사무아문은 1884년 의정부에 통합되었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남아 있다가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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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임오군란이 조선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

1. 1882년이 나타내는 시대적 상징은 무엇인가?

이번 장에서는 임오군란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임오군란 하면 보통 <임오년에 일어난 구식 군대의 난>이라고 알고 있고, 또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시콜콜 다 아는 이야기, 교과서에 써 있는 이야기를 굳이 또 적을 필요가 있을까... 고민끝에 이번 포스트에서는 임오군란을 1882년이 가지는 상징성을 가지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오군란이 과연 군란인가? 이런 주제로요. 일단 지난 장까지 설명했던 <개화, 위정척사, 조선책략>이라는 부분을 복습해 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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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임오군란 때의 격전지 모습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의 조선은 국론이 분열되고, 국가 체제가 동요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1880년 조선 책략이 유입되고 민씨정권이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부터 <조선책략 거부운동>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죠. 외국과 통상을 하겠다는 개화파와 민씨정권에 대하여 기존의 성리학 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정권타도 운동>으로 발전시켜 가면서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거기에 세도정치이래 계속된 정치의 혼란은 백성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제시해주지 못하였죠. 백성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정치는 혼란하지, 세금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지, 부농과 소작농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지.... 1882년의 농민들은 산업혁명기의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농민들은 몰락하여 개화된 도시로 몰려가서 도시 빈민을 형성하였고, 도시에서는 소수 자본가 집단이 성장하려는 중이었습니다.

실제 1882년의 상황을 가지고 이후의 상황을 추론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네요. 동학운동은 변화하는 사회체제 속에서 농민들이 살 길을 찾았던 운동이고, 갑신정변은 소수 자본가 집단의 영향력을 밀어주면서 우리나라에서 부르조아지 근대화를 시도하려던 개혁이었습니다. 갑오개혁은 전근대적인 문제점들을 조금이나마 시정하면서 신분제, 조세제를 개혁혀였죠.

1882년에는 <조선책략>의 유입 이후, 개화, 척사라는 거대한 시대 흐름이 정면 충돌하는 한 해였습니다. 개화파들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맺고 조선책략의 내용대로 미국을 통상국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백성들과 보수파들은 그것을 환영하였을까요? 아니죠. 백성들은 일본과 서양 열강이 조선의 상권, 농업권에 침투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민씨세력의 개화정책에 회의를 느낀 보수파들과, 세도정치 이래 문란한 정치에 질린 민중들은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흥선대원군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야 말로,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일본세력 등 외세의 침투에 대항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한 것이죠.

2. 1882년... 민중들은 반란거리가 필요했다.

1882년의 상황은 홍경래의 난, 진주 농민 봉기 등의 농민 반란이 계속 일어나던 세도 정치 이후, 1863 - 1873년까지 농민봉기가 없었던 <농민운동의 침체기>입니다. 그 이유는 10년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강력한 리더쉽으로 농민들의 요구 사항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면서, 조세 제도를 일부 개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876년 민씨정권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민중들은 한없이 추락해가는 자신들의 지위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개화정책의 과도기적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의 몰락으로 도시 빈민이 한없이 늘어만 갔습니다. 즉, 임오군란 때 군인들의 봉기가 아니였어도 이미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몇몇 구식군대의 봉기인 임오군란이 조선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크게 번진 이유는 임오군란 직후 <도시 빈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연구가 더 이루어져서 역사가 다시 평가한다면 <임오 시민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민란적 성격을 가진 군인봉기>까지는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임오군란과 같은 시민봉기가 있지 않았다면,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농민들의 <동학농민전쟁>은 10년이 앞당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실제 1882년은 외세로 인하여 민중이 시련을 겪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정부의 세금 말고도 일본이 무역을 빙자하여 가져가는 쌀이 어마어마하였습니다. 조선 전역에서는 쌀값이 폭동하여 안그래도 힘든 빈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였죠. 임오군란의 원인이 구식군인들의 월급이 1년 6개월 이상 밀렸다는 것에서 보았을 때도, 이 당시 쌀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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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임오군란 당시의 빈민의 모습

3. 구식 군인들의 불만은 <개화와 일본에 대한> 불만이었다.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입니다. 실제 민씨정권은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식군대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대라기 보다는 <지배층을 위한 군대>라는 편이 더 어울렸습니다. 예로, 조선 후기 서인 특정 가문이 집권을 하면서부터 조선의 군대는 국가의 군대라기 보다는 <서인>의 군대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 전기 <5위>가 조선 후기 <5군영>으로 바뀌면서 부터였죠. 세도정치기에 특히 심했던 이 <지배층을 위한 군대 역할>이 흥선대원군기에 <국가를 위한 강력한 군대>로 재편되었지만, 민씨정권에서는 다시 <지배층을 위한 군대>로 전락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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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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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임오군란 당시 신식군대의 모습

흥선대원군 때 강력하게 재편한 <5군영>을 민씨정권은 <2영>으로 줄여버립니다. 그러고 남는 돈을 신식군대에 투자한 것이지요. 신식군대를 정말 확실한 <국가 군대>로 육성했다면 좋았겠지만, 신식군대의 주요 구성원은 양반집 자제들이었습니다. 대우는 무지 좋았고, 돈먹는 귀신들이었지만 전투력은 글쎄요.... 거기에 그들을 가르치는 신식 장교가 군사 선진국이었던 일본 장교라는 점은 구식군대와 국민들을 아주 열받게 만드는 일이었죠. 또 신식군대의 제복을 마련한다는 이유 등으로 구식군대에게 1년이상 월급을 안주었다는 점도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었씁니다. 결국,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의 불만은 헛돈쓰는 개화정책과 일본이 우리 내정과 군사권에 간섭하는 분위기가 싫다는 것이었죠.

4. 시민들이여, 일어나라!

1882년, 드디어 구식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신식군대에 비해 무기나 인력에서 부족한 구식군대의 폭동이 손쉽게 성공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하였습니다. 민씨정권도 구식군대를 우습게 보았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이 폭동에 도시 빈민들과 일반 백성들이 적극 참여하여 <시민 폭동>적인 성격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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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의 폭동 경로

도시 빈민들은 군인들과 합세하여, 민씨일족들의 집을 불태우고 정부고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일본 공사관으로 향합니다. 우리를 간섭하는 외세를 물리치자는 것이었죠. 그들은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지릅니다. 성난 군중들은 궁궐에 침입하여 왕비인 민씨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식군인들과 빈민들이 왕비의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지요. 민씨는 시녀 복장을 하고 궁밖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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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임오군란 당시 나가사키로 도망간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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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임오군란을 피해 도망다니던 중의 명성황후 일기가 최근 발견되었다.

이렇게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다시 정권을 넘기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시민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화정책을 다시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되돌리기 시작합니다. 2영체제를 다시 5군영으로 돌려 구식군대를 강력한 상비군으로 정비하고, 개화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였죠.

5. 민씨 정권의 반격으로 조선의 주도권은 <청>에게 넘어가다.

도망간 왕비 민씨는 다급함에 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청군은 국모인 민씨의 부름이라는 근거를 들어 당당히 서울로 쳐들어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민씨를 다시 궁궐로 돌려보냅니다. 임오군란은 결국 외세에 의해 실패하고, 시민들의 봉기는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외교적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청나라의 전면적인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면서 민씨를 도운 청나라는 아예 정치고문과 외교고문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우리 나라에 종주권을 행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다가 공룡을 불러온 셈이죠.(민씨정권은 위기때마다 일본, 청, 러시아 등 외세에 의존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개화기 근대사를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럼 청나라가 우리의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장하는 일본 때문이었습니다. 청은 일본이 조선에 간섭하는 것을 보면서 동아시아 전체에서 일본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청, 러시아 등 대륙 세력을 막고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해양 전체를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개척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에도 일본이 요구한 첫째 내용이 바로 <조선은 자주국가이다>라는 조약이었습니다. 조선이 자주국이어야 청 등이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청 역시 이러한 일본의 야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청이 임오군란 이후 우리 내정에 적극 간섭한 이유는 조선시대 이래 <형식적인 조공무역>을 통해 속국 관계로 생각하던 조선을 <실제적인 식민지>로 만듦으로서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청의 실권을 잡고 있던 사람은 그 유명한 <위안스카이>였습니다. 위안스카이의 목적은 조선에 친청 정권을 수립하여 <조선은 청의 꼭두각시이다>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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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따라서 청은 민씨정권의 개혁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하여, 통리교섭통상아문(외교부), 통리군국사무아문(행정부)를 신설합니다. 또 5군영도 청나라 식으로 개편하는데, 위안스카이의 직속군영인 <친군영>을 세우고, 그 밑에 4개의 군영을 두어 모든 조선의 군권을 위안스카이가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사고문인 마젠창, 외교고문인 뮐렌도르프를 파견하여 모든 정치 상황을 감시하였습니다.

6. 조청 상민 무역 장정을 체결하다.

1882년은 우리나라의 경제면에서도 획기적인 해입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우리 나라에서 자유로이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일본을 누르기 위해 <조청수륙 무역장정>을 발표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문(前文) :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황해도와 산동.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의주, 훈춘.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치명적인 무역약관이었습니다. 위에 파란 줄 보이시죠? 그것 때문입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조선에서 청상인이 자유롭게 거주하고, 여행하고, 영업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이제 <항구에서의 거류지 무역>뿐만 아니라, 내륙에서의 자유로운 무역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배웠던 <최혜국 대우>... 기억나시나요? 최혜국 대우란, 어느 한 나라에게 맺은 정치, 경제적 조약을 조약 당사자인 국가에게도 똑같이 적용한다는 불평등 조약의 내용을 말합니다. 이 청과 맺은 <내륙 무역 허가>는 최혜국 대우에 의해 일본, 미국, 영국 등등 다른 모든 국가에게도 적용됩니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이 때부터 파탄나기 시작하고, 우리 전통 중계무역상인으로 볼 수 있는 객주, 여각 등은 몰락하게 되죠.

또, 이 장정의 승인으로 일본도 조일수호조규 속약과 조일 통상장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 청과 일본은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그 결과는 1889년 방곡령과 1894년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로 인해 일본이 경제적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죠.

7. 일본도 얻을 것은 다 얻는다 - 제물포 조약의 체결

임오군란은 청의 전면적 간섭을 초래하였지만, 일본에 단숨에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은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들이 죽었다는 이유로 우리 정부에 강력한 손해 배상을 요구합니다. 또, 일본 공사관이 다시는 피해보지 않도록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킨다는 명목으로 우리 나라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이것이 제물포 조약입니다. 제물포 조약의 내용을 줄이면, 청에 의해 입지가 약해진 일본이 조선에 <군대 주둔>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해 나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조약은 결국 조선에서 청의 군대와 일본의 군대가 동시에 거주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훗날, 갑신정변 때 맺은 톄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군대는 <동시파병 공동철수>를 결의하게 되자만, 그 조약은 동학운동 때 청일전쟁을 야기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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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풍자화 - 제물포 조약 체결을 위한 일본의 진격

8. 급진개화파가 등장하다.

임오군란의 실패로 인해 청이 조선에 대한 전면적인 내정간섭을 하였습니다. 이 것은 민씨정권이 스스로 개화를 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개화파들의 입지는 약해졌고, 반대로 <일본의 힘을 빌려서라도 청을 타도해야 한다>는 급진개화파의 이론이 힘을 얻게 됩니다. 특히, 급진개화파는 청의 경제 구문인 묄렌도르프와 대립하면서 청의 보수적 정책에 반발하였고, 고종을 사이에 두고 친청세력과 급진개화세력이 대립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갑신정변에서 다루도록 하죠.

오늘은 임오군란과 그 결과에 대하여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하루종일 일하고, 밤에 술을 먹고... 새벽에 글을 쓰려니깐 글이 횡설수설이네요. 내일은 말짱한 정신으로 아자아자....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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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임오군란에 대한 풍자화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 자세한 내용은 이 책에.....

찬란한 여명 4:임오군란 상세보기
신봉승 지음 | 갑인출판사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상세보기
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하여 19세기 세계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이 한국사와 세계사의 충돌에서 나오는 격동적인 사건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런 대응 태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에서 살아가는 데에 치유할 것이 있는지 해부한다.
한국 근현대사(숨마쿰라우데) 상세보기
박준규 지음 | 이룸이앤비 펴냄
최상위권을 지향하는 수험생들을 위한 숨마쿰라우데 시리즈 『한국 근ㆍ현대사』. 숨마쿰라우데의 본문은 전체의 난이도에 따라 2중 체제(CUM LAUDE 단계와 SUMMA CUM LAUDE 단계)로 구성하였다. 즉, 교과 학습 내용에 대한 본문 설명 2단계와 해당 단원의 문제 부분 2단계로 짜여져 있어 심화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학습 개념을 확실히 잡으면 내신, 수능, 심층 면접 등 어떤 시험도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상세보기
김인기외 지음 | 두리미디어 펴냄
교과서에서 소홀히 해 왔던 한국 근현대사의 논쟁점을 다양하게 소개하는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외세 침략의 시발점이 된 강화도조약의 배경에서부터 현 참여정부의 탄핵 정국까지, 청소년들이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질곡의 우리 근현대사를 올바르게 조명하고 현재와 미래에 대해 발전적이고 건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최근의 논쟁점들까지 투명하게 정리하였다. 이 책은 근현대 역사 교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상세보기
김육훈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미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청소년을 위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오랜 세월의 분투를 통해 달성한,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모두의 현재임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실현한 민주주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란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대안적인 특징점을 바탕으로 21세기 근현대사 인식과 역사교육, 그리고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역사책방 5) 상세보기
역사학연구소 지음 | 서해문집 펴냄
이 책은 역사 사실을 바탕으로 서술하되 새로운 연구성과를 받아들이고 이를 종합 정리했다. 근현대사를 통사로 서술하는 한편 각 장은 각 시기의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서술했으며, 사진과 자료를 직접 수록해 객관성을 높였다. 또 각 강의 끝부분에 기존의 중요 연구 성과와 최근의 성과를 실어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상세보기
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하여 19세기 세계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이 한국사와 세계사의 충돌에서 나오는 격동적인 사건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런 대응 태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에서 살아가는 데에 치유할 것이 있는지 해부한다.
중국 역사 이야기 14(청나라) 상세보기
박덕규 지음 | 일송북 펴냄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중국 역사 이야기> 제14권. 중국의 전체 역사를 시대별, 왕조별로 나누어 그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중국 역사에 쉽게 접근하고 싶어하는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 책은 주왕조시대부터 청나라까지 약 3천년에 이르는 중국 역사 대부분의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 상세보기
김태웅 지음 | 펴냄
대원군 정권의 성립부터 3.1운동 직전인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까지를 다루었다. 내용 역시 이런 범위에서 외세의 침략과 수탈,사회경제 변화및 근대 개혁 운동의 전개등을 집중서술하였다. 특히 반봉건, 반침략을 둘러싸고 처지와 이념에 따라 상이한 방략을 제시하는 여러 계열의 노선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개설서와는 달리 생생한 자료의 정확한 전달과 충실한 해설에 비중을 두고 개별 항목단위로 구성한 나머지 한국 근
한국사특강 상세보기
한영우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
대학의 교양 한국사 교재. 크게 2개 부로 나눠 제1부에서는 한국사의 각 시대별 특징을 14주제로 압축하여 정리하고, 2부에서는 문화사와 사회경제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10개의 주제를 따로 설정하여 분류사 형식으로 서술했다.
한국사신론(한글판) 상세보기
이기백 지음 | 일조각 펴냄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구체적 사실들의 시대적ㆍ사회적 연결관계를 찾아 이를 체계화한 한국 역사서.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원시공동체의 사회,성읍국가와 연맹왕국,문벌귀족의 사회, 민족국가의 태동과제국주의의 침략, 민주주의의 성장 등 17개 장으로 구성하였다.
이현세의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세트 (전10권) 상세보기
유경원 지음 | 녹색지팡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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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 (개정판) 상세보기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2 20세기를 넘어 새로운미래로> 20세기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 보고 21세기 새로운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가꿀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본문으로 들어가는 창에는 단원마다 역사 사진에 청소년 캐릭터를 넣어 역사 체험을 좀더 재미있고 생생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성과 역사에서는 세상의 절반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들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고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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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일본사 이야기 22> 일본의 근대화 1 - 에도막부의 중농주의와 계급분화

1. 에도막부가 흔들리기 시작하다.

오늘부터는 일본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본 근대사하면 생각나는 것은? 당연히 <메이지 유신>이겠죠? 그럼, 오늘부터는 <메이지 유신>을 키워드로 삼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배경과 내용,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일본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아야겠네요. 그럼 한번 출발해 봅시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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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장까지 에도 막부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그런데, 에도 막부를 다룰 때 아주 중요한 키워드를 <막부의 경제정책>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일본과 동아시아의 17-18세기는 <상품화폐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중국과 조선, 일본에서는 새로운 농법이 계속 개발되면서 상업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죠. 당시 동아시아 각 국가에는 부유한 농민, 부유한 상인, 상품경제 발달과 화폐유통의 증가라는 수식어가 공통적으로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3국은 전통적으로 농업경제를 우선시하였고, 당시 3국은 공통적으로 <성리학이 관학화>된 사회였습니다. 성리학에서는 농업을 제 1의 근본산업으로, 상업은 농업을 보조하는 보조산업으로 인식하였죠. 성리학에서는 토지를 바탕으로 한 신분제도와 차별적인 윤리의식을 강조했으니까요.

