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이야기 (NO.5)

한국사에서 원시시대란 무엇일까?

- 시대구분 이야기 -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의 시대구분 이야기를 달려볼꺼야.  자, 그럼 역사학자들이 우리 역사에서 원시, 고대, 중세와 같은 시대를 어떻게 나눠놓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이번 시간에는 <원시 시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그런데, <원시>라는 말을 하려고 하니깐, 비슷한 말들이 많이 있네? 뭐, <선사시대>, <석기시대> 이런 말들도 있는데, 이런 용어들은 <원시시대>와 같은 뜻일까? 다른 뜻일까?

그럼 그럼 이 3개의 용어를 구분하기 위해 먼저 <원시시대>가 무슨 말인지부터 알아보자.

원시시대란,  <고대>보다도 더 이른 시기를 통털어 말하는 거야. 서양에서는 <국가>가 성립된 그리스, 로마제국과 같은 시기를 <고대 시대>라고 불러. 그럼 반대로 국가도 없었던 더 원시적인 시대를 부르는 말이 있어야겠지? 그래서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원시시대>라는 말을 끼워넣기 한거야.

그럼 원시시대란 말은 언제쓸까? 당연히 <고대시대>라는 말에 뒤따라 오는 패키지 세트 용어인거야. 원시-고대-중세-근대.... 이런 일반적인 시대구분상 맨 앞에 따라오는 시대가 바로 <원시>인 거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국가라는 체계없이 공동체 생활을 하던 시대를 서양애들이 <원시>라고 구분한거야. 근데, 서양학자들은 <원시> 시대의 사람들이 무리지어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원시 공동체 사회>라고도 부르기도 해. 국가나 법이라는 것이 없던 시기에 인류가 기초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모여 살던 시대라는 걸 강조하려고 쓰는 말인거지.

지난 시간에 배운 마르크스의 시대구분 기억나지? <원시> 사회에서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지배자도, 노예도 없었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였어.

함께 생존하기 위해 먹을 것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했겠지.  그러다보니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한 부족(씨족)들도 있었을거구...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어려운 말로 <점유>라고 불러. 마르크스는 모두가 평등하게 생산하고 분배한다고 해서 원시 사회를 <원시 공산제 사회>라고 불렀어.

정리하자면, <원시>란 말은 시대 구분할 때 쓰는 말이야. 즉, <고대>보다 앞서는 시대로 씨족이나 부족들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시대를 말하는거지.

이번에는 선사시대라는 말을 알아보자. 선사시대라는 말의 뜻은 쉬워. <역사시대>의 반대말이거든.

우리가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은 모두 <역사>에 대한 이야기잖아.  그럼 역사란 단어는 무슨 뜻을 가진 단어일까? <역사(歷史)>란, 시간을 보내다, 전달한다라는 뜻의 歷이라는 단어와 기록된 문서라는 뜻의 史 라는 단어의 합성어야.

자, 합쳐봅세다~ <역사>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기록한다는 뜻이겠네. 

그럼 반대로, <선사(先史)>란, 역사(史)보다 이른 시기(先)를 말하는 거야. 先자는 <먼저>라는 뜻이잖아. 즉, 역사를 기록하기 전의 <문자>가 없는 시기를 선사라고 말하는거지.

만약, 어떤 시대이든지 과거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 시대는 선사 시대라고 부르면 되는거야.

예를 들어, 우리 민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 한나라 때 사람인 사마천이 지은 <사기 - 조선열전>에 나오거든. 그 책은 기원전 2세기에 쓴 책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선사시대는 <사기>에 적힌 내용보다 더 옛날인 <기록이 없는 시대>를 말한다고 보면 되겠네. 반대로, <사기>라는 책 이후의 시대는 <역사> 시대가 되는 것이지.

그런데 생각해봐봐.

사마천이 <사기>라는 역사책을 쓰기 이전에도 우리 민족이 세운 <고조선>은 존재했고, 그 이후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삼국시대도 있었잖아. 만약, 고조선과 삼국시대의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면, 그 시대는 <선사시대>라고 불러야 할 거야.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등등의 국가는 이미 강력한 국가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는 아니잖아. 그럼, 그 시대는 <고대시대>라고 불러야 맞을 거야.

결론은 이거야. 문자가 있냐 없냐를 따지는 <선사시대>라는 용어와, 시대구분상 공동체 사회였느냐, 국가 사회였으냐를 따지는 <원시시대>라는 용어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거지.

자, 이제 다음으로 <석기시대>라는 용어를 살펴보자.

<석기시대>라는 용어는 역사에서 쓰는 용어가 아니라, <고고학>에서 쓰는 용어야. 고고학자들은 유물들도 발굴하잖아. 일단 석기(石器)라는 말 자체가, <돌 기구>라는 뜻이니깐, 돌을 사용하던 시대의 유물을 발견하는 거지.

즉, 석기시대는 돌을 사용했는지, 다른 금속을 사용했는지를 따져서 시기를 구분하는 용어인거야. 한마디로, <도구 사용>에 따른 시대 구분 용어인거지.

자, 그럼 돌을 사용한 시대들을 한번 보자. 돌을 이용한 시기는 원시적인 돌을 사용했다는 뜻으로 <구석기 시대>가 있어.  좀, 돌을 깔끔하게 갈아서 효율적으로 이용한 시기는 <신석기 시대>라고 부르지.

그런데, 돌을 도구로 사용한 이 시기에 서양에서는 국가가 성립되지 않았어.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석기시대는 <원시시대>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곤 하지.

하지만, 금속을 사용한 <청동기 시대>가 되면, 부족간의 전쟁이 많아지기 시작하지. 전쟁을 통해 이긴 자들은 지배계급이 되고, 패한 자들은 노예가 되는 거야. 그럼 계급이 생기겠지? 계급이 생기면서 지배계급은 점령한 피지배계급을 노예로 삼기 시작했어. 그리고 피지배계급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국가>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한거지. 그래서인지, 서양학자들은 청동기 시대 이후가 되야 <국가>가 생기고 <고대 사회>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 서양학자들의 연구를 이유로 해서, 우리 역사학자들도 청동기 때 성립한 국가인 <고조선> 시기가 <고대>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지. 그리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해. 

하지만, 우리 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이 고대라는 걸 인정하기 않고 있어. 확실하고 강력한 국가 체계가 이루어진 시기가 <삼국 시대>이기 때문에, 법이나 종교, 왕권이라는 개념이 확실한 <삼국시대>를 고대로 파악하고 있는거지. 한마디로, 교과서는 <삼국시대>부터를 고대로 보고 있고, 최근 학자들은 <고조선> 시대부터를 고대로 보기 시작했다.... 이거지 뭐.

그렇다고, <석기시대가 반드시~ 원시시대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신석기 시대에서도 문화가 발달하고 생산력이 높아지면 국가와 계급이 발생할 수도 있잖아.  그렇게 되면 석기시대인데도 <고대시대>인 국가가 있을 수 있어. 고대 아메리카의 잉카나 마야 문명은, 신석기 시대였지만 찬란한 <고대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거든.

자, 이렇게 지금까지 <원시시대, 선사시대, 석기시대>라는 용어를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았어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 역사에서는 언제까지가 원시시대이고, 언제부터 고대시대로 봐야할지... 그럼 다음 장에서는 원시와 고대를 구분하는 이야기를 해보는거야....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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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따라잡기 1 - 원시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개정판)
국내도서>아동
저자 : 송은명 엮음
출판 : 바른사 200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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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문 1 - 원시시대
국내도서>아동
저자 : 역사신문편집위원회
출판 : 사계절 199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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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렇구나 우리역사 1 - 원시시대
국내도서>아동
저자 : 송호정
출판 : 여유당 200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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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1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강종훈,송호정,윤선태,임기환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2011.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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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마당 1
국내도서>아동
저자 : 김찬곤
출판 : 웅진주니어 201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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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1 - 원시시대에서 통일신라까지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역사문제연구소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200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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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 - 고조선,삼국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강봉룡,서의식
출판 : 도서출판솔 200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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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5)

왜, 교과서는 무적이 되야 하는 것일까?

1. 교과서의 절대성

오늘은 21세기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으로 <교육>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많은 교사들이 포스트모던의 철학으로 <역사 교육>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국 사회의 현실 때문이다. 입시를 위한 역사 교육이 우선시 되어야 하며, 입시에 강한 역사 교사가 우대받는 공교육에서 어떻게 <교과서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포스트모던의 역사 철학은 공교육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7차 한국사, 세계사 교과서의 첫 시작은 <역사란 무엇인가?>로 출발한다. 역사를 공부하면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을 쌓게 되며, 과거를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이 과거를 바라보는 눈을 흔히 <역사적 사고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한단원을 지난 후에는 교과서에서 <역사적 사고력>은 변질된다. 단순한 사료들을 나열해놓고, 그 사료들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지만, 해답은 교과서가 원하는 정해진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 정답이 곧 수능에서의 답이 된다.

교과서의 어투는 전혀 <사고력>를 키울 수 없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교과서는 <A는 B라는 계층이 주도해서 C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과거의 사건이다>는 식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미 정해진 문장에 답이 있는데, 더 이상 무슨 해답을 찾아내란 말인가?

한국의 공교육에서 교과서는 절대 불변의 진리이다. 그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결과물을 쉬운 표현으로 압축해서 적어놓은 것이며, 학생들은 그것을 비판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교사들은 교과서를 더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으며, 역사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제시하여 학생들을 <이해>시킨다.

결국, 학생들은 역사 수업을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교과서를 읽고 나면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 중에서 역사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간추려놓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진리>이다. 역사가들은 대중을 위해 헌신적으로 <역사적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교과서는 철저히 중립적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를 적은 이가 누구인지를 전혀 밝히지 않는다. 교과서는 가장 객관적인 말투로만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비판할 수도 없지만, 비판하고 싶어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알고, 과거의 중요한 사실들을 알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걸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부터 읽히는 공교육 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모던으로 역사를 읽는 법이 필요한 것이다. 

2. 지식의 독점

교과서의 절대성에 대한 근거는 너무나 빈약하다. 역사를 기술하는 전문가 집단의 연구 성과를 검증한 것은 그들 스스로의 <학회>일 뿐이며, 그들의 주장 역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7차 국사 교과서를 보자. 신라의 중앙집권은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쓴 내물왕때 시작되어, 점차 왕권이 강화되어 간다고 말한다. 고구려의 중앙집권은 태조왕때 시작되었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중앙집권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의 어느 역사책에 그런 말이 나오는가? <중앙집권>이란 말 자체가 편의상 역사를 규정하는 <연구가>들의 분류일 뿐이다. 각국의 역사는 독특힌 발전과정을 겪었다. 신라의 통일 얼마전 까지도 가야가 존재했지만, 누구도 4국시대라는 말을 쓰지 않고 3국의 통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다고 기술하면서도, 삼국통일이 자주적인 것이었다는 주장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모순을 남기기도 한다.

