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도'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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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6.02 14-15세기 : 서유럽에서 장원이 몰락하다.
  4. 2007.06.02 14세기 중세 유럽엔 봉건제도의 위기가 찾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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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12 - 가마쿠라 막부의 사회 구조와 법, 종교 분석 (4)
  13.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8- 다이카 개신기 이래의 토지제도 <반전수수법>등을 중심으로...
  14. 2007.03.09 중세유럽사7 - 중세 봉건제도의 기원 (3)
  15. 2007.03.05 중국사14 - 춘추전국시대의 패자질서와 회맹적 국제관계
  16. 2007.03.03 중국 서주시대의 봉건제도에 대한 분석 (7)
  17. 2007.02.21 유럽중세사 1 - 게르만족의 이동 (17)
  18. 2007.02.12 중국사 이야기 6 - 서주시대의 계급구조를 통해 중국고대 계급의 용어를 파악해보자.
  19. 2007.02.12 중국사 이야기 5 - 주나라시기에 종법에 기초한 씨, 성 제도가 확립되었다. (2)
  20. 2007.02.12 중국사 이야기 4 - 중국사에서 이상시대인 서주시대가 과연 존재했을까? (2)

수조권에서의 사전에 대한 해설

1. 질문답변자료 - 공전, 사전, 민전이라는 용어의 문제

간만에 질문답변자료를 올려보네요. 경준님이 말하신 공전, 사전 등 수조권 용어에 대한 내용 몇가지 정리해 드립니다. 경준님이 임용고시를 준비하시는 분이라, 제가 이해하고 있는 개념보다는 시험에 나올 수 있는 개념으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몇가지 개념들을 덧붙여서 설명해볼께요.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고, 개인적인 글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고 읽어주세요. 다 읽기 귀찮으시면, 필요한 부분의 번호만 읽으세요.

2. 수조권이라는 것의 개념

수조권이 처음 시작된 것은 신라시대 녹읍부터입니다. 그러나,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신문왕 때 관료전 부터라고 하죠. 교과서에 맞추어야 하니깐 관료전부터로 설명하겠습니다.

수조권은 관료체제가 정착되는 시대부터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왕토사상이나, 공지의 환수, 분급이라는 개념은 중국 정전법의 이념부터 내려오지만, 수조권의 개념은 중국보다는 한반도쪽에서 일반화된 개념이죠. 중국사에서는 수조권에 의한 토지 분급이 없습니다. 중국사에서는 개인이 가진 사전을 국가가 통제하고, 사전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토지제도의 개념을 잡습니다. 단, 왕토사상에 의해 형식적으로는 국가가 모든 토지를 소유했기 때문에 개인의 토지는 이념상 국왕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중국의 독특한 토지 관념을 <아시아적 토지 소유론>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사에서는 <수조권>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사에서의 토지소유관계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견이 많습니다. 수조권을 포함해서 국가가 모든 토지를 소유하였다고 여긴다면 토지국유론이 되겠고, 개별적으로 개인이 토지를 소유하였다고 생각하면 토지사유론이 됩니다. 그러나, 관념상으로는 국왕의 토지이지만, 실제적으로 개별 토지소유가 있었다는 중국식 관점이라면 아시아적 토지 소유론이 됩니다.

이건 나중에 설명하고, 일단 수조권의 개념을 잡아보죠.

수조권은 국왕의 권력이 강해져서 <관료제>를 운영해야 할 시점이 되었을 때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점이 신라시대 녹읍기라고도 보고, 어떤 이들은 신문왕 때 왕권강화기라고도 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관료제를 운영해야 할 시기에 강력한 관료제, 상비군을 운영할 수 있는 자본력의 문제가 대두합니다.

또 그 자본을 어떻게 관료들에게 지급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고대, 중세시기에는 유통경제가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관리들에게 주어야 할 돈을 <토지>라는 매개를 활용해 지급하게 됩니다. 즉, 관리들에게 화폐단위(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이 될 수 있는 <토지> 자체를 주는 것이죠. 토지는 곧 근대 이전의 자본을 의미합니다.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에 대한 일정한 권리를 관리에게 줌으로서 국가는 관료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최근 학자들은 녹읍이 바로, 토지를 매개로 관리들에게 특권을 준 최초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과서에서는 신문왕기 관료전이 바로 본격적인 수조권의 시작이며, 고려시대 전시과가 국가체제의 완성으로 수조권이 구현되는 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쿵쿵따 아시죠? 학교에서 아이들은 수조권을 쿵쿵따로 외운답니다. 관료전 - 전시과 - 과전법... 이렇게 끝자가 다음 단계의 앞자가 되죠...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사실 여기에도 역사적인 필연성이 있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중요한 것은 이 수조권이란 것이 <토지>를 매개로 하지 않아도 국가가 관료에게 직접 녹봉을 줄 수 있는 화폐경제발달이 이루어지는 시점까지 존속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조선 중기 관수관급제가 소멸되면서 수조권이 아닌, 직접 화폐지대를 받게 되죠.

3. 토지에서 세금을 걷는 전통적인 방법 : 결부법

신라시대 녹읍부터 조선시대 수조권적 토지제도가 유지되는 전 기간 동안 국가가 토지에서 세금을 걷는 방식은 <결부법>이었습니다. 결부법은 고대시대 가장 세금을 걷기에 합리적인 방식이었죠.

일단, 고구려에서는 무조건 토지의 면적을 일정하게 하여 세금을 걷는 경무법이 있었죠. 경무법은 흉년이건, 풍년이건 무조건 같은 면적의 토지에서 같은 세금량을 걷는 것이므로 상당히 불합리적이었습니다.

백제에서는 씨를 뿌리는 파종량에 따라 세금을 걷는 두락법이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불합리하죠. 파종량과 상관없이 농사의 풍흉이 결정될 때가 많으니까요.

결부법이란, 고대시대 가장 합리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방법으로 <곡물의 생산량을 통해 세금을 걷는다>는 방식입니다. 왜냐면, 우리 나라는 중국과는 그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남부와 북부의 토지 밀도가 다르고, 산지가 많으며, 강이 흐르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생산량도 다릅니다. 이러한 곳에서 절대면적으로 세금을 계산한다면, 누구도 질이 나쁜 토지에서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금은 토지면적이나 파종량이 아닌, 수확량으로 계산해야 합니다. 이 때 수확량을 계산하는 단위가 바로, <결, 부, 속, 파>라는 단위입니다.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볏단 1개를 단위로 수확량을 계산하는 단위이며, 이 단위에서 이름을 따 <결부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국가가 민전이든, 수조지이든 세금을 걷을 때는 이 결부에 따라 세금을 책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결부로 세금을 걷을 때로 그 단위는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고려초기까지는 <단일양전척>을 사용하여 토지의 실제 크기를 재고 세금을 걷었습니다. 단일 양전이란, 토지의 실제 크기는 같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단, 토지 비옥도에 따라 같은 크기의 땅에 전품을 매겨 같은 토지에서 걷는 세금을 다르게 하는 방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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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이 더욱 발전하여, 토지비옥도와 상관없이 토지의 면적을 같게 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금 걷기도 힘들구요. 따라서 실제, 비옥한 토지는 비옥하지 않은 토지에 비해 생산량이 많이 산출되므로, 같은 1결에서 같은 생산량이 산출되도록 토지의 결수를 조정하게 됩니다. 이것을 <수등이척법>이라고 합니다. 수등이척이란, 수확량이 다른 토지는 다른 척도로 재야한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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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떤 방식이든지 1결의 토지에서 얼마나 생산량이 나오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세금을 걷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토지를 파악해야 했고, 이것을 <양전사업>이라고 하죠. 또 양전사업과는 별도로, 누구에게 토지가 매매되었고, 누구의 토지가 늘었는지 줄었는지 등 토지자체의 면적 외의 내용을 기록한 것을 <작정(전정장적)>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결부법을 더욱 합리적으로 정비합니다. 토지(전정)비옥도에 따라서 세금을 나누는 것이 전분 6등이었고, 흉년과 풍년의 정도(연정)에 따라 연간 세금을 책정하는 것을 연분 9등법이라고 합니다. 세종 때, 측우기도 사실 이 연분 9등법을 실시하기 위해 발명하였다고 하죠. 이 때 조세는 1결의 생산량이 300두라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최고액은 20두, 최하액은 4두였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번잡하여 훗날 무조건 결당 4두로 세금을 통일하게 되는데 이것을 <영정법>이라고 하죠.

이렇게 계산된 세금은 토지의 성격에 따라 조세가 결정됩니다. 만약 개인이 가진 토지이면, 세금액은 생산량의 1/10 정도, 국가토지를 경작할 경우 1/4, 소작농은 1/2 정도의 세금을 내게 되죠. 물론 시대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수조지 역시 결부에 따라 세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4. 용어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전>의 개념

이제 수조권상의 용어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보죠. 수조권에서 공전, 사전, 민전 등의 용어를 이해할 때, 가장 문제점이 공전, 사전, 민전이라는 용어를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하거나, 사전을 <개인이 가진 토지>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용어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의 함정은 <사전>이 결코, <개인이 가진 토지>만을 말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소유권에서의 사전과 수조권에서의 사전이라는 용어를 역사학자들이 그냥 막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일부 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만, 그 일부 학자들이 개론서 등을 집필하면서 <사전>이라는 용어를 소유권과 수조권에서 다른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께요.

누군가 소유권을 가진 토지가 있습니다. 소유권상으로 볼 때, 개인이 가진 토지는 당연히 <사전>입니다. 국가가 가진 토지는 당연히 <공전> 또는 <국유지>라고 부르지요. 어떤 책에서 <사전>을 개인이 가진 땅이라는 뜻으로 쓸 때, 이 말은 소유권에 대한 글을 적을 때입니다.

그러나, 수조권에 대한 글에서는 달라집니다. 특히, 임용고시 공부 하시는 분들이 책마다 그 개념이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소유권에 대한 글인가, 수조권에 대한 글인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수조권에서 말하는 사전은 <국가가 개인에게 내린 수조권지>라는 뜻이거든요. 국가가 원래 가진 땅이 <공전>, 왕토사상에 의해 국가가 가져야 할 땅을 개인에게 빌려준 경우가 <사전>이 됩니다.

예로, 경기전과 외방사전이라는 용어를 볼까요? 고려시대 수조지를 줄 때, 경기도에 한정된 것을 경기전, 경기 외에 분급한 것을 외방사전이라고 합니다. 외방사전에서의 사전이란? 개인의 땅이 아니라 국가가 <수조지로 빌려준 땅>이라는 외미입니다. 한자로 私田이기 때문에 개인 소유지로 해석하면 큰일 나죠. 임용시험에 종종 나오는 한문강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사에서 <사>자는 여러 뜻으로 쓰이거든요.

특히, 고려 후기에는 농장이 유행하면서 수조권지을 마치 개인의 소유지마냥 쓰게 되었습니다. 권문세족들은 토지경병, 개간, 강탈 등을 통해 수조권지가 그냥 개인의 사전(재산, 가산)이었거든요. 따라서 여말, 조선시대 사료들에서도 <수조권지>를 그냥 <사전>이라고 표기합니다. <사전의 가산화>란, 고려 권문세족들이 수조권지를 마치 자신의 땅인것처럼 여긴다는 뜻이지, 개인의 토지를 자신의 재산으로 했다는 뜻은 아니겠죠.

조선의 건국세력인 온건개혁파와 급진개혁파들 사이에는 <사전개선론, 사전개혁론>이 있었습니다. 이 용어를 그대로 해석해서 개인의 땅인 사전을 빼앗아 개혁한다고 생각하면 틀립니다. 이 때 사전이란, <수조권지>를 말합니다.

따라서 조선의 사전개혁론이 성공했을 때의 사전이란, <수조권을 기반으로 해서 권문세족들이 확대한 농장>을 개혁한다는 뜻입니다. 실제, 조선 건국시 과전법에서는 수조권을 기반한 사전을 개혁했지, 모든 땅을 다 개혁해서 백성에게 나눠주는 계구수전의 원칙은 지켜진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사전개혁론에 의한 과전법은 경기전, 외방사전의 수조지를 모두 몰수한 다음, 경기지방의 토지만을 과전으로 지급한다는 내용입니다. 경기도의 땅을 18과로 나눠 1/10의 조세를 걷고, 사후 반납하되, 수신전, 휼양전 등의 땅만 세습할 수 있게 하였죠.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토지소유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중세시대의 토지 소유론은 국가소유인가, 개인소유인가로 나눠집니다.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이 부분을 알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서 정리해 봅니다. (제가 아는대 까지만 정리하는 것이고, 교사용 지도서는 안 읽어봐서 거기 내용은 어떤 내용인지 모르겠네요.)

5. 모든 토지는 국가가 가지고 있다는 <공전제론>

토지 공전제론이란, 모든 토지는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입니다. 한국사회에서도 고대-중세-근대 등 시대별로 특징이 있는데, 그 중 중세시대의 토지 소유는 국가중심이라는 이론이죠. 그런데, 이 이론은 일본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왜냐면 한국사회의 중세 봉건제도는 서양과 달리 국왕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을 해야, 고려와 조선 사회가 왕씨왕조, 이씨왕조 등 개인 왕조로 덮어씌울 수 있었거든요. 즉, 조선의 토지는 모두 이씨 국왕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선은 살아있는 생명체 국가라기보다 이씨가 독점하는 이씨 왕조이다...라는 것이 일본의 역사왜곡 주장입니다.

일단 고려, 조선 같은 중세 봉건국가는 족장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일부 지배층 족장들이 곧 국왕과 더불어 국가를 이루었고, 조선은 그 일부 지배층들이 토지를 공유하기 때문에, 모든 토지는 국가의 토지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봉건제 사회에서 토지를 가진 지주도 국가, 봉건제도에서 내는 세금 자체가 국가에 내는 조세, 농민들은 국가의 농노가 되는 것입니다.

고려, 조선의 중앙집권적 사회는 국가가 토지를 소유한 봉건제 사회를 탈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이 개화시키기 이전 조선 사회는 영원한 <봉건제 국가>라는 내용이죠. 이 주장에 따르면 조선이 근세, 근대라는 주장은 허황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봉건적인 <국가 토지 소유론>을 극복한 것이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이기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에 의한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약간 식민사관의 냄새가 납니다.

이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은 둘째치고, 대한제국에서 스스로 토지광무개혁을 하였고, 지계를 발급했다는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왜곡부분만을 제외하고, 핵심이론만 골라내면 쓸 만한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실증주의 학자들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민족주의 학자들은 이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죠.

6. 중국식으로 해석한 <아시아적 토지 소유론>

토지 공전제론이 일본식 해석이라면, 아시아적 토지 소유론은 중국식 해석입니다.

이 내용의 핵심은 중국사상에서 가져온 <왕토사상>의 이념입니다. 중국에서는 주대 정전법 이래, 모든 토지 소유 관계를 <명분상 국왕의 소유>라는 틀을 잡아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고 실제 농사를 짓는다고 할 때, 그 농사를 짓는 땅은 그 사람의 땅이고 농사에서 나오는 부산물도 그 사람의 소유이지만, 그것은 모두 국왕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토지(민전)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생산-소비관계에서 토지일 뿐입니다. 관념상, 명분상으로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 즉 황제의 땅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이론에 맞추게 되면 토지의 소유자는 두 계층이 됩니다. 모든 땅의 주인인 천자와 실제 토지 소유자이지요.

따라서 국가가 모든 토지를 소유하고 관리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토지는 지주와 농민이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원할 경우에 모든 땅은 국가가 처분하거나 관리할 수 있습니다. 실제 중국에서는 그렇게 했구요. 수조권이란 것도 국왕이 자신의 땅을 관리들에게 임대하였다는 개념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국가는 토지 관리자, 전주는 수조권을 가진 자, 전객은 실제 농사짓는 자라는 3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수조권이라는 것을 중국식 관념에 맞추어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론이죠.

7. 토지국유론을 부정한 <토지사유론>

토지 사유론은 말 그대로, 토지를 국가가 가진다는 이념은 없다는 해석입니다. 동양식 이론보다는 서양의 시대구분에 더 초점을 맞춘 이론이죠.

일단 서양이론에서는 시대구분상 고대-중세-근대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고려시대를 <중세>라는 개념으로 잡고, 중세의 특징은 봉건제도와 장원제도라고 판단한 것이죠.

그러나, 이 이론에서의 특징은 서양식 봉건제도와 고려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서양에서는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이지만, 고려에서는 <중앙집권>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고려에서의 봉건제도는 서양과 마찬가지의 토지사유제도가 존재하면서도 국왕이라는 존재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뿐, 그 근본이 토지사유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지대란, 지주(전주)가 전호(전객)에게 받는 돈이지 국가와는 상관없으며, 지주가 전호를 경제외적으로 지배하는 것 역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는 주장이죠.

문제는, 고려는 국왕에게 내는 조세가 있습니다. 따라서 조세는 어느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국왕에 내는 과세일 뿐, 지대와는 별개라는 것도 주장의 하나입니다. 국가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자신의 토지에서 독자적으로 장원을 경영하는 것은 서양에서도 별개로 보는 것이니까요.

토지 사유론이 바로 교과서의 이론입니다.

8. 학자들이 구분하는 <수조권상의 사전 구분론>

이 이야기는 아까 했었죠. 이 이론은 소유지에서의 사전이란, <개인이 가진 땅>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조권에서 나오는 <사전>이란 단어는 결코 같은 뜻을 해석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즉, 소유권에서의 공전은 국가의 국유지, 사전은 개인이 가진 사유지입니다.

그러나, 수조권에서의 공전은 국가가 직접 수조권을 걷는 국가 수조지(국유지)라는 뜻이고, 수조권상의 사전은 국가가 직접 수조하지 않고 수조를 개인에게 맡긴 땅(수조지)라는 뜻이 됩니다.

9. 사전(私田)인가, 사전(賜田)인가, 사전(寺田)인가에 대한 구분이 필요

마지막으로 사전에 대한 내용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한자를 안 보고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은 수조권과 관련된 개념인 사전(私田)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읽다보면 사전(賜田)에 대한 내용을 사전(私田)과 혼동해 이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수조권과 관련된 사전(私田)은 고려 시대 공전(公田)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수조권상의 지급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사전(賜田)은 말 그대로 <하사하다 사>자를 쓰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수조권과 관계없이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부여하는 토지로, 공을 세운자에게 주는 공신전을 포함합니다. 개국공신, 왕족 등에게 수조권과는 별도로 세습할 수 있도록 하사한 땅을 말합니다. 원래 공신전은 고려 말기까지 공음전이였습니다. 이름이 바뀌면서 수조권적인 성격이 가미되었지만, 본질은 세습이 가능한 토지였고, 실제 세습하도록 허용된 토지입니다.