일본 역시 그랬습니다.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으로 서양과의 교역을 막는 입장이었고, 성장하는 상업자본은 농촌 자본으로 돌리던가, 막부의 재정으로 돌리려는 극단적인 방책을 사용하여 <사회제도와 신분제도>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시대의 흐름이었습니다. 막부는 이 상품 화폐 경제로 인한 이득을 <세금>으로 환원하는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상업자본은 성장하면서도, 그 이윤의 전부를 재투자할 수 없었고, 자본이 없으면서 세금이 늘어난 하층 무사들은 빈곤함으로 힘겨워하였습니다.

일본은 18세기가 지나가면서 사회분화가 심해져갑니다. 부자농민들(호농, 부농)은 상품작물을 재배하면서 막부가 원하는 세금을 낼 수 있었고, 남은 자본으로 수공업에 뛰어들어 대기업을 이루게 됩니다. 상업자본으로 성장한 부유상인들은 전국적인 상업망을 이용하여 장시를 활성화하였고, 도시 중심의 상업문화(죠닌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자본이 없는 자들은 한없이 추락하게 됩니다. 막부가 원하는 세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거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조선의 18세기 몰락한 양반들이 상민들에게 천대받는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의 몰락한 무사들은 부유한 상민보다 못한 처지가 됩니다. 하층 무사들과 가난한 농민들은 점차 에도 막부에 질리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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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부에 대한 불만 세력이 늘어날수록 막부는 더욱 더 많은 세금을 걷어내면서 막부를 유지해나가는 상책도, 중책도 아닌 최하책으로 국가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막부의 세금은 토지에 집중되었습니다. 18세기 당시 청, 조선, 일본은 모두 세금을 <토지>로 집중시켜가고 있었습니다. 청은 <일조편법과 지정은제>, 조선의 <도결제와 삼정의 문란> 등은 세금을 가장 걷기 편한 <토지>에 때려 버린 제도였죠.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세금은 영지세(연공)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세금이 증가할수록 시중의 물가는 뛰었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펐죠. 물가가 오르면 새로 성장하는 도시상인이나, 부유한 농민들은 시세차를 이용해 더욱 재산을 불렸고, 능력없는 하층민들은 더욱 빈곤해집니다.

더 문제점은, 그나마 성장하는 새로운 농민, 상인들마저 국가가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에게 세금만을 걷어 막부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지 이들을 이용하여 <근대화된 일본>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막부에게는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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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인가, <죠닌 문화>인가의 논쟁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 논쟁은 각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가 자생적이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강요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 중국에서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인해서 근대화가 되었는가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아편전쟁이 중국의 근대화라면 중국의 근현대사는 유럽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은 명, 청대의 사회경제적 발전에서 근대화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조선에서 근대화의 시작은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학자들간에는 치열한 논쟁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흥선대원군기에 이미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어떤 학자들은 실학자들로부터 근대화의 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실제 근대화의 법령이 반포된 갑오개혁기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개화파의 등장이나 갑신정변이 근대화의 계기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개혁군주인 정조 때부터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중요한 것은, 근대화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조건이 무엇인가라는 점입니다. 근대화라는 것은 최소한 3가지를 인식할 수 있는 시기를 말합니다. 일단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도입된 시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사상>이 도입된 시기를 근대화의 기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두 사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근대화라고 부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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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근대화 논쟁은 크게 두 시기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입니다. 두 시기란, 에도 막부 후기와 메이지 유신기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에서 찾곤 합니다.(일본 교과서 견해)

일본이 서구 열강들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상을 직접 받아들여 실천한 시기가 메이지 유신기였고, 그것을 법으로 반포한 것도 메이지 유신기입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전통적 가치관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잘못된 관습을 타파하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본 근대화의 공신은 메이지 유신기의 뛰어난 <몇몇 인물>들의 업적에서 찾곤 합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것은 1854년 미일화친 조약으로 <미국과 정식 수교>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므로, 1854년이 일본 근대화의 기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이죠.

그러나,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에도막부기 지본주의>를 내세우면서 일본 근대화의 흐름을 설명합니다.

이 논리는, 일본의 근대화가 하나의 흐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조선에서도 정조 때부터 이어진 연암 박지원 - 박제가 - 박규수- 김옥균(갑신정변) - 갑오개혁기 개화파 등의 인맥을 따라가면, 근대화의 인맥적, 사상적 발원지를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죠?

일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기에 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민주주의적 정신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18세기 상품 화폐 발달과 상인층이 성장하면서 <죠닌 문화>를 이끌어간 중신층들이 그들이라는 것이지요.

이들은 동업조합과 도시문화를 이끌어 가면서 학교를 세웠고, 사상과 인맥을 계속 유지해 나갔습니다. 대상인들은 서구식 독점 자본주의와 비슷한 상행위를 하였고, 미쓰이 등 재벌이라는 구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쇄국정책 속에서도 네덜란드 등과 교류하여 학문(난학)을 유입하였고, 이 학문을 일본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의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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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메이지 유신을 근대화로 보는 이들은 이 주장의 문제점을 몇가지 지적합니다.

첫째, 상인들이 돈을 벌었지만 에도막부는 과도한 세금을 걷어가 상업자본이 균등하게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점.

둘째, 당시 상인들이나 부유한 농민에게 법적으로 사유재산권이 인정된 적도 없고, 그 권리를 유지할 방안도 없었다는 점.(막부가 무력으로 재산을 강탈하면 빼앗기는 시대에 자본주의라 말하기 어렵다는 거죠...)

셋째, 에도 막부의 국가 정책이 상업을 억압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성리학 이념의 중농주의였다는 점 등입니다.

어떤 관점이 맞는 지는 일본 학자들이 알아서 싸우고 결론내리겠죠. 그럼 다음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보죠. 다음 장의 이야기는 일본의 <통상조약 체결 과정>과 <막부타도운동의 전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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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20) 독립협회 이야기 - 본문

 

1. 1896년 : 독립협회를 발족하고, 독립신문을 만들다.



지난장에서 독립협회가 발족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요인을 아관파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은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고 이후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열강들이 우리의 이권을 침탈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망국의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고, 우리가 독립국가임을 천명하는 수단으로 독립협회를 발족한 것입니다.

보통 독립협회하면, 전국민이 참여한 거국적인 민족운동단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생긴 것은 사실 국가 존망의 위기감을 느낀 정부 기득권 세력과 개혁세력들로부터입니다.

독립협회의 초기 맵버는 서재필 등을 비롯한 구미파 세력(친미적 세력, 정동구락부 세력)이 있었고, 또 갑오개혁과 개화파의 맥을 잇는 세력들도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정부 고위관리들도 참여하여 정부 방침이 독립협회에 녹아있었습니다.

독립협회를 1896년 처음 발족한 것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이후, <조선이 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설하면서부터입니다. 청나라의 사신이 머무는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으로서 조선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초기 독립협회는 독립공원을 조성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핸 <계몽홍보 단체>였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공익광고 협의회라고 할까요?

따라서 독립협회의 구성원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들이거나, 머릿속에 뭔가가 있는 국가공인 유학파들이었습니다. 독립협회 회장에 국가원로인 안경수, 위원장은 당시 친러파의 거두였던 이완용(이 때는 친일파가 아닌 친러파였죠...), 고문은 미국국적을 가진 서재필 박사였습니다.

이렇게 정부 인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여, 국가의 자주성을 홍보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국민을 단합시키는 것이 독립협회 초기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TV같은 것이 없었죠. 따라서 홍보에 적절한 매체로 신문을 이용하게 되었고, 그 신문은 백성 누구나 알 수 있게 쉬운 글자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 신문이 바로 한글로 이루어진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독립신문이 순한글 신문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하나 더 추가 해야 합니다. 순한글 신문이자, 한글, 영문 2개판으로 나온 신문이라는 점이죠. 조선의 자주성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 알려야 할 사항이었기 때문에 독립신문은 <별도의 영문판>으로도 제작되었습니다.

2. 1897년 : 고종이 돌아오면서 마찰이 시작되다.

독립협회가 1896년 7월 2일 발족했을 때 독립협회는 단순한 <홍보기관, 사교단체, 정부어용기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것은, 열강의 이권침탈 실태를 알린다는 정도였죠. 독립협회의 모임은 정부 주도의 소모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1897년이 고종이 환궁하였습니다. 1897년 10월 독립협회의 주장과 맞물려 러시아 공사관에서 다시 환궁한 고종은, 강력한 자주권을 가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국제를 반포하였습니다.

강력한 나라의 성립은 독립협회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자주성에 대한 성격을 놓고 고종과 독립협회의 입장이 조금 달랐습니다. 고종의 <대한제국 수립과 광무개혁>은 황제권의 절대화를 통한 왕권강화와 국력강화였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 인사중 미국의 공화정 및 일본의 입헌군주정을 경험한 친미, 친일파 출신들은 강력한 왕권이 근대화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를 통하여 법치국가를 만들고, 내각제나 의회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1897년 독립협회는 초기의 독립협회와는 성격이 달라집니다. 독립협회의 위원장인 이완용 등의 친러파들은 탈퇴하고, 서재필 등 친미파, 박영효 등 친일파 세력들이 독립협회를 주도하게 됩니다. 이들은 러시아 고문인 알렉시에프 주도의 정권과는 거리가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의 정치를 주도하는 러시아 고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친러파인 이완용 등의 세력보다 비교적 민중적이었습니다. 독립신문을 적극활용하여 백성들을 계몽하고, 우매한 이들을 깨우치는 데 주력하였죠.

그러나, 독립협회는 백성들을 진정한 개혁주체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미국 유학파인 서재필조차 <백성들은 무식하여 알리고 가르쳐 계도해야 할 존재들>로 인식하였죠. 따라서 신분제가 이미 혁파된 조선사회였음에도, 백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의 대화보다는 일단 가르쳐야할 대상들로 파악하였습니다.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인사들은 <프랑스 혁명의 부르조아같은 유산시민 지식인>을 육성하여, 법치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고종과 독립협회는 처음부터 마찰의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3. 1898년 : 만민공동회가 열리며 본격적인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인사 중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왕(고종황제)과는 달리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백성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민권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독립신문은 금연광고같은 <계몽홍보신문>을 넘어서서 <정치적 비판과 정치적 이념 주장>을 펼치는 장이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고종이 환궁했음에도, 계속 우리 내정을 간섭하는 러시아의 알렉시에프 등을 비난하고, 외국세력이 우리 이권을 침탈하는 것에 대하여 크게 반발합니다.

이 시기의 운동은 민중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으로서 <자유민권운동>을 통하여 백성들과 하나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친미적, 친일적 성향을 가진 서재필, 박영효 등의 외국물을 드신 세력들이었습니다.

4. 만민공동회의 활동 - 1, 자유민권운동

그럼 자유민권운동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자유민권이란, 서양 용어로 <천부인권>을 말합니다. 서양의 천부인권이란, 프랑스 혁명과 영국혁명 등에서 비롯된 <인간의 기본권 보호 사상>을 말합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였듯이,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으로 신분제 등의 구제도를 타파하였습니다. 따라서 서구처럼 <천부인권>이 조선사회에 널리 퍼져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이 천부인권을 홍보하는 수단이 바로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신문으로 모자라면 강연회, 토론회 등을 쭈욱~ 열어 자신들의 이상을 백성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백성속으로 들어가 어떤 백성이든 같이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백분토론 같은 이상적 장이 바로 <만민공동회>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만민, 즉 모든 백성의 이야기장인 것이지요. 이 곳에서는 백정조차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서양의 천부인권에는 생존권, 재산권, 신체의 자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포함됩니다. 미국물을 먹은 서재필 박사가 이러한 권리들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러한 자유를 모두 모아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민주권>이 됩니다. 따라서 만민공동회에서 주장한 자유민권운동이란 <국민평등, 국민주권>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국민평등권,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자신의 소신대로 투표할 수 있는 <국민참정권>이 필요합니다.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은 서구식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대의제도에 따른 국회의원 선출>이죠.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의 최종 결론은 <의회설립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의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법에 따라 정치를 한다는 법치주의와 연결됩니다.

이것은 고종황제가 국가의 자주권 확보를 위해 <황제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한다>는 대한제국의 이념과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은 고종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이었죠.

자유민권운동의 결과, 서재필은 중추원을 관선국회의원, 민선국회의원으로 내각기관으로 재편합니다. 중추원은 고려시대 재추가 모이는 최고 국가 기관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갑오개혁 때 자문기관으로 유명무실해진 기관입니다. 중추원이 재신과 추신의 합좌기관으로 고려 이래 최고 기관이었던 만큼, 민선, 관선 의원들의 협의기관으로 딱이었죠.

독립협회가 주도한 토론회의 내용

97. 8. 29 : 조선의 급선무인 인민 교육을 실시한다.
   97. 9. 26  : 부녀자들을 위한 교육도 해야 한다.
   97. 10. 17 : 인민 교육을 위해서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
   97. 12. 19 : 신문을 만들어 인민의 견문을 넓혀야 한다.
   98. 1. 2 : 관민이 같이 애국해야 한다.
   98. 1. 23 :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 광산을 확장해야 한다.
   98. 2. 6 : 수구파 탐관오리들을 몰아내야 한다.
   98. 3. 6 : 우리 국토를 남에게 나누어 주지 말자.
   98. 5. 8 : 백성의 권리가 튼튼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출처 : 누드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이투스, p113)

5. 만민공동회의 활동 - 2. 자주국권운동

만민공동회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고종의 <광무개혁>과 그 본질은 통합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에서 보듯이 그 실현방법에서는 너무나 극과 극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한 만민공동회의 노력을 한번 볼까요?

민민공동회의 기본 이념은 <자유민권운동>을 비롯하여 <자주국권운동, 자강혁신운동>이라 칭해지는 활동들이었습니다.

자주국권운동은 외세를 벗어나 국가의 자주권을 확립하는 운동을 말합니다. 만민공동회 이전부터 계속 진행되온 모든 운동을 포함하죠.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에서의 복귀 운동, 열강의 이권탈취 반대운동,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발행 등의 모든 부국강병 운동을 말합니다. 자주국권운동의 구체적인 예를 몇가지 볼까요?

1.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함
   2. 러시아 군사 교련단과 재정 고문단을 철수시킴
   3. 일본의 석탄고 기지를 반환하게 하였음
   4. 프랑스, 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저지하고, 영국의 해양 침투를 막음
   5. 미국의 무한정 광산 채굴을 일부 막고, 러시아의 은광 진출을 방어함
   6. 러시아의 목포, 증남포 해역에서 토지를 매도하는 것을 막음
   7. 외국 열강, 특히 러시아에게 이권을 넘기는 이완용을 영구 제명함
   8. 일본의 철도 부설권 확득 의도와 청의 산림 탈취 의도를 사전에 홍보하고 막으려 함

이러한 자주국권운동은 독립신문에 홍보하는 동시에 만민공동회에서 계속적인 토론과 강연을 함으로서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의 고종환궁요구와 일본과 러시아의 내정간섭에 제동을 건 것도 독립협회의 업적이었죠.

그러나, 외세의 압력을 막는 <자주국권운동>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민권을 얻고 자주국가가 되기에 부족했습니다. 외세의 압력을 막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가 서구 열강과 같이 발전해야 다시는 그들이 우리를 넘볼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6. 만민공동회의 활동 - 3. 자강혁신운동

만민공동회가 생각한 이상적인 국가발전과 자강혁신은 <자주독립을 위한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부자로 만들고, 강한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법치주의에 입각한 의회제 설립과 내정개혁>이었습니다.

이 내정 개혁은 국가 체제 자체를 서구식 의회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 행정, 교육, 경제, 국방,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 서양체제를 도입하여 국가의 체질 개선을 한 후, 부르조아 계급을 육성하여 국가 지배층을 단단하게 한다는 것이죠.

실제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면서 <천부인권>을 강조하였지만, 천부인권이 곧 <모든 백성의 지배층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보았듯, 혁명의 이념은 <천부인권>이지만, 혁명의 주체이자 새로운 사회세력은 <유산계급인 부르조아 계급>였습니다.

당시 진보적이었던 독립협회에서도, 국가발전의 이상적인 방향은 <서구식 사회진화론>이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이 사회진화론은 원래 스펜서가 주장한 것으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그대로 역사에 도입한 것입니다.

진화론의 입장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적자생존과 우성이 열성을 지배하는 원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강한 동물은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약한 동물은 강한 동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진화합니다. 강한 동물은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좀더 진화하고, 진화하지 못한 동물은 도태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집니다. 가장 극대화된 진화체가 바로 인간이었고,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여 자연을 지배하였습니다.

사회진화론은 진화론을 사회에 도입한 것입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사회적인 원리이자, 본능입니다. 따라서 서구의 강한 나라들은 약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크리스트교 문명을 전파함으로서 약한 나라가 도태되지 않고 발전하도록 돕고 있다는 원리가 됩니다. 이 원리에 의해 강한 나라가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정당화되면서 영국, 프랑스 등이 식민지를 늘리는 <제국주의 이론>이 정당화됩니다.

그런데 독립협회는 이 사회진화론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독립협회 뿐 아니라, 초기 민족주의 역사학자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도 이 사회진화론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위기는 조선이 약하기 때문이며, 먹히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호랑이나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독립협회의 지식인들

한국이 생존하기에 적합치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장차 내가 해야 할 일은 나의 최선을 다하여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한국이 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윤치호 일기 -

따라서 조선의 민중운동가들은 제국주의 세력에 즉적적으로 저항하고, 그들을 적으로 돌리지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도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들의 문명을 좀더 빨리 받아들여 근대화하려는 <서구화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구화는 곧 <프랑스 혁명>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근대주의의 산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근대주의란, <지주, 자산가> 등 유산혁명계급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일반 백성들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에 계몽해야 할 사람들>로 여기게 됩니다.

