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사상의 이해 - 장자 3

장자는 누구인가?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아니, 난세는 엄청난 철학자들도 만든다구....

 

장자가 태어난 시기가 기원전 4세기라고 말했지? 이 무렵은 중국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다는 '전국시대'가 시작된 난세였어.

(기원전 4세기) 송나라의 위치를 보면 안쓰럽다.

 

자, 그럼 장자가 태어난 송나라의 위치를 위 지도로 살펴볼까? 가정환경... 아니, 국가 환경을 좀 알아야 장자가 왜 그렇게 철학에 뛰어났는지 알 수 있을테니 말야.

 

당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였어. 춘추전국이란 용어는 학자들이 만든 저서에서 비롯된거야.

 

춘추란 말은 공자가 엮은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에서 비롯된 말이지. 그럼 전국이란? 훗날 한나라의 유향이 쓴 '전국책'이란 역사서가 있는데, 전국시대에는 각종 '책략'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시대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그럼 왜 굳이 춘추랑, 전국을 나눠둘까?

 

초기 '춘추시대'는 그래도 의리가 좀 있었어. 춘추는 봄, 가을을 뜻하지? 시대가 흘러가면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람들이 살아가던 시대야. 자기가 강하다고 길가는 넘 아무나 두둘겨 패면 그건 깡패잖아?

 

강한 나라도 때로는 약한 나라를 보호해주고, 정통왕조인 주왕실을 보호하면서 자신이 훌륭하다는 '인격'을 자랑하던 시대가 춘추 시대야. 어려운 말로,지지자들을 모아서 함께 세상을 보호한다는 '혈맹'의 시대라고도 하지.

 

근데, 장자가 태어난 전국 시대에는 사정이 좀 달라졌어. 깡패들도 지키는 의리와 기강이 무너졌거든. 당시 가장 강대국이 진나라였는데, 진나라를 모시던 3명의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어. 쉽게 말해 '형님'을 모시던 넘버 쓰리(3)들이 지들이 두목 해보겠다고 배신을 한거지.

 

즉,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가 형님국가인 진나라를 공격해서 국가를 일으켰는데, 이 때부터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된거야. 형님도 사시미칼로 찔러 죽이는 세상에 어떻게 남들을 믿겠어?

 

이제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테고, 약한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략과 야비함을 총동원해서 살아남아야지. 이 때부터를 전국시대라고 불러. 전국시대를 상징하는 용어는 '혈맹'이 아니라 '군웅'과 같은 단어야. 힘쎈 놈의 시대라는 뜻이지. 특히 7명의 깡패가 이끄는 강대국을 전국 7웅이라고 불렀어.

 

하지만, 우리가 중국 역사를 그리 깊게 알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보통 일반인들은 그냥 '춘추전국시대'라고 묶어서 불러도 돼. 지금은 장자를 좀 알아야 하니깐 자세히 설명한 것 뿐이야.

 

 

자자, 이제 내용 좀 알았으니 지도 다시 보자. 장자가 태어난 송나라의 위치는?

 

와우... 그 전쟁의 한가운데 위치한 동네국가야. 패자인 진나라 및 제후국인 한, 위, 조가 옆에 붙어있고  남방의 패자인 월나라, 초나라가 송나라를 감싸고 있잖아. 즉, 7대 깡패조직의 딱 경계선에 송-나이트클럽 하나가 조그맣게 버티고 있는 거랑 같아. 그 나이트는? 뭐, 금방 접수 당하겠지.... ㅋㅋㅋ

 

결국, 백년이 지난 뒤 약소국인 송나라는 강대국들에게 허구헌날 핍박 당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거지.

(기원전 3세기) 송나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장자는 약소국인 송나라에서도 조그마한 고을인 칠원의 담당자였어. 본인은 똑똑하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미래의 운명은 뻔했던거지.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을 한다는 건, 조만간 맞아죽거나, 전쟁통에 죽거나, 백성 보호한다면서 죽거나.... 어.. 어찌되었던... '죽거나' 뿐이거든.

 

송나라에는 사전지지(四戰之地)말이 있었어. 사방이 적 뿐이라서 버틸 수 없다는 거지. 송나라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털어서 가장 전쟁이 많았던 지역이고, 기아와 유망이 끊이지 않은 나라였지. 중국에서는 송나라 사람은 '바보'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이야.

 

사기의 일화를 하나 들어볼까? 어느 날, 초나라 위왕이 장자에게 재상 자리를 줄 테니 송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망명오라고 제의를 했지.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말했어.

 

제사에 길러질 소가 있는데,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이고, 귀하게 길러지지. 그런데 마지막 죽는 날은 비단 옷을 입혀서 묘지에 보내는 거야. 그 때가 되어서 소는 평범한 돼지를 부러워하다가 죽게 된다는 거야.

 

장자는 소에 비유해서 이렇게 말했어.

 

돼지처럼 더러운 오물 속에서 뒹굴지언정, 나라일에 얽매이는 것은 싫다. 벼슬을 하느니 내 뜻대로 살겠다.... 뭐 이런 말이었지.

 

결국 장자의 철학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 탄생한거야.

 

어떻게 하면 끊이지 않는 전쟁, 모욕과 굴욕, 약자의 비애, 굶어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인간이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장자 철학의 출발점이었어.

 

그 결론은 간단해. 공자, 맹자, 한비자 등등 철학자들이 윤리나 규범, 법, 제도 등을 통해 세상의 상식과 규칙을 논했다면, 장자는 이 세속적인 가치를 우스꽝스러운 해학으로 비웃어 버리는거야.

 

아무리 근엄한 성인도 그가 우화로 표현하면 광대가 되어 버렸지. 절대 미인은 해골바가지와 동급이 되었고, 고상한 철학은 똥과 동급이 되는 거지. 그것은 단순히 증오에 차서 막 던지는 풍자가 아니었어. 상식적인 사고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오만하고 치졸한지를 정확히 꿰뚫고 핵심을 풍자하는 거지.

 

그 풍자는 험난한 시대를 살았던 장자가 인간의 추한 모습, 인간의 한계, 인간의 이기심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거야. 그럼 이제 '장자'라는 책의 유명한 구절들을 통해 장자 철학의 실제 모습을 한번 살펴볼까?

 

다음 편부터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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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사상의 이해 - 장자 1

 

'장자' 들어가기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어떤 이데올로기도, 윤리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소국들의 입장이었다. 고대 철학은 그 경계선에서 출발한다.

 

사상사의 출발점에는 공통적인 현상 한가지가 있어. 그게 뭐냐구?

 

그것은 철학의 출발점이 '도시국가'가 출현하는 '청동기' 시대라는 것이지.

 

먼저 석가모니!!!

 

석가는 인도의 공화정이었던 소왕국의 왕자 출신으로서 소국들의 대립과 거대 왕국과의 마찰이 있던 브라만 시대의 인물이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인도는 제국을 꿈꾸는 브라만 집단과 작은 소국을 꿈꾸는 공화정 집단들이 대립하고 있었지. 스타워즈의 제국과 공화국의 대립처럼 말야.

 

그런데 브라만이든, 공화정 집단이든 웬지 신라시대 귀족이랑 화랑들 같았어. 골품같은 고정적 신분이 있었지. 브라만교에는 카스트 제도 있는거 알지? 공화정에도 신라의 화백회의처럼 만장일치 귀족 회의가 있었지.

 

다음 공자!!!

 

공자와 장자, 한비자와 같은 사상가들 역시 춘추전국시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공동된 고민을 했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사는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 될 수 있을까? 밥먹고 그 고민만 했는지 후대에 남긴 어록도 무지 많아.

 

그런데, 그 정의로움을 법에서 찾는지, 도덕에서 찾는지, 자연에서 찾는지, 공리에서 찾는지는 각자 답이 달랐어. 도시국가가 많아서 밥먹고 전쟁하고, 사람 죽고, 또 전쟁하고, 통일한다고 설치고.... 

 

이런 지옥같은 무법천지인 세상을 법으로 다스릴지, 윤리로 다스릴지, 자연에서 답을 찾을지는 생각하는 사람맘 아니겠어? 그러니 철학이 발전하는거지... 철학과 과학기술은 전쟁의 참혹함에 비례해서 팍팍~ 발전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냐.

 

 

 

다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도시국가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인물이었어. 단지, 그리스 철학의 융성은 다른 지역과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지. 그건 또 뭐냐구?

 

다른 지역의 철학자들이 난세를 걱정했다면,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다른 소국을 점령하면서 쌓인 부를 활용하면서 철학이 성장했다는 거야.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어. 정치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등 신분이 있고 역할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고. 그래서 아테네의 고귀한 신분들은 식민지 소국 노예와 상인들 덕에 철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걸 철인정치론이라고 하는데, 이러니 있는 넘들이 모두 싸잡아서 함께 욕먹는거지, 뭐... 철학자가 이러는데, 다른 지배층은 오죽하겠어?

 

 

 

 

그럼 플라톤의 제자는 누구? 그 분도 같은 말을 했겠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나고, 전리품인 노예가 끊이기 않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맘놓고 철학을 고민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야. 현자인 아리스토 아저씨도 노예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니,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국가관이 뭔지 알겠지?

 

자, 그럼 그 제자도 한번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인거 알지?

 

매듭 푸는 문제 던져주면 칼로 매듭을 잘라버린다는 그 월드헤비급 챔피언.... 세계 정복왕 말야. 알렉산더는 정복을 거듭하면서 정복지를 서로 연결하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수십개를 만들었어. 그리고 그 도시도시를 거쳐서 희귀한 동양의 물품들이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도착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부수고, 자르고, 해부하고... 또... 음.... 독극물도 넣어보고 하면서 과학을 발전시켰던 거야. 그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건 헌신적인(?) 스승님의 지원이 있었던 거지. 지금이라면 독일이나 일본의 생체실험이라고 난리가 났겠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과학발전 취급을 했던 거지, 뭐....

 

말했잖아... 난세에 철학과 과학이 발전한다고...

 

 

 

 

자, 이제 청동기 소국 시대에 철학들이 융성했던 것인지, 그 이유 중 중요한 몇가지만 간추려서 정리해 볼까?

 

첫째, 문자라는 것이 존재했던 시기와 청동기 후기가 일치한다는 점이 중요해.

 

문자가 존재하기 이 전에도 수많은 철학이 존재했겠지만, 그 기록이 명확하지가 않잖아? 내가 열살 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적이 있으면 뭐해? 커서 기억도 안나고 기록해놓은 것도 없는데.... 같은 원리야.

 

초기의 상형문자가 있긴 했어. 그런데, 그 수준이 초기 문자라서 초등학생 일기 수준이야. 알지? 아침에 밥먹었다... 친구랑 싸웠다... 엄마가 미워한다... 아빠가 사랑한다.... 선생님이 존경스럽다...

 

 

 

 

당연히 기록을 남기는 것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생각은 부족했지. 그리고 그 정신없는 기록을 당대 혹은 후대인들이 해석하는 것도 어려웠어.

 

그럼, 철학이 되지 못한 초등 7세 수준의 기록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초딩들이 사용하는 글쓰기 방법이 있잖아. 엄마한테 혼났는데, 그래서, 아빠한테 갔는데, 그랬더니, 아빠가 칭찬해주는데....

 

그거야. 철학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접속사를 중심으로 전승되거나 이야기로 엮기게 되지, 그래서 그 이야기들이 뼈대를 잡고 스토리가 되면 신화로 정리되는 거야.

 

홍수가 났어. 그래서.... 다 죽어가... 그래서... 신에게 빌었어... 그랬더니? 다 죽지 말라고 방주 만들어 주더라....

 

뭐 이런 이야기가 성립되는 거지. 그래서 홍수 설화는 수메르 신화, 페르시아 신화, 구약성경 등 같은 지역의 모든 설화에 비슷하게 다 등장하잖아. 접속사만 바꿔서 말이야.... 그래서가 그러므로로 바뀌고, 짜라투스트라가 노아로 이름만 바뀌는 정도?

 

 

둘째, 청동기 시대의 국가가 소국가라는 것에 주목해야해. 

 

거대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의 '철학' 만을 인정하지. 그것이 철학이든 종교든 국가에게 유리하다면 그거 하나면 된거야. 별로 도움되지 않은 민중철학이나, 윤리철학이 국가철학에 도전한다면? 그건 이단, 반역, 마녀, 빨갱이... 등등의 수식어를 붙여서 다 처단해야지, 뭐....  

 

그래서 거대한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게 되는 거야.

 

 

 

하지만 다양한 소국가들이 등장해서 자웅을 겨루는 시기에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해야 할까? 아니지...  당장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고,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국가의 생존에 유익하다면 어떤 철학과 사상이라도 스카웃 해와야지.

 

당장 코리안 시리즈 우승해야 하는데, 이종범이 광주출신이라고 삼성이 안데려가고, 이승협이 대구출신이라고 기아가 버려야 하나? 돈이든, 명예든, 지도자 자리 하나 던져주든.... 무조건 데려와서 우승하고 나중에 생각해야 할거 아냐? 삼성이 김응룡, 선동열.... 데려가서 우승도 몇번하고, 이제는 지역 출신 감독 쓰잖아.

 

그런데, 팬들은 그렇게 생각 안해. 감히, 이승엽이 광주가서 기아 감독한다고 하면?

 

국민타자고 뭐고 광주에서는 난리날껄? 광주가 가진 명분과 역사가 있잖아...

 

 

 

철학 역시, 그 두가지를 다루고 있어. 소국이 살기 위해 누구든 스카웃하고 부국강병을 한다는 국가관을 지켜야 하면서도, 국민정서와 명분을 따지면서 윤리의식을 생각하는 것.... 그거야.

 

장자를 제일 먼저 소개하는 이유도 그거야. 그의 철학이 실리과 명분, 즉 국가관과 윤리의식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거든. 

 

셋째, 청동기 중기 이후 대대적인 정복 전쟁과 연관이 있지.

 

청동기 시대쯤 되면 생산력이 늘어나서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굶어죽지는 않을 수준이 되었어. 뭐 혹시나 굻어 죽을 것 같으면 무기 들고 나가서 약탈하면 되잖아...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겼어. 그러자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이기심도 점점 증가했지.

 

전쟁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욕심이 생명보다 소중한가라는 근본적이면서도 당연한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거야. 

 

 

 

 

그러자 고대 철학자들도 두 흐름으로 나눠졌지.

 

죽이고 빼앗아서 국가가 잘먹고 잘살아야 백성이 잘산다는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일단 백성이 안죽어야 농사를 짓던 세금을 내던 할테니 윤리문제부터 집중하자는 사람들도 등장했어. 누군가는 이 두가지를 함께 생각했고, 누군가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도 했지.

 

부국강병을 이루는 방법에서 학파가 여러개로 나눠졌고,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원리에 따라 여러 분파가 생겨서, 수많은 사상들이 '내가 옳소' 라면서 싸우게 되는 거야. 그래서 혼란기에는 철학의 전성기가 열리는 것이지.

 

자, 생각해보자.

 

21세기는 국가관이 윤리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 사회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약소국을 침략해. 그런데 솔직하지 못하지. 

 

침략 명분이 세계평화나 종교윤리, 나쁜 피 제거와 같은 따분한 이데올로기 이야기거든. 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야? 이쁜 수영복 입었다고 자랑질 한 뒤에 옆의 친구 탈락시키고는, 세계평화를 위해 살겠다고 30년째 외치는?

 

그 뿐인가?

 

에너지를 얻고 문명개발에 박차를 가하려는 국가의 노력은 자국의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자연의 질서를 역행하고 있어.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 가장 심한 곳이 가장 개발이 화려(?)했던 미국 남부잖아. 툭하면 몇백명 이상 사망자가 나오는 허리캐인이 속출하는... 거기에 요즘은 도시 개발의 후휴증으로 도심 곳곳에 발생하는 싱크홀까지 3종 세트가 다 등장했어.