  
질문에서 공신전이 사전에 포함된다고 말씀하셔서 한번 짚고 넘어갈께요. 공신전은 일단 수조권 형식으로 준 토지이므로, 수조권상으로도 개인이 가진 땅인 <사전(私田)>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실제 공신전전은 소유권을 가지고 세습을 했기 때문에 국왕이 하사한 사전(賜田)에도 포함이 됩니다. 혹시 그 부분의 문제가 아닌지요?

우리가 고려말 수조권상으로 <사전의 가산화>에 기여한 사패(賜牌)를 말할 때의 <사>자는 개간지나 황무지를 개척하여 공을 세웠다는 의미의 <하사하다의 사>자입니다. 그러나, 수조권상에서의 사전은 <수조권을 마치 개인의 토지처럼 이용한다는 뜻>의 사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헷갈릴리는 없지만, 사전(寺田)은 절이 소유한 땅의 개념으로 사원경제에서 나오는 용어이구요. 혹시나 해서요. 공신전이 헷갈리셨다면, 한자를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단 토지경제사 쪽에서 질문하신 부분 일부와 결부법같은 임용시험에 참고가 될 만한 것들 몇가지만 짚어보았습니다. 제가 막 적어놓고도 다시 읽어보고 수정하지 않으면 뭔 말인지 헷갈리겠네요. 문법없이 막 적었지만, 참고하시고 잘못된 내용이나 이상한 내용 지적해주시면 다시 생각해서 수정하겠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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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일본사 이야기 14 - 봉건제도의 등장과 선종의 유행

1. 사무라이의 등장과 봉건제도

일본에서 봉건제도가 등장한 것은 중세 이전의 헤이안 시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양사에서도 중세 봉건제도의 기원을 고대 로마의 콜로누스 제도와 로마식 주종관계에서 찾듯이 말이죠. 일본인들 역시 일본식 봉건제도의 기원을 일본 고대 말기의 역사적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일본의 봉건제도는 고대 말기 부유층의 장원 개발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일본 고대 말기에 천황가의 알력 다툼 속에서 부유한 토지 소유자들이 등장합니다. 동양사에서는 이러한 계급을 공통적으로 호족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일본 고대 말기의 토지 소유자들은 호족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중국사에서 비롯된 개념인 호족은 일정한 무력과 일정한 토지 소유, 그리고 자신들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가문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말기의 부유층은 빈농에서부터 출발하여 무사집단간의 전쟁 등을 통하여 등장한 계층도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양 고대사인 그리스, 로마 등에서 보듯 정복 사업으로 평민층이 성장하여 자신들의 지위향상을 했던 쪽과 더 유사한 면이 있는 것 같네요.

그러나, 로마에서도 노빌리스나 에퀴테스 등의 신귀족 계급이 보수화 되었듯, 일본 고대의 평민들도 무사집단에서 출발하였지만, 그들의 지도자는 결국 국왕가의 후손이었습니다. 고대 후기 천황가의 알력 다툼 속에서 천황 후보가 될 수 있는 천왕가의 후예들이 평민들을 체제 속으로 흡수하여 무사단을 조직하고 주도적인 지위를 얻으려 했던 것이지요.

예로, 무사를 뜻하는 <사무라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무력을 소유한 자>라는 뜻이 아니라 <대기하는 자>라는 뜻의 일본어 어원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리고, 고대를 부수고 중세를 연 막부의 지도자들은 모두 하층민 사무라이가 아니라 천황가와 일정한 관련을 가진 천황가의 후손이었고, 그들이 이끈 무사단이 막부 시대를 연 것이지요. 일본사에서도 평민계급에 의한 정권수립은 없었습니다.

2. 고대 말기부터 등장한 봉건적 토지 질서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일본 고대 말기부터 이미 중세적인 특징을 가진 토지제도가 존재하였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봉건제적 토지질서는 고대 <반전수수법>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 고대 천황은 중국 당나라의 율령을 받아들이면서 <아시아적인 토지 공유제>를 주장합니다. 즉, 중국식 정전제를 모방한 균전제를 일본에 도입하여 모든 토지를 국가가 관리하려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각 지방의 독자적 힘이 강하였던 일본의 호족정권들은 천황가의 이 제도를 반발하였고, 일본 고대의 토지제도는 <반전수수법>에 대한 반발로 점차 토지 사유화가 진행됩니다.

천황은 각 세력들의 반발로 결국 토지 공유제를 완전 포기하고 맙니다. 따라서 일본 고대 말기에는 귀족, 부농층, 불교세력 등이 각자 토지를 가지고 백성들을 부역하면서 장원을 소유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토지사유자 중 부농층의 토지 운영 방식입니다. 귀족과 사원세력 외에 부농층들은 경제권은 있으나, 정치적 실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보다 하층민인 빈농층과 농노(?)층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영하면서 실세인 귀족들에게 세금을 내야만 했습니다.

즉, 부농층들은 자신의 장원이 약탈당할 것을 우려하여 <유력 귀족>에게 토지를 형식적으로 바쳐버립니다. 유력 귀족은 부농층이 토지를 바치면, 그 대가로 세금을 걷어가고 부농층의 토지를 무력으로 지켜줍니다. 그리고 <유력 귀족>은 더욱 높은 귀족이나 천황가에 세금을 일부 바치고, 부농층의 권리를 국가권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도록 해줍니다. 즉, 토지경작자와 토지를 받은 소유자, 그들보다도 높은 권력자라는 연줄이 생기게 되죠. 이것이 바로 일본식 봉건제도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일본식 봉건제도는 서양식으로 계약에 의해 맺어진다기 보다는 토지소유자와 귀족간 대대로 맺어진 끈끈한 인연에 의해 맺어집니다. 소위말하는 의리라는 것으로 맺어진 관계이지요.

부농층은 귀족들에게 토지와 세금을 바치는 대신 안정된 경작권을 얻음으로서 스스로 무장하고 힘을 갖추게 됩니다. 이 부농층이 재산을 모아 무사단을 만들고, 돈으로 자신을 지킬 자(대기하는 자 : 사무라이)를 마련하면 불합리한 세금이나 억압에 대해 항거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들 새로운 부농 계급과 무사집단이 성장하면서 일본 고대는 몰락하였고, 거대 장원을 가진 자들로 이루어진 일본 중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들 부농층, 유력귀족, 중앙의 실력자와 황족은 중세시대 무사, 슈고, 지토 등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3. 미나모토노 가문의 봉건질서

일본 봉건제도는 최초의 막부인 미나모토노 가문에서 기틀이 잡힙니다. 미노모토노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슈고, 지토의 임명권을 갖게 되면서 시작된 12세기의 가마쿠라 막부는 일본 봉건제도의 여러 용어들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시기입니다.

일단 슈고의 개념부터 볼까요? 슈고란 지방(고쿠 : 국)의 군사권과 경찰권을 위임받은 직책으로 쉽게 말하면 지방 행정관입니다. 이들은 미나모토노 가문에 의해 지방으로 보내져 지방 장관들에게 보수를 받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토란? 쉽게 말하면 토지관리관입니다. 중세시대 각지마다 거대한 장원이 있어서 이들 장원에서의 세금은 곧 막부의 운영 자금과 연결되었습니다. 막부는 각 지방의 장원을 관리하면서 세금을 걷고, 장원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시급했죠. 지토는 이 장원을 감시하는 자로서 경제와 치안업무의 핵심이었습니다.

슈고와 지토들은 막부 최고 지도자인 쇼군에 의해 임명되어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대신, 쇼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수도인 교토와 막부 가문을 교대로 지키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쇼군이 전쟁을 할 때는 당연히 나가야 했습니다. 즉, 권리와 의무가 있었던 것이지요. 단, 서양식 계약관계가 아닌 쇼군에 대한 의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봉사관계였습니다.

그럼 누가 슈고, 지토로 임명될까요? 당연히 중앙의 유력 신하 가문에서 임명됩니다. 이들 유력 가문을 일본사에서는 <고케닌>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단어입니다. 일본사 책을 보면 계속 나오는 단어죠. 고케닌들이 슈고, 지토로 임명되면 군역과 조세를 거두어 중앙에 납부하는 형식으로 은혜에 보답하게 됩니다.

4. 막부시대의 문화적 특징하면? - 선종 불교가 키워드

자 그럼 이번에는 막부시대(중세시대)의 문화 키워드로 불교를 한번 간략히 다뤄보겠습니다.

일본 중세시대는 에도막부 후반 성리학이 유행하기 전까지 불교가 성행하였는데, 그 불교는 교종 계열이 아닌 <선종계열>이었습니다. 한국사에서도 나말여초기나 고려시대의 무신정권기 등 무가정권의 영향력이 센 시기에 선종이 유행하죠? 같은 원리입니다.

무사들이 득세하는 시기에는 항상 서민들이 염원하는 게 있죠. 현세의 안정과 복을 비는 것.... 즉, 서민불교가 유행하게 된다는 사실이죠. 무사들 역시 딱딱한 교리나 원칙을 따지는 교종보다는 쉽고 간결한 구결을 표방하는 선종이 입맞에 딱 맞을 수밖에 없죠.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는 가마쿠라 6불교라고 하는 6개의 종파불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6종교는 모두 공통적으로 엄격한 수행보다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선종적인 불교입니다.

일본 중세가 되면서 일본 역시 종교 본연의 모습의 찾는 종파불교가 성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국의 종파불교가 <불법의 논리와 이론적 완성>을 추구하는 교종적인 성격의 종파불교를 주로 한다면, 일본의 종파불교는 어려운 불법은 따지지 않는 선종적인 종파불교입니다. 일본의 종파불교는 정토종, 선종의 2가지로 요약됩니다.

정토종은 통일신라기 원효가 주장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외우면 무식한 서민들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경문사상의 종교입니다. 일본 정토종은 정토종, 정토진종, 시종이라는 3개의 파가 있지만, 우리가 다 알 필요는 없고 그 핵심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운다는 것으로 정리하면 될 듯 합니다.

정토종의 특징이 염불을 통한 구원이라면 선종은 좌선(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핵심으로 하는 종파입니다. 일본의 선종은 일련종, 조동종, 임제종의 3파가 있는데 이들 모두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이 곧 해탈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종파입니다. 한국사로 보면 지눌의 <간화경절문>에 해당하는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정토종이든 선종이든 일본 막부시대의 불교는 대체로 경전보다는 순간적인 깨달음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 중요시되는 종교였습니다. 일본 선종계열의 종교는 가마쿠라 6불교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도쿠가와 에도 막부기에 서민불교로 정착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전통적인 <토속신 신앙>과 융합하여 독창적인 일본 불교로 나아갑니다.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 양식은 일본 중세 문화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양식이라 불리는 초기 막부시대의 문화 양식은 중국 송나라 및 한반도의 고려 양식과 융합한 일본 양식을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일본 고대의 문화 양식이 천황과 호족 중심이었다면 중세부터는 문화의 주체가 바뀐다는 점입니다.

일단 막부 출현으로 무가적인 양식이 출현하였는데, 이 양식은 불교의 선종계열의 특징과 부합하여 무가적인 선종 불교 양식이 출현합니다. 즉, 좀더 서민적이고, 대중불교적인 양식을 말하죠. 특히 왕즉불 사상을 기반으로하는 고대 천황가의 양식과는 다르게 불사 조각이나 세밀한 목탑 등이 등장합니다. 중국은 전탑, 한국하면 석탑, 일본하면 목탑.... 아시죠?

다음장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의 마지막 장으로 막부 멸망과 남북조 시대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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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4-15세기 : 장원이 몰락하다.

1. 장원 몰락의 전체적인 배경

14세기 이후 장원제도가 몰락하는 배경을 서유럽 전체 사회 속에서 바라볼까요? 장원제도란 쌍무적 계약관계로 규정되는 봉건제도에서 비롯된 경제체제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다루어온 장원제도란, 봉건제도 밑에서 봉토로 받은 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13세기후반 이후부터 장원이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럼 13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유럽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를 살펴보아야겠죠?

13세기 후반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 끝났다는 점입니다. 11세기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 원정은 10세기 이전 항상 아시아에 참패당하던 유럽이 복수혈전을 꿈꾸며 기획한 야침찬 프로젝트였습니다. 교황은 성지탈환과 교황권의 확장을, 기사는 봉토확장을 통한 장원제의 지속을, 상인들은 동방무역을 꿈꾸며 각자의 뜻을 위해 아시아로 떠난 것이지요.

그러나 200년간의 싸움으로 얻은 것은? 유럽사회의 참패 뿐입니다. 유럽은 1차 십자군 원정 외에는 이렇다할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아시아 세력에게 밀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만 했죠. 그러나, 봉건 세력은 교황과 기사들은 십자군의 실패로 인한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교황권은 십자군 실패 이후, 유럽 안에서의 교황권 강화만을 추구하였고, 기사들은 동유럽쪽의 영지를 개간하여 장원을 넓히려 하였죠.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군 원정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동방 무역의 루트를 확실히 알게 된 상공계급이었고, 십자군 전쟁 이후 도시가 급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주들이 추구한 새로운 영지 확보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 13세기 후반 이후 기사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영지들은 이미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좋은 개간지는 모두 개간된 상태였죠. 또 엘베강 동쪽의 동유럽 땅마저도 이미 개간이 끝나 버려 십자군에 실패한 유럽 기사들이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영지란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유럽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먼저 당시 동유럽으로 인식되던 동부 독일 쪽으로 식민 개간이 이루어지지 않자, 유럽 내부에서의 상공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은 자체 무역권이 붕괴되는 현상을 맞이합니다.

영국의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물과 프랑스의 상파뉴 무역권은 백년전쟁의 여파로 몰락하였습니다. 이것은 이탈리아 대은행들의 파산으로 이어졌고, 이들과 거래하던 영주들도 몰락하게 됩니다. 영주들은 금전적인 문제가 심각해지자 농노들에게 재산을 기부받고 농노를 해방시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서유럽에서 농노가 해방되고 장원이 해체되는 첫단계였습니다.

2. 식민지가 없는데다가 병까지 돌기 시작하다.

14-15세기에 새로 개간된 동유럽의 식민지들, 즉 동유럽의 개간지들은 서유럽과는 달리 아주 자유로운 농업지역이었습니다. 동유럽의 개간지들은 아시아와 무역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여건도 확보된 지역이었습니다.

또 14세기 이후 중세 도시 경제는 플랑드르, 상퍄뉴 지역의 몰락으로 침체되었지만, 도시는 원거리 무역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무역이 성행하였으니까요. 동방무역으로 등장한 거상들은 장원이 아닌 도시경제를 이끌어가려고 하였습니다.

일부 영주들은 동방무역을 하는 상인들을 후원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영주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에는 몰락하는 영주와 갑부가 된 영주들이 공존하는 시기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영주가 부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장원이 잘 되지는 않습니다. 영주들이 부자가 되고 사치품이나, 수입품을 계속 열망할수록 장원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고혈을 계속 원했으니까요.

농노들은 다른 지역의 농노들이 해방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부유한 영주 밑에 있던 농민들이 더욱 많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14세기부터 유행한 전쟁과 전염병이었습니다. 특히 흑사병은 유럽 전체 인구의 30%이상을 죽음으로 몰았으며, 백년전쟁은 서유럽 전체의 경제구조를 파탄으로 몰아갔습니다. 일부 부유한 영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영주들은 수입이 줄었습니다. 농촌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심각한 수준까지 진행되었고, 농업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합니다.

일부 영주들은 이러한 현상 속에서 농노해방으로 자금을 확보하려던 정책을 포기하고 농노들의 부역을 강화하면서, 농노들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농민들은 병과 전쟁과 가혹한 세금 때문에 더욱 많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장원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영주들은 어떻게 대응하려 했는가?

14세기 이후, 위축된 유럽의 경제 속에서 영주들은 제각기 살기 위한 방법을 다양하게 전개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영주들은 새로운 사회에 대처하기 위해 장원제의 시스템을 바꾸려고 합니다. 이것은 곧 <노동지대의 소멸>을 통한 <부역의 금납화>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영주들이 장원제가 흔들리자 대응한 방식을 한번 볼까요?

1. 부역제를 소멸시키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부역제도를 <생산물 지대>로 받는 것입니다. 즉, 죽으라고 내 땅에서 일해!  -- 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일은 니 맘대로 하고, 대신 생산물의 1/3만 바쳐!>로 바뀌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생산물 지대로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돈으로 받는 <금납화>가 이루어집니다.

금납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일정 조세만 내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가지는 것으므로, 장원이 무너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납화를 하지 않고 많은 <생산물 지대>를 받거나, 노동을 통한 부역을 강요하는 경우에는 훗날 농민들에 의해 어마어마한 저항을 받게 됩니다.

영국은 금납화가 쉽게 이루어지고, 농노해방이 순조로왔습니다. 특히 와트타일러의 난 이후 봉건적 공납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농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훗날 큰 혁명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봉건적 공납을 받으며, 생산물 지대를 계속 올려받으려고 했던 프랑스에서는 농민들의 큰 저항을 받게 됩니다. 이 봉건적 공납이 곧 프랑스 혁명기의 <구제도의 모순>에 포함된 것으로, 프랑스 혁명에서는 이 <봉건적 공납의 유상폐지, 무상폐지>라는 항목이 혁명의 필수 내용으로 포함됩니다.

독일 및 러시아, 기타 동유럽 국가들은 아예 생산물 지대를 강화하였는데, 16세기 이후 영주가 대농장을 경영하면서 더욱 가혹한 농노제도를 확립시킵니다. 이 동유럽의 대농장은 농노를 통하여 시장생산을 하고, 상품성 있는 작물을 생산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러한 대농장을 초기 장원(고전 장원)과 구분하여 신 장원(구쯔헤르샤프트)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동유럽은 19세기까지 농노제가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러시아는 19세기 알렉산드르 2세가 크림전쟁을 할 때까지도 농노제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2. 농노제도를 소멸시키다.

서유럽의 영주들은 장원 몰락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농노를 해방시키기 시작합니다. 농노해방이란, 영주가 농노에게 일정한 자금을 받고 농노를 풀어주어 도시로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농노에게 노동 부역을 면제해주고, 일정한 세금을 받는 <금납화>도 농노해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을 동유럽과 서유럽으로 나누는 기준이 엘베강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여러차례 강조하였습니다. 엘베강 서쪽의 서유럽인 영국 부근에서는 이 금납화가 잘 이루어져서 농노가 해방되었고, 시민사회로 빨리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빠른 이유중의 하나로 금납화가 빠르고 농노제가 빨리 사라지면서 산업사회의 일꾼으로 뛸 수 있는 많은 노동력을 확보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농노제에 기반한 장원보다는, 인클로저 운동에 기반한 모직물 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농노해방이 빠르다는 점과 연결시킬 수 있겠네요. (반면, 초기 인클로저 운동 및 모직물 산업의 발달과 같은 산업적 발전이 농노해방을 촉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동유럽은 농노해방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13세기 이후 개간된 땅들은 많은데, 농사지을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유럽에서는 자유로운 농민들을 점차 예속하여 <농노제를 오히려 강화>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또 동유럽은 서유럽과 같은 도시문화가 없던 개척 식민지였기 때문에, 대토지 소유자(융커)의 입김이 상당히 강하였습니다. 동유럽과 러시아의 농노제도는 상당히 견고하면서도 오래갑니다.

