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1. 삼국시대에는 고조선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들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 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거의 자신들의 계통을 철기 시대 국가들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뿌리는 북방에서 왔지만, 독자적인 영역국가임을 주장합니다.

사실 삼국사기라는 우리 역사서의 편찬 태도 자체가 고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볼 때, 고조선에 대한 삼국시대 지배층들의 인식은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 읽어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의 지배층들이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하였다는 근거는 삼국사기 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것을 분립적 역사의식, 삼국유민적 역사의식, 독립적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의 삼국이란 실제로 <대립>하는 경쟁 국가였으며, 그들 사이에 동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단, 북방의 고조선- 남한의 삼한 사회라는 전통적인 씨족공동체 성격이 잔존하여 언어의 유사성과 복식, 풍습의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계기만 있다면 동족의식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역사서들은 모두 자국의 왕실계보와 중앙집권강화를 위해 작성되었을 뿐, 자국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계통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더 이상의 연원을 찾지 못하였고, 신라는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가지고 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삼국시대 자체에 고조선 인식이나 민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단, 고구려 - 백제가 같은 계통이었고, 고구려, 백제가 각각 요동, 요서 경영을 하였다는 중국 기사로 미루어보아, 이들 국가 사이에는 은나라 집단에서 파생된 동이족이라는 관념은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2. 통일된 신라는 국가의식은 있었으나, 고조선 인식은 없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역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신라의 통일 자체가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불완전한 것이었고, 당과의 관계 개선이 국가 기원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단,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삼국의 백성은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는 <삼한일통의식>이 보입니다. 예로, 신라 9주를 고구려, 백제를 고려하여 편제한다던가, 신라 중앙군인 9서당에 백제, 고구려, 말갈인 등을 편제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 예이죠.

또, 발해를 북국이라고 부르면서, 같은 계통의 국가라는 의식을 보이기도 합니다. 발해와는 국경을 접하는 대립국가이면서도, 때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우호적인 교류관계를 지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한일통의식>은 신라 말기로 갈수록 <신라 중심의식>만 남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라 사회를 지배한 <골품제> 때문입니다. 골품제라는 제도에서 고구려, 백제의 유민이나, 품족들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가 힘들었고, 신라 하대 골족의 상호 항쟁도 치열했습니다. 이렇게 신분제의 모순으로 삐걱거리는 사회에서 <민족의식을 찾아봐라!>라는 주문은 무리입니다.

결국 후삼국의 성립으로 <삼한일통의식>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후백제, 후고구려의 건국 자체가 다시 백제, 고구려 등 분립적인 기원을 주장하면서 신라와는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니까요. 즉, 신라사회의 골품제적 한계가 같은 <기원>을 찾아야하는 당위성을 억눌렀던 것입니다.

3. 고려 전기에도 고조선을 찾는 자가 없었다.

고려는 통일 후 다시 <삼한일통의식>을 주장합나다. 마한-진한-변한 등의 삼한의 계보와 통일신라로 넘어선 통일 계보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기원된 것임을 말한 것이죠. 단, 이 때의 <일통> 주체는 초기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호가 고려(고구려)였고, 초기에는 활발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니까요. 그러나 문벌귀족사회가 보수화된 12세기 이후에는 다시 <신라중심>의 일통의식으로 전환됩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금의 세력확대 등의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고려사회는 철저한 보수주의로 돌아섭니다. 이러한 보수적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저술된 책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였고, 삼국사기 역시 신라중심의 사관이 많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 전기에는 아직도 각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 독립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조선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는 역사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백성들의 민란은 고구려, 백제 계승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고구려를 계승한 북벌론에 기반하였고, 김부식의 묘청진압은 신라 계승의식을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4. 고려 후기 : 드디어 단군을 발견하다.

고려 후기에는 드디어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기사가 실린 역사서들이 출간됩니다.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신정변을 통한 극심한 사회의 혼란을 겪었고, 몽골과의 40년간에 걸친 항쟁으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배층은 민중들에게 국가와 지배층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민족적 기원을 제시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일단,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 주몽의 위대함을 민족적 차원에서 표출한 작품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입니다. 동명왕편은 무신집권기의 사회혼란상에서 지어진 저서입니다.

