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퀴즈 - 세계사 0914

역사퀴즈 - 세계사 인물 일화 퀴즈 0914

오늘은 서양 역사 위인들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든 퀴즈입니다.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만을 이용해 주시고, 채점 및 오답확인 버튼 눌러주세요!!

1.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그는 영국 르네상스와 해외 진출 시대를 지휘한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에 경제 고문(16세기)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금융'이란 무엇인가를 여왕에게 강의했으며, 런던거래소를 만들어 '증권'과 '주식'에 대해 새 장을 열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대학을 설립해서 유명해지기도 했었다.

그가 남긴 명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경제 이론에 대한 일화이다.

만약에 똑같은 100원짜리 동전이 있지만, 하나는 은이 많이 함유된 신권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구권이라면 사람들은 어떤 돈을 쓰겠는가?

또 만약 깨끗한 돈과 낙서가 된 돈이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돈을 더 빨리 쓰려고 하겠는가? 만약 같은 가치의 돈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 가치가 다르다면 좋은 돈(양화)는 집안에 꼭꼭 숨겨둘 것이고, 나쁜 돈(악화)는 시중에 계속 돌게 될 것이다. 결국 나쁜 돈이 좋은 돈의 유통을 막고 그것을 저장하게 하므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이것을 바로 그의 이름을 따서 ______ 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 말은 1558년 그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쉬운 설명으로 경제학 충고를 하기 위해 편지를 보낼 때 제목으로 적은 말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독재자인 제임스, 찰스 왕가가 이어지자 이 말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왕이 꼭꼭 숨겨두고 아껴두던 인재들은 독재자들에게 다 제거되었고, 간신들이 정치, 경제쪽에서 활개를 쳤다.

그가 죽은 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간신배들이 설치고 숨어있던 인재들은 제거된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1.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① 윌터롤리        ② 드레이크         ③ 그레셤
④ 제로섬           ⑤ 셰익스피어      ⑥ 스펜서    ⑦ 베이컨

 

2.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레스토랑이나 카페같은 곳에서 음식을 먹었는데 돈이 모자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때 쓰는 격언으로 '_____의 십오분' 이라는 말이있다.

그가 프랑스와 1세 왕의 명으로 로마에 갔다가 여비가 떨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 신분상 돈이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때 그가 15분만에 생각한 계책은 이것이었다.

일단 자신을 저명한 의학자라고 말한 뒤, 자신이 프랑스 왕과 왕비를 독살하기 위해 독약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즉, 프랑스왕을 제거해서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경찰이 출동해서 그를 체포했고, 중대 범인으로 분류되어 파리까지 정중한 대접을 받고 여행을 하면서 프랑스와 1세 앞까지 갈 수 있었다. 그는 위트로 위기를 넘기고 국가적 망신도 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쓴 유명한 저서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는 천재적인 두뇌에 매우 위트넘치는 인물인 '파뉼주'가 등장한다. 파뉼주는 매우 총명하지만, 그의 두뇌를 쓸데없는 곳에만 사용한다. 파뉼주는 사악하고 거짓말을 잘하며, 자신이 당한만큼 철저하게 복수하는 것을 매우 잘한다.

그 역시 프랑스 왕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철저하게 부서버릴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다행이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그는 충신으로서 일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2. 위 지문에서 말하는 '_____의 십오분'에 들어갈 인물은 누구일까요?
① 플루타르크            ② 레쉴리에            ③ 반 자크
④ 프랑수아 라블레    ⑤ 필립 시드니        ⑥ 카르멘

 

3.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꽃을 피운 인물이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그리스 동맹국들에게 아테네 여신과 아폴론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1) ____ 섬에 공동 자금을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강압적으로 공물을 받았기 때문에 아테네와 동맹국들의 동맹은 (1) ______ 동맹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동맹이 끝난 후, 강압적인 공물 헌납으로 아테네는 주변 도시국가들의 불만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2)______ 섬에서 열리는 올림피아 제전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치루기도 했다.

(2)______ 섬은 이오니아 해안의 남쪽에 있는 섬으로 이곳은 학문과 사교의 중심지이자, 제우스 신전이 있는 국제 종교회의장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열리는 경기는 그리스인의 민족적 유대를 강화하고, 모든 그리스인은 신화에 나오는 여인 <헬레네>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스스로를 <헬레네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열린 올림피아 제전은 경주,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멀리 뛰기, 레슬링의 5가지 종목이었다. 이 다섯 가지가 열린 이유는 바로 다섯 가지 종목이 페르시아 등 이민족과의 전쟁 때 필요한 핵심 군사훈련 항목이었기 때문이다.

 

3. 위 내용을 바탕으로 빈칸에 들어갈 섬 2개의 이름을 골라주세요.(정답은 2개입니다.)
① 델로스        ② 시라쿠라        ③ 간디아
④ 로도스        ⑤ 크레타           ⑥ 파마구스타    ⑦ 살로니카

 

4.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신들은 피에 목말라 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잉카 문명의 최후 지도자 몬테수마 1세였다. 그는 신대륙을 점령하고자 하는 에스파냐의 코르테스 장군이 성경을 앞세워 학살을 자행하자 이 말로 침략군을 비꼬았다고 한다.

3백년 뒤,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파가 정권을 잡고 공포정치를 했다. 지도자인 ______ 는 길로틴 박사와 함께 단두대(길로틴)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잘랐다.

