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창'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5건

  1. 2013.03.22 오늘의 역사퀴즈 - O,X퀴즈 10문항 풀어보기
  2. 2007.03.07 백제 멸망에 대한 사료 (1)
  3. 2007.03.06 계백 장군과 화랑 관창의 이야기 (1)
  4. 2007.01.14 관창 이야기 (1)
  5. 2007.01.13 계백 장군 이야기 (1)

오늘의 역사퀴즈
 

오늘은 간만에 o,x 퀴즈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서 점수와 해설을 확인해 보세요.

 

다음 10문항에 대하여 맞으면 O, 틀리면 X를 선택해 주세요.

 

1.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O
X

2. 사물놀이에 쓰이는 4가지 쇠, 장구, 북, 징은 불교의식에 쓰이며,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목어, 운판, 법고, 범좀의 네 가지 사물이 변해서 쓰인 것이다.
O
X

3. 안압지는 신라 문무황 때 만든 윌지라는 연못으로 신라가 망한 뒤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안압' 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O
X

4. 황산벌에서 신라의 대규모 부대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백제의 명장군은 관창이다.
O
X

5. 징기스칸이 죽은 뒤 몽골 본토인 몽골 제국을 물려받은 사람은 막내아들인 툴루이나, 실제 몽골의 2대 황제는 셋째아들인 오고타이이다.  
O
X

6. 프랑스 대혁명 때 처형된 왕과 왕비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이다.
O
X

7. 조선시대 지방관(수령)의 임기는 6개월이다.
O
X

8. 병자호란은 청나라를 세운 거란족과 관련된 전쟁이다.
O
X

9. 세계문화유산인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O
X

10.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여우 사냥' 작전을 전개한 러시아인들이다.
O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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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에 관한 사료

3월에 당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을 삼고 김인문(金仁問)으로 부대총관(副大摠管)을 삼아, 좌요위장군(左饒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30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치게하고, 왕(무열왕)으로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을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응원하게 하였다.

5월 26일에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장에 다다랐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니 전함이 천리에 뻗쳤는데 동쪽을 향하여 순류를 타고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으로 병선 백척을 이끌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게 했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이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 서둘러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여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과 흠춘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 유신 등이 황산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진영을 세 군데 설치하고 기다렸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길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시종들은 힘이 다 빠졌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에게 말하였다.

[신하된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를 모두 갖추게 될 것이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관장)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르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용감하니, 오늘 싸움에서 삼군의 모범이 되리라!]

관칭은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곧바로 진격하였다. 망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으나 상대편 수가 많고 이쪽은 군사가 적으므로 볼모가 되었다.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 앞에 끌려갔다. 계백은 관창의 투구를 벗기고는 아이가 어리고 용감한 것을 아깝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감탄하여 말하였다.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구나. 소년이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라!] 하고는 살려서 돌려보냈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베지 못하고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우니 계백이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손으로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있는 것 같다. 왕실의 일을 위해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고 말하였다.

삼군이 이를 보고 분개하여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 춤상과 상영 등 20여명은 사로 잡혔다.

이날 정방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 이르러 백제 군사를 맞아 크게 깨뜨렸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 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에서 벌어진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뒤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서니, 유신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정방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 합니다]하니,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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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신라로 인한 백제 멸망과정을 보여주는 핵심 사료입니다.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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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장군과 화랑 관창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로 모습이 우아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화랑이 되어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나이 16세에 말타고 활쏘기에 능숙하였다.

대감인 어느 사람이 태종대왕에게 관창을 천거하여 당나라 현경 5년 경신에 왕이 군대를 내어 당나라 장군과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 밑에 이르러 양쪽 군대가 서로 대치하자 아버지 품일이 말했다.

[너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은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다. 어찌 용맹이 없을 수 있겠느냐?]

관칭은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곧바로 진격하였다. 망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으나 상대편 수가 많고 이쪽은 군사가 적으므로 볼모가 되었다.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 앞에 끌려갔다. 계백은 관창의 투구를 벗기고는 아이가 어리고 용감한 것을 아깝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감탄하여 말하였다.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구나. 소년이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라!] 하고는 살려서 돌려보냈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베지 못하고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우니 계백이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손으로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있는 것 같다. 왕실의 일을 위해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고 말하였다.