 

도시에 수도관, 가스 등 매설하느라 대부분의 지하가 텅 비어있는 공간이 많아. 거기에 균열이 가면 갑자기 거대한 홀이 생기면서 지하 30미터 짜리 구멍이 뻥 뚫리는 거지.... 잠자다가 갑자기 30미터 아래로 쏙~ 떨어져서 실종되는 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잖아.

 

 

 

 

인간이 자연을 몸살나게 하고 있었지만, 자연은 조용히 기다렸지. 이제 인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거야.

 

장자는 이렇게 말했어.

 

인류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인 '개발'은 결국 대자연의 복수를 불러온다고...생존은 개발이 아니라 순응에서 시작한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과 싸우고 남의 것을 강탈하려는 대립은 결국 질서의 파괴를 가져오고 모두를 파멸로 이끌 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대립보다는 '상생'을 찾아야 하고, 하나의 길만 달리려는 '획일성' 보다는 자연 속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함'을 인정해야만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있는 거야. 

 

그걸 모르는 어리석인 인간들의 행동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되는 거야.

 

현대 사회의 환경파괴와 생태계 붕괴, 인간 존엄성의 파괴는 결국 환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장자님, 아니 장느님이 말씀하신거지. 장자가 21세기에도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야. 

 

 

 

이제 장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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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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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3화. 정토종 : 정통 미륵에서 벗어난 아미타 부처

1. 복잡한 인도 철학을 벗어나 민중의 신앙으로...

자,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으로 전파된 대승불교 철학을 살펴보았다. 위진시대의 불교 수준은 노자 사상으로 부처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 수준이었다. 그러나, 인도 대승 불교의 핵심사상이었던 <공>, <반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불교와 도교는 선후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수, 당의 통일국가에서는 여러 종파 불교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에서는 많은 종파의 이념을 하나로 묶으려는 화엄종이 성행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은 모두 <공> 사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즉, 인도 불교의 참뜻을 알기 위해 철학적으로 불교를 접근한 것이다. 이렇게 <공>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적으로 접근한 종파들을 묶어 <교종>이라고 한다.

<교종>은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인도 불교의 참 뜻을 알았지만, 그 복잡한 <공> 사상을 민중들보고 어떻게 이해하라는 것인가? 책 한권 읽을 돈도 없고, 농사짓기 바빠서 경전에 관심을 둘 시간도 없는 이들에게 <교종>의 심오한 철학은 먼 나라 불교였다.

반면에 쉬운 교리와 민간 신앙을 융합하여 백성들에게 쉽게 다가서려고 노력한 종파들이 있었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정토종과 선종이 그것이다. 이 종교들은 어떻게 생겨나 민중속으로 파고 들었는지 볼까나?

2. 정토종에서 만날 수 있는 부처 - 아미타

원래 <정토, 선> 등의 용어는 대승불교의 수행방법일 뿐이었다. <선>이란 말 자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참선>을 뜻한다. <정토>란 <서방극락세계>를 뜻하는 말로 <정토>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강조한 용어였다.

<교종>이란, 정통 교리인 <공> 사상을 체계적으로 접근한 종파를 말한다. 반면 <선종>은 체계적인 <수양방법>을 우선시한 종파를 말한다.

정토종은 넓은 의미에서는 선종이지만, 실제 다른 선종과 수양체계가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정토사상>을 가진 종파이다. 오늘은 정토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정토종은 정토삼부경이라 불리는 3권의 경전에서 출발한다.

<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

이 3권의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사상은 <아미타> 사상이다. 무량수경은 아미타 부처가 되기 전 인간이었던 법장 스님이 아미타불이 되는 과정을 쓴 <드라마>이다. <아미타경>은 아미타불의 세계인 서방극락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하고, 민중들이 아미타 세계로 가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관무수경>은 부처도 아미타 세계인 <정토>을 알고 있었으며, 비구니들에게 수행방법을 가르쳐주었다는 내용의 책이다.

그럼 이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아미타>는 누구인가? 아미타는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던 인도의 보살승 <법장>을 말한다. 법장은 부처가 되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선행을 시작하였다. 부처가 되기 위해 세우는 서원을 <본원>이라 한다.

법장은 많은 중생들에게 착한 일을 해야 부처가 될 수 있었으므로, 48살때까지 48개의 서원을 세웠다. 그 서원들이 곧 서방극락정토의 설계도가 되어 훗날, 아미타 세계의 10만억 국토가 된 것이다. 이 <서방극락세계>는 고통도 번뇌도 없다. 오로지 즐거움과 진리만 있을 뿐이다. 누구든 이 곳에 초대 받으면 끝없는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다. 기독교로 따지면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이랄까?

<아미타>란 부처의 이름도 <영원한 구원>을 뜻한다. 아미타(阿彌陀)는 원래 아미타바(Amitabha)라는 인도어의 발음으로 <무한>이란 뜻이다. 발음으로는 아미타로 번역하지만, 의미로 해석하면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 된다. 무량수불이란, <무한 대의 수명을 가진 자>, 무한광불은 <무한 대의 밝음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자, 법장스님이 깨달음을 얻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그가 세운 낙원이 바로 <극락정토>이다. 그 극락정토는 서쪽으로 수천만의 불국토들을 넘어야 겨우 보이기 때문에 서방극락정토라고도 한다. 그런데, 극락정토는 하늘에 있는 도솔천과 달리 지상에 있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수양을 했고, 지금은 미륵부처가 설법을 하고 있다는 <도솔천>은 어디일까? 불교에서는 우주의 중심을 <수미산>으로 보고 있다. 그 수미산에서 하늘로 12km 정도를 가면 도솔천이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는 법장스님이 48개의 서원을 세운 그 곳에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 십만억불의 세울을 지나가면 보이는 것이다. 어짜피 살아 생전에 갈 수 없는 것은 똑같다.

그러나 죽은 뒤 극락에 가는 방법은 <도솔천>에 가는 방법보다 훨씬 쉽다. <도솔천>은 <고급 보살>들이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즉, <공>이 무엇인지 알고, 선행을 많이 한 선택된 자들이 간다는 뜻이다. 도솔천은 확실히 <교종>적이다. 그러나, <정토>는 누구나 쉬운 방법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기본 인성이 있기에 마음 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극락에 가는 것을 <왕생>한다고 말하는데, 왕생(往生)이란, <가서 태어난다>는 뜻이다. 즉, 가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죽은 뒤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 가장 쉽게 가는 방법은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염불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10번을 외치는 것이다.

3. 말법의 시대를 예고한 정토종의 종말 사상

정토종이 처음 등장한 것은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였다. 남북조 시기는 <공> 사상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종파 교단이 성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반면, 백성들은 오랜 전쟁으로 지쳐 쉽고 빠르게 <천국>가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혼란기에 민중들이 <천국>가는 방법으로 숭배했던 것은 <도가>였다. 도교는 민중들 사이에 뿌리가 깊었다. 후한말 <황건적의 난>은 도교의 신선술을 숭배했던 <오두미교>의 민중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전쟁에 지쳐 속세를 떠나고자 했던 청담 사상가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도 <도가> 이야기였다. 신비한 <도사> 이야기는 민중들의 시름을 달래주며,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주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도사들이 천살까지 수명을 누리며, 세상을 유유자적하며 산다는 이야기였다. 천살까지 수양을 마친 도사는 하늘로 올라가 구름과 학을 벗삼아 자유를 누린다.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가?

남북조 시기, 또 하나 유행했던 사상은 <종말사상>이었다. 중국의 전통 종말사상엔 추연의 <음양오행가> 사상이 들어있다. 세상은 화,목,금,수,토의 오행이 돌고 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상극이 있다. 화(불)은 수(물)에 의해 제압당한다. 그러나, 수(물)은 토(흙)에 의해 제압당한다. 서로가 돌고 돌면서 상극을 이룬다.

그것을 정치에 도입하면? 앞 왕조에 상극인 새로운 사상의 왕조가 탄생한다. 그러나 왕조의 종말이 되면 또 다시 상극인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다. 세상은 돌고 돌며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음양오행에 의한 종말 사상은 한계가 있다. 우주가 계속 돌고 돈다는 원리를 지향히기 때문에, 영원한 종말과 평화는 오지 않는 것이다. 이 한계점을 메운 것이 도교와 불교이다. 도교에서는 왕조가 몰락하고 민중의 세상이 오면 도법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한다.

남북조의 혼란기, 불교는 종말 사상을 <말법사상>으로 체계화시킨다. 말법사상은 불가의 역사를 3단계로 나눠 인간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불법이 체계적으로 잡혀가는 시기를 <정법의 시기>, 불법이 유지되는 시기를 <상법의 시기>, 불법이 사라지는 시기를 <말법의 시기>로 분류한다. 원래 3법의 시기를 나눈 것은 철학을 논의하던 <교종>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토종은 이 말법 사상을 확대하여 <불교식 종말 사상>으로 바꿔 버린다.

자 그럼 정토종의 종말사상을 한 번 볼까?

말법시대는 불법이 사리지고 무법천지가 되는 세상을 말한다. 무법천지의 세상에 무슨 경전이니, 말씀을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필요한 것은 <믿음> 뿐이다. 믿음의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의 마음에 부처가 있고, 인간이 부처가 되겠다는 믿음만 있다면, 불법이 있고 없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믿음>이 있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믿음이 없는 자는 불법이 사라지면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럼 누구에 대한 믿음을 보여야 할 것인가? 바로 <아미타>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태어나, 인간을 위해 살다가, 인간을 위해 지상 세계에 천국을 만든 이가 아미타이다. 멀리 있는 천국, 어려운 경전을 공부해야 갈 수 있는 천국이 아니라 모든 <인간 부처>들을 위해 10억만 국토를 준비한 아늑한 천국이 지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극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려운 사상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명호를 계속 되새기면서 극락을 꿈꾸는 것이다. 아미타의 후배가 관세음이기 때문에, 아미타 신앙과 아미타를 도와 지상에 온 관세음도 믿음의 대상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것이 민중들을 끌어모은 정토종의 가볍고도 명쾌한 불교 진리인 것이다.

4. 미륵과 미타는 뭐가 다를까?

불가에서는 미륵이 인도의 4세기 경에 실존한 인물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증거는 없다.) 미륵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유식철학의 시조이다. 전통 대승 철학에서는 공사상과, 반야(지혜) 사상을 가장 중요시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철학을 <공부>하라는 것이다.

미륵은 그 철학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상과 하늘 사이에 있는 도솔천에서 보살로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미래의 부처이다. 미륵의 제자인 무착은 삼매경에 빠져들어 미륵을 만났고, 그 때 미륵보살은 훗날 민중을 위해 내려올 것이란 믿음을 말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올 것이다.

원래 세상에 내려와 정의(정법)을 실현하고 민중을 구원할 패왕은 전륜성왕이다. 그 때 미륵은 성왕의 오른팔로서 어려운 세상의 민중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즉, 미륵은 <구원자>인 것이다. 기독교로 따지면, 예수와 같은 존재랄까?

미륵 신앙은 백성들에게 하늘에 있는 <절대자>를 떠올리게 했다. 백성들은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포기했다.

미륵 신앙은 왕과 귀족들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국왕이 전륜 성왕이라면, 신하인 귀족들은 미륵이다. 왕은 곧 부처요. 왕에 대한 충성이 곧 <구원>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특히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는 수많은 국가에 국왕이 있었고, 불교의 미륵 신앙은 왕권 강화에 이용되기도 했다. 불교가 본 뜻을 주장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면 국왕은 불교를 금지시키는 <폐불>을 일삼았다. 불교, 도교, 유교라는 종교의 세력 균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불교의 심오한 참뜻이 이해되면서 미륵신앙의 정치적 이용도 줄어들었다. 대신에 지배층이 직접 하늘로 올라간다는 새로운 미륵 신앙이 생겨나기도 한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미륵이 구원하러 내려온다는 사상을 <하생 미륵신앙>이라고 해보자. 통일국가인 수, 당 시기에 미륵이 되서 올라간다는 사상을 <상생 미륵신앙>이라고 하면 되겠다.

<상생 미륵신앙>은 불교의 참 뜻을 이해하면서 생긴 기이한 현상이다. 지배층은 스스로가 미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생의 보살>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마음을 닦고 수양을 하면 훗날 미륵이 되어 <도솔천>에 올라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배층>이 올라간다는 점이다. 일반 불신도들은 귀족들이 <보살 출신>이라고 믿어야 했다. 어찌되었던 <교종>의 철학은 지배층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민중들이 직접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부처가 될 방법까지 상세히 알려준 것이 바로 <미타신앙>이었다.

귀족들처럼 경전을 읽을 시간도 없고, 심오한 불교 철학이 뭔지도 모른다. 그냥 <마음> 자체로 부처가 될 수 있으니 <나미아미타불>을 외치면 되는 것이다.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을 10번 외우라>는 구절이 있다. 이 10번의 정성스런 외침이 반복되면 <극락정토>의 문이 열린다. 아미타는 10억단위의 극락을 준비해놓고 모든 민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요즘으로 따지면, <우리 행복하게 잘 살께요>만 외치면 모든 국민에게 아파트 무료 분양을 해주는 것과 같다.

마음을 염(念)이라고 한다.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 하며, 염불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를 세는 도구를 염주(念珠)라고 한다.

<교종>의 핵심이 경전이라면, 정토종 미타신앙의 핵심은 염불과 염주이다.

염불을 대중화한 사람은 정토종을 종파로 일으킨 수나라의 도작이다. 도작은 <아미타불>을 얼마나 말했는지 콩을 세면서 잊지 않도록 했다. 나중에는 염주를 만들어 염불의 횟수를 세면서 마음을 가다듬도록 했다. 원래, 염주는 초기 불교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도구이다. 초기 대승불교에서도 마음의 번뇌를 잊는 수양법으로 염주알을 세도록 했으나, 본격적으로 염주를 중요시 한 것은 정토종부터이다.

5. 정토종을 이끌어 간 사람들.

중국에서 미타신앙을 이끌어간 사람들을 알아보자.

본격적으로 미륵, 미타 신앙이 알려진 것은 위진시대 <도안>부터이다. 도안 이야기는 8장에서 다루었다. 도안은 노자와 부처를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불교 수준을 한심하게 여기며, <미륵 신앙>을 강조하였다.

중국인들은 미륵신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안은 <노장사상>에 있는 <제천사상>을 <제석천>과 결부시켜 미륵 신앙을 강조하였다. 격의불교와 종파불교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도안의 제자인 혜원은 미타신앙으로 돌아선다. 미륵이 머무는 근거지인 <도솔천>보다 <서방극락정토>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백련사라는 염불 결사 단체를 만들어 아미타불 앞에서 염불을 외웠다.

그러나 혜원의 백련사는 그들만의 염불이었다. 아미타 신앙의 사상적 체계는 남북조 북위의 <담란>에서 시작된다. 정토종의 시조인 담란은 염불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스스로 노력해서 번뇌가 없는 무아 상태에 이르고, 그 상태에서 아미타불을 외치면 훗날 극락정토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 초기 도작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정토에 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사회에서 백성들을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종파>가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작의 생각을 정리한 사람이 제자인 선도이다. 선도는 염불을 외우고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만들었다. 극락정토에 가기 위해 미타불에게 공손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정토종의 간략한 수행방법과 예배 의식이 만들어졌다.

이 수행 방법에서 한가지 더해진 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철학인 <나눔>이다. 염불을 외워서 자기 혼자만 극락에 가면 소승불교랑 다를 바가 없다. 대승불교의 철학은 만민의 구제이다. 따라서 선도는 수행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이며, 수행에는 서로간의 예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 서로의 수행 상태와 성취감을 서로 공유하고, 그 아름다운 공덕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로서 정토종은 민중적 불교 사상으로 토대를 잡았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가지 논쟁이 발생한다. 아미타불만 외치면 민중들도 극락에 간다는 정토종 사상과, 누구나 <즉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선종의 사상은 그 본 뜻이 같은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이질적인 사상인가?

