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퀴즈 - 세계사 0914

역사퀴즈 - 세계사 인물 일화 퀴즈 0914

오늘은 서양 역사 위인들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든 퀴즈입니다.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만을 이용해 주시고, 채점 및 오답확인 버튼 눌러주세요!!

1.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그는 영국 르네상스와 해외 진출 시대를 지휘한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에 경제 고문(16세기)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금융'이란 무엇인가를 여왕에게 강의했으며, 런던거래소를 만들어 '증권'과 '주식'에 대해 새 장을 열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대학을 설립해서 유명해지기도 했었다.

그가 남긴 명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경제 이론에 대한 일화이다.

만약에 똑같은 100원짜리 동전이 있지만, 하나는 은이 많이 함유된 신권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구권이라면 사람들은 어떤 돈을 쓰겠는가?

또 만약 깨끗한 돈과 낙서가 된 돈이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돈을 더 빨리 쓰려고 하겠는가? 만약 같은 가치의 돈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 가치가 다르다면 좋은 돈(양화)는 집안에 꼭꼭 숨겨둘 것이고, 나쁜 돈(악화)는 시중에 계속 돌게 될 것이다. 결국 나쁜 돈이 좋은 돈의 유통을 막고 그것을 저장하게 하므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이것을 바로 그의 이름을 따서 ______ 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 말은 1558년 그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쉬운 설명으로 경제학 충고를 하기 위해 편지를 보낼 때 제목으로 적은 말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독재자인 제임스, 찰스 왕가가 이어지자 이 말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왕이 꼭꼭 숨겨두고 아껴두던 인재들은 독재자들에게 다 제거되었고, 간신들이 정치, 경제쪽에서 활개를 쳤다.

그가 죽은 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간신배들이 설치고 숨어있던 인재들은 제거된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1.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① 윌터롤리        ② 드레이크         ③ 그레셤
④ 제로섬           ⑤ 셰익스피어      ⑥ 스펜서    ⑦ 베이컨

 

2.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레스토랑이나 카페같은 곳에서 음식을 먹었는데 돈이 모자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때 쓰는 격언으로 '_____의 십오분' 이라는 말이있다.

그가 프랑스와 1세 왕의 명으로 로마에 갔다가 여비가 떨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 신분상 돈이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때 그가 15분만에 생각한 계책은 이것이었다.

일단 자신을 저명한 의학자라고 말한 뒤, 자신이 프랑스 왕과 왕비를 독살하기 위해 독약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즉, 프랑스왕을 제거해서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경찰이 출동해서 그를 체포했고, 중대 범인으로 분류되어 파리까지 정중한 대접을 받고 여행을 하면서 프랑스와 1세 앞까지 갈 수 있었다. 그는 위트로 위기를 넘기고 국가적 망신도 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쓴 유명한 저서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는 천재적인 두뇌에 매우 위트넘치는 인물인 '파뉼주'가 등장한다. 파뉼주는 매우 총명하지만, 그의 두뇌를 쓸데없는 곳에만 사용한다. 파뉼주는 사악하고 거짓말을 잘하며, 자신이 당한만큼 철저하게 복수하는 것을 매우 잘한다.

그 역시 프랑스 왕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철저하게 부서버릴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다행이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그는 충신으로서 일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2. 위 지문에서 말하는 '_____의 십오분'에 들어갈 인물은 누구일까요?
① 플루타르크            ② 레쉴리에            ③ 반 자크
④ 프랑수아 라블레    ⑤ 필립 시드니        ⑥ 카르멘

 

3.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꽃을 피운 인물이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그리스 동맹국들에게 아테네 여신과 아폴론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1) ____ 섬에 공동 자금을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강압적으로 공물을 받았기 때문에 아테네와 동맹국들의 동맹은 (1) ______ 동맹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동맹이 끝난 후, 강압적인 공물 헌납으로 아테네는 주변 도시국가들의 불만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2)______ 섬에서 열리는 올림피아 제전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치루기도 했다.

(2)______ 섬은 이오니아 해안의 남쪽에 있는 섬으로 이곳은 학문과 사교의 중심지이자, 제우스 신전이 있는 국제 종교회의장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열리는 경기는 그리스인의 민족적 유대를 강화하고, 모든 그리스인은 신화에 나오는 여인 <헬레네>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스스로를 <헬레네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열린 올림피아 제전은 경주,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멀리 뛰기, 레슬링의 5가지 종목이었다. 이 다섯 가지가 열린 이유는 바로 다섯 가지 종목이 페르시아 등 이민족과의 전쟁 때 필요한 핵심 군사훈련 항목이었기 때문이다.

 

3. 위 내용을 바탕으로 빈칸에 들어갈 섬 2개의 이름을 골라주세요.(정답은 2개입니다.)
① 델로스        ② 시라쿠라        ③ 간디아
④ 로도스        ⑤ 크레타           ⑥ 파마구스타    ⑦ 살로니카

 

4.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신들은 피에 목말라 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잉카 문명의 최후 지도자 몬테수마 1세였다. 그는 신대륙을 점령하고자 하는 에스파냐의 코르테스 장군이 성경을 앞세워 학살을 자행하자 이 말로 침략군을 비꼬았다고 한다.

3백년 뒤,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파가 정권을 잡고 공포정치를 했다. 지도자인 ______ 는 길로틴 박사와 함께 단두대(길로틴)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잘랐다.

일년에 2천명의 목이 잘렸으니, 하루 평균 몇 명이 죽은 것일까? 같은 자코뱅 파의 꺄뮤 템란인간을 위한 혁명으로 '인간이 잔인하게 학살되는' 현장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혁명위원회가 사람들을 학살하니, 자신은 '자비위원회'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구해겠다고 선전물을 뿌린 것이다.

혁명은 아름다울 줄 알았으나, 잔인했다는 것을 깨달은 까뮤 템란은 마지막에 자신과 몬테수마 1세를 동일시 하면서 마지막 선동 문구에 이렇게 적고 체포당했다.

'신들은 피에 목마르다'

후대 소설가들은 평범한 삶 속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는 이들이 좌절할 때 이 문구를 애용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피에 목마른 공포정치를 했던 _____________ 도 결국은 공포정치를 반대하는 이들에게 붙들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4. 동료에게 까지 피에 목마른 자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극빈층을 위한 과격한 정책을 시도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 혁명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① 나폴레옹         ② 알렉산드르 뒤마        ③ 로베스피에르
④ 숀 마리노        ⑤ 페이스트 트라토스

 

 

5.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군주는 나라의 첫 번째 심부름꾼이다.'

이 말은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이 했던 말이다. 그는 군주란 국가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서 나라가 발전하는 데 첫 번째 공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가가 발전하고 국왕과 국민이 하나가 되어 헌신하기 위해서는 특정 세력이 나라의 주도권을 갖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나라에서는 특이하게도 가톨릭에게도, 개신교에게도 어떠한 특권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말하는 종교정책은 바로 모든 종교가 인정되는 '관용'이었다. 당대 유럽에서는 종교 전쟁이 있었고, 어느 나라이던지 카톨릭이거나, 개신교이거나 하나의 '하나님'을 믿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보다는 국왕이 헌신하고, 국민이 왕을 믿는 것이 국가 발전의 선행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바로 '계몽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궁전에서 분수가 막혔는데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수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분수를 바라보는 순간 기적적으로 물이 다시 솟아올랐다. 그러나 어떤 신관도 그것이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왕 자신도 '카톨릭 국가에서는 이런 것을 기적이라고 말하겠지?'라고 웃어넘겼다.