모든 군사가 이를 보고 분개하여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대왕이 급찬의 위계를 내리고서 예로서 장례를 지내주고, 그 집에 당나라 비단 30필 20세, 베 30필, 곡식 100섬을 부의해 주었다.

삼국사기 권 47, 열전 7, 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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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유명한 계백의 황산벌 전투와 화랑 관창의 이야기입니다. 다 아시니 부연설명은 없어도 되겠죠?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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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창 이야기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이다. 외모가 우아하여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남과 사귀기를 잘하였다. 열여섯이 되어 말을 타고 활쏘기를 잘하니 대감인 오느 사람이 태종대왕에게 관창을 천거하여 당나라 현경 5년 경신(태종무열왕 7년, 660)에 왕이 군대를 내어 당나라 장군과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군대가 대치하자 아버지 춤일이 말하기를 <너는 나이가 어리지만 뜻과 기개가 있고,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니 어찌 용기가 없을것인가?>라고 하였다.

관창이 <예>라고 대답하고는 곧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빗겨들고 적진에 곧바로 진격하여 말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으나, 상대편 수가 많고, 우리 편 수가 적어 적의 볼모가 되었다. 볼모로 백제 원수 계백 앞에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자 관창이 어리고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길,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다. 소년이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야!> 하고는 살려 보내기를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하고 손으로 우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쳐들어가 민첩하게 싸우니 계백이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품일이 아들 머리를 손으로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왕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는 없다>라고 하였다. 모든 군사가 이를 보고 용기를 내어 뜻을 세워 북을 요란하게 치며 진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 삼국사기 권 47, 열전 7, 관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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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장군 이야기

나당(羅唐) 연합군 18만이 백제의 도성을 향하여 진격의 박차를 가해오자 의자왕은 전세가 급박함을 직감하고 달솔(達率)이던 계백(階伯)울 장군으로 삼아 황산벌 전장에 출정토록 하였다.

계백장군은 5천 결사대를 인솔하여 전장에 나가며 말하기를, '한 나라의 사람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상대하게 되니 국가의 존망을 가늠할 수가 없다. 내 처자가 적들에게 붙잡히어 노비가 되어 욕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차라리 쾌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손수 처와 자식을 벤 후에 황산(黃山) 벌판에 이르러 삼영(三營)을 설치하고 신라의 5만 병사를 만나 싸웠는데 여러 장병들 앞에 맹세하기를 '옛날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은 5천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각기 장병들은 각각 분발하여 승리를 결단함으로써 국은을 갚도록 하라'하고, 드디어는 물밀 듯이 쳐들어 가서 한 사람이 천명을 당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신라군은 드디어 격퇴 되었다. 이와 같이 서로 진퇴하며 네 번이나 싸워 이겼다.

  신라측에서는 군사의 기력이 다하고 백제군을 향하여 더 이상 진격할 용기를 잃게 되자 장군 흠순(欽純)이 아들 반굴(盤屈)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의 도리는 충성을 다 하과 같은 것이 없고, 자식의 도리는 효성된 일을 함과 같은 것이 없는데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내던지면 충과 효를 둘 다 이루는 것이라'하니, 반굴(盤屈)은 대답하기를 '삼가 아버님의 명령을 따르겠나이다.'하고 곧 적진(백제 진영)으로 뛰어들어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 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아들 관창(官狀~官昌)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모든 장병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의 아들은 나이가 겨우 16세이나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다. 너는 오늘의 급박한 전역에 사군의 표적이 되겠는가' 하니, '예' 하고 대답한 다음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말을 달려 백제 진영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관창은 곧 잡히어 포로가 되었고 계백 장군의 앞에 불려가게 된다. 계백은 관창을 살려 보냈지만 관창은 다시 백제 진영으로 뛰어 드어와 싸우다 다시 붙잡힌다. 결국 계백 장군은 관창의 목을 베어 신라 진영으로 돌려 보낸다. 이에 감개 분발한 신라군에 의하여 백제군은 전멸하고 계백 장군 또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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