정토종 사상이 확립된 당나라 이후, 정토종은 선종과 최고 <선> 자리를 놓고 논쟁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수양방법상의 논쟁이었다. 아미타불에게 수양하는 것과, 좌선과 명상으로 수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자, 그럼 다음 장에서 선종 이야기를 해보자. 선종의 역사적 배경과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정토사상과 선 사상이 같은 것일지 다른 것일지 이야기해 보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아미타경 사경 및 해설(상)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정여 (혜성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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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을 꿈꾸다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김정희 (보림,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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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 모든 것을 이루는 힘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원영 굉오 (불광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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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정토에 왕생하는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이태원 (운주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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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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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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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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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2화. 여황제 측천과 법장의 뜻이 딱 맞아 떨어진 이유는?

1. 모든 철학을 녹여 버리는 화엄의 철학

자 지금까지 우리는 <불교의 참뜻>을 알기위해 동분서주한 중국 불교의 혼란한 역사를 보았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겪으며 성숙해진 불교는, 현장법사의 구법여행을 통해 <유식> 사상까지 포괄한 진정한 불교 교리를 모두 알게 되었다.

그럼 이제, 그 많은 불교 교리들을 통일해야 할 때가 왔다. 통일된 당나라에서, 통일된 종교 교리를 내세우는 종파가 있었으니, 바로 <화엄종>이다. 자, 그럼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화엄종은 <화엄경>을 최상위 경전으로 규정한 뒤, 불법을 이야기하는 종파이다. 그럼 화엉경은 무엇인가?

화염경이란, <대방광불화엄경>의 약자로, <대>는 크다, <광>은 넓다는 뜻이다. <불>은 부처겠지? 한마디로 크고 넓은 부처들의 이야기이다.

화엄경은 보살 수행을 거쳐 부처가 된 <비로자나불>이라는 분이 <말씀하시는> 경전 이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하나의 티클에 모든 세계가 들어있으니, 모든 세계는 즉 하나이고, 하나는 곧 전체인 것이다.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

무슨 말일까? 심오한 교리이지만, 역사적 배경 정도로 설명해보자.

혹시 양쪽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을 본 적이 있는가? 없으면 해 보시라. 거울을 일정거리에 두고 서로를 비추면, (ㄱ)의 거울에 (ㄴ) 거울이 비친다. 그런데, (ㄴ) 거울도 (ㄱ) 거울을 비추고 있으므로, (ㄱ)의 거울안에는 (ㄴ) 거울이 비추고, 또 그 안에 (ㄱ) 거울이 비치며, 또 (ㄴ) 거울이 비친다.

결국 (ㄱ) 거울 안에 (ㄴ) 거울, 그안에 다시 (ㄱ) 거울.... 이런 식으로 점점 작아지는 거울이 끝없이 비춰진다. 그러나, (ㄱ)의 맞은 편에 있는 (ㄴ) 거울을 치우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ㄱ) 거울은 다시 평온해진다.

우주가 그런 것이다. 거울이 거울을 비추듯, 우주란 어떤 사물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ㄱ)이라는 거울 안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거울 안에 또 다른 거울이다. 그러나, 사실 그 본질은 (ㄴ) 거울인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가장 방대한 근원에서 출발하며, 그 카다란 근원이라는 것도 거울 안에서는 너무나 작은 존재일 뿐이다.

한마디로 하나(개체)는 전체(본질)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상>인 것이다. 이렇게 거울 속에 거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뭐 그 당시는 거울이 아닌 구슬 속에 구슬이라고 했지만...

이 거울이 비추는 세계는 4가지 세계이다. 먼저 거울이 비춘 현상세계(사법계), 거울 본체의 세계(이법계), 현상과 거울의 관계를 아는 세계(이사무애법계), 현상 세계에서 비춰진 각각의 사물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세계(사사무애법계) 이다.

우리는 거울 본체가 아니라 거울 안의 현상 세계에서 보이는 것이 진리라 믿고 살기 때문에 <사사무애법계>를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현상의 세계는 인연(연기)로 이루어진다. 육체는 태어나고 소멸된다. 흙은 땅이 되고, 비는 물이 되며, 흙과 물이 곡식이 된다. 곡식은 인간의 식량이 되고, 인간이 먹은 식량으로 새 생명이 탄생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원리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을 비추는 것은 거울이라는 본체이다.

예로, <인간의 모습>을 들어보자. 눈은 눈이고, 코는 코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떼어놓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기관들이다. 각각의 기관이 뭉쳐야 인간이 되는 것이고, 하나 하나가 스스로를 고집한다면 인간이라는 본체는 아무 의미 없다. 눈, 코, 입 등은 모두 각각의 것들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하나일 뿐이다.

이대로 대입해보자. 수없이 많은 사물들은 각각이지만, 그것을 비추는 큰 거울 앞에서는 하나와 같다. 결국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본질을 알면 모든 것이 결국 <본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지(티클)가 거울이요, 거울이 티클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을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진리를 찾는 것, 깨달음을 찾는 것, 수행을 하는 것, 말씀을 찾는 것, 노력하는 것....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거울>이 비추는 다른 모습일 뿐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화엄의 사상을 <원융사상>이라고 한다.

이 화엄의 철학이 수, 당 나라의 통일국가에서 체계화 된 것은 한 두사람이 어쩌어찌 정리하다 보니 탄생한 우연이 아니다. 화엄의 철학은 가장 통일 국가의 철학에 걸맞는 사상적 이념을 제공해 준 것이다. 한반도와 왜에서도 화엄종은 통일 국가 시기에 융성하였다.

왜 화엄은 통일 철학일까?

간단하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근원으로 통한다는 것은, 모든 분열된 국가가 <통일된 왕조>로 귀속된다는 정치 이념과도 딱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 이 말을 정치적으로 해석해보자.

<하나>란, 국왕을 뜻한다. <전체>란 백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국왕은 곧 국가이고, 국가는 곧 백성들의 모임이다. 백성은 곧 국왕으로 귀속되고, 국왕은 백성의 평안을 위해 노력한다. 불가의 화엄 사상이 유교의 <덕치주의> 사상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만약 북한 김일성 일가가 불교도였다면, 제일 먼저 화엄 철학부터 북한 주체사상에 집어넣었을지도 모른다.

또, 통일된 국가에서는 통일된 종교 사상을 원한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처럼 수많은 종파가 난립할 경우, 국가로서는 골치 아프다. 국가 철학을 지지해 줄 핵심 사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화엄경은 모든 불교 사상을 화엄 철학으로 녹여 버릴 수 있다. 열반경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다>는 것도 화엄은 인정한다. 우주가 비추는 거울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 비추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는 것이다. 단, 불성은 인간만 있는 것이기에 무생물에는 없다고 말하여 차별을 둔다.

법상종에서 말하는 <마음> 역시 화엄경은 받아들인다. <마음>도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이 아닌가? 단, 화엄종에서의 <마음>은 인간의 번뇌와 고통이 아니라, 거울이 비춰주는 <깨끗한 마음>이다. 화엄종은 인간의 본질이 우주와 같이 때문에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쪽을 좀더 비중있게 말하는 것 같다.

수나라의 통일 철학인 천태종은 지식(교)과 깨달음(선)은 같은 것이라는 교선일치를 말한다. 화엄종은 이것 역시 받아들인다. 단, (교)와 (선)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선후논쟁은 계속 전개한다.

모든 철학을 받아들여 녹일 수 있는 화엄의 <원융사상>은 통일된 왕조에서 통일된 철학으로 받아들이기 좋았다. 그럼 구체적인 화엄 철학을 한 번 볼까나?

2. 화엄의 교판 논쟁과 성기품설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 화엄종도 초기에는 <도사>들과 싸우는 학단에 불과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요, 하나란 모든 것이다>라는 이론을 도사들이 트집잡았던 것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인 내가 꿈에서 인간이 된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장자의 철학은 이 것이다. 만물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하니,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된 내가 진짜 나이지 않을까? 결국 내가 만물 속의 하나이기에, 만물은 나이고, 나를 포함한 만물은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진정한 평등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만물이고, 만물이 곧 나인 것이다.>

도사들은 장자사상과 화염 사상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격의 불교>시기엔 화엄종도 도교 이론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화엄학파는 <도사>들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가장 먼저 열반종의 <불성>을 받아들인다. 만물 속에 인간이 있고, 인간은 결국 우주의 본질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든 우주의 본질인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품>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 수양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 자체를 <성기품>이라고 하며, 그 수행 방법을 10가지로 나눠 놓은 단계를 <십지품>이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화엄경> 격상 작업이 시작된다. <화엄 철학>은 도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종교보다 화엄경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5개의 종교와 열 개의 종파를 모두 순위를 매긴 후 <화염경>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화엄종은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 산에 수많은 동물들(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산 그 자체이다. 바다에 수많은 생물(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그 모든 생물들을 끌어안고 생명을 주는 바다 자체이다. 그리하여, 흩어진 모든 종파는 화엄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3. 법장과 측천무후

초기 화엄경은 두순(557-640)에서 시작한다. 두순은 도교의 도사들이 <화엄경>을 <노장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그래서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열반종 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그가 화엄종의 시조이다.

2대조 지엄은 화엄경의 주석서인 수현기를 저술하면서, <유식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전통 <공> 사상과 다르게 <마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것은 마음이다>라는 사상도 화엄철학과 같다는 것이다. 지엄에게는 2명의 특출난 제자가 있었다. 한명은 한반도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이었고, 또 한명은 화엄학을 완성시킨 <법장대사>였다.

의상은 우리나라 사람이니, 우리 이야기에서 다루고 지금은 <법장>이야기를 해보자.

법장이 살았던 시기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중국 여황제였던 <무측천>의 시대였다. (유교사학자들은 보통 측천무후라고 부르며,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 고조 - 당 태종 - 당 고종 - 당 중종 - 당 예종 - 측천무후 - 당 중종 (복위) - 당 예종 (복위) - 당 현종 - 당 숙종 - 당 대종 - 당 덕종 - 당 순종 - 당 헌종 - 당 목종 - 당 경종 - 당 문종 - 당 무종 - 당 선종 - 당 의종 - 당 희종 - 당 소종 - 당 애종

(표) 측천무후는 당 태종기부터 활동하여 당 현종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의 난> 시기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데, 당나라 전성기를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당나라 역사의 1/4을 차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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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젊은 시절, 고령의 시절 사진화>

무측천의 시기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특이한 시기였다. 무측천은 당 태종의 후궁으로 <무미랑>이라고 불린 여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대한 자금을 가진 개국공신으로서 산둥지방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그녀의 집안 사정 문제로 무미랑을 멀리했다. 무미랑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을 사랑한다. 한 여자가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유교주의 입장에서는 상상 자체가 안되는 일이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고종의 왕비인 왕황후가 이쁜 첩들을 모함하기 위해 <무미랑>을 일부러 고종에게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까? <무미랑>은 훗날 고종의 총애를 얻어 왕황후를 비참하게 죽여 버린다.

그러나 고종은 당나라 최전성기의 왕이었다. 그녀는 고종이 늙었을 때,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들과 남동생인 중종, 예종을 왕으로 두었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직접 여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였던 중국에서 여자만의 힘으로 여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창업공신과 남북조 시대 구귀족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다. 당나라 창업공신은 <관롱집단>이라 부르는 세력으로 북위 이래 이민족 집단에서 비롯된 인물들이었다. 무측천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 <산둥귀족>들을 끌어들임으로서 창업공신 집단을 말살하고 새로운 나라인 <주>를 세웠던 것이다.

황제가 된 무측천은, 기존의 모든 사상과 종교를 새롭게 제시하였다. 창업공신의 특혜를 무시하고, <과거제도>라는 시험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다. 장안 대신 낙양을 새 근거지로 하였고, 토지제도와 세금 제도를 고대 <주>나라의 제도로 복원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새바람이 불었다.

당나라가 건국되고 국교는 <도교>였다. 남북조 시대 북위에서 구겸지가 <도교>를 창립한 이후, 도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왔다. 불교 역시 철학체계와 교단, 종파를 두어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지만, 당을 건국한 이연은 도교에 좀 더 힘을 실어주었다. 

여황제가 즉위하자 국교인 도교와 달리 정권에 충실한 통일 종교 철학이 필요하였다. 이 때 법장이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쌓인 중국 불교 이론을 집대성하여 <화엄학>을 완성하고, 그것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여황제에게 직접 설명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바로 <금사자의 비유>였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측천은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물론, 법장이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했을 것이다. 이 말 뜻은 이렇다.

금사자를 볼 때, 우리는 당연히 <금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금사자가 본질일까? 아니다. 녹여서 다른 동물로 만들어 버리면 바뀐다. 금고양이, 금호랑이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만들든 그 본질은 <금>이다.

결국 사물의 본질은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못 보는 것 뿐이다. 그럼 사물의 본질을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형식일 뿐, 그 실체는 <마음>으로 알아야 한다.

그럼 마음은 무엇인가? 진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ㄱ)이라는 거울이 (ㄴ)이라는 거울을 비치면, (ㄱ)이라는 거울에는 수많은 (ㄱ) (ㄴ) 거울들이 점점 작아지면서 무한으로 서로를 보여준다.

거울과 거울은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그 안에 비친 모든 사물들도 서로 의존하고 보완되어 있다. 사물의 본질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이다.

무측천은 생각했다. 여자들을 무시하는 유교는 필요없다. 개국공신들과 밀착된 도교도 필요없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화엄종이야 말로 시대가 원하는 철학이 아닌가?

무측천은 여황제의 귄위 강화를 위하여, 법장은 불교의 힘으로 도교를 누르기 위해여 서로 힘을 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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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건릉 사진 : 입구>

다음 장에서 다룰 내용은 지금까지 불교와는 사뭇 다른 철학과 역사를 가진 종파 불교이다. 중국 정토종, 선종의 이야기를 한 번 다뤄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초기화엄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오다 겐유 (불교시대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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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손에 넣고 중국을 치마폭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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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1화. 삼장법사의 구법여행과 훗날 등장한 손오공 이야기

1. 진정한 종파불교로 거듭난 불교

오늘 이야기는 중국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 시기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는 중국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다양한 불교사상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일단 간략하게 중국 역사를 살펴볼까?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불교의 전파와 관련된 중국 역사는 <한>나라부터이다. 그러나, 유학이 국교로 지정된 한나라 시기에 불교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반도, 왜 등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도무 <혼란기>였다. 혼란한 시기에는 새로운 국가 철학이 필요했고 불교가 유교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불교의 문제점은 불교와 국가 권력이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보다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구마라집 이후 끊임없이 시도된 <불교의 참뜻 찾기 프로젝트>는 국가 불교에서 벗어나려는 불교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 속에서 불교의 독자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불교가 진정한 <종파 불교>로 탄생한 것은 통일 국가인 <수, 당> 나라 시기였다.

<수>나라의 <천태종>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통일후 성급한 <통일 정책>으로 망하였다. 결국 수 왕조는 이종 사촌인 이연이 건국한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가 진정한 중국의 종파불교 시대이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주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던 <당>나라 시기의 종파 불교 이야기이다.

2. 각 종교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불교의 역사와 종파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 이론이 심오하다. 그렇다고, 역사를 통해 간략히 보는 종교인데 심오한 철학 하나 하나를 다룰 수도 없다. 그걸 다루기 시작하면 <불교 방송>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당나라까지 불교의 전파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복습해보자.



지금까지 전개한 중국 불교사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도에서 <보살>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간다라 미술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로 넘어왔다. 그런데,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승>을 말하며, 그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민해야 할 철학이 반야(지혜)였다. 그 반야 사상의 핵심이 바로 <공> 사상이다.

혼란기의 중국인들은 <공> 사상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도가의 <노장사상>을 활용하여 부처의 사상을 이해했다. 도가 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이해하는 것을 <격의 불교>라고 한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인도 대승 경전을 번역하면서 도가를 벗어나 독자적인 중국 불교 철학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 반야사상을 강조한 학파는 삼론종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강조한 학파는 열반종으로, 아미타불 같이 보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학파는 정토종으로 발전해갔다.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반야과 깨달음을 동시에 감싸안으려는 학파가 등장했으니, 그들이 바로 천태종과 화엄종이다.

