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2)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신석기 시대가 도래하다....

인류가 땅을 이용하여 생상력을 확보한 시기는 약 1만년 전부터이다. 1만년전을 훌쩍 뛰어넘어 70만년전에 이르는 <구석기 시대>는 토지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수십만년 동안 지속된 빙하기와 간빙기 때문이다. 그 오랜 기간 인류의 시조인 <원숭이>들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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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 아프리카누스(약 215만년전 유인원 : 미세스 플레스)의 두개골로 재현한 고인류. 당시 인류는 인간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지만, 직립보행과 도구의 사용을 근거로 인류의 시조로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기엔 미흡한 점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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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사진은 직립 보행의 근거인 골반 구조이다. 침팬지와 인간을 놓고 보았을 때, 가운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인간쪽에 훨씬 가깝다. 손과 발의 구조도 인간쪽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에게 필요한 문자를 가지지 못하였고, 빙하기를 거치는 수십만년 동안 큰 진화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지구상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년 전쯤부터 본격적인 <토지 이용>이 시작되었다. 고고학 연대로 보면 이 시기가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물론, 채집과 수렵 생활은 계속 되었지만, 토지를 이용한 생활도 병행되었다.

이제, 토지를 이용하여 도토리, 수수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초보적인 농경이 이루어졌고, 토기와 같이 작물을 보관하는 기구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농경은 그 생산력이 너무나 낮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 <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인류는 초보적인 <종교>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자연물과 동식물에 대한 경배가 시작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숭배 대상은 <하늘과 태양>이었다. 특히 태양신은 농경이 이루어진 주요 문명 지역에서 빠지지 않는 신이었다.

그럼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에 어떻게 살았을까?

2. 신석기 시대와 토지 이용

중국의 신석기 시대는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전설의 시대>이다. 사기에는 3황 5제의 전설이 나오는데, 이 3황 5제가 바로 농경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황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 지, 인과 같은 개념이다. 사기의 3황은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이라고 나오는데, 후대 역사가들이 복희, 신농, 여와, 수인 등 다양한 개념을 가져다 붙였다. 중요한 것은 3황이 하늘, 땅,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 중 <땅의 신>이 농경을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3황 이후 등장한 5제는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 전욱, 제곡(帝嚳),·당요(唐堯),·우순(虞舜) 이다.

삼황의 기록

내용

사기의 진시황본기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

사기의 보삼황본기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풍속통의의 황패편

복희(伏羲), 여와(女臥), 신농(神農)

통감외기

복희(伏羲), 신농(神農), 공공(共工)

예위의 함문가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

백호통

복희(伏羲), 신농(神農), 축융(祝融)

십팔사략의 제왕세기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3황이 하늘, 땅, 사람을 뜻하면서 농경의 전파를 전설로 설명하고 있다면, 5제는 음양오행의 돌고도는 5행을 기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원래 5제는 중국 최초 왕조은 <하> 왕조의 전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보여졌지만, 한나라 때 동중서가 <추연의 음양오행설>을 받아들여 정리한 것이다.

오제의 기록

내용

사기 오제본기

황제(黃帝), 전욱(颛顼), 제곡(帝喾), 당요(唐堯), 우순(虞舜)

황왕대기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예기 월령

태고(太皋: 복희), 염제(炎帝), 황제(黃帝), 소고(少皋), 전욱(颛顼)

도장의 동신부

황제(黃帝), 소고(少皋), 제곡(帝喾), 제지(帝摯), 제요(帝堯)

십팔사략

소호(少昊), 전욱(颛顼),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한반도와 요동지방의 신석기 시대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기이다. 그러나, 남겨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떤 방식의 토지 이용을 했을지는 알 방법이 없다.

일단 빗살무늬 토기와 탄화된 좁쌀 등의 유적으로 미루어 초보적인 농경이 부락단위로 이루어졌다는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만주지방의 칠무늬 토기(채도)는 한반도와 유사하다. 많은 학자들이 요령 지방의 홍산 문화와 같은 신석기 문화가 중국보다는 한반도 계통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링크 : 한반도와 홍산문화는 같은 문화권이다.

한반도의 신석기 농경을 <토기>의 형태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석기 초기의 토기는 시베리아 계통의 토기와 비슷하며, 신석기 후기로 갈수록 중국식 토기와 비슷한 유물이 많다고 한다.

