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속의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 :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정리해 봅시다.

1. 뭐가 있어야 말을 해보지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덕만>이가 <성골>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미실이는 자신이 <골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이라면, 신라에 품, 진골, 성골로 구분하는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덕만이가 <성골>이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아니, 진골, 성골과 같은 용어 자체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신라의 골품제도를 알 수 있는 사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 뿐이다. 너무나 적은 자료이지만, 그나마 그 적은 자료에서도 성골이 무엇인지, 진골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 놓은 부분은 없다. 신라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적을 필요가 없었던 것 일까?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과거의 용어일 뿐이다. 그럼 그 얼마 안되는 자료를 가지고,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말들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나온 <구분법>들을 총정리 해보도록 하자.

2. 신라의 건국과 <신성한 탄생>

자, 그럼 성골, 진골이라는 표현 방식부터 생각해보자. 성골(聖骨)이라는 말은 말 그래로, <성스러운 뼈대>라는 뜻이다. 진골(眞骨)이야 뭐, <진짜 뼈대>라는 뜻이겠지. 일단, 이 단어들은 모두 <뼈대 있는 인간들>을 말하는 <지배층>의 단어인데, 그 시작은 어떻게 될까?

먼저, 신라의 건국 시대로 올라가보자. 화랑세기를 보면, 이민족인 혁거세를 기존의 신라 집단이 받아들여서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의 이야기 역시 <화랑세기>의 내용을 근거로 캐릭터를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일단 화랑세기의 사료는 조금 조심스럽게 다뤄보려고 한다. 일단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의 원본이 없고, 일제시대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화랑세기 필사 원본도 지금 존재하지 않으며, 사본만 남아있는데 그 사본도 지금 위작 논란이 되고 있다. 문제는 <박창화>라는 사람이 일제시대에 음란소설이나 위작도서를 만들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아마추어 소설가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박창화>라는 인물의 생애와 글쓰기 능력 자체가 논란이 되어, 화랑세기를 역사적 사료로 다루는 데 상당히 신중한 편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일단, 사로국(신라의 초기 명칭)이라는 나라는, 고조선의 건국처럼 절대 강자가 등장해서 세운 나라가 아니다. 신라의 전신인 삼한 시대의 진한에는 <여섯 마을(6촌)>이 있었는데, 여섯 마을의 지배자를 각각 <간>이라고 불렀다. 그 중 고허촌의 촌장을 <도리>라고 부르면서 공동으로 마을의 일을 결정하는 <철기 연맹체 국가>였다.

철기시대에는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사회가 크게 변하고 있었는데, 여섯 마을의 지배자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맞게 국가 체제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여섯 마을이 같이 뭉쳐 세운 연맹체가 <진한6부> 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신성한 사람>이었기에, 공동의 왕으로 추대 했다고 한다. 혁거세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 용(계룡)이 나타나 여자 아이를 낳으니, 그녀의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짓고, 왕비로 삼았다. 왕비가 계룡의 우물(계정)에서 태어나서,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고 지었고, 사라, 또는 사로라고도 했다고 한다. (화랑세기에는 혁거세가 나정이라는 우물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성스로운 하늘의 기운을 받아 신라의 시조가 태어났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신성한 인물>이 왕이된다는 관념이 있었고, <신성한 왕, 왕비, 그 직계 혈족>을 성스러운 존재(성골)로 여겼다고 한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은 <골>이라는 말 자체가 최상위 지배층을 말하며, 성골이라는 관념은 이후 <계림>에서 후대 왕들이 <신성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3. 진한6부가 <골>의 시대로...

초창기의 진한6부를 다스렸던 세력은, 여섯 마을의 지배자였던 <간>이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박혁거세를 <거서간>이라고 부른 것은 <간들 중에 대표적인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의 초창기에는 <간>들이 돌아가면서 지배층을 이루었다. <박씨, 석씨, 김씨>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에서 진한6부가 <연맹체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거서간-차차웅-이사금 등의 군장, 제사장이라는 칭호를 쓰던 6부의 지배자가 <내물>시대에 <마립간>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김씨만이 왕위 세습을 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마립간>은 교과서에서는 <대군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더 깊게 들어가면, <간들을 지배하는 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진한6부는 <국가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존의 <간>들의 마을을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국왕의 신하로 복속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서라벌>이라는 협소한 지역을 벗어나 주변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자료가 적어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신라 시대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서서히 등장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골품제가 등장했는지는 기록에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한가지 명확한 것은, 골품이라는 제도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정해진 신분제도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제도였다는 점이다. 그럼, 일단 신라의 <골품제도>부터 한번 정리해 볼까?

4. 골품 제도의 변화와 <진골> 용어의 등장

골품제도는 말 그대로 <골족>과 <품족>을 나눈 제도이다. <골족>은 일반적인 학설로 본다면, 신라 초창기 지배자들인 화백회의 6부족의 지배자, 즉 <간>이라는 마을의 지배자를 최고지배층인 <골>로 인정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6부족의 관료층이나 행정실무층들은 그 능력에 따라 <품>으로 규정하고, 1,2,3,4,5 품의 5단계를 기준으로 <품>을 주었다. 그것이 바로 <골품제>이다.

그런데, 골품제는 초창기 진한6부의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서라벌>에 거주했던 진한6부의 <간>층과 그 일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신라는 관등을 12등급으로 나누어, 골족과 품족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의 한계선을 명확히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골품제가 <지증-법흥-진흥>으로 이어지는 변혁기에 많은 부분이 손질된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정한 뒤,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꿈꾸었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면서 골품제를 다시 만든 왕이다. 그리고, 진흥왕은 선왕들의 유지를 받들어 영토를 확장하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하려고 했던 왕이다.

특히, 법흥왕 때의 변화가 주목할 만 하다. 법흥왕은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다시 개편하려고 했던 왕이다. 그는 12관등이었던 신라관등제도를 17관등으로 넓히고, 신라의 왕이 곧 <부처의 일족>이라는 성스러운 개념을 신라사회에 도입하였다.

이 때 신라의 <골>족들은 1-17등급으로 분화된 신라 지배 관등 사회에서 상하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또 넓어진 신라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골>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골>족 사이의 분화가 생겨서 <진골>이라는 차별화된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존 학설은 진골이라는 용어가 내물왕 때 등장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1-5두품밖에 없었던 신라에서, 새로운 관등에 적응하고, 새로 등장한 <진골>족들과 유대관계를 맺는 <품>족들이 생기면서 6두품이라는 새로운 <품>이 등장하게 된다. 신라의 6두품은 법흥왕대부터 삼국통일전쟁이 있던 시기에 새로 생긴 <품>이었다.

5. <성골> 용어에 대한 다양한 해석 문제

법흥왕 다음 등장한 <진흥왕> 때에는 새로운 사회 변화에 맞춰 <국왕의 신성함>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진흥왕이 거칠부를 통해 편찬했던 역사서가 바로 <국사>였다. <국사>에서는 <성골>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거칠부는 모든 신라왕들을 <성골>이라고 규정하고, 성골들에게는 어떤 <신성함>이 있었는지를 서술하였다. 즉, 국왕은 새로 등장한 <진골>이라는 계층보다 우월하며, 신성한 존재라는 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고대 왕들의 <신성관념>이다. 즉, 왕들은 성스러운 <성골>인데, 이미 성스러운 신분이기 때문에 왕에 등극했다는 것이다. 김춘추 이후의 진골왕들이 알게 모르게 강조한 <왕이기 때문에 신성하다>라는 개념과는 반대의 개념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성골과 진골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있고, 최초의 진골왕인 김춘추를 기준으로 <신라의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

그럼, 여기까지만 정리하고 <성골>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정의를 하나 하나 살펴보자. 역사학자들은 어떻게 성골과 진골을 구분해 두었을까?

6. 전통적 주장 : 실증주의 사학

가장 전통적인 주장은, 실증주의 사학의 대표자이자, 과거 한국 사학을 이끌어갔던 <이병도>의 주장이다. 이병도는 이렇게 주장했다.

골품에서 성골과 진골의 구분은 왕족의 혈통에서 구분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성골이면 성골, 한쪽만 성골이면 진골로 골품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지금 20대 후반의 나이라면 모두 이병도 사학의 주장대로 공부했을 것이다. 교과서 자체가 이병도 사학의 주장대로였으니까... 왠만한 백과사전에도 이 주장이 실려있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근거없는 주장이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맞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성골인 진지왕의 아들 용수공이고, 어머니는 성골인 천명공주이다. 그럼 김춘추는 성골이여야 한다. 이병도는 진지왕이 패악한 군주였기 때문에 김춘추의 신분이 강등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따지면, 진지왕과 혈연관계에 있는 모든 신라 성골이 다 진골이 되어야 한다.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맞는 부분이 거의 없지만 한국 사학에서는 이직도 이 분의 파워를 무시하지 못한다.

7. 진흥왕의 직계라는 관점

이 주장은 지증-법흥-진흥왕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산물로 <성골>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특히, 진흥왕이라는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직계 후손과 방계 후손을 구별하기 위해, 진흥왕의 직계 후손을 <성골>이라고 부르면서 신성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진흥왕의 태자는 동륜이었는데, 동륜의 아들이 진평왕이었고, 동륜의 손녀가 선덕여왕이다. 진흥왕의 적통이었기 때문에 <성골>이라는 것이다. 반면, 진흥왕의 다른 손자로 왕이 된 진지왕은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인 용수와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는 성골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화랑세기에서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대원신통, 진골정통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원신통이란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 박씨의 계통을, 진골정통이란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 김씨의 계통을 말한다.

여기서 화랑세기에 의하여 또 하나의 직계, 방계 구분이 나온다.

대원신통이란, 어머니가 신을 모시는 신당의 여사제 출신일 경우를 말한다.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왕후 박씨가 바로 대원신통이며,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인 미실이도 대원신통(신녀) 출신이다.

반면, 진골정통이란, 신당의 족속이 아닌 <골>족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정확하지가 않다.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합치는 대충 이런 결론이 나온다.

성골은 아버지가 왕족인 왕의 자녀이고, 진골은 어머니가 왕족인 공주출신의 자녀를 말한다. 물론, 성골과 진골은 화랑세기의 구분으로 모두 <진골정통>이다. 보통 왕은 <성골>출신에서 나오고, 왕비는 <진골>출신과 신당의 <대원정통> 출신에서 나온다고 한다.

8. 혼인 규율을 바라보는 관점

이 주장은 왕족 내부 근친혼에 근거한 주장이다. 신라시대에는 혈통을 보호하기 위해 왕족끼리의 혼인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때 성골은 왕족 내부 집단에서 혼인했을 때 태어난 왕족을 말하며, 진골이란 왕족이 다른 일반 귀족(품족 등)과 결혼해서 태어난 집단이라는 견해이다.

예로, 무열왕은 왕족 내부 근친혼을 어기고, 가야계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성골에서 밀려 족을 강등당했는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진골로 긍정되어 인정받았다는 내용도 들 수 있다.

9. 왕위 계승권 분쟁에 관련된 관점 

이 주장은 성골과 진골의 구분이 정치적 투쟁의 결과라고 보는 주장이다. 즉, 왕족 자체가 근친혼이었으므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국왕의 직계 계승자와 왕권에 오를 수 있는 순위권의 친족을 성골이라고 부르고, 그 외에 왕위 계승권이 없거나, 소외된 집단의 귀족들을 진골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성골은 왕위계승권을 확정해 두어서 이후 분쟁의 소지를 아예 없애 버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골로 왕이 된 김춘추는 오히려 가장 확고한 전제왕권을 확립했고, 가장 강력한 후기 신라 사회를 이끌어갔으며, 김춘추의 후손인 무열왕계가 왕권을 독점하였다.

이것은 더 이상 <성골>이라는 개념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골>은 왕권이 미약할 때 왕위계승분쟁을 없애기 위한 장치이므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김춘추 이후에는 <성골>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없이 <골>이라는 명칭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성골의 개념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한 것은, 성골의 특징을 몰랐기 때문이다. 성골은 사실 중앙집권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법흥왕, 진흥왕의 과도기 때부터 여왕집권기로서 정권이 흔들렸던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 잠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삼국사기에 성골이라는 말은 그 시대에 사용된 용어이다.

10. 중국과 관련해서 바라보는 관점 

이 주장은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의미없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골과 진골은 사실 큰 차이가 없는데, 중국의 황제 체제의 영향으로 왕을 <성골>로 신성화시켰다는 주장이다.

특히, 성골이라는 관점을 외교적인 측면에서 찾는다.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으면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신라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성골>이라는 신성한 개념을 도입하여 당나라 등 주변국의 <황제> 개념에 맞먹는 개념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예로, 법흥왕과 진흥왕은 신라사회에서 보기 힘든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무열왕 때에 성골 개념이 생겼다는 주장도 연결된다. 무열왕은 이전 여왕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여왕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명분을 찾았는데, 그 결과 그녀들을 <성골>로 추존하면서 왕권이 신성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뭔가 더 찾아내려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의견도 내놓는다. 선덕여왕, 진덕여왕이라는 여왕통치가 중국 중화사상에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여자 황제를 부인한다. 당나라의 <측천황제>도 <측천무후>로 강등시키고, 여자 황제의 통치기간을 <암흑기>로 만든 것이 중국의 역사이다. 신라의 여왕 통치기를 중국이 조롱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성골> 개념을 만들어 <여왕통치의 정당화>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11. 성골은 유동적인 신분이라는 주장

이 주장은, 최근 많이 인용되는 주장으로서 이종욱이 쓴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 실려있는 주장이다.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를 다시 정비했다는 점을 위에 적어두었다. 그 때 법흥왕은 불교 전파와 관련하여, 신라의 왕을 <성스러운 석가의 일족>이라고 격상하게 된다. 따라서 성골은 원래 신성하기 때문에 왕이며, 왕은 원래 <성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왕과 그 가족, 형제 등의 직계 친족들은 모두 <성골>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제외된 이들은 진골이 되는 것이다. <성골>로서 새로운 왕이 즉위하게 되면, 새로운 왕의 가족과 형제 등을 포함한 새로운 <성골>이 등장하는 것이며, 그 외의 친족들은 <진골>이 된다는 주장이다. 즉, 성골이란 현재 왕의 직계 후손들이 <성골>인 것이다. 현재 성골이더라도 다음 왕과 혈연관계가 멀어지면 족적 강등을 당하게 되며, 왕위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이 때 성골들은 황궁에 거주하면서 그 신분을 유지하고, 후대 왕을 선출하는 등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하게 된다. 즉, 신라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진골은 황궁이 아닌 수도에 거주하면서 차별화 된다. 또한, 가야계(김유신계)라던가, 타국의 왕족이 흡수되었을 경우, 신라에서는 진골 신분으로 대접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출신 왕자가 태어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는 이 시기를 <성골남진>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에는 더 이상 성골집단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김춘추를 예로 들자.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었으므로, 진지왕이 계속 왕이였다면 성골이다. 그러나 진평왕이 즉위할 때는 그의 직계 진척이 아니므로 진골로 격하된 것이다. 신라는 예외없이 선왕의 후손인 <성골>이 다음 왕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성골이 아닌 상태에서 즉위했으므로, 진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12. 신라의 불교 공인과 성골의 연관성

이 주장은 성골이라는 관념이 불교전파와 관련되었다는 주장이다. 거칠부의 국사를 보면 모든 신라왕들이 <성골>이라고 씌여져 있으나, 그 주장은 진흥왕이 의도적으로 국사를 편찬했기 때문일 뿐이며, 사실 성골은 법흥앙-진흥왕대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즉,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면서 신라 왕의 신성함을 <미륵부처의 신성함>과 동일시 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이전 신라 시대를 지배했던 <신권>보다 강력한 힘을 불교에서 찾게 된다. 이 관념이 <성스러운 부처 일족>이라는 불교 설화와 맞물려 <성골>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원래, <골>은 모두 <진골>이었다. 그런데, 진골 중 일부가 <우리는 석가를 믿는 족속>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골>이 등장했다. 즉, 불교의 융성과 <성골> 개념의 등장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법흥왕이 불교를 전파한 이후,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덕여왕은 모두 진골의 진(眞)자를 이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진정한 석가모니 족속(진종설 : 眞種說)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진흥왕은 스스로를 불법왕인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했고, 신라를 석가의 불국토에 비유하기도 한다.

선덕여왕 드라마에서 진평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백정>이고, 그의 부인이 <마야부인>인데, 이것은 모두 석가의 부모 이름이며, 신라 왕실의 성골들은 석가의 친척이름을 차용하였다. 즉, 다른 왕족과 다른 신성한 석가 일족이라는 의미에서 성스러운 족속(성골) 개념이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13. 결국 성골이란 무엇인가?

위의 내용들을 정리해서 성골이라는 족속을 정리해보자. 위의 주장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결국 성골이란 <왕이 될 수 있는 왕위 계승권>과 관련있는 자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성골>은 하나의 신분이라기 보다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자인가를 허가하는 <허가증>같은 것일 수도 있다.

신라에는 <갈문왕>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왕위 계승>에 대비한 <보험>같은 것이었다.

왕은 다음 왕으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한다. 그런데, 왕이 자식이 없을 경우엔? 왕의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왕의 동생도 <성골>신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의 동생마저 죽어서 동생의 아들만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왕의 동생도 미리 성골로서 인정하고 <왕>으로 책봉을 해 놓아야 <왕의 동생의 아들>이 훗날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동생을 책봉한 것이 <갈문왕>이라는 제도이다. 즉, 갈문왕 제도는 성골이 <왕의계승권자>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라의 제도이다.

성골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새로운 역사책이 발견되던가, 성골과 관련된 신라왕의 무덤이나 비석이 나오지 않는 한, 성골의 실체는 영원한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 뿐이다.

최근 학설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자.

최근 학설은, <골>이라는 것을 김씨 왕권이 세습되기 시작한 내물마립간 시대에서 찾는다. 내물왕의 후손들은 <김씨>로서 박씨, 석씨와 다른 자신들만의 우월함을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다른 진한6부의 <간>층, 즉 <골>들과 다른 진짜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진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이 지증왕-법흥왕-진흥왕대에 와서 왕권에 충돌하기 시작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공인했으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던 시기의 왕들은 <왕위계승권>자인 왕의 직계들과 다른 <진골>들을 구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국왕의 권위를 위해 불교의 <석가모니 족속>이라는 이데올로기, 국왕은 원래 성스럽고 신성하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왕권 세습을 정당화하고, 왕권이 신성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국통일을 이룰 무렵 진흥왕이 생각했던 <불가능한 꿈>을 이루낸 무열왕 김춘추의 후손들은 <성골>이라는 타이틀이 없이도, 삼국통일을 이루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서 백년간 신라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묻혀있던 새로운 역사서들이 나타나서 더 정확하고, 확실한 <성골>의 개념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남기고 오늘 글을 정리한다.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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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 김유신 열전

三國史記 列傳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수태보문하시중판상서이예부사집현전태학사감수국사상주국치사신 김부식은 임금의 말씀을 받들어 찬함.

三國史記卷第四十一. 삼국사기 권 제 41

【1】列傳 第一 金庾信 (上) 열전 제1 김유신 (상)/출생(서기595년)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 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김유신(金庾信)은 서울 사람(王京人:경주인)이었다. 그 12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른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峰:지금김해龜旨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 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9세손(世孫) 구해(仇亥)에 이르렀다. 구해는 혹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하며, 유신의 증조(曾祖)이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㰡’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㰡“고 하였으며, 유신의 비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다.』 하였으니,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왕(首露王)과 신라(新羅)는 같은 성씨였다.

祖武力 爲新州道 行軍摠管 嘗領兵 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父舒玄 官至蘇判․大梁州都督 . 安撫大梁州諸軍事 按庾信碑云 『考蘇判金逍衍』 不知舒玄或更名耶 或逍衍是字耶 疑故兩存之

조부(祖父)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지금廣州) 행군총관(行軍摠官)이 되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왕(百濟 聖王)과 그 장수 네 사람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아버지 서현(舒玄)은 벼슬이 소판(蘇判:3등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유신의 비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다.』하였으니, 서현(舒玄)은 혹은 고친 이름인지, 혹은 소연(逍衍)은 자호(字號)인지, 모르겠다. 의심이 되므로 둘 다 적어 둔다.

初 舒玄路見葛文王立宗之子. 肅訖宗之女萬明 心悅而目挑之 不待媒妁而合 舒玄爲萬弩郡太守 將與俱行 肅訖宗始知女子與玄野合疾之 囚於別第 使人守之 忽雷震屋門 守者驚亂 萬明從竇而出 遂與舒玄 赴萬弩郡

일찍이 서현(舒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法興王弟)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眞興王弟)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현재의 충북 진천]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서야 딸이 서현과 야합(野合)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갑자기 벼락(落雷)이 문간을 때리자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이 없었다. 만명(萬明)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드디어 서현공과 함께 만노군(萬弩郡)으로 부임하였다.