일년에 2천명의 목이 잘렸으니, 하루 평균 몇 명이 죽은 것일까? 같은 자코뱅 파의 꺄뮤 템란인간을 위한 혁명으로 '인간이 잔인하게 학살되는' 현장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혁명위원회가 사람들을 학살하니, 자신은 '자비위원회'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구해겠다고 선전물을 뿌린 것이다.

혁명은 아름다울 줄 알았으나, 잔인했다는 것을 깨달은 까뮤 템란은 마지막에 자신과 몬테수마 1세를 동일시 하면서 마지막 선동 문구에 이렇게 적고 체포당했다.

'신들은 피에 목마르다'

후대 소설가들은 평범한 삶 속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는 이들이 좌절할 때 이 문구를 애용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피에 목마른 공포정치를 했던 _____________ 도 결국은 공포정치를 반대하는 이들에게 붙들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4. 동료에게 까지 피에 목마른 자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극빈층을 위한 과격한 정책을 시도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 혁명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① 나폴레옹         ② 알렉산드르 뒤마        ③ 로베스피에르
④ 숀 마리노        ⑤ 페이스트 트라토스

 

 

5.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군주는 나라의 첫 번째 심부름꾼이다.'

이 말은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이 했던 말이다. 그는 군주란 국가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서 나라가 발전하는 데 첫 번째 공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가가 발전하고 국왕과 국민이 하나가 되어 헌신하기 위해서는 특정 세력이 나라의 주도권을 갖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나라에서는 특이하게도 가톨릭에게도, 개신교에게도 어떠한 특권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말하는 종교정책은 바로 모든 종교가 인정되는 '관용'이었다. 당대 유럽에서는 종교 전쟁이 있었고, 어느 나라이던지 카톨릭이거나, 개신교이거나 하나의 '하나님'을 믿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보다는 국왕이 헌신하고, 국민이 왕을 믿는 것이 국가 발전의 선행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바로 '계몽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궁전에서 분수가 막혔는데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수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분수를 바라보는 순간 기적적으로 물이 다시 솟아올랐다. 그러나 어떤 신관도 그것이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왕 자신도 '카톨릭 국가에서는 이런 것을 기적이라고 말하겠지?'라고 웃어넘겼다.

어느날 가난한 병사가 마리아의 제단에서 은그릇을 훔치다 걸렸는데, 이미 마리아가 용서하셨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왕은, '그런 기적도 있을 수 있는 일이구나' 라면서 병사를 용서했고,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두 번 다시는 마리아한테서 그런 선물 따위는 받지 말거라'

결국 그는 누가 종교를 믿던, 믿지 않던 무관심한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종교는 정치가 관여할 일도 아니며, 종교 역시 정치를 넘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훗날, 이 나라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재국을 세운 재상 비스마르크는 국가 운영은 '피와 철' 만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카톨릭 세력이 국가 운영에 딴지를 거는 것을 막기 위해 종교 전쟁에 엄청난 힘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이미 프리드리히 대왕이 남긴 유산 때문이었을까?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비스마르크는 카톨릭 하나를 제압하지 못하여 국내에서는 평생 하고픈 정책을 제대로 펴지 못하였다고 한다.

 

5. 위 일화 속에 나온 프리드리히와 비스마르크와 관련있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① 서러시아        ② 노브고르드        ③ 프로이센
④ 아일랜드        ⑤ 스코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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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세계사 7

'문명이 형성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한다.  그 최초의 문명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그 문명은 독자적인 것이었을까?

1장. 4대 문명이 등장하다.

자, 이제 신석기 이야기는 그만 두고 실제 '문명'이 발생했다는 문명시대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아참, 전에 이야기했던거 기억날까? 문명은 대부분 청동기 시대에 이루어졌다는거 말야.

우리가 교과서에서 열심히 외웠던 세계 4대문명도 다 청동기 시대에 형성되었지. 물론 중국인들은 황하문명이 선석기 때 부터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고대 아메리카 문명들도 신석기 때 문명을 이루었으니깐 절대적 법칙은 아니야.

선사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황하, 인더스 문명처럼 지역을 기준으로 문명을 나눠놓으면 공부하기가 편해. 각 지역별 문명을 이해하면 유럽, 서아시아, 인도, 동아시아로 전개되는 역사 과정을 쉽게 공부할 수 있거든.

하지만 문명과 문화권은 같은 말이 아니야. 문화권은 인문학이나 사회학에서 주로 쓰는 용어인데, 의식주나 생활환경 등 사람들의 공통된 생활방식으로 공동체를 구분하는 방식이야.

예를 들어 역사에서는 농경문화권, 유목문화권, 수렵문화권 등으로 나눈 방식이 대표적이지. 하지만 이 문화권의 개념은 인종이나 국가와 같은 것들을 고려하지 않아. 예를 들어 동아시아인들은 농경, 젓가락 사용, 유교와 불교 등 공통된 요소가 있기 때문에 중국인, 한국인을 구별하지 않고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부르지.

그럼 문화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고대 사회에서는 국가나 인종같은 것보다도 '환경'이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어. 보통 비슷한 기후나 자연환경에서 비슷한 생활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많고, 큰 산맥을 기준으로 삶의 방식이 나누어지는 경우가 많거든. 하지만, 가까운 역사로 올수록 인류의 지혜가 쌓이고 역사적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정치, 종교, 관습 같은 것들이 문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되지.