링크 : 시베리아와 한반도의 유물 비교

반면, 일본의 신석기는 조몬 시대(縄文時代) 후기를 말한다. 일본인의 인종은 고몽골족으로, 1만년전 경부터 한반도 등에서 이동한 이들이 농경 등을 전파하면서 토지 이용을 시작하였다. (일본 국립유전학 연구소에 따르면 약 65% 정도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링크 : 일본 유전학 연구

   

신석기 때의 토기 :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좌), 일본의 조몬토기(우)

동아시아의 신석기인들이 농사를 지으며 먹었던 주식은 도토리와 밤 정도였다. 당시 농사 기술로는 계절에 따라 다른 음식을 먹어야만 했는데, 봄에는 나물류를 채집하고, 여름에는 강이나 바닷가 근처에서 어류를 많이 먹었을 것이다. 가을에는 도토리와 밤 등의 수확물을 먹을 수 있었고, 겨울에는 버섯류와 칡, 마, 겨울 생선 등을 먹을 수 있었다.

즉, 신석기 때 토지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가을 정도에 수확되는 일부 견과류 정도였고, 사냥과 채집이 여전히 큰 비율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초보적인 농경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촌락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식량을 구하는 씨족 단위 체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다수견해이다. 씨족들은 한 해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부족의 수호신에게 기원을 했을 것이다.

또, 당시 사회가 모계제인가, 부계제인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인들의 전통 견해에 따르면, 신석기 시대의 생산력은 극히 낮았고, 채집과 수렵 등 여성들의 생산력이 중요시되던 시기였다. 또, 결혼제도가 정착되지 않아 일부다처제를 시행했다고 가정하면, 아이를 직접 낳은 여자측의 발언권이 강했다는 주장이다. 3황5제의 모계사회가 현재의 부계사회로 넘어온 것은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왕조>가 성립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그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에도 일부일처제의 기본적인 가족관계가 성립되었고, 동아시아 사회에 모계 사회는 성립된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신석기 시대에도 남성이 힘든 일을 하면서 경제권을 조금 더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누가 경제권을 가지고 있었던지는 열심히 싸우라고 냅두고 토지이야기를 해보자.

신석기라는 1만년전후의 오랜 시간은 토지 사용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준다. 누가 토지의 주인일까?

신석기 시대의 토지 이용을 놓고, <원시 공산제 사회>라는 학설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다. 먼저 사회주의자인 <마르크스>부터 사회학자인 <베버>, <뒤르껨>... 지금의 대부분 역사학자들까지 그렇게들 주장한다.

신석기 시대의 생산력이 극히 낮고, 당시 사람들은 절대 빈곤에 처해 있었다. 농경은 초보적이었다. 사람들은 수천년간에 걸쳐 서서히 나아지고 있는 농사기술의 발전보다는 <자연신>에게 좋은 날씨를 부탁하고 있었다.

아마도 토지 소유권을 놓고 일어난 분쟁은 극히 적었을 것이다. 설령 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또, 공동체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는 토지 소유가 아닌 <점유> 형태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시 사회가 부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에, 토지는 부족민 전체가 <점유>하는 것이었다. 토지를 <점유>하다는 개념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개념으로 바뀐 것은 정복전쟁이 활발해지는 <철기 시대>쯤에 등장한다.

3. 청동기와 토지 이용

동아시아에서 금속 문명이 등장하고, 농경기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 경이다. 이 시기는 석기 문명과 청동 문명이 공존하던 시기로, 황하 문명을 비롯한 다양한 동아시아 문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000년경 양자강 근처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2000년경에 공동체를 장악한 종교 제사장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권력을 가진 자가 성장하여 기원전 1600년경 최초의 왕조인 상 왕조(은)를 건설했다고 한다.

만주에서는 기원전 1600년 경에 북방 유목 계통인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청동기가 전파되었고, 한반도에도 기원전 15세기 전후에 청동기가 보급되었다. 일본에는 기원전 1000년경 야오이 시기에 청동기가 전파되었다.