어느날 가난한 병사가 마리아의 제단에서 은그릇을 훔치다 걸렸는데, 이미 마리아가 용서하셨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왕은, '그런 기적도 있을 수 있는 일이구나' 라면서 병사를 용서했고,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두 번 다시는 마리아한테서 그런 선물 따위는 받지 말거라'

결국 그는 누가 종교를 믿던, 믿지 않던 무관심한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종교는 정치가 관여할 일도 아니며, 종교 역시 정치를 넘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훗날, 이 나라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재국을 세운 재상 비스마르크는 국가 운영은 '피와 철' 만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카톨릭 세력이 국가 운영에 딴지를 거는 것을 막기 위해 종교 전쟁에 엄청난 힘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이미 프리드리히 대왕이 남긴 유산 때문이었을까?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비스마르크는 카톨릭 하나를 제압하지 못하여 국내에서는 평생 하고픈 정책을 제대로 펴지 못하였다고 한다.

 

5. 위 일화 속에 나온 프리드리히와 비스마르크와 관련있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① 서러시아        ② 노브고르드        ③ 프로이센
④ 아일랜드        ⑤ 스코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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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라이벌전 : 누구의 영향력이 더 클까?

칼 포퍼 VS 토마스 쿤 : 역사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과학자들

- 위대한 <과학자>들의 이야기

오늘 전개할 이야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철학에 너무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과학자> 이야기이다.

바로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칼 포퍼>와 과학사 뿐 아니라 모든 인문과학분야에 <패러다임>이라는 명제를 던진 <토마스 쿤> 이야기이다. 그럼 두 인물의 상반된 이론을 이해해보고, 후대 역사학자들이 왜 이들의 이론을 역사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보자.

칼 포퍼가 1902년, 토마스 쿤이 1922년에 태어났으니까 두 학자는 20년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인지 토마스 쿤이 이미 <유명한 이론가>였던 칼 포퍼의 이론을 반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칼 포퍼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는 서양의 제국주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칼 포퍼는 관용이나 열린 사상과 같은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서구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두 철학자의 역사관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19세기 사상에 대한 <수용>이라고 볼 수 있다.

토마스 쿤은 학창시절부터 사회주의에 빠진 인물이다. 노동운동이나 자본에 따른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그 학창시절이 바로 <세계 2차대전> 중이었다. 반면, 칼 포퍼는 제국주의를 직접 경험한 세대인 만큼 서구의 미덕과 도덕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반감을 보였던 인물이다.

여기에서 두 철학자의 핵심 이론의 배경이 엇갈리기 시작한다. 칼 포퍼는 스스로 <계몽주의>자이기를 원한 인물이다. 그는 문명국가인 서구사회가 미개한 <비문명사회>를 개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리고 그 서구사회의 길잡이는 <미국>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그의 글에는 미국과 서구에 대한 자부심이 많이 들어가있다. 어떤 경우에는 역사가 특정한 법칙과 사회진화사상에 따라 <발전>한다는 담론까지 제시하기도 한다.

반면, 토마스쿤은 <계몽사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예 더 나아가 과학이 우리에게 진리를 제공하고 진보를 준다는 생각자체를 오류라고 말해 버렸다. 그래서 토마스쿤은 기존의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이 기존의 사상을 대체한다고 말해 버렸고, 그것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 19세기 최고의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850년대 동시에 등장한 혁명적인 이론 2가지였다. 하나는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 포함된 <종의 기원>이라는 과학사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또 하나의 책은 사회주의의 아버지 마르크스의 역작 <자본론>이었다. (마르크스는 종의 기원과 자본론이 같은 시기에 출판된 것을 두고, 최고의 역작들이 동시에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 포퍼는 마르크스는 철저히 비판했고,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으로 어느 정도 수용했다. 반면, 토마스쿤은 과학이론에서의 진화는 불신했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변증법>은 어느 정도 인정했다. 토마스 쿤이 주장한 <패러다임 이론>은 사회현상이 일반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혀 새로운 사회나 문화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자 그럼 이 두 과학자를 왜 역사 이야기에서 다루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의 이론이 과학 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역사, 사회 전반에 너무나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역사철학에서도 이 두 학자의 이론을 완전히 배재한 채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기가 버겁다.

그럼 먼저 <칼 포퍼>의 이론과 역사철학을 한 번 볼까?

- 칼 포퍼와 <과학적 검증>

19세기 독일의 랑케를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랑케가 <역사학>을 다른 인문과학분야에서 독립시켰기 때문이다. 랑케는 국가의 공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것을 역사학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은 역사가의 편견이나 해석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도 말했다. 과거의 정치, 제도, 문화를 밝히는데 있어서 편견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정치학이나 사회학이 될 것이다. 역사학의 임무는 <과거> 그 자체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그럼 과거 그 자체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가장 명확하게 밝히는 방법은 무엇일까? 20세기 역사학자들은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리고 랑케의 역사학을 넘어서서 다양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아날 사학자들은 인간의 역사를 아주 오랜 기간동안 관찰하면서 일상적인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변화까지도 심층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 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대처하는지에 대한 법칙을 찾고, 전체적인 역사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지중해의 어떤 섬에 인간이 살게 된다면 그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여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시도와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그 섬의 모든 인간은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하면서 의식주를 해결하게 된다. 결국 그 섬에 사는 인간들은 일정한 패턴을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사회구조사학자들은 인간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 온 모든 유산들을 하나의 인과관계로 만들어서 구조화시키려고 했다. 예를 들어, 머리모양의 역사, 방부제의 역사와 같은 시시한 것들도 하나의 역사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의 역사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밝혀낸 뒤 원인과 결과를 정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무엇을 밝혀야 하고, 어떤 방법을 활용해야 하는지는 역사학자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칼 포퍼>의 과학 법칙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칼 포퍼>는 <논리주의> 또는 <경험주의>와 과학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서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예를 들면, 근대인들은 점성술을 믿거나 신에 대한 믿음, 별자리와 같은 것을 통해서 운명을 알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칼 포퍼는 말한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인간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 당연히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 되려면 제일 먼저 그것이 아니다라는 <반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은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반증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신>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신을 믿는 사람은 그 마음에 따라 행동한다. <교회에서는 불경이 아니라 찬송가를 부른다>는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신>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신의 존재가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논리나 경험만을 따지는 <논리학, 경험주의, 실증주의>에서의 신은 과학도 아니고, 의미도 없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신이 과학은 아니라고 해도 <의미>는 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건전한 보수주의자이자, 서구학자인 포퍼의 <도덕적 논리>인 것이다.

반면, <앞으로 비가 올 것이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이건 <과학>적인 것일까? <논리주의>에 따르면 이것은 맞는 명제이다. 비는 언젠가 올 것이니까.... 하지만 포퍼는 이것이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첫째, 이것은 과학을 모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도 비온다는 말은 할 수 있다. 단지, 그게 장마철에 올지, 3년 뒤에 올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둘째, 이것은 <반증>이 안된다. 앞으로 천년간 비가 안왔다고 해서 저 명제가 틀릴까? 아니다. 만년 뒤에, 혹은 백만년 뒤에 비가 올 수도 있다. 따라서 지구가 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증명이 안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은 과학이 안되는 것이다.

즉, 포퍼에게 과학이란 <100% 완벽하게 검증>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럼 검증이란 어떻게 해야 과학이 되는 것일까?