舒玄 庚辰之夜夢 熒惑. 鎭二星 降於己 萬明亦以辛丑之夜夢 見童子衣金甲 乘雲入堂中 尋而有娠 二十月而生庾信 是眞平王建福十二年 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及欲定名 謂夫人曰 㰡’吾以庚辰夜吉夢 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今庚與庾.字相似 辰與信. 聲相近 況古之賢人 有名庾信, 盍以命之, 遂名庾信焉,(萬弩郡, 今之鎭州, 初以庾信胎, 藏之高山, 至今謂之胎靈山.)

서현공(舒玄公)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南方火星)과 진성(鎭星:中央土星)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부인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바로 태기가 있어 20개월만에 유신을 낳았다. 때는 진평왕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乙卯:595)였다. <서현공이> 그 <아들>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부인에게 말하였다.㰡’내가 경진일(庚辰日) 밤에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경진(庚辰)으로 이름을 지어야 하겠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지금 경(庚)자는 유(庾)자와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소리가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 어진 사람에 유신(庾信)이라고 이름 지은 이가 있으니 그렇게 이름 짓지 않으리요?㰡“ 하고는 드디어 이름을 유신(庾信)이라 하였다.<만노군은 지금[고려]의 진주(鎭州)[현재의 충북 진천]이다. 처음 유신의 태(胎)를 고산(高山)에 묻었으므로 지금[고려]까지 태령산(胎靈山)이라 한다.>

【2】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15세(서기609년)

公年十五歲爲花郞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

공은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으니, 그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3】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17세(서기611년)

眞平王建福二十八年辛未 公年十七歲 見高句麗․百濟․靺鞨侵軼國疆 慷慨有平寇賊之志 獨行入 中嶽石崛 齊戒告天 盟誓曰 㰡’敵國無道 爲豺虎 以擾我封場 略無寧歲 僕是一介微臣 不量材力 志淸禍亂 惟天降監 假手於我㰡“ 居四日 忽有一老人 被褐而來曰 㰡’此處 多毒蟲猛獸 可畏之地 貴少年 爰來獨處 何也㰡“ 答曰 㰡’長者從何許來 尊名可得聞乎㰡“ 老人曰 㰡’吾無所住 行止隨緣 名則難勝也㰡“ 公聞之 知非常人 再拜進曰 㰡’僕新羅人也 見國之讐 痛心疾首 故來此 冀有所遇耳 伏乞長者 憫我精誠 授之方術㰡“ 老人黙然無言 公涕淚懇請不倦 至于六七 老人乃言曰 㰡’子幼而有幷三國之心 不亦壯乎㰡“ 乃授以秘法曰 㰡’愼勿妄傳 若用之不義 反受其殃㰡“ 言訖而辭 行二里許 追而望之 不見 唯山上有光 爛然若五色焉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辛未:611)에 공은 나이 17세로, 고구려․백제․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넘쳐 침략한 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석굴(中嶽石崛)에 들어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하늘에 다음과 같이 고하여 맹세하였다.㰡’적국이 무도(無道)하여 승냥이와 범처럼 우리 강역을 어지럽게 하니 거의 평안한 해가 없습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은 헤아리지 않고, 화란(禍亂)을 없애고자 하오니 하늘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저에게 수단을 빌려주십시오!㰡“

머문지 나흘이 되는 날에 문득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㰡’이 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하게 생긴 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있음은 무엇 때문인가?㰡“ 유신이 대답하였다. 㰡’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㰡“노인이 말하였다. 㰡’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이 없고 인연 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難勝)이다.㰡“

공이 이 말을 듣고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에게] 두 번 절하고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㰡’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만나는 바가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애달피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㰡“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고 여섯 일곱 번 하니 그제야 노인은 㰡’그대는 어린 나이에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또한 장한 일이 아닌가?㰡“ 하고, 이에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면서 말하였다. 㰡’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일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㰡“말을 마치고 작별을 하였는데 2리쯤 갔을 때 쫓아가 바라보니,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빛이 보일 뿐인데 오색 빛처럼 찬란하였다.

【4】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18세(서기612년)

建福二十九年 隣賊轉迫 公愈激壯心 獨携寶劒 入咽薄山深壑之中 燒香告天 祈祝 若在中嶽 誓辭仍禱 㰡’天官垂光 降靈於寶劒㰡“ 三日夜 虛. 角二星光芒 赫然下垂 劒若動搖然.

진평왕 건복 29년(612:公年十八歲)에 이웃 나라 적병이 점점 닥쳐오자, 공은 장한 마음을 더욱 불러일으켜 혼자서 보검(寶劍)을 가지고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여 빌기를 중악(中嶽)에서 맹서한 것처럼 하고, 이어서 㰡’천관(天官)께서는 빛을 드리워 보검(寶劍)에 신령을 내려 주소서!㰡“라고 기도하였다. 3일째 되는 밤에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 끝이 빛나게 내려오더니 칼이 마치 흔들리는 듯하였다.

【5】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35세(서기629년)

建福四十六年己丑 秋八月 王遣伊湌任永里 波珍湌龍春․白龍 蘇判大因․舒玄等 率兵攻高句麗娘臂城 麗人出兵逆擊之 吾人失利 死者衆多 衆心折衄 無復鬪心 庾信 時爲中幢幢主 進於父前 脫冑而告曰 㰡’我兵敗北 吾平生 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盖聞 㰡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㰡‘ 吾其爲綱領乎㰡“ 迺跨馬拔劒 跳坑出入賊陣 斬將軍 提其首而來 我軍見之 乘勝奮擊 斬殺五千餘級 生擒一千人 城中兇懼無敢抗 皆出降.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 가을 8월에 진평왕이 이찬(伊湌:2등관) 임영리(任永里), 파진찬(波珍湌:4등관)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蘇判:3등관) 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淸原)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맞아 치니, 신라 사람은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뭇 사람들의 마음이 꺾이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이 그때 중당 당주(中幢幢主:副將軍)였었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㰡’우리 군사가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로써 살겠다고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㰡옷깃을 들면 가죽옷[裘]이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㰡‘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㰡“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어 들어 참호(塹壕)를 뛰어넘어 적진에 들락날락하면서 장군의 머리를 베어 들고 돌아왔다. 우리 군사들이 보고, 이기는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고 1천 명을 사로잡으니,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6】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48세(서기642년)

善德大王十一年壬寅 百濟敗大梁州 春秋公女子古陁炤娘 從夫品釋死焉 春秋恨之 欲請高句麗兵 以報百濟之怨 王許之 將行 謂庾信曰 㰡’吾與公同體 爲國股肱 今我若入彼見害 則公其無心乎㰡“ 庾信曰 㰡’公若往而不還 則僕之馬跡 必踐於麗․濟兩王之庭 苟不如此 將何面目 以見國人乎㰡“ 春秋感悅 與公互噬手指 歃血以盟曰 㰡’吾計日六旬乃還 若過此不來 則無再見之期矣㰡“ 遂相別 後庾信爲 押梁州軍主,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지금 陜川)를 함락하니,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으로 여겨,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춘추공이 장차 떠나려 할 때 유신에게 말하였다. 㰡’나는 공(公)과 한 몸이고 나라의 팔다리이다. 지금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해를 당하면, 공(公)은 무심할 수 있겠는가?㰡“

유신이 말하였다. 㰡’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을 대할 것인가?㰡“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더불어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여 말하였다. 㰡’내가 날짜를 계산하여 보건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다. 만약 이 기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만나 볼 기약이 없을 것이다.㰡“그리고 나서 서로 작별하였다. 후에 유신은 압량주(押梁州:지금 慶山) 군주(軍主:摠督:都督)가 되었다.

春秋與訓信沙干 聘高句麗 行至代買縣 縣人豆斯支沙干 贈靑布三百步 旣入彼境 麗王 遣太大對盧蓋金館之 燕饗有加 或告麗王曰 㰡’新羅使者 非庸人也 今來 殆欲觀我形勢也 王其圖之 俾無後患㰡“ 王欲橫問 因其難對而辱之 謂曰 㰡’麻木峴與竹嶺 本我國地 若不還我 則不得歸㰡“ 春秋答曰 㰡’國家土地 非臣子所專 臣不敢聞命㰡“ 王怒囚之 欲戮未果

春秋以靑布三百步 密贈王之寵臣先道解 道解 以饌具來 相飮酒酣 戱語曰 㰡’子亦嘗聞龜兎之說乎 昔東海龍女病心 醫言 㰡得兎肝合藥 則可療也㰡‘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 白龍王言 㰡吾能得之㰡‘ 遂登陸 見兎言 㰡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隼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㰡‘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㰡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㰡‘ 兎曰 㰡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日者 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㰡‘ 龜信之而還 纔上岸 兎脫入草中 謂龜曰 㰡愚哉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㰡‘ 龜憫黙而退㰡“ 春秋聞其言 喩其意 移書於王曰 『二嶺 本大國地分 臣歸國 請吾王還之 謂予不信 有如皦日』 王迺悅焉.

春秋入高句麗 過六旬未還 庾信揀得國內勇士三千人 相語曰 㰡’吾聞 見危致命 臨難忘身者 烈士之志也 夫一人致死. 當百人 百人致死. 當千人 千人致死. 當萬人 則可以橫行天下 今國之賢相 被他國之拘執 其可畏不犯難乎㰡“ 於是 衆人曰 㰡’雖出萬死一生之中 敢不從將軍之令乎㰡“ 遂請王 以定行期 時高句麗諜者浮屠德昌 使告於王 王前聞春秋盟辭 又聞諜者之言 不敢復留 厚禮而歸之 及出境 謂送者曰 㰡’吾欲釋憾於百濟 故來請師 大王不許之 而反求土地 此非臣所得專 嚮與大王書者 圖逭死耳㰡“ 此與本記眞平王十二年所書 一事而小異 以皆古記所傳 故兩存之.

춘추가 사간(沙干:8등관) 훈신(訓信)과 함께 고구려로 사신을 갈 때 대매현(代買縣:竹嶺縣?)에 이르니 고을 사람 두사지(豆斯支) 사간(沙干)이 청포(靑布:모시베) 300보(三百步: 43필)를 선사하였다. 고구려 국경내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寶臟王)은 태대대로(太大對盧: 1등관) 개금(蓋金:淵蓋蘇文)을 보내 객사를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식사 대접을 특별하게 하였다. 어느 사람이 고구려 왕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㰡’신라 사신(使者)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은 아마 우리의 형세를 살피려는 것 같으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㰡“고구려 왕은 무리한 질문으로 대답하기 어렵게 함으로써 그를 욕보이게 하려고 말하였다.㰡’마목현(麻木峴:鷄立嶺:鳥嶺)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 나라 땅이니, 만약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㰡“

춘추가 대답하였다. 㰡’국가의 토지는 신하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臣)은 감히 명령을 좇을 수 없습니다.㰡“고구려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려 하였으나 미처 처형하지 않았는데, 춘추공은 청포 300보(靑布三百步)를 은밀히 왕이 총애하는 신하 선도해(先道解)에게 주었다. 도해가 음식을 차려 와서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이 얼근히 올랐을 때 도해가 농담조로 말하였다.

㰡’그대도 또한 일찍이 거북과 토끼 이야기를 들었는가? 옛날에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병을 앓았는데 의원의 말이 㰡토끼간을 얻어 약을 지으면 고칠 수 있다.㰡‘고 하였다. 그러나 바다 속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거북이 한 마리가 용왕에게 아뢰어 㰡제가 그것을 얻어 올 수 있습니다.㰡‘ 하였다.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말하기를 㰡바다 가운데에 섬 하나가 있는데, 맑은 샘물과 흰 돌에, 무성한 숲과 맛있는 과일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매와 새매가 침입하지 못한다. 네가 만약 가기만 하면 편히 살아 아무 근심이 없을 것이다.㰡‘ 하고, 이어 토끼를 등에 업고 헤엄쳐 2~3리쯤 가다가, 거북이가 토끼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㰡지금 용왕의 딸이 병이 들었는데, 모름지기 토끼간이 약이 된다고 하기에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이다.㰡‘ 하였다. 토끼가 말하기를 㰡허허! 나는 신명(神明)의 후예라, 능히 오장(五臟)을 꺼내어 씻어 넣을 수 있다. 일전에 속이 좀 불편하여 간과 심장을 꺼내 씻어서 잠시 바위 밑에 두었는데, 너의 달콤한 말을 듣고 곧바로 와서 간이 아직도 그 곳에 있으니, 어찌 되돌아가서 간을 가져오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어찌 양편이 다 좋은 일이 아닌가?㰡‘ 하였다. 거북이 그 말을 믿고 되돌아갔다.

겨우 해안에 오르자마자 토끼가 풀 속으로 도망치며 거북에게 말하기를 㰡너는 어리석기도 하다. 어찌 간 없이 사는 자가 있을 것이냐?㰡‘ 하니, 거북이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㰡“춘추가 그 말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 왕에게 글월을 보내 말하였다. 㰡’두 영(嶺)은 본래 대국(大國:고구려)의 땅입니다. 신(臣)이 귀국하면 우리 왕께 청하여 돌려 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㰡“왕이 이에 기뻐하였다.

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간지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국내의 용감한 군사 3천 명을 선발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㰡’내가 들으니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잊는 것은 열사의 뜻이라 한다. 무릇 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백 사람을 당해내고, 백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천 사람을 당해 내며, 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만 사람을 당해 낼 수 있으니 그러면 천하를 마음대로 주름잡을 수 있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억류되어 있는데 두렵다고 하여 어려움을 당해 내지 않을 것인가?㰡“이에 뭇 사람들이 㰡’비록 만 번 죽고 겨우 한 번 살 수 있는 곳에 가더라도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㰡“ 하였다. 드디어 왕에게 청하여 군사 출동 기일을 정하였다. 그때 고구려 간첩 승려 덕창(德昌)이 사람을 시켜 이를 <고구려> 왕에게 아뢰었다. <고구려> 왕은 이미 춘추의 맹서하는 약속을 받았고, 또 간첩의 말을 들었으므로 <춘추를> 더 잡아 둘 수가 없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춘추는 국경을 벗어나자 바래다준 사람에게 말하였다. 㰡’나는 백제에 대한 유감을 풀고자 하여 군대를 청하러 왔다가 대왕께서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니 이는 신하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엊그제 대왕에게 서신을 올린 것은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뜻이었을 뿐이다.㰡“<이는 본기(本記)에서 진평왕 12년에 쓴 것과 같은 사건이나 내용은 조금 다르다. 모두가 고기(古記)의 전하는 바이므로 두 가지를 모두 남겨 둔다.>

【7】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50세(서기644년)

庾信爲押梁州軍主 十三年爲蘇判 秋九月 王命爲上將軍 使領兵 伐百濟加兮城․省熱城․同大城{同火城}等七城 大克之 因開加兮之津

유신은 <선덕왕 11년>압량주 군주(軍主)가 되었다가 13년(644)에 소판(蘇判:3등관)이 되었고, 가을 9월에 왕이 상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성을 쳐서 크게 이겼다. 이로 말미암아 가혜진(加兮津)을 열었다.

【8】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51세(서기645년)

乙巳正月 歸未見王 封人急報 百濟大軍來攻我買利浦城 王又拜庾信 爲上州將軍 令拒之 庾信聞命卽駕 不見妻子 逆擊百濟軍走之 斬首二千級 三月還命王宮 未歸家 又急告 百濟兵 出屯于其國界 將大擧兵侵我 王復告庾信曰 㰡’請公 不憚勞遄行 及其未至備之㰡“ 庾信又不入家 練軍繕兵 向西行

을사년(선덕왕 14년: 645) 정월에 돌아와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한다는 봉인(封人)의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니 유신은 명령을 받자마자 말에 올라 처자(妻子)를 만나지 않고, 백제 군대를 반격하여 쫓아냈는데 2천 명을 목베었다.

3월에 왕궁에 돌아와 복명하고 미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또 백제 군사가 국경에 주둔하여 많은 군사로 우리를 치려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에게 말하기를 㰡’청컨대 공은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급히 가서 그들이 이르기 전에 대비하시오!㰡“ 하니 유신이 또 집에 들르지 않고 군대를 선발하고 병기를 손질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于時 其家人 皆出門外待來 庾信過門 不顧而行 至 五十步許駐馬 令取漿水於宅 啜之曰 㰡’吾家之水 尙有舊味㰡“ 於是 軍衆皆云 㰡’大將軍 猶如此 我輩 豈以離別骨肉爲恨乎㰡“ 及至疆埸 百濟人 望我兵衛 不敢迫乃退 大王聞之甚喜 加爵賞.

이때 그 집사람들이 모두 문밖에 나와서 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유신이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 돌아다보지 않고 가다가 50보쯤 이르러 말을 세우게 하고 사람을 시켜 집에 가서 장물<漿水>을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는 㰡’우리 집 물은 옛 맛 그대로구나!㰡“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㰡’대장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시니 우리들이 골육을 이별함을 어찌 한스러워 하랴!㰡“고 하였다. 국경에 이르니 백제 사람들이 우리 군사의 방비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여 벼슬과 상을 더하여 주었다.

【9】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53세(서기647년)

十六年丁未 是善德王末年 眞德王元年也 大臣毗曇․廉宗 謂女主不能善理 擧兵欲廢之 王自內禦之 毗曇等. 屯於明活城 王師 營於月城 攻守十日不解 丙夜 大星落於月城 毗曇等 謂士卒曰 㰡’吾聞落星之下 必有流血 此殆女主敗績之兆也㰡“ 士卒呼吼 聲振天地

<선덕왕>16년 정미(647)는 선덕왕의 마지막 해이자,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왕(女主)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하므로 왕은 스스로 왕궁 안에서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사는 월성(月城)에 머물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한밤(丙夜)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은 사병들에게 말하였다. 㰡’내가 듣건대 㰡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다.㰡‘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왕(女主)이 패할 징조이다.㰡“병졸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大王聞之 恐懼失次 庾信見王曰 㰡’吉凶無常 惟人所召 故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高宗以雉雊興 鄭公以龍鬪昌 故知德勝於妖 則星辰變異 不足畏也 請王勿憂㰡“ 乃造偶人 抱火載於風鳶而颺之 若上天然 翌日 使人傳言於路曰 㰡’昨夜 落星還上㰡“ 使賊軍疑焉 又刑白馬 祭於落星之地 祝曰 㰡’天道 則陽剛而陰柔 人道 則君尊而臣卑 苟或易之 卽爲大亂 今毗曇等 以臣而謀君 自下而犯上 此所謂亂臣賊子 人神所同疾 天地所不容 今天若無意於此 而反見星怪於王城 此臣之所疑惑 而不喩者也 惟天之威 從人之欲 善善惡惡 無作神羞㰡“ 於是 督諸將卒 奮擊之 毗曇等敗走 追斬之 夷九族

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유신이 왕을 뵈옵고 말하였다. 㰡’길(吉)과 흉(凶)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붉은 새(赤雀)가 나타났어도 망하였고, 노(魯)나라 애공(哀公)은 기린(麒麟)을 얻었어도 쇠하였으며, 은나라 고종(高宗)은 장끼가 울었어도 중흥을 이루었고, 정공(鄭公)은 두 마리 용(龍)이 싸웠으나 창성(昌盛)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덕(德)이 요사(妖邪)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이 떨어진 변괴는 족히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㰡“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연(風鳶)에 달아 날리니, 하늘로 올라가는 듯 하였다.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길가는 사람에게 㰡’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㰡“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흰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빌었다. 㰡’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人道)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神明)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한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 안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를 보이니 이는 제가 의심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惡)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㰡“ 그리고 나서는 여러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베고 그 9족(族)을 무찔러 죽였다.

【補記】

삼국사기 卷五 신라본기 『선덕왕16년(647)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은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일컫고, 반란을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8월에 왕께서 훙어,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례하였다.』

『진덕여왕원년(647) 정월 17일에 비담의 목을 베고, 연루자 30인을 죽였다. 2월에 이찬 알천(閼川)을 임명하여 상대등(上大等)을 삼고, 대아찬(大阿湌:5등관)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春川)의 군주(軍主)를 삼았다』

冬十月 百濟兵 來圍茂山․甘勿․桐岑等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拒之 苦戰氣竭 庾信謂丕寧子曰 㰡’今日之事急矣 非子 誰能激衆心乎㰡“ 丕寧子拜曰 㰡’敢不惟命之從㰡“ 遂赴敵 子擧眞及家奴合節 隨之 突劒戟 力戰死之 軍士望之 感勵爭進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현재의 경북 구미시] 등 세 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진덕>왕이 유신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합 1만 명을 이끌고 막게 하였으나 고전(苦戰)하여 기세가 꺾이자 유신이 비녕자(丕寧子)에게 㰡’오늘의 사태가 급박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뭇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㰡“ 하니 비령자가 절을 하고는 㰡’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㰡“ 하고는 적진에 나아갔다.

아들 거진(擧眞) 및 집종[家奴] 합절(合節)이 그를 따라서 창, 칼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죽으니 군사들이 이를 바라다보고는 감동되고 격분되어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10】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41) 김유신/54세(서기648년)

眞德王太和元年戊申 春秋 以不得請於高句麗 遂入唐乞師 太宗皇帝曰 㰡’聞爾國庾信之名 其爲人也如何㰡“ 對曰 㰡’庾信 雖少有才智 若不籍天威 豈易除鄰患㰡“ 帝曰 㰡’誠君子之國也㰡“ 乃詔許勑 將軍蘇定方 以師二十萬 徂征百濟.