청동기가 전파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각 지역에 벼농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청동기와 벼농사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청동기는 요즘으로 따지면 <보석>과 같이 귀한 것이었다. 구리와 주석, 아연 등을 합금해야 제조가 가능한 청동은, 희소성 때문에 지배층의 무기나 제사용품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여전히 농기구는 돌이었다.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이 전파되면서 농사를 짓는 기술도 같이 전해져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특히 벼농사의 전파경로는 청동기 전파 경로와 유사하다. 만주 계통에서 한반도로, 그리고 일본으로 전래된 경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럼 창동기와 함께 보급된 농사 기술은 어떤 것이었을까?

동아시아 사람들이 처음 시도한 농사는 견과류 등을 수확하는 것이었다. 밤을 많이 수확하였고, 깨, 도토리, 박 등이었다.

조금 시기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비옥한 땅과 비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화경농법>이다. 화경은 말 그대로 그 자리를 불태워서 비옥한 땅과 비료를 만든 후에 농사짓는 초보적인 방식이었다. 화전 농법으로 보리, 수수, 조, 팥 등을 재배할 수 있었다.

신석기 후기가 되면서 농사 기술은 더욱 발전되었다. 각 지역의 화경 농법이 발달하였고, 중국 강남지방에서 시도되었던 <수경농법>과, 만주지방의 <화경농법>이 유행하였다.  

특히 <수경농법>은 물을 이용한 농법으로 한층 진화된 농사법이었다. 물을 이용함으로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벼가 동아시아인들의 주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처음 중국식 수경농법은 강가와 저습지를 이용한 농사였으나,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한반도, 일본 등에서 개량을 거치게 된다. 저습지를 찾아다닐 필요없이 직접 <관개시설>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각지에 관개 시설이 등장하고, 농사기술은 한층 발전하게 된다.

농사기술을 발전으로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생산물과 관개시설을 놓고 다툼이 시작되었다. 청동기와 철기 시대는 서로 많은 생산력과 생산물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활발히 진행된 것이다.

즉, 당시의 농업기술 수준으로 볼 때, 당시 생산력을 높이는 주요 수단은 직접적인 생산력보다도, 생산력을 획득하려는 싸움이었다는 점이다. 일정 지역을 확보한 지배자의 출현은 생산 영역을 놓고 벌이는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금속기 시대의 생활 단위인 <읍>과 중국인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토지제도 <정전제도>에 대해 간략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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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공동체: 신화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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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토지경제사연구(인문사회과학총서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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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편집부 (민족문화사,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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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타케미쓰 마코토 (서울문화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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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에 나오는 은나라 복점 내용

乙巳 王卜 今 歲商受年 王占曰 <吉 東土受年 南土受年 西土受年 北土受年>
  을사 왕복 금 세상수년 왕점왈 <길 동토수년 남토수년 서토수년 북토수년>

을사년에 왕이 복점을 치다. 지금 상의 풍흉을 모두 점치고, 왕이 말하길 동,서,남,북 사토가 길하다고 말하다

중국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복점 사료입니다.

이 사료의 내용을 해석하면,  당해에 수년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수년이란 풍작 여부를 미리 점을 쳐서 알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왕이 풍년을 점치는 내용을 보면 동토, 서토, 남토, 북토의 4토를 점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의 왕이 직접 사토의 풍흉을 점침으로서 사토가 실제 왕의 지배영역이었음을 뜻합니다.

또 세상수년이라는 말에서 왕의 4토와 국가 전체의 복점을 달리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왕의 땅을 <상>이라는 왕기로 인식하고, 나머지 4토라는 지배 영역은 왕기(직할령)가 아니라 왕의 영역에 포함되는 세력권임을 보여줍니다.

중국 은나라 포스팅에 쓰려고 작성한 갑골문입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 사용하실 수 있으나, 꼭 가져가실 때에는 꼭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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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신성왕조 <은나라>

1. 은나라를 개관해보자!

은왕조는 중국에서 유물이 발견됨으로서 가상의 왕조가 아니라 실제 존재했던 왕조로 최근 판명된 왕조입니다. 물론, 은대 이전 상왕조가 있긴 하지만, 아직 확실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여기서 내용을 서술할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관계로 중국의 왕조는 <은왕조(상왕조)>부터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상 왕조는 황하 중하류 일대의 <은허>라는 곳을 수도로 삼아 그곳에서 시작된 청동기 국가입니다. 문명 발생기에 시작된 최초의 왕조로서 그 국가의 구성은 수많은 도시 국가들이 연합한 연합왕국의 형태이지요. 그 도시 국가 중의 최고권력자가 <은>의 왕을 자임하는 형태입니다.