조선시대를 이끌어간 노론 지배층은 교과서에서 상당히 아름답게 기술되어 있다.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강조되어 있지만, 왕조 실록이나 관찬 사서에 그런 기록은 없다. 송시열이 청나라 정벌을 위해 북벌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송시열은 실제로 내치주의(국내 안정)를 주장했다.

교과서는 실학의 주체로 <서울 근기에 사는 노론 자제>들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실학의 주요 인물이라고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서얼을 포함한 정조의 규장각 출신들, 강화학파의 인물들, 성호학파의 인물들이다.  집권 노론파 자제는 어디에 있는가?

조선말 노론의 지배층이었던 역사가들은 일제 시대를 거쳐 한국 사회의 명성있는 교수님들이 되신 분들도 많다. 그 분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연구 성과를 우리가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포스트모던 역사 교육은 <과거의 지식에 대한 독점>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식의 독점을 비판하는 학문을 지식사회학이라고 한다.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자들이 누구인가?>이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고, 과거에 대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과거의 기록들을 확보한 뒤, 그 과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합리적인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사건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개개인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0개의 과거를 10명이 학습한다면, 100개의 과거가 창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를 독점한 자>들은 단 1개의 역사만을 진리인 양 포장한 뒤 나머지 과거들은 <근거없는 논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 결과물이 교과서일 따름이다.

예를 들어보자.

모나리자의 그림이 있다. <다빈치>가 어떤 의도로 모나리자를 그린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한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미소의 각도와 색감, 원근법 등을 차례로 감상한다. 10명이 감상했다면, 그들은 각기 다른 감상평을 내 놓고, 그림을 평가할 것이다. 어떻게 모나리자에 단 하나의 감상평만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사건에 대한 다양한 사료들을 교과서에 던져 놓고서도, 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첫째, 둘째, 셋째로 규정되어 있다. 삼국통일의 의의는 공부한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것인데도, 왜 3가지 납득할 수 없는 정의만이 <진리>로 규정되야 하는가?

   삼국통일은 당나라의 도움을 받은 후 당나라를 몰아내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통일이다 라는 것만이 진리인 양 규정해 놓고, 발해의 건국으로 실제로는 남북국시대였다는 기술은 또 무엇인가?

포스트모던은 역사가의 <상상>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를 따지게 된다. 그 결과, 역사를 규정해 놓은 지배집단에 대한 비판이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다.

3. 다양성에 대한 <교육>

포스트모던이 추구하는 역사는 <교실 구조>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교사가 교과서의 내용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교실은 교사의 귄위에 의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교사는 아이들보다 높은 지적 귄위로 학생들을 압박한다.

역사가들은 스스로의 이론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수많은 학회 토론을 통해 <논리적인 헛점>을 최대한 줄인 내용들을 교과서에 적어 두었다. 그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언어들을 교사가 설명할 때, 아이들은 교사의 설명 내용이 좀 이상하긴 해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교사가 아이들의 사고력을 끌어낸다면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고 해도, 결국 교사가 원하는 것은 <교과서>와 입시에 합당한 정답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사고력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교사는 역사를 만든 지배집단의 충실한 대변인이 된다. 역사가들의 이론을 가장 쉽고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기능인이 역사 교사일 수 밖에 없다.

역사교사는 교과서의 역사 구조에 종속되어 있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고 규정한 서양의 시대 구분법이 아직도 교과서의 시대 구분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한국의 교사는 다른 대안으로 시대구분을 할 수가 없다. 그리스 신화는 청소년 필독도서이지만, 단군 신화를 다르게 해석한 책들은 있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상호 토론이 가능한 웹 2.0 공간에서는 저마다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마음 껏 써내려가지만, 교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입시에 필요한 역사적 지식만을 강제로 주입받는다. 웹 공간에서의 주장이 교실에서의 질문으로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사극을 보면서 수백개씩 글을 쓰고, 댓글을 달면서 토론하던 그 학생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경직된 교실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교육의 목적 안에 <역사의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인식시켜주면서 교사 자체가 권위를 버리고, 학생들의 다양한 사고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과거를 연구한 누군가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규정>해놓은 것이며, 새로운 발견이 있거나, 새롭게 사고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15세기 서유럽의 <대항해시대>를 몇몇 원인으로 규정한다.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의 고립감, 왕자들의 모험심, 향료 무역을 통한 차액 증가, 나침반의 유입 등등...

   그러나 우리 교과서와 달리 서양의 학자들은 이런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당시 흑사병 이후 유럽의 경제난이 심각했으며, 서양 사람들에게 꼭 필요했던 대구, 참치, 고래 등 먹거리를 찾아 좀더 먼 바다로 나가다 보니 항해술이 발달한 것 뿐이라고.... 물고기들의 대륙간 이동경로가 항해 경로와 일치한 것이라고...

우리는 나폴레옹이 키가 작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폴레옹의 주적이었던 영국의 길이 단위는 프랑스와 달랐고, 영국이 의도적으로 자국의 단위를 활용하여 나폴레옹을 키작은 못난이로 만든 거라고...

역사적 사건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사건의 원인과 결과는 단순히 하나일 수 없다. 수많은 원인 중에 중요한 원인과 덜 중요한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중요도를 판단하는 것은 그 텍스트를 보게 된 개개인의 몫이다. 교과서가 하나의 원인으로 규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 방침은 자유교육을 실시하는 외국의 여러 학교들에서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감히 이러한 교육을 실시할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현실이다.

4. 교과서를 전면 부정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으로 역사 교육을 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교과서>를 부정한다고 했을 때, 어떤 역사적 사실을 가르칠 것인가이다. 사실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역사적 진리>를 부정한 채 교육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으로 역사교육을 한다고 해서 <교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에게 <진리란 상대적>인 것이며, 과거에 대한 <절대적 사실>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절대적 사실을 진리로 적어놓은 교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교과서는 가장 좋은 <역사 교재>가 될 수 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역사에 있어 권력집단의 속성이나,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교과서>를 통해 이야기해 줄 수 있다.

<교과서>에는 이렇게 씌여있지만, 이것과 다른 견해와 해석이 있다는 점을 주지시켜준다면, 교과서의 내용으로 교육을 전개하면서도 <역사적 다양성>을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공교육에서 이런 행동을 하면 좌파라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만...)

입시교육에서 자유로운 대안적 교육을 추구하는 학교라면, 외국에서와 같은 포스트모던적 역사 교육이 가능할 수도 있다.

수업의 첫 단추는 <역사는 누구나 만들어 갈 수 있는 다양성을 내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고대사 부분에서 여러 사료 등을 통해 다양한 해석을 추구하면서 <역사를 사고>하는 교육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고대사에서 신화나 설화는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이다.

우리는 선덕여왕을 보면서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라고 생각하면서 보게 된다. 극적 긴장감이나 탄탄한 스토리 전개를 위해 역사적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작가의 의도대로 줄거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관점이라면 실제 역사에서도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 고대사에 남겨진 단편적인 기록으로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전개하거나, 있을 법한 (개연성 있는) 재연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른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때, 비판적 읽기나 사료를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도 있다. (물론 선덕여왕의 미실궁주처럼 현대어를 쓰고, 21세기 인물의 성격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포스트모던적 교육이 기존의 모든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기록에 남겨진 역사적 사실들을 참고하여 그 시대상과 당시 인물들의 모습을 재창조하는 것이지, 모든 기록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단지, 포스트모던적으로 역사를 본다는 것은 그 과거 기록조차도 누군가의 의도 또는 목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재해석해야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특히, 일제시대 이래 현대사는 특정 역사관과 사관을 가진 이들이 사학계를 주름잡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는 <역사적 진리>을 만들어 왔고, 일제시대부터 특정 이념으로 살아온 이들은 그 이념에 맞게 <역사적 진리>을 구성해왔다.

현대사에서 포스트모던의 역사 교육은, 역사를 지배하고 기술한 이들의 목적과 방법, 내용까지를 비판하면서, 역사적 대상이 된 과거인의 입장과 역사를 서술하는 현대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역사를 비판해야 한다.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공교육에서도 현대사 부분은 조심스럽게 간략히 원론적인 부분만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첨예하게 대립된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으로 비판하는 역사 교육은 그런 부분들에 과감히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에 공교육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만약, 포스트모던적 역사 교육이 다른 외부적인 요인을 받지 않고 이루어진다면, 가장 좋은 교육 방안은 <교과서 창조>일 것이다.

먼저, 포스트모던적 이념을 가진 교사가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하나의 <교재>를 만들고, 다양한 역사적 내용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비판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해준다.

학생들은 간단한 사료, 토론, 현장학습, 비디오 시청, 독서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재의 내용을 이해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를 직접 작성해고, 서로 토론한 뒤 그 내용으로 <교과서>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교과서>를 만들어보는 과정으로 역사적 지식의 생성과정을 알고, 스스로 역사적 지식과 흐름을 창조하는 것이다.

단,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수업은 고대사부터 현대사를 일관적인 논리 구조로 풀어 설명하는 통사 수업에는 미흡할 수 있다. 따라서 각 시대별, 주제별로 책정된 수업들을 전체적인 흐름으로 연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글은 가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이 가능한 학교가 있다면 한번쯤 해보고 싶은 교육 방침이기도 하다. 물론 이론과 같지도 않을 것이도, 실패하고 고치고 할 부분도 많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오늘 글은 포스트모던에 관련된 글들 중에서 가장 난잡한 글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문학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는 포스트모던의 역사 코드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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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불교와 도교의 한판 승부...

1. 이민족 왕조에 뿌리내린 도교

자, 이제 불교의 수준은 <도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구마라집이 불경을 번역한 이후, 불교는 진정한 불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도교의 이론을 빌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불교 이론의 다양한 연구는 다양한 학파가 형성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각, 학파들은 도교 이론을 부정하고, 대승 불교 고유의 <공>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도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도교 역시 혼란기를 이용하여 확실한 <도가 이론>을 확립하여,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이끌어갈 사상으로 성장했다.

<도교의 시존 - 노자>

<도교의 선구자 - 갈홍>

원래 도교는 춘추전국시대 <노장사상>에서 기원한다. 당시에는 여러 제가 백가 중에 하나로서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학파>였기 때문에 <도학>, <도가> 등으로 말할 수 있겠다. <도학>은 노자의 <도덕경> 사상을 바탕으로 장자의 현실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 도가가 도교로 변한 것은 언제일까? 불교의 <학파>가 성립되는 위진남북조 시대와 일치한다.