時, 庾信 爲押梁州軍主 若無意於軍事 飮酒作樂 屢經旬月 州人 以庾信爲庸將 譏謗之曰 㰡’衆人安居日久 力有餘 可以一戰 而將軍慵惰 如之何㰡“

진덕왕 태화(太和) 원년 무신(648)에 춘추공은 고구려의 청병을 이루지 못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청하였다.

<당>태종 황제가 㰡’너희 나라 유신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㰡“ 하니, <춘추공이> 대답하기를 㰡’유신은 비록 다소의 재주와 지략이 있으나 만약 황제의 위엄을 빌리지 않으면 어찌 쉽게 걱정거리인 이웃 나라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㰡“ 하였다. 황제는 㰡’참으로 군자의 나라(君子之國)로구나!㰡“ 하고는 요청을 수락하여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때 유신공은 압량주(押粱州) 군주(軍主)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놀며 몇 달을 보내니, 주(州)의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생각하여 헐뜯어 말하기를 㰡’뭇 사람이 편안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어 남는 힘이 있어 한번 전투를 해봄직한 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찌할 것인가.㰡“고 조롱하였다.

庾信聞之 知民可用 告大王曰 㰡’今觀民心 可以有事 請伐百濟 以報大梁州之役㰡“ 王曰 㰡’以小觸大 危將奈何㰡“ 對曰 㰡’兵之勝否 不在大小 顧其人心何如耳 故紂有億兆人 離心離德 不如周家十亂 同心同德 今吾人一意 可與同死生 彼百濟者不足畏也㰡“ 王乃許之.

遂簡練州兵赴敵 至大梁城外 百濟逆拒之 佯北不勝 至玉門谷 百濟輕之 大率衆來 伏發擊其前後 大敗之 獲百濟將軍八人 斬獲一千級 於是 使告百濟將軍曰 㰡’我軍主品釋及其妻金氏之骨 埋於爾國獄中 今 爾裨將八人 見捉於我匍匐請命 我以狐豹首丘山之意 未忍殺之 今 爾送死二人之骨 易生八人 可乎㰡“ 百濟仲常一作忠常佐平 言於王曰 㰡’羅人骸骨 留之無益 可以送之 若羅人失信 不還我八人 則曲在彼 直在我 何患之有㰡“ 乃掘品釋夫妻之骨 櫝而送之 庾信曰 㰡’一葉落 茂林無所損 一塵集 大山無所增㰡“ 許八人生還 遂乘勝 入百濟之境 攻拔嶽城等十二城 斬首二萬餘級 生獲九千人 論功 增秩伊湌 爲上州行軍大摠管 又入賊境 屠進禮等九城 斬首九千餘級 虜得六百人.

春秋入唐 請得兵二十萬來 見庾信曰 㰡’死生有命 故得生還 復與公相見 何幸如焉㰡“ 庾信對曰 㰡’下臣仗國威靈 再與百濟大戰 拔城二十 斬獲三萬餘人 又使品釋公及其夫人之骨 得反鄕里 此皆天幸所致也 吾何力焉㰡“

유신공이 이 말을 듣고 백성을 한 번 쓸 수 있음을 알고는 대왕에게 고하였다. 㰡’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전쟁을 치를 수 있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陜川) 전쟁에 대한 보복을 합시다!㰡“ 왕은 㰡’소수의 병력으로써 큰 병력을 대항하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㰡“ 하니 <유신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㰡’전쟁의 승부는 병력의 다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인심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殷)나라 주왕(紂王)에게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과 덕이 떠나서 주(周)나라의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백성은 뜻을 같이하여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데 저 백제는 두려워 할 바가 못됩니다.㰡“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드디어 압량주(押粱州:경산)의 군사를 선발 훈련시켜 적진으로 나가게 하여 대량성(大梁城:현재의 합천)에 이르니 백제군이 맞서 대항하였다. <신라군은> 거짓 패배하여 이기지 못하는 척하여 옥문곡(玉門谷:慶州西)까지 후퇴하니 백제군은 이를 만만하게 여기고 대군을 이끌고 왔으므로 복병(伏兵)이 그 앞뒤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목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1천 명<級>에 달하였다.

이에 <유신공은> 사자(使者)를 백제 장군(義直)에게 보내 말하였다. 㰡’우리 대량주군주(大粱州軍主)이던 김품석(金品釋)과 그의 부인 김씨의 뼈가 너의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의 부장(裨將) 여덟 명이 나에게 잡혀 있어 엎드려 살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산 여덟 사람과 바꿀 수 있는가?㰡“

백제의 좌평(佐平:1등관)인 중상(仲常)<또는 충상(忠常)이라고도 썼다.>이 의자왕에게 아뢰었다. 㰡’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도 이로울 바가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신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의 여덟 명을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이 저쪽에 있고, 곧음이 우리 쪽에 있으니 어찌 걱정할 바가 있겠습니까?㰡“ 이에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내왔다.

유신이 말하기를 㰡’한 잎이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수풀이 줄어들지 않으며, 한 티끌이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보태지는 법이 아니다.㰡“ 하고는 여덟 사람이 살아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마침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백제의 영토에 들어가 악성(嶽城:河東) 등 12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을 목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공로를 논하여 이찬(伊湌:2등관)으로 승진시키고 상주 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하였다. 다시 적의 영토에 들어가 진례(進禮:錦山) 등 아홉 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을 목베고 6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춘추공은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 20만을 얻기를 청하고 와서 유신공을 만나 말하기를 㰡’사람이 살고 죽는 데에는 명이 있어 살아 돌아와 다시 공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㰡“ 하니 유신이 답하였다. 㰡’저는 국가의 위엄과 영령의 힘에 의지하여 두 번이나 백제와 크게 싸워 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3만여 명을 목베거나 포로로 잡았고, 또 품석공(品釋公)과 그 부인의 유해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모두가 하늘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㰡“

三國史記 卷 第四十一 終

三國史記 卷 第四十二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大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11】列傳 第二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54세(서기648년)

金庾信 中 김유신(金庾信) 중

<太和>二年秋八月 百濟將軍殷相 來攻石吐等七城 王命庾信及竹旨․陳春․天存等將軍 出禦之 分三軍 爲五道擊之 互相勝負 經旬不解 至於僵屍滿野 流血浮杵 於是 屯於道薩城下 歇馬餉士 以圖再擧 時有水鳥東飛 過庾信之幕 將士見之 以爲不祥 庾信曰 㰡’此不足怪也㰡“ 謂衆曰 㰡’今日必有百濟人來諜 汝等 佯不知 勿敢誰何㰡“ 又使徇于軍中曰 㰡’堅壁不動 待明日援軍至 然後決戰㰡“

태화2년(649:公의 55세) 가을 8월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왔다. 왕은 유신과 죽지(竹旨), 진춘(陳春), 천존(天存) 등의 장군에게 명하여 나가 막게 하였다. 전군<三軍>을 다섯 방면(五道)으로 나누어 쳤으나 서로의 승부가 열흘이 지나도록 나지 않았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어 공이(杵)를 띄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쳐서 말을 쉬게 하고 군사를 잘 먹여 다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때 물새가 동쪽으로 날아 유신의 군막을 지나가니 장군과 병사들이 보고 불길한 징조라고 말하였다. 유신이 이는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무리에게 일렀다.

㰡’금일 반드시 백제인이 간첩으로 오는 자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체하고 검문하지 말라!㰡“그리고는 군중에 전령을 돌렸다. 㰡’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옴을 기다려 결전을 하겠다!㰡“

諜者聞之 歸報殷相 殷相等 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 庾信等 一時奮擊 大克之 生獲將軍達率正仲․士卒一百人 斬佐平殷相․達率自堅等十人 及卒八千九百八十人 獲馬一萬匹․鎧一千八百領 其他器械稱是 及歸還 路見百濟佐平正福 與卒一千人來降 皆放之 任其所往 至京城 大王迎門 勞慰優厚.

간첩이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이 군대가 증원되는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일시에 용감히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장군 달솔(達率: 백제 2품관) 정중(正仲)과 병사 100명을 생포하고 좌평(佐平: 1품관) 은상, 달솔 자견(自堅) 등 10명과 병사 8,980명을 목베고 말 1만 마리와 투구 1천8백 벌, 기타 이와 비슷한 숫자의 기계를 노획하였다. 돌아오다가 길에서 항복해 오는 백제의 좌평(佐平) 정복(正福)과 병사 1천 명을 만나자 모두 석방하여 각자 가고 싶은 데로 방임하였다. 유신공은 개선군을 거느리고 왕도<경주>에 이르니 대왕이 성문까지 나와 맞았고, 위로함이 극진하였다.

【12】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0세(서기654년)

永徽五年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湌謀 迎春秋伊湌 卽位 是爲 太宗大王

영휘(永徽) 5년(654) 진덕대왕이 세상을 여의셨으나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없으므로 유신공은 재상(宰相)인 알천(金閼川) 이찬(伊湌: 3등관)과 논의하여 춘추(金春秋) 이찬(伊湌)을 맞이하여 즉위하게 하니 이가 바로 태종대왕이다.

【13】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1세(서기655년)

永徽六年乙卯 秋九月 庾信入百濟 攻刀比川城克之 是時 百濟君臣 奢泰淫逸 不恤國事 民怨神怒 災怪屢見 庾信告於王曰 㰡’百濟無道 其罪 過於桀紂 此誠順天弔民伐罪之秋也㰡“

先是 租未坤級湌 爲夫山縣令 被虜於百濟 爲佐平任子之家奴 從事勤恪 曾無懈慢 任子憐之不疑 縱其出入 乃逃歸 以百濟之事 告庾信 庾信 知租未坤忠正而可用 乃語曰 㰡’吾聞 任子專百濟之事 思有以與謀而末由 子其爲我 再歸言之㰡“ 答曰 㰡’公不以僕爲不肖 而指使之 雖死無悔㰡“

영휘 6년 을묘(655) 가을 9월에 유신이 백제 땅에 들어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무렵 백제의 임금과 신하들은 심히 사치하고 지나치게 방탕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속출하였다.

유신이 왕에게 고하기를 㰡’백제는 무도하여 그 지은 죄가 걸주(桀紂)보다 심하니 이 때는 진실로 하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정벌하여야 할 때입니다.㰡“ 하였다.

이보다 앞서 급찬(級湌:9등관) 조미곤(租未坤)이 부산현령(夫山縣令)이 되었다가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 좌평(佐平) 임자(任子)의 집 종이 되어 일을 부지런히 하고 성실하게 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자가 불쌍히 여기고 의심치 않아 출입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이에 도망쳐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고하니 유신은 조미곤이 충직하여 쓸 수 있음을 알고 말하였다. 㰡’내가 들으니 임자는 백제의 일을 오로지 하고 있어 그와 함께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길이 없었다. 자네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 말해다오!㰡“

조미곤은 답하기를 㰡’공께서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지목하여 부리고자 하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㰡“고 하였다.

遂復入於百濟 告任子曰 㰡’奴自以謂 旣爲國民 宜知國俗 是以出遊 累旬不返 不勝犬馬戀主之誠 故此來耳㰡“ 任子信之不責 租未坤 伺間報曰 㰡’前者 畏罪不敢直言 其實 往新羅還來 庾信諭我 來告於君曰 㰡邦國興亡 不可先知 若君國亡 則君依於我國 我國亡 則吾依於君國㰡‘㰡“ 任子聞之 嘿然無言 租未坤 惶懼而退 待罪數月 任子 喚而問之曰 㰡’汝前說庾信之言 若何㰡“ 租未坤驚恐 而對如前所言 任子曰 㰡’爾所傳我已悉知 可歸告之㰡“ 遂來說 兼及中外之事 丁寧詳悉 於是 愈急幷呑之謀.

드디어 <그가>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에게 아뢰었다. 㰡’제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이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의 풍속을 알아야 하므로 집을 나가 수십 일간 놀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정을 이기지 못하여 돌아왔습니다.㰡“ 임자는 이 말을 믿고 나무라지 않았다.

조미곤이 틈을 타서 보고하였다. 㰡’저번에는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유신이 저를 타일러 님(佐平)께 가서 아뢰도록 하기를 㰡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는 법이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 나라에 의지하고, 우리 나라가 망하면 나는 그대의 나라에 의지하겠다.㰡‘고 합디다.㰡“임자가 듣고는 묵묵히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조미곤은 두려워하며 물러 가 처벌을 기다렸다.

수개월 후에 임자가 불러 묻기를 㰡’네가 저번에 말한 유신의 말이 무엇이었느냐?㰡“ 하기에 조미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대답하였다. 임자가 말하기를 㰡’네가 전한 바를 내가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다. 돌아가서 아뢰어도 좋다.㰡“고 하였다. 드디어 돌아와서 <김유신에게> 보고하였다. 겸하여 <백제의> 국내외의 일을 말하여 주었는데 정말 상세하였다. 이에 더욱 백제를 병합할 계획을 급하게 하였다.

【14】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6세(서기660년)

太宗大王七年庚申 夏六月 大王與太子法敏 將伐百濟 大發兵 至南川而營 時 入唐請師 波珍湌金仁問 與唐大將軍蘇定方․劉伯英 領兵十三萬 過海 到德物島 先遣從者文泉 來告 王命太子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大船一百艘 載兵士會之 太子 見將軍蘇定方 定方謂太子曰 㰡’吾由海路 太子登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王都 泗沘之城㰡“ 太子來告 大王率將士 行至沙羅之停

태종대왕 7년 경신(660) 여름 6월에 대왕은 태자 법민(法敏)과 더불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대군을 동원하여 남천(南川: 李川)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당에 들어가 군사를 청한 파진찬(波珍湌: 4등관)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유백영(劉伯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현재의 경기도 덕적도)에 도착하였고, 부하 문천(文泉)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왔다. 왕은 태자와 장군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00척으로 군사를 싣고 만나게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니 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㰡’나는 바닷길로 쳐들어가고, 태자는 육로로 쳐들어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왕도(서울)인 사비성(泗沘城: 부여)에서 만나자.㰡“고 하였다. 태자가 돌아와서 대왕에게 고하였다.

대왕은 장수와 병사를 거느리고 행군하여 사라정(沙羅停: 今突城-尙州)에 이르렀다.

將軍蘇定方․金仁問等 沿海入伎伐浦 海岸泥濘 陷不可行 乃布柳席 以出師 唐․羅合擊 百濟滅之 此役也 庾信之功爲多 於是 唐皇帝聞之 遣使褒嘉之 將軍定方 謂庾信․仁問․良圖三人曰 㰡’吾受命以便宜從事 今以所得百濟之地 分錫公等 爲食邑 以酬厥功如何㰡“ 庾信對曰 㰡’大將軍 以天兵來 副寡君之望 雪小國之讐 寡君及一國臣民 喜抃之不暇 而吾等 獨受賜以自利 其如義何㰡“ 遂不受

장군 소정방과 김인문 등은 바다를 따라 기벌포(伎伐浦)로 들어갔는데 해안이 진흙이어서 빠져 갈 수 없으므로 이에 버들로 엮은 자리를 깔아 군사를 진군시켜 당군과 신라군이 합동으로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 전쟁에서 유신의 공이 많았으므로 당나라 고종(高宗)은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포상하고 칭찬하였다. 장군 정방은 유신(庾l信), 인문(仁問), 양도(良圖) 세 사람에게 말하였다. 㰡’나는 황제의 명으로 현지의 일을 적절하게 처리하도록 되어 있다. 지금 얻은 백제의 땅을 그대들에게 나누어 주어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여 그 공로에 보답하고자 하니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㰡“

유신공이 대답하기를 㰡’대장군께서 황제(天兵)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 임금의 희망에 따라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아 우리 임금과 온 나라의 백성이 기뻐하기에 바쁜데 우리들만 홀로 내려줌을 받아 스스로 이익을 챙기는 것은 의리상 할 수 없다.㰡“ 하고는 받지 않았다.

唐人 旣滅百濟 營於泗沘之丘 陰謀侵新羅 我王知之 召羣臣問策 多美公 進曰 㰡’令我民 詐爲百濟之人 服其服 若欲爲賊者 唐人必擊之 因與之戰 可以得志矣㰡“ 庾信曰 㰡’斯言可取 請從之㰡“ 王曰 㰡’唐軍爲我滅敵 而反與之戰 天其祐我耶㰡“ 庾信曰 㰡’犬畏其主 而主踏其脚 則咬之 豈可遇難 而不自救乎 請大王許之㰡“ 唐人諜知我有備 虜百濟王及臣寮九十三人․卒二萬人 以九月三日 自泗沘泛船而歸 留郞將劉仁願等 鎭守之 定方 旣獻俘 天子 慰藉之曰 㰡’何不因而伐新羅㰡“ 定方曰 㰡’新羅 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 事其上 如父兄 雖小 不可謀也.㰡“

당나라 군사들은 이미 백제를 멸하고, 사비(泗沘)의 언덕에 주둔하면서 몰래 신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군신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다미공(多美公)이 나아가 말하기를 㰡’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백제 사람인 것처럼 그 옷을 입혀서 만약 반역하게 하면 당나라 군대가 반드시 칠 것이니 이로 인하여 <그들과> 싸우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㰡“ 하니, 유신공도 이 말은 취할 만하니 이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㰡’당나라 군사가 우리를 위하여 적을 멸하여 주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㰡“ 하니 유신이 말하였다. 㰡’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주인을> 무는 법인데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스스로를 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㰡“ 당나라 첩자가 우리의 준비가 있음을 알고는 백제왕과 신료 93인, 병사 2만 명을 포로로 잡아 9월 3일 사비(泗沘)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가고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 등을 남겨 지키도록 하였다.

소 정방이 돌아가 백제의 포로를 바치니 황제는 그를 위로하면서 㰡’어찌 내친 김에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㰡“ 하고 물었다. 소 정방이 말하기를 㰡’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어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부형(父兄)처럼 섬기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㰡“ 하였다.

【15】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7세(서기661년)

龍朔元年春 王謂百濟餘燼尙在 不可不滅 以伊湌品日․蘇判文王․大阿湌良圖等 爲將軍 往伐之不克 又遣伊湌欽純一作欽春․眞欽․天存․蘇判竹旨等 濟師. 高句麗․靺鞨謂 新羅銳兵 皆在百濟 內虛可擣 發兵水陸竝進 圍北漢山城 高句麗營其西 靺鞨屯其東 攻擊浹旬 城中危懼 忽有大星 落於賊營 又雷雨震擊 賊等疑駭 解圍而遁 初 庾信聞賊圍城曰 㰡’人力旣竭 陰助可資㰡“ 詣佛寺 設壇祈禱 會有天變 皆謂至誠所感也.

용삭(龍朔) 원년(문무왕 원년: 661) 봄에 왕(太宗)은 㰡’백제의 남은 세력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멸하지 않을 수 없다.㰡“고 하고는 이찬(伊湌) 품일(品日)과 소판(蘇判) 문왕(文王) 대아찬(大阿湌) 양도(良圖) 등을 장군으로 삼아 가서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이찬 흠순(欽純)<또는 흠춘(欽春)이라고도 썼다.>, 진흠(眞欽), 천존(天存), 소판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인솔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말갈은 “신라의 정예부대는 모두 백제 땅에 가 있어, 나라 안이 텅 비어 있으므로 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군사를 일으켜 수륙(水陸)으로 진군시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포위하였는데 고구려는 그 서쪽에, 말갈은 그 동쪽에 주둔하여 공격이 수십 일에 이르니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지에 떨어지고 천둥과 벼락이 치면서 비가 오니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처음에 유신공은 적이 성을 포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하기를 㰡’사람의 힘을 다하였으니 이제 신령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㰡“ 하고 절(佛寺)에 나아가 제단을 마련하고 기도를 드렸더니 마침 하늘의 변괴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극한 지성이 감동시킨 바라고 말하였다.

庾信 嘗以中秋夜 領子弟 立大門外 忽有人 從西來 庾信知高句麗諜者 呼使之前曰 㰡’而國 有底事乎㰡“ 其人 俯而不敢對 庾信曰 㰡’無畏也 但以實告㰡“ 又不言 庾信 告之曰 㰡’吾國王 上不違天意 下不失人心 百姓欣然 皆樂其業 今爾見之 往告而國人㰡“ 遂慰送之 麗人聞之曰 㰡’新羅雖小國 庾信爲相 不可輕也㰡“

유신공은 일찍이 한가윗날 밤에 자제를 거느리고 대문 밖에 서 있는데 문득 서쪽으로부터 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신공은 그가 고구려 첩자임을 알고 불러 앞에 세우고 말하기를 㰡’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가?㰡“ 하니 그 사람은 얼굴을 숙이고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유신공이 말하기를 㰡’두려워하지 말고 단지 사실대로 말하라!㰡“ 하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이에 경고하기를 㰡’우리나라 임금님은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아서 백성이 즐겁게 모두 자기 일을 즐기고 있음을 지금 네가 보았으니 가서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주어라!㰡“하고 드디어 위로하여 <그를>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㰡’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유신이 재상을 하고 있는 한 가벼이 할 수가 없다.㰡“고 말하였다.