은 왕조의 성격은 신정정치 사회라는 점입니다. 왕은 정치와 종교를 동시에 주재하는 신관입니다.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매게체의 역할을 함으로서 왕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우리가 제정일치 사회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제정일치보다는 좀더 왕의 신성함이 강조된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은에서는 점인이 따로 있어 점을 보긴 하지만, 그 점에 대한 판단은 왕이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또 천신사상이나 조상신 숭배 등이 아주 중요시되는 시대였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은 왕조를 <신성왕조>라고도 부릅니다.

2. <신성함>을 매개로 뭉친 도시국가들

은은 전술했듯이 몇 개의 도시국가가 연맹한 형태로서, 유력한 도시국가가 맹주가 되어 <은>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연맹국가인만큼 정치, 군사적인 중요한 일들은 하늘의 자손들(씨족집단들)이 합의하여 처리하게 되죠.

은의 국가 구성은 일단 은왕이 있는 <직할지>인 <대읍>이 있고, 나머지 지방은 <족읍>이라 하여 왕에게 충성하는 <방백>들이 관할하는 구성입니다. 초기에는 왕위세습이 형제 상속이였지만, 후기에는 부자상속이 일반화되면서 은나라는 점차 강해지는 추세로 나아갑니다. 은나라에서 왕권의 <부자상속>이 확립된 시기 무렵에는 읍제국가(도시국가)들은 은에 부역, 병역 등 의무를 이행해야 했습니다. 은 왕은 그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도시국가의 족장들을 <후, 백>으로 임명하여 통치합니다. 이것은 서양에서의 공작, 백작, 후작과 같은 작위제로서 은대에 이미 봉건제도가 존재하였다는 증거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은왕조는 다수 도시국가의 중앙정부 성격을 갖는 봉건국가로고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은왕조는 이 봉건적인 체제를 계약관계 등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함>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같은 하늘의 자손들이 지배자가 된다는 개념으로 조상숭배가 강조되었습니다. 거북이 뼈나 등피를 이용한 갑골문자 등에 의한 점, 복사 등을 보아도 알 수 있죠. 또 은왕은 하늘에 의해 점지된 자로서 신성불가침이라는 <천명사상>은 은왕조를 지탱하는 끈입니다. 달력으로 사용된 은력에서도 이러한 신성함이 엿보인다고 합니다.

특히, 은왕조에서는 아주 큰 왕의 무덤들이 발견되곤 합니다. 이것은 제사의 대상으로서 조상신을 모시는 종교의례를 뜻하며, 이것으로 보아도 <신정정치>, <조상숭배>, <제정일치>의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를 보면, 우주를 지배하는 천신(상제님, 하늘님)의 뜻을 묻는 복점이 많습니다. 이 복점은 국가대사와 일상생활 등 은나라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것으로서, 신정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3. 그들의 단합은 <제사>, <전쟁>이었다!

은나라의 사회구조를 알기 위해 당시 지배집단을 살펴볼까요?

일단 지배계급으로는 국왕과 왕족이 있는데, 이들은 왕의 직할지인 <대읍>에 살았습니다. 지방은 제후들에게 후, 백, 방백 등의 칭호를 내려주면서 <족읍>을 분봉합니다. 대읍-족읍-소읍은 전 단원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이러한 지배집단이 하나로 뭉치게 되는 것은 <제사>입니다. 같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제사가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다른 집단이 쳐들어왔을 때는 그것을 막기 위해 하늘의 자손들이 뭉쳐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따라서 은왕조에서 가장 강조된 관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제사>와 <전쟁>에 관련된 관직들입니다.

은왕조에서 피지배집단은 일반 백성들과 노예계급입니다. 일반적으로 은대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지배층들이 생활을 유지하였으며, 노예의 명칭이 상당히 다양하고, 순장이 발달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예제 사회가 아니였다는 반론도 많은데, 제가 중국사에 약해서 그 부분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은 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생산 단위는 <읍>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후들에게 나누어준 <족읍>이 가장 중심인데, 족읍은 원래 혈연관계로 맺어진 씨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사는 마을이였습니다. 즉, 읍은 혈연성이 강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사는 곳으로 볼 수 있죠. 그러나, 이 <읍>이라는 구조가 대읍 - 족읍 - 소읍 등으로 구성된 만큼, 읍 상호간에 <중층적인 예속관계>가 존재합니다.