또 하나!!! 문화권은 문명보다 먼저 성립되었다는 점이 중요해. 인류 최초의 문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이미 집단으로 모여살고 있었잖아? 그리고 그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던, 가축을 키웠던 그 집단의 생활패턴이 있었기 때문에 문명 이전에 '문화'는 존재했다는 것이지.

자, 그럼 지금부터 4대 문명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통해서 서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먼저 한번 살펴보자.

2장. 서아시아에 도시국가들이 탄생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5500년전.... 그니깐 성경으로 따지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했다고 말한 그 시기가 500년 지난 어느 시점.... 드디어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는 것이 생겼어.

그곳은 어디냐? 바로 '동부 지중해 바닷가' 근처였었지. 그 바닷가 서남쪽에는 아프리카 나일강 하구가 있었고, 그 동쪽 내륙에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라는 강이 있었어. 그리고 그 사이의 지중해 연안에는 강과 바다의 영향으로 매우 기름진 땅이 존재했는데, 훗날 연구자들은 그 땅을 '기름진 초승달' 지역이라고 불렀지.

그 기름진 땅 근처 곳곳에 작은 도시들이 생겨서 작은 농경 문화권 또는 유목 문화권이 생겼는데, 그 도시들이 정착생활을 하면서 최초의 문명이라는 것이 생긴거야. 그 중 나일강 근처의 도시들이 이집트 문명이 되었고, 지중해 동부 소도시들이 유프라테스강 근처에 자리잡으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발전한 것이지.

이 도시 국가들이 점점 커지고, 널리 퍼지면서 약 2천년의 세월동안 발전하고 멸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거야. 그런 과정 속에서 기원전 1천년경....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유럽의 동쪽, 즉 서아시아(오리엔트) 전역에 다양한 문명이 존재하게 된 것이지.

서아시아 공부를 하다보면 이오니아해, 동지중해, 흑해, 야파, 알렉산드리아, 시라쿠사.... 이런 말 많이 나와.
게임 지도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신 간략하게 만들었으니 대강의 위치 파악은 할 수 있을거야.

좀더 자세히 살펴볼까?

기원전 3000년경, 나일강이나 유프라테스 강, 또는 지중해 동부 연안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작은 도시 국가들이 생겼는데, 이 도시 국가들은 각각 지역단위로만 발전했었어. 예를 들면 서아시아 유프라테스강 근처에는 '수메르'라는 동족 의식을 가진 도시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살고 있었지. 나일강 근처에서는 '상왕국'과 '하왕국'이라는 큰 규모의 도시 국가들이 있었는데, 일찍이 상왕국이 강 근처의 왕국들을 통일해 버렸어. 역사에서는 가장 오래된 통일왕국이라고 해서 '고왕국'이라고 부르지.

중요한 건, 이들이 강과 해안을 중심으로 뭉쳐있었다는 거야. 이집트는 나일강 근처만,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강 근처만 교류하면서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문명을 각각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지. 그래서 역사에서는 이 지역의 역사 출발점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으로 따로 구분하고 있지.

그러기를 천년....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각 도시 국가들은 세력이 커지고 주변국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어. 특히, 지중해 동부 연안에는 바빌로니아 왕국, 히타이트 민족, 미탄니 문명, 크레타 문명 등 다양한 도시 문명들이 등장했거든. 이들이 서로 문서도 교환하고 무역도 하면서 점차 국제 사회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지. 물론 그 와중에 서로를 점령하기 위한 정복 전쟁도 끊임없었겠지?

자... 그리고 시간을 더욱 흘러 또 천년이 지나간다.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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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일 역 사 퀴 즈 (2010. 2. 5. 금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온라인게임 속 역사> 입니다.

  - 이 퀴즈는 온라인 게임을 몰라도 풀 수 있습니다.
  - 문제에서 제시하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이 누구인지 잘 골라보세요.
  - 시간이 부족해서 2월 5일자부터 올립니다. 1-4일자 퀴즈는 빨랑 올릴께요.

1-2. 다음은 온라인 게임 <대항해 시대>의 여행 지도입니다. 물음에 답해주세요. (사진이 잘 보이지 않을 경우, 사진을 클릭해서 원본으로 보세요~)

- 나는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를 좋아하는데 이 사람의 후손인 부르투스가 바로 켈트족의 영웅이었거든. 그래서 내 첫 캐릭터는 (1)_____에서 시작하기로 했어. 처음에는 근해를 좀 돌다가 레벨 22를 찍고, 큰 범선이 생겨서 이제 좀 먼 바다로 나가볼까 했지.

- 9세기 이슬람 국가들은 (2)_____ 해협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렴했잖아? 난, 고고학자 스킬을 찍고, 포르투와 세비야, 말리가 등의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1차 전직을 했지.

- 탐험가로서 모험을 즐기던 나는 이왕 여기에 온김에 호탕한 모험가 카사노바가 태어난 (3)___ 에도 한번 들러보았어. 40레벨이 되서 모험가로서 명성도 얻고 배도 얻었어. 지금까지는 돛이 하나달린 바이킹선, 코크선, 갤리선 등을 타고 다녔지만, 이젠 돛이 3개 이상 달린 (4)____를 구했지. 콜럼부스가 대서양을 건널때도 이용했다는 배라서 기분이 좋았어. 무적함대가 이끄는 갈레온 선단만 피해다니면 무적의 빠르기를 자랑하는 범선이었지.

- 난 이 배로 아프리카의 최남단 (5)____을 돌아서 인도까지 진출해서 장사를 해보려고 했어. 인도에 진출하려면 포르투갈이 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삼은 (6)____에서 준비를 해야 했지. 자 그럼 나도 긴 인도 여정을 출발해볼까?