3. 직영지가 소멸되다.

장원이 흔들리자 영주들은 자신들의 땅을 직접 농사짓기 보다는 농업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면서 경작하게 하는 방식을 택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영국지역을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영주직영지가 사라지면서, 월급 경영자 또는 임금을 받는 소작자가 등장하였습니다. 영주들이 아예 돈을 받고 영지를 판 다음 도시로 가서 도시 귀족이 되어 버리는 현상도 등장합니다.

이 당시에는 정기소작제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영주직영지의 일부를 일정 기한 동안 임대한 뒤, 생산량의 일부 또는 일정 계약량을 지대로 납부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농노들이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여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농노해방이 더욱 촉진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유럽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하고, 개간된 토지가 넓어서 이러한 소작제보다는 영주가 직접 농노를 구속하고 지배하는 대농장(구쯔헤르샤프트>가 유행합니다.

4. 농민들은 반란으로 저항하다.

14세기 서유럽의 농민반란의 가장 큰 원인은? 답은 물론 봉건적 부담의 가중이겠죠.

하지만, 봉건적 부담이 가중된 이유는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실제 농민들에게 부담이 가중된 이유는 전술한 사회경제적 구조 자체가 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표적인 농민반란은 프랑스 지역에서 일어난 자크리의 난입니다. 자크리는 사람이름도 아니고, 지역이름도 아닙니다. 실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난 곳인 프랑스 보페지 지역이지요. 그럼 <자크리>는 뭘까요? 자크리는 프랑스 농민들이 입었던 바지를 말합니다. 즉, 리바이스나 니코보코처럼 상표라고 보면 되죠. 프랑스 농민들은 일을 하기 쉬우면서도 값싸게 입을 수 있는 바지를 원했는데, 그것은 요즘 입는 끝이 말려올라간 바지였습니다. 이 반란이 자크리의 난인 것은 그 명칭에서 농민반란이라는 상징성이 있지요.

자크리의 난은 프랑스 사회가 백년전쟁으로 황폐해지고, 흑사병이 돌아 인구가 감소했는데도 영주들이 오히려 봉건지대 올려받으면서 일어난 난입니다. 이 난의 특징은 이 후 설명할 에티엔느 마르셀의 도시 반란과도 연결되면서 전체 프랑스 사회의 모순점을 하나 하나 꼬집어 가면서 일어납니다. 어찌보면 프랑스 제도의 모순에 대한 최초의 심각한 성찰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영국에서는 와트타일러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이 난 역시 원인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영주들의 미비한 대처 때문입니다. 영국에서도 흑사병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임금은 팍팍 인상되고 있었는데, 영주들이 <금납화>를 하지 않고 <부역이나 생산물 지대>를 통해 장원을 부활하려 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이 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인두세 때문입니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 필요한 돈을 농민들의 머릿숫자에서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또, 노동조례라는 것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법적으로 막아 버렸죠. 농민들은 점점 성장하고 있는데, 국가가 농민의 성장을 공식적으로 막아 버린 것입니다. 결국 농민들은 반봉건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와트타일러의 난도, 도시와 연결됩니다. 와트타일러의 난 때에는 종교개혁가인 위클리프의 지지자인 롤라드파가 대거 가담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와트타일러의 난도 반봉건 운동이자, 도시 빈민층이 포함된 반교회 운동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당시 와트타일러의 지지자들은 봉건제를 지지하는 교황세력을 부정하면서 <초기 크리스트교의 평등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이 쯤 되면 종교개혁적 분위기도 물씬 나지 않나요?

16세기에도 농민반란은 있었습니다. 특히 16세기 이후의 농민반란은 농노제가 계속되고 있었던 동부유럽, 즉 독일 지역이었죠. 유명한 종교전쟁인 30년 전쟁 때에서 농민들은 종교적인 자유라기보다 봉건사회의 구조를 부정하는 교회세력이 자기편이라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가인 루터같은 사람은 <농민 전쟁은 종교적 신앙이 없는 가난한 빈민과 농민의 투정>이라면서 부정하기도 했지만 말이죠.

그러나, 이러한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기에 중세 사회의 기반인 장원은 점차 무너져가고, 새로운 사회로 서유럽이 변하게 됩니다.

여기까지해서 중세 농촌의 장원 몰락을 간략히 마치고, 다음장에서는 중세 도시의 변화라는 파트를 다루어 보도록 하죠. 2007 비보이 배틀이랑, 국가대표 축구 평가전(네덜란드전)을 보면서 글을 썼더니, 글이 두서 없었네요.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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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4세기 중세 유럽엔 봉건제도의 위기가 찾아오다.

1. 봉건경제 전반이 위축되기 시작하다.

이번 장에서 살펴볼 부분은 중세 봉건제도가 더 이상 시대적 사명을 하지 못하고, 새로운 조류에 밀려 사라지는 단계입니다.

중세사회는 5세기 게르만의 이동기부터 10세기 무렵까지 끊임없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게르만의 이동, 마자르의 침입, 노르만의 이동, 이슬람 세력의 확대 등 당시 정세가 서유럽의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없는 체제였기 때문입니다. 봉건제도는 이러한 혼란기에 국왕 - 성직자 - 기사계급- 평민으로 이어지는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적화된 사회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제도는 10세기 이후, 봉건사회가 외부침입으로부터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절정에 이르기 시작합니다. 10-13세기는 봉건제도의 절정기로서 장원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도시가 부활하였으며, 대학이 성립하고, 교황권이 안정적으로 유럽사회를 지배해나간 시기입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십자군 원정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이러한 중세적 사회 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십자군의 실패로 인하여 교황권, 기사권이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반대급부로 동방무역을 통한 도시 상인계급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또 몽골제국의 유럽원정으로 아시아 황색쥐가 유럽에 유입되면서 <흑사병>이라는 전대미문의 병이 유럽에 돌기 시작합니다. 13세기 후반 이래 유럽인들은 기근과 흑사병, 아시아계통 민족들의 재침입 등으로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하지만 폐쇄적인 장원사회와 도시의 길드체제는 이러한 새로운 변화와 혼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의 원인을 농노와 도시 빈민층에게 돌리기만 하였습니다. 13-15세기 도시의 하층민과 노동자들은 폭동과 반란을 끊임없이 일으켰으며, 농노들은 몰락하는 장원을 버리고 도시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반면, 동방무역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도시세력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스스로의 자치도시를 지키기 위해 13세기 이전에는 적대적이었던 국왕권과 제휴하기 시작합니다. 즉, 도시 상인귀족들은 국왕에게 세금을 내었고, 국왕은 도시에게 받은 세금으로 관료제도와 상비군을 마련합니다. 이 상비군으로 도시를 지켜주면서 도시와 왕권이 상호 연합하게 되는 것이지요.

상비군이란, <항상 준비된 군대>의 약자입니다. 이전에는 봉건귀족들에게 토지를 주고 쌍무적 계약을 맺어야만 왕권에 충성할 수 있는 군대를 얻을 수 있었고, 이 계약은 종종 파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세금을 비롯한 자금으로 직접 구입한 상비군은 국왕을 배신할 일이 없는 충성스런 군대였습니다. 달타냥과 삼총사를 보면, 왕실 상비군들이 목숨걸고 충성하는 기사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이 당시의 기사는 토지를 가진 영주도 아닙이다. 국왕에게 충성하면서 봉록을 먹는 이들인 것이지요.

이러한 관료제, 상비군의 마련으로 국왕권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데, 이러한 현상으로 나타난 근대적 성격의 중세 군주들의 시대를 <절대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절대주의라니깐, 엄청 국왕권이 강한 것 같죠?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차차 나중에 다뤄 보도록 하죠.

아무튼, 이렇게 국왕권이 강해지고, 상업적 기반의 도시가 성장하면서 반대 급부로, 교황권은 약해지고, 장원제도는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그 기점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규정되면서 끝나간 13세기 후반부터이지요. 서유럽의 14-15세기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태동기로서 새로운 경제질서와 새로운 사회질서, 정치질서가 확립되는 시기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보통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자, 그럼 중세가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14-15세기를 몇 차례에 걸쳐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먼저, 다음 포스팅에서는 14세기 장원이 붕괴한 원인을 다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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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권 투쟁 4장 - 서임권 문제 총정리

지난 장에서 서임권 문제의 배경은 수도원 개혁운동으로, 서임권 문제의 핵심 사안은 토스카나 가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마지막 장에서는 서임권 문제를 학문적 입장에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임권 문제의 배경

서임권 문제의 배경은 성직자 임명권이 <세속 제후>에게 넘어간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세속 제후가 서임권을 가진 것은 중세 전체의 사회적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즉, 노르만 등의 이민족 침입으로 혼란해진 서유럽은 <봉건제도>라는 유럽 중세 특유의 제도를 성립시켰고, 봉건제도에서는 <불입권, 영주권> 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영지 지배체제(지방분권체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각급 하부단위 교회는 봉건제도의 장원안에 설립된 관계로, 영주의 지배체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것이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성직자 임명권이 장원이나 대지주의 손에 넘어간 근본 원인입니다.

또, 각 교회를 다스리는 장원 영주들은 모두 상위 주군에게 충성하였으므로, 교회의 핵심 서임권은 <국왕>에게 있다는 <왕권신정론>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즉, 교황은 하느님의 명을 정신세계에서 받들지만, 국왕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목자로서 정치한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왕권신정론>은 지상의 교회에서도 국왕이 절반의 권리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교회에 대한 개혁을 추구하는 세력이 있다면 왕권에 대한 도전이요, 서임권에 대한 태클을 거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의를 구체화하면서 국가권력과 보편권력, 교회권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고대 로마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던 국가가 오토 1세 이래의 <신성로마제국>입니다.

2. 신성로마제국이 싫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1,2번째 서임권 논의에서 토스카나 가문과 연결하여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토스카나 가문은 하인리히 가문에 의해 멸문된 카노사 지역의 이탈리아 유력 가문으로, 신성로마제국에 원한이 있었고, 그 후예들이 <힐데브란트>라는 성직자를 적극 밀어주어 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됨은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에 즉위하자 또 하나의 보편권을 주장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정면 충돌합니다. 어쩌면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서임권 문제도 이들에게는 누구의 보편권이 더 강한가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밀라노의 주교 선출>에 대하여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권에 대한 교황입법을 발동하여 <교황이 황제를 폐위시킬 권한이 있다>는 것을 천명합니다. 레오 9세 이래 교황이 당연시 한 이 교황입법은 사실 황제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교황이 황제를 협박하자, 황제는 그레고리우스는 교황권의 찬탈자이자, 토스카나 가문에 빌붙은 파렴치한으로 매도합니다.

교황은 황제의 답신을 듣고, 바로 황제를 파문합니다. 황제가 파문당하자 독일의 제후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반 황제파를 결성하고 교황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하인리히는 국내 단속을 하지 않고 교황에게 덤벼든 것을 후회하고 토스카나 가문의 근거지인 <카노사>에서 맨 발로 3일간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입니다.

그러나, 카노사의 굴욕이 황제권의 몰락을 뜻하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이후, 국내 반대파 제후들을 모두 제압하고, 다시 그레고리우스 7세를 공격하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비참하게 도망다니다가 죽고 맙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도 온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교황이 죽은 뒤 이탈리아 토스카나 가문이 새로운 교황 우르반 1세를 뽑고, 그를 이용하여 하인리히 4세를 공격하여 죽게 만듭니다.

실질적인 승리자는 토스카나 가문이었으며, 이 때부터 세력을 뻗치게 되는 것은 이탈리아의 소국가들이 되었습니다. 토스카나의 지원을 받은 우르반 1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하고자 했으나, 실현하지 못한 <예루살렘 탈환>의 꿈을 토스카나의 마틸다와 논의하게 되었고, 마침 비잔틴 제국의 요청으로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길고 긴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3. 서임권 문제는 계속되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권이 황제권을 압도하기는 하였지만, 각 국가의 왕들은 쉽게 <서임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헨리 1세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서임권이라는 것은 섬 너머 딴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헨리 1세는 성 안셀모를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교회를 자신의 수족들로 채우려고 했는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안셀모가 헨리 1세를 거부하고 서임권 문제에 있어 헨리 1세에게 대들기 시작한 것이죠. 당시 교황인 파스칼 2세는 당연히 안셀모를 지원하였습니다.

결국 영국에서는 대륙보다 왕권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권과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 주요 내요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교는 교회 내에서 선출한다.
   2. 주교는 취임하기 전 국왕에게 봉신으로서 신서하고 봉토와 관할권을 수여받는다.
   3. 국왕은 신서를 거부할 수 있다.
   4. 국왕은 교회가 주교를 선출할 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교황인 파스칼 2세는 이러한 서임권 투쟁이 계속되자 아예 모든 주교들은 왕에게서 봉토를 받지 말고 영적 세계에만 전념하라는 이상주의적 개혁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속군주가 서임권을 가지는 원인을 주교들이 <토지>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토지를 바라지 않는 주교들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파스칼 2세의 개혁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교황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하인리히 5세)와 서임권 문제에 대하여 영국에서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파스칼 2세가 맺은 조약에는

<국왕은 교회내에서 주교를 선출할 때 직접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교회와 공유할 수 있다.> 가 첨부되었습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보름스 협약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교회의 주교는 상당히 애매한 입장에 됩니다. 그는 교황에 신속한 교회의 지도자이지만, 왕에게 영토를 받은 봉건 신하가 됨으로서 영적세계와 세속세계의 일에 동시에 관여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서임권 문제는 결국 영적인 교회와 세속적인 국가가 공존한다는 중세 사회 지배 체제의 특이함을 보여줍니다. 실제,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한 지역은 중세 서유럽 외에는 별로 없는 듯 합니다. 보통 아시아 지역에서는 왕권과 신권이 일체화된 제정일치적 경향이 강하니까요. 그러나, 서유럽사가 세계사인 양 전파된 근대 이후의 시기에 이러한 봉건적 이중질서를 세계사적 보편성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봉건제도는 장원이라는 경제적 측면과 주종관계라는 정치적 측면에서만 보야될 것 같습니다. 유럽 정치사를 다 보편화 시키면 제대로 들어맞는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요.

또 하나 서임권 투쟁이 유럽사회에 미친 중요한 영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국가세력이 상호 싸움을 계속함으로서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소국, 제후들은 독립적인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세력들은 교황을 절대적 권력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독일의 제후들은 독일 국왕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독일, 이탈리아는 더욱 분열된 상태로 나아가 19세기까지 분열된 체제로 나가게 되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중세부터 비롯된 혼란한 역사때문입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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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시대와 호한체제의 성립

이번 장에서는 이전 포스트인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의 역사를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위 나라가 몰락하다.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를 통일한 위 왕조는 너무 단명하였습니다. 그것은 후한말 이래 호족 세력들이 할거한 시대를 통일했지만, 호족 세력이 상당수 잔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위는 호족세력과 개국공신들에게 많은 관직을 내려주었고, 호족세력들을 중앙 관리로 끌어들여 귀족세력으로 재편하려고 했습니다. 또 9품관인법 같은 제도를 계승함으로서 관직임명에 제도적 명분도 만들려 하였죠.

하지만, 호족이 중앙에 올라와 귀족화되면서 초기 조조, 조비의 참신한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지배집단이 <귀족세력>으로 변질되기만 하였습니다. 이들 호족들은 중앙에서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곤 하였고 그 결과 사마의가 정권을 정악하면서 사마씨의 <진> 나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물론 이 진의 건국도 <선양>의 형식을 빌립니다. 사마염(무제)가 위을 선양으로 이어받으면서 건국된 <진>은 명실상부한 <삼국시대 통일국가>가 됩니다.

2. 진의 사마씨들은 호족들을 제어하지도 못하다.

진 왕조는 건국 자체부터 큰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진 왕조는 후한 이래의 <호족>세력에 의해 건국된 왕조로서, 사마염이 선양을 받아 왕조를 개창한 자체가 강력한 호족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진의 사마씨 왕실은 건국을 도와준 강력한 호족 집단들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건국 과정에서의 <호족 연합적 성격>은 마치, 후한 광무제의 건국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마씨의 진국은 호족을 통제할 힘이 없는 국가였습니다. 진국에서는 호족에게 특혜를 주어 호족들이 활발하게 중앙에 진출하여 왕권에 복속된 귀족체제를 확립하였지만, 이들 호족은 너무나 독자적이었습니다. 호족들은 진 왕실을 보호하는 것보다 자신의 종가(호족가문)의 이익만을 챙기는 것에 급급하였습니다. 이것이 후한과 진의 차이점입니다. 진의 호족들은 이미 삼국시대의 오랜 전란을 거치면서, 왕실보다는 가문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사마씨 정권은 토지제도인 점전제, 과전제 등을 실시하여 호족의 대토질 소유를 막으려 했지만 실용성이 별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진은 호족들을 믿을 수가 없었고, 호족을 통제하고 왕실의 울타리를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왕실의 <왕자들>과 <종친>들에게 토지를 분봉하여 지방 통제를 맡기는 <봉건제도>를 부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 왕조의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호족 통제를 위해 파견한 왕자들은 호족과 연합하기도 하고, 때론 독자세력화하여 진 왕실에 위협적인 세력이 되었습니다. 진 왕실은 왕자세력들이 왕실에 반기를 든 <8왕자의 난>으로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져 버립니다.

3. 호한체제가 시작되다

서진 시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찾으라면 호한체제의 시작입니다. 진은 삼국을 통일한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였지만, 이민족을 통제할 만큼 강력한 국가는 아니였습니다. 진은 이미 자체 호족들과 봉건제도를 통해 성장한 왕자세력들도 통제하지 못했으니까요.

거기에 서진은 오랜 전란으로 인해 떠난 민심을 적절히 수습할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방을 지방호족과 봉건된 왕자들에게 맡겨 버리는 형세였으니까요. 오랜 전란으로 백성들은 이미 한나라 이래 국교가 된 유교를 버린지 오래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이미 향락적인 성향의 노장사상이 유행하였고, 허무한 염세주의 사상이 전국에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또 긴 혼란기 속에서 허약해진 중국 사회에는 이미 이민족들의 중국내 거주를 인정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유비, 조조 등은 이민족의 힘을 빌려 상대 국가를 견제하려고 하였고 이것은 북방 이민족이 중원에 내려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서진은 이민족(5호)의 만리장성 이내 거주를 허락하였고, 중국인(한족)과 이민족이 이제 중국 영토에 같이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호(오랑캐)와 한(한족 : 중국족)의 공존체제라고 부릅니다.

서진 시대는 길고 긴 중국 역사 속에서 호한체제가 시작된 기점입니다. 이 시기 이후의 모든 중국사는 결국 한나라를 계승한 전통 중국 왕조(한족 국가)와 북방에서 내려온 이민족 왕조(침투왕조, 정복왕조)의 기나긴 싸움이 됩니다.