4. 수준낮은 집단농경,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

은나라에서는 농업, 목축업, 우경을 했다는 기록이 갑골문에 암시적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대의 청동기 사회는 아직 개별적인 농경이 발달하지 못하여, <집단농경방식>으로 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씨족사회인만큼, 씨족들이 함께 경작하여 농업생계를 이어갔던거죠. 실제, 개별적으로 농사를 짓는 자영농민이 출현하는 것은 씨족공동체라는 사회 기본틀이 무너져야 가능합니다. 보통 씨족공동체가 무너지고, 실력 위주의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인 자영농민이 등장하는 것도 그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네요.

은대에는 또 수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기술자는 공인계층을 형성하여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동기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은대 문화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문화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청동기 문명 때문입니다. 청동기 물질 문화는 엄청나게 고도로 발달한 선진적 물질문명사회가 은나라인데, 그에 비해 정신 문명이 너무 뒤떨어집니다. 종교관이나 자연관 등 정신세계는 복점을 본다던가, 신의 후예들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은나라에 발달된 청동기 문명은 조상신의 숭배 정도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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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명의 탄생 - 신석기 황하문명

1. 중국 문명의 성립

중국 문명은 보통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삼황, 오제 및 하, 상, 주 3대의 성왕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근대 이전 중국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20c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생각은 점차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청대 고증학의 발달과 서구 근대 사학의 문헌고증학이 유행하면서 중국의 학자들은 전한 고문헌의 신빙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새로운 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삼대 및 그 이전의 역사를 가상의 역사로 생각하며, 사마천의 사기 기록이 거짓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제, 상왕조(은나라)가 발견되고, 하나라의 유적지로 생각되어지는 이리두 유적 등이 발견되면서 중국사의 기원은 훨씬 윗 시대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보통 중국사에서 논쟁이 되는 것은 신석기 황하문명의 문제입니다. 1번째 논쟁점은 과연 황하문명이 중석기나 구석기와 연결된 문명인가라는 점이 논쟁거리입니다. 2번째 논쟁거리는 황하문명이 추운 지방인 화북지방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입니다. 중국문명은 비옥한 양자강 지방이 아닌 추운 화북지방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양자강 유역이 고온 다습하여 당시 석기나 초기 청동기로 농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양자강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철기시대 이후라는 것이지요. 황하의 황토지대는 석기로도 개발이 가능했다는 점이 문명 발생의 원인으로 지적됩니다.

보통 문명의 발생이라고 하면 강의 범람과 관련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립은 강이 범람하는 지역에서 발생하였으니까요. 그러나 황하문명은 강의 본류지역이나 범람지역이 아닌 홍수의 위험이 적은 언덕 지역에 사람이 모여살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문명과 차별됩니다. 중국 고대문명으로 유명한 앙소문화, 용산문화는 모두 언덕 지역이였습니다.

2. 신석기 시대 문명의 기원 논쟁

중국 사회에서는 중국 민족의 기원을 신석기 시대 황하문명으로 봅니다. BC 5000년 경의 중국 신석기 문명은 채도 중심의 앙소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흑도중심의 용산문화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델슨이라는 학자가 앙소문화를 서아시아 채도문화라고 규정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용은 중국 최초의 앙소문화란, 서아시아의 페르시아 계통에서 건너온 서방의 채도문화다는 것이죠. 이것을 소위 <서방전래설>이라고 합니다. 또 황하중심이 앙소문화가 용산문화, 이리두 문화로 전파되어 중국 신석기 문화의 계보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안델슨의 서방전래 이론을 부정합니다. 앙소문화가 채도, 용산문화가 흑도라는 것은 편의상의 규정일 뿐이고 실제 이러한 문화들은 다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중국은 각 지역마다 신석기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달하였으며, 구석기 시대의 문화를 물려받은 곳도 있기 때문에 상당히 다양한 신석기 문화라는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중국문화의 <다원성>을 주장하는 내용은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화중문화는 양자강 유역의 문화로서 춘추전국시대 초, 월, 오의 문화로 계승된다.