독립협회가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대중적인 것임에도, 실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지식인층이었고, 광범한 백성들의 실질적 참여는 없었습니다. 토론회와 강연회에 참여하는 것에서 백성들의 역할은 끝난 것으로 본 것이죠.

갑신정변, 독립협회 등 부르조아적 운동의 공통적인 성향은 일반 국민들이 참여하여 제국주의와 직접 투쟁하는 <의병운동>을 아직 힘도 없는 어린 애가 생각없이 어른한테 덤비는 무모한 운동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의병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화나게 할 뿐, 자강혁신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독립협회는 지주와 자산가들이 개화하여 발전한 서양제도를 본받는 것을 표방하였고, 이후 이러한 움직임을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논리를 받아들인 교과서의 입장입니다. 의병운동은 그냥 <의병활동>이라고 하면서, 서양을 본받자는 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해서 <애국>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입니다. 나라를 위해 피흘리고 죽은 사람들은 그냥 <의병>이고, 지주계급을 지배층으로 만들어 국가를 강하게 하려는 운동은 <애국>이 들어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 논리를 학자들과 교과서에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직도 서구식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독립신문 - 의병들의 활동을 부정하는 글

조선 백성은 언제든지 원통한 일을 당하여 마음에 둔 미흡한 일이 있으면 기껏 한다는 것이 반란을 일으킨다든지 다른 무뢰지배의 일을 행하여 동학당과 의병의 행세를 하니 본래 일어난 까닭은 권의 불법한 일을 분히 여겨 일어나사 고을 안에 불법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주의인데 불법한 일을 저희들이 행하니 그건 곧 도가 아니다. 도가 없으면 난민인즉, 난민은 법률상에 큰 죄이며 나라에 점점 못할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남을 시비하겠으면 나는 법률을 더 밝혀 지키고 행실을 더 높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전개된 자강혁신운동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법치주의>를 표방하였고,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국방력 강화>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산업개발을 통해 민간자본을 육성하고, 그 자본을 바탕으로 부국을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단, 독립협회가 이전 갑신정변과 다른 점은 <우민관>은 탈피했다는 점입니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은 백성들은 <무지한 존재>들로 생각하여 독단적인 정변을 일으키고 백성들의 반응에 신경쓰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신경쓸 시간도 없었지요. 3일천하였으니.... 그러나, 독립협회는 도시상인, 농민, 노동자로부터 심지어 백정에 이르기 까지 모든 백성들을 계몽하고, 독립협회의 이념을 알리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인식이며, 갑오개혁 이후 전 백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럼 자강 개혁운동의 몇가지 사례만 들어볼까요?

1.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군제를 개편하고, 전 국민을 위한 교육제도를 개혁하며 그것을 위한 재원을 마련한다.
   2. 법치주의를 위해 의회설립운동을 전개하고, 황제에게 탄원서를 제출한다.
   3. 민간자본 육성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서구식 산업제도를 도입한다.
   4. 보수파 내각을 퇴진 시켜 개혁파 내각을 만들고, (이후) 헌의 6조를 채택한다.
   5. 관선과 민선 인원이 동등하게 구성된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여 국가 개혁을 추진한다.

7. 98년 3월 만민공동회 vs 10월 관민공동회의 차이점

지금까지 이야기한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는 박영효, 서재필 등 주도세력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것입니다. 이러한 법치주의적인 입장은 고종황제의 전제 왕권 강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 안에서는 이러한 법치주의 입장과 다른 시각도 있었습니다. 한번 볼까요?

박영효, 서재필 등의 법치주의파들은 개화파로 치면 급진개화파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개화를 위해 러시아 고문인 알렉시에프 등이 당장 물러가야 하며, 친러파 관리들은 정치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또, 국왕도 법을 지켜야 하고, 정치는 내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는 것이 이상적인 근대 국가로 인식한 것이죠.

고종은 열받았습니다. 1898년 2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독립협회의 고문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조치 하였고, 박영효 등의 세력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서재필, 박영효 등은 3월 황제의 명을 반박하고 전국적인 상소운동을 전개하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재필 등이 빠져나간 후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윤치호, 남궁억 등의 새로운 세력은 황제권과 타협을 하면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두가 쫒겨날 수는 없었고, 황제의 개혁 역시 <자강혁신과 부국강병>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독립협회와 일치했으니까요. 윤치호 등의 새로운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관점에서 정부와 협력하면서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하였습니다. 개화파로 따지면 온건개화파라고 할까요? 이들의 개혁은 <강력한 전제군주 아래 황제권을 옹호하면서 이루어지는 근대화>였죠.

서재필은 반발합니다. 개혁이란, 황제와 관료들 일부가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대표인 부르조아가 모인 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개혁핵심인 부르조아는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대표가 모인 의회에서 토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강조합니다.

따라서 독립협회에서는 국민적 지지를 받는 서재필 등의 입헌군주파와 정부의 지지를 받는 절대군주파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입헌파가 고종에게 쓴 소리를 하면, 고종은 이들을 탄압하려 했고 온건파는 <독립협회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변명을 하면서 반년이 흘러갑니다.

7. 98년 연말 : 관민공동회의 개최와 헌의 6조의 발표

98년 10월, 윤치호 등의 전제황제파 독립협회 회원들은 <황제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헌의 6조를 발표하면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제 1조의 내용(헌의 6조)

- 중추원은 다음의 사항을 심사하고 의정하는 처소로 할 것 -
①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
②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③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④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⑤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⑥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제 2조

중추원은 다음의 직원으로써 구성할 것.
의장 1인, 부의장 1인, 의권(원) 50인, 참서관 2인, 주사 4인

제 3조

의장은 대황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시고, 부의장은 중추원 공천에 의하여 칙수하시고, 의관 반수는 정부에서 국가에 노고가 있는 자로 선출하시고,
반수는 인민협희에서 27세 이상인이 정치, 법률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할 것.

제 12조.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의견이 불합하는 때는 의정부와 중추원이 합석 협의하여 타당 가결한 후에 시행하고 의정부에서 직행하지 못할 것.

독립협회의 온건파들이 주장한 헌의 6조의 내용은 황제권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1조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었고, 고종이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칙임관을 임명할 때 대신의 뜻을 묻는 다던가하는 조항들이 은근히 속 뜻을 가지고 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윤치호 등은 의회제도를 원하면서도, 고종황제에게 황제권 강화라는 명분을 확실히 심어주는 타협적인 제시안을 내놓은 것이죠.

고종황제는 수구파 대신 5명을 몰아내고, 중추원의 구성과 재정개혁을 약속하였으며, 그 결과 <박정양 내각>이 출범하여 본격적인 내각제도가 시행됩니다. 즉, 명분상의 황제권은 절대적이나, 실제 내각이 출범하여 정치를 하는 타협안이 제시된 것이죠.

또, 중추원을 구성할 때 정부관료와 독립협회 인사가 딱 절반씩으로 구성되어 점진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독립협회의 급진파였던 서재필, 박영효 등도 알게 모르게 힘을 실어주어 독립협회의 <내각제도>가 성공한 듯 보였죠. 이 시기를 보통 <독립협회의 참정권 투쟁 성공기>라고 합니다.

중추원이라는 기구는 원래 송나라 기구였습니다. 고려 시대는 재추가 모이는 막강한 권력기관이었다가 조선 시기에는 무신들의 기관이었습니다. 그래도 권한은 항상 막강한 기구였죠. 하지만, 갑오개혁 때 이 중추원의 기능을 모두 상실시켜 중추원은 <내각에 대한 지문 수준의 기관>이 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이 중추원을 국가최고의 <의회기관>으로 재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끝나면서 중추원은 유명무실해졌다고, 훗날 일제시대 때 이완용 등의 건의로 친일파 어용기구로 다시 살아납니다.

독립협회가 정치에 참여하자 그 세력은 엄청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민중 계몽기부터 전국적인 지회가 있었고, 회원이 4천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붉은 악마 서포터즈가 엄청난 것과 맞먹죠. 거기에 핵심 지도부가 박정양 내각으로 대한제국 최고 권력자로 올라서니, 그 위세는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재필, 박영효 들이 돌아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계속하면서 서포터들을 늘리고, 그들 스스로가 각부의 장관으로 올라서려고 했습니다.

보수파들은 충격에 쉽싸입니다. 독립협회의 의회제도는 기존 관료들의 입지를 좁히는 것일 뿐 아니라, 독립협회가 강해지면서 다시 <입헌군주제 및 법치에 의한 통치>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기 때문이죠. 보수적 관료들은 독립협회 인사들을 탄압하려 하였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이들 정부 관료들을 쫒아내기 위한 모함, 테러, 쿠테타 등을 시도합니다.

고종황제는 긴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박영효 등의 활동은 황제권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고, 같은 독립협회의 온건파들도 <너무 앞서간다>는 지적을 하기 시작합니다. 보수세력들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제거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가 여론을 주동하는 만민공동회를 혁파하기로 결심합니다. 황제는 만민공동회가 열리는 자리마다 부보상(보부상 : 황국협회)들을 투입하여 만민공동회의 회의를 방해하였습니다.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황국협회의 간섭으로 만민공동회는 혁파당하고, 그 주동자들은 체포되었습니다.

서재필은 추방되고, 박영효는 심문을 받았으며, 온건파인 윤치호는 북쪽 국경쪽으로 관직을 옮겨야 했습니다. 보수파와 성리학자들은 독립협회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하였고 결국 독립협회는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황국협회와 함께 해산됩니다.

8. 독립협회의 한계점

독립협회는 근대적인 민족운동인 자주국권운동, 근대화 운동인 자강혁신운동, 민주주의 사상의 발현인 자유민권운동을 표방하였고, 광범위한 계층을 포섭하여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국가를 이루려는 노력을 보인 단체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기 민족주의 사상의 기반을 마련하여, 훗날 민족주의 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주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고종 황제가 실시하고 있던 광무개혁과의 충돌문제입니다. 입헌군주제(내각제도)를 통한 사회개혁과 황제권 절대화를 통한 자주성 확립이 충돌한 것이지요. 그러나, 독립협회 자체의 이론에도 많은 한계점이 노출됩니다.

일단, 국가를 부강하게 하자는 자주국권운동은 이완용 등 친러파을 견제하고, 아관파천을 철회하게 하면서 러시아 등의 이권 침탈을 막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체가 서재필, 박영효 등 친미, 친일적 성향의 개혁가였던 만큼, 일본, 미국 등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거하지는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 세력의 도움을 많이 얻었던 개혁가였고, 메이지 유신을 조선 개혁의 모델로 여겼던 듯 합니다.

자강혁신운동도 전술했던 <사회진화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논리는 외세를 적극적으로 배척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고, 의병활동 등을 애들 장난으로 여긴 것은 <독립운동이라는 시각>과는 거리가 먼 <부르조아 운동>이었습니다. 이 사회진화론 수용이 우리 독립운동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의의와 함께 우려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민족주의 학자인 신채호 선생님도 처음에는 이 사회진화론에 맞추어 민족 저항운동을 전개했으니까요.

자유민권운동은 <천부인권사상>등을 조선에 보급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 사상 역시 서구 <부르조아 유산계급>의 이론에 맞추어 토지를 가진 지주, 경제력을 가진 산업가를 자유민권의 주체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한계점이 있습니다. 실제 토지가 없는 소작인, 차경인이나 노동자들의 인권은 일제시대가 끝날 때까지 보호받지 못했으니까요.

이번 장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간히 고종의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이 같은 시기에 언급되고 있죠? 독립협회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으로 독립협회와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고종의 광무개혁을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 이해 : 글을 적을 때 친일파 박영효, 친미파 서재필 등등의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박영효나 서지필이 나라를 매국한 친일, 친미를 했다는 뜻에서 쓴 용어가 아니라, 일본 문화, 미국 사상을 받아들인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친일파, 친미파라고 적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쓰는 친러파 신채호, 친중파 김구 등의 용어도 친러, 친중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신채호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김구가 중국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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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18장) 을미개혁과 개혁의 종말

1. 을미개혁의 배경

을미개혁을 이야기 하려면 1894년의 정세부터 다시 짚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1894년의 정세를 이야기해 볼까요?

1894년 청일전쟁으로 1,2차 개혁을 주도하려했던 일본의 의도가 꺾이게 되었습니다. 전쟁중에는 정신이 없어서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못하였고, 전쟁 후에는 삼국간섭에 의해 러시아 세력에 밀리게 되었죠. 또 조선 내부에서도 일본이 너무한다라는 의견이 대두하였고, 그 결과 2차 개혁의 핵심인물로서 친일적인 성향을 가진 박영효가 쿠테타 혐의로 축출되었습니다.

삼국간섭 이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조선 정부는 일본의 라이벌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일본을 몰아낼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조선의 왕비 민씨는 고종을 설득하여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이 조선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일본이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경복궁을 점령한 사실에 민씨 정권은 한을 품은 것이지요.

조선은 러시아에 접근하기 위해 박영효 등 친일파 개혁 세력을 몰아내고 친러파로 구성된 정부를 구상합니다. 그 핵심인물이 <이완용, 이범진>이었습니다.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등은 친일파라고 해도 어느 정도 조선의 개혁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소신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완용 등의 인물은 시류에 따라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친러파, 친미파, 친일파를 두루 섭렵했으니까요. (뒷장에 나오는 독립협회 초기의 핵심간부가 이완용이라는 사실도 아시나요?)

조선이 러시아와 친해지고, 민씨가 일본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자 일본은 낭인들과 친일 군부를 동원하여 민씨 왕후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 을미 사변 이후, 일본은 이제 일본의 의도대로 조선의 3차 개혁을 실시하는데 이 개혁이 바로 을미개혁이죠.

2. 을미개혁의 내용

을미개혁은 1,2차 갑오개혁의 연장입니다. 단, 1차 갑오개혁이 대원군 세력과 동도서기 계열의 어윤중이 주도하였다면, 2차 개혁은 김홍집 내각의 박영효 등 친일적 성향의 개혁파가 주도하였습니다. 3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가장 심했던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1, 2, 3차 개혁은 모두 일관적인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일관적인 틀은 일본이 개혁에 적극 간섭하려고 하였지만, 각각의 상황에 의해 원한 바를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조선의 관료들이 주도하여 근대화를 추구하였지만 근대화의 기본 틀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요구한 개혁안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1차 개혁이 수백개의 개혁안을 쏟아내어 정신없는 개혁이었다면, 2차 개혁은 1차 개혁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홍범 14조를 발표하였고, 중앙, 지방, 사법, 교육 관제를 정비한 개혁이었습니다.

그럼 3차 개혁은? 관제를 넘어서서 서양식 제도를 받아들이는 개혁이었습니다. 일단, 개혁의 첫 번째 내용은 태양력의 사용입니다. 이 개혁이 추진된 1895년 이전에는 음력으로, 이 개혁 이후의 연도는 양력으로 표시합니다. 따라서 이 태양력 사용을 놓고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근대적 연대표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냥 연표 표기가 바뀌었다는 것 뿐 역사적으로 태양력 사용이 아주 큰 의미가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또,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난리를 쳐서 사라졌던 우정국(우체국)이 부활되어 우편사무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또, 천연두 예방접종인 종두법을 실시하기로 하였고,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사용된 연호는 <건양>이었는데,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광무>라는 연호로 바꾸게 됩니다.

3. 단발령을 내리다.

을미개혁에서 실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개혁내용은 <단발령>입니다. 머리를 깎으라는 내용이죠. 단발령이 사회에 미친 파장은 어머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머리를 깍는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도 일본놈들이 바꾼 법 때문에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양반들에게 큰 치욕이었습니다.

사극을 보면 귀하신 마님들은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리죠? 가채라고 하는 그 엄청난 무게의 말아올린 머리는 양반집 규수의 상징이었습니다. 야사에 보면, 그 머리무게를 못이기면서도 품위 때문에 그 머리를 유지하다가 목이 꺽여 돌아가신 할마마마 이야기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머리는 농사짓고 장사해야할 일반 아낙의 머리는 아니죠. 양반댁 규수들도 과연 그 머리를 깎지 않고 평생 유지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양반집 남자들은 상투를 틀죠. 조상님이 주신 머리를 깎지 않는다고 하여 머리를 묶었다고 하지만, 에어콘도 없는 여름날 어떻게 보냈을까요? 실제, 양반들도 잔머리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주변머리만 남기고, 가운데 머리를 깎아 버리면 시원하겠죠? 그런 다음에 주변 머리를 깍아 버린 가운데 머리로 올려 묶습니다. 이렇게 상투를 틀면 머리를 깎은 티도 나지 않고, 조금은 시원한 맛을 느끼면서 체통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단, 티가 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편법을 쓰지 않은 모범적인(?) 양반들이 더 많았구요. 하지만, 득실대는 이는 알아서 처리해야겠죠.

단발령이 중요한 이유는 <신체는 부모가 주셨고, 부모가 주신 몸을 훼손할 수 없다>는 양반들의 명분을 자극했다는 점입니다. 최익현은 상소를 올리고, <머리를 베어도 머리카락을 벨 순 없다>고 단발을 거부하였고, 성균관 학생들을 비롯한 생원, 진사 등 양반 유생들은 <머리를 치기 전에 일본을 쳐 없애자는> 의병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 의병운동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을미개혁(단발령)으로 일어난 을미년 3종 세트인 을미 의병입니다.