동진시대 갈홍이 <도교>의 선구자이다. 갈홍은 <포박자>를 저술하여 도교 발전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원래 학문적 성격이 강한 <도가>에 신선술과 민간 종교를 모두 종합하여 <도교>를 성립시킨 것이다.

일단,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자연 속에서 영생을 누리는 <신선>이라는 존재를 종교 안에 포함시켰다. 신선은 노장 사상을 이해하여 속세를 해탈한 귀인으로 표현된다. 또, 신선은 죽지 않고 천수(1000살)를 누린다는 <불로장생> 사상을 포함시켰다. 이렇게 대충 이론이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도교는 부적이나 신비술이 가능하다는 <신선술>을 강조함으로서 혼란기 현실에서 고뇌하는 백성들을 포섭하였다. 후한부터 시작된 중국의 혼란기에 많은 민란이 있었다. 대표적인 민란인 한나라 오두미교는 <도교> 조직의 모델이었다.

가난한 백성들도 곡식 5두를 내면 가입이 가능한 <오두미교>는 후한 시기 장각의 태평도로 발전하였다. 이 오두미교를 <천사도>라고 불렀는데, 북위 시대 구겸지가 이것을 <신천사도>로 개편하여 혼란기 중국 북부지방의 조직단체로 개편한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를 통일했던 북위는 도교를 국교로 숭배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등장한 여러 이민족 왕조들이 중국 고유의 사상인 <유교>를 배척하기 위해 도교를 활용하는 정책을 사용하면서 도교의 교단이 강화된 것이다.

도교를 국가 종교로 만든 사람은 북위의 구겸지였다. 불교가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여 <내세에서의 행복한 윤회>, <해탈>, <인과응보>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모은 것처럼 도교 역시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였다.

혼란한 시대를 피해 숨어 버린 한족들도 도교에서 주장하는 <무위자연>을 받아들였다. 특히, 죽림칠현 등 당대 사상가들은 유교의 형식주의가 무질서한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난세에 인간의 인격은 존중되지 않는다. 이민족들의 세상에 현실은 너무 암담하다. 역사 속을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이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신선을 동경하게 된다. 신비로운 자연에서 살아가는 고고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백성들 역시 현실을 탈피한 이상적 존재를 그리워하게 된다. 부처이든 노자이든, 이 암울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 없지 않는가?

<신선의 뜻을 품은 도가인들 - 풍속화>

이민족의 왕들도 도교를 장려하였다. 북위의 구겸지는 유학과 다른 원리로 <도교>원리를 제시하였다. 중국의 황제가 <천명>을 받들어 즉위하는 것은 유교 방식이다. 고럼, 이민족인 북위의 왕은 <천명>이 없는가?

천명은 <도교>에서 찾으면 된다. 황제가 즉위할 때 하늘에 계신 지고지순한 신선인 <노자>가 축복해준다. 천상노군(노자)는 중국인의 아버지로서 중국의 천하를 이민족이 다스려도 된다는 것을 인정해준다. 이민족들을 <오랑캐>로 여기는 전통 유교 원리와 다르게, 도교는 중국을 다스리는 원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에서는 유교가 도교에 밀려 버렸다. 그럼 남은 것은 불교 뿐이다. 한참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두 종교는 이제 종교 천하통일을 놓고 한판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도교 사원의 천존상>

2. 패자의 자리를 내준 유가

한나라 시기 국학으로 인정되던 유가는 혼란기에 힘을 잃었다. 전쟁이 지속된 어느 순간부터 모든 학문분야에서 유학은 제왕의 위치를 잃어간다.

삼국시대 초기 위나라의 조조는 유학을 벗어난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진수의 <삼국지> 같은 작품이 등장하면서 역사학이 유학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불상들이 조각되고, 미술과 회화 분야도 유학의 입지가 사라졌다. 천문분야는 도교로 넘어갔으며, 자연과학분야은 수학과 의학 등에게 밀리게 되었다.

모든 학문분야를 총괄하던 유학은 노장사상, 문학, 역사학과 대등한 위치로 전락하였다. 이 4가지를 위진남북조 4학이라고 하며, 불교학을 포함하면 5학이라고도 한다.

정치 원리에서 밀린 유학은 도교 세력에게 참패를 당했다. 특히, 북조에서 도교를 국교화하면서 유교적 통치원리까지 무너진 것이다. 유학은 도교를 미신이라고 몰아세웠지만 이미 힘이 없었다.

유학은 불교도 끊임없이 비판한다. 특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충, 효를 강조하는 유학과 상극이다. 어찌 국왕과 부모를 버리고 속세를 떠난다는 것인가? 유학자가 보기에 불교는 인륜을 무너뜨린 오랑캐의 종교였다. 그러나, 그 비판도 힘이 없었다. 불교 자체가 국왕을 보호한다는 <호국>의 이념을 가진 시기이기에 유학자들의 비판은 공허한 것이었다.

또, 죽으면 내세로 향한다는 원리도 유교의 현실주의와 상극이었다. 현실 정치와 현실에서의 충효를 중요하게 여기며, 내세를 논의조차 하지 않는 유교 입장에서는 불교가 눈에 가시였다. 내세를 위해, 해탈같은 비현실적인 작업을 위해 어마어마한 불교 사원을 짓는 것은 얼마나 돈과 시간의 낭비인가? 유교주의자들 눈으로 볼 때, 불교 사원을 짓고 부처가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은 <덕치주의, 민본주의>와 상관없는 미친 왕의 행동인 것이다. 고대 하, 은 나라가 망할 때 얼마나 큰 사치가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이 있었는가?

내세문제는 불교와 유학의 <정신불멸론> 논쟁으로 격화되었다. 유교에서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고,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죽기 때문에 내세란 없다고 말한다. 육체가 칼이라면 정신은 칼이 날카로운지, 무딘지를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칼이 부러지면, 칼이 날카로운지는 의미가 없어지며, 칼은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죽은 뒤 분리된다고 말한다. 정신은 육체와 다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육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정신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윤회를 통한 내세, 해탈은 현생을 사는 궁극적 이유가 된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의 유학은 비판 이상의 현실적 조치가 없었다. 이미 불교세력에게 큰 소리를 칠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유학이 불교를 누르기 위해서는 수백년이란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남북조 시대의 라이벌은 도교와 불교 뿐이었던 것이다. <정신불멸론> 논쟁에서 유학이 승리하기 위한 기다림은 남북조와 수, 당 나라를 넘어 송나라에 이르는 긴 시간이었다. 국가는 철학으로서 유학의 힘을 아직 인정했지만, 지배층들은 이미 불교나 도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3. 1라운드 - 도교와 유교의 연합작전(1차 폐불사건, 466)

이제 본격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쌈박질 라운드에 돌입해보자. 이 두 종교가 마찰을 빚기 시작한 것은, 격의 불교를 뛰어넘어 불교가 도교에서 분리되던 4세기 부터이다. 그 핵심은 부처와 노자 중 누가 우위에 있으냐는 지극히 원시적인 논쟁이었다.

먼저 도교의 도사들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초기 청담사상가들은 유교, 도교, 불교의 성인들은 모두 <도>를 체득한 사람이므로 근본적으로 같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시작한 논쟁은 <노자가 곧 부처다>라는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노자는 <도덕경>을 쓰고 <신선>이 되었다. 그런데, 노자는 신선이 되기 전에 인도가 가서 큰 깨달음을 얻었고,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인>이 인도인을 교화한 것이며, <불교>의 근원은 <노자>라는 것이다. 노자와 부처 중 누가 먼저이냐를 <선후논쟁>이라고 말해두자.

불교와 도교라는 2가지 종교를 동시에 인정하여, <유학>을 대신하여 활용하려고 했던 이민족의 <북위> 왕조는 남북조 시기 내내 이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문제는 북위의 왕들이 불교와 도교라는 종교적 입장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어느 종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가, 또 정권을 잡은 귀족들이 어느 종교를 신봉하는가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남북조 시대 - 북위와 남조의 송>

그 첫 번째 대결은 북위 <태무제> 때였다.

당시 남북조 시대는 이민족 왕조인 <북위>가 중국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중국 왕조들이 정권을 바꿔가면서 대륙 남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위 태무제 때의 재상 최호는 <중국인>이었다. 북위는 <선비족>들이 세운 왕조였지만, 전통 한족들을 어느 정도 우대하면서 마찰없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족 관리들은 <유학>을 신봉하였다. 그가 원한 것은 선비족들도 전통 사상인 <유학>을 받아들여 <유교적 덕치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호는 도교의 창시자 구겸지와 결탁하여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유교와 도교가 연합하여 불교세력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전혀 성격이 다른 유교와 도교는 불교라는 적 때문에 동맹을 맺은 것이다. 결국 북위 태무제 때 국가에서 불교를 막아 버리는 폐불사건(불교금지령)이 발생한 것이다.

1차 폐불사건으로 불교는 위축되었지만,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유학자인 최호가 <국사필화사건>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최호 등 한족들이 편찬한 <국사>는 북위의 창업과정부터 모든 내용들을 적어두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적어두는 <훈고학적 유교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사에는 북위 지배층들의 잘못과 치부까지 그대로 적혀있었다. 이것은 북위라는 선비족 국가에서 한족과 선비족 중 누가 우월한가라는 논쟁을 불러왔다. 이 대립은 최호 등 한족 관리들이 주살되어 끝나게 된다. 즉, 한족 귀족들보다 선비족과 선비족의 왕이 더 우월함을 보여준 것이다.

구겸지의 도교 창시로 도교가 <국교화>되고 불교는 위기를 맞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불교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4. 2라운드 - 도교와 불교의 선후논쟁(520)

1차 폐불 이후, 불교는 다시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다. 북위에서 한화정책으로 유명한 <효문제> 당시를 보면 더 뚜렷해진다. 효문제 스스로가 중국인들의 왕이라 칭하면서 중국식으로 모든 제도를 고치고, 선비족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유학의 이론을 공부하면서도 도교와 불교 문화를 더 장려하였다.

도교의 제단이 곳곳에 생겼다. 국왕이 불교문화를 장려하여 용문의 석굴사원이 건설되었다. 두 종교는 치열하게 교세 확장과 함께 이론적 논쟁을 다시 시작했다.

520년 두 종교는 또 다시 <선후문제>로 국왕 앞에서 직접 논쟁을 벌였다. 종교간의 논쟁이 아닌 국왕 앞에서의 논쟁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국왕이 손 들어 주는 쪽이 우월한 종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도교 도사인 강빈은 노자가 부처를 제자로 삼아 교화했다고 주장했다. 승려인 담무외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두 명이 모두 자신의 주장을 위해 자료를 위조했다는 점이다. 강빈과 담무외는 각각 노자와 부처의 기록을 위조해 효명제 앞에 자신들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효명제는 강빈의 자료가 위조되었다는 것에 분노홰 강빈을 유배보내 버렸다.