2. 화북문화는 황하강 유역의 문화로서 훗날 상왕조(은나라)의 문화로 연결된다.

3. 앙소, 용산문화는 다양한 중국문화 중의 하나로서 중원중심적인 황하문명기원론은 중화사상의 잔재일 뿐이다.

4. 단, 용산문화는 앙소문화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한 문화이다.

3. 모계사회에 대한 주장

중국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사회가 모계중심의 사회라는 주장이 일반적입니다. 황제, 전욱, 제곡, 제요, 제순의 시대로 넘어가는 고대 이상시대는 모두 모계사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계씨족사회가 부계씨족 사회로 넘어가게 된 계기는 하나라를 세운 <우>부터라고 합니다. 우는 제순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고 치수사업에 큰 공을 세웠지만, 다른 현명한 이에게 선양으로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는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하>왕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즉, 아들에게 왕위가 세습된 시기를 중국에서는 부계사회가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부계가족중심으로 사회가 재편되면서 사유제산이 발생하고 계급이 분화한 당시 사회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하 왕조는 원래 전설상의 왕조라고 생각되었지만, 최근 이리두 유적이 발견되면서 실존 왕조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리두 유적은 하왕조의 위치, 시가와 일치하는 유적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앙소문화 - 용산문화 - 이리두문화가 서로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요즘 중국에서는 신석기 유적지 가운데 은문화와 동일하지 않는 유적을 하나라의 문화로 여기고 있습니다.

4. 하, 은의 시대에 이미 거대한 도시국가였다는 중국주장

크릴이라는 학자는 외적으로부터 보호받고, 선진문명권에 참여함으로서 이익을 얻기 위해 중국의 주변 민족들은 중국 왕조의 책봉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주변국들은 중국 왕조의 책봉에 참여하여 선진문물을 수용하였고, 중국 황제가 보증한 권위를 배경으로 각 국가에서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이러한 전통적 사상을 조공 - 책봉에 입각한 봉건질서라고 합니다.

실제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왕권에 의한 거대한 읍의 건설, 잉여노동에 의한 지배층의 재화축척 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왕권에 의한 대외무역의 통제와 독점이 있었고, 무역에 중요한 원료를 얻기 위해 동서남북으로 전쟁을 많이 했다고 하네요. 원료를 얻은 후에는 생산성의 재고를 위해 노동을 조직, 배분하고 정치적 통합을 견고히 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성립한 것이 바로 봉건제도라고 합니다. 봉건제도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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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고대 문명

1. 고대 이집트의 역사 전개

이집트의 고대 역사는 선왕국-고왕국-중왕국-신왕국으로 나누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집트는 사하라 사막과 지중해 등이 위치하는 특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주변 민족의 침입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폐쇄적인 지형 속에서 오랫동안 통일을 유지하면서 강력한 전제왕권을 구축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먼저 선왕조기는 최초의 문명이 시작된 시점을 말합니다. 초기 도시 중심의 조그마한 지역 국가들이 이집트에 많았죠. 마치 그리스의 폴리스나 우리 고대사의 삼한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도시 중심의 소국가를 이집트에서는 <노메스>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노메스를 메네스 왕이 통일하면서 통일 왕조를 만들었다고 전설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것이 이집트 최초의 문명인 전설시대의 상왕조(선왕조)입니다. 그런데, 선왕조기는 전설속의 시대라 실제 역사보다는 신화에서 많이 인용되는 시기네요.

그 이후 실제 역사 시기에 들어선 왕조를 고왕조라고 합니다. 고왕조는 수도를 멤피스로 정하고 동양적인 고대국가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이 고왕국기의 특징은 전제군주의 군주권이 아주 강했다는 점인데,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적인 파라오는 이 시기의 왕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또, 고대 신화 중 가장 유명한 오리시스 신화도 이 시기의 신화입니다. 오리시스 신화의 주 내용은 부활, 내세라는 이집트적 특징을 상징하는 것들이 주를 이룹니다. 피라미드, 미이라 등등 이집트 만의 독특한 문화는 이 신화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된 것이죠. 영혼불멸의 사상을 담고 있는 이집트의 <사자의 서>도 바로 오리시스 신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중왕국기에는 사회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소아시아의 힉소스가 쳐들어와 중왕국을 점령하면서부터 이집트는 폐쇄적인 자기만의 마이웨이를 걷는 길에서 탈피하게 됩니다. 아시아의 국가들이 이집트라는 국가의 존재감을 알고 덤비기 시작한 것이지요.