카르납이라는 과학자가 검증이란 <확률>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최고의 투수가 연속으로 스트라이크를 1000개를 던졌다. 그럼 100% 검증은 못하더라도 저 투수는 다음 번에 스트라이크를 던진다는 법칙은 거의 맞을 것이다. 즉, 신뢰도가 무지 높아지기 때문에 검증이 곧 <확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포퍼는 아니라고 말한다. 아무리 만개의 스트라이크를 던져도 반증가능한 확률이 0.00001% 만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에 <확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논리를 중요시하는 <햄펠>이라는 실증주의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과학적 명제나 지식을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기호(원자명제)로 바꿔서 번역해 버리면 <확률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이다. 예를 들면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반드시 물이 이루어진다.>는 100% 확증일 수 없지만, <H2 + O = H2O> 라고 과학적으로 바꿔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퍼는 말한다.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어떤 과학적 실험에서 <반증>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과학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즉, 포퍼가 생각한 과학이란 <100% 완벽한 검증>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검증의 문제를 놓고 포퍼와 햄펠이 격론을 벌였는데, 여기서 바로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난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 칼 포퍼와 <역사의 법칙>

칼 포퍼는 위에 언급한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의 연구방법이 역사의 핵심을 밝히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랑케처럼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원문을 번역하듯이 밝혀놓기만 하면 어떤 역사가 중요하며,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어떤 법칙이 숨어있으며, 그것이 정당한지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포퍼는 역사학을 자연과학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자연과학이 <100% 옳은지 검증>할 수 있는 것들을 밝히는 학문이라면, 역사학은 어떤 과거의 사건들을 전후관계(인과관계)를 따져서 100% 법칙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 그럼, 알기 쉽게 포퍼가 생각한 법칙을 정리해보자.

조건(Control) : 2월 혁명의 원인은 왕정의 무능력함이었다.

법칙(Low) : 지배층이 무능력할 경우 혁명은 발생한다.

결과(Effect) : 2월 혁명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포퍼는 어떤 조건이 제시되었을 때, 그것이 역사법칙과 맞아떨어진다면 100% 결과가 도출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사회과학이 발달하면서 역사를 규칙 속에서 바라보려는 역사학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진 이론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이와 비슷한 조건이 있었는데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포퍼는 간단히 말한다. 법칙에 해당하는 어떤 조건이 빠진 것이라고.... 한마디로 빠진 걸 알아서 잘 찾아보라는 이야기다.

그러자, 햄펠이 포퍼의 이론에 바로 반박하였다. <미국독립혁명>과 같은 경우에는 프랑스 혁명의 원인과 상관없는 <조세문제, 식민지 문제> 등이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역사를 설명할 때는 굳이 어떤 법칙이나 증거를 들이대지 않고, 원인과 결과만 나열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 또는 <가장 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2월 혁명에서 지배층들은 왕정의 무능함으로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피지배층들은 왕정의 재정파탄으로 생계가 어려웠다. 그들이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혁명을 일으키는 게 맞다는 것이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가만 있다가 피해를 보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기 때문에 혁명은 당연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햄펠은 과학적 <기호>를 이용하여 이런 공식을 만들어낸다.

a : 지배층 / b : 피지배층 / c : 왕정의 무능 / d : 혁명

c라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a + b는 아주 은 률로 d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포퍼는 햄펠의 기호논리에 대해 부인한다. 기호를 이용한 수식은 <과학>적이지 못할 뿐더러, 100% 확증이 없이 <확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증명> 하거나 <반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높은 확률>은 실험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느 정도가 높은 확률인지 증명을 할 수 없지 않는가?

위에서도 계속 말했지만 포퍼의 핵심 주장은 <반증>이 가능한가였다.

하지만 포퍼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었다. 역사라는 학문은 인간의 과거를 다루는 데, 과연 100% 확고한 법칙으로 역사를 설명할 수 있을까?

포퍼는 여기서 한발 물러난다. 모든 역사적 사실을 100% 법칙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법칙으로 생각한 것은 누구나 너무나도 당연해서 법칙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거나, 당연히 법칙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증명하는 과정이 난해해서 대부분 그냥 넘기는 그런 법칙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동설을 주장하는 교회세력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을 받았다.>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빠진 법칙이 있다.

<기득권 세력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언행을 하면 제재를 받는다> 라는 법칙이 있지만, 너무 당연해서 그냥 원인과 결과만 설명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 칼 포퍼의 <계몽주의>

자, 그럼 칼 포퍼의 역사이론을 통해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살펴보자. 포퍼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하나의 사건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법칙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법칙들은 반드시 선후관계(인과관계)를 가진다고 믿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것도 러시아에 진격한 것도 반드시 그 원인이 있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칙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다.

20세기 사회는 19세기 서구 문명이 이루어낸 문명 이기의 총합이다. 산업혁명과 계몽주의라는 조건(Control)이 있었고, 진보한 문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법칙(Low)이 있었다. 그 결과 서구사회는 진보의 정신으로 발전해왔다. 아프리카 등 제 3세계는 같은 조건과 법칙을 적용하여 서구 문명과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다윈이 생명체의 세계에서 진화의 법칙을 찾아냈듯이 서구사회는 다른 사회에 그러나 이러한 진화를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주의와 파시즘적 공산주의는 그러한 진보의 과정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칼 포퍼는 자연과학이든,사회과학분야에서든, 역사에서든 변화와 발전에는 법칙이 있으며, 그것의 결과로 사회는 발전해나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포퍼의 과학연구가 <과학이 역사적으로 전개해 온 방식>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 학자가 있다. 그는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았더니 변화나 발전이라는 말보다 <전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에서 법칙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양한 <다른 세계>들이 공존한다고 말하였다.

토마스쿤은  이런 주장들을 묶어 <패러다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용어는 과학사 뿐 아니라 모든 인문사회과학과 역사학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럼 다음장에서 토마스쿤의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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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3)

역사학과 사회학이 싸우던 낡은 시대를 뛰어넘어...

1. 18c :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마추어다.

익숙한 문화 코드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데, 계속 이론 이야기만 해서 지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화 이야기는 이 편만 끝나면 시작될 것이니, 좀 참고 견뎌보자. 자, 오늘은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과연 역사학에 가까운지, 사회학에 가까운지 간단히 짚어보자.

역사학과 사회학의 처절한 결투는 18세기 이래 계속되었다. 서양 연대기로 따지자면 프랑스 혁명 전후부터랄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는 수많은 학문이 분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사>와 <사회>라는 항목이었다.

혁명의 기록은 역사이나,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통계는 <사회학>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후 등장한 철학자들은 모두 역사학자같은 사회학자들 이였으니....

사실 서유럽에서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역사라는 독립된 학문이 존재한다는 것을 크게 인식하지 못한 듯 싶다. 고대라 불리던 사회에서는 과거와 관련된 모든 학문이 다 역사였고, 철학이었다. 중세에는 <신의 역사>가 곧 신학이으로서 역사와 동의어였다.

서구에서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그나마 역사다운 역사물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서유럽의 <절대왕정>이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기록을 현재의 우리가 <역사>로 인식하는 것 뿐이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시민계급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학, 사회학>을 논의할 뿐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로크의 시민정부론도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은 올바른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뿐이었다. 밀러의 <신분론>은 사회계급현상을,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은 경제체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역사를 인용할 뿐이었다.

아담스미스가 <중상주의 체제의 발전과정>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중상주의보다 자율적 가격합의에 의한 시장경제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 뿐이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원시사회부터 상업사회까지의 발전과정을 이야기한 것은 결국 <인구 증가와 자원의 한계>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역사학과 사회학을 구분하지 못한 혁명기 철학자들은 역사는 당연히 <사회>를 연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자체만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이런 말이 어울렸을 것이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2. 19c : 랑케가 뜰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이런 현실 속에서 <아마추어 같은 역사>를 독립적인 학문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랑케였다. 랑케는 1편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니, 그의 이론은 생략하고 이야기하자.