六月 唐高宗皇帝 遣將軍蘇定方等 征高句麗 入唐宿衛金仁問 受命 來告兵期 兼諭出兵會伐 於是 文武大王 率庾信․仁問․文訓等 發大兵 向高句麗 行次南川州 鎭守劉仁願 以所領兵 自泗沘泛船 至鞋浦下陸 亦營於南川州

時 有司報 㰡’前路有百濟殘賊 屯聚瓮山城 遮路 不可直前㰡“ 於是 庾信以兵進而圍城 使人近城下 與賊將語曰 㰡’而國不龔 致大國之討 順命者賞 不順命者戮 今 汝等 獨守孤城 欲何爲乎 終必塗地 不如出降 非獨存命 富貴可期也㰡“

<문무왕 원년> 6월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이 명을 받고 돌아와 출병일을 알리고 겸하여 출병하여 함께 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문무대왕은 유신, 인문, 문훈(文訓) 등을 인솔하여 많은 병사를 출동시켜 고구려로 향하였다. 행군이 남천주(南川州)에 이르렀을 때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이 거느린 군사를 사비로부터 배를 태워 혜포(鞋浦)에 이르러 하륙시켜 또한 남천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유사(有司)가 보고하기를 㰡’앞길에 백제의 잔적이 옹산성(瓮山城: 대덕군 懹德)에 모여 있어 길을 막고 있으니 곧바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㰡“ 하였다. 이에 유신공은 군사를 진격시켜 성을 포위하고 사람을 시켜 성 아래에 가까이 가게 하여 적장에게 말하였다. 㰡’너희 나라가 공손하지 못하여 대국(大國)의 토벌을 당하였다. 명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겠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 지금 너희들은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어찌하고자 함인가? 끝내 반드시 패망할 것이니 성에서 나와 항복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귀를 기약함보다 더 좋은 방책이 없을 것이다.㰡“

賊高聲 唱曰 㰡’雖蕞爾小城 兵食俱足 士卒義勇 寧爲死戰 誓不生降㰡“ 庾信笑曰 㰡’窮鳥困獸 猶知自救 此之謂也㰡“ 乃揮旗鳴鼓攻之 大王 登高見戰士 淚語激勵之 士皆奮突 鋒刃不顧 九月二十七日 城陷 捉賊將戮之 放其民 論功賞 ৶˜將士 劉仁願 亦分絹 有差.

於是 饗士秣馬 欲往會唐兵 大王 前遣大監文泉 移書蘇將軍 至是復命 遂傳定方之言曰 㰡’我受命萬里 涉滄海而討賊 艤舟海岸 旣踰月矣 大王軍士不至 粮道不繼 其危殆甚矣 王其圖之㰡“ 大王 問羣臣 㰡’如之何而可㰡“ 皆言 深入敵境輸粮 勢不得達矣 大王 患之咨嗟 庾信 前對曰 㰡’臣過叨恩遇 忝辱重寄 國家之事 雖死不避 今日 是 老臣盡節之日也 當向敵國 以副蘇將軍之意㰡“ 大王前席 執其手下淚曰 㰡’得公賢弼 可以無憂 若今玆之役 罔愆于素 則公之功德 曷日可忘㰡“

庾信 旣受命 至懸鼓岑 之岫寺 齊戒 卽靈室閉戶 獨坐焚香 累日夜而後出 私自喜曰 㰡’吾今之行 得不死矣㰡“ 將行 王以手 書告庾信 㰡’出疆之後 賞罰專之 可也㰡“

적들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㰡’비록 조그만 성이지만 군사와 식량이 모두 족하며, 장수와 병졸이 의롭고 용기가 있으니 차라리 죽도록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㰡“ 하니, 유신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㰡’궁지에 몰린 새와 짐승은 오히려 스스로를 구할 줄 안다고 하는데 이 경우를 두고 말함이라!㰡“ 하고는 이에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공격하였다. 대왕은 높은 곳에 올라 싸우는 군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격려하니 병사들이 모두 분발하여 공격하여 창끝과 칼날을 겁내지 않았다.

9월 27일에 옹산성이 함락되자 적의 장수를 잡아 처형하고 그 백성은 놓아주었다. 공을 논하여 장수와 병사에게 상을 주었고 유인원도 비단을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디.

이에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먹인 후 당나라 군사가 와 있는 곳에 가서 이와 합치려 하였다. 대왕은 앞서 태감(太監) 문천(文泉)을 보내 소장군(蘇將軍)에게 서신을 보냈던 바 이 무렵 돌아와 보고하였다. 드디어 <소>정방의 말을 전하였다.

㰡’내가 명을 받아 만 리나 되는 푸른 바다를 건너 적을 치러 배로 해안에 이른 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대왕의 군사가 이르지 않으니 식량을 이을 길이 없어 위태로움이 심합니다. 왕께서는 조처하여 주십시오!㰡“

대왕은 뭇 신하에게 㰡’어찌하면 좋을꼬?㰡“ 하고 물으니, 다같이 말하기를 㰡’적의 경계 내에 깊이 들어가 식량을 수송하는 것은 형편상 이룰 수가 없다.㰡“고 하였다. 대왕은 걱정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유신이 앞에 나아가 대답하였다. 㰡’신이 지나치게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고, 무거운 책임을 맡았으니 국가의 일을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이 이 늙은 신하(老臣)가 충절을 다하여야 할 때입니다. 마땅히 적국에 가서 소장군(蘇將軍)의 뜻을 맞추어 주려고 합니다.㰡“ 대왕은 자리를 옮겨 앞으로 나아가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㰡’공의 어진 보필을 얻었으니 걱정이 없습니다. 만약 이번 전투에서도 뜻한 대로 어긋남이 없으면 공의 공덕을 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㰡“

유신공은 이미 명을 받고 현고잠(懸鼓岑)의 동굴 안의 절(岫寺)에 가서 재계하였다. 곧바로 영실(靈室)에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분향하여 여러 날 밤을 지내고 나와서 사사로이 홀로 즐거워하며 말하기를 㰡’나의 이번 행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㰡“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하니 왕께서는 손수 쓴 글을 유신공에게 주었는데 『국경을 벗어난 후 상벌을 마음대로 하여도 좋다.』 하였다.

十二月十日 與副將軍仁問․眞服․良圖等九將軍 率兵載粮 入高句麗之界

12월 10일에 부장군(副將軍) 인문(仁問). 진복(眞服). 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과 더불어 군사를 인솔하고 식량을 실어 고구려의 경계 안으로 들어갔다.

【16】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8세(서기662년)

壬戌正月二十三日 至七重河 人皆恐懼 不敢先登 庾信曰 㰡’諸君若怕死 豈合來此㰡“ 遂先自上船而濟 諸將卒 相隨渡河 入高句麗之境 慮麗人要於大路 遂自險隘以行 至於䔉壤

임술년(문무왕 2년, 662)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臨津江)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배에 오르지 않자 유신이 말하기를 㰡’여러분이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 곳에 왔는가?㰡“ 하고는 스스로 먼저 배에 올라 건너니 여러 장군과 병졸이 따라서 강을 건너 고구려 강역 안에 들어갔다. 고구려 군사들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하여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하여 산양(䔉壤)에 이르렀다.

庾信 與諸將士曰 㰡’麗․濟二國 侵凌我疆埸 賊害我人民 或虜丁壯 以斬戮之 或俘幼少 以奴使之者久矣 其可不痛乎 吾今所以不畏死 赴難者 欲藉大國之力 滅二城 以雪國讐 誓心告天 以期陰助 而未知衆心如何 故言及之 若輕敵者 必成功而歸 若畏敵 則豈免其禽獲乎 宜同心協力 無不以一當百 是所望於諸公者也㰡“ 諸將卒 皆曰 㰡’願奉將軍之命 不敢有偸生之心㰡“乃鼓行 向平壤

유신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㰡’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강역을 침범하여 우리 백성을 죽이고 젊은이를 포로로 잡아가 목을 베었으며, 혹은 어린애를 잡아다가 종으로 부린 지가 오래되었으니 통탄스런 일이 아닌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움에 나가는 것은 대국의 힘에 의지하여 두 나라 수도성을 함락시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다. 마음 속으로 맹서하고 하늘에 고하여 신령의 도움을 기대하나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 몰라 말한다. 적을 가벼이 보는 자는 반드시 성공하여 돌아갈 것이나, 적을 두려워하면 어찌 포로로 잡힘을 면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면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내지 못함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여러분에게 바라는 바이다.㰡“ 그러자 여러 장졸들이 모두 말하기를 㰡’원컨대 장군님의 명을 받들겠으며 감히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다.㰡“ 하였다. 이에 북을 치며 평양으로 향하였다.

路逢賊兵 逆擊克之 所得甲兵甚多. 至障塞之險 會天寒烈 人馬疲憊 往往僵仆 庾信露肩執鞭 策馬以前驅 衆人見之 努力奔走 出汗 不敢言寒 遂過險 距平壤不遠 庾信曰 㰡’唐軍乏食窘迫 宜先報之㰡“ 乃喚步騎監裂起曰 㰡’吾少與爾遊 知爾志節 今欲致意於蘇將軍 而難其人 汝可行否㰡“ 裂起曰 㰡’吾雖不肖 濫中軍職 況辱將軍使令 雖死之日 猶生之年㰡“ 遂與壯士仇近等十五人 詣平壤 見蘇將軍曰 㰡’庾信等領兵 致資粮 已達近境 㰡“ 定方喜 以書謝之

길(梨峴)에서 적병을 만나면 역습하여 이기니 얻은 무기가 심히 많았다. 장새(獐塞: 遂安)의 험한 곳에 이르렀을 때(2/1) 마침 날씨가 매우 추웠고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하여 쓰러짐이 많았다. 유신이 어깨를 드러내 놓고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 나가니 뭇 사람이 이를 보고 힘을 다하여 달려 땀이 나자 감히 춥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험한 곳을 지나니 평양이 멀지 않았다. 유신이 말하기를 㰡’당나라 군대의 식량 부족이 심할 터이니 마땅히 먼저 알려야겠다.㰡“고 하고는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를 불러 말하였다.㰡’내가 젊어서 그대와 놀 때 너의 뜻과 절의를 알았다. 지금 소(蘇) 장군에게 소식을 전해야겠는데 적당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네가 가지 않겠는가?㰡“열기가 말하였다.㰡’내 비록 어리석으나 외람되이 중군(中軍)직을 맡았고, 하물며 장군님이 시키신다면 비록 죽는 날도 살아 있는 때와 같다고 여기겠습니다.㰡“드디어 힘센 장사(壯士) 구근(仇近) 등 15명을 데리고 평양으로 가서 소 장군을 만나 말하기를 㰡’유신 등이 군사를 이끌고 식량을 가지고 가까운 곳에 이르렀다.㰡“고 하니, 정방이 기뻐서 글로 감사하다고 썼다.

庾信等 行抵楊隩 見一老人 問之 具悉敵國消息 賜之布帛 辭不受而去 庾信 營楊隩 遣解漢語者仁問․良圖及子軍勝等 達唐營 以王旨 餽軍糧 定方以食盡兵疲 不能力戰 及得粮 便廻唐 良圖以兵八百人 泛海還國.

時 麗人伏兵 欲要擊我軍於歸路 庾信 以鼓及桴 繫羣牛腰尾 使揮擊有聲 又積柴草燃之 使煙火不絶 夜半潛行至{艸/瓢}河 急渡岸休兵 麗人知之來追 庾信 使萬弩俱發 麗軍且退 率勵諸幢將士 分發拒擊敗之 生禽將軍一人 斬首一萬餘級 王聞之 遣使勞之 及至 賞賜封邑爵位 有差.

유신공 등이 양오(楊隩)에 다다라(2/6) 한 노인을 만나 물었더니 적국의 소식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 베와 비단을 주었더니 사양하여 받지 않고 가 버렸다. 유신공이 양오(楊隩)에 진을 치고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인문(仁問), 양도(良圖) 그리고 그 아들 군승(軍勝) 등을 보내 당나라 군영에 가서 왕의 명으로 군량을 보냈음을 알렸다. 정방은 식량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곤하였으므로 힘껏 싸울 수 없어 식량을 얻고는 돌연히 당으로 돌아갔다. 양도(良圖)는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귀국하였다.

그때 고구려인이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우리 군사의 돌아오는 길에서 공격하고자 하였다. 유신공은 북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적마다 소리를 내게 하였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놓고 밤중에 몰래 행군하여 표하([艸/瓢]河:임진강 하류)에 이르러 나루를 건너 강 가에서 군사를 쉬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이를 알고 추격해왔다. 유신공은 만노(萬弩)를 일제히 발사하니 고구려 군대가 물러나므로 여러 부대[幢]의 장병을 독려하여 나누어 출발하게 하고 역습하여 패퇴시켰다.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았고, 1만여 명을 목베었다. 왕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하였고 <왕도에> 돌아오자 상을 내려 식읍을 봉해 주고 벼슬을 차등있게 하였다.

【17】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42) 김유신/69세(서기663년)

龍朔三年癸亥 百濟諸城 潛圖興復 其渠帥據豆率城 乞師於倭 爲援助 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 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 合兵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 出陣 我軍力戰 大敗之 百濟與倭人 皆降 大王謂倭人曰 㰡’惟我與爾國 隔海分疆 未嘗交構 但結好講和 聘問交通 何故今日 與百濟同惡 以謀我國 今爾軍卒 在我掌握之中 不忍殺之 爾其歸告爾王 任其所之㰡“ 分兵擊 諸城降之, 唯任存城 地險城固 而又粮多 是以 攻之三旬 不能下 士卒 疲困厭兵 大王曰 㰡’今雖一城未下 而諸餘城保 皆降 不可謂無功㰡“ 乃振旅而還 冬十一月二十日 至京 賜庾信田五百結 其餘將卒 賞賜有差.

용삭(龍朔)3년 계해(문무왕 3년: 663)에 백제의 여러 성이 몰래 부흥을 꾀하여 그 장수들이 두솔성(豆率城: 定山)에 근거하며 왜국(倭國)에게 군사를 청하여 후원을 삼으니 대왕이 친히 유신(庾信), 인문(仁問), 천존(天存), 죽지(竹旨) 등 장군을 인솔하고 7월 17일에 정벌에 나서 웅진주(熊津州:公州)에 이르러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劉仁願)과 군사를 합쳐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에 이르렀다. 백제병과 왜병이 진영에서 나오자 아군이 힘껏 싸워 크게 이기니, 백제와 왜병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병들에게 말하였다.㰡’우리 나라와 너희 나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역이 나뉘어 있어 일찍이 전쟁한 일이 없고 단지 우호관계를 맺어 사신을 서로 교환하여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금일 백제와 죄악을 함께하여 우리 나라를 도모하는가? 지금 너희 군졸은 나의 손아귀 속에 들어 있으나 차마 죽이지는 않겠다. 너희는 돌아가 너희의 국왕에게 전하라! 그리고 너희는 가고 싶은대로 가라!㰡“

군사를 나누어 공격하니 모든 성이 항복하였으나 오직 임존성(任存城:大興)만은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며 또한 식량이 많아 30일(三旬)을 공격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군사가 피곤하여 싸움을 싫어하였으므로 대왕이 말하기를 㰡’지금 비록 한 성을 함락시키지 않아도 다른 모든 성이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㰡“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에 환경하여 유신공에게 토지 500결을 내려주고 다른 장병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三國史記 卷 第四十二 終

三國史記 卷 第四十三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大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列傳 第三

【18】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70세(서기664년)

金庾信 下 子三光․元述․孫允中․允文․玄孫巖 附

김유신(金庾信) 하<아들 삼광(三光)․원술(元述), 손자 윤중(允中)․윤문(允文), 현손 암(巖) 붙임>

麟德元年甲子三月 百濟餘衆 又聚泗沘城反叛 熊州都督 發所管兵士 攻之 累日霧塞 不辨人物 是故不能戰 使伯山來告之 庾信 授之陰謀 以克之.

인덕(麟德) 원년 갑자(문무왕 4년: 664) 3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가 또 사비성(泗沘城: 夫餘)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웅주도독(熊州都督) <유 인원(劉仁願)>이 자기 소관의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안개가 끼어 사람과 물건을 분별하지 못하여 이 때문에 싸울 수가 없었다. 백산(伯山)을 시켜 <그 사연을> 보고하니, 유신공이 은밀한 모책을 주어 이기게 하였다.

【19】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71세(서기665년)

麟德二年 高宗遣使梁冬碧․任智高等來聘 兼冊庾信奉常正卿. 平壤郡開國公. 食邑二千戶.

인덕 2년(문무왕 5년: 665)에 <당나라> 고종(唐高宗)이 사신 양동벽(梁冬碧)․임지고(任智高) 등을 보내 문안하고 겸하여 유신(庾信)공을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平壤郡) 개국공(開國公)으로 책봉하고 식읍(食邑) 2천 호(戶)로 하였다.

【20】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72세(서기666년)

乾封元年 皇帝 勑召庾信長子大阿湌三光 爲左武衛翊府 中郞將 仍令宿衛.

건봉(乾封) 원년(문무왕 6년: 666)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칙명(勅命)으로 유신의 장자(長子) 대아찬(大阿湌) 삼광(三光)을 불러 좌무위 익부 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삼고, 이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21】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74세(서기668년)

摠章元年戊辰 唐高宗皇帝 遣英國公李勣 興師 伐高句麗 遂徵兵於我 文武大王 欲出兵應之 遂命欽純․仁問 爲將軍 欽純告王曰 㰡’若不與庾信同行 恐有後悔㰡“ 王曰 㰡’公等三臣 國之寶也 若摠向敵場 儻有不虞之事 而不得歸 則其如國何 故欲留庾信守國 則隱然若長城 終無憂矣㰡“ 欽純 庾信之弟 仁問 庾信之外甥 故尊事之 不敢抗.

至是告庾信曰 㰡’吾等不材 今從大王 就不測之地 爲之奈何 願有所指誨㰡“答曰 㰡’夫 爲將者 作國之干城 君之爪牙 決勝否於矢石之間 必上得天道 下得地理 中得人心 然後 可得成功 今我國 以忠信而存 百濟 以慠慢而亡 高句麗以驕滿而殆 今若以我之直 擊彼之曲 可以得志 況憑大國 明天子之威稜哉 往矣勉焉 無墮乃事㰡“ 二公拜曰 㰡’奉以周旋 不敢失墮㰡“

총장(摠章) 원년 무진(문무왕 8년: 668)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시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게 할 때, 우리에게도 군사를 징발케 했다. 문무대왕이 군사를 내어 호응하려고 마침내 흠순(欽純)․인문(仁問)에게 명하여 장군을 삼았다. 흠순이 왕에게 고하기를 㰡’만일 유신과 함께 가지 않으면 후회가 있을까 합니다.㰡“고 하였다. 왕이 말하였다.㰡’공들 세 신하는 나라의 보배이다. 만약 다 함께 적지로 나갔다가 혹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가 어찌될 것인가? 그러므로 유신을 머물러 나라를 지키게 하면 흔연히 장성(長城)과 같아 끝내 근심이 없을 것이다.㰡“흠순은 유신공의 아우이고, 인문은 유신의 생질(外甥)이므로, <유신을> 높이 섬기고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다.

이때 이르러 유신공에게 아뢰기를 㰡’우리들이 부족한 자질로 지금 대왕을 따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땅으로 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여야 좋을지를 원컨대 지시해 주기를 바랍니다!㰡“ 하였다. <유신공이> 대답하였다.㰡’대저 장수된 자는 나라의 간성(干城)과 임금의 조아(爪牙)가 되어서 승부를 싸움터에서 결판내야 하는 것이니, 반드시 위로는 하늘의 도(天道)를 얻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地理)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인심(人心)을 얻은 후에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충성과 신의로써 존재하고 있으며,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하였고, 고구려는 교만함으로써 위태롭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충직(忠直)으로써 저편의 잘못(邪曲)을 친다면 뜻을 이룰 수 있거늘, 하물며 큰 나라 밝은 천자(天子)의 위엄을 의지하고 있어서랴! 가서 힘써 자네들 일에 그르침이 없게 하라.㰡“두 공(公)이 절하며 㰡’<그 말씀을> 받들어 잘 행동하여 감히 실패함이 없게 하겠습니다.㰡“ 하였다.

文武大王 旣與英公 破平壤 還到南漢州 謂羣臣曰 㰡’昔者 百濟明襛王 在古利山城 謀侵我國 庾信之祖 武力角干 爲將逆擊之 乘勝 俘其王及宰相四人與士卒 以折其衝 又其父舒玄 爲良州摠管 屢與百濟戰 挫其銳 使不得犯境 故邊民 安農桑之業 君臣. 無宵旰之憂 今 庾信 承祖考之業 爲社稷之臣 出將入相 功績茂焉 若不倚賴公之一門 國之興亡 未可知也 其於職賞 宜如何也㰡“ 羣臣曰 㰡’誠如王旨㰡“ 於是 授太大舒發翰之職 食邑五百戶 仍賜輿杖 上殿不趨 其諸寮佐 各賜位一級.