이어, 몽골침략기에는 드디어 단군까지 민족기원을 거슬러 올라간 책이 집필되었습니다. 이 책이 바로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입니다. 이 책들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저서 해석>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특히, 제왕운기는 단군을 기원으로 하는 <삼조선설>을 주장하여,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체계화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을 민족적 시조로 하여 <전조선>, 기자를 문명화의 상징으로 하여 <후조선>으로 이분화하여 고조선을 증명하였습니다. 단, 제왕운기에서는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찬탈한 <위만조선>은 철저히 부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전, 후 고조선은 이후 준왕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삼한>에 전통에 계승되었고, 그 이후 <삼국>에 전통이 계승되면서 고려까지 민족적 힘이 내려왔다는 내용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단군기년설>도 등장합니다. 유교에서는 600년을 가장 좋은 수로 여기고, 600이 들어가는 숫자는 번영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단기 3600년이 되는 고려 시대는 600 * 6이라는 엄청나게 좋은 운수를 가진 해이므로, 길하다는 것이 바로 단군기년설입니다. 즉, 단군을 민족시조로 하여 연도를 계산하고, 이 단군기년을 유교적 원리와 결합하여 민족 기원의 정당성과 다복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논리로 인해 정착된 단군의 기원은 조선건국에도 반영되었고, 조선시대 단군기년의 기원으로 작용합니다.

5. 조선시대에는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하다

조선 전기에는 이제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합니다. 이성계가 건국후 국호를 배정받기 위해 중국에 건의한 국명 중에 <조선>이 있었으며, 이 <조선>이 곧 국호가 됩니다. 즉, 국호 자체가 <조선>이었고, 단군을 시조로 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선 초기의 저서들에는 단군신화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응제시주 등에는 모두 단군 관련 기사가 적혀있으며, 조선 초기 태조기에는 요동정벌을, 세종 기에는 4군 6진 개척 등을 실시하면서 상당히 북진적인 국가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6세기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붕당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북진 정책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 병자난 등 국난을 겪으면서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 기원 의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특히 전쟁 이후 17세기에는 단군에 대한 막연한 <민족 시조> 개념이 아닌, 단군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기원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중심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실학자들은 싫증적으로 고조선의 존재, 고구려와 발해의 존재까지 증명하여 민족의 기원을 체계적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익은 독자적인 <삼한 정통설>을 내세우면서 고조선 - 삼한 - 삼국 - 통일신라라는 개념을 확립하였고, 많은 실학자들이 다양한 기원론을 주장합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습니다.

  - 이익의 삼한정통론과 단군 인식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여기에 8조의 교를 내리니 지금 전하는 바가 3개조이다. (중략)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중략)

(그 이후..)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중국 남북조 시대에 정통이 없는 것처럼 삼한도 정통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뜻인 듯 합니다.) (중략)

지금 경주는 진한의 옛 터이며, 그 땅의 지계가 바르게 잡혀있다. 그 땅이 속되지 아니하며, 모자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어리석은 오랑캐의 풍속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추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필시 기자가 와서 개화한 것의 영향이 큰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이 주장한 삼한정통론 -

6. 일제시대에는 진정한 <민족>의 개념까지 정립하게 되다.

조선 말기 이후 외세의 침투 속에서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사실, 조선시기까지의 단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지배층 위주의 논쟁이었습니다. 왜냐면, 근대사회까지 우리 사회는 양반과 상민, 노비가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양반과 노비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은 공유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인, 상민, 노비는 민족의식보다는 신분의식이 더 크게 삶을 지배하였습니다. 이들이 민족의식을 발휘하는 때는 <국난, 외침> 등의 국가적 문제가 있을 때였습니다. 실제, 국난이 있을 경우에도 피지배층들은 <민족의식>을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공동체적인 향촌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서 <민족의식>처럼 보이는 국가 수호 의식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조선 정복 야욕은 신분을 넘어선 전 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민족적인 종교인 <대종교>가 등장하여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기원을 민중에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이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확립됩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의 동력을 <정신>으로 보고 정신의 성쇠에 따른 역사의 순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고조선을 민족의 기원이자, 중흥기로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 조선은 철저히 부정하고, 고조선 이래 고구려-발해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기원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채호는 고조선 이래 북방 정신이 쇠퇴한 것은 금국정벌을 주장했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김부식 등 문벌보수파에게 진압당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사건이 곧 민족적 정신이 쇠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서 <1천년래 대사건>으로 인식한 것이죠. 이 사건이래 단군 조선의 민족기운이 쇠퇴하여 결국 일제 식민지 지배기까지 오게되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등의 신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조선 전통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조선학 운동>까지 전개하며 민족의 기원인 단군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들 민족주의 학자들과 사회주의 학자들의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납치당하면서 신민족주의적인 경향의 학풍은 남한 사회에서 대부분 단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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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세 역사학의 발달 과정

1. 삼국시대 : 역사학이 성립되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제대로 된 역사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의거할 때, 한국에서 제대로 된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는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됩니다.