 

1. 위 지문의 (1)에 들어갈 나라는 대항해 시대의 출발 국가 중 하나입니다. 어디일까요?
① 노르웨이
② 영국
③ 프랑스
④ 이탈리아
⑤ 그리스
⑥ 에스파냐
⑦ 포르투갈

 

2. 소녀시대가 대항해시대 게임을 즐기고 있습니다. 역사 배경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윤아 : (1)에 들어갈 국가도 대항해 시대의 탐험에 참여했었지.
② 유리 : (2)에 들어갈 말은 지블롤터 해협이야. 중세 유럽과 이슬람이 주도권 싸움을 할 때 이용했던 바다였지.
③ 태연 : (3)에 들어갈 도시는 나폴리잖아? 카사노바 그 바람둥이가 패션의 도시에서 태어났다니...
④ 제시카 : (4)에 들어갈 배는 삼본마스터선이라 불리는 배였는데, 대표적으로 캐릭선, 캐라벨선 등이 있지. 특히, 캐릭선은 대항해 시대를 주름잡던 배였어.
⑤ 티파니 : (5)에 들어갈 아프리카 남단의 지명은 희망봉이야.
⑥ 써니 : (6)에 들어갈 포르투갈의 무역 거점지 중에는 말라카가 있었어. 내가 또 어렸을 때 외국에 살았잖아?

 

3. 다음은 온라인 게임 대작 <콜 오브 듀티>의 한 장면입니다. 잘 읽고 물음에 답해주세요.

- FRS 게임을 잘못하는 나는, 일단 온라인에 들어가기 전 솔로잉 캠페인을 시작하기로 했어. 일단, 미션을 수행할 국가를 선택해야 하는데...

- 나는 세계 2차대전 캠페인을 수행하려고 이 국가를 골랐어. 이 국가의 캠페인은 연합국에 소속된 캠페인이었지. 일단, 배경이 되는 지하 하수도에서 침략자인 독일 병사들의 눈울 속이며 전투를 벌여야 했어. 불가침 조약을 폐기하고 갑자기 쳐들어온 독일군에 맞서 펼쳐지는 (1)____ 전투는 우리의 대승으로 끝나게 되지.

- 이제 우리는 탱크를 지휘하면서 서쪽으로 밀고 들어가 폴란드까지 해방시키고, 독일을 압박하게 될꺼야. 이제 다른 나라 캠페인도 시작해볼까?

 

3. 캠페인에서 이루어진 (1)의 지역에서 있었던 유명한 전투로, 빈 칸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요?
① 레지스탕스
② 노르망디
③ 스탈린그라드
④ 베를린
⑤ 에스토니아

 

4-5. 다음은 온라인 삼국지의 퀘스트 장면입니다. 잘 읽고 물음에 답해주세요.

- 위 퀘스트는 <마씨의 오상> 퀘스트이다.

- 마씨에게는 5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마양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유비(소열제)의 부름을 받고 시중이 되었다. 마양은 어릴 때부터 눈썹에 흰 털이 많았는데, 유비가 말하기를,

마씨의 오상은 모두 훌륭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가 바로 (1)______ 이구나. 라고 하였다. 마상의 흰 눈썹을 칭하는 말이 훗날에는 여럿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가르키는 말이 되었다.

- 훗날, 유비는 제갈공명과 의논하지 않고 군사를 진군시켜 크게 패하고 죽었는데, 이 때 마양도 죽게 되었다. 유비와 마양이 죽자 제갈공명은, 마양의 아우 마속에게 촉군의 수송로를 맡겼는데, 마속은 적장 사마중달에게 크게 패하였다.

마양 못지 않게 뛰어난 마속이었지만, 제갈공명의 입장에서는 군법에 따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눈물을 머금고 수족과 같은 인물을 제거하는 것을 (2)_________ 이라고 하였다.

 

4. (1)의 빈칸에 들어갈 말을 정확한 2글자로 적어주세요~

 

5. (2)에 들어갈 고사성어를 4글자로 적어보세요~

 

6. 다음은 디아블로와 와우(월드오브워크레프트) 등 중세 환타지 게임에 단골로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의 모습입니다.

- 고대 인도-유럽의 아리아 계통의 제사장이 분화되었다. 캘트의 갈리아로 넘어온 사제는 (1)_____이 되었고, 인도로 넘어간 사제 계급은 브라만이라는 독특한 계급이 되었다고 한다.

-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이들은 갈리아의 사제 계급으로서 법의 집행자이자, 훈육관의 역할을 도맡아 했던 켈트족의 지배층이었다. 이들의 핵심 권위는 하늘에 대한 제사였는데, 법적 분쟁이 있을 경우 성지에 모여 하늘의 뜻을 주관하였다. 이들은 영혼불멸을 교리로 삼아 영혼은 옮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20년 이상 긴 수련을 하였다.