이 논쟁으로 불교가 도교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논리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국왕의 판단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도사들은 기회만 닿으면 불교에 흠집을 내려고 했다.

5. 3라운드 - 도교의 반발(2차 폐불사건, 574)

568년, 북주 무제기에 다시 <선후논쟁>이 불붙는다. 그러나, 이 때의 국왕은 단순히 불교 편을 들지 않았다. 유교와 도교가 침체되자 승려의 숫자가 증가했고, 이것은 국가적으로 낭비였다. 승려는 일하지 않는 자, 세금을 내지 않는 자였다. 또, 사원이 많아지는 것도 국가 운영비에 타격을 주었다. 종종 승려들이 세력화하여 횡포를 부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도사들은 다시 <부처는 노자의 제자>라고 주장한다. 도사인 위원숭과 장빈은 종교의 순위를 정하였다. 한족의 지침인 유학이 1위, 도교는 2위, 노자의 제자인 부처가 3위가 된 것이다.

당시 종교계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는 반발하였고, 황제에게 부당함을 건의하였다. 사회적으로 세력화한 불교를 규제하려고 한 무제는 도사들의 말을 받아들여 불교를 폐불시켰다. 그러나, 도사들도 제 발을 밟았다고 해야 할까? 도교 역시 사회적으로 무시 못할 종교 세력으로 왕권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무제는 불교를 폐지시킨 후, 도교마저 폐지시킨다.

불교와 도교를 막론하고, 종교인들을 일하지 않고 논쟁을 하는 자들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철학으로서 유학만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당시 뿌리를 깊게 내린 종교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무제가 죽은 뒤 불교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6.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가 걸어간 길...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를 정의하자면, <전파된 불교에서 독자적 불교로 나아간 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처음에는 불법의 뜻도 몰라서 노장사상의 이론에서 불법의 뜻을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구마라집 등이 인도 불경을 해석하고, 도안과 혜원 등이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법현이 인도에 구법여행을 떠나는 등 승려들의 노력으로 불교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학파들이 생겨나 불교 이론이 논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불교는 <호국불교>였다. 위진남북조라는 유례없는 혼란기에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왕권>과의 결탁이 필요했다. 국왕의 보호로 불교는 성장하였다. 그러나, <호국불교>는 양면의 칼이었다. 국왕이 불교를 버릴 때, 불교는 대책없이 탄압당했다. 또한, 왕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교는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에 부족하였다.

여러차례의 폐불을 겪은 불교가 택한 선택은 무엇일까? 점차,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북위> 정권과 밀착했던 북조 불교는 그런 점을 뼈져리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국가 정권의 영향력을 적게 받았던 한족 정권의 <남조 불교>는 큰 탄압이 없었다. 불교가 귀족의 보호를 받았지만, 국가 이념에 정면으로 대항한 적도 없었다. 될 수 있으면 독립적인 종파를 만들어 <이론>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남조 불교>는 북쪽과 달리 <도교> 영향력이 적었다는 것이다. 구겸지가 창안한 <도교>는 북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 도교와 피터지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점점 <거대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한다. 정토종, 삼론종, 천태종, 율종, 선종은 5대 종파로 성장하였고, 담란의 정토종은 민중 사회로 스며들었다.

민중 사회에서는 읍사가 생겼다. 원래 읍은 북조, 사는 남조의 용어로 <불교를 믿는 마을 단체>를 말한다. 후대에는 합쳐서 읍사로 표현한다. 마을 단위로 불교 단체가 생기고 불상을 만들었으며, 스님들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크리스트교와 같은 교구제로 운영하지 않았다. 행정구역과 종교구역을 일원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의 행정구역과 실제 마을민들이 느끼는 공동체 단위가 일치하지 않았고, 오랜 전쟁으로 임의로 구성된 공동체가 많았던 점도 있다. 또, 불교단체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한다고 해도 그것과 행정구역은 별도였다. 불교 사원 자체가 수양과 깨달음을 위해 마을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도 교구제가 성립할 수 없었던 원인이었다.

길었던 분열의 시대는 끝이 났다. 수나라에 의해 중국 대륙이 통일된 것이다. 이제 통일된 시기의 불교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수, 당 시대에도 불교와 도교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몇몇 인물들로 파악해 보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처음 만나는 불경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장호 (심포지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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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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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사 2:수용기의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카마타 시게오 (장승,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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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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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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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전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용하 (불천,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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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양으로 읽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화령 (민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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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양입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박영옥 (경덕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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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개정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가와이 하야오 (동아시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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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6화. 격의 불교 이야기...

1. 중국 불교는 청담에서 비롯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중국 불교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후한 시대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과 외교정책으로 대승 불교가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에서의 불교는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나라는 가장 전통적인 중국 왕조이다. 중국 민족은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중국 전통 문화의 원류는 <한나라>에서 기반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가장 전통적인 <유학>도 한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고, <한자>의 정형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불교가 한나라에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외국 철학의 일종일 뿐이었다. 지배층이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뿐, 중국 지식인들은 관리 임용을 위해 <유학>을 익혔다.

그럼,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후한이 멸망할 무렵부터이다. 중국 후한시대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원소, 조조 등 호족세력들이 판치는 무법천하였다. 백성들은 길고 긴 전쟁의 시대로 막 들어선 것이다.

위, 촉, 오의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의 분열까지 길고 긴 분열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시기가 되기에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유학>은 왕따당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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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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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국가 먹이사슬>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이 찾는 종교는 <내세>라던가 <자연>을 강조하는 종교였다. 사람들은 유학이 아닌, 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나라가 망한 뒤, 실권을 잡은 것은 삼국 중 조조의 <위>나라였다. 위 나라는 강력한 법치주의에 의해 국가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정치가가 아닌 일반 학자, 사상가들은 <도교>에서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도교는 혼란의 원인을 <인간의 욕심>으로 보았다.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탐욕자들이 싸우고 죽이는 탓에 백성들만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위나라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의 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노자, 장자 등의 철학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현학>이라고 한다.

<현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를 <현>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현학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현학은 하안(190-249), 왕필(226-249)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안과 왕필 등의 사상가들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점이 무언가를 따지려고 했는데, 이런 대화를 <청담>이라고 한다. <청담>이란 말 그대로 <깨끗한 세계의 담론>이란 뜻이다. 위나라에서 시작된 이들의 <대화>를 역사에서는 <정음시대의 현학>이라고 부른다.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럼 이들의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도학에 나오는 사상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는 것이었다. 도학의 문구들은 너무나 심오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서양 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양 최고의 학술서이다. 노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 국가는 작을수록 좋다라는 <소국과민>, 가장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의 삶이라는 <자연합치> 등을 주장하였다.

노자의 사상에 맞춰서 모든 사상을 재해석하는 것이 <현학>이다. 유교사상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후한이 망한 뒤의 세상은 무법 천지이다. 인간 윤리는 이제 <전쟁없는 사회>라는 틀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청담 사상가들은 현실의 윤리보다는 <전쟁>의 참혹함, 사후세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내세에 대한 상상, 삶과 죽음과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한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던 청담 사상가들은 <전쟁>에 골몰하는 국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현실과 떨어져 중국 전통 윤리를 비관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청담 사상가들은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노자의 세계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어떤 철학을 찾았을까?

불교에 그 답이 있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내세에 대한 윤회와 열반 사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 사상을 강조하여 <허무주의>를 보여주면서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혼란한 시기에 딱 맞다. 얼마나 맞춤형 철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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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국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 질려있었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 서진시대, 5호 16국의 이민족 시대, 남북조의 분열시대.... 길고 긴 전쟁의 역사는 훗날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세울 무렵에야 끝나는 것이다.

이 불안한 시기에 불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인간은 죽은 뒤 자신의 업보에 의해 <윤회>를 하게 된다. 지금 현상에서의 고난은 전생에서의 죄를 씻는 과정이다. 그 업이 끝나고 현생에 덕을 쌓으면 내세에는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 (업설) 지금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많은 죄를 지은 것이고 생이 끝나면 죄를 받을 것이다.(인과응보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얼마나 딱 맞춤인 철학인가?

그렇다고 지배층과 국가가 불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일가의 시대가 끝난 뒤 중국은 5호 16국이라는 이민족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민족의 왕들은 <유학>에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불교>가 이민족 취향에는 딱 맞았다.

이민족 왕들은 불교를 주술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흉년이 들면 승려가 주술을 펼쳐주었다. 질병과 재난은 불제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큰 전쟁을 앞두고 학식이 높은 승려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묻기도 하였다. 또, 인도의 아쇼카 왕이 했던 것처럼 왕 자체가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수호신>임을 자청하였다. 왕이 곧 불교의 신이라는 이념은 불교를 믿는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묶어줄 수 있었다.

왜 불교가 민간신앙이나 주술신앙, 국가 호국 불교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혼란한 이 당시에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으로 충분했다. 혼란기의 각국 지배자는 큰 사찰과 어마어마한 불상, 귀따가운 큰 법회를 열어가면서 왕권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불교의 원래 뜻이 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종교는 현실에 도움만 주면 되지 않는가?

3. 대충 때려맞춰서 이해한 격의 불교

초기 청담 사상가인 왕필은 유교, 도교, 불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필은 도교의 기준에 맞춰 다른 종교의 특징을 규정하였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 사상을 창시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행동 가짐을 <도>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공자 역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이고, 석가모니도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성인들이 결국 <도>를 깨달았으니, 모든 믿음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왕필이 주장한 <유,불,도교의 3교 일치설>은 지둔(314-366)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지둔은 불교 스님이다. 왕필이 도교 기준으로 종교를 통합했다면, 지둔은 불교 사상을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 전통 사상은 <리기론>이다. <리>란, 우주의 근본 질서나 계절을 의미하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지둔은 이렇게 말한다.

<리>가 절대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불가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영원 불변의 <깨달음>이다. 즉, <리>는 불가의 <절대적 깨달음>을 말한다.

다른 것도 대입해볼까?

불가의 <공>사상은 <만물은 돌고 돌아 그 형체를 알수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것은 곧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난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도교의 <무>로 설명한다. 사라진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부처가 <열반>한다는 것은 도교의 <무위>로 해석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을 도교의 <도>로 해석한다. 불가의 <진리>는 도교의 <근본>으로 해석해 버린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편한 해석법인가?