삼국시대의 역사편찬은 왕권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가 대체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시기였습니다. 고구려의 유기는 5c 고구려의 강성기에, 백제의 서기는 근초고왕의 전성기에, 신라의 국사는 신라 6세기 진흥왕기에 각각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을 <왕의 업적>을 홍보하여 왕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당시의 역사서들은 남아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왕실의 족보와 신성함, 왕계를 거슬러올라갔을 때의 신화, 선민의식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즉, 왕실과 지배집단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한 저서들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고구려에서는 유기를 편찬하였고, 이후 신집 5권으로 이것을 요약하였다고 합니다. 백제는 서기, 백제기, 백제본기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리는 국사, 가야는 개황력 등이 존재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서들은 일단, 중국의 역사 서술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단, 사마천의 기전체 중에서 거의 대부분 <본기> 위주로 역사를 서술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역사서의 편찬 목적이 국왕가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들 책의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인용되어 나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선사, 한산기,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등의 역사 저서들이 나오는 데, 이러한 책들인 국가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던 삼국시대 책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일단 불교관련 저서나, 화랑의 역사 등 역사 서술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즉, 국왕에게 치중했던 역사 서술이 이제는 좀더 넓은 지배집단 및 일부 피지배층으로 확대된 것이지요. 이것은 이제 국왕만의 역사 편찬인 <본기> 위주의 서술을 넘어 <열전, 지, 표> 등으로 역사 서술이 넓어진 것을 뜻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형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기 시작한 것이지요.

2. 중세시대 : 최초의 역사서 삼국사기의 등장

중세시대의 역사서술은 이제 <송>나라의 유학체제를 받아들이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서들이 출현였다는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아직도 역사서술에 있어서 <바이블>은 사마천의 사기였습니다. 고려 후기 <원>에서 성리학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사기의 기전체 방식이 역사서술의 대세였지요. 하지만, 성리학이 유입된 여말,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을 통한 유교서술이 대세가 됩니다.

우선 고려 시대 사서들을 아주 간략히 다루어 볼까요?(각 사서들에 대한 구체적 포스팅들은 따로 하겠습니다.)

고려 시대 최초의 유교적 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입니다. 당시 사회는 문벌귀족 사회의 폐단으로 사회적인 불안감이 조성되었고, 여진족의 금이 강성하여 국가적 위협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고려 국왕은 김부식을 책임자로 하여 당시 훈고학 계열의 유학자 12인에게 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으로서 <유교적 통치질서와 전통> 확보를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벌귀족 사회는 묘청의 난을 겪고, 금나라와 사대외교를 하는 등 국가적 팽창력이 약회된 시기였습니다. 삼국사기는 문벌귀족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신라 중심으로 고대사 체계를 정립하게 됩니다.

이후 무신 집권기에는 사회의 혼란함을 고대 위대한 유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잘 보여집니다. 이후 몽고간섭기에는 고구려의 유산을 넘어서서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보입니다. 이것이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단계의 역사서술이었습니다.

3. 고려시대 :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유교적 합리관

고려 중기 이후 유교주의적 역사서술의 특징은 상당히 합리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대표적인 서술 방식을 보통 <무징불신의 태도>라고 합니다.

무징불신이란, 합리적인 역사서술을 위하여 문헌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지도 쓰지도 않는다는 역사 서술 태도를 말합니다. 즉, 고대적인 신화주의는 배격하고,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존중합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가 가장 잘 반영된 역사서가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또, 문헌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도 귀신의 이야기는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쓰지 않는다는 <괴력난신>, 문헌적 증거가 확실해도 합리적이지 않은 사건은 삭제해 버린다는 <필삭주의> 원칙은 중세 사서의 큰 특징입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를 통해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했던 목적은 역사에서 합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즉, 역사는 지난 날을 되돌아봐서 오늘날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 역사 서술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실을 기록할 대는 사실 자체의 서술과, 그 사실에 대한 평가는 따로 구분해야 하며, 평가도 논,찬의 형식으로 따로 적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서술할 때 <기전체>가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역사 서술의 교훈적 목적에 맞추어 다양한 서술체제가 확립되는 것도 이 시기 역사서들의 특징입니다. 실제 기전체 양식은 사마천의 사기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했지만, 원나라에서 송학이 들어온 이후 고려 후기 역사서들은 다양한 역사서술체제를 선보입니다. 중국 송에서도 자치통감의 편년체, 자치통감강목의 강목체 등이 선보였듯이 다양한 서술체제로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한 것이지요.

또,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다는 것은 다른 말로, 역사를 역사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학의 일부로 본다는 것과도 상통합니다. 역사는 유교적인 정치이념과 윤리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일종의 <거울>로서, 역사학의 목적인 현재 통치이념에 부합되는 <유교적 정당성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4. 15-16세기 조선시대 : 유교적 합리관에서 성리학적 유교관으로...