- 로마 제국이 갈리아를 지배하면서 이들은 캘트족의 지배자 자리를 위협받고 브리튼과 아일랜드에서 추방되기 시작했다. 자연의 지배자인 이들은 로마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제사직을 빼앗기고, 단순한 역사가, 법관 등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6. 위 캐릭터와 지문으로 미루어보아 (1)에 들어갈 고대 갈리아의 사제의 이름은 무엇이였을까요?
① witch doctor
② medicine man
③ Druid
④ Priest
⑤ Bishop
⑥ Cleric

 

7. 다음은 대작 게임이자, 영화로도 출시된 <페르시아 왕자>의 포스터입니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 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엔 수많은 어려움 뿐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굳은 다짐 뿐이죠.
   다시 너를 구하고 말거라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죠.
   수많은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가요 마법의 성 중에서>

노래 <마법의 성>은 공주가 반역자이자 마법사인 (1)______ 에게 잡혀가자, 왕자가 목숨을 건 모험 끝에 공주를 구한다는 페르시아 왕자의 줄거리를 보고 감동을 받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1)______ 은 원래 쿠란에 나오는 <알라로부터 유래하는 권위>라는 뜻의 단어였다. 이것은 원래, 이슬람의 종교 지배자였던 <칼리프>를 옹호하면서 그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권위였다. 11세기 이후, 아바스 왕조, 셀주크 투르크 제국 등은 스스로 자립하여 왕조를 세우고, 칼리프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므로 (1)_______ 이란 말은 세습 군주를 지칭하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시대가 바뀌었다. 서구에서도 로마 황제가 임명해야 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나폴레옹이 맘대로 겸직한 것처럼, (1)________ 도 점차 칼리프의 권한을 스스로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오스만 왕조의 오르한 대제는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는 뜻에서 (2)___________ 라는 칭호를 쓰게 되었다.

 

7.(1)에 들어갈 말로 가장 알맞은 것은 무엇일까요?
① 마물루크
② 이프리트
③ 슐탄
④ 무함마드
⑤ 이크타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5)

왜, 교과서는 무적이 되야 하는 것일까?

1. 교과서의 절대성

오늘은 21세기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으로 <교육>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많은 교사들이 포스트모던의 철학으로 <역사 교육>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국 사회의 현실 때문이다. 입시를 위한 역사 교육이 우선시 되어야 하며, 입시에 강한 역사 교사가 우대받는 공교육에서 어떻게 <교과서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포스트모던의 역사 철학은 공교육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7차 한국사, 세계사 교과서의 첫 시작은 <역사란 무엇인가?>로 출발한다. 역사를 공부하면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을 쌓게 되며, 과거를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이 과거를 바라보는 눈을 흔히 <역사적 사고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한단원을 지난 후에는 교과서에서 <역사적 사고력>은 변질된다. 단순한 사료들을 나열해놓고, 그 사료들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지만, 해답은 교과서가 원하는 정해진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 정답이 곧 수능에서의 답이 된다.

교과서의 어투는 전혀 <사고력>를 키울 수 없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교과서는 <A는 B라는 계층이 주도해서 C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과거의 사건이다>는 식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미 정해진 문장에 답이 있는데, 더 이상 무슨 해답을 찾아내란 말인가?

한국의 공교육에서 교과서는 절대 불변의 진리이다. 그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결과물을 쉬운 표현으로 압축해서 적어놓은 것이며, 학생들은 그것을 비판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교사들은 교과서를 더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으며, 역사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제시하여 학생들을 <이해>시킨다.

결국, 학생들은 역사 수업을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교과서를 읽고 나면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 중에서 역사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간추려놓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진리>이다. 역사가들은 대중을 위해 헌신적으로 <역사적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교과서는 철저히 중립적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를 적은 이가 누구인지를 전혀 밝히지 않는다. 교과서는 가장 객관적인 말투로만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비판할 수도 없지만, 비판하고 싶어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알고, 과거의 중요한 사실들을 알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걸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부터 읽히는 공교육 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모던으로 역사를 읽는 법이 필요한 것이다. 

2. 지식의 독점

교과서의 절대성에 대한 근거는 너무나 빈약하다. 역사를 기술하는 전문가 집단의 연구 성과를 검증한 것은 그들 스스로의 <학회>일 뿐이며, 그들의 주장 역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7차 국사 교과서를 보자. 신라의 중앙집권은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쓴 내물왕때 시작되어, 점차 왕권이 강화되어 간다고 말한다. 고구려의 중앙집권은 태조왕때 시작되었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중앙집권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의 어느 역사책에 그런 말이 나오는가? <중앙집권>이란 말 자체가 편의상 역사를 규정하는 <연구가>들의 분류일 뿐이다. 각국의 역사는 독특힌 발전과정을 겪었다. 신라의 통일 얼마전 까지도 가야가 존재했지만, 누구도 4국시대라는 말을 쓰지 않고 3국의 통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다고 기술하면서도, 삼국통일이 자주적인 것이었다는 주장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모순을 남기기도 한다.

조선시대를 이끌어간 노론 지배층은 교과서에서 상당히 아름답게 기술되어 있다.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강조되어 있지만, 왕조 실록이나 관찬 사서에 그런 기록은 없다. 송시열이 청나라 정벌을 위해 북벌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송시열은 실제로 내치주의(국내 안정)를 주장했다.

교과서는 실학의 주체로 <서울 근기에 사는 노론 자제>들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실학의 주요 인물이라고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서얼을 포함한 정조의 규장각 출신들, 강화학파의 인물들, 성호학파의 인물들이다.  집권 노론파 자제는 어디에 있는가?