반면, <이러한 지식들이 과연 부처가 처음 말한 진리와 같은 것일까? 너무 한쪽 측면에만 치우친 것은 아닐까?> 는 고민을 안고, 다시 인도에 불법을 찾아 떠난 이가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다. 현장은 <공> 사상에만 치우친 중국 불교에 <공> 사상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유심> 사상을 상기시켰다.

초기 격의 불교 시대에 번역된 불경을 고역경,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을 구역경이라 한다면, 현장이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성경에 구약, 신약의 시대가 있듯이, 불법의 시대도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

3. 현장(602-664)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는 세계 불교사를 통털어 가장 활발한 불법 종파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이론을 쌓아온 불교의 각 학파들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파가 많아질수록 더 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은 무엇일까? 각 종파들은 자신들이 석가의 참 뜻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석가의 가르침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20살 때 출가하였다. 하지만, 어느 한 종파의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저기 학파들을 돌아다니던 현장은 점점 실망하였다. 사상적인 체계도 서로 다르고, 같은 불경을 놓고도 종파의 입맛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왜 일까? 왜 석가의 마음이 이렇게 나눠진 것일까?

현장이 생각한 종파들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라 말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의 본체라고 말한다. 작은 인간이 커다란 코끼리의 본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장은 석가의 참 뜻이 담겨있는 인도 원전들을 직접 보고, 자신이 다시 해석하기로 결심한다. 쉽게 말하자면, 국내에서 영어를 백날 해보았자 발음도 안되고 무슨 뜻으로 생긴 말인지도 모르니, 영어 원조 국가에 가서 직접 배우자는 것이다. <국내파>로는 안되니 <유학파>가 되어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이랄까? 그리하여 그 유명한 삼장법사의 서역 이야기가 629년에 시작된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는 동물들이 현장법사를 따라 서역으로 떠난 것이라고 나온다. 물론 소설이니까... 그러나, 실제 현장의 구법 여행은 서유기의 이야기처럼 괴수들을 무찌르며 진격한 그런 여행이 아니였다.

일단 인도로 가는 길부터가 너무나 험했다. 산넘고, 물건너 가야 하는 길은 여행자가 아닌 스님이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냥 가라고 해도 어려운 길인데, 현장법사의 출국을 막는 중국 수비대가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으로는 한반도와 왜, 서로는 이슬람 국가들, 남으로는 인도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따라서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당나라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당나라 정부는 모든 입출국자를 국가차원에서 통제하려고 하였다. 특히 당의 토지세법은 조용조 제도였는데, 이 제도의 핵심은 토지세와 인두세였다. 즉, 자신의 토지에서 떠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는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현장은 국외로 빠져나가면서 국경수비대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고, 도망다녀야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소 직원이 정부 몰래 북한에 가서 현장조사를 하고온 것과 같은 것이다. 당나라 처럼 말로만 세계화를 외치는 이명박 정권에서 이런 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바로 징역형이다.

현장법사는 외친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 멋진 말씀이시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는 불법을 찾기위해 국가가 만든 보안법을 위반한 한 승려로부터 출발한다.

현장법사는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고 겨우 중국 국경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인가?

인도로 가는 동안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 없이 경험해야 했다.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그의 여행을 반길리가 없었다. 불교를 숭상하는 지역에서는 그를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해주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

석가에 참 뜻을 구하고자 인도에 왔어도 석가는 그곳에 없다. 그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훗날 이곳을 다시 찾아올 구법 여행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는 석가에 대한 기록을 찾아 실제 뜻을 연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명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며 존경하였고, 불법에 대한 열정은 주변국까지 알려졌다. 당시, 인도의 구마라왕은 그를 자신의 국가에 데려오기 위해 큰 전쟁을 할 정도였다. 그는 16년간의 파란만장한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 그 숫자상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권 한권 정확한 석가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더 놀랍다고 한다. 16년간을 인도의 수많은 학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며 석가의 참 뜻을 토론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4. 현장(602-664)의 이론체계를 완성한 <법상종>

 
현장이 16년간 공부하고 토론하여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과 쌍벽을 이루는 <식>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대승불교는 대부분 구마라집의 해석어거나, 그의 제자들로 시작된 불경 번역이었다.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구마라집의 핵심 사상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이었다.

그 핵심은, 만물은 돌고 돌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현상계의 자연현상을 놓고 <공>을 다루는 것이었다. 돌고 도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자, 자연의 법칙이다. 대승불교의 <용수>가 주장했던 것도 이런 입장의 <공>이었다.

세상은 돌고 돌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나란 존재는 죽으면 흙이 되고, 물이 되며, 그 흙과 물은 곡식이 되고, 곡식을 먹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 다시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나란 내가 아니며, 내가 아닌 흙과 물이 곧 나인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사물의 본질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우주나 자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서 <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 철학인 <유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도 성실종, 지론종 등의 학파가 <인간의 마음>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류 학파는 아니였다.

그러나 현장의 <유식> 사상은 본질이 없다는 <공> 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있다고 말하는 <공> 사상이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다. 밧줄을 보고 뱀이라 생각하여 놀라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체는 존재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편견과 욕망이 많을수록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밧줄을 밧줄이라고 보았을 때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실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결국, 현장이 생각한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의 모든 현상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철학을 <만법유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강조하는 현장의 철학을 이어받은 제자 기(자은법사)는 스승의 철학을 <법상종>이라는 종파철학으로 발전시킨다.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 법상종의 기존 유식철학은 <마음>에 따라 불교 교리의 발전을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나란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초기의 <공> 사상이다. (석가철학의 아함경)

2단계는 모든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반야>의 진리를 깨닫는 단계이다.(반야경)

3단계는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실제하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실제하는 본질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화엄경)

결국 법상종은 기존의 <공> 사상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진다는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대에, 사상을 받아들인 학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반종, 천태종, 밥상종의 교리를 한데 모아 큰 통합을 이루려는 <화엄종>이었다. 화엄사상은 바다와 같다. 각 종파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라면, 화엄은 그 모두가 뛰어놀고 있는 그 바다 자체를 지향하는 통일 종교였으니...

현장의 유식 이론은 법상종으로 이어졌으나, 그 끝은 결국 화엄종으로 귀결되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다른 종파들이 결국 화엄의 철학으로 녹아내렸듯이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화엄의 <원융사상>으로 녹아내리게 된다.

당이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번성한 통일왕조에서 필요했던 불교는, 모든 혼란기의 사상과 당대 사상까지 통합한 화엄종이 아니였을까? 다음 장에서는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5. 대당서역기가 서유기로....

서유기는 명나라시대 오승은이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승은은 현장의 구법여행을 토대로 이 소설을 적었다.

총 100부작인 서유기는 총 3부의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가 손오공의 탄생 이야기, 두 번째가 현장의에게 구법의 의무가 주어지는 이야기, 세 번째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천대성 손오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오공의 탄생 설화와 하늘에서의 난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 현장 시대의 이야기 외에도 많은 민간 설화와 민간 종파의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불교의 많은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 손오공이 보살들에게 대들 때, 보살들의 손에서 큰 <인장>이 나온다. 인장은 도장을 말한다. 원래 <인>은 다양한 손모양을 토대로 보살들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로, <항마촉지인>을 들어볼까?

위의 손 모양이 항마촉지인이다. 이것은 검지를 뻗어 손을 아래로 내리는 일종의 <수화>이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마왕이 석가모니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마왕이 말하기를,

<당신이 엄청난 공덕을 쌓은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라고 협박을 하였다.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땅에 대어 <이 대지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그 순간 땅에서 <땅의 신>이 튀어나와 부처님의 은혜로운 삶을 증명해주었다. 마왕은 항복하였고 이 때부터 <항마촉지인>은 보살이 적을 무찌르는 손 모양이 되었다.

<선정인>은 부처가 깊은 선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전륜법인>은 부처가 맨 처음 설법하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지권인은 왼손으로 부처님 세계를 오른손으로 중생 세계를 표현하여 두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화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설정은 손오공을 <불법>과 대비되는 도사의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불교이야기를 하면서 핵심주제의 하나로 <불법과 도가>의 폐불사건들을 다루었었다.

그런데, 초기 망나니같은 손오공은 <도사>의 신비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머털도사처럼 머리카락을 뽑아 숫자를 늘린다는 기술은 초기 도가인 <오두미교>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술이다.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설정은 손오공이 학과 구름을 벗삼아 사는 신선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 <도사> 세력을 쳐 부수고, 불법의 <인장>이 승리한다. 즉, 보살이 도사를 이긴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손오공은 도사이므로 죽지 않는다. 그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도와 불법을 찾는 다는 내용은, 초기 도가 사상을 받아들인 불교가 도가를 발 아래 두고 불법의 진리를 찾는다는 역사적 상황과 맥락이 같다. 손오공의 이름 자체가 <공손하라>는 의미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손오공의 머리에는 금제가 있다. 불법을 벗어날 때 마다 고통이 찾아온다. 자비로운 삼장은 진정한 불법을 찾으면 금제를 풀어준다고 말한다. 도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법을 찾고자 한 현장은 <독자적인 불법>을 찾은 뒤, 손오공을 풀어준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미 불법에 빠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현장법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중국에 진정한 불법이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진정한 부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삼장법사>는 서역에 가서 불법을 전해받아야 한다. 그런데, 악의 무리들이 그 과정을 방해한다. 그 악의 무리들은 여러 갈래이다.

같은 불교이면서도 불법의 참 뜻을 모르는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삼장의 참 뜻을 모른다. 반대로 우마왕같은 존재는 인도 바리문의 <소 숭배>를 생각나게 하면서도 반대로 농경사회인 중국의 전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처음에 우마왕과 싸우던 손오공이 우마왕과 형제가 되는 설정은 특이하지 않는가?  또, 신선술을 부리며 각종 동물이나 괴물로 변하는 도가의 술법을 쓰는 자들도 있다.

저팔계’는 저속한 마음의 욕심을 이겨내려면 여덞 가지 계율, 즉 ‘팔정도를 이루라는 뜻이고, 사오정은 맑은 마음을 가져야 깨우칠 수 있다는 불교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사실 서유기는 불교식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 작품이 명나라 때 쓰여진 관계로, 당나라 당대 불교의 교파들 보다는 훗날 밀교화된 불교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미타불>과 같은 정토종 성향이 상당한 강하다. 백성들이 읽는 고전 작품이기 때문에 심오한 교리보다는 <아미타> 신앙과 같은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손오공이 알게 된 불교는 심오한 교리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알게된 <깨달음>이지 않는가?

또, 이 작품은 명나라 당시 부패한 사회상과 나쁜 관료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 풍자의 방식으로 불교적인 사상이 덧붙여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직접 비판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신비하고 가벼운 모험 스토리로 풍자하는 것이 일반인들 읽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서유기는 보살이 나오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의 모든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법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괴물들을 물리치는 과정과 방법은 도교식이지만, 그 원리는 불교식이다. 현장은 모든 괴물들도 사실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용서가 가능하다는 <열반종>의 불성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악>은 악일 뿐이기에 퇴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현장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며, 법상종과 화엄종의 핵심 교리인 <일체유심조>를 주장한다.

실제 대당서역기와 서유기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찾으려하는 현장의 마음 만큼은 서유기에서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대당서역기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현장 (서해문집,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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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위대한 정치의 시대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멍셴스 (에버리치홀딩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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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3: 치세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나채훈 (씽크뱅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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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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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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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논술프로그램세계명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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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서천으로 갔다(서유기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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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불교와 유식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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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불교와 도교의 한판 승부...

1. 이민족 왕조에 뿌리내린 도교

자, 이제 불교의 수준은 <도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구마라집이 불경을 번역한 이후, 불교는 진정한 불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도교의 이론을 빌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불교 이론의 다양한 연구는 다양한 학파가 형성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각, 학파들은 도교 이론을 부정하고, 대승 불교 고유의 <공>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도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도교 역시 혼란기를 이용하여 확실한 <도가 이론>을 확립하여,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이끌어갈 사상으로 성장했다.

<도교의 시존 - 노자>

<도교의 선구자 - 갈홍>

원래 도교는 춘추전국시대 <노장사상>에서 기원한다. 당시에는 여러 제가 백가 중에 하나로서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학파>였기 때문에 <도학>, <도가> 등으로 말할 수 있겠다. <도학>은 노자의 <도덕경> 사상을 바탕으로 장자의 현실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 도가가 도교로 변한 것은 언제일까? 불교의 <학파>가 성립되는 위진남북조 시대와 일치한다.

동진시대 갈홍이 <도교>의 선구자이다. 갈홍은 <포박자>를 저술하여 도교 발전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원래 학문적 성격이 강한 <도가>에 신선술과 민간 종교를 모두 종합하여 <도교>를 성립시킨 것이다.

일단,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자연 속에서 영생을 누리는 <신선>이라는 존재를 종교 안에 포함시켰다. 신선은 노장 사상을 이해하여 속세를 해탈한 귀인으로 표현된다. 또, 신선은 죽지 않고 천수(1000살)를 누린다는 <불로장생> 사상을 포함시켰다. 이렇게 대충 이론이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도교는 부적이나 신비술이 가능하다는 <신선술>을 강조함으로서 혼란기 현실에서 고뇌하는 백성들을 포섭하였다. 후한부터 시작된 중국의 혼란기에 많은 민란이 있었다. 대표적인 민란인 한나라 오두미교는 <도교> 조직의 모델이었다.

가난한 백성들도 곡식 5두를 내면 가입이 가능한 <오두미교>는 후한 시기 장각의 태평도로 발전하였다. 이 오두미교를 <천사도>라고 불렀는데, 북위 시대 구겸지가 이것을 <신천사도>로 개편하여 혼란기 중국 북부지방의 조직단체로 개편한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를 통일했던 북위는 도교를 국교로 숭배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등장한 여러 이민족 왕조들이 중국 고유의 사상인 <유교>를 배척하기 위해 도교를 활용하는 정책을 사용하면서 도교의 교단이 강화된 것이다.

도교를 국가 종교로 만든 사람은 북위의 구겸지였다. 불교가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여 <내세에서의 행복한 윤회>, <해탈>, <인과응보>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모은 것처럼 도교 역시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였다.

혼란한 시대를 피해 숨어 버린 한족들도 도교에서 주장하는 <무위자연>을 받아들였다. 특히, 죽림칠현 등 당대 사상가들은 유교의 형식주의가 무질서한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난세에 인간의 인격은 존중되지 않는다. 이민족들의 세상에 현실은 너무 암담하다. 역사 속을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이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신선을 동경하게 된다. 신비로운 자연에서 살아가는 고고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백성들 역시 현실을 탈피한 이상적 존재를 그리워하게 된다. 부처이든 노자이든, 이 암울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 없지 않는가?

<신선의 뜻을 품은 도가인들 - 풍속화>

이민족의 왕들도 도교를 장려하였다. 북위의 구겸지는 유학과 다른 원리로 <도교>원리를 제시하였다. 중국의 황제가 <천명>을 받들어 즉위하는 것은 유교 방식이다. 고럼, 이민족인 북위의 왕은 <천명>이 없는가?

천명은 <도교>에서 찾으면 된다. 황제가 즉위할 때 하늘에 계신 지고지순한 신선인 <노자>가 축복해준다. 천상노군(노자)는 중국인의 아버지로서 중국의 천하를 이민족이 다스려도 된다는 것을 인정해준다. 이민족들을 <오랑캐>로 여기는 전통 유교 원리와 다르게, 도교는 중국을 다스리는 원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에서는 유교가 도교에 밀려 버렸다. 그럼 남은 것은 불교 뿐이다. 한참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두 종교는 이제 종교 천하통일을 놓고 한판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도교 사원의 천존상>

2. 패자의 자리를 내준 유가

한나라 시기 국학으로 인정되던 유가는 혼란기에 힘을 잃었다. 전쟁이 지속된 어느 순간부터 모든 학문분야에서 유학은 제왕의 위치를 잃어간다.