을미의병 자체가 단발령 같은 양반들의 문데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 당시 의병은 <양반중심>의 의병이었습니다. 의병장도 유인석, 이소응 등 양반출신이었죠. 실제, 농민들은 단발령 같은 것으로 의병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습니다. 농민들은 일본 자체가 싫은 것이고, 그 이유는 일본이 쌀 등 곡물을 강탈하기 때문이지 머리카락 때문은 아니였거든요.

4. 개혁 3종 세트의 공통된 결과

갑오년 1차 개혁부터 을미년 3차개혁까지 3번의 개혁은 <왕권을 약화>시키는 방향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국왕을 제외한 모두가 왕권 약화의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침략을 위해 조선의 국왕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경제와 군사적인 면에서 고종의 힘을 축소하려고 하였습니다. 개혁파 신료들도 이 점에 공감하였습니다. 당시의 근대화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입헌이라는 말에서 왕도 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군주가 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 권한이 <의회중심>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의 근대화 개혁 자체가 국왕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강화하는 <내각제>를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개혁 자체에서 조선의 국왕은 제외되었습니다. 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에서, 2차 개혁 이후는 김홍집 내각에서 개혁을 주도하였죠. 이것은 서구 근대사회의 유물은 관료제를 표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서구란, 서양에 의해 개화된 일본 관료제 모델을 말합니다.

이 개혁의 핵심은 국왕권이 약화되면서 <시민사회>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18세기 시민혁명 이래 계속된 <부르조아 또는 젠트리 위주의 자본주의>를 조선 개혁가들이 꿈꾸었던 것이죠. 대표적인 부르조아 개혁이 <갑신정변>입니다. 김옥균은 소수 엘리트 중심의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고, 국민들은 계몽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프랑스나 영국이 아니였죠.

갑오개혁 역시 부르조아적 개혁을 표방하였습니다. 조세 금납화와 일원화는 상업 자본주의를, 신분제 폐지와 과거제 폐지는 근대적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표방하는 것이었죠. 단, 일본의 군사적 의도가 개입되어 군제개혁은 미흡하였습니다.

갑오개혁이 생각한 부르조아 개혁의 핵심은 <지주계층을 토지 자본가로 육성>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개혁이란,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핵심 계층이 필요한데, 그 계층을 토지를 가진 지주로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에서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하여 <실제 농사를 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해야한다>는 원리를 무시합니다. 토지는 자본을 가진 <지주>의 것이며, 따라서 갑오개혁에서는 동학에서 요구한 토지개혁을 빠져있습니다. 포함된 것은 부세 개혁정도이죠.

갑오개혁은 영국식 자유무역체제 도입, 조세제도 정비, 신분제도 철폐, 지주제도의 발전 등을 통한 체제 개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권의 약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죠.

5. 근대화 개혁의 한계점

갑오년, 을미년의 개혁은 3가지 측면에서 큰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 개혁이 일본에게 유리했다는 점입니다. 일단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실시한 1차 개혁 이래 일본의 입김이 계속 작용하였고, 독자적인 개혁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했다는 점입니다. 이 개혁의 내용 자체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기에 딱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개혁이 지주에게 유리했다는 점입니다. 개혁의 기본 방향이 농민층보다 지주층을 옹호하고, 지주층의 발전을 통한 근대적 자본주의 확립에 중점을 주었습니다. 농민이 요구한 토지개혁은 싹~ 사라지고, 대부분의 개혁 내용이 국가체제, 사회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한 개혁이었죠. 동학 등 일련의 사태 속에서 농민들이 쟁취한 신분제 폐지 등의 개혁의 내용도 결국 근대화를 위한 필연적 요소였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이 개혁에 대해 국민적 지지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개혁에 대해 일본의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던가, 개혁의 내용이 실제 국민들의 이해관계에 절실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의문이 많았습니다. 물론, 신분제 폐지 하나만으로도 좋아할 백성들이 있었지만, 실제 양반-농민간, 지주-전호간에는 신분제 폐지에 따른 신분 변화가 크지 않았습니다. 신분상 평등하지만, 소작농이 양반지주와 겸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농민들이 혁명으로 이룬 개혁이 아니라, 지배층의 자의적인 개혁안이기 때문에 국민 대다수에게 절실히 와 닿지 못한 것입니다.

네 번째  문제점은 군제개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근대화를 모델로 했기 때문에 서양식 근대화의 핵심인 관료제도, 상비군의 정비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군대의 개혁이 소홀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간섭한 개혁인 만큼, 우리 국방력의 강화가 일본의 이해관계와 반비례했기 때문입니다. 갑오, 을미년의 개혁으로 조선의 군대는 오히려 친위대 수준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조선의 군제 개혁은 훗날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에서 대대적으로 개편됩니다.

갑오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혁이 지속되지 않고, 미완의 상태로 중단되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개혁도 법하나 만들고, 조칙 몇 개 내리고 끝나지 않습니다. 수년, 수십년을 계속해서 보완하고, 수정하고, 고쳐가야 합니다. 그러나, 을미개혁은 을미사변으로 민비왕후가 죽은 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일본을 피해버림으로서 중단되었습니다.

즉, 수백개의 법을 만들어 놓고, 국왕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1년 몇 개월 동안 법령과 몇가지 세부사항만을 남긴채 종료되어 버렸습니다.

과거제는 폐지되었으나, 과거를 대신할 근대식 학제는 학교 몇 개 만들고 사범학교 만드는 선에서 끝났습니다. 조세의 금납화가 되었으나, 세밀한 조세 항목은 미흡했습니다. 군제개혁은 흐지부지하고 을미의병으로 국가 치안은 어수선했습니다. 신분제는 폐지되었으나, 양반이 평민들을 하대하지 못할 강력한 제재는 없었습니다. 후속 조치가 없었다는 것... 당시 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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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1. 2차 갑오개혁의 배경(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은 1차 갑오개혁과 내용상의 큰 차이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차 갑오개혁은 그 추진 세력이 달랐습니다.

1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은 개화파의 성격과 보수파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1894년 7월부터 추진한 개혁은 그 개혁법안만 200개가 넘습니다. 200개가 넘는 개혁안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성급한 개화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200개의 법 이름만 외우기에도 벅찰 것 같네요.

구체적인 개혁내용은 신분제 폐지, 조세제도 개혁, 과거제 폐지 등등 근대화를 위한 핵심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안에 대한 홍보를 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었고, 1984년의 7월엔 이미 동학농민운동이래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에서 남부 3도의 행정을 관할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 9월이 넘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개혁 강요로 인하여 2차 농민전쟁이 기포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일본은 1894년 11월 농민군 및 청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제 1차 개혁을 주도한 흥선대원군 및 동도서기 계열, 조선 보수 관료 등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죠. 이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개혁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의 개혁이 바로 2차 갑오개혁입니다.

일단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고문관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개혁에 감놔라, 배놔라... 시비걸기 시작합니다. 1차 개혁의 중심세력인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을 밀어내고 비교적 친일성향의 개혁파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때 흥선대원군은 물러나게 되었고, 1차 개혁의 중심기구인 군국기무처도 폐지하게 됩니다. 일본의 목적은 청나라 세력을 확실히 제거한 뒤,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2차 개혁은 1차 개혁과 내용상 차이는 없지만, 일본의 침투에 용이한 조항과 조선 국왕권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2.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다.

일본의 개혁방침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죠. 일본은 러시아를 막기위해 연합세력을 구축한 영국의 식민지 모델 방식을 벤치마킹하였습니다.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건설을 위해 막대한 돈을 이집트에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 건설이 늦어지고 이집트 스스로 그 차관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지자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았습니다.

보호국이란, 차관(빚)을 진 나라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돈을 빌려준 나라(영국)이 그 빚을 받기 위해 해당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이집트 같은 경우 영국에 막대한 차관이 있기 때문에 돈을 갚을 때까지 제 3국이 이집트에 불평등한 경제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영국이 이집트를 보호(?)해주면서 이집트의 모든 피와 살을 뜯어먹는 형식이지요. 일본이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에 가하려고 했던 방식이 바로 이 <보호국>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2차 개혁에서 일본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주기 위한 법령>을 만들고, 일본의 고문관들을 파견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선결조건으로 일본과 친한 박영효, 김홍집 등의 친일 내각을 수립하려고 했죠. 당시 개화파인 김홍집 등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나갔던 적이 있어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선진화되는 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조선의 개화와 동시에 일본의 침략을 원할하게 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은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성장을 두려워한 <러시아의 간섭> 때문이었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자 러시아는 긴장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삼국간섭>을 하였습니다. 3나라는 일본에게 청에게 강탈한 요동반도를 다시 돌려주고, 대만 땅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였죠.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마관조약, 하관조약)을 통해 대륙진출을 시도하던 일본은 러시아의 간섭으로 청일전쟁에서 빼앗은 땅을 다시 잃게 됩니다.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지면서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은 결국 1894-1895년에 실현되지 못하고, 훗날로 넘어가게 됩니다. 삼국간섭이후 조선의 개혁은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가 주도하게 되죠. 2차, 3차 개혁을 주도한 것은 1,2,3차 김홍집 내각(김홍집, 박영효 등)이었습니다.

2. 홍범 14조를 발표하다.

2차 갑오개혁 때 발표한 홍범 14조는 1차 갑오개혁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표한 것은 2차 개혁 때였지요. 홍범 14조로 볼 때 1차, 2차 갑오개혁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내용을 한 번 볼까요?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② 왕실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 ·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③ 국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 ·비빈 ·종실 및 척신이 간여함을 용납치 아니한다.

④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⑥ 부세(賦稅)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⑦ 조세부과와 징수 및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⑧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⑨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l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⑪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⑫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⑭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홍범 14조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1조의 <청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라>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조선이 원한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청은 청일전쟁에서 밀리며 이미 조선에 대한 간섭을 이전처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이 아닌 청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조항은 <일본의 조선 침략 목적>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2-5조까지의 내용은 <왕권을 확실하게 약화시킨다>는 조항입니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들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내각제를 실시하는 것>이 서양과 같은 근대화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의 왕권이 약해져야 <조선의 보호국 정책>이 수월해지니까요.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왕권은 약화시키면서도 군제를 확실히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군제개혁은 12조의 징병제도 뿐인데, 이 항목을 제외하곤 실제 1894년 조선의 군대는 더욱 약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개혁은 군대 강화를 일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갑오개혁의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6-9조는 재정과 부세에 관한 항목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조세의 금납화 및 조세권의 일원화>이죠. 탁지아문이라는 재정 전담부서에서 부세를 걷고, 잡세를 폐지하여 농민들의 살 길을 열어준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조세의 일원화는 국왕이 재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또, 토지개혁없이 세금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농민들이 원한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농민들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잠깐 세금 깍아주는 것보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이 원하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경자유전>이란, 토지를 경영하는 자(실제 농사짓는 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부터 계속 주장되어온 내용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실현되지 못합니다.

특히 7조의 1년 회계를 예정한다는 <서구식 선예산주의>를 택한 것으로서 재정개혁의 근대화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부분입니다. 또 13조의 민법, 형법 등의 법령을 정한다는 것은, 법령위의 헌법적 성격을 가진 강령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13조의 내용은 훗날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법령을 만드는 것에 기본 근거가 되는 조항이 됩니다.

10조 이하는 신분제도 폐지, 능력위주의 인재등용 등 새로운 사회의 지침을 설명한 것입니다. 200개가 넘는 수많은 개혁 법안 중 가장 핵심을 추려 놓은 것이 바로 이 홍범 14조입니다.

홍범14조를 정치적인 면에서 본다면 <입헌군주제>가 핵심이겠네요. 왕도 법을 지키라는 것이죠. 이것은 실학자들부터 이어져 내려와, 갑신정변에서도 강조된 개화파의 개혁 핵심이었습니다.

사회적인 면에서 본다면 <신분제 폐지>가 핵심입니다. 이것은 동학 농민들이 주장했던 내용입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는 <재정 일원화와 금납화>이겠죠. 홍범 14조는 국가의 자주권부터 정치, 행정, 재정, 교육, 국민의 권리 등을 규정한 <국가 개혁을 위한 기본 방침>이었습니다.

홍범 14조는 자주독립국가임을 국가 내부, 외부에 선언한 최초의 선언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주독립은 청의 종주권을 부인한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국가 개혁 강령으로 함으로서 서구적인 입헌주의를 도입하겠다는 의지를 알린 것이며, 서양식 헌법내용을 도입하겠다는 것을 알린 최초의 선언문입니다.

3. 2차 개혁만의 독특한 법안

1차 개혁의 내용 대부분이 2차 개혁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실제, 주도 세력이 누구인가만 다를 뿐 개혁 그 자체의 본질은 다를 바가 별로 없으니까요. 단, 2차 개혁에서는 제도적인 정비가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한 번 볼까요?

먼저 중앙제도에서는 본격적인 내각제도의 법제화라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1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개혁 주체가 <내각>이 되었고, 국왕권은 허수아비가 됩니다. 1차 개혁 때는 군국기무처라는 도깨비같은 기구가 개혁을 주도했다면 이제 서구식 <내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내각으로 개편하면서 의정부와 8아문이 서양식 <~~부>로 바뀌고, 이것을 7부라고 합니다. 7개의 부가 등장했죠. 요즘으로 말하자면 행정부, 경제부, 교육부 등등이 등장한 것이죠.

다음으로 지방제도도 바뀝니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나라 지방제도는 8도가 있고 그 밑에 군, 현이 있으며, 그 아래 행정단위로 방위개념이 강한 면, 촌락개념이 강한 읍, 향촌공동체 성격의 리 등이 있었죠. 이것을 23부로 바꾸고 지방 장관이 할 수 있는 권한을 확~ 줄여 버립니다. 그 이유는 철저한 개혁을 위해 전국을 <내각 주도>로 개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또, 사법제도도 근대식으로 바꿉니다. 사법부가 왕권에서 완전 독립하였죠. 행정부는 사법부에 간섭할 수 없었고, 재판은 독자적인 재판소의 권한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재판소인 의금부, 관리감찰을 하던 사헌부, 행정재판을 보던 한성부 등의 권한은 모두 1심, 2심 재판소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재판제도의 근대화라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왕권 약화를 위한 일본의 의도였다는 점은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교육제도도 근대화됩니다.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어 교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소학교, 외국어 학교 관제가 공포됩니다. 물론 이전부터 있던 개념이긴 하지만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등등의 학명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바로 세워진 학교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2. 2차 개혁의 중단

1차, 2차 개혁은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2차 개혁은 1년, 2년, 3년 계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습니다. 2차 개혁이 중단된 첫 번째 이유는 전술했던 <삼국간섭>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이 러시아에 의해 청일전쟁 승리의 노확물을 얻지 못하자, 일본 내부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고조되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 정책에서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죠.

두 번째 이유는 개혁의 추진 세력이 친일 개혁파였기 때문에 국민적인지지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조선의 국민들은 너나 할 것없이 갑오개혁에 간섭하는 일본 세력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일본군에 대한 반감은 과거 임오군란, 갑신정변에 개입하였던 청나라에 대한 것보다 더 큰 것이었죠.

세 번째 이유는 친일 개혁파의 거두인 박영효가 1895년 6월 쿠테타를 일으키고, 국왕을 추방하려고 한다는 혐의로 추방당했기 때문입니다. 갑오개혁의 핵심은 <국왕권 약화와 내각제 강화>였습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개혁파가 눈에 가싯거리였습니다. 좋은 개혁 내용도 있지만, 개혁의 핵심은 <국왕을 물로 본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조선에서 일본식 입헌군주제는 아직 시기상조였습니다. 박영효가 반대파의 음모 또는 쿠테타로 추방되면서 일본의 <조선 보호국 정책>은 완전 실패하였고 2차 갑오개혁에서 일본이 이루려던 야망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더구나 <삼국간섭>으로 고종과 민씨 왕후는 <러시아가 일본을 견재할 수 있는 대항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을 버리고 친러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일본은 당황하였고, 반일세력의 중심인물을 <민씨>를 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1895년 여름 일본은 <민씨 왕후>를 낭인자객을 보내 무참하게 살해하고 시체를 불지르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을미개혁이라는 3번째 개혁을 강요하게 됩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을미개혁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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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894년 갑오개혁 - 1차 개혁의 내용

1. 갑오개혁은 여러 이권이 맞물려 시작되었다.

보통 갑오개혁을 이야기할 때, 자주적이었는가, 의세의존적이었는가를 많이 이야기 합니다. 1차 갑오개혁은 일본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비교적 조선 관리들에 의해 차분히 진행되었습니다. 1차 개혁으로 조선의 근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은 평가할 만 합니다.

1차 개혁에서 일본의 역할이 왜 축소되었는지는 지난 파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부연하지면, 동학농민운동이 전주화약으로 평화롭게 끝나가는 것을 일본이 방관하지 않았고,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청과 조선이 그것을 적극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본은 무력으로 개혁을 강요하였습니다.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에게 군사적인 협박을 시작한 것이죠.

그러나, 실제 개혁을 강요한 일본이 적극적으로 개혁을 주도하지 못하였습니다.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이, 6월 23일 청국 함대와 교전을 시작하면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1894년은 너무 어지러운 한 해였습니다. 3월부터 동학농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5월에 전주화약을 맺고 1차 동학농민운동이 겨우 마무리되나 했는데, 6월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때 1차 갑오개혁이 일어났으니까요. 9월에는 농민들이 일본군 철수를 외치며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고, 이것을 진압한 일본은 12월에 2차 개혁, 을미년에 3차 을미개혁을 추진합니다.