문무대왕은 이미 영국공(李勣)과 함께 평양을 격파한 다음, 남한주(南漢州: 廣州)로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㰡’옛날 백제의 명농왕(明襛王:성왕)이 고리산(古利山.沃川)에 있으면서 우리 나라를 치려고 꾀하였을 때, 유신의 조부(祖父) 무력(武力) 각간(角干)이 장수가 되어 이를 역습하였고, 승리의 기세를 타서 그 왕 및 재상 네 사람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 침입을 좌절시켰으며, 또 그의 아버지 서현(舒玄)은 양주총관(良州摠管)이 되어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그 예봉을 꺾어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변방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짓고 누에를 쳤으며, 군신은 국가의 일에 골몰하는[宵衣旰食] 근심을 없게 하였다. 지금 유신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사직(社稷)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그 공적이 많았다. 만일 공(公)의 한 집안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그의 직(職)과 상(償)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㰡“ 여러 신하들이 㰡’참으로 대왕의 생각하심과 같습니다.㰡“고 하였다. 이에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와 식읍 500호를 주었으며, 이어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궐에 오름에 있어서 몸을 굽히지 않도록 하였다. 그의 모든 보좌관들에게도 각각 위계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

【22】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74세(서기668년)?

摠章元年 唐皇帝 旣策英公之功 遂遣使 宣慰濟師助戰 兼賜金帛 亦授詔書於庾信 以褒獎之 且諭入朝 而不果行 其詔書 傳於家 至五世孫 失焉

총장 원년(668)에 당나라 황제(高宗)은 이미 영국공 (李勣)의 공로를 포상하고, 드디어 사신을 보내 위로하였으며, 군사를 내어 싸움을 돕게 하고 겸하여 황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또한 조서(詔書)를 유신공에게도 내려 포상하고 칭찬하였으며, 또한 <당나라에> 들어와 조회(朝會)하기를 유시(諭示)하였는데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조서는 가장(家藏)으로 전하여 오다가 5세손(5대손) 때 이르러 실전되었다.

【23】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79세(서기673년)

咸寧四年癸酉 是文武大王十三年 春 妖星見 地震 大王憂之 庾信 進曰 㰡’今之變異 厄在老臣 非國家之災也 王請勿憂㰡“ 大王曰 㰡’若此 則寡人 所甚憂也㰡“ 命有司 祈禳之 夏六月 人或見戎服. 持兵器. 數十人 自庾信宅 泣而去 俄而不見 庾信聞之曰 㰡’此必陰兵護我者 見我福盡 是以去 吾其死矣㰡“ 後 旬有餘日寢疾 大王親臨慰問 庾信曰 㰡’臣願竭股肱之力 以奉元首 而犬馬之疾 至此 今日之後 不復再見龍顔矣㰡“ 大王泣曰 㰡’寡人之有卿 如魚有水 若有不可諱 其如人民何 其如社稷何㰡“

庾信 對曰 㰡’臣 愚不肖 豈能有益於國家 所幸者 明上 用之不疑 任之勿貳 故得攀附王明 成尺寸功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太平 亦可謂小康 臣觀自古繼體之君 靡不有初 鮮克有終 累世功績 一朝墮廢 甚可痛也 伏願 殿下 知成功之不易 念守成之亦難 疏遠小人 親近君子 使朝廷 和於上 民物. 安於下 禍亂不作 基業無窮 則臣 死且無憾㰡“ 王泣而受之 至秋七月一日 薨于私第之正寢 享年 七十有九

大王聞訃震慟 贈賻彩帛一千匹․租二千石 以供喪事 給軍樂 鼓吹一百人 出葬于金山原 命有司 立碑 以紀功名 又定入民戶 以守墓焉.

함형4년(咸亨四年) 계유(673)는 문무대왕 13년인데 봄에 요상한 별(妖星)이 나타나고 지진이 있어 대왕이 걱정하니 유신공은 나아가 아뢰기를 㰡’지금의 변이(變異)는 재앙이 노신(老臣)에게 있고, 국가의 재앙이 아닙니다. 왕은 근심하지 마옵소서!㰡“ 하였다. 대왕이 㰡’이와 같다면 과인이 더욱 근심하는 바이다.㰡“ 하고, 유사에게 명령하여 제만을 올리게 하였다. 여름 6월에 군복을 입고 무기를 가진 수십 명이 유신의 집으로부터 울며 떠나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는데, 조금 있다가 보이지 않았다. 유신공은 <이 소식을> 듣고 㰡’이들은 반드시 나를 보호하던 신병(神兵)이었는데 나의 복록이 다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떠나간 것이니, 나는 죽게 될 것이다.㰡“ 하였다. 그 후 10여 일 지나 병이 나 누우니, 대왕이 친히 왕림하여 위문하였다. 유신공이 말하기를 㰡’신이 보필의 힘을 다하여 대왕(元首)을 받들고자 바랬는데, 견마(犬馬)의 병이 이 지경에 이르니 금일 후에는 다시 용안(龍顔)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㰡“ 하였다.

대왕이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㰡’과인에게 경(卿)이 있음은 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은 일이다. 만일 피하지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며, 사직을 어떻게 하여야 좋을까?㰡“

유신공은 대답하였다. 㰡’신이 어리석고 못났으나 어찌 국가에 유익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밝으신 대왕께서, 등용하여 의심치 아니하시고, 일을 맡김에 의심치 않으셨기 때문에 대왕의 밝으신 덕에 매달려 조그마한 공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삼한(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성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저으기 편안하여졌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예로부터 대통(大統)을 잇는 임금이 처음에는 정치를 잘 하지 않는 이가 없지 않지만 끝까지 잘 마치는 이는 드물었습니다(靡不有初 鮮克有終).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성공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수성(守成)이 또한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君子)를 가까이 하시어, 위에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에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의 기반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㰡“왕이 울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가을 7월 1일에 유신공이 사제(私第)의 정침(正寢)에서 훙어(薨御)하시니 향년은 79세였다. 대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부의(賻儀)로 문채를 놓은 비단 1천 필과 조(租) 2천 섬을 주어 장사에 쓰게 하였으며, 군악(軍樂)의 고취수(鼓吹手) 100인을 주어 금산원(金山原)에 장사(葬事)지내게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케 하였다. 또 8가구의 민호(民戶)를 고정 배치하여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

【24】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43) 김유신/가족

妻 智炤夫人 太宗大王 第三女也 生子五人 長曰三光伊湌 次元述蘇判 次元貞海干 次長耳大阿湌 次元望大阿湌 女子四人 又庶子軍勝阿湌 失其母姓氏 後 智炤夫人 落髮衣褐 爲比丘尼 時 大王 謂夫人曰 㰡’今 中外平安 君臣高枕 而無憂者 是 太大角干之賜也 惟夫人 宜其室家 儆誡相成 陰功茂焉 寡人 欲報之德 未嘗一日 忘于心 其餽南城租 每年一千石㰡“ 後 興德大王 封公 爲興武大王.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대왕의 셋째 딸이었다. 아들 다섯 사람을 낳으니, 맏이는 이찬(伊湌: 2등관) 삼광(三光)이요, 다음은 소판(蘇判: 3등관) 원술(元述)이요, 다음은 해간(海干: 4등관) 원정(元貞)이요, 다음은 대아찬(大阿湌: 5등관) 장이(長耳)이며, 다음은 대아찬 원망(元望)이었다. 딸은 넷이고, 또 서자(庶子)로 아찬(阿湌: 6등관) 군승(軍勝)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의 성씨(姓氏)는 전하지 않는다. 후에 지소부인은 머리를 깎고 거친 옷을 입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이때 성덕대왕이 부인에게 말하였다.㰡’지금 중앙과 지방이 편안하고 군신이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곧 태대각간(太大角干)의 공이니, 생각컨대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리어 조심하고 훈계함이 짝하여 숨은 공이 컸으므로, 과인이 그 덕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일찍이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소. 남성(南城)의 벼(租)를 매년 1천 섬씩 주겠소.㰡“ 그 후에 흥덕대왕이 공(公)을 책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고 하셨다.

初 法敏王 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有之 唐高宗大怒 遣師來討 唐軍與靺鞨 營於石門之野 王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 營於帶方之野 時 長槍幢 獨別營 遇唐兵三千餘人 捉送大將軍之營 於是 諸幢共言 㰡’長槍營 獨處成功 必得厚賞 吾等 不宜屯聚 徒自勞耳㰡“ 遂各別兵分散 唐兵與靺鞨 乘其未陣擊之 吾人大敗 將軍曉川․義文等死之. 庾信子元述 爲裨將 亦欲戰死 其佐淡凌 止之曰 㰡’大丈夫 非死之難 處死之爲難也 若死而無成 不若生而圖後效㰡“ 答曰 㰡’男兒不苟生 將何面目 以見吾父乎㰡“ 便欲策馬而走 淡凌攬轡不放 遂不能死 隨上將軍出蕪荑嶺 唐兵追及之 居烈州大監阿珍含一吉干 謂上將軍曰 㰡’公等努力速去 吾年已七十 能得幾時活也 此時 是吾死日也㰡“ 便橫戟突陣而死 其子 亦隨而死.

처음에 법민왕(法敏王)이 고구려의 반란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소유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 치게 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말갈병(靺鞨兵)과 함께 석문(石門) 들판(石門野: 瑞興?)에 주둔하니, 왕이 장군 의복(義福)․춘장(春長) 등을 보내 방어케 하였는데, <이들은> 대방(帶方)의 들판(帶方之野:鳳山)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이때 장창당(長槍幢)만은 홀로 주둔하다가 당나라 군사 3천여 명을 만나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으로 보냈다. 이에 모든 당(幢:部隊)에서 함께 말하기를 㰡’장창당(長槍幢)이 홀로 진을 쳤다가 성공하였으니 반드시 후한 상을 얻을 것이다. 우리들이 모여 있는 것은 한갓 수고로울 뿐이다.㰡“라고 하면서 드디어 각각 자기 군대를 갈라 분산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말갈과 함께 <우리 군사들이> 미처 진을 치지 아니한 틈을 타서 공격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장군 효천(曉川)과 의문(義文) 등이 전사하였다.

유신공의 아들 원술(元述)이 비장(裨將)이었는데 또한 싸워 죽으려고 하므로, 그를 보좌하는 담릉(淡凌)이 말리며 㰡’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을 곳을 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니, 만일 죽어서 성공이 없다면 살아서 후에 공을 도모함만 같지 못합니다.㰡“고 하였다. <원술이> 대답하기를 㰡’남아는 구차스럽게 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의 아버지를 뵙겠는가?㰡“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려고 하니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죽지 못하고, 상장군(上將軍)을 따라 무이령(蕪荑嶺)으로 나오니 당나라 군대가 뒤를 추격하였다. 거열주(居烈州: 晋州) 대감(大監) 일길간(一吉干:7등관) 아진함(阿珍含: 阿那含)이 상장군에게 말하기를 㰡’공 등은 힘을 다하여 빨리 떠나가라! 내 나이 이미 70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으랴? 이 때야말로 나가 죽을 날이다.㰡“ 하며 창을 비껴 들고 적진 가운데로 돌입하여 전사하였는데, 그 아들도 역시 뒤를 따라서 전사하였다.

大將軍等 微行入京 大王聞之 問庾信曰 㰡’軍敗如此 奈何㰡“ 對曰 㰡’唐人之謀 不可測也 宜使將卒各守要害 但元述不惟辱王命 而亦負家訓 可斬也㰡“ 大王曰 㰡’元述裨將 不可獨施重刑㰡“ 乃赦之 元述慙懼 不敢見父 隱遁於田園 至父薨後 求見母氏 母氏曰 㰡’婦人有三從之義 今旣寡矣 宜從於子 若元述者 旣不得爲子於先君 吾焉得爲其母乎㰡“ 遂不見之 元述慟哭擗踴 而不能去 夫人終不見焉 元述嘆曰 㰡’爲淡凌所誤 至於此極㰡“ 乃入太伯山 至乙亥年 唐兵來 攻買蘇川城 元述聞之 欲死之 以雪前恥 遂力戰有功賞 以不容於父母 憤恨不仕 以終其身

대장군 등은 미행으로 왕도에 들어왔다. 대왕은 이 말을 듣고 유신에게 㰡’군사의 실패가 이러하니 어찌할까?㰡“ 하니, 대답하기를 㰡’당나라 사람들의 모책을 헤아릴 수 없사오니 장졸들로 하여금 각기 요소를 지키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가훈(家訓)마저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하겠습니다.㰡“ 하였다. 대왕이 말하기를 㰡’원술은 비장(裨將)인데, 혼자에게만 중한 형벌을 시행함은 불가하다.㰡“ 하고 용서해 주었다.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시골 농장(田園)에서 숨어 다니다가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 어머니를 뵙기를 청하였다. 어머니가 㰡’부인(婦人)에게는 따라야 할 세 가지 의(三從之義)가 있다. 지금은 내가 과부가 되었으니 아들을 따라야 하겠지만, 원술 같은 자는 이미 선군(先君:先親)에게 아들 노릇을 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 어머니가 될 수 있느냐?㰡“ 하고 만나지 아니하였다. 원술은 통곡하며 가슴을 두드리고 땅을 구르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으나, 부인은 끝내 보지 아니하였다. 원술이 탄식하며 㰡’담릉으로 그릇된 것이 이렇게까지 되었다!㰡“ 하고 이에 태백산(太伯山)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을해년(문무왕 15년: 675)에 당나라 군사가 매소천성(買蘇川城: 楊州)을 치니, 원술이 듣고, 죽어서 전의 수치를 씻으려 하여 드디어 힘써 싸워서 공(功)과 상(償)을 받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벼슬하지 않고 한 세상을 마쳤다.

嫡孫允中 仕聖德大王 爲大阿湌 屢承恩顧 王之親屬 頗嫉妬之 時屬仲秋之望 王登月城岑頭眺望 乃與侍從官 置酒以娛 命喚允中 有諫者曰 㰡’今宗室戚里 豈無好人 而獨召疎遠之臣 豈所謂親親者乎㰡“ 王曰 㰡’今寡人 與卿等 安平無事者 允中祖之德也 若如公言 忘棄之 則非善善及子孫之義也㰡“ 遂賜允中密坐 言及其祖平生 日晩告退 賜絶影山馬一匹 群臣觖望而已

<유신공의> 적손(嫡孫) 윤중(允中)은 성덕대왕(聖德大王:702~736) 때 벼슬하여 대아찬(5등관)이 되고 여러 번 임금의 은혜를 입었는데, 왕의 친속들이 자못 질투하였다. 때마침 8월 보름이었는데 왕이 월성(月城) 산 위(岑頭)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시종관(侍從官)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윤중(允中)을 부르게 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 간(諫)하였다. 㰡’지금 종실(宗室)․외척들 중에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소원(疏遠)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또 이것이 어찌 이른바 친한 이를 친히 한다는 일이겠습니까?㰡“

왕이 말하였다.㰡’지금 과인이 경들과 더불어 평안 무사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允中) 조부의 덕이다. 만일 공의 말과 같이 하여 잊어버린다면, 착한 이를 좋게 여겨 자손에게 미치는 의리가 아니다.㰡“마침내 윤중을 가까운 자리에 앉게 하고, 그 조부의 평생 일을 말하기도 하였다. 날이 저물어 <윤중이> 물러가기를 고하자, 절영산(絶影山:釜山)의 말 한 필을 하사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불만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開元二十一年 大唐遣使 敎諭曰 㰡’靺鞨. 渤海 外稱蕃翰 內懷狡猾 今欲出兵問罪 卿亦發兵 相爲掎角 聞有舊將金庾信孫允中在 須差此人爲將㰡“ 仍賜允中金帛若干 於是 大王命允中․弟允文等四將軍 率兵會唐兵 伐渤海.

개원(開元) 21년(성덕왕 32년: 733)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권유하였다.㰡’말할(靺鞨). 발해(渤海)는 겉으로는 번방(藩邦)이라 일컬으면서 속으로는 교활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지금 군사를 출동시켜 문죄하려 하니, 그대도 군사를 출동하여 서로 협공하게 하라. 듣건대 옛 장군 김유신(金庾信)의 손자 윤중(允中)이 있다고 하니, 모름지기 이 사람을 뽑아 장수로 삼아서 보내 주시오.㰡“하면서 이내 윤중에게는 금과 비단 약간을 보내주었다. 이에 대왕은 윤중(允中)과 아우 윤문(允文) 등 네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회합하여 발해를 치게 하였다.

允中庶孫巖 性聰敏 好習方術 少壯爲伊湌 入唐宿衛 間就師 學陰陽家法 聞一隅 則反之以三隅 自述遁甲立成之法 呈於其師 師憮然曰 㰡’不圖吾子之明 達至於此也㰡“ 從是而後 不敢以弟子待之.

大曆中 還國 爲司天大博士 歷良․康․漢三州太守 復爲執事侍郞․浿江鎭頭上 所至 盡心撫字 三務之餘 敎之以六陣兵法 人皆便之 嘗有蝗蟲 自西入浿江之界 蠢然蔽野 百姓憂懼 巖登山頂 焚香祈天 忽風雨大作 蝗蟲盡死.

大曆十四年己未 受命 聘日本國 其國王 知其賢 欲勒留之 會 大唐使臣高鶴林來 相見甚懽 倭人認巖爲大國所知 故不敢留 乃還.

윤중(允中)의 서손(庶孫:衆孫) 암(巖)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방술(方術)의 학술을 좋아하였다. 젊어서 이찬(2등관)이 되어 당에 들어가서 숙위(宿衛)로 있는데, 틈틈이 스승에게 찾아가서 음양가(陰陽家)의 술법(術法)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세 가지를 미루어 알았다. 스스로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을 저술하여 그 스승에게 드리니, 스승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㰡’그대의 밝음이 여기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㰡“ 하며, 그 후로는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

대력(大曆:766~779)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사천 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고, 양주(良州:梁山)․강주(康州:晋州)․한주(漢州:漢城) 세 지방(州)의 태수(太守)를 역임하고 다시 집사부 시랑(執事部侍郞)과 패강진 두상(浿江鎭頭上)이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극진한 마음으로 백성들을 보살펴 사랑하며, 삼무(三務: 春. 夏. 秋)의 여가에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치니 모두들 유용하게 여겼다.

일찌기 메뚜기(蝗蟲) 떼가 생겨 서쪽으로부터 패강(浿江: 대동강) 지경에 들어오는데 우글우글 들판을 뒤덮으니,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암(巖)은 산마루에 올라가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 누리가 다 죽어 버렸다.

대력(大曆) 14년 기미(혜공왕 15년: 779)에 <암(巖)이> 왕명을 받고 일본국(日本國에)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나라 임금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하려 하였으나, 마침 당의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일본에> 와서 서로 만나보고 매우 즐거워 하니, 왜인들은 암(巖)이 중국에도 알려진 것을 알고 감히 억류하지 못하자 이에 돌아오게 되었다.

夏四月 旋風坌起 自庾信墓 至始祖大王之陵 塵霧暗冥 不辨人物 守陵人聞其中 若有哭泣悲嘆之聲 惠恭大王 聞之恐懼 遣大臣 致祭謝過 仍於鷲仙寺 納田三十結 以資冥福 是寺 庾信平麗․濟二國 所營立也

<그 해> 여름 4월에 회오리 바람이 세차게 일어나 유신공의 묘소에서 시조대왕(味鄒王)의 능에까지 이르렀는데, 티끌과 안개로 캄캄하여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능(陵)지기가 들으니, 그 속에서 울고 슬퍼하며 탄식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혜공대왕이 그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을 보내 제사를 올려 사과하고, 이어 취선사(鷲仙寺)에 밭 30결을 바쳐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 절은 유신공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하고 세운 것이었다.

庾信玄孫 新羅執事郞長淸 作行錄十卷 行於世 頗多釀辭 故刪落之 取其可書者 爲之傳

유신공의 현손(玄孫)으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유신공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오는데, <거기에는> 꾸며 만들어 넣은 말이 자못 많으므로 깍아버리고, 그 중에서 쓸 수 있는 것만을 간추려서 이 전기(傳記)을 지었다.

論曰 唐李絳 對憲宗曰 㰡’遠邪佞 進忠直 與大臣言 敬而信 無使小人參焉 與賢者遊 親而禮 無使不肖預焉㰡“ 誠哉 斯言也 實爲君之要道也 故書曰 『任賢勿貳 去邪勿疑』 觀夫新羅之待庾信也 親近而無間 委任而不貳 謀行言聽 不使怨乎不以 可謂得六五童蒙之吉 故庾信 得以行其志 與上國協謀 合三土.爲一家 能以功名終焉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 微中國之書 則泯滅而無聞 若庾信 則鄕人稱頌之 至今不亡 士大夫知之 可也 至於蒭童牧豎 亦能知之 則其爲人也 必有以異於人矣.