조선말 노론의 지배층이었던 역사가들은 일제 시대를 거쳐 한국 사회의 명성있는 교수님들이 되신 분들도 많다. 그 분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연구 성과를 우리가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포스트모던 역사 교육은 <과거의 지식에 대한 독점>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식의 독점을 비판하는 학문을 지식사회학이라고 한다.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자들이 누구인가?>이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고, 과거에 대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과거의 기록들을 확보한 뒤, 그 과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합리적인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사건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개개인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0개의 과거를 10명이 학습한다면, 100개의 과거가 창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를 독점한 자>들은 단 1개의 역사만을 진리인 양 포장한 뒤 나머지 과거들은 <근거없는 논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 결과물이 교과서일 따름이다.

예를 들어보자.

모나리자의 그림이 있다. <다빈치>가 어떤 의도로 모나리자를 그린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한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미소의 각도와 색감, 원근법 등을 차례로 감상한다. 10명이 감상했다면, 그들은 각기 다른 감상평을 내 놓고, 그림을 평가할 것이다. 어떻게 모나리자에 단 하나의 감상평만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사건에 대한 다양한 사료들을 교과서에 던져 놓고서도, 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첫째, 둘째, 셋째로 규정되어 있다. 삼국통일의 의의는 공부한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것인데도, 왜 3가지 납득할 수 없는 정의만이 <진리>로 규정되야 하는가?

   삼국통일은 당나라의 도움을 받은 후 당나라를 몰아내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통일이다 라는 것만이 진리인 양 규정해 놓고, 발해의 건국으로 실제로는 남북국시대였다는 기술은 또 무엇인가?

포스트모던은 역사가의 <상상>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를 따지게 된다. 그 결과, 역사를 규정해 놓은 지배집단에 대한 비판이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다.

3. 다양성에 대한 <교육>

포스트모던이 추구하는 역사는 <교실 구조>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교사가 교과서의 내용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교실은 교사의 귄위에 의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교사는 아이들보다 높은 지적 귄위로 학생들을 압박한다.

역사가들은 스스로의 이론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수많은 학회 토론을 통해 <논리적인 헛점>을 최대한 줄인 내용들을 교과서에 적어 두었다. 그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언어들을 교사가 설명할 때, 아이들은 교사의 설명 내용이 좀 이상하긴 해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교사가 아이들의 사고력을 끌어낸다면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고 해도, 결국 교사가 원하는 것은 <교과서>와 입시에 합당한 정답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사고력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교사는 역사를 만든 지배집단의 충실한 대변인이 된다. 역사가들의 이론을 가장 쉽고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기능인이 역사 교사일 수 밖에 없다.

역사교사는 교과서의 역사 구조에 종속되어 있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고 규정한 서양의 시대 구분법이 아직도 교과서의 시대 구분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한국의 교사는 다른 대안으로 시대구분을 할 수가 없다. 그리스 신화는 청소년 필독도서이지만, 단군 신화를 다르게 해석한 책들은 있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상호 토론이 가능한 웹 2.0 공간에서는 저마다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마음 껏 써내려가지만, 교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입시에 필요한 역사적 지식만을 강제로 주입받는다. 웹 공간에서의 주장이 교실에서의 질문으로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사극을 보면서 수백개씩 글을 쓰고, 댓글을 달면서 토론하던 그 학생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경직된 교실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교육의 목적 안에 <역사의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인식시켜주면서 교사 자체가 권위를 버리고, 학생들의 다양한 사고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과거를 연구한 누군가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규정>해놓은 것이며, 새로운 발견이 있거나, 새롭게 사고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15세기 서유럽의 <대항해시대>를 몇몇 원인으로 규정한다.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의 고립감, 왕자들의 모험심, 향료 무역을 통한 차액 증가, 나침반의 유입 등등...

   그러나 우리 교과서와 달리 서양의 학자들은 이런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당시 흑사병 이후 유럽의 경제난이 심각했으며, 서양 사람들에게 꼭 필요했던 대구, 참치, 고래 등 먹거리를 찾아 좀더 먼 바다로 나가다 보니 항해술이 발달한 것 뿐이라고.... 물고기들의 대륙간 이동경로가 항해 경로와 일치한 것이라고...

우리는 나폴레옹이 키가 작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폴레옹의 주적이었던 영국의 길이 단위는 프랑스와 달랐고, 영국이 의도적으로 자국의 단위를 활용하여 나폴레옹을 키작은 못난이로 만든 거라고...

역사적 사건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사건의 원인과 결과는 단순히 하나일 수 없다. 수많은 원인 중에 중요한 원인과 덜 중요한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중요도를 판단하는 것은 그 텍스트를 보게 된 개개인의 몫이다. 교과서가 하나의 원인으로 규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 방침은 자유교육을 실시하는 외국의 여러 학교들에서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감히 이러한 교육을 실시할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현실이다.

4. 교과서를 전면 부정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으로 역사 교육을 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교과서>를 부정한다고 했을 때, 어떤 역사적 사실을 가르칠 것인가이다. 사실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역사적 진리>를 부정한 채 교육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으로 역사교육을 한다고 해서 <교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에게 <진리란 상대적>인 것이며, 과거에 대한 <절대적 사실>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절대적 사실을 진리로 적어놓은 교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교과서는 가장 좋은 <역사 교재>가 될 수 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역사에 있어 권력집단의 속성이나,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교과서>를 통해 이야기해 줄 수 있다.

<교과서>에는 이렇게 씌여있지만, 이것과 다른 견해와 해석이 있다는 점을 주지시켜준다면, 교과서의 내용으로 교육을 전개하면서도 <역사적 다양성>을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공교육에서 이런 행동을 하면 좌파라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만...)