이러한 불교 이해 방식을 격의 불교 방식이라고 한다. 격의란, 불교의 난해한 개념들을 중국 전통 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비슷한 개념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불교의 원래 뜻을 왜곡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중국 곳곳에 알리고 다닌 이는 축법아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불교의 승려들은 축법아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격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을 알 수 없기에, 지배층들이 마음대로 해석하여 불교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또, 일반 백성들은 토착신앙과 신비주의를 불교와 구분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불교를 이해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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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남북조 시대의 대립상황>

4. 불도징을 초빙하다.

불도징은 위진남북조의 혼란이 시작된 초기 인물이었다. 그는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다. 그가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다. 드디어 불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정통 <인도산 스님>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불도징은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지 못하였다. 당시는 혼란중에 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였다. 5개의 이민족이 16개 국가를 세워 중국 대륙은 어딜 가나 전쟁 뿐이었다. 불도징은 후조 왕국의 석륵, 석호 부자에게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석륵은 불교를 아주 우습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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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기 : 5호 16국 시대의 후조 왕국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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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국가들의 민족 분포와 국가 창업자>

불도징은 불교 교리에 대한 철학 강의를 했지만, 석륵은 시큰둥했다. 결국 불도징은 교리로서 불법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겼다. 불도징은 주문을 외워서 항아리에서 연꽃이 나오게 하는 등 신비로운 주술로 석륵을 감동시켰다. 결국 이 당시 불교 수준은, 뭔가 위대한 부처의 힘을 보여줘야 비로소 믿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은 큰 뜻을 품고 중국 대륙에 왔지만, 단 한권의 책도 쓰지 못하였다. 이민족의 왕들이 원하는 건 신비로운 주술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뿐이었다. 스님과 주술가, 점쟁이를 구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석륵의 아들, 석호는 이 신비로운 스님을 존경하였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국왕>이 해야 할 일을 설교하면서 중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불도징은, 인도에서 건너온 선구자라는 것 외에 크게 남긴 것이 없다.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이민족들은 불법이 뭔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 불교사를 바꿀 만한 거목들을 제자로 키웠다. 그들의 이름은 도안, 혜원 이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부처의 참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다음장에서는 도안부터 시작되는 <불교 알리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중국 스님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알리고자 했던 노력은 수백년 동안 계속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참고할 만한 책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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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조창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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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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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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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팡리티엔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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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나라(1 인도 중국편)(윤승운의 불교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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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윤승운 (동쪽나라,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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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종교와 사상(보충교재)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편집부 (예지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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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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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양훼이난 (정우서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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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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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운 (랜덤하우스코리아,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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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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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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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불교 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황푸차이 (시그마북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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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간의 고독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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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강성률 (형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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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성철스님법어집1집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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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성철 (장경각,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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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서문. 넌 대체 어느 지역의 종교니?

1. 시작은 인도였지만, 그 끝은 우리 이니라...

불교의 역사를 간략히 적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우린 불교의 창시자가 석가모니라고 알고 있다. 그는 인도 어느 부족의 왕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종교는 자비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숭배하는 신이 뭔지 딱히 알기가 어렵다. 본인이 성불한다고? 뭐, 불교에서 신은 여러 가지 있지만,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주신은 누군지 모르겠다.

그럼, 불교는 종교야~ 사상이야?

우리가 불교를 사상적으로 접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교의 역사> 때문이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진화해온 종교이다. 비록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한무제 때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삼국시대 성립기 쯤 우리 역사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내려갔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출발한 종교가 아닌데다가 그 사상이 심오하고 철학적이여서 종교 성향을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반면에, 아주 쉬운 교리로 대중들 사이에 빠르게 파고 든 종교도 불교이다.

그럼, 불교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 이야기는 아주 옛날 인도의 공화국 시대부터 출발한다. 석가모니는 왕자출신으로서 인도의 <공화정>을지지하는 부족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제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훗날 하나의 종파를 만들곤 하였다.

그런데, 중국에 전파된 종교는 딸랑 <불교>였다. 어느 종파, 어느 사상체계가 아닌 불교 자체가 들어온 것이다.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 불교의 <참뜻>이 뭔지 알기 위해서 중국인들은 나름대로 끝없이 고민한다. 그러나, 결론은 없다. 왜냐구? 그들은 석가모니를 만나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까....

결국 중국인들은 직접 석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찾아 <인도>로 떠난다.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데리고... 인도로 불법을 찾아 떠났다나 말았다나.... 뭐 그런 이야기들이 유명하다.

삼장법사는 결국 책을 찾아왔다. 번역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번역서들을 보면서 더욱 고민에 빠진다. 화엄종, 법상종, 법성종, 계울종, 선종.... 뭐 저리 많어? 석가가 말한 참뜻은 이중에 뭐여?

중국도 당황하고,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도 당황한다... 뭐, 참뜻이 뭔지 아는 사람이 없으니 <왕>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나선다.... <왕이 곧 부처다....> 불교의 참뜻을 많이 알수록, 불교는 정치에 덜 휘둘린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오랜 세월 동안 불교는 왕권에 밀착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불교 이야기는 인도, 중국, 한국, 일본에 걸친 불교의 역사 이야기이다. 이 종교가 어떻게 시작하였고,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종교적 관점이 아닌 역사적 줄거리로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적 줄거리로서 불교를 설명하다 보면 수많은 인물들의 일화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화는 전체 줄거기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자, 그럼 석가의 시대부터 한번 출발해 볼까? 이 이야기는 2009년이 시작되면 적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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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속 역사여행 8 > 오리무중(五里霧中) - 오리의 안개 속을 헤메다

1. 고사의 시대

고사의 시대 : 후한시대 순제기    / 출처 : 후한서, 장해전

오리무중은 후한 말엽에 있었던 장해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5리의 안개 속에 숨어 버리다는 뜻으로, 어디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을 때 쓰는 말이죠. 후한시대 말엽은 외척(왕의 외가 친척)과 환관들이 왕을 무시하고 세력을 다투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의 혼란기 이후 삼국시대로 넘어가죠. 당시, 외척과 환관들의 횡포로 지방에서 토지를 가지고 있던 토지 귀족(호족)들이 각지에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소, 조조, 손권 등도 사실은 지방 호족들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럼 고사를 한 번 볼까요?

2. 오리무중의 유래

후한 시대는 자고 일어나면 왕이 바뀐다고 할 정도로 황제가 자주 바뀌던 시대였습니다. 그것도, 외척과 환관들이 서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 황제를 왕으로 옹립하던 시기였죠.

당시, 화제라는 왕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고, 상제라는 왕도 즉위하자마자 1년도 못되어 죽었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계속 어린 왕이 즉위하고, 정치의 실권이 계속 바뀌는 시기였습니다. 다음 왕은 안제였는데, 정치 실권은 죽은 전 황제, 화제의 부인인 등태후와 그의 오빠 등줄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힘이 없었죠.

당시, 화제-상제-안제로 이어지는 왕실에서 가장 명망있는 신하는 시중인 장패였습니다. 그러나, 장패는 황제가 자주 바뀌고 나라에 멸망의 기운이 돌자 정치적 실권을 가진 자들이 아무리 우대하도 시큰둥하더니, 결국 권력을 멀리하고 떠나 늙어 죽었습니다.

장패에서는 <장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장해도 학식이 깊고, 친구들이 많아서 명망있는 인사였습니다. 장해의 제자는 백명이 넘었고, 권력을 쥔 자들도 장해를 초빙하려고 서로 다투어 노력하였죠.

장해는 죽고 죽이는 권력이 싫어서 지방에 숨어 은거해 버렸지만, 그럴수록 권력자들은 장해를 초빙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답니다. 특히, 장해가 권력을 마다하고 학문에 열중한다는 소문이 돌자, 더욱 장해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조정에서는 장해를 찾아 금은보화를 들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왕은 <장해는 청렴결백하고, 그 절개가 백이, 숙제와 같구나>라면서 장해를 칭찬하였습니다. 하지만, 왕이 초빙하여도 장해는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조정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해를 초빙하려고 해도 장해는 만나주지를 않았는데, 장해를 만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장해가 도가에서 비기로 전해지는 <도술>을 익혔기 때문입니다. 태왕사신기에 보면 현무의 사신이 안개를 일으켜 시야를 가리던데 그런 도술인가 봅니다.

장해가 쓰는 도술은 안개로 자신을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안개가 5리에 이른다고 하여 <5리무>라고 소문이 났죠. 당시 유명한 도술가가 자신은 3리에 안개를 만드는 <3리무>를 할 줄 안다며 장해를 찾아와 도술울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해는 5리무를 사방에 뿌려 이 도술가마저 자신을 찾아오지 못하게 하였답니다.

장해가 은거하는 동안에도 여러 황제가 바뀌었습니다. 은거하고 있는 장해도 계속 바뀌는 중앙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지 반역죄로 2년간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가 옥살이 동안 한 일은 유명한 저서에 각주를 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옥살이가 끝나고, 황제들이 장해를 계속 초빙하였어도 그는 계속 은거하였습니다. 도술을 연마하고, 공부를 하다가 결국 70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합니다.

오리무중이란, 이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그 뜻은,

1. 5리에 걸친 안개 속에 들어서게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찾을 사람을 찾을 수도 없게 된다. 동서남북의 방향 감각을 잃었다는 뜻.

2. 머리 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하얗게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도 세워지지 않고, 마음의 방향을 집지 못하고 있음.

이런 뜻으로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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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리의 안개를 만들었다는 도술가 후한 말기 도술가 장해... 장해가 죽은 뒤, 중국에서는 장각 등 장씨성을 가진 자들이 도술을 부려 태평도를 일으키고 후한을 멸망시키는 운동을 하게 됩니다. 그 유명한 황건적의 난이죠. 기록에는 자세하지 않지만 후한 말기의 도술가들은 <장>씨 성을 가진 자들이 많은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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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속역사여행 4) 백미와 읍참마속의 유래

출처 : 진수의 삼국지 / 시대 : 중국 삼국시대

백미 - 마양의 흰 눈썹

중국의 삼국시대 하면 너무나 유명합니다. 위나라의 조조, 촉나라의 유비, 오나라의 손권은 대부분이 알고 있죠. 삼국지가 유명한 책이긴 합니다만, 어렸을 때부터 중국 역사소설을 읽고 인생의 방략이 어쩌고... 말하는 부분은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삼국지에 앞서 우리 역사인 삼한지부터 읽으면 좋을텐데... 암튼 삼국지의 등장인물을 100명이상 외우고 성격분석까지 하시는 분들은 대단하십니다.

그 삼국시대 유비에게는 마양이라는 뛰어난 참모가 있었습니다. 마양은 유비가 촉한의 황제가 되자 시중에 올라 남만족(중국에서 칭하는 남방의 오랑캐)을 설득하여 이민족과의 싸움을 중단시킨 유명한 참모였습니다. 제갈공명도 마양이 있었기에 남쪽에 신경쓰지 않고, 북쪽의 조조와 한판 승부를 원없이 펼칠 수 있었다고 하죠.