여말,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유교적인 합리관은 여말 들어온 <성리학>에 의해 성리학적 사관으로 전환됩니다. 여말의 성리학은 원대 허영의 학파에서 들어온 사관으로서 <수기치인> 중에서 <치인>을 강조하는 실용적이고, 부국강병 성향의 성리학이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가 개창하면서 새왕조는 통치이데올로기를 정비하기 위해 수많은 사서들을 편찬합니다. 일단, 고조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근원을 정리한 뒤, 성리학적 인식에 맞추어 삼국사와 고려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그 결과 삼국사략,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삼국사, 고려사 저서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사서들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고, 왕조초기 성리학적 가치기준에 맞춘 부국강병과 왕도정치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진보적인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대사에서 단군기원을 확립하고, 민족단일의식을 강조한 것이 이 시대 역사학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성종 이후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이제는 부국강병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도덕지향적인 송대 주자학이 조선 시대 역사학의 대세를 이룹니다. 이 시기의 역사서들은 부국강병보다는 사람들의 향촌자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습니다. 역사의 영역도 정도전이 주장했던 만주와 요동수복이라는 관점보다는, 한반도 내의 조선사를 좀더 강조하게 됩니다.

주자학적 역사관과 고려 합리주의적 역사관을 비교하면 가장 큰 차이점은 명분론과 합리론이라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역사학은 <무징불신>으로 대변되는 합리사관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주자학에서의 사관은 <전통과 명분>으로 대표되는 사관입니다.

예로, 중국 삼국지에서 조조의 위와 유비의 촉 중에서 어느 쪽이 정통이냐고 물었을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중세 합리적 사관을 지향하는 역사학에서는, 당시 정세와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선양으로 왕위에 오른 조비의 <위>를 전통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명분을 따지는 주자학의 사관에서는 한나라 왕실의 후손인 유씨의 유비의 <촉>이 삼국시대의 전통국가라고 볼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죠.

4. 양난이후 조선시대 : 새로운 전통과 실학의 발견

16세기 중반 이후 역사서술은 아주 큰 변화를 겪습니다. 실제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가 동요하고, 조선왕조의 체제가 급속히 붕괴됩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들은 무너져가는 왕조를 되살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붕당정치의 서인, 남인의 공조체제 형성, 비변사 체제의 형성, 대동법과 균역법 등 체제 변화 등으로 노력하면서, 사상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많은 사서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16-17세기의 정치가들은 명이 멸망한 후 <중화>의 전통이라는 것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습니다. 명은 망했고, 청이 대세인 시기에 명만이 전통이라는 <명분>만으로 사회를 이끌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 명분으로 추구했던 북벌운동도 실패도 끝났습니다. 이제는 청나라를 인정하는 <북학운동>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배워야 했고, 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명분보다는 부국강병이 필요한 시기였던 것이죠.

따라서 이 당시 역사학은 명청 교체로 인하여 중화의 전통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도통동전>을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 역사를 중국 역사의 부속물이 아니라 순수한 <정통설>로 확립하려는 시도가 많아졌고, 스스로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북벌수호운동>, <도서방위체제확립>, <양역변통> 등의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사상적으로 우리 역사의 체계를 잡으려 했던 사람들이 실학자들입니다. 이들은 단군, 기자, 고구려, 삼한 등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였으며,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른 포스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익, 정약용, 안정복 등의 고대사 시각은 이 당시 성리학 사회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음 파트에서는 1900년 대 이후 역사인식에 대하여 간략히 다루고, 이후 한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료들에 대하여 개론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중세 삼국사기부터 근대 노무현기의 사학까지를 포스팅 할 건데, 아주 가끔 다루다보니 시간은 무지 오래걸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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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편

고려 고종(高宗) 때 이규보(李奎報)의 작품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3권에 실려 전한다. 그 내용은 고려 초기 문인들이 허상적 관념론에서 벗어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임을 재인식하는 입장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영웅적이고 성자적(聖者的)인 행위를 찬양, 고구려인의 긍지를 노래한 장편 서사시이다. 대몽항쟁(對蒙抗爭)에 있어서 민족의식 내지는 국가의식이 고취되면서 역사적 사실이 문학에 반영된 작품으로 기사체(記事體) 문학의 선구가 된다. 《현대문학》 제1권 제10호(1955년 양재연 번역)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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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유리의 태자 등극

유리는 소년 시절에 남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참새잡이로 일을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있음을 보고는 쏘아 구멍을 냈다. 부인이 노하여 퍼붓기를 <아비없는 자식이 내 물동이를 깼구나>라고 하였다. 유리는 크게 부끄럽게 여기여 진흙 탄환을 쏘아 맞혀 동이 구멍을 막으니 전처럼 되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묻기를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가 어리므로 장난삼아 <너는 정한 아 버리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유리는 울며 <사람이 정한 아버지가 없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마침내 자살하려 하였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말리며 <아까 한 말은 장난이었다. 네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부여 나라의 신하됨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남쪽 땅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다. 네가 가서 뵙겠느냐?>라고 말하였다.