그럼 왜 뜬금없이 <역사 독립선언>이 등장하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각국이 새로운 철학을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사회 철학은 <계몽 사상>이었다.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 철학은 <민중이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긍정하였다. 루소, 로크 등의 시민철학은 왕정을 박살내고 민중의 정부가 가능하다는 가능성까지 제시하였다.

이런 혁명의 시대를 겪은 유럽의 각국은 혁명이 끝나자 새로운 철학을 찾기 시작한다. 이젠 유럽의 각국 스스로가 <국민들에게 일체감>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등장한 철학이 바로 <낭만주의> 사상이었다.

낭만주의는 <합리적 이성>보다는 <민족적 자긍심, 끓어오르는 열정과 애국심, 폭발적인 사랑의 힘> 등 내면적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사상이었다. 국가는 애국심, 민족의 위대함, 공동체의 단합 같은 것을 강조해야만 수많은 유럽 국가들 안에서 독립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와 독일 같이 분열된 국가에서는 특히 이 <낭만주의>가 유행하였다. 랑케와 달타이 등은 독일 역사가였고, 크로체는 이탈리아 역사가였다. 이들 분열된 국가에서 <역사학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이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훗날 이 두 나라에서 낭만주의적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파시즘 사상이 유행했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나폴레옹 이래 <국민 교육>과 <시민 교육>을 실시하였고, 역사는 민족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필수교과로 채택되었다. 랑케가 국가 공문서를 바탕으로 한 정치사 교육이 <본질적 역사>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받아들인 것 이다. 사실, 정부와 역사학자가 가장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상호협조했던 지역이 바로 랑케가 살았던 <분열된 독일>이었다.

이제 역사는 연대기를 보면서 과거의 일을 하나 하나 생각해보는 수준의 역사를 벗어나, 국가의 공문서를 바탕으로 기술되었다. <학교>라는 지식주입소는 새시대 인력들의 머릿속에 과거의 정치적 지식을 콸콸 쏟아부었다. 역사는 독립했지만, 그 지식의 선택권은 국가에게 있었다. 역사는 국가에 의해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되었지만, 그것이 절대적 진리인지에 대한 판단은 학생들에게 없었다.

역사는 사회현상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 재미있는 이야기(내러티브)가 되었다. 랑케는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역사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랑케의 역사는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였다. 서민들의 이야기는 없었으며, 정작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이야기는 없었다.

3. 진화론을 믿었던 사회학자들의 역사 만들기...

19세기 랑케가 역사학의 독립을 부르짖을 때, 한편으로는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콩트가 <사회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연설하고 있었다.

콩트는 과거를 아주 간단히 정의하였다. 과거란 <종교의 시대, 형이상학의 시대, 과학의 시대>로 발전하였다고 말이다. 콩트 이래, 과거를 간단히 정의하는 사회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관이 뚜렷한 과학적 근거를 가진 <사관>이라고 생각한 듯 싶다.

이들 사회학자들의 사관은 <진화론>에 의거하고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말한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으며, 우성은 살아남고 열성을 도태되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자연에 적용된다>는 이론을 사회학과 역사학에 인용한 것이다.

진화론을 사회학에 인용한 대표적인 학자는 스펜서이다. 그는 <노동자는 열성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가난은 자신의 탓이다>라고 말하여 산업 사회의 약자가 무능하다는 것을 진화론으로 증명한다. 또, <강대국이 약소국을 점령한 것은 사자가 배고픔에 양을 잡아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법칙이다.>라고 말하여 제국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제국시대를 살아간 자랑스런 영국인이었으니까... 그가 생각한 역사는 야만적 무력 사회에서 제국의 산업자본사회로 발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을 가진 역사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관>은 역사가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관이었다.

헨리 메인은 역사를 <노예사회에서 신분사회로, 신분사회에서 계약사회로> 이동한다고 말하였다. 새로운 사회로의 진화는 인류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이라고 본 것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역사란 원시적 본능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본능을 누르고 문명사회로의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는 원시적 유전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문명인들 역시 내면 속에는 <성적 본능과 원시적 욕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장 역사적으로 유용한 <사관>을 뽑으라고 한다면 <마르크스 사관>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 과정을 <원시공동체 - 고대노예제 - 중세봉건제 - 근대산업자본주의 - 공산주의 사회>의 단계로 설정하고, 각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의 필연성을 증명하였다. 다음 단계가 전단계가 진화한 결정체라는 것이다.

여기에 딴지를 건 학자들도 있다. 튀니스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의 발전 단계는 퇴보할 수도 있다면서 공동체 사회보다 후진적인 <익명성을 가진 사회>를 말하기도 하였다. 

베버는 아예 죽은 마르크스를 평생 비판하면서 살아간다.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이란 단순한 대립구조에 불과할 뿐, 실제 사회 안에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세분화 된 <계층>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저술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은 기독교 계층의 힘이 근대 사회를 이끌어간 동력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역사적 사관을 바탕으로 아예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한 사람도 있으니, 그가 바로 사회학의 아버지 <뒤르껨>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사회 발전 과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사회의 구성 요소를 <기능론> 입장에서 제시한다.

사회는 우리 몸과 같은 유기체이며, 몸의 각 기관은 맡겨진 기능을 담당한다. 머리, 가슴, 손, 발 등이 모여 하나의 몸을 구성하므로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된다. 단, 머리가 손, 발 보다 중요한 기능이므로 그 기관이 우대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다. 머리에 해당하는 엘리트, 손과 발에 해당하는 노동자, 심장에 해당하는 정치인 등등....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다르므로 엘리트와 노동자의 급여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사회는 그들이 전부 존재해야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역사도 이러한 역할 분담을 통해 과거의 질서를 유지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훗날, 수많은 세부분야의 역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편에서 이야기 했던 아날 사학의 아버지 <브로델>도 역사 자체를 심층적이고 점진적인 발전 속에 이루어지는 유기체적 결합으로 보았다. 역사란, 사회학에서 말하는 커다란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법칙과 같은 것이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우연스러운 행동 역시 그 법칙에 제시한 과정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이 있고, 자신의 존재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우리는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진화론을 믿었던 사회학자들의 생각은 다시 18세기로 돌아가게 된다.

역사 자체를 알아서 어디다 쓰려고?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본다. 역사가 마르크스나 브로델이 말한 것처럼 어떤 결말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는 어떤 법칙을 가지고 파악해야 하는 과학이 되는 것일까? 역사의 발전 과정 속에 모든 인간들의 삶을 집어넣어 버린다면 수없이 많은 <다양성>을 가진 인간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진화론은 <역사가 가진 위대한 힘>과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보여주었고, 인간의 미래는 결국 가장 합리적인 결말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러나, 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주변 이야기가 되어 사라져갔다.

역사는 과거를 살았던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진화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4. 랑케를 넘어 역사를 <인문학>으로 만들어 버린 역사학자들...

진화론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일련의 사회학자들 때문에 <역사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역사가들은 아예 역사를 사회학과 분리시키려는 이론을 만들어 제시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칼을 뽑아든 사람은 <크로체>였다.

도대체 <발전 사관>이라는 것을 만들어 <역사의 동력이니, 역사의 목표니, 역사의 발전과정이니...> 하는 거대한 틀을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는 사회학자들의 역사관은 역사도, 과학도 아닌 어중간한 발전 법칙이라고 비난하였다. 사이비 역사를 넘어, 사이비 과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학을 사회과학과 다른 <인문학>으로 정립시킨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딜타이>이다.