마양의 형제는 5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상>이라는 호칭이 들어가 이 다섯 형제를 <마씨의 오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씨 형제들은 모두 총명하고 지혜가 출중하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비에게 총애를 받은 마양이 특히 뛰어났습니다.

마양은 어렸을 때 눈썹에 흰 털이 있어서 <백미>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래서 마양의 동네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씨의 오상은 모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는 가장 뛰어난 인재라네>

마양은 주군인 유비를 따라 어렵고 험한 전투를 계속하였습니다. 마양은 매우 큰 공을 세운 적도 여러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비가 오군과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유비는 오군과의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제갈공명에게 말하지도 않고 전쟁을 일으켰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마양이 죽고 맙니다. 유비 역시 이 싸움으로 크게 상처를 입고, 유선에게 제위를 넘기고 죽게 됩니다.

제갈공명은 이후 유선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제갈공명을 도와 촉군의 수비를 맡고 보금품을 담당한 자가 바로 마양의 동생 마속입니다. 마속은 제갈공명이 사랑한 부하였지만, 제갈량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군을 움직였다가 사마중달의 군대에게 크게 패하고 맙니다.

제갈량은 마속을 친형제처럼 아끼면서도 군의 기강을 위해 그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읍참마속>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사랑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체벌한다는 뜻의 고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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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속역사여행 2> 등용문이란 단어의 어원은?

1. 청류파의 이응과 등용문

중국 후한 시대 밀가인 환제라는 왕 때의 일입니다.

발호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횡포한 외척 양기가 죽음을 당하자, 이를 대신하여 단초 등 환관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부 관료들은 나쁜 환관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을 깨끗한 관료군이라는 뜻의 <청류>라고 부르면서, 환관들을 더러운 무리라는 뜻의 <탁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시 황제의 신임을 얻으면서 세력을 잡은 환관들은 자신들과 대립하는 관료들을 탄압하고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중국사에서는 <당고의 화>라고 합니다.

이 항쟁의 중심이 된 사람으로서 청류파 관료 중의 하나인 이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응은 여러 군인직을 거치면서 이름을 남겼지만, 환관들을 욕하였기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응은 여러 관리들에게는 좋은 인물로 기억되었고 그 벼슬이 장군직인 사례교위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환관들은 득세하여 중국 한나라는 점점 망해가고, 지방에서는 환관들에게 대항하는 호족 세력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위기였습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대인 조조, 유비, 손권이 나오는 삼국시대가 이 후한 바로 다음 시대이죠.

당시 궁전에서는 환관들이 무서워 모두 벌벌 기고 있었지만, 이응은 절대 환관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명성을 지켜갔습니다. 지방의 호족 청년들과 젊은 관료들은 이응을 본받으려고 하였고, 천하의 모범은 이응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새로 관료가 될 지식인들은 이응과 교류하고, 이응의 추천을 받는 것을 가장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응의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되는 것은 깨끗함을 상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응의 추천을 받는 것은 관리가 되는 지름길이라 하여 이것을 <등용문>이라고 부릅니다.

2. 용문을 오른다는 뜻의 등용문

원래 용문이란, 황하 상류에 있는 계곡의 이름입니다. 이 계곡은 너무 물살이 빨라서 큰 고기도 그 곳을 오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그 물고기는 곧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즉, 용이 되어 오르기 위한 입구를 <등용문>이라고 한 것이죠.

등용문이란, 누구나 이루고 싶어하지만 이루기 너무 어려운 것을 말합니다. 당시 환관파에 의해 첨령한 관리들은 관직에 오르기도 힘들었고, 쟁쟁한 선배 관료들과 경쟁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후 출세의 첫걸음을 <등용문>이라는 말로 대신 사용하였습니다. 이응의 문하에 모여 든 샛병아리 지식인들이 만든 말이지만, 이 말은 훗날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입신양명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말이 되었습니다.

등용문의 반대말로 <점액>이란 말이 쓰입니다. 이것은 용문을 오르려는 물고기들이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바위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쳐 다시 하류로 떨어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경쟁에서 진 패배자와 낙오자에게 쓰는 말입니다.

- 후한서, 이응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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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통치제도 정리

1. 통치체제의 개요

삼국은 모두 부체제 형태의 국가로 시작합니다. 부 체제란, 삼국이전부터 각기 영역을 가지고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던 각 부가 중앙왕실에 귀속되었지만, 각 부 귀족들은 각자 관리를 거느리고 독자적으로 영역을 지배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은 모두 부가 있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5부, 신라는 중앙 6부가 있었죠. 이들 독자적인 부 중에서 힘이 있는 부에서 왕을 배출하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부체제를 보통 역사에서는 <연맹왕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각 부는 중요한 일들을 각 부의 연합회의(귀족회의)에서 결정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제가, 백제의 정사암, 신라의 화백 등은 삼국 초기의 부체제를 상징하는 회의들입니다. 국왕은 어떤 명령(교, 칙)을 내릴 때에도 각 부들과 상의하여 명령을 전달합니다. 대표적으로 신라의 <공동하교>는 국왕도 어느 부에 소속되어 명령을 내릴 때는 소속부를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관등제도가 정비되고, 각 부의 귀족들은 왕의 신하(관료)가 됩니다. 각 부들은 점차 행정적인 <부>로 전환됩니다. 국왕은 불교, 율령 등을 수용하면서 중앙집권적 제도를 정비하였고, <공동하교>는 점차 왕의 단독하교로 전환됩니다.

즉, 관등제도는 종래 족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다양한 독자세력들을 <국왕권 밑으로 신속>하면서 생긴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관등제도에는 초기부터 국가권력을 독점하던 부의 독자세력들은 중앙집권이 정비되면서 왕권에 복속함으로서, 자신들의 특권을 계속 보장받는다는 의미도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족장적 특권이 귀족적 특권으로 전환된 것이지요. 예로, 신라 골품제도는 이벌찬, 아찬 등 족장계열의 <찬> 계열이 계속 특권을 향유하였고, 고구려의 관등도 대대형, 태형 등 족장계열인 <형>계열의 관료군들이 지배층으로 특권을 향유하였습니다.

2. 삼국이 관등을 정비하다.

삼국의 관등제도는 이렇게 초기 족장세력들을 국왕권으로 포섭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관등제도와 관직체계는 본래 족장 세력의 규모와 세력에 따라 <등급>을 매겨 주는 것이었고, 이러한 <포상적 의미>의 관등제도는 곧, 관등제도가 <신분제도>의 제약을 받음을 의미합니다.

삼국의 관등은 능력이 아닌 족장세력의 우열로 결정됩니다. 고대 사회의 특징인 <신분이 곧, 관등을 결정한다>는 것이지요. 신라의 초기 골품제를 보면, 간층, 5두품, 4두품이 올라갈 수 있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습니다. 법흥왕 이후 개선된 골품제도에서도 진골, 6두품, 5두품의 상한선은 명백합니다.

이러한 관등제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관품>이 곧 <관직>을 결정한다는 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관품(품계)와 관직(수행하는 관직)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고려 이후에는 정 3품이니 종 2품이니 하는 관품에 따라, 관직인 어사대부 등을 하사하였지만, 이 시기는 관품이 곧 관직입니다.

그리고 관품이라는 것도 특정 족장세력의 가문들에게 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등급을 부여함으로서 <세력에 따른 특권의 차등적 부여>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유력가문이 유력관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신라, 통일신라>사회를 고대적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3. 삼국의 관등

고구려는 이러한 관등제를 10여관등으로 정비하였고, 최고 관직은 대대로였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1-5관등으로서 최고 귀족이 참여하는 관등의 상한선이 바로 5등급 관등이었습니다.

고구려의 특징은 형과 사자라는 계열을 분화한 것입니다. 과거 유력한 지방 족장이었던 세력은 형계열, 유력 족장 세력의 수취인과 행정관료 출신인 사자계열로 구분하여 관직에 차별을 두었습니다. 초기 위지에서는 10관등만 보이지만, 중국의 사서가 시간이 흐를수록 고구려 관등을 많이 적어놓습니다. 후기에는 14관등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됩니다.(사이트 내 참고사료 검색 : 주서, 수서, 당서, 한원 등의 동이전 참조)

고구려 역시 관등이 곧 관직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전왕족과 왕비족에 대한 예우가 있었는데, 이들은 <제가> 중에서 상위의 <가>라는 뜻의 <고추가>를 하사하였습니다.

백제는 고이왕 대 상좌평 이하 6좌평제로 정비하였는데, 기본 관등은 16관등이었습니다. 백제의 관등에서는 초기적이지만, 문무의 구별이 보인다고 합니다. 중국식 관등은 6좌평제도(중국의 6조제도)가 보이며, 자색, 비색, 청색의 관복에 따른 신분 차별이 보입니다. 관직은 <1. 좌평과 솔, 2. 덕, 3. 무명>이라는 3단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신라는 법흥왕대에 12등급인 골품제도를 17등급으로 개편하였습니다. 1-5관등은 <간층>으로서 전직 족장계열로 우대하였습니다. 이들은 간이라는 어원을 가진 <찬>이라는 계층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이벌찬, 사벌찬, 아찬 등의 호칭을 사용하였죠. 신라는 <찬, 사, 지> 등의 관직으로 구분되었는데, 관직에는 골품에 따른 절대적인 상한선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골품의 관직은 모두 경위인만 대상으로 하였고, 외위는 해당하지 않는 관직명입니다.

또, 왕이 되어야 했는데 되지 못한 성골, 아들이 왕에 오른 자 등은 <갈문왕>의 칭호를 주어 왕족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전왕족이나, 왕비족 중에서도 왕위 계승권이 있고, 실제 후손 중 왕을 배출하였으면 갈문왕이 됩니다.

4. 가장 미숙한 신라의 중앙 관직 제도

삼국 중 <샴국사기>등의 기록에 의거해 가장 많은 중앙관직관련 사료가 많은 국가가 신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신라가 중앙집권을 이룬 것은 6세기가 넘어서이고, 신라의 체제는 삼국 중 가장 후진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체제 정비가 늦었다는 점도 있고, 지리적으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라의 중앙 관제는 당의 6부체제에 영향을 받았지만, 너무도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관직은 사회발전정도에 따라 상황에 맞게 필요에 따라 설치하였습니다. 즉, 정복사업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면서 병부가, 그것을 관장하기 위한 재정부서로서 창부, 예부가 설치되는 등 너무도 허술한 체제입니다. 그리고 정복사업 확장에 따라 병부, 창부가 거의 모든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또 귀족 대표자 자격으로 상대등이 설치되었으나, 이것은 중대 이후 집사부의 설치로 인하여 그 역할이 애매했었습니다.