유리가 대답하기를 <아버지가 임금이 되어 있는데도 자식은 남의 신하가 되어 있으니, 제가 비록 재간이 없사오나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어머니는 <너의 아버지가 떠날 때 말을 남기시기를 "내가 감추어둔 물건이 있는데, 칠령칠곡의 돌 위에 선 소나무가 있다. 이것을 얻은 자가 내 자식이다:라고 하였다.>라는 말을 일러주었다.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찾아도 얻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왔다. 유리가 집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보니, 그 기둥이 돌 위의 소나무요, 일곱각이 진 것이라. 유리가 스스로 깨달아 말하기를 <칠령칠곡은 일곱 각이고 돌 위의 소나무는 기둥이다>라고 말하고는 일어서서 가보니 기둥 위에 구멍이 있었다.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고 크게 기뻐했다.

전한 홍가 4년 여름 4월에 고구려로 달려와서 칼 한 조각을 왕에게 바쳤다. 왕이 유리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진실로 내 아들이다. 어떠한 신성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유리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공중을 날아서 들창을 타고 넘어 해를 꿰뚫어 신성한 이적을 보여주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태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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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국가의 안정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흰 사슴을 잡아 해원에 거꾸로 매달아 저주하기를, <하늘이 비를 내려 비류국 왕도를 물바다로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로 너를 놓아주지 아니하겠다. 이런 고난을 면하고자 한다면 네가 하늘에 호소하여라>라고 하였다.

그 사슴의 슬피 우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송양의 도읍은 물바다가 되었다. 왕은 갈대줄로 강을 가로질러 놓고, 오리말을 타고 있었다. 백성들은 모두가 그 줄을 붙들고 있었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에 금을 그으니 물이 줄었다. 6월에 송양이 온 나라 백성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다고 한다.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은 그 산성을 볼 수 없었다. 오직 수천 사람 소리가 토목 공사를 하는 듯이 들렸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레 만에 운무가 스스로 흩어지니, 성곽과 궁실, 누대 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었다. 왕이 황천을 향해 절을 하고는 나아가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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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건국의 과정

비류왕 송양이 사냥을 나왔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데리고 가서 더불어 앉아 말하기를, <바닷가에 떨어져 살아 아직 군자를 만나보지 못하다가 오늘 우연히 만났으니 다행한 일이요. 그대는 어떤 사람이며 어디서 오셨소?>라고 물었다.

왕이 대답하기를 <과인은 천제의 손자며 서국의 왕입니다. 감히 묻습니다. 군왕님은 누구 후손이신지요?>라고 하였다. 송양이 <나는 선인의 후예인데, 여러 대에 걸쳐 왕을 하고 있소. 지금 이 지방은 지극히 좁아 두 임금이 갈라서 차지할 수 없는데, 그대는 건국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우리 부용국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죠?>라고 말하였다. 왕은 <과인은 하늘을 이은 자손이고 지금 왕은 신의 자손도 아닌데도 억지로 왕이라 일컬으니 만약 나에게 복종치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그대를 벌할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송양은 왕이 몇 번이나 천손이라고 말하는 데 대해 의심을 품고 재주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왕과 더불어 활을 쏘고 싶소이다.>라고 말하고는 사슴을 그린 과녁을 100보도 못 미치는 거리에서 두고 쏘는데, 살이 사삼의 배꼽을 맞하지 못했으면서도 실지로 맞힌 것처럼 여겼다. 왕은 사람을 시켜 옥지환을 100보밖에 걸게 하고 쏘자 마치 기와장이 부서지듯이 깨지므로 송왕은 크게 놀랐다고 한다.

왕이 말하기를 <나라 일이 새로우니 아직 고각의 위의가 없다. 비류국 사자가 왕래할 때, 내가 왕의 예로서 영송할 도리가 없으니 우리를 업신여기는 구실이 되겠다>고 말하였다. 시종하던 신하 부분노가 나와서 말하기를 <신이 대왕님을 위하여 비류국의 고각을 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하메, 왕이 <다른 나라 장물을 네가 어떻게 가져 오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내린 물건이니 어찌 가지지 못하였겠습니가? 대체로 대왕님이 부여에서 곤궁하실 적에 어느 누가 이곳에 오시리라 생각하였겠습니까? 지금 대왕님이 만 번 죽을 위태한 땅에서 몸을 빼나와 요좌에서 이름을 날렸사옵니다. 이는 천제가 명령하시어 이루신 일이오니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아니하겠습니까?>하고는 부분노 등 3인이 비류국에 가서 고각을 훔쳐왔다.