<사신(史臣) 김 부신은> 논평하여 말한다. 당나라의 이강(李絳)이 헌종(憲宗)을 대하여 말하기를 㰡’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충성되고 정직한 이를 나오게 하며, 대신과 더불어 말할 때는 공경하고 믿음 있게 하여 소인을 참여시키지 말며, 어진 이와 놀 때에는 친하되 예절 있게 하여 어리석은 자가 끼여들지 못하게 하십시오.㰡“라고 하였다. 참되도다! 이 말이여! 실로 임금의 정치에 중요한 도리이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어진 이에게 맡기어 의심하지 말며, 사특한 자를 제거하여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우함을 보건대 친근하여 틈이 없고, 일을 맡겨 의심치 않으며, 꾀를 내면 행하고 말을 하면 들어주어 그로 하여금 쓰여지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게 하였으니, 이른바 <주역> 육오동몽(六五童蒙)의 길(吉)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유신이 그 뜻한 바를 행할 수 있게 되어 당나라와 함께 협의하여 3국을 통합시켜 한 국가를 만들고, 능히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날려 일생을 마치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기록이 없어져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는데, 유신과 같은 분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지금<고려>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사대부(士大夫)가 알아줌은 당연하지만 꼴 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三國史記 卷 第四十三 終

譯文은 디지털 학국학(http://www.koreandb.net/Sam/SamInfo.htm)에서 引用하고, 1978년간, 安敬公派世譜의 金沅泰 譯文에서 脚註를 引用하여 編輯하였음.

2005. 5 . 7 . 金 順 大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47) 김영윤(흠순/반굴/영윤)

金令胤 新羅沙梁人 級湌盤屈之子 祖欽春或云欽純角干 眞平王時爲花郞 仁深信厚 能得衆心 及壯 文武大王陟爲冢宰 事上以忠 臨民以恕 國人翕然稱爲賢相 太宗大王七年庚申 唐高宗命大將軍蘇定方 伐百濟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 戰不利 欽春召子盤屈曰 㰡’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㰡“ 盤屈曰 㰡’唯㰡“ 乃入賊陣 力戰死

令胤生長世家 以名節自許

김영윤(金令胤)은 신라(新羅)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級湌)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 흠춘(欽春)<또는 흠순(欽純)이라고도 하였다.>은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짐이 깊고 신뢰가 두터워 뭇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 문무대왕이 그를 올려 총재(冢宰)로 삼았다. 윗 사람을 충성으로 섬기고 백성에게는 관대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칭하였다. 태종대왕 7년 경신(660)에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백제를 치게 하였을 때 흠춘이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을 이끌고 나갔다. 가을 7월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을 만나 싸움이 불리하여지자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였다.

㰡’신하로서는 충성이 제일 중요하고 자식으로서는 효가 제일 중요하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모두 이루어진다.㰡“

반굴이 㰡’예! 그렇게 하겠습니다.㰡“ 하고는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김>령윤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하였다.

神文大王時 高句麗殘賊悉伏 以報德城叛 王命討之 以令胤爲黃衿誓幢步騎監 將行 謂人曰 㰡’吾此行也 不使宗族朋友 聞其惡聲㰡“ 及見悉伏出椵岑城南七里 結陣以待之 或告曰 㰡’今此凶黨 譬如鷰巢幕上 魚戱鼎中 出萬死以爭一日之命耳 語曰 㰡窮寇勿迫㰡‘ 宜左次以待疲極而擊之 可不血刃而擒也㰡“ 諸將然其言 暫退 獨令胤不肯之而欲戰 從者告曰 㰡’今諸將豈盡偸生之人 惜死之輩哉 而以向者之言爲然者 將俟其隙而得其便者也 而子獨直前 其不可乎㰡“ 令胤曰 㰡’臨陣無勇 禮經之所誡 有進無退 士卒之常分也 丈夫臨事自決 何必從衆㰡“ 遂赴敵陣 格鬪而死 王聞之 悽慟流涕曰 㰡’無是父 無是子 其義烈可嘉者也㰡“ 追贈爵賞尤厚

신문대왕 때에 고구려의 남은 세력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토벌을 명할 때에 <김>령윤을 황금서당(黃衿誓幢)의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았다. 장차 떠나려 할 때 말하기를 㰡’나의 이번 걸음에 나의 종족과 친구들이 나쁜 소리를 듣지 않게 하겠다.㰡“ 하였다. 실복이 가잠성(椵岑城) 남쪽 7리에 나와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㰡’지금 이 흉악한 무리는 비유컨대 제비 천막 위에 집을 지은 것이고 솥 안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같으니 만번이라도 죽겠다는 각오로 나와서 싸우나 하루살이의 목숨과 같다. 㰡막다른 곳에 다다른 도둑을 급박하게 쫓지 말라.㰡‘ 하였듯이, 마땅히 좀 물러서서 피로가 극에 달함을 기다려 치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㰡“

여러 장수들이 그 말을 그럴 듯하다고 여겨 잠깐 물러났다. 오직 <김>령윤만이 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싸우려하니 그 따르는 자가 말하였다.

㰡’지금 여러 장수들이 어찌 다 살기를 엿보는 사람으로 죽음을 아끼는 무리이겠습니까? 지난 번의 말을 수긍한 것은 장차 그 틈을 기다려 그 편함을 얻고자 함인데 그대가 홀로 곧바로 진격하겠다고 하니 그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㰡“

<김>령윤이 말하였다.

㰡’전쟁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기에서 경계시킨 바요,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은 병졸의 떳떳한 분수이다. 장부는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반드시 무리를 좇을 필요가 있겠는가?㰡“

드디어 적진에 나가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㰡’그런 아버지가 없었으면 이런 자식이 있을 수 없다. 그 의로운 공이 가상하다.㰡“ 하고는 벼슬과 상을 후하게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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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숙위학생

숙위학생이란, 신라에서 중국 당나라로 유학갔던 학생들을 말합니다. 이 숙위학생은 통일신라시대에 전제왕권기와 신라하대에 성격을 달리합니다. 숙위학생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상단 검색창에서 <숙위학생>을 입력하시기 바랍니다.

1. 숙위학생이 시작된 이유는?

원래 숙위학생이란, 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 등에서 당의 개방정책에 의해 유학생을 파견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즉, 당은 주변 여러 나라에서 유학생을 모아 당나라 교육기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고, 유능한 인재를 당에서 선별하여 활용하는 정책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숙위학생을 당나라의 개방성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초기의 숙위학생들은 유학생이라기 보다는 <인질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인질적 성격이라는 것은 초기 숙위학생을 했던 신분이 <진골 혈통>이었다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다음 사료를 한번 볼까요?

(1)번 사료

김춘추가 당왕에게 아뢰기를 이렇게 말하였다.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으니 성상곁에 있게 해주소서" 곧 아들 문왕과 대감인 **를 머물러 두게 하였다.

(2)번 사료

신라는 당나라와 조공한 이후 항상 왕자를 보내 숙위를 시켰고, 학생을 보내 대학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였다. 이들은 l0년을 기한으로 귀국케 하였으며, 계속 파견된 입학생이 100 여 명에 이르렀다.

- 동사강목 -

위 (1)번 사료를 보면 김춘추가 당에 아들인 문왕(훗날 문무왕)을 보낸 것은 유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삼국통일기에 당의 협조를 위해 아들을 인질로 보낸 것입니다. 또 (2)번 사료로 보면 신라가 당에 신하를 보낸 것이 <왕자>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 (2)번 사료에서는 학생들을 대학에 입학시켰다는 점에서 순수 학문을 위한 유학생들로 바뀌고 있다는 것도 동시에 보여줍니다.

2. 숙위학생의 신분과 역할이 바뀌다.

이러한 인질적 성격의 숙위학생은 신라 하대로 가면서 그 성격이 변화합니다. 신문왕 대 <국학>이 설립되면서 신라도 본격적으로 당나라를 모방한 유학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때부터의 숙위학생은 단순히 인질이 아니라 <학문연구>도 겸하게 된 것입니다.

왕의 아우 김사종을 당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전하고 겸하여 글을 올려 자제의 국학 입학을 청하니 당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 동사강목 -

위 사료를 보면 왕의 아우가 당나라에 인질적 성격으로 당에 갔으나, 국학에 입학하였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곧 인질적 성격과 함께 학문적 목적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사료를 볼까요?

(1)번 사료

당문종은 홍로시에 명하에 질자와 기한이 넘어 마땅히 귀국해야 할 학생 105인을 귀국하도록 하였다.

(2)번 사료

빈공과(賓貢科)는 매월 별시(別試)를 치러 합격자를 방(榜)의 끄트머리에 부쳤는데, 김운경(金雲卿)이 처음 합격한 이후 당말(唐末)까지 58인이었고, 5대(代)에는 32인이나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최이정(崔利貞)· 박계업(朴季業)· 김윤부(金允夫)· 김입지(金立之)· 박양지(朴亮之)· 이동(李同)· 최영(崔靈)· 김무선(金茂先)· 양영(楊潁)· 최환(崔渙)· 최광유(崔匡裕)· 최치원(崔致遠)· 최신지(崔愼之)· 김소유(金紹游), 박인범(朴仁範)· 최승우(崔承祐) 등으로, 이들은 이름을 떨친 바 있다. (《東史綱目》5上, 眞聖女主 3年 )

- 동사강목 5권 상, 진성여주 3년 -

위 사료를 보면 신라 후기의 숙위학생은 이제 확실히 공부를 위한 숙위 학생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귀국 숫자도 100명을 넘어 대단위이며, 이들의 출신도 김운경, 최치원 등 6두품 출신입니다.

즉, 신라에서 골품제도의 한계로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한 6두품들이 당에서 빈공과에 합격하여 능력을 인정받아서 당 왕조에 협조하거나, 신라로 돌아와 정치에 매진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학문적 성향이 강한 나말의 숙위학생들은 당에서는 인정받았지만, 정작 신라에서는 큰 인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폐쇄적인 골품제의 한계 때문입니다. 이들은 신라로 돌아온 후, 신라 사회의 모순을 한탄하며 대부분 당으로 돌아갑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최치원과 같이 은거하여 도교사상에 심취하거나, 호족과 연계하여 반신라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정리하자면 숙위학생은 초기에는 인질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나, 후기에는 학문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이러한 숙위학생들이 나말에 골품제적 한계에 좌절하면서 반신라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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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알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의 식읍과 녹읍제도

1. 고대 사회에서 식읍이란 무엇인가?

식읍이란, 전쟁 등을 통하여 공이 있는 자에게 내린 토지를 말합니다. 설명하자면, 왕실의 성원, 대공신 등 아주 소수의 일부 공훈자들에게 특별 급여로 땅을 지급하는 것을 말하죠. 땅을 지급한 대신 왕실을 번병하여 지키고, 국왕에게 충성하라는 의무를 부여합니다. 즉, 식읍은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부여된 땅입니다.

식읍으로 받은 땅에서는 인민, 토지 등을 포괄적으로 지배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광역 지배가 허용된 것이지요. 사실 식읍은 실제 땅을 내려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초기 국가시대에 소국의 족장들에게 원래 영토의 기득권을 허용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원래 소국 점유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한 것으로 보아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예로, 신라 진흥왕은 항복한 금관국의 국주 김무력에게 금관국 자체를 식읍으로 하사했습니다. 금관국은 망했지만, 금관국의 왕가는 자국을 다시 식읍으로 받아 예전과 같은 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단, 신라 왕실에 대한 충성을 담보로 한 것이죠. 또 고구려에서는 부분노와 같은 건국 공신, 고노자와 같은 신하에게 식읍을 하사했는데, 이 경우는 전투 공훈자에 대한 포상으로 식읍을 하사한 것입니다. 이들은 식읍을 자신의 국가처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고구려 왕실에 대한 충성을 대가로 합니다. 이러한 토지에 대한 인민지배는 국가가 아직 중앙집권화되지 못하고, 식읍에 대한 지배권이 약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식읍은 5-6c가 지나면서 국가가 식읍을 하사한 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으며, 식읍주가 임의로 인민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통제도 강화됩니다. 이것은 삼국이 중앙집권화되면서 지방에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시기와 일치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2. 고대 사회에서 녹읍이란 무엇인가?

녹읍은 5-6c세기 이후 국가가 중앙집권화 되는 시기에 식읍을 대체하면서 등장합니다. 6c 무렵 신라에서는 우경이 시작되어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였고, 국가는 관료제, 군현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이제 신라 등 고대 국가들은 생산력 발달에 따른 각 읍락의 잉여 생산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6c 이후에는 식읍보다는 녹읍을 주는 경향이 강합니다.

녹읍은 국가가 일정 지역의 백성과 토지에 대한 지배층의 사적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권리로 식읍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식읍이 소수 공신, 전공자에게 부여된 것에 비해 녹읍은 다수의 관리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또, 식읍이 백성, 토지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을 갖는 것이라면, 녹읍은 국가가 인정한 땅에서 일정한 양의 조세만 수취할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녹읍은 관리의 등급에 따라 차등있게 지급되었으므로, 일종의 연봉과 같은 개념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녹읍과 같이 일정 지역의 토지에서 일정 비율의 세원만을 수취하는 권리를 흔히 <수조권>이라고 합니다. 즉, 녹읍은 식읍과 달리 <수조권>만 인정된 최초의 수조권제도였으며, 이것은 토지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강호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녹읍을 받은 관리들은 녹읍을 마치 식읍처럼 운영하려고 했습니다. 백성을 징발해 일을 시키고, 임의로 많은 공납을 받으려 했죠. 이러한 경우가 많아서 과거에는 녹읍은 수조권 제도가 아니라, 인민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가진 제도라고 인식했었고, 교과서에서도 녹읍을 수조권 제도라고 볼 수도 있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합니다. 국가는 이러한 녹읍의 식읍화 현상을 막기 위해 <좌우사록관>을 설치하여 녹읍에 대한 감시를 하였습니다.

3. 아예 녹읍을 폐지하겠다고 하며 등장한 관료전

통일 후 전제왕권을 확립한 신문왕은 아예 녹읍을 폐지하여 녹읍을 식읍처럼 부리는 관행을 아예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완전히 수조권에 입각한 <관료전> 제도를 시행합니다. 관료전 제도는 <좌우사록관>을 파견하여 녹읍을 감시하는 정도의 약한 통제가 아니라 아예 국가가 나서서 녹읍주의 직접 지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전제왕권을 달성한 신문왕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고, 통일신라의 전성기인 7c에는 <관료전에 입각한 철저한 수조권 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국가가 녹읍주에게 직접 매년 세조를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토지 통제 보수 귀족들의 반발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능력별로 인재를 등용한다는 국학, 독서삼품과 제도 등에 대한 반발과 맞물려 점차 시행이 어려워집니다. 또, 관리에 대한 직접 세조 지급은 국가의 행정적인 부담이 너무 커서 경덕왕 때에는 다시 녹읍이 부활합니다.

보통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한 것을 관료전 제도의 실패이자, 왕권이 진골귀족권에 밀린 것으로 인식하는데,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나면, 녹읍이 부활한 것은 굳이 행정적 부담이 큰 관료전을 시행하여 관료들에게 일일이 세조를 지급하지 않아도 국가가 관료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녹읍을 부활한 경덕왕 때에는 한화정책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우는 시기였고, 왕권이 약해지는 시기가 아니였습니다. 경덕왕이 녹읍을 부활한 것은 중국의 선진적인 토지제도를 배워 신라사회에 적용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경덕왕이 한화정책으로 중국에서 도입한 토지 정책은 바로 당나라의 <균전제>일 것입니다. 즉, 녹읍의 부활은 완전한 수조권적 형태로 국가가 토지제도를 운영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자, 이 제도를 시행함으로서 행정적 부담을 덜고 귀족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4. 식읍제 방식의 변화

경덕왕 대에 새로운 녹읍의 등장으로 신라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근근히 행해져오던 식읍제도도 그 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식읍제도 역시 인민, 토지를 완전히 장악하던 과거의 제도를 벗어나, 수조권적인 성격을 가지거나, 형식적인 성격으로 변화합니다.

식읍제는 원래 일정 지역을 지정하여 공훈자에게 주는 방식에서 벗어나, 일정한 봉호수를 정하여 그 봉호수를 사여하는 방식으로 전환됩니다. 즉 지역 하사에서 일정 호수를 지급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지요. 김인문에게 식읍 300호를 내린다, 김유신에게 슥읍 500호를 내린다 등의 기록은 식읍에 지역에 해당하는 땅을 준 것이 아니라, 일정 마을 규모를 하사하여 그곳에서 인두세를 걷게 한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 봉호라는 것도 실제로 그 마을을 하사한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주는 척만 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예로, 당나라 고종은 삼국통일의 공훈을 세운 김유신에게 식읍 2000호를 주고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여기서 김유신은 2000호를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우리 땅인데, 당 황제가 준다는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김유신의 업적과 작위를 고려하여 그만큼의 땅을 식읍으로 받을 정도가 된다는 것을 형식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이것이 식읍의 변화된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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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진흥왕대 화랑도의 개편 -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1. 화랑도에 관한 사료부터 읽어보자!

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신선을 숭상하고,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가려서 원화로 삼았다.

원하는 무리를 모아 그 중에서 인물을 뽑고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와 교정 낭자를 원화로 뽑으니, 모여든 무리가 300-400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한 나머지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로 인하여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뒤 여러 해만에 왕은 국가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가의 덕행 있는 사내를 뽑아 화랑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으니, 화랑 국선의 시작이다. 그래서 기념비를 명주(강원도 강릉)에 세웠다. 이로부터 사람에게 악을 고쳐 선으로 옮기게 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니 오상과 육예와 삼사와 육정이 널리 행하여졌다.

(참고 - 오상 : 인, 의, 예, 지, 신 / 육예 : 예, 악, 사, 서, 어, 수의 6가지 과목 / 삼사 : 태사, 태부, 태보의 3가지 최고 관직 / 육정 : 성신, 양신, 충신, 지신, 정신, 직신의 6가지 바른 신하)

-삼국유사 권 3, 탑상편,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전에 군신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뽑아 쓰려 하였다. 그리하여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뽑아 300여명 이나 되는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두 여인이 서로 어여쁨을 다투고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이로 인해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졌다.

그 뒤 다시 외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부르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의를 닦거나 서로 가악으로 즐겁게 하면서 명산대천을 돌아다녔는데,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 가운데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런 까닭에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현좌와 충신과 양장과 용졸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 라고 하였고,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이른다. 이 교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를 포함한 것으로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의 뜻이며,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 그대로이다> 라고 하였으며,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서는 <귀인의 자제 가운데 어여쁜 자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국인이 모두 높이 섬긴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 -

공(김유신)은 나이 열다서에 화랑이 되어 다이 사람을 기꺼이 복종하였는데, 이를 용화향도라 일컬었다.

- 삼국사기 권 41, 열전 1, 김유신 상 -

2. 화랑도의 용어를 정리해보자!

위 사료에서 보면 알겠지만, 화랑이라는 단체의 기원은 도교적, 유교적 영향으로 여성을 선발하던 단체였으나, 점차 남성단체로 전환된 것에서 비롯됩니다. 화랑이란, 국선, 풍월주라고도 하며 진골 중에서 으뜸인 젊은이들을 뽑아 사회에 필요한 교양과 국가 교육을 동시에 하는 단체였습니다. 화랑이 진골 귀족출신이라면 낭도는 화랑을 쫒던 일반 1-6두품 출신의 무리였습니다. 6두품이 등장할 무렵 1-3두품은 평민화 되어가는 것으로 볼 때, 낭도는 평민층도 포함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랑이란, 무리인 <랑>을 이끄는 자들 중 가장 아름답다(화)는 뜻입니다. 여기서 화랑이 여성단체인 원화의 <화>, 즉 꽃에서 유래된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화랑도를 이끄는 <랑>은 최고의 귀족출신입니다. <낭도>란 <랑>을 따르는 자(도)라는 뜻입니다. 화랑 + 낭도라는 의미에서 <화랑도>라고 합니다.

향도는 이렇게 화랑(랑)과 낭도(도)로 이루어진 단체입니다. 향도란 무리를 따르는 <도> 들이, 모인 단체라는 뜻인다. 위 사료에서처럼 김유신의 용화향도가 대표적인 단체입니다.

3. 신채호가 생각한 화랑도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 화랑도를 우리 전통의 선 사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신라의 선(군선)은 고구려의 조의, 선인제도, 삼한시대의 소도를 수비하던 무사의 개념에서 내려오는 전통 사상으로 중국 당나라 초기에 국교화된 도교에서 말하는 <선>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중국의 선 사상과 다른 우리 고유의 선 사상을 <낭가사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채호는 이러한 전통사상을 잘 지켰을 경우 우리 민족이 흥하였고, 전통사상을 무시하고 내분을 일으킬 경우 민족이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고구려 초기의 국풍이 후기 내분으로 멸망단계에 이르고, 신라 후기에 낭가의 전통이 약해진 경우 등은 모두 국가가 문란한 시기였다고 말합니다.

특히, 묘쳥, 정지상 등이 이끈 서경천도운동은 낭가사상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중흥할 수 있는 계기였는데, 김부식 등의 유가주의자들에 의해 진압당한 것은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고려 개경 보수파 김부식에 의해, 진보적 낭가주의 사상가들인 사경파가 진압당함으로서 우리 역사는 더 이상 북방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한반동에 갖혀 역사가 어그러지는 과정을 맛보았다는 것이지요.

4. 화랑도의 기원은?