결국 서진은 이민족의 침투에 의해 무너집니다. 이민족인 <흉노>가 <영가의 난>을 일으켜 한나라 이후 구축한 중화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이민족인 5호 국가가 중국에 자리잡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죠. 이 <영가의 난>이 바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호한체제 성립을 가져온 사건입니다.

4. 서진의 멸망

결국 서진은 호족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봉건제를 실시하였다가 <8왕자의 난>으로 국가 체제가 무너지고, 이민족들이 적극적으로 서진에 침투하게 됩니다. 결국 이민족인 <흉노>족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흉노>족은 진시황, 한무제 등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통일 군주들과의 항쟁에서도 살아남아, 결국 중국사회를 정령한 최초의 이민족 국가인 <한>을 건국합니다.

이후 중국은 가장 혼란한 시기인 5호 16국 시대를 맞이합니다. 서진은 수도를 옮겨 동진이 되었고, 중국의 주요 영토는 중화사상에 의해 오랑캐라고 규정된 국가들이 나누어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곧 호한체제의 출발이자, 모든 민족이 중국 영토안에서 어울어지고, 이 모든 민족을 통일하기 위하여 서로 항쟁하는 시대의 출발을 의미합니다. 이 시대 이후는 중화민족의 시대가 아니라, 모든 민족을 아울러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각 민족국가들이 <세계국가>, <세계시민>을 추구하는 시대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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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봉건왕정의 발전

이번 포스트에서는 중세 유럽 각국사의 발전을 포스팅하기 위한 배경 지식으로서 중세 봉건 왕정이 성립된 배경을 간략히 다루어 봅니다. 아주 짧게 포스팅 하고, 각 국가별로 여러 파트로 나누어서 유럽 중세 각국사를 다뤄보겠습니다. 이 포스팅과 관련된 중세 각국의 역사에 관련된 글들은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서양사이야기/중세각국사 참조하시면 됩니다.

1. 중세 봉건 왕조는 왜 절대주의 국가가 아닌가?

중세 봉건 왕조는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각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국가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들 국가는 근대적 의미의 <국민국가>가 아니라, 각 지역에서 권력 유지를 하기 위한 국가이고, 국민의식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봉건적 왕조라는 말은 일단, 봉건제도를 매개로 한 국가라는 뜻입니다. 이 당시 국가는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공권이 해체된 상황에서 유력 제후들과 연합한 국가형태를 띄고 있었으며, 그 연합은 사적인 보호관계인 주종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쌍무적 계약관계>였습니다.

따라서 11-14세기의 국가들의 특징은 주권이라던가 중앙집권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또, 국왕이 제후들을 압도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 한 왕령을 넓히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으므로, <국토>라는 개념이 없고 <왕령>이라는 개념만 존재합니다. 이 <왕령>에 속한 자들은 모두 국왕의 조세원이지만, 중세 위계상 장원의 노역 담당자로서 <국민>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당시 장원의 농노들은 누가 주인이 되었든 편안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왕령도 제후국을 능가하지 못하였으므로, 중세의 왕조들은 봉건질서상 상위 주군의 역할을 담당할 뿐, 실제 강력한 왕권을 구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프랑크 왕국과 로마를 계승하였다는 이념을 가진 신성로마제국은 자국의 봉건국가들조차 제압하지 못하였고, 프랑스의 카페 왕조는 제후 연합 세력의 수장으로서 아무런 힘도 없는 왕조였습니다. 단지, 영국만이 강력한 왕권을 확대하려고 했지만, 이것도 대헌장이라는 봉건귀족들의 요구사항에 막혀 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봉건국가들이 중앙집권을 이루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단 봉건제후들을 누르고 <지방분권을 타파>해야 합니다. 또 보편적 중세교회의 수장인 교황권도 타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왕령을 넓혀 영토를 확장하고 그 영토민에에게 <국민>이라는 의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왕권을 뒷받침할 조세원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진 것은 15세기 이후입니다.

봉건제후의 세력을 누르는 것은 십자군, 백년전쟁, 장미전쟁, 각종 왕위계승 전쟁을 통하여 이루었고, 교황권은 십자군전쟁, 종교개혁 등을 통하여 눌렀습니다. 왕령의 확장은 각국의 16-18세기 왕위계승전쟁, 종교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신항로 개척으로 유럽 각국 왕권이 금전적으로 뒷받침 받게 됩니다.

2. 그러나 12-14세기 봉건 국가들도 근대 국가적 성격은 있었다.

12세기 이후 유럽의 국가들도 근대적인 성격은 일부 갖추었습니다. 일단 12세기 도시와 상업의 성장으로, 유럽의 각국은 어느 정도 조세원을 확보하였습니다. 특히 도시에서 시민계급이 성장함으로서 중세 장원과 다른 또 다른 세력이 출연한 것이 중요합니다. 즉, 봉건제도와는 다른 세력이 출연함으로서 근대 시민적 성격이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국의 왕들은 이 시민계급의 성장 및 대학의 발전과 더불어 체계적인 행정제도를 정비합니다. 이 행정제도 정비에는 각국의 주권이라는 개념이 포함된 <로마법>을 활용하게 되는데, 이 로마법은 고대 로마 이래 <국민국가>라는 개념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는 법 개념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럽의 각국은 이 로마법의 원리에 따라 국왕의 중앙집권 개념을 체계화하고 왕령을 확대해 갑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이런 개념에 충실하였고, 이들 두 나라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게 됩니다. 프랑스 왕조의 인척관계였던 에스파냐 등도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지만, 동유럽 국가들은 아직 이런 로마법의 개념이 정립되지 못하였습니다.

대충 이야기하고 중세 유럽 각국사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각국사로 고고!!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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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부터 거의 200년간에 걸쳐 서유럽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정면으로 충돌하였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을 이번 장에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1. 왜 십자군 원정을 해야 했는가?

십자군 원정을 유럽이 강행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항은 유럽인의 <자신감> 때문입니다. 서유럽은 11세기 이전에는 주변 아프리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에 비해 너무나 후진지역이었습니다. 5세기 이후 게르만의 침입으로 서로마가 망하면서 성립한 중세는, 9세기 이후 남으로는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지중해와 남부 유럽을 잃었고, 북으로는 노르만족(바이킹)의 침입으로 홍역을 치루었으며, 동으로는 마자르족과 흉노족 등 아시아계 민족의 준동으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중심을 잡아야 할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고, 서유럽의 왕들은 교황권보다도 약한 처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10세기가 되면 신성로마제국이 유럽의 중심에서 보편적 황제권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물론 이것은 교황권과 충돌하여 황제가 교황에게 굴복하는 카노샤의 굴욕을 초래하기는 했지만...) 11세기에는 교회의 지원을 받은 각 유럽의 소국들이 남부 이슬람 세력(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을 몰아내면서 유럽인의 자신감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유럽은 동네 북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가 되어 주변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유럽이 남부 이슬람을 몰아낼 때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세력은 클뤼니 수도원과 교황으로 대표되는 크리스트교 옹호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프랑스의 귀족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세력은 이슬람과 맞붙어도 자신있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실제, 독일 하인리히와 피터지게 싸우며 카노샤의 굴욕을 얻어내었던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은 이미 십자군 원정과 이슬람 정복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단지, 황제권과의 피터지는 싸움 때문에 그것을 실현에 옮길 수 없었던 것이지요. 실제, 교황권이 황제권을 능가하여 황제들을 조종할 수 있다고 시작되는 시점에서 십자군은 시작됩니다.

2. 그럼 유럽은 왜 이베리아와 시칠리아에서 이슬람을 몰아낼 수 있었는가?

그 원인은 바로 10세기 이후 유럽사회의 안정 때문입니다. 9세기 마자르, 노르만, 이슬람 등의 세력에서 동, 남, 북에서 골고루 두들겨 맞은 서유럽은 이들의 침입이 끝난 뒤 내줄 땅은 내주고, 지킬 땅은 지켜 평화의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평화의 시기에 유럽은 바퀴달린 중량쟁기를 사용하여 <심경>이라는 농사법을 시작하였고, 장원에서 삼포제를 이용한 지력강화, 철제 농기구의 보급, 수력을 이용한 물레방아 등 여러 농사기술을 통해 새로운 발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유럽의 농사기술 발전은 9세기 이민족의 침입으로 아시아에서 전파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농법은 곧 유런내의 개척사업과 개간사업을 활발하게 진행시켰고, 유럽인들은 서유럽과 동유럽의 경계라고 생각한 <엘베강>을 넘어 동쪽으로 계속 식민사업과 개간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동유럽에서는 <프로이센>이라고 하는 새로운 소국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제 유럽은 이슬람 수준의 충분한 생산력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반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3. 비잔틴 제국이 도움을 요청하다.

이러한 유럽의 자신감이 넘칠 무렵, 교황권과 황제권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신성로마제국보다 우위를 점한 교황 우르반 1세는 황제권과 대립하였던 이탈리아 토스카나 가문 등 이탈리아 공국들의 지지를 얻어 본격적인 십자군 원정을 계획하였습니다.

마침 당시 이슬람에서는 셀주크 투르크라는 투르크계 민족이 강성하여 바그다드와 서아시아 일대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는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장악하고(당시 이슬람도 구약성경의 예시에 의거하여 예수를 성인으로 모시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크리스트교 계 성지순례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또,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여, 비잔틴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권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합니다. 비잔틴의 교황 알렉시우스 1세는 서유럽의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서유럽의 교황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를 열고 이전부터 계획했던 십자군 원정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십자군 원정은 이미 오랜시간 동안 계획되었던 교황세력의 <프로젝트 사업>으로 이스람에 대한 공략 방침은 이미 수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이슬람이 장악하고 있는 성지들과 로마 시대 대교구들을 탈환하는 프로젝트>, <비잔틴 교회를 교항의 세력으로 만들어 교황권을 전 유럽으로 확장하는 프로젝트>이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성지수복과 하느님의 계시, 종교적인 열망이 주요한 목표라고 했지만, 사실은 교황이 치밀하게 주도했던 야심찬 사업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 사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그동안 축척된 유럽의 능력과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유럽은 이제 교황이 아니라고 해도 이미 팽창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4. 교황의 프로젝트 사업이 가동되다

십자군 원정에는 교황을 위시하여 서유럽의 전 계층이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교황의 프로젝트에 이미 들어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평민들에게는 성지수복이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구원의 확실한 계시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교황이 평민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원하신다>라고 말하였고, 이와 더불어 십자군의 승리가 평민들에게 신분의 자유와 부채의 탕감까지 보장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평민들은 교황이 기획한 이 <계획>의 수단으로 이용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황이 원하는 것은 십자군을 통한 성지탈환 보다는 <동로마 교회를 교황 소속으로 통합하는 것>, <교황권이 황제권을 능가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2가지 프로젝트의 목적을 가지고 평민들을 전쟁에 끌어들인 것이지요.

십자군기에 교황은 베네치아 등 반 황제파의 도시 무역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실제 11세기 이후 남부 유럽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면서 지중해 무역은 다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상업 국가에게로 주도권이 넘어왔습니다. 만약 십자군 원정이 성공한다면, 그리고 실패한다고 해도 동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활로만 열린다면 지중해 근방의 <도시국가 상인>들에게는 커다란 이윤이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황은 이러한 부분들을 적절하게 상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었고, 상인들 역시 카노샤의 굴욕 이후 황제권을 막고 자신들의 무역보장을 위해 교황을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십자군 원정에 대한 대규모의 경제적 지원이 보장되는 것을 뜻합니다.

또, 십자군 원정에 대하여 봉건 영주들은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교황권이 강한 반면, 왕권이 약해지는 것이 영주들에게는 지방정권의 유지에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군을 따라 십자군에 적극 봉신하였고, 십자군의 승리가 새로운 영지와 조세원을 보장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기사단으로 구성되어 십자군에 참여하였고, 새로운 정복지는 봉건제도로 구성되어 자신들에게 영지가 분봉될 것이라는 확답까지 얻어내고 참전하게 됩니다.

교황은 십자군 원정에 있어 많은 세력들과 제휴하였습니다. 평민에게는 믿음의 정렬과 부채탕감으로, 상인에게는 무역 이권으로, 제후에게는 영토분봉의 법적 지원으로 다가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200년에 걸친 교황권 강화의 대프로젝트는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실제 십자군 원정의 양상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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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이야기 34 - 한 무제의 황제지배체제 완성

이번 장에서는 한무제에 대한 이야기만 다루겠습니다. 한무제의 업적을 내치, 외치, 유교정치, 동중서라는 관점에서 나눠 다루겠습니다. 상홍양 등에 관련된 경제정책은 다음장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1. 한무제의 황제지배체제의 배경

한무제의 정치체제는 중국 역사상 <황제지배체제>를 현실적, 이념적으로 완성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는 중국 역대 왕조에서 계속적으로 이용할 황제지배체제를 논리적, 현실적으로 완성하였고, 실제 그 이념에 따라 가장 고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권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 앞에서 설명한 문제, 경제가 이루어놓은 업적 때문입니다. 역대 유명한 정복군주 중에서 홀로 잘나서 유명해진 왕은 거의 없습니다. 광개토-장수왕에게는 소수림왕이 이룬 불교-율령 체제가 뒷받침 되었고, 진흥왕에게는 지증-법흥왕의 체제 개혁이 뒷받침되었죠. 중국 역대 황제들도 마친가지입니다. 한무제의 앞에는 문경지치라는 중국 역대 역사로 볼 때 가장 안정된 평화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만들어진 토지제도와 사회안정으로 인해 축적된 정치, 경제적 역량이 한무제를 통하여 빛을 발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를 정비하였고, 유교를 관학화 함으로서 그 전제체제를 사상적으로 정비하였다는 점입니다. 그 사상적 체계 정비에는 동중서라는 걸출한 학자의 역할이 매우 지대하였습니다. 동중서는 법가적인 황제지배체제 사상에 대한 <이념적 윤리>로서 황로사상, 음양사상, 유교사상 등을 총원하여 체계적인 황제지배체제의 이론을 완성하였고, 이것이 유가적 덕치주의를 포함한 <천인상응설>로 귀결됩니다.

세 번째로 그의 황제지배체제는 <중화사상>의 완성으로 주변 <이민족>에게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해주겠다는 유교적 조공-책봉 관계 속에서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이를 원할히 하기 위하여 한무제는 동,서,남,북으로 엄청난 원정을 감행하고, 정복전쟁을 시도합니다.

2. 연호와 역법에 관심을 두다

한무제는 황제권 강화를 위하여 상당히 많은 제도를 만들었고, 구래의 제도는 수정하였습니다.

일단 수용한 제도를 보면, 진시황제의 군현제를 부활한 것, 통제경제체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이러한 진나라의 제도에다가 유교적 이념을 더함으로서 법가와 유가를 혼합한 황제지배체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일단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연호>란 황제가 정한 일종의 <달력>을 말합니다. 예로 한무제가 즉위한 지 첫 해에 <건원>이라는 연호를 쓰면 그 해부터가 건원 1년이 되어 날짜계산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황제는 역사적 상황이 변동할 때마다 여러 연호를 바꾸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단지 시간개념을 넘어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강대국이 연호를 사용하면 그와 연관된 약소국들은 강대국의 연호를 수용해야 했고, 따라서 <연호>라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황제의 칭호로서 천자국이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고구려 역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연호를 사용하는데, 이렇게 연호가 등장함은 그 나라가 천하의 중심이며, 천자국이라는 <자국중심의 천하관>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훗날 신라에서는 체제가 정비되는 법흥왕기부터 연호가 등장합니다.

한무제 때는 또 역법을 중히 여겼습니다. 연호와 달리 역법을 사용한 달력은 따로 있었는데, <역법>이라는 것은 연호와 같이 천자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역법은 하늘의 변화를 관측하여 천자가 하늘의 뜻을 파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역법에 따라 국가의 대사를 정하는 것은 천자의 임무였습니다. 동중서는 이것을 하늘의 뜻과 천자의 뜻이 서로 상응하는 것을 관찰한다고 하면서 <천인상응설>의 이론적 근거로도 활용하였습니다.

3. 내조정치를 시작하다.

한무제기에는 진의 제도를 본따 중앙행정기구를 정비하는 데, 이것이 중국 전통 행정제도의 바탕이 됩니다. 한무제는 진시황의 3공제를 받아들이지만, 이중에서 행정권을 가진 승상의 권한을 약화시킵니다. 대신 황제의 개인 비서인 상서, 중서를 중용하여, 상서 중서가 적극적으로 황제를 보필하면서 정치에 참여합니다. 이것을 보통 <내치주의>에 입각한 정치라고 합니다. 중국사 전체에서 보았을 때는 <내조정치>라고도 하죠. 이로서 한나라에서는 국왕권을 보호하는 비서기관인 시중, 중상시의 권한이 상당히 강해지고, 이것이 한무제 사후 한나라 멸망으로 이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한의 중앙제도에 관해서는 제도사 파트에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만...

4. 지방 제후들을 철저히 통제하다.

한무제는 강력한 군현제를 실시하여 지방의 제후들을 감시합니다. 일단 군현에 파견하는 관리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였습니다. 또, 군현을 총체적으로 감시하여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가 군현에 내리는 명령을 전달하는 관리로서 <자사>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 자사는 위진남북조 시대로 가면 군현과 함께 하나의 행정구역화됩니다.

한무제는 지방 제후를 약화시키기 위해 철저한 입법에 의한 <법>으로서 통제하여 감히 황제에게 덤비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제후왕을 감독하기 위한 법으로 추은령, 주금률, 좌관률, 부익률, 아당률 등을 제정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볼까요?

추은령 : <추은>은 은혜를 나누어 가지라는 뜻입니다. 제후왕이 죽으면, 제후왕의 땅은 1명이 아닌 여러명의 자식들에게 분할 상속하게 합니다. 따라서 제후왕의 영토는 시간이 지날수록 소규모로 쪼개지게 되고, 결국 황제에게 다시 귀속되게 되는 것이지요.

주금률 : <주금>은 금을 만들어 바치라는 뜻입니다.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낼 때 종묘제사를 하는 8월이 되면 제후들은 제사에 필요한 황금을 진상해야 합니다. 만약 황금의 양과 질이 떨어지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좌관률 : <좌관>은 품위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후왕들은 황제의 허락없이 백성들과 절대 군신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법입니다.

부익률 : <부익>은 더 이상의 노역을 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후왕은 황제의 허락없이 황제가 정한 조칙에 위배되는 부역이나, 잡세, 토지세를 일체 걷을 수 없다는 법입니다.

아당률 : <아당>은 자신의 당을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약 파견된 관리(자사 등)가 제후왕의 죄를 알면서도 한패가 되어 죄를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은 경우 파견된 관리의 죄를 엄중하게 처벌하겠다는 법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제후 통제는 곧 제후들이 봉토조세자로 전락하게 되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무제 이후 지방의 제후들은 왕권에 반항할 힘을 잃었습니다. 따라서 한무제 사후의 정치투쟁은 중앙에서 한무제가 키운 내조와 환관끼리의 다툼이었습니다. 반면, 지방에서는 토지를 바탕으로 경제적 힘을 키워나가게 되는데, 이러한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정치세력화되는 세력이 훗날의 <호족>세력입니다.