비류국왕이 사자를 보내 아뢰기를 뭐라 뭐라 하였다. 왕은 고각을 와서 볼까 염려하여 어둡게 색칠해 오래된 것 같이 해놓았더니, 송양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송양이 도읍을 세운 시기의 선후로서 부용국을 정하려 했다. 왕이 궁실을 만드는데, 썩은 나무로 기둥을 삼아 1000년이나 묵은 듯이 해 두었다. 송양이 와 복는 마침내 감히 도읍의 선후를 다투지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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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영웅의 위기

나이 들어 어른이 되니 재능도 함께 갖추었다. 금와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같이 사냥을 하면서 놀았다. 왕자와 종자가 40여명인데도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으나, 주몽이 잡은 사슴은 아주 많았다. 왕자가 이를 투기하여 주몽을 잡아 나무에 묶어놓고 사슴을 빼앗아가 버리므로 주몽은 나무를 뽑아 버리고 돌아왔다. 태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이란 놈은 귀신같은 장사고 안목이 비상하옵니다. 이 놈을 일찍 처치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훗날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먹이도록 하였으니, 주몽의 참뜻을 떠 보고자 한 것이다. 주몽은 속 마음에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저는 천제의 자손으로 남의 말을 먹인다는 것은 죽음만 같지 못한 노릇이니, 남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울까 합니다. 그러하오나, 어머니가 계시니 감히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는 내가 밤낮으로 마음 졸인 바이다. 내가 듣기로는 장사가 먼 길을 떠날 때는 꼭 좋은 말이 필요하다. 나는 말을 고를 줄 안다.> 하고 곧 말목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긴 채찍으로 마구 치니 뭇 말이 놀라 달리는데, 붉고 누름한 말 한 마리가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었다. 주몽은 훌륭한 말임을 알고 남몰래 바늘을 혀뿌리에 꽂아두었다. 그 말은 혀가 아파 물과 풀을 먹지 못하므로 몹시 야위어갔다. 왕이 말목장을 순행하다가 뭇 말이 모두가 살찐 것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고 야원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은 그 말을 얻어서 바늘을 뽑고는 잘 먹었다.

주몽은 남으로 내려가고자 하였지만, 강을 건너자니 배가 없고 따라오는 군사들이 닥쳐올까 두려워서 채찍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한숨짓고 탄식하기를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황천과 후토는 이 외로운 사람을 살피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마련하소서>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은 이러하여 건널 수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추격병들이 이러렀다. 추격병이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놓은 다리가 즉시 없어졌으므로 다리 위에 있던 군사들은 모두 빠져 죽었다.

주몽이 작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어미 걱정은 말아다오>하고는 오곡 종자를 싸 주었다. 주몽은 생이별하는 아픔으로 애끓이다가 그만 보리씨를 가져오는 것을 잊어 버렸다. 주몽이 큰 나무에서 쉬고 있었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이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어머니가 사자를시켜 보리씨를 부쳐온 것이다>하고는 활을 당겨 쏘는 한 살에 다 떨어졌다. 목구멍을 열어 보리씨를 꺼내고는 물을 비둘기에게 뿜자 다시 살아서 날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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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주몽의 탄생

왕이 천제의 왕비임을 알고 별궁에 있도록 하였더니 여자는 품 속에 햇빛이 비치어 잉태를 하였다. 신작 4년 계해 여름 4월에 주몽이 탄생하였는데, 울음소리가 아주 크고 골격이 뛰어났다.

처음에 날 때 왼쪽 옆구리에서 한 알을 낳으니, 크기가 닷 되들이 정도였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이 새 알을 낳았으니 불길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을 시켜 알을 말 우리에 두었더니 모든 말들이 밟지 않았고, 깊은 산속에 버려도 온갖 짐승들이 모두 지켜주었다. 구름이 끼고 음침한 날이면 알 위에 항상 햇빛이 비쳤다. 왕은 알을 가져오게 하여 그 어머니에게 보내 기르게 하였다. 알이 마침내 갈라져서 한 사내아이를 얻었다. 낳은 지 한달도 안되어 말을 아주 잘했다.

(주몽이) 어머니에게 일러 말하기를 <파리 떼들이 눈에 덤벼 잘 수가 없으니, 어머니가 활과 실을 만들어 주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싸리나무로 활과 실을 만들어 주었더니, 물레 위의 파리를 쏘는데 화살을 쏘는 족족 맞혔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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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해모수와 하백

본기(구삼국사 본기인 듯)에 이렇게 적혀 있다.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하여 아들 낳기를 빌러 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금빛 나는 개구리 모양의 작은 아이가 있었다. <왕은 이를 하늘이 내게 아들을 준 것이다.> 라고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일전에 천제가 내게 내려와서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여기서 떠나거라"라고 하였는데, 동해 가에 가섭원이란 땅이 있어 오곡이 잘 되니 도읍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아란불은 왕을 권하여 옮겨 도읍하고 동부여라 이름하였다. 예전 도읍테에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 되어 내려와서 도읍하였다.