2. 교청청과 군국기무처의 차이점

동학농민운동 이후 조선이 스스로 개혁을 하기 위해 마련한 교정청은 6월 11일 만들어진 기구입니다. 교정청에서 하려던 개혁은 농민군이 요구한 환곡의 폐단과 잡세 폐지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고, 신분제, 과거제 폐지 및 탐관오리 숙청 등이 들어가 있습니다. 교정청은 철저히 조선 자체의 내부 모순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가진 기구였죠. 그럼 교정청 줌싱의 개혁안을 한번 볼까요?

우리 정부는 왕명을 받들어 교정청을 설치하였고 당상관 15명을 두고 먼저 폐정 몇 가지를 개혁하니 모두 동학당이 주장해온 말이다. 자주 개혁을 점차 추진하여 일본인들이 끼어듦을 막고자 하였다. 6월 16일 교정청에서 혁폐 조건을 의정하여 방방곡곡에 부쳐 각 도에 시행하도록 하였다.

1. 이포(착취한 세금)가 많은 자는 일절 너그러이 용서하지 말고 일률로 시행하라.

1. 공사채를 물론하고 족징을 절대로 금하라.

1. 지방관은 부임지에 토지를 매입하거나 묘를 쓸 수 없다. 만일 이를 어기면 토지는 속공하고 묘는 파내어 옮겨라.

1. 채무에 관한 소송은 30년이 지난 것은 받아주어서는 안된다.

1. 각 읍 이속은 신중하게 뽑아 안에 올리고 이를 임명하는 데 만을 뇌물을 내어 법을 위반하는 자는 공금 횡령으로 다스려라.

1. 세력에 기대어 남이 먼저 써놓은 묘를 빼앗는 것을 일체 엄금하고 묘는 일일이 적발하여 세금을 거두어라.

1. 각 읍관에 쓰이는 물건은 시중가격을 따르고, 진배 물종 역시 시중가격의 낮음에 따를 것이다. 소위 관지정(관아에서 알아서 정한 것)은 혁파한다.

1. 부보상 외에 이르을 칭탁해 무리짓는 것을 각별히 금할 것이다. (사료상 보부상이라는 표기는 안 나온다. 교과서에 나오는 보부상이라는 표기는 일제시대 일본식 표기이다. 부보상이 맞다.)

1. 경각사에서 따로 복정하는 것은 반드시 정부에 보고하고, 만일 사사로이 백성에게서 거두는 이는 반드시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1. 원결외 추가로 더하거나, 호포 외 더 걷는 것은 금지한다. 만일 드러나면 곧 바로 다스린다.

1. 경우리 역가미는 구례로 시행하고, 20년 이래 가마련은 아울러 거론치 말라.

1. 민고는 혁파하라.

- 속음청사 7권, 교정청 의정혁폐조건, 고종 31년 6월 26일 -

그러나, 이것에 불안을 느낀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신설하면서 개혁의 내용이 약간 바뀝니다. 그 이유는 <군국기무처>가 정상적인 기구가 아니라, 초법적인 비상 개혁 추진 기구였기 때문입니다. <군국기무처>의 성격이 전두환 독재시절의 <국가비상회의>같은 느낌이랄까요?

군국 기무처의 역할

1. 군국의 기무 일체의 개혁을 담당한다.

1. 군국의 기무는 본처에서 이결한 뒤 뜻을 품어서 시행한다.

1. 의원 10인 이상 20인 이하.

1. 군국에 관한 사무는 일단 모두 회의에 올려 상의할 것

1. 회원 반수 이상의 참석으로 개최하고,

1. 회의원이 논의하는 안건의 가부는 다수에 따라 결정한다.

- 경장장정존안, 개국 503년 6월 26일, 27일 -

일단,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민씨정권을 몰아내고, 형식적으로 대원군 정권을 불러들였습니다. 따라서 군국기무처에는 대원군 계열이 일단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대화의 개혁인만큼, 실질적으로는 동도서기 계열과 개화파 계열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 일본의 강요로 이루어진 만큼, 일본인 고문과 친일파, 그리고 형식적으로 각국 고문들도 포함되어 있었죠.

하지만,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조선의 개혁에 어느 정도 간섭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개혁의 중심층은 동방의 정신을 지키고 서양의 좋은 것만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 계열이였습니다. 이것이 1차 개혁이며, 1차 개혁은 7월말에 대부분 이루어집니다. 이후 11월부터 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어 2차 개혁이 진행되어도, 1차 개혁의 큰 틀은 바뀌지 않습니다.

3. 1차 개혁의 큰 틀

1894년 7월부터 진행된 1차 개혁은 교정청 대신 <군국기무처>가 들어섰지만, <교정청>에서 제시한 개혁안들이 대부분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굳이 군국기무처를 신설한 일본의 압력이 청일전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죠. 일본이 개혁을 추진한 것은 조선의 이권을 빼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이권을 놓고 청과 전쟁중이니 개혁에는 큰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이 대원군을 데려다놓고 시작한 개혁이었지만, 일본이 빠지자 어윤중을 대표로 하는 동도서기 개혁파들은 대원군을 왕따시키면서 개혁을 추진합니다. 왜냐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 자체가 국왕권을 축소하고, 국왕의 생부인 대원군의 세력을 견재하면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 모델인 <입헌군주제>를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본 역시, 민씨세력 견제를 위해 흥선대원군을 데려왔지만 대원군에게 실권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죠.

따라서 1차 개혁부터 3차개혁까지 전체적인 틀에서 개혁을 보았을 때, 핵심은 <왕권의 약화>를 통한 개혁 세력, 즉 <내각의 강화>입니다. 그럼 한 번 그 내용을 볼까요?

4. 1차 갑오년 개혁

정치 개혁의 핵심은 <왕권 약화>를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되, 국가 주권은 강화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입헌군주제>를 성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을 분리해 버립니다. 국왕이 모든 재정을 좌지우지하던 조선시대의 관행을 폐지하고, 재정은 <탁지아문>이라는 재정부에서 관리하도록 합니다.

또 왕실의 업무와 국가 업무를 분리하여 <행정질서>도 법체계에 의해 확고히 합니다. 궁내부의 일과 의정부의 일을 분리하여, 국왕은 군림하되 행정 각 부의 담당 업무에 하나 하나 참견할 수 없게 한 것이죠. 행정업무는 총리대신과 8아문에서 전문적으로 담당하게 됩니다.

왕권과 집결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신분의 구별없이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특히 삼사, 언론기관 등 조선 시대 신하들의 기관을 폐지해 버립니다. 이 말은 왕권의 약화와 함께, 왕권의 지지기반인 신권도 약화시켜 조선시대 모든 지배계급의 권한을 제한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은 더 이상 신료들에 대한 인사권을 독점할 수도 없고, 신료들도 과거제를 이용한 출세나 권력남용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법치주의에 입각하여 국가 권한은 강화시켰습니다. 일단, 만국공법에 입각한 <국민주권, 국가주권>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고, 국가의 주권이 중요함이 강조됩니다. 청과의 주종관계는 청산하겠다고 천명하였고, 독자적인 개국연호를 사용합니다. 경찰기관인 경무청도 설치하였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개혁은 <재정일원화>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국왕을 중심으로 왕실, 외척, 세도가문 등에 의해 정리되지 못한 모든 재정은 <탁지아문>이라는 재정전담부서에서만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걷는 세금도 <은>을 화폐단위로 하여 <일원화>하였습니다. 흔히, 조세의 금납화라고 부르는 대목이지요.

또, 그동안 일치하지 않았던 도량형을 통일합니다. 쌀 한 되, 한 말, 1리, 서양식 인치 등의 단위를 기준을 정하여 통일한 것이죠. 쌀 한 되가 바가지 크기에 따라 달라지면 곤란하니까요.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가장 큰 개혁은 <신분제도의 폐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분제도의 폐지는 양반, 상민이 법적으로 차별이 없다는 뜻도 있지만, 노비가 공식적으로 해방되었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또, 조혼제도, 고문과 법에 의하지 않은 처벌, 연좌제도도 공식 폐지됩니다. 물론, 법적으로 폐지되었다는 것이므로, 이후에도 사람들의 인식에는 아직 신분제도와 같은 구제도의 불합리함이 남아 있긴 합니다. (실제 양반들은 이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계속 양반으로, 소작농은 이전 노비로 취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개혁은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되지 못했다>가 답입니다. 청일전쟁 중인 일본은 조선의 군제문제 만큼은 신경쓰고 있었습니다. 갑오개혁 때 우리 군은 근대화되고 강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모가 축소되고 이전보다 나아질 것 없는 군대였습니다. 훈련대와 시위군을 설치했지만, 이것은 국가를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왕실을 호위하는 수준의 <의장대 역할>의 군대였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종로를 지키는 수비대와 나팔부는 경악대 정도라고 할까요?

1차 개혁 때의 내용들은 2차 개혁 때 홍범 14조로 발표됩니다. 여기서는 1차 개혁에 대한 법령만 간략히 볼까요?

갑오개혁 개혁법령(1894. 7)

1. 현재 이후 국내외의 공사 문서에는 개국기원을 사용한다.

1. 문벌과 양반, 상민등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뽑아쓴다.

1. 문무존비의 구별을 철폐하고 다만 품계에 따라 상견의를 규정한다.

1. 죄인 자신 이외 일체의 연좌율을 폐지한다.

1. 적실과 첩에 모두 아들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양자를 허가한다.

1. 남녀의 조혼을 엄금하여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라야 비로소 결혼을 허락한다.

1. 과부의 재혼은 귀하고 천함을 따지지 않고 자유에 맡긴다.

1. 공사노비법을 혁파하고 인신의 판매를 금지한다.

1. 비록 평민이라고 해도 국가에 이익이 되고 백성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의견이 있다면 군국기무처에 상서하여 토의하게 한다.

1. 각 아문의 조예는 그 수를 조절하여 늘 비치하게 한다.

1. 공금 횡령한 관리에 대해 징계를 엄중히 하되 횡령한 공금을 변상하여 납입하게 한다.

1. 조관품급의 정, 종의 구분을 없애고, 각 아문이 마음대로 체포, 시형하지 못하게 한다.

1. 역인, 창우와 피공 등의 천민 대우를 폐지한다.

1. 관민이 휴관한 뒤에 상업을 경영함은 그 자유에 맡긴다.

1. 과거문장으로만 취사하는 것은 재주 있는 사람을 뽑아 쓰기 어렵다. 임금의 재가를 주청하여 변통하되 따로 선용조례를 제정한다.

1. 각 도의 부세, 군보 등으로 상납하는 크고 작은 쌀, 콩, 면포는 급납제로 대처하도록 마련한다.

- 경장의정존안, 개국 503년 7월 2일, 3일, 10일 -

5. 1차 갑오년 개혁의 평가

1차 갑오개혁에 대한 평가는 2가지 정도입니다.

갑오개혁의 타율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1차 개혁이 일본의 침략적인 의도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일단, 당시 갑오개혁에 대해 조선의 백성들이 심하게 반발하였고, 농민들의 개혁안이 많이 반영되었음에도 <일본>에 의한 개혁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또, 이 개혁의 실시를 놓고, 조선, 청, 일본의 감정이 대립하였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교청청이 일본에 의해 <군국기무처>로 바뀌었으며, 조선의 심장인 경복궁이 점령당하였습니다. 이 개혁안을 놓고 청과 일본은 청일전쟁을 하였고,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특히, 1차 개혁에서는 조선의 군대 개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갑오개혁의 자율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일단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들이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에서 요구한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노비 해방, 재정일원화> 등의 내용이 많이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타율론자들은 갑오개혁의 왕권약화로 인해 일본의 침략이 수월해졌고, 이것이 일본의 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율론자들은 왕권 약화는 진정한 시민사회로 가기 위해 꾸준히 진행된 근대화의 흐름이었다고 이해합니다.

자, 지금까지 동도서기 계열인 어윤중을 중심으로 한 1차 개혁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음 장에서 이야기할 2차 개혁은 개화세력과 친일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김홍집, 박영효 내각의 개혁 이야기입니다. 1차 개혁과 2차 개혁은 내용상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상이 아닌 다른 이유로 2차 개혁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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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1. 1894년... 왜 개혁이 필요했는가?

오늘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갑오개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갑오개혁은 1894년에 1, 2차 개혁을 하였고, 그 다음해인 을미년에 3차로 을미개혁을 하였습니다. 이 개혁으로 조선은 서구식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지만,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럼 이 개혁이 이루어진 배경을 한번 볼까요?

갑오개혁은 우리 정부가 주체적으로 추진했다는 <자율성론>과 일본에 의해 강제로 추진했다는 <타율성론>의 시각이 있습니다. 이번 나중에 다루고 이번 장에서는 이 2가지를 적절히 다루어 보도록 하죠.

갑오개혁은 조선인 스스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개화파>의 개혁의지가 1894년 반영되었다는 점이 일단 중요합니다. 그동안 조선은 개혁을 추진하려는 세력과 그것을 막으려는 보수세력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1860년대부터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반대 정책이 있었고, 외국의 침략적 움직임을 간파한 위정척사운동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미 1860년대에도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등의 개화 선구자들은 외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외세를 막으려는 위정척사와 외세를 받아들여 이용하자는 개화의 흐름은 1880년 조선 책략이라는 개화지침서가 들어오면서 대대적으로 충돌하였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은 개화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고, 같은 해 임오군란은 외세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강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은 <개화사상에 의한 조선의 개혁>이란 과제를 조선 사회 전체에 던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많은 개화파가 죽었으며,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개화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김옥균같은 <급진적 개화파>는 실패하였지만, 고종과 일부 개화파들은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조선의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여, 대내외의 새로운 사상을 알렸고, 최초의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을 세웠습니다. 서양식 군사훈련을 위한 연무공원, 광산개발을 위한 광무국, 근대적 진신시설을 위한 전신국이 창설되었죠. 물론 이러한 시설들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측면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인 고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청, 러시아, 일본 등에서 파견한 고문은 침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 시설을 수용하기 위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또 유럽 각국에서 넘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구한말 카톨릭 선교사들에게 먼저 빼앗긴 종교 입지를 찾아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 포교에 앞장서게 됩니다. 원래 종교란, 순수한 목적으로 포교를 한다고 해도 국가적 차원에서는 그 포교를 정치적 논리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서양에서는 종교적 포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정치, 경제적 침투를 하려 하였고, 조선은 이들을 이용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우리 내정에 심하게 간섭하였던 청에게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일본,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초대 주미 대사의 이름은? 훗날 독립협회의 헌의 6조로 유명해진 박정양입니다. 우리 정부는 청을 견재하기 위해 조러 비밀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의 강력한 반대로 조러 비밀 협약은 실패하였고,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은 소환당하기도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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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가운데)

2. 개혁의 불씨를 당긴 동학농민운동

조선은 점진적으로 개화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열강에게 둘러싸여 힘이 없었고, 조선 스스로의 개혁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의 힘을 조금씩 빌려 조금씩 국가의 체질 개선을 하는 중이었죠.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개혁이었고, 이 개혁이 과연 백성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인가는 의문이었죠.

학교를 세웠지만 양반자제들의 학교였고, 군대를 개편했지만 농민들과는 상관없는 군대였습니다. 농민들이 원한건 잡세를 없애고 토지개혁을 추진하며, 신분제도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를 가지고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정부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동학농민들을 진압하겠다던 명분으로 출병한 청과 일본은 동학과 정부가 정부화약을 맺고 대립을 끝냈음에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조선에 더 이상 머물 명분이 없었던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겉으로는 동양 평화를 위해 <조선의 개혁을 돕는다>는 입장이었지만, 사실 이것은 일본이 청을 대신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히기 위함이었죠.

정부는 일본의 속셈을 파악하고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농민군의 요구가 포함된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조선의 자주적인 개혁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조선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한번 일본군의 내정 간섭 과정을 자세힐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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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알연하는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쓰케 :
조선 내정개혁을 요구하고 일본의 입맛대로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3.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과정과 목적

동학농민과정에서 전주화약으로 조선과 농민군이 화해를 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전쟁이 끝났으니, 일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농민을 잡기 위해 늑대를 불렀는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늑대가 순순히 물러날리 없죠. 일본군은 바로 서울로 쳐들어와서 떡 하니 서울 한복판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청, 일본 양국이 조선을 개혁하자는 개혁안을 제시하였죠. 청나라는 일본의 속셈을 알고 이것을 거부합니다.

일본공사는 조선 정부에 <일본이 조선 개혁에 도움을 주겠다>라는 공식입장을 밝히고, 일본이 작성한 내정개혁안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거부했고, 일본군이 먼저 물러가면 생각해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일본과 조선은 내정 개혁에 대한 1,2차 회담을 열었는데, 일본의 목적이 수상하다는 것을 느낀 조선정부에서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조선 스스로의 개혁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조선은 3차 회담에서 일본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검은 속셈을 드러냅니다. 서울에 주둔하던 군대를 이용하여 바로 경복궁을 침입하여 조선의 정권을 탈취하였습니다. 민씨 정권은 축출당하였고, 흥선대원군이 허수아비 정권으로 다시 들어섰으며 친일적인 성향의 <개화파>들을 통해 갑오개혁을 추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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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당시의 김홍집과 어윤중

여기서 친일적인 성향이란, 친일파라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겠다던 개화파들을 말합니다.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경력이 있었던 지식인들을 개혁 주체로 하여 개혁을 추진한 것이죠. 갑오년에 일어난 이 개혁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수립되었고, 이 내각의 개혁 중심기구인 <군국기무처>는 국왕권마저도 초월하는 초법적 기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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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당시의 군국기무처(교과서 그림)

그럼 왜, 일본이 이렇게 조선의 내정 개혁에 열을 올렸을까요?