입시교육에서 자유로운 대안적 교육을 추구하는 학교라면, 외국에서와 같은 포스트모던적 역사 교육이 가능할 수도 있다.

수업의 첫 단추는 <역사는 누구나 만들어 갈 수 있는 다양성을 내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고대사 부분에서 여러 사료 등을 통해 다양한 해석을 추구하면서 <역사를 사고>하는 교육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고대사에서 신화나 설화는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이다.

우리는 선덕여왕을 보면서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라고 생각하면서 보게 된다. 극적 긴장감이나 탄탄한 스토리 전개를 위해 역사적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작가의 의도대로 줄거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관점이라면 실제 역사에서도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 고대사에 남겨진 단편적인 기록으로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전개하거나, 있을 법한 (개연성 있는) 재연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른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때, 비판적 읽기나 사료를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도 있다. (물론 선덕여왕의 미실궁주처럼 현대어를 쓰고, 21세기 인물의 성격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포스트모던적 교육이 기존의 모든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기록에 남겨진 역사적 사실들을 참고하여 그 시대상과 당시 인물들의 모습을 재창조하는 것이지, 모든 기록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단지, 포스트모던적으로 역사를 본다는 것은 그 과거 기록조차도 누군가의 의도 또는 목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재해석해야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특히, 일제시대 이래 현대사는 특정 역사관과 사관을 가진 이들이 사학계를 주름잡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는 <역사적 진리>을 만들어 왔고, 일제시대부터 특정 이념으로 살아온 이들은 그 이념에 맞게 <역사적 진리>을 구성해왔다.

현대사에서 포스트모던의 역사 교육은, 역사를 지배하고 기술한 이들의 목적과 방법, 내용까지를 비판하면서, 역사적 대상이 된 과거인의 입장과 역사를 서술하는 현대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역사를 비판해야 한다.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공교육에서도 현대사 부분은 조심스럽게 간략히 원론적인 부분만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첨예하게 대립된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으로 비판하는 역사 교육은 그런 부분들에 과감히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에 공교육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만약, 포스트모던적 역사 교육이 다른 외부적인 요인을 받지 않고 이루어진다면, 가장 좋은 교육 방안은 <교과서 창조>일 것이다.

먼저, 포스트모던적 이념을 가진 교사가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하나의 <교재>를 만들고, 다양한 역사적 내용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비판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해준다.

학생들은 간단한 사료, 토론, 현장학습, 비디오 시청, 독서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재의 내용을 이해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를 직접 작성해고, 서로 토론한 뒤 그 내용으로 <교과서>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교과서>를 만들어보는 과정으로 역사적 지식의 생성과정을 알고, 스스로 역사적 지식과 흐름을 창조하는 것이다.

단,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수업은 고대사부터 현대사를 일관적인 논리 구조로 풀어 설명하는 통사 수업에는 미흡할 수 있다. 따라서 각 시대별, 주제별로 책정된 수업들을 전체적인 흐름으로 연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글은 가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이 가능한 학교가 있다면 한번쯤 해보고 싶은 교육 방침이기도 하다. 물론 이론과 같지도 않을 것이도, 실패하고 고치고 할 부분도 많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오늘 글은 포스트모던에 관련된 글들 중에서 가장 난잡한 글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문학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는 포스트모던의 역사 코드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일본사 이야기 18 - 전국시대 : 다이묘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다~

1.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키워드

일본의 전국시대는 단순한 무사들의 봉기 같은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시작된 근본적인 계기는 이전에 다루었던 남북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창업을 하고자 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혼란의 수습을 위한 해결책으로 슈고에게 토지에 대한 많은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원래 일본의 봉건제도에서 <슈고>는 지방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관입니다. 토지에 대한 권리를 위임받고 토지 경작에 관여했던 직책은 <지토>였죠. 그러나 막부 최고 지도자인 쇼군이 막부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슈고>에게 토지에서 절반의 세금을 걷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어려운 말로 병작반수라고 하죠.

슈고가 토지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영주(다이묘)와 같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슈고 다이묘>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남북조 시대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이 슈고다이묘들이 점차 쇼군을 넘어서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기도 하였죠.

그 결과 1467년 발생한 슈고들의 반란을 기점으로 무로마치 막부는 무너집니다. 이 난을 <오닌의 난>이라고 하는데, 실력자들과 토지를 가진 세력들이 하극상을 일으켜 각각 자신의 지역을 독립국으로 만들어 버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죠.

오닌의 난으로 무력을 가진 자들은 약한 자들의 토지를 빼앗아 새롭게 다이묘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새 시대의 다이묘들을 <신흥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이 신흥 다이묘들과 군사력을 가진 자들, 그리고 스스로 영토를 지키려는 자치 마을 등 일본 내 많은 세력들이 세력균형을 이루며 대치하는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시대가 전국시대입니다.

2.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다.

전국시대를 이끌어 간 각 지방의 대표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고 주변국을 통합하여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거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입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부국강병책과 제가백가들이 등장하죠? 신라말 고려초에 골품제와는 다른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죠? 그리고 지도자들이 그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었죠?

마찬가지의 개념입니다. 전국시대 일본의 지방 세력들은 분열된 시대를 이끌어가기 위한 주역으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개혁을 실시합니다.

전국시대의 각각 영주(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억압하고, 가신단을 통제하며 영지에 대한 확실한 경제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법을 만드는 데 이 법을 <분국법>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내 땅에서는 내 법으로 통치할테니 누구도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있는 법이지요.