5. 유교를 관학화하다

한무제기에 유교가 관학화 되면서 국가 사상으로 발전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 이유를 들라면, 한초에 유행한 황로사상 때문입니다. 황로사상은 도가적 색채가 강하여 무위자연적인 성격을 내포한 사상입니다. 보통은 신선술을 내포한 사상이라고도 여겨지죠. 한나라 건국 자체가 유가에 무식한 유협집단과 지방세력에 의한 것인 만큼, 한 초에에는 미신적인 도가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도가는 현세를 부정하고 은둔과 자유를 추구하는 협객집단의 이념과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인위적 정치를 배격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편히 누려라>라는 사상은 중앙집권적인 한의 통치이념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에서는 더 체계적인 통치이념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 가장 체계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이 바로 중용을 바탕으로 하는 유가였습니다. 유가의 이론은 현실적이고 왕권옹호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또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라는 국가윤리는 발췌하여 사용하기 딱 좋았습니다. 거기에 유가는 다양한 사상을 포용할 수 있는 <경전>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경전은 필요한 부분을 구미에 맞게 편집해서 쓸 수 있는 학실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유가 중 공자, 맹자, 순자 등등 원하는 사상가를 원하는 만큼 원하는 때 이용하기 좋았으니까요.

실제로 유가의 사상에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독특한 유가논리를 펼친 사상가가 바로 <동중서>입니다. 동중서는 한무제의 학사가 되어 현량과(효렴과)를 통해 어진 관리를 추천으로 뽑아 그들과 함께 유교사상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대표적인 그의 사상은 <천인상응설>로 대표됩니다. 이것은 하늘과 인간은 그 5행의 흐름에 일통하여 서로 감응한다는 설인데, 여기서의 감응 주체는 곧 천자인 황제와 자연의 주제자인 우주입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천자의 권위를 신격화하는 논리로서 이용됩니다. 이 논리는 천자의 권위를 5행과 연결시킵으로서 극대화됩니다. 하 - 은 - 주의 3대는 각각 오행중 화, 목, 토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이후 한 왕조는 천명을 물려받은 5행의 연속이자, 천지신명의 뜻이므로 누구도 도전할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됩니다. 따라서 천자는 하늘의 뜻을 항상 살펴야 하는데, 이 하늘의 뜻을 살피기 위해 마련된 것이 <역법>입니다. 그리고 5행은 또 다시 끊임없이 화,목,토,수,금으로 돌고 돌므로 이 천인상응의 논리는 <참위설, 예언설>과 같은 미신적 방법론과도 연결됩니다.

실제 이 사상은 비과학적이고 너무 신비주의적이다라고 하여 크게 비판받았고, 중국 과학사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미신적인 사상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왕망이 전한을 찬탈하고 신을 건국할 때 이 사상을 근거로 5행의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고, 그는 동중서의 천인상응설과 유교주의를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6. 유교주의를 위한 제도

한의 유교에서 몇가지 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유교 연구를 위해 5경박사를 두었는데, 5경박사란 오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은 한, 당 대에는 오경, 이후 송 이후에는 사서가 유교저서에서 강조됩니다.

또 한 대에는 지방의 군에서 청렴한 청년들을 인품에 따라 등용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효렴과>라고 합니다. 효렴과는 지방에서 추천된 청년을 중앙에서 천거하여 관리로 임용하였습니다. 또 유교 교육을 받은 자들을 관료로 삼기 위한 학교 제도로 <태학>이 있었습니다. 고구려에도 후대 태학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한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이 유교적 제도가 완성됨으로서 거칠었던 법가적 황제지배체제가 유가적 이념에 의해 부드럽게 다듬어 집니다. 이 모든 제도들은 유가 이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후대 당나라에서 더욱 정교하게 제도화됩니다.

7. 한무제의 외정

한무제의 외정은 동, 서, 남, 북의 <오랑캐>을 모두 <중화>라는 민족 아래 둠으로서 중국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중국 외부의 국가들에게 <봉건적 제후>로서의 권한을 준다는 의식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실제면에서 보면 흉노 등의 이민족에 시달렸던 중국이 그 고질적인 폐단에서 벗어나기 위한 면이 더 강합니다.

동으로는 고조선을 정복하고 한4군을 설치합닏, 서로는 하서4군을 설치하고, 비단길을 개척하여 서역 무역의 활로를 열었습니다.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여 남해9군을 설치합니다. 북으로는 흉노와 끊임없이 격전을 벌입니다. 이러한 광대한 동,서,남,북의 정벌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문제, 경제 시대의 광대한 경제력과 상업통제로 인한 이윤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서역에 장건을 파견한 이유는 흉노를 막기 위해 흉노와 적대적인 관계의 국가들(월씨국, 오손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서역 이동으로 비단길이 개통되었고, 동서문화의 교통이 열렸으며 중국인들은 서역이라는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세계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서역과의 비단 무역을 중국이 직접 주도함으로서, 비단 중계무역을 하던 흉노가 경제적 타격을 입게되었고, 결국 비단길의 개척은 무력이 아닌 경제력으로서 흉노를 압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흉노는 이후 고조선과의 연계를 통하여 세력을 동으로 확장하려고 했고, 고조선 역시 대동강 중계 무역을 통해 남방과 흉노, 중국을 연결한 무역 네트워크를 만들려했습니다. 결국 한무제는 고조선 정벌을 집중적으로 시도하였고, 이에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흉노의 세력은 더욱 갈 곳을 잃게 됩니다. 이후 흉노는 계속적으로 중국 국경을 넘나들며, 중국을 괴롭혔고 한이 망한 뒤 5호 시대에 중국 영토 안에 안주하여 중국 국가로서 한 때를 보내게 됩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한무제 시기 경제와 관련된 내용을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자야겠네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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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이야기 33 - 한 왕조의 건국

이번 장부터는 중국 한 나라 시대에 대한 역사를 간략히 개관하겠습니다. 한 왕조는 건국기, 한무제기, 한무제 이후기로 역사를 나눠보고, 그 후에는 경제사, 제도사, 사회사를 다뤄서 쭉 정리하는 식으로 할께요. 자세한 한의 세부적인 역사는 이후 중국사 시즌 2, 시즌 3을 정리할 때 다룰 예정입니다.

1. 한 왕조의 건국과 유방

한의 역사는 진이 멸망한 이후 <초한지>에 나오는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싸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초한지를 보면, 힘이 장사였고 귀족집안 출신이었던 항우에 비해, 유방의 세력은 미약했고 그를 돕는 자들도 의리로 뭉친 의협집단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유방이 더 통솔력이 뛰어났고 시세를 잘 파악하여 항우를 물리치고 건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승자의 관점에서 적은 기록이겠지만, 이 초한지는 중국 역사상 아주 드라마틱한 소재로 많이 이용됩니다. 예전에 패왕별희를 연극으로 본 적이 있는데, 중국인들의 사고에는 이 한의 건국이라는 것이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의 최초 통일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는 듯 싶더군요.

항우가 건국에 실패한 원인은 너무도 시대의 흐름을 못 읽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나라의 유산인 아방궁을 태우고, 진이라는 통일국가를 원수처럼 적대시한 것은 당시 새로운 집권층에게는 신 세력이라기 보다 <초적>세력으로 비추어졌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또, 지배층을 위한답시고 주나라의 이상 정치인 <봉건제도>를 시행하려 했던 것은 너무 역시대적 발상이었지요. 거기에 진의 근거지인 관중지방을 완전히 무시한 것도 실책입니다. 진은 망했지만, 진의 유산으로 계승할 수 있는 경제력과 정치적 역량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었으니까요. 항우는 강남의 팽성에 도읍을 정함으로서 중국 고대로부터의 문화적 역량을 모두 버린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한의 고조 유방은 한을 건국한 이후 진의 멸망을 거울삼아 법가주의적 통치를 계승하면서도 군현제가 아닌 <군국제도>를 통해 지방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수도도 진의 근거지인 함양와 가까운 장안으로 정했구요.

유방의 창업공신들은 항우와는 달리 능력으로 유방을 도와 건국까지 달려온 <유협집단>이었습니다. 솔직히 건국기 한나라는 유교가 뭔지, 예절이 뭔지도 모르는 협객들이 오로지 능력과 의리로 뭉쳐 달려온 집단이었습니다. 유방도 유교사상에 무지했습니다. 유방에게 가의와 같은 유교사상에 능통한 신하가 없었다면 유방 역시 건국 후 어떤 변수를 맞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교 사상이 한나라에 정착될 쯔음 유방의 창업공신 중 일부가 제거되고, 일부는 유교적 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든든히 할 기틀을 마련합니다.

유방은 건국 후 <군국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군국제도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제도입니다. 유방이 보기에 봉건제도란,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분쟁을 양산한 산만한 제도였고, 항우가 주장했다가 실패한 시대역행적 제도였습니다. 그렇다고 군현제는 진시황제가 실패한 정책으로, 봉건제와는 달리 국가 기반이 약할 경우 황제권을 보호해줄 든든한 혈적이 없어 위험한 제도였습니다. 결국 유방은 경기지방(장안인 수도 근기)은 군현제로서 황제가 직접 다스리고, 지방은 유씨 일족과 공신들을 분봉함으로서 봉건제도로 다스리는 절충안을 내놓는데, 이것이 군국제도입니다.

또 건국초기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유방은 흉노와 화친정책을 시도합니다. 진시황의 몰락 중 하나의 원인이 지나칠 정도로의 무모한 흉노 정벌과 만리장성 축조 등 인력 착쥐에 있었다고 생각한 유방은 흉노와의 평화를 통해 내치에 주력하고, 법가사상을 가미한 유교사상으로 국가 이념을 완성하려 했습니다.

또, 건국 후 유방은 이성제후들을 제거하고 동성제후(유씨)들에게 특권을 주는 정책을 점차 확대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창업의 일등공신인 한신을 제거한 사건입니다. <사냥감을 잡은 뒤에는, 필요없어진 사냥개를 사냥한다>라는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죠.

그러나, 유방은 무지한 촌부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탓에 유교적 지식이 너무 부족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곁에는 항상 유교적 학식이 뛰어난 학자들이 많이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육가는 건국초기 유교사상 완성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법가주의적 통치제도를 유지하면서도 그 위에 예악, 법률, 문화에 있어 유교적인 색채를 가미하는 법가적 유교정치의 실시를 유방에게 건의합니다. <창업은 마상에서 이룰 수 있어도, 수성은 마상에서 이룰 수 없다>는 말은 유명한 말이죠.

2. 문경지치의 시대

한을 세운 유방이 죽은 뒤 한나라는 한차례 건국 홍역을 치릅니다. 보통 유명한 제국들이 건국시조가 죽은 뒤 왕위계승과 외척 다툼으로 한차례 위기를 넘기고 더 단단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한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유방이 죽은 뒤 부인인 여씨는 유방이 아끼었던 다른 부인들을 모두 주살합니다. 특히 미인이었던 두씨 부인을 죽인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여씨부인은 두씨의 눈을 파고, 얼마 뒤에는 손을 자르고, 또 얼마 뒤에 벙어리로 만들고, 또 얼마뒤 다리를 자른 뒤 변소간에 버렸습니다. 보통 옛 시대의 변소간에는 사람의 변을 받아먹고 사는 돼지들이 있었는데, 여씨부인은 자신이 평소 질투하던 아름답던 부인들을 <인간 돼지>로 만들어 죽지도 못하게 한 뒤 고통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 유방이 통일할 때, 여걸로서 1등공신을 뽑으라면 부인인 여씨였습니다. 그녀는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우습게 알 정도의 베포 큰 여장부였다고 합니다. 평소에 유방은 그녀만 보면 무서워서 벌벌 기었다는 자료도 많이 보입니다. 그녀는 여씨 일족을 국가 주요 자리에 앉히고, 국정을 좌지우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씨 일족은 문제 시대에 대부분 제거되고, 황제권이 다시 강해집니다. 정권은 여씨에서 유씨로 돌아온 것이지요. 이후 문제, 경제 시대는 중국 한나라의 전성기이자 태평성대라고 하여 <문경의 치>라고 부릅니다.

문경지치는 문제와 경제의 중국 전통의 검약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문제는 가의의 <치안책>을 받아들여 유교식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덕에 의한 정치를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이 당시에는 미신적인 황노사상이 유행하였는데, 황노사상은 도교와 음양기적 색체가 상당히 강한 무위자연적이고 음양오행적인 사상입니다. 문제, 경제는 이러한 황노사상의 영향을 받아 무위자연의 순리와 우주 오행의 순리에 맞추어 국가 운영을 하였다고 합니다.

문경시대의 업적은 토지세의 감면이 가장 큰 업적입니다. 국가가 긴축재정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토지세를 1/30만 받았고, 이것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또 연좌제와 육형제도를 폐지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서 진시황제의 시대와는 다른 보다 <민본적인> 사회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또, 중국사에서 유명한 한무제 시기에 흉노정벌 등 엄청난 대규모의 원정이 가능했던 점, 그리고 그러한 원정이 진시황제와는 달리 국가 체제 위기까지 가지 않았던 점은, 이 문경시대에 만들어놓은 축척된 경제력이 뒷받침된 것입니다.

3. 오초 칠국의 난

그러나 경제 후기에는 다시 국가 수입이 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생산력의 증가로 조세가 늘어나야 정상이지만, 한고조 유방이 실시한 군국제로 인하여 지방의 봉건제후들이 조세를 제때 내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자 생산력의 증가는 곧 지방 세력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 되어 국가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안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하인 조조는 제후국의 영지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강간약지정책) 즉, 군국제의 모순으로 동성제후들이 중앙권력을 이탈하기 시작한 만큼, 그들의 권한을 줄이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죠. 이에 대해 지방 제후들은 7국이 모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여차하면 중국이 다시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갈 판이었죠.(이렇게 봉건제도를 실시할 경우, 혈연관계가 소원해지면 꼭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국사에서 특이한 점입니다.)

비록 영지삭감을 주장한 조조는 죽었지만, 결국 7국의 난은 진압하였습니다. 이후 한의 황제들은 철저하게 지방의 제후왕들을 탄압하면서 중앙집권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국가체제를 전환합니다. 이것이 곧 한무제 시대의 <군현제>로 귀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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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의 난립기에 제자백가 사상이 등장하다

1. 제자 백가 사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

제자 백가가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차분히 정리해 볼까요? 우선 당시 춘추전국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에 대하여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들이 모두 제자백가사상의 등장 배경입니다.

일단, 당시 농업혁명에 의해 발전된 농업경제는 새롭게 재산을 축적한 서민층의 성장이라는 것과 맥락이 닿습니다. 이 서민층들은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전쟁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운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사> 계급에 새롭게 포함되기 시작합니다. <사>란 원래 귀족 주변의 사적인 종자 성격으로서 일종의 <가신 계급>으로 성장한 계급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점차 사회변화와 맞물려 성장하면서 지식인, 군사, 관료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들은 지식을 배경으로 지배층에 포함되기를 원하였고, 그 대가로 군공을 세워 기존 제후층에게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실제 <사>라는 용어를 보면 무사계급인 사족으로 <국인>층에 포함된 하층무사라는 어원에서 출발한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국가 체제에 맞는 입신출세를 원하였고, 군주를 보좌하면서 군주가 원하는 치국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던 신분상승의 욕구를 가진 계층입니다.

이러한 욕구와 맞물려 당시 사회에서는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도시국가들이 영토국가로 전환되는 과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군현제적 영토국가의 성립은 곧 사상과 지식, 학문적 논의가 국가단위에서 이루어지며, 전쟁을 통해여 그 지식의 범위가 확대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봉건질서의 붕괴는 곧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보급이 일반 서민계급과 황하강의 중원을 넘어 양쯔강의 이남 지역인 오랑캐 지역까지 파급됨을 뜻합니다. 이것은 폭발적인 지식인 계급의 성장을 지원하는 사회적 요건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당시 각국가들이 혼란기를 맞이하여 각자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입니다. 각 국의 군주들은 영토확장을 위해 인재를 우대하였고, 이것은 사상이 다양해지고, 다양한 학설이 각국에 전파되는 것을 장려하게 된 배경이 됩니다. 따라서 다양한 사상들은 각자 사학적인 학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다양한 사상들은 <사> 계층을 중심으로 고유한 사상체계로 <부국강병>의 근본적 방책을 제시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학자를 우대하여 다양한 사상이 모여 토론하던 곳이 제나라에 <직하의 학사>입니다.

2. 제자백가의 성격

제자 백가는 일단 사학적 성격을 가진 소규모의 학단들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당시 군주들의 부국강병책은 다양한 군주윤리와 사회윤리를 제시하였고, 그 윤리들은 각각 창시자로부터 구전으로 전달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서 책이 부족했으며, 아직 한자라는 통합적인 글자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시기에 각 지역별로 문자체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단의 교육이란 스승이 제자에게 설명하고, 질문하고, 암기시키는 <도제적인 지식전달과 질문법에 의한 사고력 향상>이 제자백가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자백가는 개인적 사상체계라기 보다 개인이 속한 <학단>의 사상체계로 정착된 듯 싶습니다. 물론, 그 학단내에서도 많은 분파가 있고, 분파마다 약간 다른 학설이 있기도 합니다.

제자 백가 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주를 이루다 보니, 그 학풍이 관료제적 국가 운영체제 및 입신양명을 위한 학문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자백가 사상은 지배층의 윤리와 지배층의 정치 방식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 제자백가의 논의가 있음으로서, 주나라 까지의 천명사상과 신정정치에 의한 미신적 정치관은 일단 탈피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문제가 신과 자연의 문제보다 선행된 문제로 인식되어 중국인 특유의 현실적 세계관의 기틀이 잡히게 됩니다. 또 지나치게 부국강병에 얽매인 철학 사상은 개인적 측면의 사상보다는 군현제적 체제에 부합된 국가윤리를 강조하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이후 학문과 정치라는 것이 일원화 되어 <관료가 학자이고, 학자가 곧 관료>가 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형이상학의 문제들도 현실 정치가들이 논하게 되고, 이상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등의 문제도 부국강병이나 치국에 맞는 변법적 측면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백가의 한계를 말하자면 국가주의적 윤리관을 추구함으로서 개인주의적인 인간행복의 가치를 공동체적인 규칙에 종속시켰다는 점을 일단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신앙을 추구하는 내세적이고, 열정적인 가치관은 이후 중국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네요.