신라의 관직 개편 과정

1. 유리왕 : 사로 6촌을 6부로 개편, 12등급의 골품제 기반 마련
                   대보 - 정무와 군사를 담당하는 부서 / 이벌찬, 아찬 등이 화백회의를 통해 업무를 총괄
   2. 법흥왕 : 골품제를 17등급으로 개편 , 상대등 병부의 설치 - 군권 기구 등장
   3. 진흥왕 : 조세를 담당하는 품주를 설치 - 조세 기구 등장
   4. 진평왕 : 위화부, 조부, 예부 설치 - 인사 기구도 등장
   5. 진덕여왕 : 품주를 집사부, 창부로 이원화(행정총괄기구 등장) , 좌이방부와 우이방부 설치(형법기구 등장)

다음 포스트에서는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를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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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세 역사학의 발달 과정

1. 삼국시대 : 역사학이 성립되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제대로 된 역사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의거할 때, 한국에서 제대로 된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는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됩니다.

삼국시대의 역사편찬은 왕권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가 대체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시기였습니다. 고구려의 유기는 5c 고구려의 강성기에, 백제의 서기는 근초고왕의 전성기에, 신라의 국사는 신라 6세기 진흥왕기에 각각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을 <왕의 업적>을 홍보하여 왕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당시의 역사서들은 남아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왕실의 족보와 신성함, 왕계를 거슬러올라갔을 때의 신화, 선민의식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즉, 왕실과 지배집단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한 저서들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고구려에서는 유기를 편찬하였고, 이후 신집 5권으로 이것을 요약하였다고 합니다. 백제는 서기, 백제기, 백제본기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리는 국사, 가야는 개황력 등이 존재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서들은 일단, 중국의 역사 서술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단, 사마천의 기전체 중에서 거의 대부분 <본기> 위주로 역사를 서술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역사서의 편찬 목적이 국왕가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들 책의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인용되어 나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선사, 한산기,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등의 역사 저서들이 나오는 데, 이러한 책들인 국가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던 삼국시대 책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일단 불교관련 저서나, 화랑의 역사 등 역사 서술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즉, 국왕에게 치중했던 역사 서술이 이제는 좀더 넓은 지배집단 및 일부 피지배층으로 확대된 것이지요. 이것은 이제 국왕만의 역사 편찬인 <본기> 위주의 서술을 넘어 <열전, 지, 표> 등으로 역사 서술이 넓어진 것을 뜻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형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기 시작한 것이지요.

2. 중세시대 : 최초의 역사서 삼국사기의 등장

중세시대의 역사서술은 이제 <송>나라의 유학체제를 받아들이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서들이 출현였다는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아직도 역사서술에 있어서 <바이블>은 사마천의 사기였습니다. 고려 후기 <원>에서 성리학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사기의 기전체 방식이 역사서술의 대세였지요. 하지만, 성리학이 유입된 여말,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을 통한 유교서술이 대세가 됩니다.

우선 고려 시대 사서들을 아주 간략히 다루어 볼까요?(각 사서들에 대한 구체적 포스팅들은 따로 하겠습니다.)

고려 시대 최초의 유교적 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입니다. 당시 사회는 문벌귀족 사회의 폐단으로 사회적인 불안감이 조성되었고, 여진족의 금이 강성하여 국가적 위협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고려 국왕은 김부식을 책임자로 하여 당시 훈고학 계열의 유학자 12인에게 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으로서 <유교적 통치질서와 전통> 확보를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벌귀족 사회는 묘청의 난을 겪고, 금나라와 사대외교를 하는 등 국가적 팽창력이 약회된 시기였습니다. 삼국사기는 문벌귀족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신라 중심으로 고대사 체계를 정립하게 됩니다.

이후 무신 집권기에는 사회의 혼란함을 고대 위대한 유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잘 보여집니다. 이후 몽고간섭기에는 고구려의 유산을 넘어서서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보입니다. 이것이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단계의 역사서술이었습니다.

3. 고려시대 :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유교적 합리관

고려 중기 이후 유교주의적 역사서술의 특징은 상당히 합리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대표적인 서술 방식을 보통 <무징불신의 태도>라고 합니다.

무징불신이란, 합리적인 역사서술을 위하여 문헌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지도 쓰지도 않는다는 역사 서술 태도를 말합니다. 즉, 고대적인 신화주의는 배격하고,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존중합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가 가장 잘 반영된 역사서가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또, 문헌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도 귀신의 이야기는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쓰지 않는다는 <괴력난신>, 문헌적 증거가 확실해도 합리적이지 않은 사건은 삭제해 버린다는 <필삭주의> 원칙은 중세 사서의 큰 특징입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를 통해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했던 목적은 역사에서 합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즉, 역사는 지난 날을 되돌아봐서 오늘날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 역사 서술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실을 기록할 대는 사실 자체의 서술과, 그 사실에 대한 평가는 따로 구분해야 하며, 평가도 논,찬의 형식으로 따로 적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서술할 때 <기전체>가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역사 서술의 교훈적 목적에 맞추어 다양한 서술체제가 확립되는 것도 이 시기 역사서들의 특징입니다. 실제 기전체 양식은 사마천의 사기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했지만, 원나라에서 송학이 들어온 이후 고려 후기 역사서들은 다양한 역사서술체제를 선보입니다. 중국 송에서도 자치통감의 편년체, 자치통감강목의 강목체 등이 선보였듯이 다양한 서술체제로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한 것이지요.

또,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다는 것은 다른 말로, 역사를 역사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학의 일부로 본다는 것과도 상통합니다. 역사는 유교적인 정치이념과 윤리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일종의 <거울>로서, 역사학의 목적인 현재 통치이념에 부합되는 <유교적 정당성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4. 15-16세기 조선시대 : 유교적 합리관에서 성리학적 유교관으로...

여말,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유교적인 합리관은 여말 들어온 <성리학>에 의해 성리학적 사관으로 전환됩니다. 여말의 성리학은 원대 허영의 학파에서 들어온 사관으로서 <수기치인> 중에서 <치인>을 강조하는 실용적이고, 부국강병 성향의 성리학이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가 개창하면서 새왕조는 통치이데올로기를 정비하기 위해 수많은 사서들을 편찬합니다. 일단, 고조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근원을 정리한 뒤, 성리학적 인식에 맞추어 삼국사와 고려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그 결과 삼국사략,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삼국사, 고려사 저서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사서들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고, 왕조초기 성리학적 가치기준에 맞춘 부국강병과 왕도정치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진보적인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대사에서 단군기원을 확립하고, 민족단일의식을 강조한 것이 이 시대 역사학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성종 이후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이제는 부국강병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도덕지향적인 송대 주자학이 조선 시대 역사학의 대세를 이룹니다. 이 시기의 역사서들은 부국강병보다는 사람들의 향촌자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습니다. 역사의 영역도 정도전이 주장했던 만주와 요동수복이라는 관점보다는, 한반도 내의 조선사를 좀더 강조하게 됩니다.

주자학적 역사관과 고려 합리주의적 역사관을 비교하면 가장 큰 차이점은 명분론과 합리론이라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역사학은 <무징불신>으로 대변되는 합리사관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주자학에서의 사관은 <전통과 명분>으로 대표되는 사관입니다.

예로, 중국 삼국지에서 조조의 위와 유비의 촉 중에서 어느 쪽이 정통이냐고 물었을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중세 합리적 사관을 지향하는 역사학에서는, 당시 정세와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선양으로 왕위에 오른 조비의 <위>를 전통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명분을 따지는 주자학의 사관에서는 한나라 왕실의 후손인 유씨의 유비의 <촉>이 삼국시대의 전통국가라고 볼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죠.

4. 양난이후 조선시대 : 새로운 전통과 실학의 발견

16세기 중반 이후 역사서술은 아주 큰 변화를 겪습니다. 실제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가 동요하고, 조선왕조의 체제가 급속히 붕괴됩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들은 무너져가는 왕조를 되살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붕당정치의 서인, 남인의 공조체제 형성, 비변사 체제의 형성, 대동법과 균역법 등 체제 변화 등으로 노력하면서, 사상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많은 사서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16-17세기의 정치가들은 명이 멸망한 후 <중화>의 전통이라는 것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습니다. 명은 망했고, 청이 대세인 시기에 명만이 전통이라는 <명분>만으로 사회를 이끌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 명분으로 추구했던 북벌운동도 실패도 끝났습니다. 이제는 청나라를 인정하는 <북학운동>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배워야 했고, 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명분보다는 부국강병이 필요한 시기였던 것이죠.

따라서 이 당시 역사학은 명청 교체로 인하여 중화의 전통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도통동전>을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 역사를 중국 역사의 부속물이 아니라 순수한 <정통설>로 확립하려는 시도가 많아졌고, 스스로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북벌수호운동>, <도서방위체제확립>, <양역변통> 등의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사상적으로 우리 역사의 체계를 잡으려 했던 사람들이 실학자들입니다. 이들은 단군, 기자, 고구려, 삼한 등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였으며,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른 포스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익, 정약용, 안정복 등의 고대사 시각은 이 당시 성리학 사회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음 파트에서는 1900년 대 이후 역사인식에 대하여 간략히 다루고, 이후 한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료들에 대하여 개론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중세 삼국사기부터 근대 노무현기의 사학까지를 포스팅 할 건데, 아주 가끔 다루다보니 시간은 무지 오래걸릴 것 같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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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시대와 호한체제의 성립

이번 장에서는 이전 포스트인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의 역사를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위 나라가 몰락하다.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를 통일한 위 왕조는 너무 단명하였습니다. 그것은 후한말 이래 호족 세력들이 할거한 시대를 통일했지만, 호족 세력이 상당수 잔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위는 호족세력과 개국공신들에게 많은 관직을 내려주었고, 호족세력들을 중앙 관리로 끌어들여 귀족세력으로 재편하려고 했습니다. 또 9품관인법 같은 제도를 계승함으로서 관직임명에 제도적 명분도 만들려 하였죠.

하지만, 호족이 중앙에 올라와 귀족화되면서 초기 조조, 조비의 참신한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지배집단이 <귀족세력>으로 변질되기만 하였습니다. 이들 호족들은 중앙에서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곤 하였고 그 결과 사마의가 정권을 정악하면서 사마씨의 <진> 나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물론 이 진의 건국도 <선양>의 형식을 빌립니다. 사마염(무제)가 위을 선양으로 이어받으면서 건국된 <진>은 명실상부한 <삼국시대 통일국가>가 됩니다.

2. 진의 사마씨들은 호족들을 제어하지도 못하다.