삼국시대 초기 위나라의 조조는 유학을 벗어난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진수의 <삼국지> 같은 작품이 등장하면서 역사학이 유학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불상들이 조각되고, 미술과 회화 분야도 유학의 입지가 사라졌다. 천문분야는 도교로 넘어갔으며, 자연과학분야은 수학과 의학 등에게 밀리게 되었다.

모든 학문분야를 총괄하던 유학은 노장사상, 문학, 역사학과 대등한 위치로 전락하였다. 이 4가지를 위진남북조 4학이라고 하며, 불교학을 포함하면 5학이라고도 한다.

정치 원리에서 밀린 유학은 도교 세력에게 참패를 당했다. 특히, 북조에서 도교를 국교화하면서 유교적 통치원리까지 무너진 것이다. 유학은 도교를 미신이라고 몰아세웠지만 이미 힘이 없었다.

유학은 불교도 끊임없이 비판한다. 특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충, 효를 강조하는 유학과 상극이다. 어찌 국왕과 부모를 버리고 속세를 떠난다는 것인가? 유학자가 보기에 불교는 인륜을 무너뜨린 오랑캐의 종교였다. 그러나, 그 비판도 힘이 없었다. 불교 자체가 국왕을 보호한다는 <호국>의 이념을 가진 시기이기에 유학자들의 비판은 공허한 것이었다.

또, 죽으면 내세로 향한다는 원리도 유교의 현실주의와 상극이었다. 현실 정치와 현실에서의 충효를 중요하게 여기며, 내세를 논의조차 하지 않는 유교 입장에서는 불교가 눈에 가시였다. 내세를 위해, 해탈같은 비현실적인 작업을 위해 어마어마한 불교 사원을 짓는 것은 얼마나 돈과 시간의 낭비인가? 유교주의자들 눈으로 볼 때, 불교 사원을 짓고 부처가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은 <덕치주의, 민본주의>와 상관없는 미친 왕의 행동인 것이다. 고대 하, 은 나라가 망할 때 얼마나 큰 사치가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이 있었는가?

내세문제는 불교와 유학의 <정신불멸론> 논쟁으로 격화되었다. 유교에서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고,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죽기 때문에 내세란 없다고 말한다. 육체가 칼이라면 정신은 칼이 날카로운지, 무딘지를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칼이 부러지면, 칼이 날카로운지는 의미가 없어지며, 칼은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죽은 뒤 분리된다고 말한다. 정신은 육체와 다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육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정신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윤회를 통한 내세, 해탈은 현생을 사는 궁극적 이유가 된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의 유학은 비판 이상의 현실적 조치가 없었다. 이미 불교세력에게 큰 소리를 칠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유학이 불교를 누르기 위해서는 수백년이란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남북조 시대의 라이벌은 도교와 불교 뿐이었던 것이다. <정신불멸론> 논쟁에서 유학이 승리하기 위한 기다림은 남북조와 수, 당 나라를 넘어 송나라에 이르는 긴 시간이었다. 국가는 철학으로서 유학의 힘을 아직 인정했지만, 지배층들은 이미 불교나 도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3. 1라운드 - 도교와 유교의 연합작전(1차 폐불사건, 466)

이제 본격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쌈박질 라운드에 돌입해보자. 이 두 종교가 마찰을 빚기 시작한 것은, 격의 불교를 뛰어넘어 불교가 도교에서 분리되던 4세기 부터이다. 그 핵심은 부처와 노자 중 누가 우위에 있으냐는 지극히 원시적인 논쟁이었다.

먼저 도교의 도사들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초기 청담사상가들은 유교, 도교, 불교의 성인들은 모두 <도>를 체득한 사람이므로 근본적으로 같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시작한 논쟁은 <노자가 곧 부처다>라는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노자는 <도덕경>을 쓰고 <신선>이 되었다. 그런데, 노자는 신선이 되기 전에 인도가 가서 큰 깨달음을 얻었고,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인>이 인도인을 교화한 것이며, <불교>의 근원은 <노자>라는 것이다. 노자와 부처 중 누가 먼저이냐를 <선후논쟁>이라고 말해두자.

불교와 도교라는 2가지 종교를 동시에 인정하여, <유학>을 대신하여 활용하려고 했던 이민족의 <북위> 왕조는 남북조 시기 내내 이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문제는 북위의 왕들이 불교와 도교라는 종교적 입장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어느 종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가, 또 정권을 잡은 귀족들이 어느 종교를 신봉하는가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남북조 시대 - 북위와 남조의 송>

그 첫 번째 대결은 북위 <태무제> 때였다.

당시 남북조 시대는 이민족 왕조인 <북위>가 중국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중국 왕조들이 정권을 바꿔가면서 대륙 남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위 태무제 때의 재상 최호는 <중국인>이었다. 북위는 <선비족>들이 세운 왕조였지만, 전통 한족들을 어느 정도 우대하면서 마찰없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족 관리들은 <유학>을 신봉하였다. 그가 원한 것은 선비족들도 전통 사상인 <유학>을 받아들여 <유교적 덕치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호는 도교의 창시자 구겸지와 결탁하여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유교와 도교가 연합하여 불교세력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전혀 성격이 다른 유교와 도교는 불교라는 적 때문에 동맹을 맺은 것이다. 결국 북위 태무제 때 국가에서 불교를 막아 버리는 폐불사건(불교금지령)이 발생한 것이다.

1차 폐불사건으로 불교는 위축되었지만,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유학자인 최호가 <국사필화사건>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최호 등 한족들이 편찬한 <국사>는 북위의 창업과정부터 모든 내용들을 적어두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적어두는 <훈고학적 유교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사에는 북위 지배층들의 잘못과 치부까지 그대로 적혀있었다. 이것은 북위라는 선비족 국가에서 한족과 선비족 중 누가 우월한가라는 논쟁을 불러왔다. 이 대립은 최호 등 한족 관리들이 주살되어 끝나게 된다. 즉, 한족 귀족들보다 선비족과 선비족의 왕이 더 우월함을 보여준 것이다.

구겸지의 도교 창시로 도교가 <국교화>되고 불교는 위기를 맞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불교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4. 2라운드 - 도교와 불교의 선후논쟁(520)

1차 폐불 이후, 불교는 다시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다. 북위에서 한화정책으로 유명한 <효문제> 당시를 보면 더 뚜렷해진다. 효문제 스스로가 중국인들의 왕이라 칭하면서 중국식으로 모든 제도를 고치고, 선비족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유학의 이론을 공부하면서도 도교와 불교 문화를 더 장려하였다.

도교의 제단이 곳곳에 생겼다. 국왕이 불교문화를 장려하여 용문의 석굴사원이 건설되었다. 두 종교는 치열하게 교세 확장과 함께 이론적 논쟁을 다시 시작했다.

520년 두 종교는 또 다시 <선후문제>로 국왕 앞에서 직접 논쟁을 벌였다. 종교간의 논쟁이 아닌 국왕 앞에서의 논쟁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국왕이 손 들어 주는 쪽이 우월한 종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도교 도사인 강빈은 노자가 부처를 제자로 삼아 교화했다고 주장했다. 승려인 담무외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두 명이 모두 자신의 주장을 위해 자료를 위조했다는 점이다. 강빈과 담무외는 각각 노자와 부처의 기록을 위조해 효명제 앞에 자신들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효명제는 강빈의 자료가 위조되었다는 것에 분노홰 강빈을 유배보내 버렸다.

이 논쟁으로 불교가 도교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논리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국왕의 판단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도사들은 기회만 닿으면 불교에 흠집을 내려고 했다.

5. 3라운드 - 도교의 반발(2차 폐불사건, 574)

568년, 북주 무제기에 다시 <선후논쟁>이 불붙는다. 그러나, 이 때의 국왕은 단순히 불교 편을 들지 않았다. 유교와 도교가 침체되자 승려의 숫자가 증가했고, 이것은 국가적으로 낭비였다. 승려는 일하지 않는 자, 세금을 내지 않는 자였다. 또, 사원이 많아지는 것도 국가 운영비에 타격을 주었다. 종종 승려들이 세력화하여 횡포를 부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도사들은 다시 <부처는 노자의 제자>라고 주장한다. 도사인 위원숭과 장빈은 종교의 순위를 정하였다. 한족의 지침인 유학이 1위, 도교는 2위, 노자의 제자인 부처가 3위가 된 것이다.

당시 종교계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는 반발하였고, 황제에게 부당함을 건의하였다. 사회적으로 세력화한 불교를 규제하려고 한 무제는 도사들의 말을 받아들여 불교를 폐불시켰다. 그러나, 도사들도 제 발을 밟았다고 해야 할까? 도교 역시 사회적으로 무시 못할 종교 세력으로 왕권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무제는 불교를 폐지시킨 후, 도교마저 폐지시킨다.

불교와 도교를 막론하고, 종교인들을 일하지 않고 논쟁을 하는 자들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철학으로서 유학만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당시 뿌리를 깊게 내린 종교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무제가 죽은 뒤 불교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6.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가 걸어간 길...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를 정의하자면, <전파된 불교에서 독자적 불교로 나아간 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처음에는 불법의 뜻도 몰라서 노장사상의 이론에서 불법의 뜻을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구마라집 등이 인도 불경을 해석하고, 도안과 혜원 등이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법현이 인도에 구법여행을 떠나는 등 승려들의 노력으로 불교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학파들이 생겨나 불교 이론이 논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불교는 <호국불교>였다. 위진남북조라는 유례없는 혼란기에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왕권>과의 결탁이 필요했다. 국왕의 보호로 불교는 성장하였다. 그러나, <호국불교>는 양면의 칼이었다. 국왕이 불교를 버릴 때, 불교는 대책없이 탄압당했다. 또한, 왕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교는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에 부족하였다.

여러차례의 폐불을 겪은 불교가 택한 선택은 무엇일까? 점차,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북위> 정권과 밀착했던 북조 불교는 그런 점을 뼈져리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국가 정권의 영향력을 적게 받았던 한족 정권의 <남조 불교>는 큰 탄압이 없었다. 불교가 귀족의 보호를 받았지만, 국가 이념에 정면으로 대항한 적도 없었다. 될 수 있으면 독립적인 종파를 만들어 <이론>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남조 불교>는 북쪽과 달리 <도교> 영향력이 적었다는 것이다. 구겸지가 창안한 <도교>는 북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 도교와 피터지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점점 <거대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한다. 정토종, 삼론종, 천태종, 율종, 선종은 5대 종파로 성장하였고, 담란의 정토종은 민중 사회로 스며들었다.

민중 사회에서는 읍사가 생겼다. 원래 읍은 북조, 사는 남조의 용어로 <불교를 믿는 마을 단체>를 말한다. 후대에는 합쳐서 읍사로 표현한다. 마을 단위로 불교 단체가 생기고 불상을 만들었으며, 스님들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크리스트교와 같은 교구제로 운영하지 않았다. 행정구역과 종교구역을 일원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의 행정구역과 실제 마을민들이 느끼는 공동체 단위가 일치하지 않았고, 오랜 전쟁으로 임의로 구성된 공동체가 많았던 점도 있다. 또, 불교단체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한다고 해도 그것과 행정구역은 별도였다. 불교 사원 자체가 수양과 깨달음을 위해 마을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도 교구제가 성립할 수 없었던 원인이었다.

길었던 분열의 시대는 끝이 났다. 수나라에 의해 중국 대륙이 통일된 것이다. 이제 통일된 시기의 불교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수, 당 시대에도 불교와 도교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몇몇 인물들로 파악해 보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처음 만나는 불경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장호 (심포지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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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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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사 2:수용기의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카마타 시게오 (장승,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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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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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전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용하 (불천,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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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양으로 읽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화령 (민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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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양입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박영옥 (경덕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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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개정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가와이 하야오 (동아시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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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8화. 인도식 불교가 중국식 불교로 바뀌다.

1. 구마라집(구마라습 : KUMARAJIVA, 344-413) : 중국 중관사상의 아버지

도안과 혜원이 격의 불교 수준의 중국 불교에 새 바람을 넣으려 했다면, 구마라집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정리한 사람이다. 구마라집에 의해 중국 불교는 인도에서 전래받는 수준을 뛰어넘어 중국 고유의 토착 불교로 자리잡게 된다.

<구라마집 상>

구마라집은 중앙아시아 쿠챠국의 왕족이었다. 공주였던 어머니는 어린 라집을 불교에 입문시켰고, 최고의 불문 법사들 라집을 지도하였다. 라집은 박학다식한 불교 이론을 접하였다. 불교 뿐만 아니라 베다의 천문술, 수학, 음양오행, 힌두이즘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당시 5호 16국 시대에 북방을 주름잡던 전진왕 부견은 라집을 모셔오라고 했다. <도안>과 함께 <라집>까지 있다면, 불교의 참뜻을 알 수 있을 뿐 이나라, 불법의 신이 전진의 호국신이 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안 역시 라집을 만나 진정한 불교의 참 뜻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이들의 만남을 거부하였다. 라집은 전진의 수도 장안으로 오는 과정에서 양주에 갖히게 된다. 불교를 싫어하는 이들이 그를 가둔 것이다. 1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안과 부견은 모두 사망하였다. 결국 라집은 전진을 계승한 후진의 왕 요흥이 전쟁까지 불사하는 의지를 보이고서야, 장안에 겨우 오게 되었다.

구마라집이 중국 불교사에 중요한 인물이 된 이유는 긔의 <불경 번역> 때문이다. 라집은 방대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중국인들에게 대승 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반야>가 무엇인지를 이해시켰다.

중국에서는 구마라집을 기준으로 불경 번역의 단계를 나눈다. 성경이 예수를 기준으로 구약과 신약을 나누듯, 라집의 불경 번역이 중국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다.

중국사에서 구마라집 이전에 번역된 불경들을 <고역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은 <구역경>이라고 한다. 구마라집 이후에 당나라 현장법사가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구마라집은 격의 불교 수준의 중국 불교를 탈피하여, 중국 불교 수준을 인도 대승불교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인물이다. 대표적인 그의 번역서는 <대승론>, <반야경> 등으로 이것은 인도 전통 대승불교를 확립한 <용수> 등의 중관 사상을 중국에 그대로 이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6바라밀의 핵심사상은 <반야>가 어떤 지혜를 갖는지, <공>이라는 것이 <연기설, 업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였다.(2-3화의 인도 불교 이론 참조)

이렇게 해서 중국에서도 대승불교의 중관학파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공>사상을 바탕으로 진정한 불교이론을 갖춘 <삼론종>이 등장한 것이다.

구마라집의 불경 번역은 중국 불교 사상에 수많은 철학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구마라집이 대승 불교의 원전을 번역했기 때문에 대승 불교 교단이 난립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가 되면, 삼론학파을 필두로 열반학파, 성실학파, 섭론학파, 지론학파 등이 등장하게 되고, 수,당시기에는 삼론종, 사론종, 성실종, 천태종 등 종파까지 등장하게 된다.

2. 승조로부터 시작된 <삼론종>

구마라집에게는 구름과 같이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 제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승조와 도생이다.

승조와 도생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승조는 책을 베껴적는 필사 일을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었는데, 책을 필사할수록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승조는 <노자와 묵자>의 사상을 가장 좋아하였다. 특히 민중적이라는 점은 노자와 묵자의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더욱 민중적인 종교가 있었으니 <불교>였다. 그는 구역경 중의 하나인 <유마힐경>을 읽은 뒤 감동을 받아 불교에 입문하였다. 

라집의 제자로서 격의 불교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공>사상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밝히던 그는 라집의 사상체계를 중국인들에게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서구로 따지면, 예수의 철학을 알리려는 사도 바울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수많은 불경해석을 하였다. 구마라집은 <공>에 대한 이해가 가장 확실한 제자라고 그를 극찬하였다. 불교철학사에서 그가 지은 <반야무지론, 부진공론, 물불천론> 등은 이후 중국 대승 불교사에 큰 영향을 준 책이었는데, 그 중 <부진공론>은 삼론종의 이론적 근원이었다.