제가백가는 중국의 철학이 사학적 성격의 철학으로 출발하여, 동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유, 도, 음양, 겸애, 태극, 오행, 법치 등의 사상을 탄생시켰다는 것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상들은 진나라에 의해 법가주의적으로, 한나라에 의해 유가주의적으로 일원화됨으로서 다양한 사상들이 획일화되어 음지에서 퍼졌다는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3. 제자백가의 형성 지역

제자백가 중에서 유가 사상은 서주문화권에서 많이 퍼졌습니다. 공자 자체가 노나라 사람으로서 중화권이었고, 유가는 중화의 근원지인 진, 위, 제나라 등에서 유행했습니다.

반면 유가를 차별애라고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겸애를 주장하였던 묵가사상은 중원을 벗어난 남방에서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5패 7웅에 속하였던 남방의 최강국가 <초>에서 묵가사상이 가장 유행하였습니다. 유가와 묵가는 이념적인 대립 뿐 아니라 중원과 변방이라는 지역적인 대립도 심하였습니다.

도가는 원래 남방의 <초>에서 시작되었으나, 제나라 <직하의 학사>에 유입되면서 남북지역에서 고루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도가의 무위자연이나 소국과민의 주장은 당시 <부국강병>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도가의 이념은 현실적인 정치이념보다 이상적인 관념 수준으로 유행한 듯 합니다.

법가는 강력한 법치주의적 통치를 주장하는 내용 때문에 전국시대 각국에서 유행했습니다. 원래는 <한, 위, 조> 등 주왕실의 근거지인 국가들이 신봉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초, 제, 진 등 변방국가들에 전파되었고, 각국의 변법 추진의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초기에 이런 지역색을 가지고 있었던 각 제자백가 사상은 전국시대 중기를 지나면서 상호 융합되어 각 지역별로 사상들이 서로 경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결국 통일을 이룬 것은 진나라의 <법가주의적 부국강병책>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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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의 시대

1.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개관(12-14c)

일본 막부시기 700년들 통털어볼 때, 가라쿠라 막부는 12-14세기에 걸쳐 존재한 최초의 막부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가마쿠라 막부를 잘 보면, 이 당시가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북방민족의 외침을 많이 받던 시기이고,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 등에게 시달리던 시대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혼란기와 상관없는 일본열도였지만, 이 막부가 성장하게 되는 경제적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혼란기를 이용한 무역의 호황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고, 나중에 망하게 되는 것도 북방에서 내려온 원나라의 침입때문이니 국제 정세와 무관한 막부는 아닙니다.

이들은 무신들이 장악한 최초의 사회입니다. 우리나라 고려와 약간 비교되기에, 한번 이 막부체제를 우리 고려사회랑 비교해보았습니다.(어떤 책에도 나와있지 않지만, 제 나름대로 이러한 비교가 도움이 될 것 같기에 시도해봅니다.)

비교학습

가마쿠라 막부

고려의 무신정권

배경

귀족중심의 율령체제의 동요에 따른 호족의 성장

무신차별과 귀족체제 동요에 따른 무신들의 사회불만

무신관계

의리에 기반을 둔 봉건적 질서

무신간 귄력다툼을 통한 최충헌 독재체제의 등장

특징

쇼군은 수도가 아닌 거점에서 전국의 무사들을 지배하는 형식

수도(개경)에서 사병을 거느리고 독자적 관료기구를 만들어 권력 장악

표를 보면 이해가 가시겠지만, 일반 이들 무신이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은, 모두 당시 귀족사회의 지배체제의 동요와 관계가 깊습니다. 일본에서는 천황가와 귀족가의 권력다툼이 심해지면서 무사세력이 성장하였고, 고려에서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등 당시 문벌귀족들이 동요하면서 무신정권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봉건제도가 쇼군과 지토를 중심으로 하는 의리 중심의 봉건질서를 확립하면서 700여년을 이끌어간다면, 고려의 무신정권은 무신간의 다툼 속에서 최충헌 정권의 독재로 이어지고 이 독재는 약 60여년 동안 그 사회를 지배하였습니다. 물론, 고려의 무신정권도 세계제국인 몽골과의 처절한 항쟁이 아니였다면 오래갔을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출연한 두 세력을 비교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네요.

가마쿠라 막부의 가장 큰 특징은 봉건제도의 확립입니다.

봉건제도는 앞 장에 자세히 설명했으니, 요점만 짚어봅시다. 봉건제도에서 국왕(천황가)은 존속합니다. 그러나 실권이 없고, 실권은 막부가 가지고 있습니다. 천황은 단지 신성한 하늘의 자손이라는 형식적 신성성만 가진 존재로 전락하지요. 즉, 실권은 쇼군(주군)이 가지고, 무사계급과 주종관계를 형성하는 봉건제도를 확립합니다. 일본식 봉건제도의 특징은 자세히 설명했었죠?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치안유지와 장원 관리를 위해 쇼군이 부하 무사들을 지방에 파견하는 제도입니다. 쇼군은 슈고와 지토에게 지방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권리와 토지를 분배하고, 이들은 쇼군에게 충성과 봉사를 하는 의리 중심의 봉건제도입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호죠씨로 대표되는 <싯켄>이 실제 권력 행사를 하는 시기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미나모토씨의 막부는 쇼군이 3대로 끝나면서, 실제 쇼군의 역할이 초기 요모토모 시기에 비해 현저히 약해졌습니다. 따라서 3대 이후 막부의 실권은 쇼군 아래에서 정치를 담당하였던 <싯켄>이 장악하였고, 이 싯켄 정치는 호죠씨 집단이 계속 세습하면서 영원할 것만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원나라의 침입을 막는 과정에서 무사생활이 빈곤해지고, 막부의 재정이 바닥나서 몰락하고, 다시 귀족가문(공가)가 정권을 잡는 시기로 돌아섭니다.

2. 가마쿠라 막부 시기의 가마쿠라 6불교

가마쿠라 시기의 종교적 특징을 찾으라면 <서민적 종교>의 출현입니다. 원래 고대에서의 불교는 귀족적인 불교이거나, 천황의 신성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의 성격이 강한 불교였습니다. 서민들을 위한 구원의 불교가 유행하지 않아서, 불교는 본래의 의미보다 지배집단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성격이 강하였지요. 보통 우리 신라에서 말하는 호국불교, 왕주교종 등이 일본고대 종교에서도 통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중세로 넘어오고 귀족사회가 몰락하자 불교는 서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서민적 불교를 가마쿠라 6불교라고 합니다. 이 시대 불교의 특징은 귀족적 특징을 가진 교종 불교가 아니라, 서민적 특징을 가진 선종불교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교종불교는 귀족적 성격으로서 심오한 불교교리를 이해하거나, 강론, 강회 등에 참석함으로서 깨달음을 얻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책을 살 돈도, 공부할 시간도 없는 서민들에게는 적합하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선종불교는 아주 간결한 깨달음으로 선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불교종파들을 말합니다. 예로 불교 경전을 몰라도 <나무아미타불>을 되새기며 마음으로 진리를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신라시대 원효스님의 말씀도 선종적인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일본 막부시대의 불교도 이러한 선종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정토종, 정토진종, 시종이라는 막부시대 불교 종파는 <나무아미타불>염불만으로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서민들에게 쉽고 간단한 불교진리를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또 임제종, 조동종이라는 선종 종파는 좌선(앉아서 계속 생각하면서 깨달음)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불교가 융성한 이유는 2가지 정도입니다.

첫 번째는 일본사회가 귀족사회가 몰락함으로서 새로운 계층의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당시 국제적으로 중국 송나라에서 성리학, 선종불교가 유행하였고, 고려의 무신정권기에도 선종이 유행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려 무신정권과 비슷한 상황의 일본 막부는 이들 선종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본식 선종은 막부 시대 내내 유행하였고,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시의 에도 막부 시대에 서민 불교로서 융성하게 됩니다.

3. 가마쿠라 막부의 법

원래 무사들은 율령격식 같은 율령을 지키지 않습니다. 무사들은 법보다는 자기들만의 양심이나 <도리>, <선례>에 따라 재산을 합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이 법이며, 그들이 옳은 일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무사의 실천이 곧 <정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가마쿠라 막부는 이러한 중구난방의 <정의>를 정리하여 성문법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법이 곧 <고세바이시키모쿠>라는 법이며, 이 법이 무가시대의 근본 법전이 되었습니다.

이 법전은 전국시대에 다시 수정되게 됩니다.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가신단을 통제하기 위한 법률을 새로 제정하는데 이것이 <분국법>입니다. 이 법은 고세바이시키모쿠를 반영하면서도, 가신 통제라는 중요한 목적을 반영하는 법입니다.

나머지 세세한 법, 제도, 문화, 예술 등은 별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없어서 다 생략하겠습니다. 그럼 이 쯤하고 가마쿠라 막부의 피냄새 진한 정치얘기를 한번 해보도록 하죠.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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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카 개신 - 토지개혁을 시도하다.

1. 6-7c 토지제도를 개혁하다.

일본 다이카 개신의 최대 핵심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의 율령체제를 도입하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당의 균전제도를 모방하여 토지를 개혁한 반전수수법의 시행입니다.

이 파트에서는 2번째 개혁 내용인 반전수수법과 토지제도를 이야기해 봅니다. 토지제도를 통해서도 일본 고대사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 먼저 야마토 정권부터 한번 봅시다. 야마토 정권은 지금까지 이야기 했듯이 호족들이 연합하게 만든 정권입니다. 각자 땅을 가진 호족들이 유력자를 천황으로 모셔 통일국가를 이루는 구조였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천황은 세력을 키워 중앙집권화를 추구하고 싶었고, 그래서 도입한 국가이념으로서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리고, 국가통치제도로서 수용한 것이 당의 율령제도였지요. 여기까지 이야기했었습니다.

다이카 개신으로 천황권이 강해진 일본 천황은 이제 모든 일본의 토지를 국왕의 토지로 하겠다라는 왕토사상의 이념까지 주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7c에 발표된 <개신의 조>입니다. 개신의 조는 4개조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 핵심은 바로 <공지공민제도>입니다. 공지공민이란, 모든 땅은 국가의 소유이며, 모든 사람의 천황에 소속된 사람이란 뜻이지요.

이와 동시에 발표된 토지법이 바로 그 유명한 <반전수수법>입니다. 이 법은 당의 균전제도를 모방한 제도입니다. 당의 사신으로 갔다온 견당사 일행이나, 당나라에 유학다녀온 도당유학생들이 당의 선진 제도를 가져와 일본에 시행하려 했던 것입니다.

당나라 균전제는 모든 국토가 황제의 국토라는 왕토사상을 기반으로, 백성들에게 땅을 분배해주고, 이 대가로 세금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세금과 노역이 바로 조.용.조입니다.(당나라 제도편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일본은 이것을 모방하여 비슷한 제도인 반전수수법을 만듭니다. 이 제도는

1. 6살 이상의 남자에게 반전이라고 해서 토지를 줍니다.

2. 양민에게는 2단(107평)을, 천민에게는 2/3단을 주고, 토지를 준 대가로 세금을 받습니다.

즉, 반전수수법은 반전=토지, 수수=주고받다(수수료할 때 수수입니다) 라는 용어로 해석하면 됩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가혹하게 많이 걷어가는 세금이 싫어서 도망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지방 호족들은 당연히 반발했구요.

2. 7-8c 후속 조치들을 계속 시행하다.

반전수수법이 가혹한 세금 때문에 지켜지지 않자, 천황가는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법을 정했는데 그것이 <삼세일신의 법>입니다. 이 법의 내용은

1. 황폐해진 반전을 개간한 자는 평생 그 땅을 개간한 자에게 준다는 내용입니다.

2. 황무지를 개간한 자는 3대에 걸쳐 토지사유를 인정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모든 땅은 국가땅이라는 균전의 이념(왕토사상)을 버리고, 일정한 기간동안 백성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다가도 3대가 되어 국가에 반납할 때쯤 되면 다시 땅을 버려 황무지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죠. 국가는 또 고민합니다. 고민과 고민 끝에 <국가는 결국 토지는 국가가 소유한다>는 원칙을 버립니다.

토지를 개인이 가질 수 있다는 새로운 법을 8c의 <간전영년사재법>이라고 합니다.

3. 10c 이후 토지 사유를 통한 새로운 계층이 성장하다.

자, 이제 일본의 천황은 그토록 하고 싶었던 토지국유제도를 포기했습니다. 토지는 이제 천황의 것이 아닌 개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법이 일본 고대사에 끼친 영향은 무지 큽니다. 토지를 각각 가진 자들이 지방에서 활동하는 사회.... 딱 생각나는 것이 유럽이나 중국의 봉건제도 아니겠어요? 점점 일본이 봉건제 사회인 중세사회로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간년영년사 제법>으로 토지를 사유화한 계층은 귀족과 불교사원의 유력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돈 많은 농민들도 토지를 사거나 개간해서 영주가 되기 시작합니다. 돈많은 농민영주들은 가난한 농민과 농노를 부려 토지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토지를 형식적으로 귀족과 사원에 기부합니다. 진짜 주는 것은 아니고 세금을 바치겠으니, 내 땅을 지켜달라는 액션이죠. 이렇게 형식적으로 귀족에게 바친 땅을 기진지라고 하니다.

이를 통해 일본에서는 새로운 사회 질서가 생깁니다. 이 새로운 장원 질서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 돈 많은 농민은 개발영주가 되어 커다란 장원(토지)를 갖고 농노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 돈을 번다.

2. 이 개발영주(농민지주)는 유력한 귀족에게 토지를 기진지를 바친다고 말하며 세금을 낸다. 유력한 귀족은 이 개발영주의 땅을 지켜준다.

3. 유력한 귀족들은 개발영주에게 받은 돈이나 일부 땅을 황족이나 중앙의 실력자에게 바치고, 관직이나 높은 권력을 얻는다.

자,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번 개발영주(농민지주)들은 점차 무장하여 돈을 벌게 되고, 차츰 자신의 토지를 자신이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즉, 돈이 많아진 개발영주(농민지주)들은 나중에 무사계급이 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장원질서는 계속되어 땅을 가진 자들은 자기 윗선에 계속 토지를 형식적으로 기증하고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게 됩니다. 이것이 11c 이후 중세사회에서는 봉건제도라고 불리는 제도로 정착됩니다. 이 개발영주, 유력한 귀족, 중앙의 실력자라는 구도는 중세시대로 말하자면 무사, 슈고, 지토 등등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중세시대에서 자세히 설명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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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세사회의 봉건제도 - 기원

1. 봉건제도를 파악하기 위한 2가지의 제도

유럽의 봉건제도는 충성과 의무를 수행한다는 계약적 주종관계라는 주종관계의 측면과, 농노제에 입각한 장원을 구성하였다는 장원제도라는 측면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주종관계와 장원제도는 따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2가지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봉건제도라고 하면 국왕 - 제후 - 기사 등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형 주종관계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주종관계를 존재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것은 장원에서 농노들의 자립적 생활 경제 기반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봉건제도를 해석할 때, 이것을 그 사회 전반에 확장적으로 사용하면 사회 전반에 걸친 생활 양식을 가르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사회를 가르켜 <봉건적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주종관계와 장원양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뜻도 되지만, 그 사회가 <중세적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봉건적인 것은 무엇인지, 중세적인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죠.

2. 봉건제도 중 주종관계의  역사적 성립 배경

봉건제도가 생긴 이유는 2가지 정도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중세사회는 4-5c 무렵 게르만족들이 서로마 영내에 각각 나라를 세우고 약해진 서로마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5c 이후 서로마는 멸망하고 각 게르만 국가들이 서유럽 전반을 지배하기 시작하는데, 남부 유럽의 게르만 국가들은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및 이슬람 제국이라는 강력한 세력을 만나 대부분 소멸되고 맙니다. 그러나 갈리아 지방에 정착하면서 원거리 이동을 피하고 북부 지방에 안주하였던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 국가 중 가장 광대한 영역을 보유하며 국가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카롤루스 대제 때에는 이슬람과 이베리아 반도를 경계로, 또 고트족이나 롬바르드족과는 이탈리아를 경계로 하여 북부를 통치하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하지만, 카롤루스 사후 이후 게르만 특유의 재산분할제와 내분으로 카롤루스의 아들 3명이 베르됭 조약, 메르센 조약 등으로 영토를 3분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입니다.

이렇게 프랑크 왕국의 분열로 게르만 사회가 분열되었을 때, 북에서는 노르만족(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이킹 세력)이 남하합니다.

프랑크 왕국 및 라틴, 게르만 사회는 이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엄청난 혼란에 빠집니다. 프랑크 왕국은 이미 노르만을 막을 힘이 없었고, 이 노르만족은 과거 게르만족이 로마 영내 곳곳에 왕국을 건설했듯이 프랑크 왕국 및 기타 유럽 전역에 왕국을 건설합니다. 그리고 상호 항쟁을 시작합니다. 또 노르만의 침입으로 유럽사회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아시아계통의 마자르족과 훈족, 그리고 이슬람 제국의 세력도 유럽 중앙부에 재침투를 시도합니다. 당시 서유럽사회는 아시아 및 기타 문명권에 비해 너무나 후진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침입을 막을 방도가 없었지요.

그러한 상황에서 국가 공권은 무력했습니다. 이제 상호 항쟁은 작은 영역단위에서 방어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보호 - 피보호 관계를 계약으로 설정한 주종관계인 것입니다. 유력자는 토지를 분봉하여 하위 기사들에게 충성을 강요하였고, 기사들은 유력자에게 의탁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보호받았으며, 피지배층은 스스로 유력 영주에게 의탁하여 몸을 보호받는(농노가 되더라도 말입니다)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을 <쌍무적 계약관게>, <주종관계>라고 부르며 봉건적 주종관계를 설정한 것이죠.

3. 봉건제도 중 봉토(장원)개념의 기원

봉건제도에서 토지를 매개로한 봉토 개념은 로마, 게르만의 옛 역사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로마사 이야기 편에서, 클리엔테지(Clientage) 개념을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클리엔테이지는 로마 초기에 자유가 없었던 평민들이 자신을 지켜줄 유력한 귀족 계급에서 자신을 의탁하고, 그 대가로 공물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귀족들은 자유가 없는 평민들을 대신해 재판이나 법률상담, 인신적 구속에 대한 방어 등을 책임져 주었습니다.