그는 사회학을 사이비로 몰아세우며 역사학과 분리시켰다. 사회과학은 사회가 발전하고 유지되는 과정을 법칙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자연과학과는 다른 사이비 과학이다. 과학은 외적인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역사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사회학과는 학문 체계가 다른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역사학을 <인문학> 관점에서 서술한 학자가 <콜링우드>였다. 그는 과거의 일들은 법칙이 아닌 <과거인의 사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하며, 로마로 진군한 것은 법칙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한 것 뿐이고, 그 결과는 그의 사상에 비추어 가장 있을 법한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과거에 살았던 시저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역사일 뿐, 그의 행동에서 법칙을 찾아내고 인간 행동 패턴의 일반화를 찾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콜링우드가 생각한 역사는 과거인의 <생각>을 과거의 상황에 비추어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거대한 법칙이나 틀을 찾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사회학에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역사학과 사회학을 구분할 수 있는 이론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사회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또 다시 역사학의 본질을 놓고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5. 20c : 랑케의 정치사를 깨고 다양성을 찾는 역사학자들...

20세기 사회학자들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독립성에 대해 큰 의문을 품게 된다.

사회가 세분화 되면서 역사, 정치, 지리, 인류학, 민속학 등 많은 분야가 제각각 독립을 주장한다. 새롭게 등장한 수많은 학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독립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들 학문들은 서로 인접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사회학과 역사학, 그리고 수많은 학문들은 서로 교류하면서도 독자성을 내세우는 모순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역사학은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맞게 새로운 철학으로 거듭나게 된다.

20세기 역사학의 특징은 랑케가 말한 <국민 공통의 정치사>를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역사는 과거를 다루는 학문인데, 왜 정치사만 다루어야 하는가? 왜 영웅의 일대기만 역사가 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나라는 랑케의 고향 독일이었다. 세계 1,2차 대전을 패하고, 국가집단의 무서운 광기를 맛본 독일은 의도적으로 정치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왜 국가는 인간을 억압하는가, 왜 히틀러라는 지도자의 광기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는가 등의 근본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독일에서 역사는 랑케가 만든 역사의 독립성을 다시 벗어나기 시작한다. 사회 구조와 변화과정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사건이 발생한 인과관계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 경향을 묶어 사회구조사 연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쟁은 어떤 원인으로 시작되며, 전쟁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유태인들의 이주와 독일에서의 정착생활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러한 원인을 먼 과거부터 추적하여 <탐문 수사>하듯이 파헤치는 것이다. 이 역사인식론은 랑케를 반발하는 과거 학자들로부터 이어져 세계 대전 이후 급속히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발맞추어 등장한 또 하나의 역사 철학은 프랑스의 <아날 사학>이었다. 1편에서 이야기 말했듯이 역사를 오랜시간 동안 서서히 변하는 <지중해>에서의 삶과 같이 표현하면서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도 역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학은 랑케 사학의 <정치사> 뿐 아니라 사회 구조와 <인간들의 아주 작은 이야기>들도 역사의 분야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랑케의 역사 보다 훨씬 재미도 없고, 쉽지도 않은 것이었다. 고대부터 이어진 전쟁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 지식을 넘어 군사학과 통계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손을 대야 하기 때문에 전문 역사가나 사회학자, 군사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역사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렇게 전문가들이 각종 사회학 이론과 통계학 등을 기초로 만들어낸 역사는, 일반인들이 비판하기 어려웠다. 또, 쉽게 쓴 동화책이나 영상물 등 이야기(내러티브)로 만들어 설명하지 않는 이상 이해조차 쉽지 않았다.

또, <인간들의 작은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미시사>를 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필연적인 선택을 법칙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불과했다.

<지중해>라는 표본지역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스스로 선택을 해서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오랜시간 살펴보면, 자신의 자연환경에 맞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다른 인간들이 그곳에 살아간다고 해도 아마 비슷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 자체의 고유성을 바라보는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 구조>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20세기 서구유럽에서 보여준 새로운 역사적 흐름은 역사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인문학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사회과학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독자적으로 <인간 자체>를 연구해야 하는가?

6. 이들의 논쟁을 정리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자과 사회학자들이 바라보는 역사에 대한 시각은 <구조냐, 인간이냐>의 차이에서 출발하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 차이점을 모두 융합하면서 역사의 <세밀한 부분>을 강조하였다.

역사를 <진화론>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법칙과 사관은 필요가 없다. 역사가 어떤 형식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주관성>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건, 베버건, 뒤르껨이던 간에 그들은 역사와 사회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포스트모던>일 뿐이다.

랑케가 주장한 <정치사>도 허구이다. 영웅이란 것은, 국민교육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낸 허상일 수도 있다. 더구나 영웅에 대한 과거의 자료들은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작품일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은 20세기 역사가들이 보여준 <아주 작은 인간들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갖는다. 왜냐면, 역사란 과거를 살아간 하나 하나 인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역사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관심은 포스트모던과 달랐다.

20세기 역사가들은 인간들이 집단 구조 속에서 살면서 그 구조를 유지하는 <손과 발>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뒤르껨의 유기체론과 기능론에 입각해서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설정하고, 사회 속에서 의의를 갖는 인간을 연구했던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이것을 반박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사회의 문화에 영향을 받지만, 일률적으로 똑같이 종속되지 않는다. 똑같은 노비가 존재하더라도 신분에 적응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시대의 이념에 저항하고 새 시대를 지향하는 인물도 있는 것이다.

또, 사회 구조 속에서만 찾는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찾아야만 살아있는 역사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아날 사학>은 연역법과 같다. 미리 사회 구조의 특징을 정해놓고, 그 정해진 패턴에 따라 인간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 이런 사회였으니,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포스트모던>은 귀납법과 같다. 인간들이 그 사회와 문화의 틀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들을 하나 하나 상상력을 동원해 구성해 나간다. 이미 정해진 사회 구조는 누군가 만들어놓은 것 뿐이다. 내가 생각해보고, 내 관점에서 구축된 작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그 시대에는 이런 삶이 가능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역사는 과거인들의 일상 생활에 자신을 집어넣어 보기도 한다. 내가 과거인이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를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단, 사회 구조 속에 가두어진 과거인이 아닌, 그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공유하는 깨어있는 과거인으로 말이다.

역사에 있어 법칙이란,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가설>에 불과하다. 과거의 <자료>란 완전한 것도 아니고,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 토대로 삼는 일종의 <참고서적>일 뿐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내 의지와 판단에 따른 것이다. 내가 정치사가 아닌 여성들의 이야기, 소수 인종들의 이야기, 이색적인 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그 과거에 파고 들어 그들의 삶과 문화를 공유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한 포스트모던이 현실에서도 가능한 것일까? 지금부터 그 가능성을 한국 사회 각 분야의 문화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지겹도록 재미없는 이론이야기를 이쯤에서 끝내고 실제 <문화>를 가지고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해보자.

다음 이야기는 문학에서의 영웅 서사 구조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졌길래 <게임 바람의 나라>와 <드라마 주몽>이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포스트모던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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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사회진화론 2장> 노동자는 진화가 덜되었기 때문에 가난하다.

1. 강한 나라는 강하기 때문에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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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화론에 대한 2번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장에서는 <사회진화론>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이야기했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은 <다원의 생물학적인 진화론>에서 강조된 개념 중의 하나인 <적자생존의 법칙>을 사회현상에 도입한 것이었죠.

자, 그럼 어떻게 <진화론>의 개념을 <사회적으로 도입>할 수 있을까요?

생물학적인 진화론의 개념을 사회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대표적인 학자는 영국의 사회경제학자인 <스펜서>였습니다. 그리고 스펜서가 <진화론>을 사회현상으로 도입하려고 한 이유는 19세기 유럽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스펜서가 영국 학자라는 점은 사회진화론을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도 있겠네요.