진 왕조는 건국 자체부터 큰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진 왕조는 후한 이래의 <호족>세력에 의해 건국된 왕조로서, 사마염이 선양을 받아 왕조를 개창한 자체가 강력한 호족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진의 사마씨 왕실은 건국을 도와준 강력한 호족 집단들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건국 과정에서의 <호족 연합적 성격>은 마치, 후한 광무제의 건국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마씨의 진국은 호족을 통제할 힘이 없는 국가였습니다. 진국에서는 호족에게 특혜를 주어 호족들이 활발하게 중앙에 진출하여 왕권에 복속된 귀족체제를 확립하였지만, 이들 호족은 너무나 독자적이었습니다. 호족들은 진 왕실을 보호하는 것보다 자신의 종가(호족가문)의 이익만을 챙기는 것에 급급하였습니다. 이것이 후한과 진의 차이점입니다. 진의 호족들은 이미 삼국시대의 오랜 전란을 거치면서, 왕실보다는 가문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사마씨 정권은 토지제도인 점전제, 과전제 등을 실시하여 호족의 대토질 소유를 막으려 했지만 실용성이 별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진은 호족들을 믿을 수가 없었고, 호족을 통제하고 왕실의 울타리를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왕실의 <왕자들>과 <종친>들에게 토지를 분봉하여 지방 통제를 맡기는 <봉건제도>를 부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 왕조의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호족 통제를 위해 파견한 왕자들은 호족과 연합하기도 하고, 때론 독자세력화하여 진 왕실에 위협적인 세력이 되었습니다. 진 왕실은 왕자세력들이 왕실에 반기를 든 <8왕자의 난>으로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져 버립니다.

3. 호한체제가 시작되다

서진 시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찾으라면 호한체제의 시작입니다. 진은 삼국을 통일한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였지만, 이민족을 통제할 만큼 강력한 국가는 아니였습니다. 진은 이미 자체 호족들과 봉건제도를 통해 성장한 왕자세력들도 통제하지 못했으니까요.

거기에 서진은 오랜 전란으로 인해 떠난 민심을 적절히 수습할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방을 지방호족과 봉건된 왕자들에게 맡겨 버리는 형세였으니까요. 오랜 전란으로 백성들은 이미 한나라 이래 국교가 된 유교를 버린지 오래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이미 향락적인 성향의 노장사상이 유행하였고, 허무한 염세주의 사상이 전국에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또 긴 혼란기 속에서 허약해진 중국 사회에는 이미 이민족들의 중국내 거주를 인정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유비, 조조 등은 이민족의 힘을 빌려 상대 국가를 견제하려고 하였고 이것은 북방 이민족이 중원에 내려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서진은 이민족(5호)의 만리장성 이내 거주를 허락하였고, 중국인(한족)과 이민족이 이제 중국 영토에 같이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호(오랑캐)와 한(한족 : 중국족)의 공존체제라고 부릅니다.

서진 시대는 길고 긴 중국 역사 속에서 호한체제가 시작된 기점입니다. 이 시기 이후의 모든 중국사는 결국 한나라를 계승한 전통 중국 왕조(한족 국가)와 북방에서 내려온 이민족 왕조(침투왕조, 정복왕조)의 기나긴 싸움이 됩니다.

결국 서진은 이민족의 침투에 의해 무너집니다. 이민족인 <흉노>가 <영가의 난>을 일으켜 한나라 이후 구축한 중화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이민족인 5호 국가가 중국에 자리잡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죠. 이 <영가의 난>이 바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호한체제 성립을 가져온 사건입니다.

4. 서진의 멸망

결국 서진은 호족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봉건제를 실시하였다가 <8왕자의 난>으로 국가 체제가 무너지고, 이민족들이 적극적으로 서진에 침투하게 됩니다. 결국 이민족인 <흉노>족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흉노>족은 진시황, 한무제 등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통일 군주들과의 항쟁에서도 살아남아, 결국 중국사회를 정령한 최초의 이민족 국가인 <한>을 건국합니다.

이후 중국은 가장 혼란한 시기인 5호 16국 시대를 맞이합니다. 서진은 수도를 옮겨 동진이 되었고, 중국의 주요 영토는 중화사상에 의해 오랑캐라고 규정된 국가들이 나누어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곧 호한체제의 출발이자, 모든 민족이 중국 영토안에서 어울어지고, 이 모든 민족을 통일하기 위하여 서로 항쟁하는 시대의 출발을 의미합니다. 이 시대 이후는 중화민족의 시대가 아니라, 모든 민족을 아울러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각 민족국가들이 <세계국가>, <세계시민>을 추구하는 시대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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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를 통일한 조조, 조비 부자의 <위> 나라

이번 장에서는 삼국시대에 대한 내용을 <위>나라 중심으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하지만, 삼국지의 이야기식이 아닌 순수한 역사적 관점에서 적어도록 하죠.

1. 위나라는 정통성이 있는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시대의 나라는 조조의 위, 유비의 촉, 손권의 오를 말합니다. 영웅들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어렸을 때 한번쯤은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소설인 삼국지는 훨씬 후대에 나관중이 쓴 소설입니다. 역사로서의 정사 삼국지는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이죠.

진수의 삼국지와, 진수 이후의 삼국시대 사서들은 좀 관점이 다릅니다. 진수는 삼국시대의 정통이 <위>에 있었다고 봅니다. 위나라는 후한의 호족연합정권에서 파생된 가장 강력한 호족 세력으로서 후한 대 이후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었고, 역사는 명분보다 <실세>로 흘러간다는 입장에서 보아도 위가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었죠. 특히, 진수가 삼국지를 저술할 시기에는 삼국시대 이후 <진>나라가 정권을 잡으면서 실력있는 자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진수는 위나라를 전통으로 하여 위를 기전체 역사에서 황실의 이야기인 <제왕 본기>로 서술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 자체가 실력으로 줭권을 잡는 시기였습니다. 실력있는 이민족들이 중국 대륙을 넘보는 시기의 역사 서술은 조씨 일가와 사마의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후 중국민족이 중국 전체를 휘어잡고 이민족을 몰아낸 송대에는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유지기의 사통, 주희의 통감강목 등의 역사서에서는 중화민족의 기틀을 <한나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전한왕실의 정통성을 후한이 이어갔고, 후한의 멸망 뒤에는 왕실 성인 <유씨>가 계승하려 했으므로, 유비가 곧 정통이라는 입장입니다. 이 논리는 상당히 유교적인 논리입니다.

2. 위의 발전 배경 - 둔전제

삼국시대, 위나라의 가장 큰 발전 배경은 <토지 개혁>이었습니다. 후한 말기 원소, 조조 등 유력한 토지보유 호족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사병을 양성했기 때문에 후한 말에는 토지가 황폐해졌고, 백성들은 수많은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전란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사실 조조, 원소, 동탁 등 대토지를 보유한 호족 계급이었지만, 그들 중 사회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개혁할 의지가 있었던 자들은 초기에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조조, 유비, 손권이 패권을 잡은 것인 이렇게 문란한 토지제도와 경제질서를 개혁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둔전법으로, 유비는 낭방 개척과 수운사업으로, 손권은 양자강 일대의 수운 무역과 그 일대 농지개간으로 성장한 호족세력이었습니다. 이중 가장 토지개혁을 철저하게 했던 자가 바로 조조입니다.

조조는 전란으로 황폐화된 영지가 늘자 임자없는 농경지를 모두 <둔전>으로 편제하여 버립니다. 이 둔전에 유망하는 유민들을 둔전민으로 편제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또 둔전을 관리하는 둔전관도 호적에 넣어서 철저한 둔전 통제책을 실시합니다. 둔전민들은 조조의 보호아래 청주 일대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관리관은 소, 씨앗 등을 무상으로 대여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농경민을 적극 유치한 이유는 군사력과 조세 때문입니다. 이 둔전에서 조조는 소를 대여한 땅에서는 6/10, 자가농의 영지에서는 1/2의 세금을 걷었습니다. 엄청난 세금이었지만, 농민들은 혼란기에 안정적인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 듯 싶습니다. 이 농민들은 전쟁이 극심할 경우에는 청주일대를 중심으로 조조의 사병이 되어 전쟁에 투입되었고, 조조는 병사들에게 더 많은 정복 토지를 보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둔전제의 의의는

첫째, 떠도는 유민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한 것
   둘째, 황무지를 개간함으로서 국가의 경제력을 재건한 것
   셋째, 경제력과 유민을 확보함으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한 것 등입니다.

3. 후한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하다

조조의 경제적 실권이 둔전책이라면, 정치적 실권은 바로 <후한계승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것입니다. 조조는 새로운 왕조는 자신의 왕조가 아니라, 후한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조조일가는 양자로서 가문이 계승되었던, <환관> 가문이었습니다. 중앙의 정치력을 가진 환관가문이자, 지방에서는 대토지와 무력를 소유한 호족가문이었습니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위>를 건국할 때도 무력으로 후한 세력을 다 죽인 것이 아닙니다. 조비는 구세력의 저항이 가장 적은 방법으로 <선양>이라는 형식으로 즉위합니다. 선양이란, 성현에게 왕위를 양위한다는 유교의 덕치주의적 정치원리의 형식만을 빌린 왕위계승법입니다. 즉, 위는 후한의 황제로부터 덕이 있어 왕위를 물려받은 왕조가 되는 것이지요. 이 선양은 주례체제에서 빌린 획기적인 방식 왕위계승 방식입니다. 이 후 대부분의 중국 전통 왕조는 왕위계승을 선양의 형식으로 합니다.

또 조비는 자신의 거점지인 화북을 중심으로 <낙양>에 도읍을 정하여 한의 수도가 곧 위의 수도라는 명문을 내세우며 한의 계승자임을 자처합니다.

4. 위의 몰락

그러나 위 왕조는 너무 단명하였습니다. 그것은 후한말 이래 호족 세력들이 할거한 시대를 통일했지만, 호족 세력이 상당수 잔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위는 호족세력과 개국공신들에게 많은 관직을 내려주었고, 호족세력들을 중앙 관리로 끌어들여 귀족세력으로 재편하려고 했습니다. 또 9품관인법 같은 제도를 계승함으로서 관직임명에 제도적 명분도 만들려 하였죠.

하지만, 호족이 중앙에 올라와 귀족화되면서 초기 조조, 조비의 참신한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지배집단이 <귀족세력>으로 변질되기만 하였습니다. 이들 호족들은 중앙에서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곤 하였고 그 결과 사마의가 정권을 정악하면서 사마씨의 <진> 나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물론 이 진의 건국도 <선양>의 형식을 빌립니다. 사마염(무제)가 위을 선양으로 이어받으면서 건국된 <진>은 명실상부한 <삼국시대 통일국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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