1. 전주 화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할 명분도 없었고, 청과 전쟁을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통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청일전쟁을 장기화하면서도 조선에 머물 수 있는 최선책이었습니다.

2. 조선에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위함이라고 말함으로서, 훗날 청,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우선적으로 침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필요한 것은 조선 등 아시아 식민지였으니까요.

3. 조선의 개혁을 방해하는 청군을 몰아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청군을 조선에서 영구히 추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4. 그러나 1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적었다.

갑오년에 실시한 1차 조선 개혁은 일본이 주도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간섭이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의 1차, 2차 전쟁 사이에 청과 일본의 청일전쟁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혁의 시작인 일본의 압력이 작용하였지만, 실제 개혁은 조선의 개화파들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요구를 몇가지 적절히 섞어서 조선식 개화를 추진하였는데, 일본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에 개혁은 다시 한번 일본의 요구대로 진행됩니다. 이것이 갑오년 2차 개혁입니다. 2차 개혁의 내용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볼 수 있는 개혁이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모델을 같은 섬나라인 영국의 황제국가체제(영국은 여왕 중심체제였고, 일본은 천황중심체제였음)에서 일부 모방하였는데,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구실로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역시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것이 당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오개혁이 순전히 일본의 의도대로만 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개화파들은 조선 사회의 시급한 문제들을 개혁의 내용에 우선적으로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는 1차 개혁, 2차 개혁, 3차 개혁의 내용을 차례로 포스팅하고 갑오을미개혁의 논쟁점들을 간략히 다뤄보도록 하죠. 오늘 서론이 길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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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3 - 동학농민들의 2차 봉기

1. 1차 농민전쟁의 결과

자, 이제 농민들의 1차 봉기는 끝났습니다. 농민들은 <집강소>를 구성하여, 스스로 자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정부도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개혁을 약속하였습니다. 정부가 개혁을 위해 마련한 기구가 바로 <교정청>이었죠.

그런데, 여기서 은근히 헷갈려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1894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중 어느 것이 먼저냐고 물어보면 다들 고민을 하더군요.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답이 없으니까요.

동학농민운동은 1, 2차로 나눠야만 다른 사건들과의 개연성이 생깁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부분을 나누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탐관오리 숙청, 부당한 조세제도 혁파, 토지개혁 등을 주장한 1차 동학 농민운동은 1894년 3월부터 5월까지입니다. 1차 동학운동은 전주화약을 맺으면서 정부와 농민들의 화해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과 일본은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적은 동학농민운동 때문이 아니라 <조선의 실질적 주도권>을 누가 가지는가 였으니까요.

특히 일본은 그동안 청과 나누어 왔던 한반도의 정치, 경제적 권리를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속셈이었지요. 일본은 서울과 부산까지 연결하는 전기선을 가설하면서 전쟁에 대비하였고, 1894년 6월 경복궁을 무력으로 장악합니다.

일본이 경복궁을 장악하고 요구한 것은 조-청간 경제 무역을 중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요구는 <조청상민무역장정>의 폐기였지요. 일본은 또 우리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꾸며 아산만에서 청의 함대를 기습하여 청군을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이 때 죽은 청나라 군사만 1200에 달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경북궁을 장악한 채로 조선에 개혁을 요구합니다.(갑오개혁) 189년 6월 23일 조선에 주둔하던 청일군이 전면전을 하였는데, 일본군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때부터 1895년까지 청일전쟁이 조선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청일전쟁은 조선정부에게도 부담스러운 전쟁이었지만, 농민에게는 더욱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겨우 자유를 얻고, 농민의 힘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분위기를 일본이 망쳐놓은 것이지요.

갑오개혁도 처음에는 교정청에서 농민의견을 많이 반영하면서 진행되는 듯 하였지만, 교정청이 사라지고 일본이 개화파를 앞세워 군국기무처를 신설하면서 일본의 의견이 더 많이 들어가는 개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일본군은 전쟁을 이유로 우리 농민들에게 식량을 징발하고, 헐값에 조선인들을 인부로 채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농민들의 분노는 이제 탐관오리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죠. 동학농민의 2차 봉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2. 1차, 2차 동학농민운동 사이의 7월 - 내정 개혁이 강요되다!

일본은 1차 동학농민운동이 끝날 무렵, 청과 전쟁을 하면서도 조선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죠. 한번 일본의 속셈을 분석해 볼까요?

1. 전주 화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할 명분도 없었고, 청과 전쟁을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통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청일전쟁을 장기화하면서도 조선에 머물 수 있는 최선책이었습니다.

2. 조선에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위함이라고 말함으로서, 훗날 청,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우선적으로 침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필요한 것은 조선 등 아시아 식민지였으니까요.

3. 조선의 개혁을 방해하는 청군을 몰아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청군을 조선에서 영구히 추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의 개혁의지를 청이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전주화약 후 일본군은 바로 서울에 침입하면서 <청>에게 청일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이 보기에 일본의 속셈이 뻔하였으므로 이것을 거절하였죠.

일본공사는 바로 조선 정부에게 내정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개혁을 강요합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군이 선철수 해야 함을 강조하였고, 1,2차 회담을 열어 이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하였습니다. 이 때 개혁기구로 창설된 것이 바로 <교정청>이지요. 우리는 3차 회담을 하면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고 우리 스스로 개혁을 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당황한 일본은 경복궁에 무단침입을 한 뒤, 민씨 세력을 궁 밖으로 강제 추방하고 흥선대원군을 표면에 내세워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물론 흥선대원군은 허수아비였고, 개혁의 주체는 일본이 내세운 김홍집, 김윤식 등 개화파였죠. 이렇게 실시한 개혁이 바로 갑오개혁입니다.

3. 농민들은 다시 일어나다!

1차 동학농민봉기 이후, 일본의 힘이 세지자 농민들은 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본이 조선 농민의 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농민들은 다시 일어납니다. 2차 동학농민봉기는 일본을 추방하기 위한 반외세 운동이었습니다. 그럼 자세한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이 땅의 살아있는 동포에게 포고한다. 우리는 왜놈을 이 땅에서 축멸(逐滅)코자 다시 기포한다! 관 민을 불문하고 우리의 창의에 합세하는 것은 충의(忠義)요 이반하는 것은 반역(反逆)이다. 충의지사(忠義之士)는 모두 삼례역으로 모여라.

- 2차 동학농민운동 출정문 -

일구(日寇)가 구실을 만들어 병사를 움직여 우리 임금님을 핍박하고 우리 국민을 어지럽게 함을 어찌 그대로 참을 수 있단 말이오.…지금 조정의 대신은 망녕되고 구차하게 생명을 유지하며, 위로는 군부를 위협하고 밑으로는 국민을 속여 왜놈, 오랑캐와 연결하여 삼남의 국민에게 원한을 사며, 망녕되게 군대를 움직여 백성을 해하려 하니 참으로 그 무슨 뜻이오.    

- 전봉준 격문(1894. 10) -

묵은밥은 새밥에 섞지 마소서.

묵은 음식은 반드시 끓여 드소서.

침을 뱉지말며, 뱉거던 반드시 땅에 묻으소서.

노변에서 대변을 보았으면 파묻고 가소서.

물을 끓여 먹고 구정물은 아무데나 버리지 마소서.

집안과 내몸을 하루에 두번씩 청결히 닦으소서.

그리고 춘추로 이회씩 정기적으로 사십구일기도를 하소서.

- 2차 동학농민운동 최시형의 통유 -

위 사료를 보세요. 2차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은 전봉준이 전라도 삼례에 투쟁본부를 두고 시작되었습니다. 전봉준은 동도창의소란 이름으로 조선민들의 거병을 촉구하였고,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해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남접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1차 때부터 전국적 무력봉기를 자제할 것을 주장하였던 교주 최시형 등의 북접 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추구합니다. 최시형도 통유문을 발표하고 가세하였죠.

경주황오리에 고아로 태어나 가사여의치 않아 배움도 얻지못하고

이집저집 머슴살이 영일군오덕동 제지소에서 종이를 떴다

마북동검등꼴 화전민되어 신유년 서른다섯살 수운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늘님소리 듣고파서 가진고행 마다하지 않았다

허나나는 들을수 없었다

하늘님의 소리를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하늘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옳다 사람의 소리 곧 하늘의 소리구나

그때부터 천지가 열렸다 나는 쉬지않고 일했다

자나깨나 도인들의 고통을 나누며 죽도록 일했다

평생토록 보따리하나 걸머지고 조선팔도 도바리 아니 도망다닌 곳이 없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 최보따리 그 보따리엔 하늘님이 계셨다

이제 나는 그 보따리를 불사르고자 한다

개같은 왜적놈 총부리앞에 불사르고자 한다

이게 나의 천명이요 이게 너의 천명이다

나 너에게 이르노니 나는 이제 가노라

천명을 다하고 허나 나는 말한다

너는 너는 높이 날으고 멀리 뛰어라

너는 너는 높이 날으고 멀리 뛰어라

- 최시형의 기포 명령문 -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할 정도로 군사력이 막강한 일본군에게 열악한 무기를 가진 농민군은 점차 밀리게 되었습니다. 전략적 요충지인 전주와 논산을 빼았기고, 금구, 태인 전투 등에서도 전봉준 군은 일본군에게 밀렸습니다.(우금치 전투, 태인전투) 또 농민들의 봉기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는 것이라 생각한 양반들이 농민군에게 저항함으로서 산발적인 농민군의 봉기(기포)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잡혀 죽고 말았죠.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가할진대 어찌 컴컴한 적굴속에서 암연히 죽이는가?

때가 오니 하늘과 땅이 다 힘을 합치는데 운이 가니 영웅이라도 어찌해볼 도리없다

나라위한 붉은 마음 그 누가 알리 교수대에서 헛되이 외로운 넋이 되려는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에 대한 탄식 -

새야새야 녹두새야

웃녁새야 아랫녁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함박쪽박 열나무딱딱

-녹두장군에 대한 노래 -

법무아문(法務衙門) 대신(大臣) 서광범(徐光範)과 전봉준의 독대

  공초사료(供草史料)중에서

서광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이다.

서: 전명숙(全明淑)이라는 자는 누구냐?

전: 명숙은 나의 자(字)다.

서: 전녹두는 누구냐?

전: 사람들이 나를 그리 부른다.

서: 왜 난을 일으켰으냐?

전: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서: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없는 양민을 죽게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서: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전: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서: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전: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서: 너는 동학의 괴수(魁首)냐?

전: 나는 의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동학의 괴수라 함은 가당치 않다.

서: 동학엔 언제 입당하였느냐?

전: 삼년전이다.

서: 왜 입당하였는냐?

전: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 동학의 주의(主意)가 무엇이냐?

전: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서: 그렇대면 그대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 보다는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한 것밖에 더 되느냐?

전: 동학은 본시 우리 해동 조선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도학(道學)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서: 송희옥(宋喜玉)을 아는가?

전: 면식은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자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이 전라일도 도집강(都執綱)이요 너의 가까운 친척이라는데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전: 그는 본시 부랑자로 홀왕홀래했을 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의 기서(奇書)에 의하면 너의 재차 기포는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전: 어찌 척양척왜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있는 몇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서: 너는 대원군을 서울 운현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전: 유언비어일 뿐이다. 나는 대원군을 만난 적이 없다.

서: 동학에 남접 북접이 있다는데 그 구별은 무엇이뇨?

전: 그것은 호남과 호서의 지역적 구별일뿐 동학이 두개인 것은 아니다. 동학은 삼십년전 경주에 살던 최제우(崔濟愚)로부터 시작하였고 동학의 모든 접주는 최법헌(崔法軒)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최법헌이 팔도(八道)의 접주의 직책을 총괄한다.

서: 최법헌이 누구인가?

전: 해월 최시형이다. 이름은 최경상이다.

서: 그럼 너도 기포의 허락을 최법헌으로부터 받았는가?

전: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서: 최법헌을 언제 처음 만났는가?

전: 작년 춘삼월 보은 장내리에서였다.

서: 그때 그대는 거기서 무엇을 했는가?

전: 나는 그 대집회에 참석한 전라도 도인들의 식량을 운반하는 운량도감의 책임을 맡았으며 또 금구 원평집회를 주도했다.

여기서 어이없는 것은 일본군이 외국 혁명군인 농민군을 학살한 것에도 모자라, 양반층들은 전쟁에 진 농민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을 학살하였다는 점입니다. 여기서부터 일본군과 기득권을 가진 양반부호들의 연합은 시작되었고, 이것이 일본군의 전략상 정책으로 채택되면서 훗날 <식민지 지주제>라는 형식의 민족분열정책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음 마지막장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의 문제, 동학이 주체인가, 농민이 주체인가에 대한 주체 문제, 동학이 추구한 이상향이 근대화인가에 대한 논쟁들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찬/반의 의견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동학의 의의와 폐정개혁안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겠습니다. 짧게 하려고 했음에도, 동학에 대한 내용이 4번의 글로 이어져 버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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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토막 역사 13화) 개항기 때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돈이 쓰였을까?

1. 조선 후기에 어떤 돈을 쓰고 있었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한반도에서도 <화폐>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럼 조선 후기 이후 개항기까지 어떤 돈들이 주로 쓰였을까요?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주도하여 화폐가 쓰인 것은 고려 성종기부터입니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지고, 최승로의 건의로 유교정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고려 초기초기부터죠. 이 때의 화폐란, 국가가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어 행정적으로 사용하기 쉽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화폐유통을 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백성들은 돈의 효용성을 몰랐지요. 고려 시대 유명한 스님인 의천도 화폐 유통이 국가경제와 사원경제를 원할하게 하여 결과적으로는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세금은 현물세로 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토지세는 쌀과 콩으로, 군역은 군포로, 특산물세는 각 지역의 특산물을 직접 내는 형태였죠. 이러한 현물을 운반하는 것도 일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세금을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조선시대 대납(대신 내주고 이자붙여 받는 것), 방납(미리 내주고 후에 받는 것)과 같은 형태의 세금내기가 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된 것은 조선후기 상평통보가 사용되면서입니다. 보통 가운데가 뻥뚫린 이러한 엽전은 사용하기도 간편하였고, 가운데 구멍에 돈을 꿰어차고 다니기도 용이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되었음에도 시중에 화폐가 없어서 곤란을 겪는 <전황>이 종종 발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화폐가 재산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부자들이 화폐를 저장하기만 하였지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계속 화폐를 발행하고, 부자들은 계속 화폐를 저장만 하니 돈의 진정한 가치 중 저장가치만이 제 기능을 한 것이죠. 유통가치, 교환가치로서의 돈이 사용되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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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2. 갑오개혁 이전에 사용했던 화폐들

조선 후기부터 사용된 대표적인 돈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엽전>입니다. 영조, 정조 때 이 엽전은 돈의 구실을 제대로 하였고, 사람들은 돈을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동김씨 등이 집권한 세도정치 때에도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곤 했는데, 그 때에도 돈의 가치를 이용하곤 하였습니다. 이자를 붙여 돈을 늘리는 고리대업을 할 줄 알았던 것이죠.

이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초기에는 화폐의 균형이 잡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기존의 돈을 걷가나, 마구 새로운 돈을 발행하여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하는 사람만 내라던 <원납전>은 백성들에게 강제로 걷었기 때문에 <원망하면서 납부한다는 뜻의 원납전>으로 말이 바뀝니다. 또 새로운 돈인 당백전을 마구 찍어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달팠고, 시중에 돈이 남아도는 관계로 인플레이션을 겪기도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돈이 부족해지자 청나라 화폐를 수입하여 국내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청전>이라고 합니다.

대원군 이후, 민씨 정권이 정치를 하면서 청, 일본 등과 본격적인 무역을 시작하였습니다. 1880년대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돈들이 유통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1894년의 갑오개혁까지 우리나라의 공식화폐는 엽전이었지만, 유통된 화폐는 다양해졌죠.

1880년대 초기에 청, 일본과 무역을 하기 위해 사용한 화폐는 멕시코의 은화였습니다. 신항로 개척 이후 가장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돈이었고, 당시 세계 금융시장이 은본위 화폐제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점차 일본과의 무역량이 많아지면서 일본의 화폐가 조선시장에 들어오게 됩니다. 무역시장에서 주로 사용하던 <멕시코 은화>가 점차 <일본 은화>로 전환되기 시작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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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은화


해외 국가들과의 접촉이 많아지자, 정부는 엽전보다 더 큰 단위의 돈을 만들었습니다. 1883년부터 엽전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된 돈이 <당오전>이라는 돈입니다. 당오전은 <엽전 5개의 가치는 갖는 돈>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돈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불량 화폐가 너무 많이 많들어져서 시중에서 당오전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돈의 실제 가치는 상당히 낮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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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당오전


3. 갑오개혁 이후에 사용하게 된 화폐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본격적으로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화폐도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이 새로운 돈이 바로 <백동화>입니다. 백동화는 갑오개혁 때부터 주조되었고, 대한제국기에 대량으로 주조되면서 엽전을 대체하였습니다. 이 돈의 명칭이 백동화인 것은 원료가 <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백동화는 엽전 24개의 가치를 갖는 돈이었습니다. 당오전이 엽전 5개인데, 백동화가 엽전 24개의 가치를 갖는 돈이라면 당시 물가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겠네요.