19세기 유럽의 정치, 경제적 사상은 큰 2가지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식민지를 늘리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었죠.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의 결과 개인의 재산소유와 사회경제의 발전을 <고전 경제학>으로 정리해가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영국은 가장 식민지가 많았던 국가 중 하나였고, 산업혁명이 시작된 국가였습니다. 이 두 가지 사상에 가장 관심이 많은 국가였죠. 그럼, 어떻게 영국의 제국주의 사상과 산업혁명으로 인한 경제적 신질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그것을 스펜서는 <진화론>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진화론을 제시한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책은 <인류의 진화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책입니다. 생물은 각 세포와 기관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로서 유기체가 살아가기에 가장 적합한 구조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갑니다. 그 발전을 효과적으로 이룬 유기체는 <우성>이 되어 진화하지만, 그렇제 못한 유기체는 퇴보하게 됩니다. 이것을 다윈은 <자연의 선택> 또는 <개체의 변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펜서는 이 진화론의 개념에서 <적자생존>이라는 부분만을 크게 강조하였습니다. 자연 속의 생물들이 살아가고, 진화하고, 변이하는 모든 과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이라는 부분만을 강조한 것이죠. 즉, <잘난 개체는 살아남는다>는 부분을 강조함으로서, 영국과 같은 강한 나라가 약소국가에게 행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정당한 행위로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보다는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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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윈>의 이론이 <애덤스미스>의 이론으로 전환되다.

스펜서의 이론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키워도는 사회진화론이 <자유방임주의>를지지하는 핵심 사상이었다는 점입니다.

18세기 애덤스미스가 국가 경제현상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것을 <고전 경제학>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가격>을 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물건의 가격이 비싸면?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죠. 어떤 물건의 가격이 너무 싸면? 돈을 벌 수 없으니, 물건을 만들지 않죠. 즉, 가격이 비싸면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기 때문에 가격은 자동으로 내려갑니다. 물건값이 너무 싸면 사는 사람만 많고 만드는 사람이 부족하여 물건이 부족해지므로 물건 값은 올라갑니다. 이렇게 <가격>은 가만 내 버려 둬도, 너무 싸지도 비싸지도 않게 책정됩니다. 따라서 <가격>은 자동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부른다는 개념입니다.

또, 가격이 알아서 결정되는 만큼 국가는 시장가격에 개입해서는 안됩니다. 국가는 최소한의 <작은 정부>여야 하고, 모든 경제 현상은 <개인들이 알아서>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고전 경제학>이죠. 고전 경제학은 세계경제공황기에 캐인즈의 <수정자본주의>가 등장하여 국가가 경제활동에 일부 관여할 때까지 제국주의 전 시대를 통털어 경제학의 <성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전 경제학의 핵심은 국가의 간섭없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자유방임주의였죠.

스펜서는 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식민지를 확보하는 <제국주의>이론에도 알맞은 사상을 <진화론>에서 찾은 것입니다.

자연상태의 생명체는 스스로 진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자는 강하고, 사슴은 빠르며, 도마뱀은 꼬리를 자를 수 있고, 고슴도치도 자신만의 무기가 있죠. 각 개체는 가장 알맞은 생존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이러한 생명체들이 <먹이사슬>로 연결되면서 자연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가 이 적합한 자연상태를 인위적으로 흔들어 버린다면? 만약, 사납다고 해서 모든 사자를 죽인다면? 자연의 균형이 유지될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속의 모든 개체들은 자신들만의 생존방식과 사회적 성장 욕구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있고, 소방관이 있고, 경찰이 있으며, 선생님도 있습니다. 하나 하나의 개체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적으로 상태로 구성되어 있죠. 상인은 적절한 가격에 물건을 팔아야 인정받고, 소비자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물건을 구입합니다. 즉, 자연상태와 마친가지로 사회 속에서 모든 개인들도 <자유>를 인정받아야 하며, 어느 누가 이 질서를 인위적으로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스펜서가 생각한 사회진화론의 핵심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진화상태도 <자유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애덤스미스의 <고전 경제학>을 지지하는 이론으로 작용합니다.

단, 스펜서의 이러한 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스펜서가 살았던 시공과 다를수록 변질되어 간다는 점은 유의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모든 개체를 <자유>롭게 내 버려 둔다는 것은, 모든 개체의 불합리한 처우에 대해서 <방임>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사회진화론을 개인이 아닌 <민족>으로 이해한다면, 어떤 민족은 좀더 진화한 민족, 우월한 민족이라는 민족 우월주의로 가게 됩니다. 만약 사회진화론을 개인이 아닌 <국가>에 적용한다면, 우월한 국가와 진화가 완벽한 국가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약소국을 침탈할 수도 있겠네요.

결국, 다윈이 주장한 <생물학적 진화론>이 스펜서의 <사회적학 진화론>으로 변하면서, 제국주의와 애덤스미스 사상을 지원사격하는 사상으로 변한 것입니다.

3. 약자에 대한 배려는 <진화 법칙>에 어긋난다. 약자는 죽어도 좋다.

1장에서 우리는 멜서스 이야기를 잠깐 했었습니다. <인구론>을 쓴 멜서스는 지구 인구가 늘어난다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못난 민족, 가난한 자들은 국가에서 아무런 혜택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빈민촌에 약을 주는 것은 인류 멸망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멜서스죠.

멜서스의 이론은 스펜서의 이론으로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펜서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개인들이 진화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경찰, 군대의 유지 및 사유재산 보호>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자유는 <인권, 기본권>같은 것과는 상관없는 <국가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자유>였죠.

오히려, 스펜서는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주지 말자고 주장했습니다. 왜? 왜? 왜?

이유는 간단합니다. 노동자들이 가난한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고전경제학을 지지하는 멜서스, 스펜서, 섬너 등의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동자가 노동자인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에 진화가 되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노동자이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함과 나태한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노동자라는 것이죠.

사회는 진화하고, 강한 자는 성공하며, 게으른 자는 도태합니다. 노동자들은 게으르고, 열성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고, 삶에 의욕이 있는 걸출한 유전자라면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자본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게 사회진화론의 입장이니까요.

스펜서는 아예, 진화의 기준을 넘어 <선과 악>의 기준마저 진화의 법칙으로 설명합니다. 사회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적응한 자들, 발전한 자들이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하층 계급일수록 <악한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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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선과 악의 구분은 18세기 <계몽사상>의 이념을 끌어다가 정당화시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18세기 로크, 루소, 몽테스키외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무한히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주의 법칙도, 자연의 법칙도 알 수 있고, 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신념으로 여긴 것이지요. 이들은 신의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주가 구성되어 운영되는 법칙이 곧 <신의 존재>이므로 신, 즉 우주의 법칙을 알면 인간이 무한히 진보하여 우주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지요.

그런데 스펜서는? 계몽사상과들처럼 인간은 무한히 진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그 낙관적이고 이상적인 인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유능한 인간들은 <우성, 적자, 가진 자, 강한 국가>이기 때문에 <열성, 도태자, 노동자, 약한 국가>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를 볼까요? 스펜서는 영국 사회가 식민지도 많으며, 앞으로는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 국가가 될 것이라 예언합니다. 그 증거는? 유전학적으로 영국인들의 머리가 <우수하다>는 멘델의 법칙을 인용한 것이지요. 영국인이 우성 유전자를 가졌으니 인류의 발전은 영국에 달린 것이죠. ㅎ

스펜서와 계몽사상가들이 다른 점은, 계몽사상의 신은 <우주의 운영 법칙>이었지만, 스펜서의 신은 <진화의 법칙>이라는 점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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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가진 국가, 가진 계급을 위한 이론이 됩니다. 그리고, 자유방임주의 이론을지지함으로서 가진 국가, 가진 계급의 권리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 기존의 사회질서에 도전하는 자들은 노력하지 않고, 사회의 기득권을 노리는 <열등한 유전자의 반항>으로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만능이며, 자본주의 사회 안의 모든 개인 행위는 자연상태의 <적자생존>으로 인식합니다.