또 다이묘들이 국가를 경영하는 방략으로 중국에서 왕권강화에 기여한 이념인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훗날 퇴계 이황 선생님이 일본 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도 일본 스스로 유학의 장점을 찾아 국가 권력과 군신관계 이념을 정립하려는 의도가 있었지요.

일본 전국시대는 혼란기 같지만, 유학이 널리 보급되고 학교가 대대적으로 증가하게 된 획기적인 시기이기도 합니다.

3. 유럽의 신항로 개척과 일본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다.

이러한 일본의 적극적 문물 수입에 불을 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서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이었죠. 보통 유럽말로 <대항해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멀고 먼 유럽인들이 일본에 넘어오기 시작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서아시아의 최강국 오스만 제국에 가로막혀 동방무역이 원할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은 인도의 문물과 특산물을 유럽에 가져오기 위해 아프리카를 뺑돌아 항로를 개척하였죠. 아메리카도 발견했구요.

그리고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믿는 강국들을 물리치기 위해 지구 반대편의 <하나님 나라>를 찾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고대 하나님의 나라로서 찬란한 문명을 이끌었던 전설의 나라 <아틸란티스>를 찾는다던가, 이슬람을 물리칠 구원자인 <존 왕>이 사는 지구 반대편 기독교 국가를 찾기를 원했죠. 그래서 유럽인들이 일본에 왔을 때 새로운 문명을 가진 동쪽 끝의 국가(해가 뜨는 국가)라는 뜻으로 <지팡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1부는 아주 큰 거인들이 사는 나라, 2부는 아주 작은 소인들이 사는 나라가 나오고 3부는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사람들의 나라가 나옵니다. 이 걸리버 여행기의 3부에 나오는 나라로 걸리버의 마지막 여행지가 바로 <지팡구>였고, 일본이었습니다. 따라서 걸리버 여행기 3부의 지도를 보면 한반도와 일본의 지도가 나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걸리버 여행기가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바다를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표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6세기 동해바다를 일본과 서양이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만하죠?

유럽 국가들 중에서 신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일본과 적극적으로 무역을 시도하였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 화약과 화포술을 바탕으로 만든 대포를 일본에 전래하였죠. 당시 중국 대포의 제조법은 국가 기밀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최무선이 염초(화약원료)만드는 기술 하나를 배우기 위해 생난리를 치다가 기술을 배워 일본 왜구를 크게 소탕하였죠. 일본은 대포와 총포의 주력 화술을 유럽에서 역수입한 것입니다.

신항로 개척기 카톨릭 국가인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영국, 네덜란드 같은 신교(개신교) 국가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방 선교에 주력하였고, 전국시대의 명장들은 크리스트교와 카톨릭의 문물을 적극 도입하여 부국강병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give and take였던 것이죠.

4.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일본의 전국시대 하면 중국의 삼국지 만큼 유명한 인물 3명이 등장하죠.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죠. 다른 인물들도 유명한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역사가 아닌 만큼 이 3명만 간단히 이야기해보죠.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 등의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나면 정리해 보죠.

이 중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사나이는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하면 <천하포무 : 천하통일>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작은 영지를 가진 오와리의 노부나가는 동맹을 맺을 상대와 공격할 상대를 잘 찾아 행동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초기에 주변국인 미노와 친선을 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그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미노를 공략하는 등 상황 판단이 빠른 인물이었죠.

노부나가의 가장 큰 장점은 시류를 잘 볼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양식 총포를 도입하여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철포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식 소규모 전투가 아닌 화포를 이용한 전술은 노부나가의 든든한 성공 전략이었죠.

또 새로운 종교인 카톨릭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도입합니다. 카톨릭의 도입은 포르투갈 등 서구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서, 일본 고유의 기득권층인 불교세력을 철저하게 억압하는 효과를 가져왔죠.

노부나가는 서양식 화포로 토지 영주였던 승려 세력을 억압하였고, 혼란기를 틈타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세력들을 모두 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실력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용병제도>를 도입하였죠. 노부나가의 전략은 통일을 위한 가장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가신인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갑자기 죽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은 전국시대 통일을 앞둔 것이여서 그 파장이 큰 것이었습니다. 이 때 노부나가의 심복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츠히데를 죽이고,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를 앞세워 노부나가의 세력을 모두 끌어안았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정식 계승자로서 전국시대의 <통일>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집권은 많은 골수 노부나가 추종자들의 반발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정책이었던 카톨릭 보호 정책을 폐기하고 카톨릭과 연관된 세력들을 탄압한다는 구실로 반대파를 제거하였습니다. 또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조선을 공격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전쟁을 통하여 막부 세력의 결속을 단단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 사망하자, 새로운 권력을 놓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때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유명한 전투의 승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식 쇼군이 되어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를 개창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잡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을 인내한 자였습니다. 그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밑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막부를 세웠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60을 훨씬 넘긴 후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최후의 승자는 이에야스였다는 것입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는 이전과 달리 수도명을 막부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의 막부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쇼군의 자격으로 정치를 하였던 것에 비교해, 에도 막부는 수도에서 직접 중앙집권정치를 실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막부 자체가 수도에서 전국을 통괄하는 체제로 이전에 비해 훨씬 강해지고 안정적인 막부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에도막부는 일본 막부사상 가장 긴 시기를 지속한 막부입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에도 막부가 어떻게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유지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음 장의 키워드는 <에도막부의 중앙집권과 사회통제정책>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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