갑오개혁 때 사용된 또 다른 돈은 <일본 지폐>였습니다. 일본 지폐는 청일 전쟁 때 일본이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대량으로 사용하면서 유통되기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897년 일본이 은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화폐단위를 바꾸면서 <일본은화> 대신에 <일본지폐, 일본금화>가 많이 사용됩니다. 일본은화와 일본금화, 그리고 우리나라의 백동화는 그 가치를 같게 하여 1:1:1로 교환할 수 있는 화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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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금화


그리나, 백동화 역시 당오전과 마찬가지로 불량 화폐가 너무 많았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백동화와 엽전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고, 백동화는 점점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백동화와 일본은화(일본금화)는 실제로는 1:1의 가치였지만, 사실 백동화 2개 이상을 주어야 일본은화와 바꿔주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일본화폐가 조선에서 대량 유통되면서 생길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대량 유통되는 일본화폐가 일본의 농간으로 모두 일본에 환수된다면 조선은 화폐 공황을 맞아 큰 위기가 닥칠 수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환수되는 일본 은화와 구별하기 위해 조선에서만 유통되는 은화에 도장을 찍었고, 도장을 찍은 은화는 조선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을 <각인 부은화>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개항기에 조선에서 유통된 화폐들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 우리 상업은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외국과의 무역 개방은 상인들에게 큰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체계적이지 못한 화폐단위는 상인들에게 변수로 작용하였습니다. 훗날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면서 실시한 화폐개혁으로 우리 상인들은 모두 몰락하게 됩니다.

일본이 실시한 화폐개혁이란, 백동화를 모두 일본화폐로 바꾸고, 일본화폐만을 공식화폐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량 백동화는 바꿔주지 않았고, 그 교환도 1:1의 맞교환이 아니였기 때문에 어지간한 재력이 있는 상인이 아니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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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2 -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1.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오늘 적을 내용은 동학에 대한 2번째 이야기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94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럼 한번 출발해 볼까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동학은 1850년대 후반부터 그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최제우가 혹세무민이라는 성리학적 명분에 의해 죽고난 이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동학은 그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이필제의 난 등을 겪으면서 동학은 점차 사회, 정치 운동까지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1870년대의 동학은 흥선대원군 대신 친일적인 성향의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반봉건 운동을 일으킬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학은 1862년 임술농민봉기 등 정부에 의해 크게 진압당해본 경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차분히 교세를 확장하고, 때를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이가 2대 교주 최시형이었습니다. 최시형은 이필제의 난이 실패한 이후 동학의 구조를 양반중심에서 농민중심으로 개편하고, 농민 스스로를 개혁의 주체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이 외세의 압력으로 실패하고, 갑신정변이 농민층을 배제하면서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도 동학은 더 이상의 정치적 논리에 쉽게 휩쓸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894년은 뭔가 한번쯤 사건이 터질 만한 국내외적 분위기였습니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난지 30년이 지나면서 농민층의 불만이 쌓일만큼 쌓인대다가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인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농민들은 이미 부패한 나라를 씻어낸다는 반봉건의 이념에,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는 청과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불만까지도 가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시형은 참고 또 참고 있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종교운동을 표방하는 교주 최시형과는 다르게 독자적인 성향으로 활동하는 세력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사상은 최시형의 온건노선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동학에서 당시 큰 세력은 전봉준, 황하일 등의 남접과 보은 집회를 연 최시형, 손병희 등을 북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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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동학의 확대 지역

2. 점차 정치적인 성격의 집회로 발전해가다.

동학농민운동은 1892년까지만 해도 비교적 종교적인 성격을 가진 집회가 열리곤 했습니다. 예로 1892년 전라북도 삼례집회에서의 요구사항도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1893년 서울 집회에서도 최시형 등 동학대표 40여명이 광화문 앞에서 <농민들은 동학이 결코 국가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종교운동적 차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893년 3월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의 요구는 달라졌습니다. 농민들이 많이 모이면서 요구사항도 <농민들을 괴롭히는 일본의 축출과 탐관오리들의 숙청>으로 바뀐 것이지요. 물론 교조신원운동도 하였구요. 농민들의 요구는 이제 <척양척왜 : 서양도, 일본도 적이다>라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정부는 1893년의 집회가 보은, 금구 등에서 계속되자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종교운동이라면 달랠 수 있겠지만, 이제 주체세력이 현실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농민층으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죠. 동학의 운동은 점차 운동을 넘어 <개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혁명>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것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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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880년대 이후 농민항쟁의 증가 추이

특히 전봉준 등의 남접 우두머리들은 최시형, 손병희 등의 북접의 우두머리들이 연 보은 집회와는 별도로 금구집회를 열어 집회 후 1만명의 농민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려고도 하였습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아니였어도 동학농민운동은 언젠가는 일어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1880년대 이후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농민봉기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에, 그 무리 4000여 인들은 전라도 전주 근방에 모여 감사에게 3개조의 요구를 제기하였다.

첫째, 국인 가운데 우리 당을 지목하여 사악함을 주창한다고 하면서 경멸하는 이가 있으니, 명령을 발하여 그 어리석음을 바로 잡을 것

둘째, 외국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니 속히 쫒아낼 것

섯째, 요즈음 지방 관리들이 포악하게 거두고 억지로 빼앗아 생민이 도탄에서 고통을 당하니, 마땅히 이들 지방 관리를 쫒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3개조를 들어주지 않는 동안에는 우리들 4000여인은 한 걸음도 이 곳에서 물러날 수가 없다고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1893. 4. 18, 전봉준의 요구와 금구 집회-

3. 고부에서 농민봉기가 시작되다.

동학농민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전라도 고부 지역이었습니다. 전라도 고부에는 만석보라는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은 이미 저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강 하류에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고 가혹한 세금을 걷었습니다. 전봉준 등 고부 군민들은 2차례나 고부관아에 세금을 감면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강제로 쫒겨나기도 하였습니다. 농민들은 참을 수 없어 고부 군수인 조병갑을 죽이고 봉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일으킨 횡포가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탐관오리의 횡포가 만연한 시기였죠. 문제는 그 횡포를 바라보는 농민들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1893년의 집회를 여러차례 경험하고, 서로 의견을 나눌 시간이 많았던 농민들인 더 이상 참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때 농민들의 봉기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고,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이 농민들을 달래면서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을 엄하게 다스리려고 하면서 문제가 다시 커졌습니다. 이용태는 민란의 주동자인 전봉준 등에게 역적죄를 적용하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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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가운데 사람이 전봉준

결국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농민 대표들은 백산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1차 동학농민전쟁을 시작합니다.전봉준이 농민들을 모으기 위해서 만든 아이디어는 사발통문이었습니다. 사발통문이란,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원으로 이름을 적어 누가 지도자이고 주동자인지를 모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림을 보면 이름이 원으로 둘러 적혀있어서 누가 주동자인지 모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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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사발 통문의 원본

사발통문의 내용(판독된 부분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 이때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집행본부)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감을 효수할 것

1.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1.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의 것을 빼앗은 탐리를 공격하여 징계할 것

1.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로 바로 향할 것

위와 같이 결의가 되고 따라서 전략에 능하고 만사에 민활한 영도자가 될 장.....

이제 농민들을 모아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럼 백산의 격문과 농민들의 행동 강령을 한 번 볼까요?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本義)가 결단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요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强敵)의 무리를 축멸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밑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수령(方伯守令)밑에서 굴욕당하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이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 호남창의대장소, 백산봉기문 -

첫째,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죽이지 마라!

둘째, 충과 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하라!

셋째,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를 깨끗이 하라!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있는 자들을 모두 박멸한다.

- 동학농민군의 4대강령, 대한계년사 권 2, 갑오조 -

백산격문을 보면 전봉준 등이 봉기한 이유가 단지 고부라는 한 마을의 사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의 1차 봉기는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나라를 제 자리에 되돌리겠다는 의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지역문제였다면 전국에서 농민들이 모두 모이는 대규모 전쟁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은 사회의 모순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동학농민의 1차 봉기는 고을 단위의 봉기가 아니라 각 지역의 농민들이 힘을 합쳐서 중앙정부에 항거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농민군은 민란을 일으킨 후 당황하는 정부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습니다. 물론 핵심적인 내용은 <탐관오리의 처벌, 세금의 공정한 부과와 잡다한 세금 혁파>가 요구사항이었습니다. 또 균전사의 수탈을 시정하라는 것도 요구사항의 내용이었습니다.

균전사는 1890년대부터 정부에서 지금의 전라북도 서부(군산, 익산, 고창, 정읍을 잇는 황해 루트)의 11개 고을의 개간사업을 위해서 파견한 관리를 말합니다. 균전이란 말 그대로 토지를 균등히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균전사들은 왕실의 힘을 등에 업고 농민들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개간 사업에 필요한 돈을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관리하고, 지대를 걷어가기도 하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중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나쁜 탐관오리들이 잡다한 세금을 핑계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 때문이었죠.

농민들은 장성전투, 황토현 전투에서 싸울 의욕이 없는 정부군을 격파하고 전라도의 중심지 전주까지 입성하게 됩니다. 실제 전라도 지방의 정부군은 농민군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하였습니다. 지방군 자체가 농민들 중에서 착출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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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정부군에 잡혀 있는 동학농민군

4. 농민들이 전라도를 스스로 다스리다.

농민들이 전주를 점령하자 정부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의 군대가 농민군에게 연전연패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정부는 바로 청에게 연락을 하여 원병을 요청합니다. 1894년 5월 청나라군이 조선에 입성하였습니다.

문제는 청과 일본이 갑신정변에 맺은 톈진 조약에 의해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자 일본군도 같이 충병하였다는 것입니다. 갑신정변 때 길게 서술한 톈진조약 기억하나요? 청과 일본은 조선에 출병과 철수를 상의하여 같이 처리한다는 조약이었죠. 우리나라 정부는 일본군이 조선에 오자 또 다시 당황합니다. 청을 통해 농민군을 진압하려다 일본이라는 여우새끼를 불러들이게 된 것이지요.

정부는 청과 일본에게 군사를 돌려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고, 농민군과는 타협으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였습니다. 농민과 타협하기 위해 고종이 농민들에게 했던 따끔한(?) 한마디를 살펴볼까요?

관리의 탐학과 살상은 내 반드시 엄하게 징치하리라. 세상에는 대의가 있는 것이요 조정에는 명분이 있는 것이다. 어찌 진을 치고 기를 꽂아 창의라 내세우며 대의를 어지럽히는가? 너희들은 모두 양민이니 각각 집으로 돌아가 업에 편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들의 소원을 펴게 하리라.

- 고종 황제의 글 -

농민들 역시 청, 일본이 조선에 와서 설치는 것이 불안하였습니다. 농민군은 전쟁 50일만에 정부와 타협을 하였습니다. 타협의 조건은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사항의 일부를 들어주고,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한다는 내용입니다. 단, 농민들도 더 이상의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것도 추가되었죠. (전주화약)

이제 농민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처럼 모든 사회를 뒤집어 엎어 버린 혁명은 아니였지만, 스스로 싸워 자신들의 요구를 현실로 바꾼 것입니다. 농민들은 전라도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도 53곳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정청>을 설치하고 국가적인 개혁 사업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1894년 같은 해의 갑오개혁으로 일부 계승됩니다.

집강소 정강

1. 인명을 함부로 죽인 자는 벨일
  1. 탐관오리는 뿌리 뽑을 일
  1. 횡포한 부호배를 엄징할 일
  1. 유림과 양반배의 소굴을 토멸할 일
  1. 잔민 등의 군안을 불지를 일
  1. 종 문서는 불지를 일
  1. 백정의 머리에 폐랑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일
  1. 무명 잡세 등은 혁파할 일
  1. 공사채를 물론하고 과거의 것은 모두 따지지 않을 일
  1.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벨 일
  1.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일
  1. 농군의 두레법은 장려할 일

농민들은 12개조의 폐정개혁안을 발표하고 전근대적인 <구제도의 모순>을 바꿔나갑니다. 12개조의 내용은 대부분 사회체제의 개혁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습니다. 12개조의 내용도 한번 볼까요? (내용 분석은 동학농민운동 4부할 때 몰아서 하겠습니다.)

①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② 탐관 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⑤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⑥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⑦ 청상 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⑧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⑨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⑩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⑪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자 이제 1차 동학농민운동이 끝났습니다. 혁명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농민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몇 달도 가지 못합니다. 일본 때문이었지요. 다음 장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인 <일본군과의 전쟁>을 한번 다루어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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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860년대 이후 위정척사는 계속되었다.

1. 위정척사란?

흥선대원군이 18363년부터 집권하여 안동김씨의 노론 세도 가문을 축출한지 10년... 1873년 민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대원군이 실각하고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개화정책은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조선책략이 유입되면서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 사상을 우리 전통 유교주의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당연히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아무런 근거없이 서양을 싫어해서도, 조선 왕조를 지탱하는 신분질서의 하나인 성리학을 수호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였습니다. 물론 통상요구가 조선의 신분제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흔들기는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나름대로 논리있게 반박하였습니다.

성리학의 근본질서를 옳은 것(正)으로 여기는 것을 위정이라 하고, 서양의 문물을 악으로 보아 사(邪)라 하는 것을 척사라 하여 이러한 사상을 <위정척사>라고 합니다. 그럼 위정척사의 핵심 내용들을 한번 볼까요?

2. 대원군기의 위정척사(1863-1873)

흥선대원군이 막 집권하던 시기는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고,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베이징을 함락시킨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열강들이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던 시기입니다. 또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킨 이후 그 통상영역을 조선에 까지 확장하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외세를 몰아내고 척화비를 건립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부터 1871년 신미양요까지 조선은 통상을 요구하는 외세의 압력과 직접 맞싸워야 했습니다. 또,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으로 조선민들은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이 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1860년대의 위정척사운동이란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인식으로 외국과의 통상은 곧, 매국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박규수, 오경석 등 초기 개화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집권층이 대원군 정권과는 연결되지 못하고, 개별적인 개화 주장을 해야 했습니다.

위정척사론은 외국과 통상을 했을 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화이사상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 내용이긴 하지만, 이미 중국과 일본이 외세에 넘어간 상황에서 우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서양 침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나열한 논리적인 반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논리속에는 서양에 대한 두려움과 유교사상의 입장에서 본 서양인의 <짐승>같은 행위들에 대한 좁은 시선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럼 몇 가지 글을 한 번 볼까요?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오늘날 양적의 침입을 당하여 군론이 교(외교)와 전(전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내 나라 쪽 사람, 곧 국변인의 주장이고, 양적과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국 쪽 사람, 곧 적변인의 주장입니다. 전자를 따르면 나라의 의상지구(조선문화의 전통)를 보전할 수 있지만, 후자에 따른다면 인류(조선인)가 금수의 지경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 점이 양적과 싸우니냐 화친하느냐 하는 차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근본을 잡는 신념, 곧 겸이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이항로, 화서집 권 3, 소차, 사동부승지겸진소회 -

1860년대 대표적인 위정척사 사상가 이항로의 화서집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위 내용에서 보면 1860년대 위정척사 사상이 <인수지별>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항로는 신미양요 후 세운 척화비에 대하여 열렬하게 지지한 유생입니다. 그는 서양의 물건을 사는 것은 <농산물>을 <공산품>과 교환하게 됨으로서 나라의 경제가 망하여 외국에 종속된다고 주장하면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최초로 꼬집여낸 성리학자입니다.

따라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백성들에게 알려서, 서양의 물건을 사지 않고 서양이 통상을 요구하는 목적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신제가부터 해서 집안을 잘 단속하고, 유교윤리에 맞는 경제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유교 윤리에 따른 경제관은 농업중심의 생필품 교환과 검약 정신입니다. 따라서 유교윤리를 통해 서양을 차단하기를 주장하였고, 이 논리에 의하면 유교적 윤리를 모르는 서양과 일본은 <짐승>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 당시의 주장은 만약 외세가 통상을 계속 요구한다면,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한 <척화주전론>과도 연결됩니다. 이 척화주전론을 실행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척화비>를 세운 자가 바로 흥선대원군이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모든 유생들이 개화 정책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양반들 중에서는 개화사상을 인정하는 학자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유생들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던 것이지요. 특히 위정척사를 전개했던 유생들은 이항로, 이만손, 최익현, 기정진 등 서울 근기쪽의 전통 성리학자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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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 선생과 추도비

3. 민씨 정권 집권 후 위정척사운동(1873-1880)

대원군이 축출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위정척사를 전개하던 유생들은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민씨가 강화도 조약을 맺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이죠. 이제 유생들은 단순히 통상 거부 운동 차원을 떠나서 <개항>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논리적으로 펴기 시작합니다. 흥선대원군 때에는 쇄국정책이 국론이었기 때문에 유생들이 국가 정책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위정척사파들은 민씨와 개화파들에 대하여 <반정부투쟁>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의 위정척사운동은 흔히 <개항 반대 운동>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최익현의 5불가소입니다. 한번 봐야겠죠?