지금 이 이론을 접하게 되면 이 이론의 목적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론은 결국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괴롭히는 이론적 근거로 활용됨과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층민들이 기득권 세력에 반항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그리고 20세기에는 이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국가와 나라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 이론은 독일과 일본에서의 국가주의 이론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사회유기체 이론으로,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 국가들과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제국주의에 반항할 수 없는 이론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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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진화론을 사회학이 아닌 역사학의 개념으로 다뤄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 이제 사회진화론이 세계 각국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봐야겠죠? 1,2차 대전의 독일,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개항한 중국, 한국, 일본, 동남아 국가들.... 다음 장부터 나라별로 간략 간략하게 다루고, 우리 근현대사 속의 사회진화론을 자제히 다뤄보죠.

다음 장으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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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었을까?

한국은행에서는 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 10만원권 지폐의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해서 2차로 발표했습니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2차로 발표된 인물에 대한 각기 평가가 너무 상이하기도 합니다. 예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아예 평가후보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광개토대왕을 원한다고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아예 처음부터 삭제한 것이지요.

여성사이트에서는 신사임당, 유관순, 허난설헌, 김만덕 등의 역사 속 여성들이 많은 표를 차지했지만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인 후보에는 빠졌습니다.

단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빠진것도 눈의 띕니다. 신채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이 많다는 점, 안재홍은 월북한 민족주의자라는 점, 윤동주, 김소월, 방정환 등도 10인 후보에서는 탈락하였습니다. 소위 좌파 사상가라는 것도 미래성에 맞지 않은 듯 합니다.

건국이후 인물들은 모두 제외된 점도 특이합니다.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등의 인물은 역사적 평가와 업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고, 국민적 논란 및 정치적 파장이 크다는 입장인 듯 합니다. 이들은 아예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2. 인물 선정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0만원권은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한국 지폐의 최고권으로 나라를 대표할 돈입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돈인 만원권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 눈부신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만원권 지폐에서 세종대왕만큼의 업적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듯 합니다.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0만원권의 지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폐 인물의 기준을 역사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국의 모든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갑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갑니다. 중국의 지폐에는 어김없이 마오쩌둥이 나옵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이 인물들을 넣고, 뒷 면에서는 다른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의 인물들을 새겨넣습니다. 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돈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르네상스, 절대왕정, 신항로 개척, 식민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은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며, 국민들은 왕실을 존중합니다. 지금 1952년 즉위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화폐에 들어감으로서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영국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도안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이 아니라 현재 여왕을 화폐에 넣음으로서 국민적 단합을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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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폐 50 파운드 - 엘리자베스 2세의 웃는 모습

중국의 화폐의 마오쩌둥은 중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며, 인도의 간디 역시 인도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도록 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국민 화폐의 역할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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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화폐 1천루피 - 간디의 자상한 모습

2. 외국인들이 보기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화폐를 선정할 때 중요한 점의 하나는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국내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외국화폐를 볼 때 화폐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 화폐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한은의 후보군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등은 후보에 없거나, 중요성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큰 가치가 없거나, 주변국과의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화폐의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이끈 장군입니다. 하지만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폐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해서 후보군에서 제외되거나, 단군이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잘라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단군이 우리 국조가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생각할 가치도 없을 뿐더러, 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 정체성을 폄하하는 입장으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의 입장을 살펴 우리의 외교자세를 선택한다는 실리주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인물 화폐가 아니라 뭔지도 모를 추상화 같은 화폐를 도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그 화폐를 통용한 것은 미래로 나가는 스위스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화같은 화폐는 둘째로 하고라도, 역사 속 인물들을 특정한 이유로 배제하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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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봐도 모르겠습니다. 스위스 화폐
  

화폐를 보는 외국인들이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이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적 기상이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폐, 또는 그 나라의 역사성을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상적 체계가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화폐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 모두 이씨 입니다. 다른 종친회에서 반발할만도 하네요. 이번 화폐에서는 이씨를 빼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화폐의 특징은 이씨라는 것보다 이들이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성리학적인 애민정치를 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이순신 역시 성리학이 자리잡혀가고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업적은 성리학보다는 장군으로서 위대함이였죠. 기존 화폐의 기준에 사상적인 측면이 들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이라면 사상적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 어떤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인물의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그 시대 속의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합리적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선시대 성리학 인물만으로 화폐가 도안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조선시대만 있었고, 우리 역사의 황금기가 조선시대였다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철기시대 국가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그리고 대한제국까지 많은 영토국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외의 국가에서도 사상적인 체계가 있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유교 인물은 많았지만, 정작 조선 이전 역사에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사상이나,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은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무정부주의, 폭력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등 다양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니까요. 사회주의를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라서 제외한다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의 리더 김구 선생님도 폭력주의자가 됩니다.

사상적 체계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계산되어야 합니다. 단지 성리학을 완성시킨 인물들만 지폐가 채워진다면 미래에 대한 지향성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4.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성이지만, 그 역사성은 과거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성이여야 타당합니다. 예로, 장영실은 우리나라가 지향할 IT산업과 이공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0인안에 선정되었고, 장보고는 후기신라시대 해상왕으로서 그 상업적 마인드와 탁월한 외교능력 등이 인정되어 10인안에 선정되었습니다.

단, 미래성만 있는 인물은 국민화폐로서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역사성과 확실한 사상체계, 우리 조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 중에서 미래성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정말 고심해서 좋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선정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벌써 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안된다. 이 사람이 왜 빠졌는가.... 말이 많죠. 선정된 인물들 모두 역사 속에서는 훌륭한 위인들입니다. 그러나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위인의 경중을 따져서 선별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성과 사상성, 인간적 노력, 미래성 까지 갖춘 인물을 가려야 합니다.

이번에 10인의 후보를 보면 역사성, 사상성 보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은 더 많을 지 모르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미래 한국사회의 이상향으로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고른 듯 싶네요.

민족정체성만으로 선별한다면, 시조인 단군과 광개토대왕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보군에 없습니다. 감강찬, 을지문덕, 서희 등 역사속 무관들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여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사회를 주도하는 미래의 한국을 본다면 장영실을 뽑을 수 있겠죠.

실학자로서 기존의 사상체계와는 다른 변화된 사상을 제시하여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꾼 정약용도 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는 정약용과 김정희 두 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가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상업적 마인드와 미래 지향적 태도도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의 인물로서 독립에 앞장선 김구, 안창호, 한용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틀을 잡게 된 중요한 시점의 인물들이 화폐 도안에 없다는 점에서 김구 선생님도 유력한 후보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제 10인 가운데 2분이 5만원권, 10만원군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입장 속에서 추려낸 후보군이라, 역사성을 가진 인물보다는 미래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택하였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어떤 인물이 한국을 대표할 지폐에 들어가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합성한 10만원권 인물......(재미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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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장금이까지 지폐 후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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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문화

1. 문화적 특징

로마 문화의 특징하면 <실용적, 보편적>문화를 완성하여 고전문화를 완성한 것으로 보통 요약합니다. 그러나, 그 문화가 왜 실용적, 보편적인지는 자세히 따져보지 않았죠? 한번 천천히 볼까요?

