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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드라마 선덕여왕 :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정리하면? 미디어 속의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 :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정리해 봅시다. 1. 뭐가 있어야 말을 해보지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이가 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미실이는 자신이 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이라면, 신라에 품, 진골, 성골로 구분하는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덕만이가 이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아니, 진골, 성골과 같은 용어 자체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신라의 골품제도를 알 수 있는 사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 뿐이다. 너무나 적은 자료이지만, 그나마 그 적은 자료에서도 성골이 무엇인지, 진골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 놓은 부분은 없다. 신라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적.. 더보기
삼국사기 - 김유신 열전 삼국사기 - 김유신 열전 三國史記 列傳 삼국사기 열전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수태보문하시중판상서이예부사집현전태학사감수국사상주국치사신 김부식은 임금의 말씀을 받들어 찬함. 三國史記卷第四十一. 삼국사기 권 제 41 【1】列傳 第一 金庾信 (上) 열전 제1 김유신 (상)/출생(서기595년)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 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김유신(金庾信)은 서울 사람(王京人:경주인)이었다... 더보기
통일신라시대의 숙위학생 통일신라시대의 숙위학생 숙위학생이란, 신라에서 중국 당나라로 유학갔던 학생들을 말합니다. 이 숙위학생은 통일신라시대에 전제왕권기와 신라하대에 성격을 달리합니다. 숙위학생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상단 검색창에서 을 입력하시기 바랍니다. 1. 숙위학생이 시작된 이유는? 원래 숙위학생이란, 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 등에서 당의 개방정책에 의해 유학생을 파견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즉, 당은 주변 여러 나라에서 유학생을 모아 당나라 교육기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고, 유능한 인재를 당에서 선별하여 활용하는 정책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숙위학생을 당나라의 개방성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초기의 숙위학생들은 유학생이라기 보다는 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인질적 성격이라는 것은 초기 숙.. 더보기
우리가 완전히 잘못알고 있었던 고대 식읍과 녹읍의 개념 정리 우리가 잘못알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의 식읍과 녹읍제도 1. 고대 사회에서 식읍이란 무엇인가? 식읍이란, 전쟁 등을 통하여 공이 있는 자에게 내린 토지를 말합니다. 설명하자면, 왕실의 성원, 대공신 등 아주 소수의 일부 공훈자들에게 특별 급여로 땅을 지급하는 것을 말하죠. 땅을 지급한 대신 왕실을 번병하여 지키고, 국왕에게 충성하라는 의무를 부여합니다. 즉, 식읍은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부여된 땅입니다. 식읍으로 받은 땅에서는 인민, 토지 등을 포괄적으로 지배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광역 지배가 허용된 것이지요. 사실 식읍은 실제 땅을 내려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초기 국가시대에 소국의 족장들에게 원래 영토의 기득권을 허용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원래 소국 점유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한 것으로 .. 더보기
화랑도의 기원과 역할, 그리고 진흥왕의 화랑도 개편 목적 분석 진흥왕대 화랑도의 개편 -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1. 화랑도에 관한 사료부터 읽어보자! 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신선을 숭상하고,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가려서 원화로 삼았다. 원하는 무리를 모아 그 중에서 인물을 뽑고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와 교정 낭자를 원화로 뽑으니, 모여든 무리가 300-400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한 나머지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로 인하여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뒤 여러 해만에 왕은 국가를 흥하게 하려면.. 더보기
혜공왕 대 귀족들의 반란으로 김유신계 귀족도 제거되다 혜공왕 대 귀족들의 반란으로 김유신계 귀족도 제거되다 37대 혜공왕 때, 대력 14년 기미 4월에 문득 회오리 바람이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 속에 준마를 탄 한 사람은 장군의 모습과 같았으며, 갑옷을입고 모기를 든 사람 40여 명쯤이 뒤를 따라와서 죽현릉(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능 속에서 진동하며 우는 소리가 나는 듯하고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말은 이러했다. [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으며,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진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나간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론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군신들이 저의 공열을 생각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옮.. 더보기
김유신계 후손 진골들도 점차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김유신의 후손들도 정권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김유신의 적손 윤중은 성덕대왕에 벼슬하여 대아찬이 되고 여러번 은호를 입었는데, 왕의 친속들이 질투를 심하게 하였다. 때는 중추 보름날, 성덕왕이 월성 잠두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면서 시종관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윤중을 부르라 하였다. 그 때 누군가 간하였다. [ 지금 종실과 척리들 가운데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소원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또 어찌 친친(가까운 친척과 친해야 하는 예절)의 경우에 맞다 하겠습니까? ] 왕이 대답하였다. [지금 과인이 경들과 더불어 평안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 조부의 덕이다. 만을 공의 말고 같이 하여 잊어 버린다면, 선한 이에게 잘해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는 의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 42 열전 2 김유신 .. 더보기
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보통 역사에서는 김춘추의 즉위를 놓고, 성골계통에서 진골계통으로 왕위가 이전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김춘추 계통의 진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골과 진골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전에 자세히 정리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김춘추를 중심으로 성골과 진골 개념을 정리해보죠. 1. 진흥왕 시기 진골의 성립 진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신라 사회에 성립된 것은 보통 진흥왕 때라고 보고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은 정복군주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으며, 불교교단, 화랑도 정비를 통해 국가체제를 국가체제로 전환시킨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한 왕입니다. 진흥왕은 이전 왕들이 각 소속 부족들과 를 내리던 관례도 없애고, 왕 혼자 단독하교를 내리.. 더보기
김유신과 신령한 산신 김유신과 삼국통일의 의지 공은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으니, 그 무리를 용화향도라고 부른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에 공은 나이 17세로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넘쳐, 침략한 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 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와 범처럼 우리 강토를 어지럽게 하니 평안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 재주와 힘은 헤아리지 않고 화란을 없애고자 하오니 하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저에게 수단을 빌려주십시오!] 머문지 나흘이 되는 날 문든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이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하게 생긴 소녕이 여기에 와서 혼자 있음은.. 더보기
김춘추의 왕위 계승 과정 - 진골왕계의 탄생 김춘추의 즉위 배경에 대한 사료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뭇 신하들이 알천 이찬에게 섭정을 청하였다. 알천은 짐짓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나이 늙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조 제세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군신이 드디어 춘추를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춘추는 재삼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 하, 보장왕 25년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선덕여왕기 이후 성골계 귀족들이 점차 소멸되면서 새로운 진골계 세력이 대두함을 보여줍니다. 선덕여왕은 [여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