이 경우 평민들은 로마 귀족 계급을 위하여 소작농의 형태로 토지 경영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전통이 되어 내려온 것이 precarium이라는 소작적 개념의 용익권입니다. 용익권이란 자신의 토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로서 자신을 지켜주는 유력자를 위해 헌신한다는 개념으로 토지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토지를 스스로 팔지 못하고 토지에 구속당하며, 유력자에게 공납을 바치는 소작개념으로 토지를 운영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정 로마 후기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등으로 자유민들이 엄청난 토지세와 신분적 구속, 직업 상속의 병폐를 경험한 후 아예 유력자의 토지에 스스로 결박되어 소작농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을 colonus제도라고 하는데, 이 콜로누스 제도 하에서 반자유민으로 농사짓는 콜로나투스 농민들이 바로 긴 역사를 통해 형성된 중세 농노의 기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로마 말기로 갈수록 콜로누스제는 중세적 성격을 강화합니다. 콜로누스의 특수 영지는 면세권을 가져서 세금에 대한 자율권을 획득하였고, 국가권력으로부터 불입권을 획득하여 자신의 토지에 대한 총체적인 운영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게르만의 옛 사회에서도 봉건제도의 개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초기 게르만 사회를 묘사한 게르마니아를 보면 1세기 중후반의 게르만족들은 자유로운 시민사회로서 스스로의 일들을 결정할 수 있는 민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전쟁에 나갈 때에는 족장들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족장(추장) 세력에게 공납의 의무를 하였고, 족장 세력은 자신의 영역에 있는 민들을 지켜줄 것을 약속합니다. 또 유력 기사계급은 힘없는 자들을 보호해주면서 족장과 같은 권리를 행사합니다. 이것을 게르만에서는 종사제도(comnitatu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종사제도 역시 토지를 매개로 하는 제도입니다. 게르만에서의 종사란, 토지 생산물을 통한 공납 부여를 말합니다. 실제 게르만 족이 이동한 하나의 원인은 훈족의 압박도 있었지만, 인구 증가로 인하여 공납과 전쟁 의무를 수행할 토지가 절대 부족해진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그들은 유목민족인 흉노나 아시아계 민족보다 토지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는 것이지요.

게르만 국가로서 번성했던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은 왕국의 가장 큰 문제점을 이슬람 세력(사라센)을 격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그가 이슬람을 물리쳤던 투르, 푸아티에 전투는 사실 여부를 떠나 서유럽 세계를 지키는 아주 큰 역할을 했으니까요. 문제는 마르텔이 사라센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기병이 필요했는데, 기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기병으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보상을 주어여 하며, 또 말과 창을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크 왕국에서는 게르만 군대가 원하는 만큼을 줄 수 있는 토지가 절대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마르텔은 교회의 토지를 군대에게 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토지는 교회의 재산이므로 그 토지를 영구히 군대에게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 등을 토지를 받은 군인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의 수행, 토지세의 납무, 교회에 대한 카톨릭적 존경심 등등 여러 의무를 부과하여 토지를 부여하였고,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토지에 대한 용익권을 하사하였습니다. 즉, 국가에 대한 복무와 충성을 대가로 일정 의무를 부과한 토지를 내려준 것이지요. 이것을 마르텔 시대에는 은대지 제도(benificium)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봉건제도에서의 주종제도와 은대지제도는 서로 상호 연관된 관계인 것이지요. 그러나 후대에는 은대지 대신 봉토(feudum)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성립된 봉건제도는 농촌적 자연경계를 기반으로 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유럽사에서는 농촌적 봉건제가 탄생한 원인을 이슬람의 팽창으로 인하여 지중해를 상실하자 상업, 공업, 화폐제도, 상업도시 등이 소멸하여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약간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유럽사는 전공하지 않았지만, 이 말대로 하자면 원래 고대 유럽은 상업적 도시 사회였다가 농촌사회로 전환된 것이고 중세가 유럽의 암흑기라는 것인데, 유럽사회가 상당한 수준의 도시사회라는 증거가 뭔지 의문이 드는군요. 그리스, 로마가 중국의 춘추시대보다, 한국의 철기문화보다 발달한 도시 사회라는 건 당시 유럽의 후진적 문명 수준에서 좀 의아합니다. 그리스의 폴리스도 일부 아크로폴리스 외에는 다 농업을 기반으로 했던 사회였습니다. 유럽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은 약간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며, 고대부터 찬란한 문명으로 시작했다는 유럽의 주장을 좀 맹신하시는 것 같네요. 암튼,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봉건제도를 계속 설명을 계속해보죠.

다음 파트에서는 봉건제도의 계급관계와 계층구조를 한번 다뤄보도록 할께요.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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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 춘추5패와 회맹적 국제질서란?

1. 회맹적 국제질서란?

희맹적 국제 질서란 춘추시대 초기에 나타는 <패자>를 중심으로 한 연합 질서를 말합니다. 이것은 형식상 주왕실을 받는다는 명문을 가진 패자가 힘이 없는 주 왕실을 대신하여 오랑캐를 무찌르고 <중화질서>를 지킨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성립한 질서입니다. 춘추초기의 과도기적 사회에서 보이는 특이한 질서이지요.

이 질서는 당시에도 존재했던 원시적인 주술관과 봉건제도의 혈연성을 벗어나지 못한 제도입니다. 즉, 주왕실에게 봉토를 받았던 하늘의 후예들이 연대하여 공동의 중화 질서를 지키고, 동일 조상신을 통해 같은 핏줄임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이민족을 무찌를 수 있는 강한 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이렇게 주 왕을 받들어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사상을 <존왕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당시 춘추시대 초기 패자들은 소국을 병합하면서도 소국의 <종묘사직>은 보호하고 지켜주었습니다. 병합하되, 점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패자들의 원칙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기 국가병합의 가장 큰 특징은 주왕실과 그와 관련된 씨족질서는 계속 유지하면서 대국이 소국을 병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소국의 지배층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대국과 결맹을 맺어 대국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회맹>이라고 합니다. 회맹은 맹주에 대하여 소국들이 병력을 <부세>로서 제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패자가 점령한 소국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경우 소국은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패자에게 저항하는 <반맹>현상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대국이 소국을 병합하면서도 소국의 인정을 받고, 소국은 대국으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며 등장한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외교가가 바로 <자산>입니다.

2. 춘추 5패의 등장

춘추 5패는 이러한 회맹적 질서를 보이며 등장한 춘추시대 5명의 패자를 말합니다. 춘추 5패는 제, 진, 초, 오, 월을 말합니다. 원래 초기의 패자는 중원지역인 황하유역의 제, 진 나라 등이 영토전쟁을 하면서 패자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후기에는 철기를 통한 양자강 유역의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초, 오, 월 등의 남방국가들이 패자로 등장합니다. 초기의 중원국가들은 남방국가들은 오랑캐로 생각하여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춘추 5패로서 중원에 영향력을 끼치자 후기에는 이들도 같은 중화민족으로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춘추 시대 후기에는 북방의 진과 남방의 초가 대립하면서 남북적 대립현상이 보입니다. 어떻게 본면 춘추 5패의 판도는 제, 진의 북방 중화질서 유지와 초, 오, 월 등 남방국가의 중화 진출 시대의 한 판 장이라고도 보여집니다.

3. 춘추 중기 이후의 멸국치현 현상

춘추 시대 중기 이후 남방과 북방의 대립이 심해지고, 각국의 부국강병이 절실한 시기가 오자 이제 <중화>라는 개념으로 싸우기보다 <남북간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춘추시대가 전개됩니다. 이 때는 주왕실을 받들어 소국의 종묘사직을 인정한다는 명분은 점차 희석되고, 소국을 멸망시켜 자국의 행정구역인 <현>으로 만든 뒤 세금을 부여하는 <멸국치현>현상이 발생합니다.

국가를 멸망시키고, 현을 성립시킨다는 <멸국치현>은 지배자를 제가하고 소국의 종묘사직을 파괴하였습니다. 각 국은 국력 강화를 위해 군대를 모아야 했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패자는 절대적인 가부장적 군주로 변신하게 되고, 각 국은 <변법>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맞는 법과 이념을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이 춘추 중기의 현상은 곧 <읍제국가>수준의 지배형태를 <군현제적 중앙집권국가>로 변환시키는 것이었고, 결국 약육강식의 전국시대로 나가는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춘추 5패가 서로 항쟁하는 부분의 고사들(와신상담 등)은 따로 정리하여 사료방에 넣어두겠습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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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주시대 봉건제도에 대한 분석

1. 봉건제에 대한 이론들

봉건제도는 전통적으로 중국 서주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중국사회가 유가주의를 사상적으로 채택하면서 유교의 유덕자 주공에 의해 봉건제의 기틀이 마련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렇게 유가적 봉건론을 주장하면서 주공을 신성시 하는 학파를 신고파라고 합니다.

주공은 <혈연>을 중심으로 새 정복지에 대하여 왕실의 울타리를 마련하고, 국가 기반을 든든히 다지기 위해 일족과 공신에게 땅을 분봉하였는데, 이것을 봉건제의 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공은 봉건제도, 지방통제제도, 어진 재상의 모범, 강태공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봉건제도에 대한 유가적인 입장을 부인하는 연구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봉건제는 주공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며, 은나라 시대에 이미 실시하고 있던 것을 주나라에서 확대 실시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봉건제를 주나라에서 계승하여 확대 실시한 목적은 은주교체기의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정복지에 왕실의 일족과 믿을 수 있는 공신을 제후로 봉함으로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함과 동시에, 공신에 대한 포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종래 은왕조에 종속되었던 유력한 읍의 지배자를 서주의 지배체제로 복속시키기 위한 사회적 의도가 있었습니다.

셋째로, 유가적인 봉건제 해석은 실제 봉건제가 주대 이상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후대 진시황의 법가적 통일에 대한 반발로서 부각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진의 법가주의적 통치와 분서갱유같은 유교탄압이 진왕조의 단명이라고 생각한 유교주의자들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봉건제도를 상당히 미화한 것입니다.

2. 봉건제도의 구성

봉건제도는 일단 토지를 여러 단계로 분봉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왕은 왕토사상에 의해 전국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직할지인 왕기만을 소유하고 나머지 토지는 제후에게 분봉합니다. 제후에게 분봉한 땅을 <국>이라고 합니다. 제후는 자신의 국(국가)를 가지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거주하면서 가신집단인 경, 대부에게 토지를 사여합니다. 경, 대부에게 분봉한 땅을 <공읍, 채읍>이라고 하며, 그 중심지를 <도>라고 부릅니다.

즉,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왕기 - 왕의 직할지, 원칙적으로  왕토사상에 의하여 모든 땅은 국왕의 소유라고 관념적으로 규정한다.
   국 - 주왕실이 분봉한 읍, 제후는 이곳을 성곽으로 둘러싸고 자신의 영역으로 확정한다.
   도 - 제후가 경, 대부에게 분봉한 읍(공읍, 채읍), 경, 대부는 국의 중심지를 성곽으로 둘러싸고 종묘사직을 설치한다.
   봉토 -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내려준 토지의 명칭, 이 토지(채읍)를 받은 대가로 군사적 봉사와 공납이 따른다
   구조 - 왕기에서 각 읍에 이르는 분봉 과정은 피라미드형 구조이다.
            ; 도의 경, 대부가 갖는 봉건적 의무 역시 제후가 주왕실에 해야 하는 의무와 같다.

3. 봉건제도의 원리

봉건제도의 원리를 한 문장으로 규정하자면 천명사상, 왕토사상, 종법제도, 혈연중심 통치제도 속에서 공납과 군역의 의무를 매개로 맺어진 사회, 정치 질서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볼까요?

봉건제도는 국왕은 신으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천명사상과 모든 땅은 국왕의 땅이라는 왕토사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 속에서 혈연적 유대관념과 씨족적 질서, 종법제도, 세습제도 등으로 천명사상을 든든히 받쳐줍니다.

특히, 종법제도는 천명사상, 왕토사상에 근거한 혈연중심 통치제도입니다. 종법이란 부계씨족제, 장자상속제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본가와 분가의 종적 신분질서를 철저히 규명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곧 동양 가족 질서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종법에서의 종주는 주왕실입니다. 주왕실은 종국, 종읍, 종묘, 종족 등의 관념을 형성하고 이것을 종법 속에서 신격화합니다. 천자는 하늘의 자식으로서 왕토사상에 입각하여 왕기를 다스리고, 제후, 방백들에게 <국>을 하사하여 혈연관계를 과시합니다. 제후와 방백은 경, 대부, 사 등에게 혈연관계에 입각하여 <도>를 하사함으로서 <혈연적 봉건 신분제>를 유지합니다.

서양의 봉건제도가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일본막부의 봉건제도가 의리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특징을 갖는다면, 중국의 봉건제도는 혈연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왕도주의는 이념상 유가적 이상주의이지만, 이 제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조공, 순수, 감국 제도 등을 활용하여 제후들을 철저히 통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지방분권주의의 병폐를 막기위한 제도적 방편이었지요. 물론 이것은 실패하여 진나라 시기 법가적 중앙집권주의로 돌아서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봉건제도의 원리를 요약하자면, 봉토를 매개로 공납과 군역의 의무를 부여하고, 혈연성을 과시하는 혈연적 종법질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봉건제도의 원리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혈연관계가 소원해지면, 종가에 대한 분가의 종법적 충성심이 점점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봉건제도를 기반으로 국가 운영체제를 구축한 전한, 서진은 종친, 왕자의 난 등 혈연관계의 지배집단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국가 기반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봉건제가 갖는 가장 큰 모순중 하나입니다.

4. 서주의 지방제후 통제

서주에서는 봉건제도의 원리 하에서 효율적인 지방 통제를 하기 위한 여러 방편을 마련했습니다.

제도적인 통제책으로는 종법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혈연의식강화로 인한 통제 효과입니다.
   사상적인 통제책으로는 천명사상을 바탕으로 한 전국토의 왕토사상으로 인한 통제 효과입니다.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제도에 의한 통제였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볼까요?

일단 서주는 주공시대에 채숙의 난을 진압하고, 양경체제를 구축합니다. 양경체제란 종주, 성주로 주요 거점을 나눠 국가를 통치하는 방책을 말합니다.

종주란, 주의 본거지인 호경으로 왕기(직할지)를 말합니다. 성주란, 낙양을 말하는 것으로 은의 옛 땅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건설한 곳입니다. 종주와 성주는 각각 종주 6사(서방 6사), 성주 8사(동방 8사)로 구성된 천자 직속군단이 있어 태사가 이를 통솔합니다.

종주6사는 왕실군으로서 국인으로 편성됩니다. 역할은 서방방어 및 호경 방어입니다.
   성주8사는 은의 유민으로 편제하여 낙양을 방어하면서, 지방제후의 반란 진압, 동남이 정벌의 주력부대로 활용됩니다.

다음으로 지방제후의 일족을 중앙에 머물게 하고 관직을 임용해줌으로서 효율적으로 지방을 통제합니다. 또, 지방에 감시관을 배치하는 <감국제도>, 천자와 제후가 상견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군신관계를 확인하는 절차로 물품을 바치는 <조공제도>, 천자의 권위를 지방으로 확대하고 제후의 정치를 천자가 나서서 직접 살피는 <순수제도>등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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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의 이동과 유럽 중세의 시작

1. 게르만 족이란?

게르만족은 발트해 북유럽 연안에 살던 소수의 야만인(?)입니다. 야만인이라는 것은 당시 로마 제국의 관점이였죠. 로마는 갈리아 정복 이후 춥고, 도움이 안되는 북극쪽의 땅은 정복하지 않습니다. 실제 로마가 현재 프랑스-서부독일-에스파냐를 잇는 갈리아를 정복한 것도 갈리아 지방에 풍부한 유산이 있거나, 갈리아인들이 문명인이라서가 아닙니다. 갈리아 정복은 단지 이베리아 반도를 거치기 위해 필요한 도로를 확장하기 위함이였으니까요.

아무튼, 북유럽의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방인이였습니다. 그러나 게르만족에게 평화가 오랜 기간 유지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경작지가 부족해졌습니다. 이것은 게르만인들이 남부로 내려오는 하나의 원인이 됩니다. 게르만족들은 중국의 흉노(훈족)의 동진과 함께 대대적인 이동을 시작합니다. 초기의 이동은 흉노를 피해 로마로 이주한 유이민들이였고, 이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학대당하였습니다. 초기의 유이민들은 정착할 땅을 얻지 못하였고, 노예로 팔리거나, 소작농이거나, 성 노예로 매매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에 적응하기 위하여 로마의 영토를 지키는 병사를 자처하면서 연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4c경 훈족의 압박으로 게르만족들은 무장하면서 대대적인 이동을 합니다. 게르만 일파인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이 로마제국내에 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르렀고, 각 게르만족의 일파들은 로마 영지에 국가단위로 안착하게 됩니다. 이후 동고트의 약탈로 약해진 서로마는 서고트족의 일격으로 망하게 됩니다. 이 서로마가 멸망한 것을 기준으로 유럽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갔다고 말합니다.

2. 게르만인들의 초기 사회

게르만의 초기사회는 1c중반의 역사가인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자세히 나온다고 합니다.

초기 게르만인들은 국가라고 할 조직적인 기반이 없는 부족사회였습니다. 족장도 전사들의 모임인 시민회에서 선출되었습니다. 게르만의 정치는 자유민으로 이루어진 시민회(민회)가 주도했습니다. 시민들의 자유로운 사회인 것이죠. 실제 프랑크족, 색슨족, 고트족 등의 게르만족들은 조직적 부족국가가 아닙니다. 그냥 언어나 풍습이 유사한 집단들이 하나의 족속개념으로 뭉친 것이지요.

그들은 종사제도라는 강한 인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르마니아(1c 전반, 타키투스), 갈리아전기(1c 후반, 시저) 등의 내용을 보면 게르만인들은 자유를 무척이나 즐기는 편이지만 인적인 유대관계도 견고하다고 합니다.

종사제도(Comitatus)는 중세 유럽의 주종관계와도 관련있는 <봉건제적 개념>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상위 지배층과 하위 전사간의 충성-의무 관계를 말합니다. 즉, 족장들은 무기, 식량등을 전사로부터 공급받고 전장에서 활약한 전사단을 거느립니다. 전사단은 족장에게 충성하는 대신 가족의 생명과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습니다. 이것은 게르만인들이 유럽을 이끌어가는 중세시대에 <봉건제도>라는 사회틀로 자리잡습니다.

게르만인들은 초기에는 원시종교를 믿었는데, 이 원시종교는 중세사회가 자리잡은 5c 이후부터 10c무렵까지도 지속됩니다. 하지만, 게르만인에게도 크리스트교가 보급되어 시간이 지날 수록 크리스트교가 중세사회의 핵심 종교로 자리잡게 되는데, 그것은 초기 게르만인들에게 <아리우스파>의 교리가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리우스파는 로마제국기 콘스탄트누스 황제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스우스파의 삼위일체설에 밀려 게르만 사회로 흘러들어간 학파라는 것을 로마사에서 설명했습니다. 이 아리우스파가 게르만인 교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3. 훈족의 압박과 민족의 대이동

3c 경 게르만인들은 로마의 용병이나 소작인 수준으로 로마 변경 지대에 정착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로마 군인으로 활약하면서 그들의 권리를 작게나마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특히, 콜로나투스 제도가 로마에 정착되는 3c 경에는 토지의 부족현상이 심해져서 로마인에게 토지를 주면서 군복무를 시키기가 어렵게 되었고, 로마인들은 강제로 세습군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복무하지 않았지만, 게르만인들은 절박한 처지 속에서 목숨걸고 충성하였습니다. 충성이 곧 그들의 신분상승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것이였으니까요.