화랑도는 원시 사회 청소년 조직에서 유래된 사회 유지 단체로, 성년식 등을 통한 청년 교육, 비밀 결사로 이루어진 군교육, 연령에 따른 계급적 교육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원시적인 성격을 띄는 집단이었으나, 진흥왕이 화랑도를 국가 체제 속에서 공적인 단체로 규정한 이후 국가 군사 엘리트(명망군)를 보충하기 위한 특수조직으로 거듭납니다. 진흥왕기 진흥왕의 모후로서 섭정했던 김씨부인은 이 청소년 집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즉, 화랑도는 진흥왕기에 불교교단의 정비와 더불어 국가 행정체제에 포섭된 단체가 되었고, 이후 풍월도, 풍류도라 불리던 전통 사상체계 및 중국 도교 사상 등과 연계되어 유, 불, 선 3교를 포함한 정치, 사회, 사상적인 제도로 자리잡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청소년 단체를 넘어 사회 교화까지 담당하는 역할을 하게 되죠.

5. 진흥왕대 화랑도가 정비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신라사회를 살펴볼 때, <부체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었습니다. 진흥왕 이전까지 신라 사회는 왕도 소속부를 가지고 있었고, 왕의 하교는 6부의 소속부와 같이 명령을 내리는 공동하교였습니다. 공동하교란, 왕과 주요 6부가 화백회의와 같은 회의체를 통해서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으로, 왕족은 왕과 6부에 흩어져 공동의 정치를 했다는 것을 의미해줍니다. 신라 왕도 탁부 소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증왕 대 우경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하면서 국호와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고, 법흥왕 대 율령과 불교의 수용, 골품제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강해진 것을 계기로, 진흥왕 때는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추진하면서 왕 혼자 국정을 총괄하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단독하교>입니다.

왕이 단독하교로서 왕권을 중앙집권화하려 하자, 인재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왕은 소속부를 초월하여 진골 인재들을 자신의 밑에 직접두려고 했죠. 이러한 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불교교단의 정비와 골품제의 시행입니다. 불교 교단의 정비란, 불교 교단을 국가 행정 구역과 일치시켜 불교를 국가 지배체제 속에 포함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불교 세력을 각 부가 아닌 왕이 장악하게 되는 것이었지요. 또, 화랑도를 국가 단위로 개편하여 소속부와 계층을 뛰어넘어 왕이 진골인재를 직접 선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진흥왕의 이 정책으로 탄생한 세력이 바로 <진골세력>, <6두품>세력입니다. 과거 부체제 속에서 각 부의 혈연집단이었던 혈연 귀족들은 이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진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진골들은 왕과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세력으로 1-5두품 세력을 적극 활용하게 되는데, 진골에 의해 6등급 아찬중위제 등 고위 관료직까지 진출한 새로운 두품을 <6두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진골 계급을 우두머리로, 성장하고 있는 두품 세력을 낭도무리로 하여 계급적 지배체제로 재탄생한 제도가 진흥왕기 화랑제도입니다.

그러나 화랑제도는 이러한 정치적 목적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화랑은 기본적으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지만, 그 인재를 소숙부와 계급을 초월하여 선발함으로서 <사회통합>에 기여하였습니다. 또, 화랑과 낭도에 계급을 부여하고 그 계급윤리를 준수하게 함으로서 사회 규범과 윤리를 유지하는 역할도 하였고, 국가 긴급시에 활용할 수 잇는 군대(명망군)의 역할을 함으로서 삼국통일의 군사적, 정치적 기반으로도 활용됩니다.

이러한 화랑도의 발전으로 화랑도는 자체 체계도 갖추게 됩니다. 예로, 승려 원광이 작성한 세속오계는 화랑의 성격이 유교, 불교, 도교 등을 통합한 종합적 사상 체계임을 보여줍니다. 살생유택은 불교적 이념이, 사군이충과 사친이효, 교유이신 등에는 유교적 가치좐이 보입니다. 그러나, 충성, 우애, 효도 등은 유불선을 떠나 어느 사회에서나 강조하는 이념으로서 화랑도가 신라사회의 <보편적 이념>을 따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 화랑의 역할

실제 화랑은 삼국통일에 앞장선 자들입니다. 사다함, 반굴, 관창 등의 화랑은 적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김유신과 같은 가야계 진골들도 삼국통일에 큰 공훈을 세웁니다. 화랑은 자신의 낭도를 철저히 보호하고, 그 공훈을 인정하여 높은 보상을 보장하였기에 화랑을 따르는 낭도, 특히 6두품 낭도들은 목숨을 걸고 충성합니다. 실제로 삼국통일기에 화랑 아래에서 활약한 위대한 낭도들은 6두품 출신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삼국통일의 역사적 과도기라는 점은 큰 메리트로 다가왔고,  두품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이것으로보면 화랑도가 골품적 한계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 계층을 넘어선 사회통합에 기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화랑은 사회통합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효녀 지은전을 보면 효종랑과 그 낭도들은 어렵게 살아가는 효녀 지은을 지극 정성으로 도우면서, 이것을 당연한 화랑도의 도리라 여깁니다. 즉, 화랑도는 <진골>이라는 지배계급이 백성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 할 지를 제시하는 지배층의 <교과서>같은 역할도 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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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글) 이하의 아래 글은 화랑도에 대한 이기동 교수님의 글입니다. 참조하세요.

[기원과 제정]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성읍국가시대에 걸쳐 우리나라의 촌락 내부에는 청소년조직 같은 인위적인 공동체가 발생하여 차츰 발전해갔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三國志〉·〈후한서 後漢書〉의 동이전에는 삼한사회(三韓社會)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갖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농촌에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두레'라는 말은 본래 지역공동체를 나타내는 칭호였는데, 그 어원은 '들어간다'는 의미의 '들=들이=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입문(入門)·입사(入社)의 뜻인데, 이는 아마도 성읍국가시대 마을의 젊은이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에 들어가 단체활동을 했던 사실에서 연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신라는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연맹왕국을 완성하고, 6세기초에는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함에 따라 지금까지 촌락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청소년조직은 그 독자적인 기능을 중앙정부에 흡수당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태에서 조정에 의해 제정된 것이 원화(源花:또는 原花) 제도였다. 당시 조정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젊은이들을 떼지어 놀게 해놓고 그 행실을 보아 등용하려고 했는데, 그 단장인 원화에는 어여쁜 여성 2명을 뽑았다. 이때 원화로 뽑힌 사람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었는데, 그들은 300명에 달하는 무리를 통솔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 두 여성 사이에 서로 시기하는 일이 생겨 준정이 남모를 강물에 던져 죽인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 단체는 해산되었다. 원화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조정에서는 인재를 양성·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히 6세기 전반기가 되면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 나아가서는 고구려·백제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에 따라 대규모 군대를 편성해야 했다. 이에 진흥왕(眞興王:540~76 재위) 때에 국가는 화랑도를 정식으로 제정했는데, 이때 조정은 화랑도조직을 통해서 당장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화랑도는 결국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출발한 것이었다.

[조직상의 특징]

화랑도는 비록 국가에 의해서 조직되었으나 법률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즉 종전의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청소년조직이 전통에 입각하여 거기에 중국 율령(律令)의 수용을 통해서 배운 관청조직의 원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단체였다.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神文王:681~92 재위) 때 최고 학부인 국학(國學)이 정비된 뒤에도 화랑도는 교육적 기능을 지니는 민간의 조직으로 여전히 남았는데, 이는 화랑도 조직상의 특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한 시대에 몇 개의 단체가 존재했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眞平王:579~632 재위)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 여러 단체를 통솔할 책임자로 화주(花主)를 제정한 일도 있었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다. 이 낭도의 수효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많은 경우에는 수백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은 이 집단의 중심 인물인데, 진골 귀족 가운데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이 깊으며 사교성이 풍부한 사람을 뽑았다. 신라시대를 통해서 화랑은 모두 2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화랑의 무리 속에 섞여서 활동하는 승려들은 주로 지적·정신적인 방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 만큼 학문적 교양이 풍부한 승려가 흔히 이에 뽑혔다. 한편 낭도들의 신분이나 자격규정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수도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 출신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화랑도는 위로는 진골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분에 속하는 수도 거주의 청소년들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화랑도 구성원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맺어지고 있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화랑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와 같은 혈연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혈연주의를 초월하여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 일종의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수련상의 특징]

화랑도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했다. 신라사회에서는 통상 3년을 하나의 서약·수련·의무의 이행기간으로 잡고 있었으므로 화랑도 역시 수련기간이 3년으로 짐작된다. 여러 가지 역사 기록을 종합해보면 화랑은 대개 15~18세의 청소년이다. 화랑집단의 구성원들은 이 기간 동안 경주의 남산을 비롯하여 멀리는 금강산이나 지리산 같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순례하면서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도의를 연마했다. 그런데 그들이 연마한 도의란 흔히 6세기말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5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의 5계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긴 사회윤리 덕목은 충과 신이었다. 이것은 화랑도가 제정된 6세기 중엽부터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엽까지의 200여 년 간이 신라 역사상 드물게 보는 국난기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 특히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는데, 화랑집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화랑도가 즐긴 노래와 춤은 그들의 명승지 순례와 더불어 놀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놀이는 화랑도의 인격 형성, 나아가 그 세계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 때는 신라사회에 불교가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 만큼 화랑도집단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의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화랑을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으로, 낭도를 미륵을 쫓는 무리로 여겼다. 화랑 김유신(金庾信)의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로 불렀다는 역사책의 기록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국난기에 즈음하여 귀족계급이나 민중들은 하루 빨리 이상국가가 건설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아가 화랑도가 자신들의 열망을 실현시켜줄 것으로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랑도는 낭도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합된 위에 조국수호, 나아가서는 이상세계 건설이라는 원대한 공동 목표를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그 구성원간의 인적 결합관계는 매우 긴밀했다. 그들 사이의 우정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함께 죽기를 약속할 정도의 사우(死友)·맹우(盟友) 관계였다.

[기능과 역할]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진흥왕 때에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크게 활기를 띠었다. 화랑도는 이 중대한 시기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 花郞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하여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했다. 화랑도는 당시 무사도(武士道)의 화신이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 및 낭도들의 전기를 보면 그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순국지상주의(殉國至上主義)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전사단체로서 화랑도는 사태가 급할 때는 곧바로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국가의 정규부대인 당(幢)·정(停)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했다. 화랑집단의 무사도가 화랑도 구성원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층에까지 널리 퍼져서 시대정신의 구현에 이바지한 것은 이때였다. 그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화랑도가 국가에 기여한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화랑도가 제정되어 크게 활약하던 시기는 골품제도라고 하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때였는데, 화랑도는 이러한 신분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완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것은 화랑도가 진골귀족을 비롯하여 하급 귀족, 일반 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 소유자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추구하는 공동목표는 같았는데, 그 이유는 집단 자체가 철두철미하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단체였기 때문이다.

[변천]

삼국통일 후 화랑도의 성격은 차츰 변질되어갔다. 무엇보다도 종전에 목표로 하고 있었던 군사적 과업이 달성됨으로써 전사단으로서 화랑도의 존재의의는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통일 후 오랫동안 안정과 평화를 누리면서 화랑도의 수련은 군사적 목표를 상실한 채 일방적으로 놀이의 성격이 강해졌다. 여기에는 도교(道敎)의 신선사상이 침투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신라 말기의 문인 최치원(崔致遠)이 화랑도의 근본정신은 유교·불교·도교 3교의 융합에서 나온 풍류도(風流道)라고 규정한 것도 이처럼 삼국통일 후 변질된 화랑도에 대한 정의였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와 왕권이 쇠약해지고 귀족세력이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화랑도는 귀족들의 문객(門客) 또는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어갔다. 이처럼 신라의 쇠퇴와 더불어 차츰 변질되어가던 화랑도는 신라의 멸망과 동시에 그 제도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화랑도의 도풍(道風)마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고려시대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에서 그 유풍을 볼 수 있고, 민간의 교육기관인 사학(私學) 12도(徒)가 크게 일어난 것도 화랑도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었음을 반영해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이같은 화랑도의 유풍은 거의 사라지고 오로지 노래와 춤을 즐기는 화랑도의 가무조합적(歌舞組合的) 기능만이 남았다. 그리하여 화랑이라고 하면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를 비롯해 〈훈몽자회 訓蒙字會〉·〈속대전 續大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자무당[巫夫]·창우(倡優)·유녀(遊女)·무동(巫童)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어 마침내 화랑도의 본질적인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었다. 현재 일부의 화랑도 연구자들이 화랑을 신라시대의 남자무당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처럼 조선시대에 변질된 화랑이란 용어를 마치 신라시대의 그것으로 잘못 판단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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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왕 대 귀족들의 반란으로 김유신계 귀족도 제거되다

37대 혜공왕 때, 대력 14년 기미 4월에 문득 회오리 바람이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 속에 준마를 탄 한 사람은 장군의 모습과 같았으며, 갑옷을입고 모기를 든 사람 40여 명쯤이 뒤를 따라와서 죽현릉(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능 속에서 진동하며 우는 소리가 나는 듯하고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말은 이러했다.

[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으며,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진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나간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론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군신들이 저의 공열을 생각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사오니 임금께서는 이를 허락해주소서 ]

삼국유사 권 1 미추왕 죽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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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혜공왕 대 대대적인 귀족의 반란은 안 그래도 입지가 좁아진 김유신 계열의 진골들도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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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후손들도 정권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김유신의 적손 윤중은 성덕대왕에 벼슬하여 대아찬이 되고 여러번 은호를 입었는데, 왕의 친속들이 질투를 심하게 하였다.

때는 중추 보름날, 성덕왕이 월성 잠두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면서 시종관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윤중을 부르라 하였다. 그 때 누군가 간하였다.

[ 지금 종실과 척리들 가운데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소원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또 어찌 친친(가까운 친척과 친해야 하는 예절)의 경우에 맞다 하겠습니까? ]

왕이 대답하였다.

[지금 과인이 경들과 더불어 평안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 조부의 덕이다. 만을 공의 말고 같이 하여 잊어 버린다면, 선한 이에게 잘해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는 의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 42 열전 2 김유신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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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이 사료의 핵심은 신라 하대로 갈수록 진골의 숫자가 많아지자, 진골 내부에서 1골, 2골로 등급을 나누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김유신계 진골은 이 때 배제되기 시작하며, 왕의 직계 진골에서 소외당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라 하대 진골의 분화 양상은 김유신계의 배제로 극명하게 증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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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보통 역사에서는 김춘추의 즉위를 놓고, 성골계통에서 진골계통으로 왕위가 이전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김춘추 계통의 진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골과 진골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전에 자세히 정리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김춘추를 중심으로 성골과 진골 개념을 정리해보죠.

1. 진흥왕 시기 진골의 성립

진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신라 사회에 성립된 것은 보통 진흥왕 때라고 보고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은 정복군주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으며, 불교교단, 화랑도 정비를 통해 <부족적인> 국가체제를 <행정적인> 국가체제로 전환시킨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한 왕입니다. 진흥왕은 이전 왕들이 각 소속 부족들과 <공동하교>를 내리던 관례도 없애고, 왕 혼자 단독하교를 내리는 전례를 보였던 왕이기도 합니다. 이 진흥왕기에 원래 소부족의 소족장 계급으로 신라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던 각 <부>들이 왕권을 옹호하는 행정적인 귀족들로 변모하면서 <진골>이라는 국왕을 옹호하는 계급이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흥왕의 아들은 동륜, 사륜이었습니다. 동륜은 일찍 죽어서 사륜이 왕이 되었는데, 사륜(전지왕)은 음란하다고 하여 쫒겨난 왕입니다. 사륜이 쫒겨나자 동륜의 아들 백정이 왕이 되었는데 이 아들이 바로 진흥왕의 적손자인 진평왕 이였습니다. 이후, 진흥왕의 장자인 동륜의 직계들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동륜의 자손만이 성스럽다는 관념이 생겼고, 이것을 보통 성골이라고 불렀습니다. 성골은 사륜의 후손 진골 및 다른 부족의 진골과 차별된 신성한 족속이었죠.

2. 성골의 신성함과 여자의 부정함이 충돌하다

그러나 진평왕은 아들이 없이 죽었고, 딸인 덕만이 선덕여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당시는 여왕이라서 왕이 안된다는 관념과 성스런 족속이므로 여왕도 괜찮다는 관념이 충돌하는 시기였습니다. 선덕여왕은 결국 여자라서 나라가 어지럽다는 이유로 당시 진골 세력에 의해 축출됩니다.

그러나 당시 왕위계승에서는 한발 뒤처져 있던 김춘추는 자신의 입지를 다질 시간이 필요했고, 다시 여자인 승만을 진덕여왕으로 추대하여 즉위시켰습니다. 이 진덕여왕이 마지막 동륜계의 자손인 최후의 성골입니다.

진덕여왕이 죽은 후 왕위 계승자는 계승 1순위인 상대등 알천이었습니다. 그러나, 알천은 당시 실력자였던 김춘추를 왕에 추대합니다. 김춘추는 왕위 추대를 3번 거절하는 삼양지례를 치른 후 당당히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김춘추가 바로 사륜의 손자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최초의 진골로 알고 있는 김춘추는 진흥왕 이후 동륜계 성골, 사륜계 진골의 왕위 계승 문제 속에서 즉위한 최초의 진골 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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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료

진덕왕이 돌아가자 군신들은 이찬 알천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거부하며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고 덕행도 없다. 덕망으로 볼 때는 춘추를 따를 자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결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춘추를 왕으로 받들었다. 춘추는 세 번 사양한 끝에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즉위년

진덕왕 8년에 왕이 돌아갔으나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이에 유신은 재상인 이찬 알천과 모의하여 이찬 춘추를 맞아 즉위시키니, 이가 태종무열왕이다.

삼국사기 권 42 열전 2 김유신 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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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과 삼국통일의 의지

공은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으니, 그 무리를 용화향도라고 부른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에 공은 나이 17세로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넘쳐, 침략한 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 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와 범처럼 우리 강토를 어지럽게 하니 평안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 재주와 힘은 헤아리지 않고 화란을 없애고자 하오니 하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저에게 수단을 빌려주십시오!]

머문지 나흘이 되는 날 문든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이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하게 생긴 소녕이 여기에 와서 혼자 있음은 어인 일안가?]

유신이 대답하였다.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나는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고 인연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이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노인에게 두 번 절을 하고 앞에 나가 말하였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만나는 바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원컨데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애달피 여기시어 방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고 예닐곱 번을 하니 그제야 노인은

[그대는 어린 나이에 삼국을 병합할 마음이 있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 하면서 이에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말하였다.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작별을 하였는데, 2리쯤 갔을 때 쫓아가 바라보니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빛이 보일 뿐인데 오색빛처럼 찬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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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김유신 등의 신라 화랑들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김유신이 이끈 용화향도는 양화란 미래에 나타난다는 미륵불을 의미하고, 향도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조직된 종교라고 합니다. 신라 시대의 화랑도를 향도라고 하였습니다. 이 신이한 글을 보았을 때, 용화향도는 김유신이 화랑이 되어 이끈 향도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설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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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의 즉위 배경에 대한 사료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뭇 신하들이 알천 이찬에게 섭정을 청하였다. 알천은 짐짓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나이 늙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조 제세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군신이 드디어 춘추를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춘추는 재삼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 하, 보장왕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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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이 사료는 선덕여왕기 이후 성골계 귀족들이 점차 소멸되면서 새로운 진골계 세력이 대두함을 보여줍니다. 선덕여왕은 [여자는 정치 자질이 없다]라는 핑계로 비담, 염종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담, 염종 등은 새로운 왕위계승자를 요구했는데, 김춘추는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해 성골출신의 진덕여왕을 왕으로 배정합니다. 그리고 김유신계 등의 진골과의 유대를 강화하여 전덕여왕기 실력을 쌓았습니다. 김유신계로 대표되는 가야계 진골들은 왕위계승은 처지지만 잠재력을 갖춘 김춘추를 적극 밀어줌으로서 이 세력들은 진골여왕 사후 정권을 잡게 됩니다. 알천이 실세임에도 김춘추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이 그것을 반증하는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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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을 유인하려는 백석의 계책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년에 태어났다. 유신공은 7요(북두성 : 해,달,화,수,목,금,토)의 정기를 타고났으므로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고, 신기하거나 이상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 되던 임신년에 검술을 닦아 화랑 국선이 되었다. 이 때 백석이라는자가 있어 어디서 온지는 모르나 여러 해 동안 낭도 중에 속해 있었다. 낭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일로 밤낮으로 깊이 도모하였은데 백석이 그 도모함을 알고 낭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제가 공과 더불어 몰래 저들을 염탐하고 싶사옵니다. 그런 뒤에 도모하는 거이 어떠실는지요]라 하였다.

낭이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나 고개 위에서 막 쉴 때 두 여자가 나타나 낭을 따라왔다. 골화천(영천)에 이르러 유숙하매,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으므로 공이 세 낭자와 더불어 기쁘게 이야기하였다. 이 때 낭자들이 맛있는 과자를 드리니 낭이 받아먹고 마음으로 서로 허럭하게 되었으므로 그 연모하는 마음을 말하였다. 낭자들이 말하기를,

[공이 말하는 바는 이미 들어 아오니, 원컨대 공은 백석을 떼치고 우리와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십시다. 그러면 다시 참된 마음을 말하겠나이다] 하였다.