 대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약점을 보고 이를 숨기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들이 우리가 방비가 없고 약함을 보이는 실상을 알고서 우리와 강화를 맺는 경우 앞으로 밀려올 구렁텅이 같은 저들의 역심을 무엇으로 채워주시겠습니까? 우리 물건은 한정이 있는데 저들의 요구는 그침이 없을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응해주지 못하면 저들의 노여움은 여지없이 우리를 침략하고 짓밟아 우리가 이전에 들인 모든 노력은 허망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불러들이는 첫째 이유입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적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모두가 지나치게 사치하고 기이한 노리개고 손으로 만든 것이여서 그 양이 무궁하지만, 우리 물화는 모두 백성들의 생명이 달렸고 땅에서 나는 것이어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피와 살이 되어 백성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유한한 물화를 가지고 저들의 사치하고 심성을 좀먹고 풍속을 음란하게 하는 물화와 교역한다면 그 양은 틀림없이 1년에도 수만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면 동토 수천리는 몇 년 안 지나 땅과 집이 모두 황폐하여 다시 보존하지 못할 것이고 나라 또한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둘째 이유입니다.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이옵니다. 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의 서적과 천주의 초상화가 교역하는 속에서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선교사와 신자 간의 전수를 거쳐 사학이 온 나라 안에 퍼질 것입니다. 포도청이 살피고 검문하여 잡아다 베려고 하면 저들의 사나운 노기가 또한 더욱 커질 것이고 강화로 맺은 맹세가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 집집마다 사학을 받아들이고 사람마다 사학에 물들 것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아비라 여기지 않고 신하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아 예의는 시궁창에 빠지고 인간들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셋째 이유입니다.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저들이 상륙하여 서로 왕래하고 또는 우리 지경 안에서 집을 짓고 살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강화하였으므로 거절할 말이 없고 저절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두면 재물이나 비단과 부녀자들을 빼앗는 일을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도대체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또한 저들은 얼굴만 사람이지 마음은 짐승이어서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짓밟을 것입니다.

- 최익현, 면암집 권 3, 지부복궐척의소 -

5불가소에서 최익현은 서양과 통상을 했을 경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일본과의 통상도 안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정리했네요. 5가지 이유를 볼까요?

1. 개항 반대운동 : 일본의 강요에 의한 조약을 맺으면 일본의 탐욕에 노예가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2.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 : 개항 후 수공업품과 농산물 교환이 이루어지면 나라의 경제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18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이 우리에게 수출한 영국산 면제품과 조선쌀의 무역은 방곡령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촌을 망치는 것이었고, 결국 동학 농민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동학 운동 중에서도 이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 왜양일체론 : 70년대 개항 반대의 가장 큰 논리가 바로 이 <왜양일체론>입니다. 즉, 서양과 일본은 사실 같은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지요. 메이지 유신 이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서계 문제 등으로 우리에게 행패를 부렸고, 이들은 서양의 사교 및 짐승같은 윤리를 우리에게 강요할 것이니, 대원군의 쇄국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풍속의 교란 문제 : 일본인이 부녀자를 능욕하고, 윤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할 것이니 개항을 하면 인륜이 바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5. 인수지별론 : 이것은 일본 역시 프랑스, 미국과 같은 짐승들이니 짐승이 인간과 같이 살수 없다는 사람, 금수의 구별론입니다. 위정척사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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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4. 조선책략 유입 후 위정척사 운동(1880~)

앞 포스트에서 설명했었죠? 조선책략은 두말 할 것 없이 중요한 우리 나라 개화의 지침서입니다. 이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민씨정권이 미국과 수교를 맺고, 별기군을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를 실시하자 위정척사운동은 <정권타도>를 외치며 폭력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80년대 위정척사파들은 조선책략 태우기 운동을 하며 개화파들을 적대시합니다. 이제, 국가 안에 아군과 적군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지요. 특히 이만손이 올린 <영남만인소>는 위정척사 사상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영남만인소 역시 논리적인 어조로 조선책략의 유입이 왜 문제인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만손에 동조한 조선의 최고 재상 홍재학의 상소입니다. 홍재학은 이 상소로 말미암아 고종의 눈에서 벗어나 나중에 죽게 됩니다.

    대개 서양의 학문은 천리를 어지럽히고 기강을 소멸시킴이 심하다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양의 물건은 대부분 음탕하고 욕심을 유도하며, 유교 윤리를 깨뜨리고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며, 천지를 거역하는 것들입니다. 서양의 학문과 물건은 귀로 들으면 창자가 뒤틀리고 수컷이 다른 것으로 바뀌며 눈으로 보면 창자가 꼬이고 위가 뒤집히며, 코로 냄새를 맡고 입술로 그것에 닿게 하면 마음이 변하여 실성하게 되니 이는 곧 그림자가 서로 부딪치고 전염성이 서로 감영되는 것과 같으며, 그 사람의 좋고 싫음이 향배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상을 받들지 않는다 해도 예수교의 책을 읽게되면 성인에게 죄를 얻는 시작입니다. 전하의 백성들의 과연 귀와 눈과 코와 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라 안의 실정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 홍재학의 상소  -

위정 척사는 정조 임금 이래로 내려온 조정의 기본 정책으로서 아직도 그 의리가 빛나는 바, 전하의 친정 이래로 왜양일체의 해를 모르고 일본과 통상을 주장해 온 결과 사설과 이의가 횡행하여 국가의 사태가 위급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양물과 아소라는 사교의 위세로 공맹의 태도는 날로 사라져 가정에는 윤리가 깨지고 사람에게 예의가 허물어진 결과, 종묘 사직이 무너질 위기에 있으니 전하께서는 더욱 위정척사의 대위를 밝혀 주시어 ‘주화매국’하려는 신료를 처단해야 합니다. 신설된 아문을 폐쇄하여 옛 제도를 복구하고 경비를 절약하여 사치를 금하고 언로를 넓혀 지혜를 모으고 정학을 장려하여 사악함을 막아 기강과 민력을 떨친다면 상하원근이 한 마음으로 뭉칠 수 있으니, 그렇게 될 때 동왜와 서양을 막을 수 있으며 북쪽 러시아도 우리에게 위압될 것입니다.

- 일성록, 고종 18년 윤 7월 6일, 홍재학의 상소 -

위정척사운동이 격해지자 고종이 직접 조서를 내리는 등 개화정책 추진을 위해 유생층을 달래는 시도를 계속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한 임오군란으로 돌아오기도 하죠. 고종이 개화를 위해 유생들을 달래려고 한 시도들을 한번 볼까요?

왕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바다의 한쪽 구석에 처하여 다른나라와 교섭해보지 않은 관계로, 견문이 넓지 못하고 고스란히 제 지조나 지키면서 500년을 내려왔다.

최근에 천하 대세는 옛날과 아주 다르다. 유럽과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 곧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은 정밀한 기계를 제조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해 세계 수많은 나라들과 조약을 맺어, 병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국제공법으로 서로 대치하기를 마치 춘추 열국 시대와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홀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중국도 오히려 평등한 처지에서 서로 조약을 맺으며, 서양을 엄하게 배척하는 일본도 결국 서로 선린 관계를 맺고 통상을 하니 어찌 까닭없이 그렇게 하겠는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논의를 벌이는 사람들은 또한 서양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지고 장차 예수교에 물들 것이라 여긴다. 이것은 물론 유교와 세상 교화를 위해서 매우 걱정스런 일이다. 그러나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은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고 종교를 막는 일은 원래 종교를 막는 문제이며, 조약을 맺고 통상하는 것은 만국공법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설사 어리석은 사람들이 몰래 배운다 하더라도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는 이상 처단하고 용서하지 않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숭상하고 물리치는 데는 딴 재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배척하고 도구와 기물을 본받는 것은 원래 병행하여도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는다. 더구나 강하고 약한 형세가 두르러진 조건에서 그들의 도구와 기물을 본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며 그들이 념겨다보는 것을 막겠는가. 참으로 안으로는 정사와 교화를 잘하며 밖으로는 이웃 나라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우리나라 예의를 지키면서 각 나라와 대등하게 부강한 나라로 발전시켜 일반 백성들과 함께 태평세월을 누린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 고종실록, 고종 19년 8월 5일 -

   저들의 종교는 사악하다.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치장한 여자를 멀리하듯이 해야 한다. 하지만, 저들의 기술은 이롭다. 잘 이용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다면 농업, 양잠, 의약, 병기, 배, 수레에 대한 기술을 꺼릴 이유가 없다. 종교는 배척하되 기술을 본받는 것은 함께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결코 충돌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강약의 형세가 이미 큰 격차로 벌어졌다. 만약 저들의 기술을 볻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들에게 모욕을 받지 않고 저들이 엿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 1882년 8월 5일, 고종이 내린 개화 조서 -

5. 1894년 - 동학과 갑오개혁 이후의 위정척사운동

1890년대로 가면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이제 위정척사운동은 통상 반대운동, 개항 반대운동, 조선책략 불태우기 운동을 넘어서게 됩니다. 이 때의 위정척사운동은 곧 <민족적인 항일 투쟁 운동>으로 점차 전환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이제 양반 유생들은 <일본과 서양은 금수가 아니라 만국공법상의 법에 의해 위법한 행위를 하는 상대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또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 일부 농민들도 위정척사에 흡수되었고, 그 결과 유인석, 신돌석 등의 평민의병장이 나올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마련됩니다. 즉, 1890년대 이후는 위정척사가 항일 의병 운동으로 전환되는 기점이며, 1910년 국권 피탈을 기점으로, 항일 의병 운동은 대일본 폭력 투쟁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이 부분은 구한말 의병운동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6. 동도서기의 입장에서 위정척사를 전개한 이들

성리학 유생이라고 해서 모두 위정척사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이 당시 위정척사의 입장이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 실행 내용에 있어 개화사상과 중간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주장도 한번 볼까요?

형이상을 도라 하고 형이하를 기라고 한다. 도는 형상이 없어 기 속에 머무르니 도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기를 버리고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므로 군자의 학은 체(體, 몸)와 용(用, 기술)을 서로 밑천 삼고 기와 도를 같이 익히는 것이다.

- 속음청사, 상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뀔 수 없는 것이 도(道)이고, 자주 변화하여 고정될 수 없는 것은 기(技)이다. 무엇을 도라 하는가? 삼강(三綱), 오상(五常)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도라고 한다. 요순, 주공의 도는 해와 별처럼 빛나서, 비록 오랑캐 지방에 가더라도 버릴 수 없다. 무엇을 기라고 하는가? 예악(禮樂), 형정(刑政), 복식(服食), 기용(器用)을 기라고 한다. 당우삼대 조차도 덜하고 더함이 있거늘 하물며 수천년 뒤에 있어서라! 진실로 때에 맞고 백성이 이롭다면, 비록 오랑캐 법일지라도 행할 수 있다.

- 신기선전집 -

기계의 재주와 농수의 책이 진실로 이롭다면 반드시 선택해서 행할 것이며, 그 사람 때문에 양법을 꼭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 고종실록, 고종 18년 7월 18일, 곽기락의 상소 -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유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도(道)가 되었습니다. 수레, 배, 군사, 농업, 기계는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기(器)가 되니, 제가 바꾸고자 하는 것이 기인 것이지, 도가 아닙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12월 22일, 윤선학의 상소 -

곽기략, 윤선학 등 일련의 유생들은 우리 것을 지키더라도, 서양의 유용한 것들을 꼭 버릴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성리학의 정신적 사상체계는 민족의 양식으로서 지켜나가고, 서양의 기술은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유교주의 국가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선 건국 당시 허영 일파의 실천적 성리학과 비슷합니다.

7. 위정척사운동의 한계점

위정척사운동은 서양이 통상, 개화를 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고 대처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이 운동은 우리 국익을 위한 애국적인 성격을 가진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단순히 외세를 배격하여 우리 전통의 것을 지키자는 논의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외세의 침략 의도와 나쁜 점은 알았지만, 그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였죠. 당시 조선의 가장 큰 과제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였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성리학적 전통질서와 봉건질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서 격변기의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또 반외세를 지향했으나, 지배 신분층인 입장으로 적극적인 반봉건 노력이 없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즉, 농민들이 원하는 것은 신분제 폐지, 양성평등, 토지제도 및 조세제도 개혁 등이었으나 이들은 이러한 문제를 외면하였습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은 적어도 1880년대까지는 양반 위주의 신분적 운동이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을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에서 분석해 볼까요?

정치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조선왕조의 전제주의를 긍정합니다.

경제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지주전호제를 긍정하고, 전통 유교질서의 경제관을 고수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신분제도를 옹호하고 성리학적 신분관을 그대로 적용하였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부분에서 위정척사운동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운동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빈체제에서 복고주의, 정통주의, 보수주의를 외치는 장면이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운동에서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다음 포스트에서는 위정척사운동과 개화세력의 대립이 극에 이르게 된 <임오군란>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김광진 외, 1963, 조선경제사상사, 과학원출판사 : 1989, 이성과 현실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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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오늘부터 다룰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입니다. 그 중 맨 처음으로 개화기의 중요한 역사적 흐름과 사건을 주제별로 묶어서 포스팅 하보도록 하죠. 오늘은 그 첫 번째로, 1860~1900년대까지 개화기의 전반적 흐름을 개관하는 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1. 1870~8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80년대의 한국사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키워드는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정부주도의 개화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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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화정책과 관련된 조선책략>

한국사회에서 1850년대는 세도정치의 여파로 각종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사회모순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또 밖으로는 서양의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가 서구의 아시아 진출로 인하여 또 다시 재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1862년에는 세도정치에 대한 대대적인 항거인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의식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하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1863년부터 딱 10년간 정권을 잡은 사람이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삼정의 문란과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재정립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가문과 양반벌족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만은 1873년에 축출되고 맙니다.

대원군을 몰아낸 명성왕후 세력은 1895년까지 조선 사회를 <개화>라는 맥락에서 이끌어갑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게 되었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개화정책이 정부주도로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1880년대의 조선 사회는 이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조선책략을 수용하여 1882년 미국과 수교를 맺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조선책략을 통한 대미수교에 대하여 양반유생들을 비릇한 전통 성리학자들은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대대적인 위정척사운동으로 연결되고, 1882년 임오군란에서도 이러한 반대논리가 표출됩니다.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이 절정에 맞이하면서 반개화세력과 마찰을 빚은 가장 큰 사건은 1884년의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급전적 개화파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세력을 개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사건이었으나 보수파와 청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는 <청>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졌고, <일본>역시 경제적인 침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는 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외세의 경제적 침략은 1889년 방곡령을 계기로 노골화되고,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청, 일본이 대립하게 됩니다.

2. 189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90년대 한국사의 키워드를 말하라고 하면 <일본이 청, 러시아를 제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90년이 되면서 한반도에서는 일본, 청이 각각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치, 경제적으로 대립하는 형세였습니다. 또, 방곡령 등을 계기로 반외세의 기운이 높아지고, 국내 정치의 문란으로 인한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층의 불만은 <임술농민봉기>가 30년이나 지난 시점에 다시 불붙고 있었습니다.

결국 1894년 농민들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농민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외세인 청,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고, 청과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직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은 일본의 입맞에 맞는 개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본은 1990년 중반을 기점으로 조선에서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잡게 됩니다. 비록, 삼국간섭에 의해 청나라에서의 주도권은 잃었지만,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갑니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개혁> 등을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고종은 1896년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버립니다.(아관파천) 이 사건으로 우리 나라는 국가의 무능력함을 대외에 크게 알리게 되었고, 결국 이 사건이 우리나라의 각종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이권수호운동 및 고종이 다시 궁으로 돌아올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됩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 이후, 환궁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후 황제가 되어 <광무개혁>을 실시합니다.

여기까지가 개화기 1860-1990년대까지의 대략적인 역사 줄거리입니다. 당시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만, <사회모순과 외세에 대한 농민의 저항과 정부의 개화정책 실패>라는 큰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럼 하나하나 개화기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그리고 중요 사건순으로 묶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화기, 그 격동의 한국사로 갑니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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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 14조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② 왕실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 ·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③ 국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 ·비빈 ·종실 및 척신이 간여함을 용납치 아니한다.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⑥ 부세(賦稅)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⑦ 조세부과와 징수 및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⑧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⑨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l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⑪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⑫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⑭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참고글 : 갑오개혁 중 2차개혁기에 씌인 홍범 14조는 갑오개혁 전반에 대한 지침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개혁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보겠습니다. 물론, 갑오개혁에 대한 자율성론과 타율성론의 논쟁이 치열해서 관점에 따른 평가는 조금 다르지만, 일반적인 교과서적 입장으로 서술해보겠습니다.

1. 정치 : 왕권과 언관권을 동시에 약화하면서 내각이 강화되었습니다. 청과 주종관계를 청산하고, 건국기인 1392년부터의 개국연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여 왕의 상징적 권한은 내세우지만, 실제 왕의 인사권은 제한되었고, 삼사와 언론기권을 폐지하였으며, 과거제도도 폐지합니다. 궁내부와 의정부를 분리하여 의정부와 8아문의 권리를 강화하였습니다.

2. 경제 : 왕실재정을 경제적으로 제한하여 재정을 탁지아문이 일괄적으로 일원화하여 관리하였습니다. 또 은본위제의 조세 금납화를 실시하고, 도량형을 통일합니다.

3. 사회 : 신분제를 폐지하여, 노비가 공식적으로 소멸합니다. 조혼, 고문, 연좌제 등이 폐지되고 과부가 제가되는 등 동학농민군의 요구사항이 많이 관찰된 부분입니다.

4. 군제 : 훈련대와 시위군이 설치되지만, 왕실 호위수준의 군대일 뿐 군대의 규모는 축소되어 이것을 근거로도 갑오개혁의 타율성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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