한 신작 3년인 임술년에 천제가 태자를 보내 부여왕의 옛 도읍에 내려가 놀게 하였는데, 해모수라는 이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다섯 용이 끄는 수레 오룡거를 탔고, 따르는 이 백여명은 모두 흰 고니를 탔다. 색깔있는 구름이 그들 위에 떴고 음악 소리가 구름 속에서 울려 나왔다. 웅심산에 머물렀다가 10여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내려왔는데, 머리에는 오우의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의 칼을 찼다.

그녀들이 왕을 보고는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좌우 신하들이 말하기를 <대왕님은 어찌하여 궁전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여자들이 방에 들거든 문을 닫아서 가로막으시옵소서>라 하니, 왕이 "그러리다"라고 말하고는 말채로 땅에 금을 그으니 동실이 문딕 서서 장관이었다. 방 가운데에 세 자리를 준비하고 통술을 차려놓았다. 그녀들이 각각 자리에 앉아 서로 권하여 술 마시더니 크게 취하였다고들 한다.

하백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보내 말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길래 내 딸을 붙들어 두었는가?>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지금 하백과 혼인을 맺으려 한다.>고 하였다. 하백이 또 사자를 시켜 고하기를 <그대가 천제의 아들로서 나에게 구혼할 뜻이 있다면 마땅히 중매자를 시킬 일이거늘 지금 갑자기 내 딸을 붙들어 두었으니 어찌 그렇게 예의가 없는 것인가?>하므로 왕은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왕은 곧 가서 하백을 뵈옵고자 하였으나,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그녀를 놓아 보낼까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미 왕과 정이 들어 떠나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왕에게 권하기를, <만약 용이 끄는 수레만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하늘을 가르켜 고하니 갑자기 오룡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왕이 그녀와 같이 수레에 오르니 바람과 구름이 문득 일어 하백궁에 이르렀다.

하백이 말하기를 왕이 진실로 천제의 아들이라면 무슨 신이한 것을 가졌는가?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하백이 뜰 앞 물에서 몸을 변하여 잉어가 되어 물결 타고 노니는데, 왕은 수달이 되어 잡았다. 하백이 또 사슴이 되어 뛰어가니, 왕은 늑대가 되어 쫒았다. 하백이 뀡이 되면 왕은 매가 되어 치매, 하백은 진실로 천제의 아들임을 알고는 예로서 혼례를 치렀다. 왕이 앞으로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두려워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차려 왕에게 권하여 만취케 하여 놓고는 딸과 함께 작은 가죽 가마에 넣어 옹거에 실었는데, 같이 하늘에 오르게 하자는 생각에서인 것이다. 수레가 물에서 뜨기도 전에, 왕은 곧 술이 깨서는 그녀의 황금 비녀를 빼서 가죽 가마를 뚫고 그 구멍으로 빠져나와 혼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하백이 크게 노하여 그녀를 책망하기를, <너는 내 훈계를 따르지 아니하였다가 끝내는 우리 집안을 욕보였다>라고 말하고는 좌우 신하들에게 딸의 입을 쥐어 당기게 시켜 입술 길이를 석자나 되게 하였다. 기여 비복 2명만 주어 우발수 한가운데로 내쫒았다. 우발수는 못 이름인데 지금 태백산 남쪽에 있다.

어부 강력부추가 아뢰기를, <근자에 발 속의 고기를 훔쳐가는 일이 있사온데, 어떤 짐승인지 알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자, 왕이 어부를 시켜 그물로 끌어올리게 하였으니,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당겨내서야 비로소 한 여자를 얻었는데, 돌에 앚아사 나왔다. 여자는 입술이 길어 망을 못하기에 세 번 자르게 한 연후에야 말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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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서문

세상에서 동명왕의 신이하고 이상한 일이 이야기 되는데, 비록 배운 것 없는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제법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내가 일찍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웃으며 <선사 공자님은 괴력난신을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이 동명왕 설화는 실로 황당하고 기궤하니 우리들이 논급할 바가 아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뒤에 <위서>와 <통전>을 읽어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지 못하고 자세하지 못하니, 자기네 일은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핵심만 기록하려고 한 때문일 것이다.

다음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서 동명왕 본기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되는 것보다 더 자세하였다. 그러나 역시 처음에는 이를 믿지 못하였으니, 귀신(귀)이나 환상(환)의 이야기같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여러번 탐독, 미독하여 차차로 근원을 찾아가니 이는 환이 아니고 성이며, 귀가 이나고 신이다.