로마의 문화가 실용적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토목, 건축, 법률 분야에서입니다. 로마는 제국화되고 영토가 넓어지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속주로부터 세금을 징세해야 하는 일이였습니다. 따라서 도로를 만들고, 해안가에 건물을 짓는 일이 중요했죠. 또,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고 새로운 민족을 점령하게 되면서 기존 로마의 법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따라서 법률의 개정도 로마가 영토확장하는데 있어 필수었습니다.

로마 문화가 보편적이라는 것은 헬레니즘 문화와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문화는 대제국을 건설하면서도 그 문화 기반을 그리스에 두고, 그리스적인 문화의 바탕위에 동방문화를 얹은 형태였습니다. 따라서 헬레니즘 문화는 간다라 미술 등으로 대표되는 동서문화의 융합이자, 그리스 문화의 세계화였지요. 그러나, 로마 문화는 단순히 문화를 섞어놓은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 라틴, 헬레니즘 문화를 통합하여 로마만의 독특한 고전문화를 완성하였습니다. 이 문화는 로마시민권을 전 제국의 자유민에게 분배하는 과정에서 모든 민족에게 거부감없이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문화였고, 로마 역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로마 초기에는 그리스적인 요소가 많았고, 그리스 문화에 동화된 측면이 많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러나 로마는 헬레니즘 세계를 통합하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라틴문화를 첨가하여 고대 지중해 문화를 통합하였습니다. 이 문화가 중세 유럽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지요. 거기에 하나 더하자면, 크리스트교라는 보편적 종교가 로마 사회에서 성장하여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는 점도 로마 문화의 보편성에 힘을 더해 줍니다.

2. 로마의 법률

이러한 실용적, 보편적 성격의 로마문화를 대변하는 것은 법률입니다. 로마의 법률을 통해서 모든 로마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로마법은 로마 역사에서 중요합니다.(저도 처음에는 법률 중심으로 로마사를 정리할까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럼 로마법을 통해 로마를 알아볼까요?

지금부터 적는 내용은 다 로마사이야기 1-9편에 있는 내용 중 법률 부분의 이야기를 재정리한 겁니다. 혹시 첨 보는 내용들은 앞편이나, 사이트내 검색창, 태그창을 참조하세요.

로마 초기의 법은 <관습법>입니다. 관습법은 기록이 아니라 구전되어 전해지는 불문법으로, 이 법인 귀족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큰 법입니다. 실제 기원전 6세기의 초기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를 지배할 때, 관습법에 의거해 라틴인들을 제거하기도 했습니다. 또, 에트루리아인 이후의 귀족들도 관습법에 의거해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법은 평민계급에게 불리했습니다. <성산사건>이후 평민들은 <시민법>을 만들어 로마 귀족들에게 저항합니다. 시민법은 로마평민들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토지를 분배받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시민법은 로마 평민들이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통일하는 공화정기의 법입니다. 대표적인 시민법은 귀족들의 자의적 법해석을 막기 위해 동판에 적은 <12표법>에서부터 출발하여, 리키니우스법, 섹스티우스법, 호르텐시우스법 등이 있습니다. 설명은 여러번 했으므로, 생략할께요. 중요한 점은 이 공화정기의 시민법은 모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시민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즉, 동맹시나 점령지역에는 적용이 안되었죠. 그들에게는 라틴시민권을 주거나, 자치권을 주었다는 것을 설명했었습닏.

이제 로마는 <제국기>에 들어섰습니다. 제국기의 법은 <만민법>단계까지 발전합니다. 만민법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한다는 취지의 법입니다. 이것은 시민권이 없는 속주에게도 적용되는 법으로 전 로마제국안의 자유민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카라칼라 황제는 로마의 재정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시민권을 전 자유민에게 확대하는 시민권을 배포다는 것도 여러번 강조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법의 최후단계이자, 가장 보편적인 법의 적용 개념으로 <자연법>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자연법이란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인류 전체의 법이자, 현실법의 근거가 되는 이상주의적인 법의 근원을 말합니다.

자연법의 근원은 모든 사람은 보편적인 권리가 있다던 <스토아 학파>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을 구체화 한것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였고, 올피아누스를 거쳐 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을 완성시킨 사람은 동로마 제국 전성기 때의 <유스티니아누스>였습니다. 그는 로마법 대전을 집대성하면서 자연법 사상을 완성시켰고, 그 법이 지금 유럽 각국 법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자연법이란, 현실의 법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법의 원리가 존재하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한다고 하는 <법의 기본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의 헬레니즘 시대 자연과학과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성장했고, 로마제국, 기독교사상에 영향을 준 위대한 법의 정신입니다.

이 자연법의 원리는 중세 시기 신 중심적인 철학(스콜라 철학)이 중심이 된 시기에 잠시 주춤했지만, 근대 계몽사상, 사회계약설 등의 원리로 다시 태어났고, 시민혁명기에 천부인권사상과 결부되어 인간이 누려야할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한 사회적 권리로 등장하게 됩니다.

3. 로마의 역사학

로마 역사학의 특징은 심오한 사상체계가 있다기 보다, 스토아, 에피쿠로스 학파의 헬레니즘 체계를 계승한 정도입니다. 로마에서는 특히 스토아 철학의 대가들이 많았습니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에픽테토스 등이 유명합니다.

역사서적인 유명한 저서들이 많지만, 간략히만 적어봅니다. 나중에, 이 파트를 전문적으로 다를 때 심도있게 적어보겠습니다.

일단, 폴리비우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흥망성쇠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기술한 것으로 유명합나다. 또, 어린이들이 읽는 필독도서 중 하나인 플루타크의 영웅전도 유명하죠. 로마이야기의 대작으로는 리비우스의 로마사가 있습니다.

게르만 민족의 생활상에 대해 적인 저서인 1c 무렵의 게르마니아(타키투스 작품), 공화정 말기 시저의 갈리아 전기는 중요한 역사 지침서입니다. 폴리니우스의 자연사는 백과전서적인 서술방식으로 적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4. 로마의 건축

로마는 그리스, 헬레니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건축에서는 웅장함이 더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 초기 로마를 지배한 에트루리아의 건축양식도 보입니다. 코린트식 열주를 보면 그리스식 양식이 보이기도 하면서, 또 로마 판테온 신전을 보면 독자적 라틴 양식이 보이기도 합니다.

로마 건축의 특징은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점인데, 도로, 교량, 수도, 개선문의 실용적 작품이 많습니다. 특히 이 당시부터 콘크리트 공법이 활용되었으니, 로마 문명이 꽤 발달했음을 알수 있죠. 검투사 경기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콜로세움(원형극장)도 한번씩 사진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특히 공중목욕탕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로마인들은 목욕을 시민의 의무로 생각하여 항상 청결함을 위한 목욕을 장려했습니다. 고대 로마에는 목욕탕 규모를 수천명이 들어갈 정도로 만들어놓기도 했다는군요. 그 주변 공간을 다 채우기 위해 목욕탕 주변은 상가가 들어서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목욕탕에 들어올 물을 대기 위한 용도로 바다에서부터 로마시까지 수로를 만들기도 했다네요.

로마에서 중요한 건축양식으로 바실리카 양식이 있습니다. 그리스인 이야기를 다룰때, 코린트, 도리아, 이오니아식 건축양식을 그림으로 자세히 설명했죠? 이 바실리카 양식은 그리스 양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 특징은 장방형 평면구조의 한 쪽 끝에 반원형의 재판석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중세 초기의 교회건축이 이 양식을 모방했다고 하네요.

다음 장에서는 로마사 이야기의 마지막장으로 로마의 종교를 총체적으로 다루면서 크리스트교의 특징을 다루겠습니다. 다음 장은 이번장처럼 헐렁헐렁하지는 않겠네요. 그럼 종교부분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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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 양식의 성당 내부구조, 앞부분이 둥근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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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