이에 함께 들어갔는데, 낭자들이 문득 신의 모습으로 변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내림, 혈화, 골화 등 세 곣의 호국신이요, 지금 적국 사람이 남을 꾀어 끌고 가는데도 낭이 알지 못하기에 우리가 낭을 만류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오]라고 말하면서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엎드려 재배하고 나와 골화관에서 유숙하면서 백석에게 이르기를,

[지금 남의 나라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었구나. 너와 함께 집에 돌아가 가지고 와야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함께 집에 돌아와서 백석을 때려 묶고 그 진상을 물으니 말하되,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인데 우리나라 여러 신하들이 신라의 유신은 곧 우리나라의 점쟁이 추남이라고 말한다. 국경에 거꾸로 흐르는 물이 있어 추남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아뢰되,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므로 그 징조가 이와 같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었다. 대왕은 놀라 괴이쩍게 여기고 왕비는 크게 노하여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 하고, 왕에게 고하되 다시 다른 일로 시험삼아 물어보아 그 말이 맞지 않으면 중형에 처하라고 하였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합 속에 감추고 묻기를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하였다. 아뢰되 틀림없이 쥐인데 그 수가 여덟이라 하였다. 이에 말이 틀린다하여 죽이려고 하니 추남이 맹세하기를내가 죽은 뒤에는 위대한 장수가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하겠다고 하였다.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일곱 마리였으므로 그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늘 밤 대왕은 추남이 신라의 서현공 부인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꿈꾸었다. 이를 여러 신하에게 이야기하니 모두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이 일이 과연 맞았다고 하면서 그것 때문에 나를 보냈으므로 여기에 와서 너를 꾀어내게 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이 백석을 처형하고 백미를 갖추어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니 모두 나타나 흠향하였다.

삼국유사 1권 기이편1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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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당시 고구려에서는 김춘추와 결탁한 김유신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고구려는 원병을 요청온 김춘추는 억류하여 잡아두었고, 김유신은 납치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신라가 고구려에 큰 위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춘추는 이러한 고구려의 정치적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고 정의적인 측면에서 외교를 하려다 납치를 당하였고, 김유신도 적진을 관찰한다는 이유로 백석을 따라가려 했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신라에 새롭게 등장한 김춘추 세력이 아직 국제정세에 민감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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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에 관한 사료

3월에 당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을 삼고 김인문(金仁問)으로 부대총관(副大摠管)을 삼아, 좌요위장군(左饒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30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치게하고, 왕(무열왕)으로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을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응원하게 하였다.

5월 26일에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장에 다다랐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니 전함이 천리에 뻗쳤는데 동쪽을 향하여 순류를 타고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으로 병선 백척을 이끌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게 했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이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 서둘러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여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과 흠춘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 유신 등이 황산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진영을 세 군데 설치하고 기다렸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길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시종들은 힘이 다 빠졌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에게 말하였다.

[신하된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를 모두 갖추게 될 것이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관장)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르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용감하니, 오늘 싸움에서 삼군의 모범이 되리라!]

관칭은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곧바로 진격하였다. 망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으나 상대편 수가 많고 이쪽은 군사가 적으므로 볼모가 되었다.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 앞에 끌려갔다. 계백은 관창의 투구를 벗기고는 아이가 어리고 용감한 것을 아깝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감탄하여 말하였다.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구나. 소년이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라!] 하고는 살려서 돌려보냈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베지 못하고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우니 계백이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손으로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있는 것 같다. 왕실의 일을 위해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고 말하였다.

삼군이 이를 보고 분개하여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 춤상과 상영 등 20여명은 사로 잡혔다.

이날 정방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 이르러 백제 군사를 맞아 크게 깨뜨렸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 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에서 벌어진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뒤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서니, 유신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정방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 합니다]하니,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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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신라로 인한 백제 멸망과정을 보여주는 핵심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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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를 위하여 동햇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절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려 하여 이 절을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쳤는데, 금당 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大王巖)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感恩寺)라 이름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현대(利見臺)라 한 것 같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찬(瑗))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안에 있는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에게 점치게 하니 아뢰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삼한(三韓)을 진호하시고 또 김유신(金庾信) 공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으로 내려와서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성 지키는 보물을 내려 주시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현대로 가시어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 보게 하였다. 산의 형상은 거북의머리와 같은데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대로 아뢰니 왕은 감은사로 가시어 유숙하시었다.

이튿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어둑컴컴해지더니 7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바다에 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왕에게 바치었다. 왕은 이를 맞아 같이 앉으면서 물으셨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이냐?" "비유해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 같은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그것을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았다. 그 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명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올 때는 비가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지므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 삼국유사 2, 기이편, 만파식적 -

참고글 : 통일신라의 전제 왕권기 왕권의 안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호국불교의 성격을 보여주는 만파식적에 대한 유명한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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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의 기원

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신선을 숭상하고,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가려서 원화로 삼았다.

원하는 무리를 모아 그 중에서 인물을 뽑고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와 교정 낭자를 원화로 뽑으니, 모여든 무리가 300-400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한 나머지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로 인하여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뒤 여러 해만에 왕은 국가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가의 덕행 있는 사내를 뽑아 화랑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으니, 화랑 국선의 시작이다. 그래서 기념비를 명주(강원도 강릉)에 세웠다. 이로부터 사람에게 악을 고쳐 선으로 옮기게 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니 오상과 육예와 삼사와 육정이 널리 행하여졌다.

(참고 - 오상 : 인, 의, 예, 지, 신 / 육예 : 예, 악, 사, 서, 어, 수의 6가지 과목 / 삼사 : 태사, 태부, 태보의 3가지 최고 관직 / 육정 : 성신, 양신, 충신, 지신, 정신, 직신의 6가지 바른 신하)

-삼국유사 권 3, 탑상편,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전에 군신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뽑아 쓰려 하였다. 그리하여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뽑아 300여명 이나 되는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두 여인이 서로 어여쁨을 다투고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이로 인해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졌다.

그 뒤 다시 외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부르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의를 닦거나 서로 가악으로 즐겁게 하면서 명산대천을 돌아다녔는데,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 가운데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런 까닭에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현좌와 충신과 양장과 용졸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 라고 하였고,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이른다. 이 교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를 포함한 것으로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의 뜻이며,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 그대로이다> 라고 하였으며,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서는 <귀인의 자제 가운데 어여쁜 자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국인이 모두 높이 섬긴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 -

공(김유신)은 나이 열다서에 화랑이 되어 다이 사람을 기꺼이 복종하였는데, 이를 용화향도라 일컬었다.

- 삼국사기 권 41, 열전 1, 김유신 상 -

참조글 :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성읍국가시대에 걸쳐 우리나라의 촌락 내부에는 청소년조직 같은 인위적인 공동체가 발생하여 차츰 발전해갔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三國志〉·〈후한서 後漢書〉의 동이전에는 삼한사회(三韓社會)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갖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농촌에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두레'라는 말은 본래 지역공동체를 나타내는 칭호였는데, 그 어원은 '들어간다'는 의미의 '들=들이=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입문(入門)·입사(入社)의 뜻인데, 이는 아마도 성읍국가시대 마을의 젊은이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에 들어가 단체활동을 했던 사실에서 연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신라는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연맹왕국을 완성하고, 6세기초에는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함에 따라 지금까지 촌락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청소년조직은 그 독자적인 기능을 중앙정부에 흡수당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태에서 조정에 의해 제정된 것이 원화(源花:또는 原花) 제도였다.

당시 조정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젊은이들을 떼지어 놀게 해놓고 그 행실을 보아 등용하려고 했는데, 그 단장인 원화에는 어여쁜 여성 2명을 뽑았다. 이때 원화로 뽑힌 사람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었는데, 그들은 300명에 달하는 무리를 통솔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 두 여성 사이에 서로 시기하는 일이 생겨 준정이 남모를 강물에 던져 죽인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 단체는 해산되었다. 원화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조정에서는 인재를 양성·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히 6세기 전반기가 되면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 나아가서는 고구려·백제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에 따라 대규모 군대를 편성해야 했다. 이에 진흥왕(眞興王:540~76 재위) 때에 국가는 화랑도를 정식으로 제정했는데, 이때 조정은 화랑도조직을 통해서 당장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화랑도는 결국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출발한 것이었다.

화랑도는 비록 국가에 의해서 조직되었으나 법률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즉 종전의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청소년조직이 전통에 입각하여 거기에 중국 율령(律令)의 수용을 통해서 배운 관청조직의 원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단체였다.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神文王:681~92 재위) 때 최고 학부인 국학(國學)이 정비된 뒤에도 화랑도는 교육적 기능을 지니는 민간의 조직으로 여전히 남았는데, 이는 화랑도 조직상의 특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한 시대에 몇 개의 단체가 존재했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眞平王:579~632 재위)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 여러 단체를 통솔할 책임자로 화주(花主)를 제정한 일도 있었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다. 이 낭도의 수효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많은 경우에는 수백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은 이 집단의 중심 인물인데, 진골 귀족 가운데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이 깊으며 사교성이 풍부한 사람을 뽑았다. 신라시대를 통해서 화랑은 모두 2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화랑의 무리 속에 섞여서 활동하는 승려들은 주로 지적·정신적인 방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 만큼 학문적 교양이 풍부한 승려가 흔히 이에 뽑혔다.

한편 낭도들의 신분이나 자격규정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수도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 출신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화랑도는 위로는 진골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분에 속하는 수도 거주의 청소년들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화랑도 구성원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맺어지고 있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화랑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와 같은 혈연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혈연주의를 초월하여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 일종의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했다. 신라사회에서는 통상 3년을 하나의 서약·수련·의무의 이행기간으로 잡고 있었으므로 화랑도 역시 수련기간이 3년으로 짐작된다. 여러 가지 역사 기록을 종합해보면 화랑은 대개 15~18세의 청소년이다. 화랑집단의 구성원들은 이 기간 동안 경주의 남산을 비롯하여 멀리는 금강산이나 지리산 같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순례하면서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도의를 연마했다. 그런데 그들이 연마한 도의란 흔히 6세기말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5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의 5계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긴 사회윤리 덕목은 충과 신이었다. 이것은 화랑도가 제정된 6세기 중엽부터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엽까지의 200여 년 간이 신라 역사상 드물게 보는 국난기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 특히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는데, 화랑집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화랑도가 즐긴 노래와 춤은 그들의 명승지 순례와 더불어 놀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놀이는 화랑도의 인격 형성, 나아가 그 세계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 때는 신라사회에 불교가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 만큼 화랑도집단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의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화랑을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으로, 낭도를 미륵을 쫓는 무리로 여겼다. 화랑 김유신(金庾信)의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로 불렀다는 역사책의 기록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국난기에 즈음하여 귀족계급이나 민중들은 하루 빨리 이상국가가 건설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아가 화랑도가 자신들의 열망을 실현시켜줄 것으로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랑도는 낭도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합된 위에 조국수호, 나아가서는 이상세계 건설이라는 원대한 공동 목표를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그 구성원간의 인적 결합관계는 매우 긴밀했다. 그들 사이의 우정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함께 죽기를 약속할 정도의 사우(死友)·맹우(盟友) 관계였다.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진흥왕 때에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크게 활기를 띠었다. 화랑도는 이 중대한 시기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 花郞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하여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했다. 화랑도는 당시 무사도(武士道)의 화신이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 및 낭도들의 전기를 보면 그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순국지상주의(殉國至上主義)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전사단체로서 화랑도는 사태가 급할 때는 곧바로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국가의 정규부대인 당(幢)·정(停)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했다. 화랑집단의 무사도가 화랑도 구성원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층에까지 널리 퍼져서 시대정신의 구현에 이바지한 것은 이때였다. 그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화랑도가 국가에 기여한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화랑도가 제정되어 크게 활약하던 시기는 골품제도라고 하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때였는데, 화랑도는 이러한 신분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완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것은 화랑도가 진골귀족을 비롯하여 하급 귀족, 일반 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 소유자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추구하는 공동목표는 같았는데, 그 이유는 집단 자체가 철두철미하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단체였기 때문이다.

삼국통일 후 화랑도의 성격은 차츰 변질되어갔다. 무엇보다도 종전에 목표로 하고 있었던 군사적 과업이 달성됨으로써 전사단으로서 화랑도의 존재의의는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통일 후 오랫동안 안정과 평화를 누리면서 화랑도의 수련은 군사적 목표를 상실한 채 일방적으로 놀이의 성격이 강해졌다. 여기에는 도교(道敎)의 신선사상이 침투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신라 말기의 문인 최치원(崔致遠)이 화랑도의 근본정신은 유교·불교·도교 3교의 융합에서 나온 풍류도(風流道)라고 규정한 것도 이처럼 삼국통일 후 변질된 화랑도에 대한 정의였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와 왕권이 쇠약해지고 귀족세력이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화랑도는 귀족들의 문객(門客) 또는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어갔다. 이처럼 신라의 쇠퇴와 더불어 차츰 변질되어가던 화랑도는 신라의 멸망과 동시에 그 제도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화랑도의 도풍(道風)마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고려시대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에서 그 유풍을 볼 수 있고, 민간의 교육기관인 사학(私學) 12도(徒)가 크게 일어난 것도 화랑도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었음을 반영해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이같은 화랑도의 유풍은 거의 사라지고 오로지 노래와 춤을 즐기는 화랑도의 가무조합적(歌舞組合的) 기능만이 남았다. 그리하여 화랑이라고 하면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를 비롯해 〈훈몽자회 訓蒙字會〉·〈속대전 續大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자무당[巫夫]·창우(倡優)·유녀(遊女)·무동(巫童)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어 마침내 화랑도의 본질적인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었다. 현재 일부의 화랑도 연구자들이 화랑을 신라시대의 남자무당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처럼 조선시대에 변질된 화랑이란 용어를 마치 신라시대의 그것으로 잘못 판단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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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식읍과 늑읍

좌사록관은 문무왕 17년에 두었다. 우사록관은 문무왕 21년에 두었다.

- 삼국사기 4권 38, 잡지 7, 직관 상 -

교령을 내려 내외관의 녹읍을 없애고 해마다 조를 차등있게 하사하는 것을 항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8, 신문왕 9월 정월 -

내외 군관의 월봉을 없애고 녹읍을 다시 지급하였다.

-삼국사기 권 9 신라본기 9, 경덕왕 16년 3월 -

무열왕 4년(657년) 태종대왕이 김인문을 압독주(경산 지역)총관으로 제수하였는데, 이에 장산성을 쌓아 요새로 만드니, 태종이 그 공을 기록하고 식읍 300호를 주었다.

-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김인문 -

문무왕 8년(668) 문무대왕은 인문의 영특한 계략과 용맹한 공로가 특이하다 하여 죽은 대탁각간 박뉴의 식읍 300호를 내렸다.

-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김인문 -

문무왕 8년 김유신에게 태대서발한의 직과 식읍 500호를 제수하고 여장(수레와 지팡이)을 하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43 열전 3, 김유신 하 -

참조글 : 식읍은 공신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해당 지역의 지역 지배를 인정한 것입니다. 녹읍 역시 지역지배적 성격은 있었으나, 국가가 감시와 규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규제책을 마련하면서 될 수 있으면, 면적 단위의 성격으로 바꾸려고 했던 부분들이 보입니다. 최근에는 녹읍을 <수조권적인 지배>형태로 보려는 관점이 있습니다. 녹읍은 국가가 하사한 땅이되, 식읍처럼 산천을 경계로 한 지역단위로 하사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일정 지역을 하사한 것이라는 견해이죠.

이러한 토지에 대한 통제가 극대화 된 것이 전제 왕권이 성립된 신문왕대 <관료전 지급 후, 녹읍 폐지>라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귀족들의 반발로 경덕왕 대 다시 녹읍이 부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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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과 백석의 일화

유신공(庾信公)은 진평왕(眞平王) 17년인 을묘년에 출생하였는데, 7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고 또 신기하거나 이상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 되던 임신년(壬申年)에 검술을 닦아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 때 백석(白石)이라는 자가 있어 어디서 온 지도 모르나 여러해 동안 낭도 중에 속해 있었다. 낭(郎)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일로 밤낮으로 깊이 도모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도모함을 알고 낭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제가 공과 더불어 몰래 저들을 먼저 염탐하고 싶사옵니다. 그런 연후에 도모하는 것이 어떠실른지요."라 하였다.

낭이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나서 고개 위에서 막 쉬고 있을 때 두 여자가 나타나 낭을 따라 왔다.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유숙하매,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으므로 공이 세 낭자와 더불어 기쁘게 이야기하였다. 이 때 낭자들이 맛있는 과자를 드리니 낭이 받아 먹고 마음으로 서로 허락하게 되었으므로 그 연모하는 마음을 말하였다. 낭자들이 말하기를, "공이 말하는 바는 이미 들어 알고 있사오니, 원컨대 공은 백석을 떼치고 우리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십시다. 그러면 다시 참된 마음을 말하겠나이다." 하였다. 이에 함께 들어갔는데 낭자들이 문득 신(神)의 모습으로 변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내림(奈林)· 혈례(穴禮)· 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이요. 지금 적국 사람이 낭을 꾀어 끌고 가는 것인데도 낭이 알지 못하고 길을 가기에 우리가 낭을 만류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오."라 하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엎드려 재배하고 나와 골화관(骨火館)에서 유숙하면서 백석에게 이르기를, "지금 남의 나라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었구나. 너와 함께 집에 돌아가 가지고 와야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함께 집에 돌아와서 백석을 때려 묶고 그 진상을 물으니 말하되,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인데 우리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신라의 유신(庾信)은 곧 우리나라의 점쟁이 추남(楸南)이라고 말한다. 국경에 거꾸로 흐르는 물이 있어 그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였더니 아뢰되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므로 그 징조가 이와 같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었다. 대왕은 놀라 괴이히 여기고 왕비는 크게 노하여 이것은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 하고 왕에게 고하되 다시 다른 일로 시험삼아 물어보아 그 말이 맞지 않으면 중형에 처하라고 하였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합(盒) 속에 감추고 묻기를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하였다. 아뢰되 그것은 틀림없이 쥐인데 그 수가 여덟이라 하였다. 이에 말이 틀린다하여 장차 죽이려고 하니 추남이 맹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위대한 장수가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하겠다고 하였다.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일곱 마리였으므로 그제서야 그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 밤에 대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의 서현공(舒玄公)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러 신하에게 이야기하니 모두 가로되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이 일이 과연 맞았다고 하면서 그것 때문에 나를 보냈으므로 여기에 와서 너를 꾀어내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백석을 처형하고 백미(百味)를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내니 모두 나타나 흠향하였다.

- 삼국유사 권 1, 기이편, 김유신 -

사료해석 : 김유신 장군에 대한 유명한 일화입니다. 백석이 김유신을 죽이려 하였을 정도로 김유신이 견제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며, 고구려에서는 이전 장수왕 때 승려 도림을 백제에 보낸 것부터 시작하여 많은 암살자들을 타국에 보냈음을 알 수 있네요. 고구려는 첩보전에 능하였고, 암살 등의 계책을 많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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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병합기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국주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장남 노종(奴宗), 둘째 덕무(武德), 세째 무력(武力)의 세 아들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오니, 왕은 이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상등의 지위를 주고 그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 아들 무력은 조정에 벼슬하여 각간에까지 이르렀다.  

- 삼국유사 -

자료 참조 : 법흥왕 대에 금관가야가 병합되는데, 이 사료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신라는 금관가야를 병합하면서 그 일족을 흡수한 사실입니다. 왕이 이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지위를 준다는 것은, 가야국에 대한 예우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더 연구되어야 알겠지만, 신라 통일기에 금관가야계 김씨인 김유신 등이 신라 공신으로 성장하였다가, 중대 이후 골품제의 한계 속에서 다시 몰락하게 되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2. 금관가야국의 아들에게 이들에게 식읍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식읍이란 공신들에게 하사한 사유지 성격을 갖습니다. 이 식읍이 신라 중대 이후에 형식적인 봉호 형태로 바뀌는데, 이 때까지는 실제로 식읍을 준 것 같습니다. 또 아들이 각간에 이른다는 것으로 보아 진골귀족 대우를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 본국을 식읍으로 준다는 것으로 신라 시대 제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점령지를 이전 촌주나 본국주에게 다스리게 하였다는 것은 신라시대 상수리 제도와 고려시대의 기인 제도와 연결되는 측면이 있습니다.(물론 상수리제도는 본인이, 기인제도는 아들이 중앙과의 연락 담당 및 인질화 된다는 점은 다르죠.) 초기에는 상수리제도나 기인제도 모두 인질적 성격보다 정권 연합적 성격이 짙다는 것과 이 사료가 약간의 연결성이 있는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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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통삼한의식의 형성

왕은 군신과 더불어 의논한 후에 당의 조칙에 답하였다.

생각건대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덧이 있었고, 더욱이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일통삼한을 하였으니, 그 공적을 이룩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12년조-

사료해석 : 통일신라시기부터 진정한 민족의 형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통일신라시대에 <일통삼한>의식이 싹뜨기 때문입니다. 일통삼한이란, 이전 3국이 각각 분립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가진 것과 대비되어지며 드디어 우리 민족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라는 의식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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