동명왕의 이야기는 변화롭고 어지러워 중생을 현혹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은 실제 나라를 건국한 신이한 사실적 이야기이며, 즉 이것이 저술되지 않았음이 후에 어찌 보겠는가. 이로서 이 이야기를 시조 짓고,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무릇 천하에 우리 국가의 근본이 성인의 국가임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니라.

사료해석 : 동명왕편 서문이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민족적 발로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규보는 초기에는 유교적 합리사관에 의해 초기에는 유교적 합리주의 입장의 사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중세 사관인 무징불신, 필삭주의 등을 지키려 했었고 명확한 증거가 없는 것을 손대지 않으며, 신화와 같은 허무맹랑한 사실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규보는 점차 고구려 계승의식을 바탕으로 한 동명왕을 강조하면서 중국과 다른 독자성을 우리 역사에서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곧, 이규보가 유교 사관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역사 시대를 좀더 상고시대로 끌어올려보려는 절충적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규보는 동명왕 신화는 유교사관에서 말하듯 괴력난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웅적 시조의 이야기을 잘 분석하면 우리 민족 고유의 독자적 혈연관계와 문화 공동체 의식을 찾아낼 수 있다는 민족의식의 발전성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최씨 무신 정권기에 사회 통합 기능 차원에서 어느 정도 목적성이 있을 수도 있어 보입니다. 또한 삼국사기와 같은 직전 시대의 사서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것을 저술함으로서 묻혀 버린 과거 이야기를 진지하게 논의하고자 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조선시대 단군조선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마련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비체계적인 서술과 감성적인 고대 전통으로의 복귀라는 문제점은 이 글의 가장 큰 약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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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편(주몽설화)

이 작품은 고구려를 창건한 동명왕을 민족적 영웅으로 형상화한 영웅 서사시입니다. 서사시는 장중한 문체로 집단의 운명에 직결되는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장편의 이야기시의 이름인데, 특히 국가나 민족 또는 인류적 영웅의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사건을 그 주된 이야기거리로 삼은 것을 영웅 서사시라고 하지요. 우리 문학사의 경우 고전문학이나 현대문학을 막론하고 서사시가 매우 드문 형편인데, `동명왕편`은 고구려를 창건한 동명왕을 민족적 영웅으로 주인공화하여 하늘과 땅은 물론 수중 세계를 아우른 광활한 지역을 배경 삼아 기억하기에 편리한 오언시(五言詩)로 표현되고, 작자의 개인적인 정서나 사상보다는 커다란 역사 공동체로서의 당시 고려인의 신앙과 이념을 나타냄으로써 영웅서사시의 제반 요건을 충족하고 있는 귀중한 문학 유산입니다.

창작동기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지은 시기는 1193년(명종23)4월로 그의 나이 26세 때였습니다. 이 시기는 고려 사회의 대내외적 모순이 절정을 향하고있을 때였지요. 외적으로는 요나라의 수차례에 걸친 침공을 경험한데 이어 요나라의 뒤를 이은 금나라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무신정변이라는 살육에 의한 지배층의 교체와 1190년(명종20)부터 시작되어 진행 중에 있던 민란으로 인해 고려 국가가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기도 했구요. 이런 대내외적 정서가 이규보의 `동명왕편` 창작의 배경으로 작용하였음은 분명한 일입니다.

이 시절 이규보는 비록 과거시험에 합격은 하였으나 아직 관직에는 오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2년 전인 1191년(명종21), 아버지를 여읜 후로부터 개성 근교에 있는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스스로 호를 짓고 시와 술에 몰두하여 한가로운 날을 보내면서 대뇌외적 모순에 당면한 고려 사회를 관조하고 있었습니다. `구삼국사(舊三國史)`를 구해 읽고 동명왕의 사실에 대해 감명을 받는 등 고려인으로서의, 또 문학 청년으로서의 진지한 정열을 불태우던 시기가 바로 이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일생을 통하여 관직에의 강렬한 욕구를 보여 당시 무신정권의 권력가인 최충헌 가문에 밀착되기까지 하였고, 그 결과 70세에 상국(相國)의 지위로서 은퇴하기까지 평탄한 벼슬살이를 할 정도로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이규보의 성향으로 볼 때 진지한 정열을 불태우던 시절에 대내외적 모순을 극복할 상념에 젖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함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규보와 같이 현실에 뜻있는 고려 지식인들이 고려 사회가 당시에 맞고 있었던 위기의 원인을 상념한 관점을 추정하여 `동명왕편`의 창작 동기를 민족의식의 고양, 또는 국가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동명왕편의 지은 동기는 서문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럼 서문부터 제시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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