신왕국기가 되면 이집트는 이제 통일왕국들이 지배하는 세계 국가 속의 이집트가 됩니다. 즉, 아시아의 통일왕조는 페르시아,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그리고 로마제국이 바로 신왕국을 정복한 세계제국들입니다. 신왕국은 26왕조의 부흥운동 등 독자적인 자립운동을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맙니다.

2. 고대 이집트의 정치와 사회

고대 이집트의 정치형태를 말하라고 하면 <가장 전형적인 동양적 전제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즉, 극단적으로 강한 왕권 속에서 강력한 제도를 통해 사회를 유지한 국가입니다. 파라오는 신의 후손으로서 절대적 권력을 누립니다. 정치, 종교, 토지, 경제는 모두 왕권 밑으로 일원화 된 국유제 사회입니다.

왕 밑으로는 승려, 관료, 서기 등이 국가의 지배층으로 구성되어 국가의 통제가 완벽한 단원적인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글자를 적을 줄 알았던 서기직책이 핵심 지배층이라는 사실이 눈에 띄네요. 글자를 안다는 것은 이 당시 사상과 문화를 이해할 줄 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치체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만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진 계급사회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이들의 계급구조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완전 불변한 것은 아닙니다. 정권과 지배층이 바뀌기도 하니까요. 문제는 사회적 변동이 있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농경사회의 기본틀입니다. 보통 사회가 발전하고 변하면 새로운 지배층이 탄생하기도 하고, 몰락하는 계층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폐쇄적인 지형 안에서 그 변화하는 생산력이나 사회 분위기를 수용하지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리스가 민주주의로 나가는 동안, 이집트는 그리스만큼의 생산력이나 경제력이 발전하면서도 그 잉여생산물이 사치품을 만들거나, 왕권을 강화해주는 쪽으로만 발전합니다. 거디한 피라미드나 궁궐, 미이라를 만들 시간이면 그리스에서는 새로운 철학이 3번을 나왔을 시간입니다.

이집트는 기본 사회구조가 <노메스>라는 행정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파라오는 지방장권을 임명하여 철저하게 지방을 감시하였습니다. 또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한 치수사업에 치중해야 하는 지리적 요건은 민주주의니 하는 것이 엄두도 나지 못할 사회적 형편이었습니다.

3. 고대 이집트의 문화적 특징

이집트의 종교는 다신교였는데, 오리시스 신화를 상징으로 하는 내세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오리시스 신화 편을 참조하세요) 이러한 내세적 세계관 속에서 미이라, 스핑크스, 투탕카멘의 무덤, 피라미드 등이 출연하게 된 것이지요.(이와 관련된 글을 사자의 서 편를 읽어보세요.)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던 이집트의 왕도 있었답니다. 그는 바로 이크나톤(아멘호텝 4세)입니다. 그는 경직된 이집트 사회를 바꿔보기 위해 기존의 관습, 신앙을 부정하는 새로운 체계를 세워보려 했습니다. 그가 하려고 했던 것은 다양한 신을 모시는 다신교를 버리고 아톤(태양신)을 중심으로 한 일신교적 개혁이었습니다. 태양신을 내세워 농경사회의 윤리체계를 체계적으로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그의 개혁은 일신교를 반대하는 당시 사회분위기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또 그러한 개혁 자체가 파라오라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국왕의 신성성 근본을 건드릴 수도 있는 것이었기에, 그 개혁은 실패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관개농업에 필요한 천문학, 측량술, 산수 등이 발달하였습니다. 피라미드 건축을 위한 기하학도 고도로 발전하였죠. 죽음의 서 등에서 보여지는 신성문자(그림문자)와 파피루스도 이집트 하면 빼 놓을 수 없겠죠?

마지막으로 고대 이집트의 예술은 그냥 전통적 예술을 답습하는 수준입니다. 단, 전통적 양식을 깨고 자연주의적 경향의 미술을 추구하려는 시도가 개혁적 국왕인 이크나톤에 의해 시도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술 개혁기를 아마르나 시대라고 하는데, 이크나톤의 부인인 네페르티티의 두상이 가장 유명한 예술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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