승조는 인도의 중관학파의 <공> 사상에 구마라집의 <해설>까지 더하여 중국 특유의 대승불교 학파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삼론학파>라는 연구 단체였다. 훗날, 삼론학파의 철학이 수, 당 나라 시기 정착되어 <삼론종>으로 발전하게 된다. 삼론학파는 대승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반야> 사상을 구마라집의 해설에 기초하여 연구하는 학파였다.

3. 도생로부터 시작된 불성논쟁과 <열반종>

반면,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특출하게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시킨 이가 있으니, 그가 곧 도생이다.

도생은 난징에서 축법태에게 학문을 배운뒤, 7년간 혜원과 함께 지내면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진리를 알고 싶어했다. 혜원을 떠나 구마라집에게 온 뒤, 그의 박학다식은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구마라집의 수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명성을 얻은 그는 북쪽을 떠나 남조로 내려왔다. 그는 당시 불교 이론에서 상상하지 못하였던 혁신적인 발언을 한다.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도 처음엔 깨달음이 없었다. 부처의 제자들 중에는 가난하고 글을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바보로 태어난 자는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같은데,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는가?

이런 내용을 강연하던 그는 깨달음은 지위고하와 지식의 유무를 떠나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제 막 불교 교리가 정리되던 마당에 그의 발언은 큰 파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세속적 쾌락만을 추구하고 불교를 비방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그런 자도 인간으로 태어났다. 불교를 비판하는 자는 깨달음을 전혀 얻을 수 없는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인 <불성>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갑작스럽게 깨닫는다면 <성불>할 수 있다. 살면서 수없이 이루어지는 행동들과 노력을 일일이 기록하여 깨달음에 영향을 준다고 하면, 누가 성불하겠는가?

기독교로 따지면, <죄 없는 자는 돌을 던져라>와 같은 맥락이다. 삶은 수없이 이루어지는 인과관계의 연속이므로, 결과가 그 과정을 설명해준다. 결과는 곧 그 과정들이 선택한 지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살아온 날들의 과정이 마지막 순간에 집약된 것과 같다. 인생의 어느 순간이든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불성>을 깨닫게 된다면, 악인이라도 마지막 순간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생의 과정 자체가 업보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이치를 몰라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부처의 보편적 정신>을 가지고 있다. 내 몸 안에 부처가 살고 있기에 누구든지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도생은 자신의 이론을 <돈오성불>이라고 말한다. <돈오>란 자신이 부처임을 갑자기 깨닫는 것이다. <성불>이란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부처임을 한번에 깨닫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훗날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사상에 영향을 준다.

도생의 이론은 <불성논쟁>이라는 새로운 논쟁을 가져왔다. 도생 이전의 불교 기본 이론은 <점수>였다. <점수>란, 한단계 한단계 수양을 하여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깨달음>의 철학은 <점수론>을 옹호하는 기존의 승려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 보수적인 승려들은 그를 추방해 버렸다. 어떻게 부처의 세계와 <공>사상, <반야>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자가 <부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도둑놈도 깨달으면 성불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도생은 <노장사상>의 허무주의로 세상을 현혹한다고 하여 교문에서도 추방된다.

하지만, 도생의 이론이 인도 본토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 사상이나 <반야> 사상과 반대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도생이 추방된 후 3년 뒤 인도에서 <대열반경>이 전래되었다. 대승불교의 심오한 뜻을 담은 이 경전에는 천제(세속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 불교를 비방하는 자, 무식한 자를 묶어서 다루는 말)도 사람이기에 성불할 수 있다라고 씌여진 것이다.

도생이 주장한 것은, 인도 본토에서 석가의 뜻을 해석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도생은 최고의 고승 반열에 올라 대승 불교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기존 가치관을 바꾸는 혁명이었다. <공자>와 같은 성인은 특출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일반인과 성인의 차이점이 좁혀진 것 아닌가? 누구가 부처가 될 수 있기에 인간의 능력은 무한한 것으로 확장된 것이다.

도생은 자신의 이론으로 <열반학파>를 창시하였다. <열반학파>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열반학파의 사상은 수나라 시대의 <천태종>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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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교의 성장으로 발생한 폐불 사건

구마라집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불교 이론 정리는 수많은 불교 연구 학파를 탄생시켰다. 승조의 <삼론학파>, 도생의 <열반학파> 외에도 구마라집의 제자들은 다양한 연구 학파를 만들어냈다.

구마라집의 제자들 중 <공> 사상을 <분석>하려는 시도를 가진 일파가 있었다. 인도의 4세기 하리바르만이 지은 <성실론>이라는 책에 의거하여, 변화하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즉, <공>이라는 것을 존재나 깨달음의 차원이 아닌 <존재에 대한 분석>으로 접근하려고 한 것이다. 이 학파를 <성실학파>라고 한다. 그러나, 승조의 <삼론학파>는 이 학파의 이론이 불교를 <존재와 논리>로만 접근한다고 생각했다. 성실학파는 대승불교가 아닌 소승불교로 분류되었고, 삼론학파에 흡수되어 삼론종의 일파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고구려, 백제, 일본 등에 <성실종>이란 종파로 이론이 전파된다.

구마라집의 제자 중에서는 인도의 유식학파 세친의 <화염경>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지론학파라고 한다. 이 지론학파는 훗날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또 남조의 진제가 번역한 <섭대승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섭론학파>를 만들고, 유식학파 세친의 <화엄경>을 연구하기도 힜다. 이들은 훗날 중국 유식학파의 대표종파인 <법상종>의 선구자들이 된다.

이렇게 불교는 <학파>와 <종파>를 만들어가면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불교가 성장함에 따라 유교와 도교 세력은 긴장하게 된다. 혼란의 절정기인 남북조 시기가 되면, 불교와 도교는 피터지는 혈투를 벌이게 된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이 피터지는 역사에 대해 한번 다뤄 보도록 하겠다. 불교와 도교의 싸움...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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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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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5화. 불교의 외침 - 이젠 인도를 떠나고 싶어요 ~

1. 인도에 불교가 없다?

불교의 종주국은 인도이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지나고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불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벳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불교의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특히, 4세기 이후,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석가의 가르침이 재정리되어 대승 불교로 정립된 인도의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의 힘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권의 성립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이 불교를 보호한 이래,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왕이 곧 부처의 화신이다>라는 사상으로 불교를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말하였던 아쇼카 왕이다.

기원후 3세기 까지도 인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들은 불교를 인정하였다. 기원 전후 인도 남부에 브라만교를 신봉하는 안드라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 중북부의 대부분 지역은 불교 문화와 간다라 미술을 인정하는 쿠샨 왕조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쿠샨 왕조는 쿠샨인(이란인) 계통의 왕조로 다양한 종교를 모두 인정하였다.

<쿠샨 왕조의 불상>

<쿠샨 왕조의 전성기>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2c)은 중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헬레니즘 상권을 장악하면서 상권과 통행세를 받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불자들을 보호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르는 비단길과 인도를 거치는 바닷길은 불교 전파 경로와도 일치했다. 헬레니즘의 다체로운 문화는 대승 불교의 확대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중국, 한반도, 인도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인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브라만 교를 신봉했던 아리아 인들의 강력한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건국한 굽타왕조는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족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인, 샤카부족(석가부족), 이란인(쿠샨인)은 아리아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고대 브라만의 후손들이 아리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고대 사상의 복구를 꿈꾸며 강력한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민족과 혼혈족, 반브라만 종교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

<4세기 굽타왕조의 영역>

그리고, 고대 브라만의 베다 문학을 재정리 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힌두교가 인도 전통 민족 종교가 되었고, 인도인의 율법은 <마누법전>으로 정리되었다. 고대 브라만 민족의 위대함은 <대서사시>로 편집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다.

대서사시는 고대 신인 브라만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슈누, 시바 등 고대적 요소를 갖춘 전통신을 아리아 부족의 현실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힌두의 신은 인도인을 괴롭혔던 모든 이민족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세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다.

그럼, 그동안 불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교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굽타왕조에 맞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인도 북부의 불교 교단들은 이미 큰 싸움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까지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북부 지역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불교 사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북방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특히, 쿠샨 왕조 시기 불교 교단이 주적으로 삼았던 이민족은 <훈족>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에서 밀려난 훈족들은 끊임없이 인도 북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훈족들은 동으로는 중국 북부로, 서로는 게르만 사회로, 남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여 기원후 세계사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준다. 인도의 고대 여러 왕조들이 이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이끌었던 게르만족의 이동까지 훈족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나마, 이란인이 세운 쿠샨 왕조가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 버틴 것은 왕조를 지지했던 불교 교단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는 망했고, 불교 교단은 훈족과의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복고주의는 불교 사상을 원시 브라만 주의로 돌려놓았다. 수드라 계급에게 평등은 더 이상 없었다. 바르나 제도의 계급 차별은 확고했고, 모든 직업과 주거, 결혼까지도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다. 마누법전은 힌두교를 믿는 아리안 민족만을 위한 법이었다. 하층민에게 <해탈>의 기회는 없었다.

아잔타 석굴 : 인도양식과 이전 양식들이 결합한 인도적인 양식.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항을 주었다.

2. 불교는 <밀교>가 되어간다...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운 굽타 왕조는 7세기가 되기 전에 멸망한다. 7세기 무렵, 불교를 옹호하는 바르다나 왕조가 출현하면서 중국 불교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도의 작은 독립국들은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힌두교가 지배층의 종교로서 백성들을 통제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7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교리에 포섭되어 그 의미를 잃어갔다.

인도에서 대승 불교는 점차 <밀교>가 되었다.

힌두교를 믿는 아리아인의 탄압으로 종교 집회는 비밀스럽게 열렸다. 불교도들은 교리를 찾는게 아니라 종교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점점 종교의 교리는 희박해지고, 절대자나 유일신을 찾는 신비주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초기 논리적인 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주술 신앙도 등장한다. 미륵이 바람과 불, 홍수를 몰고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믿음이 등장한다. 또 민간 신앙과 불교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민간에서 믿었던 수많은 신들이 불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변질된 <불교>조차 7세기 이후 사라져간다. 7세기 이후 인도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기본 사상은 <평등>이다. 계급간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와는 상극이었다. 하층민들은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가 싫어서 불교를 선택했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어짜피 똑같은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라면, 힘있는 <이슬람 정복자>들이 숨어지내는 불교도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세기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가 된 인도는 또 한번 문화적 격동을 경험한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은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래 저래 불상은 정권의 놀림감이 되었다. 16세기 무굴제국이 성립했지만, 무굴 제국은 전통 아리아 종교인 힌두교와, 하층민 종교인 이슬람을 융합시키기에 급급했다. 불교가 설 자리는 없었다.

21세기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인구는 전체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너무나 미미하다. 불교의 종주국은 대승 불교가 정립된 5세기 이후, 한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3. 불교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 불교

5세기 이후, 불교의 종주국 자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유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체계가 이미 정비되어 있었고,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 선진국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이었다. 중국어는 한자(표의문자)이고, 인도어는 범어(표음문자)이다. 중국인들은 유가, 법가 사상등 국가와 인간의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려는 특징을 가진 사상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이 분립하면서 생성과 멸망을 반복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한다면, 비교적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해 버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중국은 자신과 다른 이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중국식으로 바꿔 버린 것일까?

인도와 중국이 불교라는 문화를 공유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헬레니즘 문화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문화권을 만들고 떠난 뒤, 인도는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이 서역 지배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 자체가 이란계 왕조였던 만큼, 쿠샨 왕조는 동서 교역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부터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승 불교가 아시아 곳곳에 전파된 것이다. 특히, 쿠샨 왕조와 상업을 하던 실크로드 중간 중간의 국가들은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중국의 한 왕조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 당시 인도와 중국간 직접 교역로는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남방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 경전이 한 왕조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의 한족들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무제라는 강력한 왕이 <유학>을 국가 사상으로 공포했던 나라였다. 한 왕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 뒤,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 임용에 채용되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인 도교에도 밀렸다. 한 나라의 지배층은 고품격 품위 유지 사상으로 도교의 <황로사상>을 숭배하였다. 황로사상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지배층의 교양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처음 불교를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불교를 도교와 같은 교양 철학으로 생각했다. 도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라>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지배층의 우아한 집권 철학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말로만 생색내기 위한 교양 철학이었지만....)

불교 역시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을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복귀한 상태이다. 공이란 곧,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이란 것이 태초의 허무함이라면, 곧 자연 상태가 아니겠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구나....

결국 한나라 지배층이 생각한 불교는 도교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고, 교양이나 취미로 알아야 할 것이 도교나 불교 따위였던 것이다. 교양이나 취미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는 하나의 패키지 세트로 묶여서 교양철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 생각해보는 교양 철학이 어떻게 유가 사상과 맞먹는 거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 그럼 그 철학자들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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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7장. 수나라에서 중국식 불교의 기반이 시작되다

이제 불교전파사에 대한 <중국부분>의 막바지에 왔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전개한 인도에서의 불교 - 위진남북조에 전파된 불교가 당나라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완성된 후, 송대 이후에는 성리학에 밀려 포스팅할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 송기의 중국 불교가 완성되고, 이것이 한반도,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설명한 뒤 이제 한반도, 일본으로 불교 이야기를 넘겨보려고 합니다. 자, 그럼 당대 불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포스팅을 시작해 볼까요?

1. 위진남북조에 꽃 피기 시작한 중국식 불교

지금까지 인도 불교를 거쳐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도의 불교사상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용한 불교, 또는 노장사상을 통해 이해한 격의 불교, 또는 귀족계급 등 지배층을 위하여 활용한 불교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러한 초기 중국 불교는 전술했던 수많은 불승들이 불교의 참 뜻을 중국에 전하려고 노력하였고, 중국 내부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많은 불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분열된 중국 사회 내부에서는 이러한 불승들의 노력을 받아들일만큼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자체가 분열과 혼란 그 자체였으니까요. 따라서 불교는 위진남북조 전 시기를 통해 불법의 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불교가 왕권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 불법을 내세운다면 왕권에 의해 불교가 폐교당하는 <폐불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북주, 북제를 거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중앙집권의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 불교 본 뜻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위진남북조 후기와 수의 통일 과정 사이에는 성실종, 정토종, 율종, 선종, 천태종, 삼론종 등 종파적 성격을 가진 불교 교단들이 성립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특히 민중적인 선종, 정토종을 중심으로 백성 사회에 침투하여 불교의 대중화 운동이 시작됩니다. 불교단체들은 각 마을을 단위로 불교단체를 형성하여 하나의 작은 <교구>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구 설립 운동은 서양 중세의 <크리스트교>처럼 교황부터 대주교, 주교, 사제 등을 국가 행정 조직체계에 맞춘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중국 등 아시아의 향촌사회는 원래부터 그 독자적인 공동체성이 무척이나 강한 농경 조직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단체들은 <마을>을 종교체계에 흡수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종교체계가 <마을의 공동체 조직>으로 흡수되어 민중 속에서 불교를 전파하려고 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초기에는 교단이 성립되지 못하였으므로, 승려 개개인이 지방에서 교리를 전파하려고 하였으나, 교단이 성립되면서 대대적인 불교 단체가 마을마다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불상을 제작하고, 불경을 강독하면서 공동체 조직원들을 교화하고 계도하였습니다. 또 대규모의 법회를 열면서 주술적인 부분들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신비한 부처>라는 일종의 기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가면서 사찰의 폐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불교 교단이 커지고, 통일기의 제국가 불교가 연계되면서 승려는 세금을 면제받고, 교단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승려의 수가 증가할수록 국가재정은 부담이 되고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수, 당나라 때에도 불교세력이 왕권에 위협을 줄 정도로 성장하면 <폐불사건>을 일으켜 불교를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불교는 전체 시기를 통털어 보았을 때 도교와 함께 중국 사상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2. 수나라 : 본격적인 교단 융합 불교인 천태종이 시작되다.