게르만인들은 차츰 부족단위, 동맹시 단위로 군대를 편성하여 로마의 변방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이들 군인들이 거대한 제국에 꼭 필요했지만, 이것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 됩니다. 4c 대대적인 게르만의 이동기에 로마 영토내에 국가를 세우고 독립해버린 자들은 다름아닌 게르만의 부족, 동맹시였으니까요.

4. 게르만의 국가

훈족의 압박으로 이동한 게르만족 중 유명한 국가들을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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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고트족

우선 서고트족은 먼 길을 이동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합니다. 그들은 에스파냐 왕국을 건설하고,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 시민과 공존하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당시 확장중인 이슬람과 맞닿은 지역이였습니다. 서고트족은 이후 이슬람의 공격으로 망하고, 이베리아 반도는 중세 시대 이슬람의 세력권으로 남게 됩니다.

2. 반달족

반달족은 에스파냐 남부에서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는 영토에 반달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이민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학살하며, 재산을 파괴하는 등 잔혹한 방법으로 영토 확장을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무법적인 만행을 보통 <반달리즘>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6c 동로마의 위대한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멸망당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법>체계를 확립하여, <반달리즘>과 같은 야만성을 법으로 규제해 버립니다.

3. 앵글로=섹슨족

영국과 북해에서는 북해 7왕국 등이 건설되었는데, 이곳에 정착한 민족은 앵글로족과 섹슨족입니다. 이들은 앵글로-섹슨 왕국을 건설하면서, 영국이라는 섬나라를 주도하는 민족이 됩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와 같은 섬들은 캘트족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 영국은 이후 역사에서 이들 민족간의 항쟁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4. 아시아계 민족

훈족이 철수한 이후에는 훈족이 이동했었던 중앙아시아와 동부 유럽에 아시아계통의 민족이 정착하게 됩니다. 유럽의 중앙평원에는 마자르족, 불가리아족, 아바르족 등이 남아 이후 유럽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들은 아시아 계통의 민족이면서도 점차 유럽화되어 갑니다.

5. 동고트족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도에 직접 진출하였습니다. 이들은 이탈리아에 왕국을 건설하였고, 로마 민족과 대립하였습니다. 로마의 명제상 보에티우스는 누명을 쓰고 죽기 직전 감옥에 있을 때, 이 동고트족이 점령한 혼란기 로마의 참상을 보고 <철학의 위안>이라는 대작을 남겼다고 합니다. 동고트족 역시 6c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로마제국 회복 작업에 의해 멸망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이탈리아는 황제권을 회복하여 서유럽의 역사가 다시 전개된 것이죠.

6. 롬바르드족

롬바르드족은 북부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국가를 세운 영토를 <롬바르디아 평원>이라고 부릅니다. 또 그들은 시칠리아 섬 북부 등 이탈리아 남부에 2개의 공국을 세웠습니다.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북부를 차지하면서,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는 <라벤나>를 경계로 시칠리아, 남부 이탈리아를 로마 영토로 선언합니다. 롬바르드족은 그 민족이 멸망했다기 보다 자연스레 로마 문화로 융화되면서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이탈리아 북부에 세력권을 유지합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이러한 혼란기에 서유럽은 어떻게 로마 문화를 유지했는지 살펴보고, 프랑크 왕국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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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 계급구조와 계급 용어를 파악하자.

1. 서주의 계급구조

중국 서주 시대의 계급을 보면, 그 특징이 종법과 혈연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엄격한 세습적 신분제도라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세습되는 혈연적 관계의 신분에 의해 사회의 기본 구조가 형성된 것이죠. 지금부터 설명하는 이 용어들은 모두 고대 주나라에서 성립된 용어들로, 동아시아의 많은 왕조들이 이 용어를 실제로 사용하였던 개념들입니다. 알아두시면 동아시아 역사이해하기 좋아요.

먼저, 가장 높은 계급을 말하라고 하면 당연 <주왕실>입니다. 주왕실은 국토와 인민은 모두 주왕실의 소유여야 한다는 <왕토사상>의 이념을 가지고 영토를 지배합니다. 그러나 모든 영토가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은 이념적인 이상을 말한 것이고, 실제로는 왕의 직할지를 제외하고는 제후에게 영지를 분배하는 <봉건제도>를 통해 국가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다음 계급을 말하라고 하면 <제후>계급입니다. 제후는 주왕실로부터 땅(읍)을 분봉받은 친족을 말하는데, 이렇게 주왕실로부터 받은 땅을 <국國>이라고 합니다. 제후는 땅을 받은 대가로 천자를 받들고 천자를 위해 조공과 군사적 의무를 이행합니다. 그러나 이들 <제후>계급은 초기와는 달리,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왕실과 혈연관계가 약해지면서, 훗날에는 주왕실을 형식적으로는 받들게 됩니다.

제후는 자신이 받은 <국>을 자신에게 충성하는 경, 대부에게 일부 나눠줍니다. 그리고 자신은 국의 중심지에 도성을 설치하고, 지방정부를 구성하게 됩니다. 제후의 영토는 독립적인 성격이 강해서 독자적인 관료, 군대 등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국國의> 중심지에 설치한 도성을 훗날에는 <도都邑 : 수도>라고 부르게 됩니다.

제후 아래에는 사족(국인)이라고 불린 대부와 경이 있었습니다.

대부는 제후국 안에 작은 영토로서 (국>을 부여받은 자를 말합니다. 대부의 가족은 氏로 구분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다른 계급에 비해 높다며 우월감을 과시하는데, 이러한 대부 가문을 <씨실>이라고 부릅니다. 즉, 왕의 가문은 <왕실>, 제후 가문은 <공실>, 대부 가문은 <씨실>이라고 칭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씨실제도는 명목상으로는 제후의 신하이나, 실제적으로 우리는 독립국이다라는 것을 내포하는 개념입니다. 또, 공실개념 역시 왕실에 속해있으나, 그들의 세력이 막강함을 과시하는 개념으로 쓰이죠. 그러나, 정반대로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공실, 씨실은 왕실에 속한 혈연집단이라는 개념으로 쓰입니다.

대부들은 서주가 약해진 이후, 실제 독립국가의 개념으로 역사에 대두하여 <국>의 대권을 좌우하고, 군주를 폐립하는 데 까지 이릅니다. 이 시기가 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누구나 <국>에서 왕을 자처하는 사회가 된 것이니까요.

<경>은 사실 대부출신입니다. 경이란 대부의 자격을 가지고, 제후를 실제로 보조하면서 제후 국가의 정책을 도와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대부 중에서 똑똑하고 유력한 사람을 <경>이라고 하죠. 그래서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경>이라고 하면 <대부>보다는 높은 계층을 일컫는 말입니다.

대부와 경 아래에는 가장 말단 지배층인 <사士>계층이 있습니다. 사는 하위 지배층으로 보통은 전투에 주력하는 전사계급입니다. 이들은 무사계급으로서 전투에 필요한 6예(활쏘기, 말하기, 예절, 음악, 그림, 수학)을 습득하였는데, 그들이 배우는 과정은 무사로서의 훌륭함 뿐만 아니라 가장 필수적인 교양과목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점차 교양인으로 성장하게 되고, 그들이 습득한 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대부>계급을 <사대부>라고 칭하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다음으로 평민 계급을 볼까요?

평민층은 상인이나 공인보다 농민이 많습니다. 농민들은 귀족의 사유토지를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권리인 <경작권>만 세습이 되었을 뿐, 토지의 주인이 아닌 관계로 토지매매나 양도는 불가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주시대의 노예계급은 대부분이 전쟁 포로들입니다. 고대 사회의 특징이 전쟁 노예가 많다는 점이지요. 물론 범죄자나, 빚을 갚지 못한 평민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가 가능했습니다. 이 노예의 존재는 서주를 어떤 사회로 볼 것인가라는 시대구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노예가 만약 노동노예, 가내노예, 국유노예, 종족의 노예 등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면 일단 서주시대가 노예제 사회라고 볼 수 있겠죠. 이것은 마르크스의 시대 구분에 의하면 고대 노예제 사회가 됩니다.

그러나 노예라는 존재가 주인의 땅에서 소작을 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고 판단하는 학자들은 서주 시대는 봉건제도와 정전제가 존재하는 봉건제 사회라고 볼 수 있게 됩니다. 실제, 서주에서는 봉건제도가 실시되었고, 봉건제 밑에서 일하는 소작인을 노예가 아닌 농노로 볼 수도 있으니까요.

어느 쪽이 맞는지는 잘 모르죠. 암튼, 이러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보기 위해 다음 장에서는 서주시대의 특이한 제도인 <정전제도>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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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시대의 종법질서에 의한 씨, 성 제도가 있었다

1. 서주 시대의 정치

보통 은나라 다음으로 주나라 역사를 전개한다고 할 때, 주나라의 시기는 2시기로 구분됩니다.

먼저, 호경을 수도로 한 서주시대로서, 이 시대는 중국에서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 평가합니다.

두 번째로,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동주시대로서 이 시대는 주왕실이 문란해지고 각지에 제후들이 실권을 잡게 되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춘추시대, 전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나라는 주 문왕이 건국하였고, 무왕 때 역성혁명을 일으켜 <주>라는 국가를 성립시켰습니다. 그러나, 주 무왕은 은나라의 귀족들을 몰살시키지 않았습니다. 은나라 자체가 도시국가의 연합적인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은나라의 세력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은나라의 기반 세력>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주의 무왕은 은왕의 아들 및 일족, 공신들에게 주변의 토지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주왕실의 울타리 역할을 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봉건제도>인 것입니다.

주나라는 성왕 대에 가서 어린 왕을 보필하는 <주공 단>이 실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주공 단은 왕권에 욕심내지 않았고, 어진 정치로 백성들을 보살폈으며, 왕이 성장하게 성인이 된 이후 왕에게 자신의 실권을 고스란히 물려줍니다. 그리고 그는 낚시나 하면서 소일 하는 <강태공>이 되었다는군요.. <주공 단>은 훗날 중국에서 어진 재상을 뜻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됩니다.

특히 주공단은 은의 유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잘 다스렸다고 합니다. 관숙과 채숙이 일으킨 삼감의 난은 유명하죠. 삼감의 난으로 주공은 은의 유민들을 통제할 방법을 찾습니다. 주공 단은 효율적으로 주의 영토를 다스리고, 지방 제후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종주, 성주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인 호경은 서방의 수도로서 <종주>라 하였고, 낙양은 은의 유민을 동방에서 이주시켜 <성주>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2중적인 거점 도시 건설은 은의 유민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 주왕실에 복속시키기 위함이였습니다.

주공 단의 시대를 중심으로 주나라는 이민족 정벌도 꾸준히 시도합니다. 동쪽으로 나아가 은의 잔당인 동이족에 대한 토벌을 시도하고, 서쪽으로는 견융족과 험윤족을 정벌합니다. 그러나 남부의 양자강은 정복하기 어려워 아직까지 주의 영토는 황하강을 중심으로 한 북부지방에 머뭅니다. 남부는 미지의 세계로 남게 되지요.

2. 주의 사회 통제 장치 - 종법제도와 성씨제도

주 시대는 은나라 시대보다 중앙관직이 더 다양해졌습니다. 은대는 신성정치를 하면서 제사, 전쟁 위주의 관직분포라고 설명했었습니다. 주는 은나라와 같이 제정일치사회이긴 하지만, <신성정치>를 하는 국가의 색체는 약합니다. 건국부터가 <역성혁명>을 표방하며, 천손도 교체될 수 있음을 주장했으니까요. 따라서 주대의 관직은 다양하며, 국가규모가 커질 수록 관직수도 늘어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국가에 봉사하는 귀족들은 관직 복무의 댓가로 <채읍>이라는 땅을 받았고, 관직도 세습되었습니다.

이렇게 관직도 많아지고, 땅을 받은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주나라는 이러한 왕족, 친족, 관리들을 통제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러한 통제의 관점에서 종법제도가 정립됩니다.

종법은 혈연적인 친족관계를 명확히 하여 주 왕실에 대한 충성을 견고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종법은 아버지 혈통에 따른 부계씨족제, 장자 상속제를 기반으로 본가집과 분가집을 종적인 신분질서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종법의 원리 속에서 성씨제도와 씨족제도라는 것이 탄생합니다. 성씨제도란, 종법사회에 있어서 혈연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성이 있어서 귀족들이 만든 것입니다. 성씨제도에서 <성>이란 일반 평민들도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씨>라는 것은 귀족들이 스스로의 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귀족이 중심이 되는 사회나, 신분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성>보다 <씨>를 더 중요시 하죠.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 조선 시대에는 성보다는 가문(씨>를 훨씬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안동 김씨, 전주 이씨 처럼요..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는 <씨> 안에서 <성>은 존재한다고 보았으니까요. 김씨, 이씨 등의 단순한 성은 옛날 사회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고대의 성 중에서 女자변이 들어간 성이 많다는 점입니다. 이것으로 고대가 모계중심사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지요.

3. 씨족제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씨라는 것은 <성>에서 갈려져 나온 집단의 명칭입니다. <이씨>가 성이라면, <전주 이씨>는 씨입니다. 이렇게 씨와 성을 구분하는 것은 주왕실(공실)에서 분가하여 새롭게 자리잡은 집단의 시조는 누구인가, 이러한 집단은 공실과 어떤 관계인가를 규명하기 위함입니다. <주공 단>을 보면, 주공이 씨 이고 이름자는 단입니다. <주공>이라는 씨에서 주나라 공실 출신인 본가임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씨족제도로서 종법제도가 유지됩니다. 이 종법제도는 본가와 분가를 구분함과 동시에, 남존여비사상, 적서차별사상, 동성불혼 사상 등을 포함하는 사상입니다. 즉, 종법제도가 정작되면서 남자중심의 씨, 성 제도가 정착되고, 이것으로 여자의 지위는 끝없이 하락하게 됩니다. 바로 이 주나라 시대의 종법질서에서 유교적인 남성위주의 사회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로, <제잉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잉제는 왕실인 제후(공실), 대부(씨실)에게 출가할 경우 언니, 여동생이 동시에 출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공 단>에게 시집갈 경우, 언니, 여동생은 주공단과 동시에 결혼하는 것이죠. 단, 서민집단은 이러한 성, 씨와 관련이 없으므로 1부1처제였습니다.

 이 종법제도는 봉건제도를 다룰 때, 이것보다 훨씬 자세하게 설명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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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에서 서주라는 시대를 인정해야될까?

1. 서주라는 시대를 인정해야 하는가?

서주라는 시대는 공자나 맹자와 같은 유교 사상가들이 가장 이상적이 평화로웠던 시대라고 규정한 시대입니다. 중국 문화의 기본 틀은 봉건제도, 정전제도, 종법제도 등이 이 시대에 나왔고, 실제 이 시대에서는 이러한 이상적인 틀들이 이상적으로 잘 지켜진 시대라고 유교사상가들은 말합니다.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주의자들은 옛날 문헌의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서주는 봉건제도를 완성한 중국의 이상사회로서, 가장 가치있는 시대의 경험이라고 말이죠. 반대로 말하자면, 이러한 이상시대인 서주를 멸망시킨 춘추전국시대란, 암흑시대요, 저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중국 신문화운동기를 주도했던 근현대 사학자들은 서주시대의 이상을 철저하게 비판합니다. 중국의 현대화를 위하여 중국 전통 사상인 유교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었던 사람들은 서주라는 시대가 유가주의자가 만들어낸 허구 시대라고 말합니다. 삼황오제의 전설은 제자백가시대에 창작된 창작물에 불과하며, 유교적인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국가는 실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죠. 이들은 아예 서주 및 중국고대사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면서 서주 이전의 역사기록들이 전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서주의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전 시대인 은나라의 유물이 더 많죠.

2. 그래도 서주 시대는 중국사의 기본틀이다.

문제는 서주 시대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간에 서주시대가 중국사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크다는 점입니다. 실제, 중국역사를 통털어 서주시대의 제도, 문물의 영향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받지 않은 시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서주시대는 중국 역사에 있어 창업, 개혁, 제도정비 등의 모델로 자리잡았죠. 예를 몇가지 들어볼까요?

일단 중국 역대 왕조들 중에 <주>라는 이름의 국가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북주, 후주, 무주 등등이 그렇지요. 또, 왕망은 <신>이라는 국가를 창건할 때, 국가의 이상적 모델로 서주의 제도들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또, 전단계국가를 멸망시키고 다른 국가를 세울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아 나라를 세운다는 <역성혁명>의 이론도 주나라의 왕조교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 중국식 시호제도, 봉건제도, 종법질서, 정전제도, 가족질서 등은 모두 서주의 모델을 근거로 하여 체계적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중국 대부분의 통일왕조는 모두 서주의 근거지인 <위수분지>를 거점으로 창업하였습니다. 유일하게 위수분지가 아닌, 중국남부에서 창업한 나라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명>나라 밖에는 없습니다. 이 위수분지는 농사짓기에 최적의 위치이자, 이민적을 막기에 천연의 요새지이고, 동서교류의 요충지로서 서주 이후의 국가들은 이 곳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3. 은에서 주로 교체되는 시기의 논쟁

은나라가 망하면서 주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의 <역성혁명>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평가가 많이 갈라집니다.

은나라가 망한 것은 걸왕의 폭정 때문이며, 주를 세운 무왕은 <하늘이 새로운 뜻>으로 자신을 택하였다는 <역성혁명>의 이론으로 주를 세웠습니다. 이 <역성혁명>이란 것은 주나라가 <하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 것을 뜻합니다.

은나라에서의 천명사상은 <신성함> 그 자체입니다. 은의 황제는 하늘의 자손으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존재이며, 선천적으로 절대자입니다. 그러나 주나라의 천명사상은 하늘의 뜻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은나라 왕이 폭정을 했기 때문에, 그를 처단하고 새로운 하늘의 뜻을 보여준다는 <역성혁명 : 성을 바뀌어 새로이 하늘의 뜻을 대신함>은 후천적이고 가변적인 천명입니다. 이러한 주의 <천명사상>은 후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이용됩니다. 실제, 삼국지를 보면 위나라 조조의 아들 조비가 나라를 세울 때, 황제가 나에게 <쳔명>을 양보하여 황제가 바뀐다는 <선양의 예>에 따라 황제가 등극하는 예를 보여줍니다. 그 이후 이 천명사상은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조교체의 논리로 이용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의 왕권 교체가 과연 혁명적이였는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보통 혁명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주나라가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세움으로서 봉건제도, 종법제도라는 중국적 제도를 완성했으므로, 은주혁명은 아주 획기적인 혁명이라는 입장입니다.

반대로, 서주의 등장은 은나라의 체제를 계승한 국가로서 혁명이 아니라 사회구조를 계승한 국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서주시대의 봉건제, 종법제, 읍제국가체제는 이미 은나라 말기에 있었고, 서주는 은말체제를 계승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유교주의자들이 서주를 위대하게 보는 것을 깔아내리려는 신문화운동기 학자들의 의도가 어느 정도 내포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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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