위진남북조에서 교단불교로 등장한 선종과 정토종은 자세히 이야기했었습니다. 여기서는 수나라 시기에 교단 불교로 자리잡은 천태종을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중국 불교에서 가장 이론적으로 발전하면서 서로 보완관계에 있었던 종파가 수나라의 천태종과 당나라기의 화엄종입니다. 이 중 천태종은 남북조 시대 양나라 출생인 지의에 의해 탄생하였습니다. 지의는 7살 때 불가에 입문했다가 남북조의 혼란기를 패해 탁발승이 되었습니아. 탁발승이란 걸식하고 구걸하면서 도를 닦는 스님을 말합니다.

그는 어느날 문득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상태에 빠져 천년전의 석가 법회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체험하는 것을 <법화삼매>라고 합니다. 이것은 꿈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더 높은 차원인 <심령현상을 이용한 신통력>이었습니다.

그 이후 유명해진 그는 천태산에서 제자들과 집을 지어 <수선사>라고 부르며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이 천태산에서 그가 완성한 사상적 체계를 <천태종>이라고 부릅니다.

지의 불교의 특징은 지와 관 양지를 모두 강조하는 양자적 합일점을 찾은 교파라는 데 있습니다. 지라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 불교만을 고집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이라는 것은 수련을 통하여 불교의 참 뜻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지의는 학문만으로 불교를 찾는 것은 불교의 참 뜻인 중생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이라며 싫어했으며, 수련으로만 불교를 찾는 것은 이론적 바탕이 없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이 2가지가 다 중요하다는 것이 지의의 이론인데, 이것이 천태종의 개요입니다. 천태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의 입장도 반영하면서, 수련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입장 역시 무시하지 않는 종파입니다.

이 지의의 불교는 지, 관을 모두 중요시 함으로서 당시 수없이 나눠진 종파들을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그는 모든 불교의 진리들은 그것이 지이던, 관이던간에 원리 석가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진리는 모두가 원래 석가의 뜻 하나였으므로 석가의 본 뜻을 아는 것이 중욯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석가의 본뜻이 모두 지, 관을 통합하였다는 것을 <일념삼천, 삼제원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석가의 본 뜻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석가의 말씀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석가의 말씀 5단계가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각종 경전들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5단계의 석가 말씀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따라서 그는 법화경을 가장 중요시하였고, 법화경은 화엄경과 함께 동아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 천태종은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전파된 대규모의 불교종파입니다.

석가의 본 뜻이 하나다라는 천태종의 교리는 당시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어 수없이 대립된 불교 교파가 대립이나 갈등 없이 중국식 불교로 정착되는 것에 크게 기여합니다.

3. 이제 불교는 동아시아 문화권 전체에 전파되기 시작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중국에 정착된 불교는 점차 동아시아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불교의 전파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본 요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파된 시기가 동아시아 문화권이 완성되고, 불교 교리가 확립된 당나라 불교기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사상을 중국이 아직 다 깨닫지 못한 남북조와 수나라 시기라는 점입니다.

전진왕 부견 때 순도가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이것은 남북조의 초기단계인 전진시대로 이 때 불교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중국에서 가져온 불교는 도교사상을 불교사상으로 착각하고 이해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으며, 몇 번의 착오 끝에 수나라에게 천토종을 가져왔지만 이것도 완전한 불교교리 이해가 아니였습니다.

백제는 동진의 마라난타의 입교로 침류왕 대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역시 완전한 불교가 아닌 인도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초기 불교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불교의 유입은 이 당시 한반도가 불교 교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 유입된 불교가 가지는 호국성에 강한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점은 한반도의 불교가 중국과는 또 다른 <호국성>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될 때에는 불교의 본 뜻을 전파한다는 인도인의 취지를 중국 왕권이 저지하는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폐불사건> 등으로 이어졌으며, 중국은 불법과 왕법이 투쟁하는 과정 끝에 왕법이 불법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불교는 그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왕법이 승리해 버린 중국식의 격의불교를 유입한만큼, 불교는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 불교는 초기부터 왕법이 불법을 눌러 버렸고, 불법을 전파할 만한 사회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4세기 고구려, 백제의 불교 전파보다 훨씬 느린 6세기 법흥왕대의 신라 불교 전파는 더욱 가관입니다. 귀족들이 왕법에 이용되는 불교를 견제하고자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불교보다는 귀족적인 토착신앙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왕권은 이들 귀족권을 누르기 위해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결국 불교를 도입하였습니다. 신라의 법흥왕 때 왕명 자체가 불교식이었고, 진흥왕기 교단을 불교식으로 정비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의 불교는 철저한 호국적 성격이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호국불교보다 더욱 강력한 왕권 강화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묵호자, 마라난타 등은 모두 이름 자체가 서역식이고, 그들을 호승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인도-아리안 계통의 승려이거나, 서역계통의 승려로 보기도 합니다. 이 불교의 전파는 한반도의 종교적 문제를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화교류나 동아시아 문화권의 확립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합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6세기 백제 성왕 기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부터입니다. 일본에 대한 불교 포스팅은 중국, 한반도가 끝난 뒤 자세히 하겠습니다.

수나라기의 불교는 천태종 외에는 별로 다룰 것이 없어서 여기서 그만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중국 불교의 완성기인 당나라 불교, 침체기인 송나라 시기 불교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한국의 불교에 대하여 포스팅하겠습니다. 그럼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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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5장. 불교의 참뜻을 알고싶다!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제 수준낮은 격의불교의 단계인 중국불교가 <불법>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단계에 이른 시점을 포스팅하려고 합니다. 위진시대의 정음시대 현학, 노장사상으로 이해한 불교가 북위시대와 남조시대에 이르러 어떻게 변화하고 있었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1. 불도징 : 나는 불교의 참뜻을 중국에 전해야겠다.

위진시대에 진정한 불교의 포문을 연 사람은 <불도징>이었습니다. 불도징은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습니다. 그는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는 중국 백성들을 괴롭히는 석륵을 만나서 <주문으로 항아리에 연꽃이 피는> 주술을 보여줌으로서 석륵을 감화시켰다고 합니다. 불법에 높은 혜안이 있는 불도징이 철학 강론이 아니라, 주술로서 석륵을 감화시켰다는 점은 <중국 불교의 수준이 낮아서 직접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했음>을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불도징은 단 한권의 경서도, 단 한편의 논문도 쓰지 않은 채 신통력으로서만 중국 지배층을 교화하였다고 합니다. 실제 후조의 왕 석호는 불도징을 존경하였는데, 불도징은 석호에게 다음과 같은 짧은 글로서 국왕의 도리를 설파하였다고 합니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이 불도징에게는 도안, 혜원이라는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도안, 혜원이 바로 북조시대를 이끌어간 불교의 전파자들입니다.

2. 도안 : 노장수준의 격의불교를 인도불교에 접근시키다.

도안은 불도징의 제자로서, 그는 불도징을 십수년간 모신 뒤 불도징이 입적하자 불경 주해를 다는 일에 정력을 쏟아부은 학자입니다. 그는 불경에 주해를 아주 쉬운 말로 달아서 중국어로 변용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노력은 곧 <중국과 인도 사상을 융합한 선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수많은 경서를 번역하고 주해를 달면서 중국어의 어휘가 풍부해지고, 중국의 불교교리가 심화되었습니다. 도안은 쓸데없는 노장사상의 청담이 결코 불교 교리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면서 철저하고도, 확실한  근거를 통해 불교를 노장사상과 격리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도안의 명성을 듣게 된 전진왕 부견은 도안을 모셔오려고 십만대군을 일으켜 전쟁을 하려고 한 일화도 있습니다. 부견의 이러한 노력으로 도안은 전진의 수도 장안에 와서 수백권의 경서를 번역하였습니다. 훗일의 구라마습은 그를 <동방의 성인>이라고 까지 존대하였다고 합니다. 실제 전진왕 부견이 북방을 통일한 배경에 도안의 철학이 사상적 배경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도안은 한나라 이해 유행한 선법과 방야의 두 학설을 종합하여 반야학 6대가의 한 사람으로 지칭됩니다. 그는 난잡한 중국 불교에 계율을 확립한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또 모든 승려는 석씨를 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주장은 후세에 그대로 지켜져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안의 노력과 경전 번역은 노장사상의 수준으로 이용하던 격의불교의 중국 불교 사준을 전문적인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3. 혜원 : 30년간의 계율이 귀거래사를 만들어 내다.

혜원은 불도징의 제자로서 <정토종>을 개창하여 민중불교의 큰 틀을 확립한 인물입니다. 그는 '나미아미타불'이라는 아주 간략한 문구를 정성껏 외움으로서 극락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극히 간단한 가르침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입니다. 실제 후세 정토종 사람들은 그를 시조로 추존합니다. 그의 염불불교는 당대 강남에서 백련사 운동으로 전개됩니다. 그럼 혜원을 간단히 볼까요?

그는 도안에게 오랜 기간동안 불법을 전수받은 도안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계율> 중심의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불문은 속세를 떠났기에 왕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소신껏 지키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도연명과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혜원이 도연명을 만나 이야기 하던 중 도연명을 더 이상 전송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도연명 : <좀더 전송해주게나. 나는 국가의 관리이므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네는 속세를 떠났으니 자유롭지 않은가?>

혜원 : <안되네. 내 마음과 욕망은 자네를 더 전송하고 싶지만, 앞에 호계가 있으니 건널수가 없네. 이것이 삼십년 동안 지킨 내 계율이네.>

도연명 : <그런 계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혜원 : <의미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네. 선한일이 비록 작다 하여도 행하지 않아서는 안되고 악한 일이 비록 작아도 행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이 유가에 있더군. 내가 만일 이렇게 작은 일도 시종일관하지 못한다면 큰 일에는 더욱 시종일관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도연명은 그 말을 듣고, 대화마자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여 돌아오는 즉시 고관의 외투를 벗어던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고에 길이 남을 <귀거래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혜원은 원래 노장사상에 박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안이라는 특출한 불도자를 만나 출가한 후, 기존의 노장사상을 뒤집고 불교교리를 완성시킨 반야성공을 연구하였습니다. 반야성공은 <본체는 공이나 무이다>라는 석가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사상입니다.

그는 도안에게 배운 뒤 강남에서 구라마습을 만나, 불교와 중국 전통을 융합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특히 불문이 왕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영혼이 불멸한 것인가 등등의 문제를 놓고 중국 전통사상과 치열하게 논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혼란기 중국 사회의 정체성과 관련된 논쟁으로 중국 불교 역사상 대전환기에 체계적인 불교사상을 잡아갔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4. 구마라습 : 경전 번역으로 중국 불교수준을 업그레이드 하다

구마라습은 서역에서 태어난 유명한 불법학자입니다. 전진왕 부견은 도안, 구라마습 등 당대 최고의 고승들을 전진에 데려오려 많은 노력을 하였고, 구마라습을 중국에 초빙하였는데, 그가 중국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부견, 도안이 죽은 뒤였습니다.

그는 중국에 반야 사상을 가장 잘 이해시킨 학자로서 수준낮은 중국 불교수준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대승론을 번역하는 등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불교원전 번역과 대승경전 번역은 중국의 불교가 <대승불교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됩니다.

그는 진제, 현장과 함께 중국 불교의 3대 번역가로 불립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구마라습을 기준으로 구마마습 이전의 번역 불경을 고역경, 구마라습의 번역 불경을 구역경, 당나라 현장기의 변역 불경을 신역경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가 이러한 불교 경전을 번역함으로서, 이 번역된 경전을 통해 중국에 새로운 불교 종파들이 등장합니다. 중국 불교의 가장 큰 흐름인 <삼론종, 사론종, 성실종, 천태종>은 모두 구마라습이 번역한 경전에 근거하여 창립되었습니다.

5. 도생 : 자신이 부처임을 한번에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

도생은 구마라습의 수재자로서 불경을 번역한 유명한 승려입니다. 그런데, 그가 구마라습과 따로 분류되어 중국 불교사를 장식하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기존 사상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속적 쾌락만을 추구하고 불교를 비방하는 자(범어로 천제)도 인간이므로,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은 모두 누구나 불성이 기본적으로 있다고 믿고, 따라서 신분고하와 직위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다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당시 불교계의 이단아 역할을 하는 것이었죠. 도생은 <노장사상과 공자, 맹자 사상을 받아들여 허무매랑한 주장만을 반복한다>고 매도되었고, 교문에서는 그를 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3년 뒤 인도에서 전래된 대열반견에는 <천제도 성불할 수 있다>라는 문귀가 있었고, 실제 도생의 이론은 인도 본토의 이론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도생은 최고의 고승 반열에 올라 불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의 이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돈오성불입니다. 이것은 <돈오>하여 아느날 갑자기 깨달으면, <성불>하여 부처가 된다는 이론입니다. 즉, <자신이 부처임을 한번에 깨닫는다>는 것이 돈오성불의 내용인데, 이 내용은 훗날 선종 등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6.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는 불교 토착화의 진통이었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진통을 겪으면서 불교의 체계화가 이루어지고, 불경의 번역이 이루어지는 시기였습니다. 당대 불법가들은 인도를 통해 불법의 참뜻을 깨닫는 것에 주력하였고, 많은 경전에 번역되었습니다. 일부는 직접 서역과 인도에 진출하여 불법을 연구하였고, 일부는 외래 승려를 초빙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인도에서 직접 포교활동을 위해 중국에 건너온 승려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진정한 교리를 깨닫는 과정속에서 국가와의 마찰이 심해집니다. 국가는 불교의 진정한 교리를 탄압하면서 불교를 세속적인 왕권강화에 이용하려고 노력합니다. 대표적인 왕권과 불법의 충돌이 바로 <폐불사건>입니다. 불교는 이러한 폐불사건을 여러번 경험하면서 불교 스스로 정화노력을 하고 진정한 불교의 참뜻을 찾기위해 나아갑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당대에는 불교의 참뜻을 자체적으로 해석하여 등장한 여러 종파가 나타나게 되고, 중국의 불교가 석가의 뜻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종파불교로 발전합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남북조시대 불법과 왕법의 충돌에 관련된 폐불사건과 수당대 종파불교로의 발전을 다루겠습니다. 중국에서의 불교사는 당대까지만 다루겠습니다. 왜냐면, 불법이 쳬계적으로 이루어져 완성된 시기가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중국의 당왕조까지 이고, 그 이후 중국, 인도의 불교는 새로운 사상에 의해 더 이상 세력을 확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인도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것처럼, 중국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되어 새로운 경지에 이르는 과정들을 포스팅 하겠습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일본 불교를 다루면서 불교가 어떤 형식으로까지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죠. 그럼 일단 다음 포스트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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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의 난세 속에서 등장한 현학과 청담의 달인들

이번 장에서는 위진남북조의 문화를 다루겠습니다. 그 첫 번째로 청담사상에 대한 포스트를 해볼까 합니다.

1. 귀족문화 시대가 도래하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지배층은 <귀족>입니다. 이 귀족들은 한대의 호족계층이 점차 성장하면서 이루어진 계급입니다. 한나라 이후, 지속적으로 대토지와 사병을 양성하면서 성장한 호족들은 혼란한 시대를 맞이하면서, 중앙 관료로 급속히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이 귀족사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들 귀족들은 이제 단순히 <토지와 사병>을 가진 지방의 실력자가 아니라 <다양한 학문과 교양>을 가지고 존경받는 계급으로 성장합니다. 지배계급인 귀족이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몰두한 <교양과 취미> 생활은 곧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화로 정착되었습니다.

중국의 문화 특징은 서양과는 달리 전문가 집단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지배층이 곧 학자이고, 지배층이 전문가이며, 지배층이 곧 관료인 사회입니다. 따라서 지배층의 수준에 따라 당대 문화가 결정되는데, 위진남북조의 문화는 수당대까지 이어지는 가장 귀족적이고 화려하며, 국제적이면서도, 이민족의 색채까지 가미된 문화였습니다. 당대 지배집단이 <북방 이민족 왕조>와 <남방 한족 귀족 왕조>였으니까요.

위진남북조의 문화의 특징을 말하자면, 이민족 침입에 의하여 서방 문화가 급속히 전래된 가운데, 아주 다양한 문화가 각지에서 꽃핀 시기입니다. 호한체제가 구축되면서 북방문화는 중국문화에 융합되었고, 이것은 전통의 <중화사상> 속에 다양함이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양산하게 됩니다. 외래 종교인 <불교>와 다양한 종교가 유행하였고, 불안한 시대 속에서 염세주의적인 사상이 크게 융성합니다.

특히, 심한 격동기의 중국은 인생에 대하여 노장사상, 불교사상 등을 통하여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유교는 이러한 혼란기에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귀족문화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문화였고, 유교의 전체주의적 윤리나 왕권강화윤리와는 반대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조왕조가 이민족 중심의 왕조로서 서역문화와 한문화가 섞인 문화라면, 남조왕조는 한족이 중심이 되어 <화려하고 우아한> 남조 귀족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남조문화는 북조문화보다 훨씬 더 귀족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귀족문화는 결코 서민적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들 문화가 개성적이었다면, 그것은 귀족만의 독특한 특권에 의한 것이었고, 이들 문화가 국제적이었다면 이민족 왕조의 등장에 의한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은 귀족적 취미와 교양이 다양하다는 것이지 결코 대중적인 다양성을 확보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귀족문화는 그들만의 문화에 머물렀습니다.

실제, 서민문화가 출현하는 것은 귀족계급이 몰락하고, 사대부 계급이 성장하는 <송대 이후>입니다. 송, 원, 명, 청의 문화는 각각 문화적 특색을 달리하지만, 모두 <서민적 문화>를 존중하였다는 특색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에서 수, 당>의 귀족문화에는 이러한 서민문화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 현학 사상이 발전하다

현학사상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유가사상이 쇠퇴하고 호족들이 대두하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입니다. 위나라 시대 이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 사람들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보다는, 사후세계와 생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유가의 충효 원리>보다는 <노장사상과 불교>의 공사상, 무사상 등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나라에서는 <정시의 음> 시대라고 하여 하안, 왕필 등이 <정음시대의 현학>을 논하였습니다. 현학이란, 도가사상의 철학인 노자, 장자, 주역 등을 논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인 <현 : 도>가 무엇인가를 논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이것의 핵심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이나 논어같은 심오한 사상을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가에 나오는 무위자연, 소국과민, 자연합치 등을 이용하여 <유교, 음양오행> 등을 도가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죠.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합니다.

3. 개인주의와 은둔주의 사상이 대두하다.

위진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은 은둔주의 사상이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지방의 호족들과 아슬아슬한 시대에 태어난 2세대 관료군들은 중앙집권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제군주나 관료제도에 의한 재배체제를 벗어나서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죽림칠현과 같이 은둔하려고 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장자의 <무정부주의> 사상을 가지기 까지 하였습니다.

특히, 죽림칠현은 유교의 예교적 형식주의에 반발하여 유교를 적극 비판하고, 개인주의적인 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죽림칠현은 난세의 인간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면서 고독한 인간존재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의 존재를 현상계를 초월한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 여기는 <신선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신선사상은 곧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자연합치>사상과 연계되어 세속을 탈피한 생활이 가장 안정된 삶이라는 이론으로 전개됩니다.

4. 완적의 자연주의 사상

죽림칠현이란 진나라 시대 대나무 숲에서 청담으로 세월을 보내던 7명의 노장사상가들을 말합니다. 이들의 이름은 완적, 혜강, 왕융, 향수, 완함, 유형, 산도 등 7명입니다.

이중 완적은 귀족가문의 유력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관직을 권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가는 것이 곧 생명을 단축하는 미친 짓이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진나라에서 조비의 충신 <장제>가 관직을 권하였어도 완적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마의>의 정변으로 조씨 일가가 몰락하고 <사마씨>의 세상이 오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완적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사마소가 완적을 사위삼으려고 하자 완적은 미친 듯이 술을 마셔 인사불성이 되어 사마소의 청탁을 거부한 적도 있었답니다. 사마소가 강제로 그를 관직이 앉게 하자 그는 곧바로 관직을 이용하여 말을 타고 유람을 떠나 버렸다고 합니다.

완적은 형식과 예법을 완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법에 얽매인 사람이 완적을 찾아오면 눈동자의 <흰자위>를 드러내어 무섭게하고, 거문고나 술로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완적의 태도에서 <백안시> <청안시>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남을 업신여겨 냉정히 째려보는 것은 백안시, 남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청안시라고 합니다.

그는 상중에도 술과 고기를 맘껏먹고, 유교 예법을 거슬르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집권자인 사마씨들과 대립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완적의 사상은 만물은 천지에서 나오고, 천지는 자연(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에서 나온다는 자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을 본받아 도가 변화하므로 군주가 도를 지키면 만물은 저절로 변화하여 조화로울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는 자연과 봉건적 신분질서를 결합하여 <윗사람이 되어서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고 비천한 신분에 처하여도 귀한 이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5. 혜강과 광릉산의 악보 이야기

죽림칠현인 혜강의 아버지는 조조군대의 모사였고, 그의 아내는 조조의 친척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항상 음악에 심취하여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혜강이 스스로 자부하는 거문고를 타고 있는데, 어느 노인이 그 거문고에는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서 <광릉산>이라는 곡을 연주해주었습니다. 혜강은 광릉산 곡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항상 거문고를 탔다고 합니다.

광릉산 - 전국시대 진나라가 통일을 하기 위해 한을 공격하려고 하자 한의 대신 협루가 진과 내통하여 돈과 관직을 받고 한을 팔아넘기려 하였다. 이 때 대신 엄중자가 이에 분개하여 제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이 때 백정출신인 섭정을 만났다. 섭정은 엄중자의 간청을 받아 한나라로 가서 협루를 죽인 뒤 자신의 얼굴을 못알아보게 하려고 자신의 얼굴과 신체를 으깬 뒤 죽었다. 한나라는 그 시체를 길에 버리고 누구인지 밝히려고 하였다. 이 때 섭정의 누이는 목숨을 걸고 시체옆에서 울어서 그 시체가 자신의 동생 시체임을 알리고, 동생이 <대의>를 행하였음을 알린뒤 자결하였다.

죽림 칠현은 나중에 사마씨의 회유책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혜강은 같은 고집쟁이는 의연히 사마씨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혜강은 그 정신적 고통을 달래기 위해 시작과 회화에 몰두하고 그래도 울분이 풀리지 않으면 거문고를 탔습니다. 그리고, 대장장이가 되어 쇠를 두들기면서 울분을 풀곤 하였답니다.

 어느 날 혜강은 불에 군 쇠붙이를 두들기고 그의 친구 향수는 대장간의 풀무를 손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사마씨의 심복인 종회가 발문해 왔습니다.  종회는 혜강의 학식과 명성을 사모하여 그와 교제하기 위하여 방문했던 것이지만, 혜강은 종회가 온 뜻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방약무인한 태도로 탁탁 쇠붙이만 두들기고 있었습니다. 종회도 또한 혜강의 뜻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그 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서먹한 분위기가 오래 계속되자 참다못한 종회가 부아를 내면서 일어서 나갔습니다.

 혜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습니다.  "무슨 소문을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는 거요?"

 종회가 홱 돌아서며서 응수하였죠.  "들을만한 소문을 듣고 왔다가 볼 만한 것을 보고 가오."

 당시 조정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던 사마씨는 완적과 혜강을 자파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갖가지 회유책을 썼습니다. 완적은 술과 익살스런 말로 그때 그때의 위기를 무난히 모면하였으나 혜강은 끝까지 사마씨 일파와 직설적으로 대결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사마씨 일파들은 혜강의 죄를 나조하여 그를 형장으로 끌고 갔답니다.

 혜강은 형장에서 한나라의 간신을 척살한 섭정의 행동에 깊은 감동을 느끼면서도 간신을 제거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술책에 빠져든 자신의 무력함에 회한과 통한의 분노를 삼켰습니다. 혜강은 그 자리에서 거문고를 빌어 '광릉산' 한 곡조를 탄주하였습니다.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쳐 갈고 닦아온 그 곡조를 거문고에 실어 이승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그의 비장한 멜로디가 흡사 장송곡처럼 온 형장 안에 울려 퍼지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혜강은 거문고를 손에서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그러나 '광릉산'아 , 너는 이후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그것이 원통할 뿐이로다!"

그러나 서른 아홉에 혜강은 죽었지만, 광릉산은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 사실 제가 읽은 김용의 소설중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작품중의 하나가 <소오강호>였는데, 거기에서 유정풍과 곡양장로가 광릉산 악보를 발견하여 둘이 음악으로 맺어진 친구로 나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가장 감명깊었던 장면중에 하나이고, 눈물나는 장면중에 하나였죠. 그 장면에 감동받아서 김용작품의 시리즈를 군대에서 반년 만에 모두 완독했던 적이 있습니다. 월나라 월녀검법에서 청나라 녹정기까지 모두요....

6. 청담이란 무엇인가?

청담사상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탈속적인 논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청, 담은 말 그대로 세속을 떠난 깨끗한 이야기를 말하지요.

이것은 역과 노장사상, 인물비평등을 토론형식을 빌어서 논하는 것이었는데, 초기 이러한 노장사상적인 논쟁을 <현학>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점차 현학적인 기풍은 비현실적인 공론으로 기울어졌고, 나중에는 죽림칠현과 같은 무정부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논쟁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들은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철학적인 논쟁을 좋아했고, 예술적인 가치를 중시하였습니다. 완적의 철학사상과 혜강의 광릉산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제시한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 현실에 대한 비관적 현실을 떠나 우주론적인 최고 원리의 경지가 무엇인가를 토론하였습니다.

이 청담 사상은 초기에는 노장사상과 탈세속적인 사상, 정부 비판 사상이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뷸교>사상 쪽의 청담 이야기로 변환됩니다. 위진의 노장사상 - 남북조의 도교사상 - 수, 당에서의 불교 사상으로 이야기의 논의가 변화되면서, 점차 불교사상을 이해하는데 주력하게 됩니다.

실제 중국 초기 불교는 불교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노장사상을 도용합니다. 불교의 <공> 사상은 도교의 <무위>사상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열반>의 개념을 도교의 <신선>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청담이 진행된 과정을 보여주는 일례이자, 초기 불교 수준이 너무 낮아 노장사상이나 현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노장사상은 청담사상과 함께 발전하였지만, 점차 불교적 색체를 띄게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장, 청담, 불교사상의 유행은 전통 유학자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에 대한 반발로 <숭유론>이 유행하고, 유교부활을 말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그들의 견해는 대부분 묵살되었다고 합니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는 유교적 도덕원리가 통하기에는 너무 어수선한 사회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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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춘추전국시대의 사상 2. 도가와 묵가

이번 장에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의 2번째 편으로 도가와 묵가를 간략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 두 사상은 전편에 다른 유가와 정면적으로 충돌한 사상으로, 유가와 비교해서 해석하면 재미있습니다.

1. 도가

도가의 기원은 노자, 장자의 노장사상을 흔히 말합니다. 도가는 유가와 함께 중국 2대 사상으로 발전하지만, 그 사상은 유가에 대한 반발적 경향이 강합니다.

도가 사상의 핵심은 유가에서 말하는 <도덕원리>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가부장권을 이론적 근거로 하여 전제군주권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유가는 국가주의적인 기형아적 사상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춘추전국의 혼란은 인간이 욕심을 부려서 일어난 <인재>라고 보고, 인간이 욕심을 떠나서 자연 그대로의 삶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소위 <무위자연>이며, 도가에서는 국가생활을 떠나 자연생활에서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보통 이러한 현실 부정의 사상은 중국 남부의 초나라 등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인도 등 남부 지역의 자연주의 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이라 보는 입장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상의 기원이 아니라 도가 사상이 실제 자연중심적이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중국 사상의 기반을 이룬다는 점이죠.

도가에서는 국가란 것의 규모가 커질수록 인위적인 사회라고 말합니다. 국가는 될 수 있으면 인간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최소 단위인 것이 좋으며, 국가의 규제보다는 자연의 법칙이 더 커질 때 진정한 자유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을  <소국과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따라서 국가가 만약 일반 백성의 삶을 지나치게 규제한다면, 백성들은 국가에 대하여 저항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저항권>의 개념이 은연중에 나타나는 것이며, 중국 민란의 사상적 근거의 대부분이 훗날의 <도교>에서 비릇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2. 도가의 사상가

도가 하면 일단 노자를 떠올릴 것입니다. 도가의 창시자이자 무위자연, 소국과민이라는 용어도 노자에게서 비롯되니까요. 그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였고, 백성들의 저항을 인정하였으며, 유가의 인위적 질서를 비판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노자가 은둔하기 직전 국경검문소 병사의 요청으로 그 자리에서 적어주었다는 <도덕경>만이 남아 있는데, 이 도덕경의 심오함은 계몽주의 시대 서구 사상가들마저 감탄하여 필독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장자는 도가사상에 종교성을 주입하여 <도교>를 확립하는데 기여한 철학가입니다. 그는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여, 어떤 진리도 절대적 근원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내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가, 내가 나비인데 지금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라고 말한 부분은 진리의 상대성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말입니다.

3. 묵가 사상

묵가는 묵자가 창시했는데, 유가의 형식주의와 불평등주의를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나온 제자백가입니다. 묵가는 전국시대 당대에는 가장 활발했던 학파로서, 당대 사상을 이끌었던 핵심 제자백가입니다.

묵가가 유가를 비판한 내용은 다양합니다. 일단 유가의 윤리성이라는 것이 너무 형식적이고, 비실용적이라는 점입니다. 묵가의 입장에서 유가를 바라볼까요?

유가에서의 예악정치란, 속마음을 숨기고 형식으로만 상대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왕위세습이라는 것은 지배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사회적 제도 장치입니다. 유가가 말하는 어짐, 효도, 우애는 자신들의 가족만을 위한 가족윤리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사상에 맞지 않습니다. 묵가에서는 유가의 사랑을 <차별애>라고 하며 비난합니다. 또, 삼년상이란 쓸데없는 허례허식으로, 그 시간에 노동을 해서 이웃과 더불어 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가가 말하는 정치철학은 너무 현세주의적이라 내세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다수 <백성>들의 삶에 위안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반대의 사상이 묵가 사상의 핵심입니다.

묵가사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겸애,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비공, 모두가 평등하다는 상동, 모두가 일한 만큼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는 교리, 위인을 존경한다는 상현, 왕위와 높은 직책은 능력에 따라 열심히 일한자에게 준다는 선양 등을 주장합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꼭 갖추어야 하는 본성은 <가족윤리>가 아니라 <노동의 자세>라고 말합니다. 노동은 곧 생활이자, 사회적 능력이자,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온정인 것입니다.

묵가사상에서 본 정치는 노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공정한 능력 사회입니다. 이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이 너무나 크다고 묵가는 말합니다. 즉, 국가는 정치를 공정하게 할 수 있는 인물을 선거(선양)하여 그 인물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의 부강함, 인구의 증가는 모두 공정한 정치에서 나오며, 공정한 정치란, 노동자들에게 생산, 노동, 절약의 정신을 심어주고 가난한 자를 없애주는 정치를 말합니다. 특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을 <3환의 제거>라고 말하는데, 3환이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 추위게 입을 것이 없는 것, 일하는 자에게 휴식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묵가는 묵자 이래 거대한 교단을 형성하여 사회 노동조직이자, 종교적 성향을 지닌 사학 집단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절대적 겸애를 바탕으로 한 <공리주의>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랑>을 핵심 덕목으로 하는 사상체계였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노동과 금욕주의를 통하여 생산력과 개인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으므로, 게으른 자에 대한 귄위주의적 체벌과 훈련, 노동에 대한 복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묵가의 강력한 노동 중심의 권위주의는 묵가의 몰락을 초래합니다. 춘추전국시대 가장 강성했던 묵가가 몰락한 원인은, 그 사상이 너무나 철두철미하여 <중용>을 강조하는 중국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과업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후의 묵가 교단은 중국 역대 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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